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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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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전근대2.2. 근현대2.3. 현대
3. 원인4. 부작용
4.1. 반일 감정을 이용하는 자들4.2. 일본 문화 자체에 대한 부정과 혐오 확산4.3. 반일에 대한 일방적 염증과 비방
5.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 반일에 대해 설명한 문서다.

2. 역사

2.1. 전근대

일본은 삼국시대 백제 가야와는 우호적이었고 동맹 관계에 교류 역시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고구려의 경우 그리 국가관계가 나쁘진 않았으나[1] 지리적으로 워낙 멀어 양국 교류가 백제보다는 적었다.[2] 그리고 신라와는 최악의 관계였다. 역사 기록을 보면 초기 신라에는 왜구에 의한 약탈이 많았다.[3]

이 관계는 후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나아지지 않았고, 신라의 전성기인 성덕왕 때와 경덕왕 때에 일본 수백 척의 배를 동원해 신라 원정을 준비했지만 주도자였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사망하며 중지되었고, 발해와 친교를 맺고 신라를 견제하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다만, 백제만큼은 아니라도 나중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 비하면 신라 때까지는 일본과의 교류는 매우 많은 편이었다.[4] 8세기 중후반으로 가면서 일본의 자존의식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자국을 상국으로 모실 것을 신라에 요구하는 형식적 외교관례에 집착했고, 이러면 신라도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내고 개무시하면서 차츰 정부간 교류가 줄어들게 되는데 그래도 장보고로 대표되는 사무역이나 민간 교류는 9세기에도 꽤 많긴 했다.

신라가 몰락한 나말여초 때에는 신라구 해적의 피해로 일본과의 사이가 틀어졌고, 이후 일본이 국풍이 강해지고 고립주의적으로 나가면서 고려시대 들어서 두 나라의 우호적 교류는 삼국, 신라 때와 비교하면 거의 없는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도이의 난으로 일본이 여진족들에게 초토화했을 때 고려가 지원을 해주는 등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이후 일본과의 관계는 그냥저냥 평범한 상태로 이어졌지만 고려 몽골의 침입을 겪은 후 다시 관계가 크게 틀어진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으로, 고려는 이후에 벌어진 왜구의 침탈로 양국간의 감정이 험악해진 것. 정확히 말해 왜구의 침탈은 고려가 몽골에게 한참 얻어터지던 원종 시기부터 서서히 나타났다. 이 때 각국의 속사정이 굉장히 복잡했다.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의 경우 고려는 하기 싫었지만 억지로 했고, 고려 말 왜구는 남북조 시대 군량을 동원하기 위한 남조 정부의 주도로 대대적인 침략이 벌어졌다. 세종대왕 때 간행한 삼강행실도를 보면 상당수가 왜구의 잔인한 면모를 보인다. 특히 열녀부분을 보면 왜구에게 욕을 보이고, 아니면 그 직전에 자살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절개를 지키려는 열녀들의 모습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당대 왜구와 그 속에 들어간 조선의 일본 이미지를 알 수 있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하고 백성들의 삶이 파탄 지경에까지 이르자, 조선의 대일 감정이 최악으로 치닫았다. 그나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나오고 겉으로나마 조선과 일본이 화해하고 조선 통신사로 관계를 유지했지만, 양쪽의 앙금은 전혀 풀어지지 않았고 조선 측의 경우 통신사를 통해 필사적으로 일본의 경제와 군사 상황을 알아내 경각심을 가지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통신사 제도는 문화 교류의 성격이 커졌다. 특히 왜란은 변경의 전투가 아닌 전면전으로 나라 전체가 비극의 현장이었다. 때문에 다른 국경의 전투나 변경 외적의 노략질과는 다른 차원으로 온나라 백성이 함께 공유하는 기억이 되었다.

2.2. 근현대

대한제국, 그리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그에 따른 조선 침략 정책이 본격화하는 19세기 후반부터 일제강점기 이후 이어지는 사건들과 식민지 통치는 근대 한국인들은 물론, 현대의 한국인들에게도 반일감정을 갖는 근본원인이 되었다.

근대화를 이뤄낸 일본은 조선에 근대적 통상을 요구하면서, 운요호 사건으로부터 강화도 조약으로 이어지는 강압적이고 불평등인 방식을 밀어붙였다. 여기에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미사변 등의 굵직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대다수의 조선 백성들은 일본 제국을 내정간섭을 일삼는 믿지 못할 열강 세력으로 받아들여 매우 경계하게 되었다.

일본의 이권 침탈과, 이를 미숙하게 대처했던 조선 및 대한제국 정부의 실정이 겹친 끝에, 일본은 을사조약을 거쳐 실질적인 국권을 빼앗고 끝내 경술국치를 통해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 일본인과 본격적으로 부대껴 살게 된 한국인들은 강압적인 행정 처리에 익숙했던 순사 경찰 등 일본 제국의 공권력 아래 공포에 떨었고, 일본 출신 이민자들이 일삼는 온갖 차별 대우와 갑질에 시달리며 울분을 삼켰다.[5] 또한 다테마에 메이와쿠 등 세세한 부분에서의 문화 차이로 인해서, 한국인은 일본인에 대해, 일본인은 한국인에 대해 서로에 대한 오해와 스테레오타입을 쌓아갔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여전히 살아남아 국가의 요직을 차지한 친일파에 대한 반감, 좌우 대립과 6.25 전쟁 등 동족상잔의 비극의 씨앗을 태동시킨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원망, 한국에서의 전쟁 덕분에 오히려 전후 부흥에 성공한 일본에게 느낀 허탈감, 국민적인 독도 영유권 갈등[6], 식민지와 전쟁범죄를 둘러싼 일본의 역사왜곡, 한일기본조약 체결 과정에서 생겨난 국내적 갈등,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 등이 반일 감정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그리고 1970~90년대 당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경우, 당시 권위주의 정권은 의도적으로 일본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감추고 부정적인 면들만 보도했다. 여기서 '긍정적인 면'이란 광복 이후 일본의 대한 관계 개선 의지와 산업화 과정에서의 기술적•경제적 지원, 덴노가나 일본 내 시민단체의 과거사 자정 활동 등을 일절 은폐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부정적인 면' 역시 과거사인 광복 이전 식민지 시절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해당 시점의 한일관계라는 현실 정치에서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 같은 자극적인 부분만 보도함으로써, 국민들이 현대 일본국을 구 일제와 같은 집단이라고 인식하도록 만들어 결과적으로 반일감정을 키웠다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이 이처럼 행동한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 권위주의 정권은 쿠데타로 집권했기 때문에 권력 기반이 불안했고, 때문에 한강의 기적 같은 경제적 업적을 치적으로 선전해야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혈맹이던 미국은 몰라도 이미지가 영 좋지 않던 일본에게마저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가치가 퇴색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 또한, 패전 이후 일본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였고, 일본은 대한민국을 독재국가라 무시하며 민주화 인사들을 돕기도 했다. 게다가 일본 정부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문세광 등 재일교포가 영부인 육영수를 암살한 대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행위들은 당대 한국 정부에게는 자국 체제에 대한 도전이자 일종의 내정간섭으로 받아들여졌다.
  • 게다가 독재정권과 느슨한 협력을 유지하던 우파 국가주의 진영[7]에서는 과거 자국을 식민지배했던 일본에 대한 반감 역시 남아 있었다.[8] 또한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흔히 그렇듯 이들은 반일감정을 퍼뜨림으로서 정치경제적으로 위태롭던 대한민국 내부의 결속을 도모하고자 했다.
때문에 민선 독재정권이던 이승만 시절엔 주로 세 번째 이유가, 군부 독재정권이던 박정희•전두환 시절엔 주로 앞의 두 가지 이유가 크게 작용하여 반일감정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2.3. 현대

민주화가 이루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1990년대에는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반일감정이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9] 김영삼 정부 시기에는 대일 강경책을 취해왔으며 1995년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1996년 일제의 잔재인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개정하는 방침, "일본놈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라는 강경 발언과 독도 영유권 분쟁 등으로 인해서 반일 시위가 지금에 비해서 많이 일어난 시기였다. 소수 존재하는 일본 문화에 대해서도 이것이 '패악적이고 저질적'이라는 뉴스 보도가 # 나가기도 했을 정도이다.[10] 이렇듯 1990년대에는 일본과 관련된 것을 무조건적으로 좋지 않게 보던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일본의 어떤 걸 보고는 "일본의 좋은 점을 배우자"라고 한다거나, 로바다야끼를 경영하거나 출입하는 것만으로 부정적인 인상을 주기도 했다. 한편 방송매체에서는 반일 성향을 내포한 특집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를 줄곧 편성해왔고, 이는 반일감정을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요인이 되었다.[11]

이러한 극단적인 반일감정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들어 점차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 김대중은 애초에 과거 군사독재 시절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을 갔었던 만큼, 일본에게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12] 때문에 취임 직후부터 한일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과거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좋은 일본 문화 받아들이자.”라는 말로 대표되는 일본과의 문화교류 활성화는 점차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김대중 본인이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일본 정치세력들의 도움을 많이 받은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김대중 납치사건 때도 국제사회가 무관심 일변도로 나오는 와중에 일본 정부가 중앙정보부로 인해[13] 자신들의 주권이 침해를 당했다는 이유로 김대중의 구명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한일수교도 찬성했다. 김대중은 박정희 정부의 한일수교에 찬성했다는 이유만으로 야당내에서 사쿠라(배신자)취급을 당했고 본인이 가장 힘든시기였다고 회고하였다. #

2000년대까지만 해도 반일감정은 ‘초당파적인 것’이었으나, 점차 개선되어왔다. 노무현 정부시기 또한 (독도 영유권 분쟁 등으로 갈등이 있었지만)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

한일관계 개선 추세에서 변곡점이 된 것은 (현재 시점에서는) 역설적이게도 2011년 이명박 정부 독도 방문이었다. 당시 레임덕을 겪고 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반일감정 자극 및 민족주의 고취를 통해 이를 반전시키고자 하였다.[14] 이명박 전 대통령은 독도를 방문하여 일본의 아키히토 덴노에게 '우리는 식민지 시기를 잊지 않았다.[15] 일왕은 한국에 와서 독립운동가들과 식민지 시기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서 고개숙여 사죄해야 한다.' # 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그런데 서울신문에서 이를 '일왕은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한다.'라고 했다고 오보를 낸 것이 문제가 되었다. 해당 기사는 빠르게 삭제되었으나, 일본 현지에 이미 해당 기사의 내용이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일왕은 포승줄로 온 몸을 꽁꽁 묶고 도게자해야 한다.'라는 발언을 했다고 와전되었고, 이것이 다시금 와전되어 종국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일왕은 한국민에게 진심으로 도게자하고 싶다면 오라, 중죄인에 상응하여 손발을 묶고 머리를 밟아 지면에 짓뭉개면서 사과하도록 만들겠다."라고 하였다는 수준까지 왜곡되어(...) 일본 내에서 반한감정이 크게 확산되었다.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여 한 발언이라는 점에서 당시에 독도 영유권 분쟁에 관심이 없던 일본인들에게까지 해당 문제를 알리는 엄청난 어그로가 되었고, 이 여파로 일본 내에서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 확산되어 다시금 한국에서 해당 문제로 반일감정이 확산되는 악순환을 일으키게 되었다.

2010년대는[16] 반일정서가 정파적 성격을 띄는 계기가 된 시기였다. 먼저 이 시기는 대학생들이 민족주의 학생운동의 영향에서 거의 벗어난 시기였다.[17] 박근혜 정부 위안부 합의 문제는 반일 정서가 정파적 차이를 가지게 한 계기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일본의 일방적 수출규제로 인해 발발한 한일 무역 분쟁과 그에 따른 노재팬 운동은 이를 결정적으로 심화시켰고, 특히 문재인 정부에게 반감이 심했던 사람들에게는 반일 정서 자체에 대한 반감을 심어주기도 했다. 당시 민주당 의원들은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를 만들고 '여행금지 구역 확대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일본의 극우논객 구로다 가쓰히로의 불매운동 폄하 발언을 일부 국내 언론에서 인용한 것을 두고 "일본특위는 불매운동에 대해서 개입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지만 이를 폄하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은 잘못됐다는 점을 지적한다"며 "마치 국채보상운동에 대해서 반대하고 탄압했던 일제나 부역자들의 친일 행태가 연상된다"라고 반응한 바 있다. # 이에 일각에서 '너무 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박용진 의원은 "지금은 1952년이 아니다"라고 만류하였고 #, 정의당 유상진 대변인은 불매 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주장했으며, 경향신문은 여당이 반일 공세로 불매 운동을 부추기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

두 차례에 걸쳐 '보수 진영이 친일적인 스텐스'를 취하는 동시에, '진보(민주당계) 진영이 반일적인 스탠스'를 취한 결과 반일정서는 초당파적인 것에서 당파적인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파일:2023 가장 싫어하는 국가 여론조사 엠브레인퍼블릭.jpg
2023년 5월 기준 가장 싫어하는 국가에 관한 여론조사[18]
2020년대 들어 신냉전이 도래한 이후 반일정서는 완전한 정파적 성격을 띄게 되는 동시에, 연령별로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40~50대가 주류를 차지하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층들에게는 현재까지도 반일정서가 막대한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 성향이 강한 60대 이상 노년층에게는 박근혜 정부 시절 위안부 합의로 인해 한 차례 겪었던 논쟁과 더불어 반공주의[19]가 강해지는 바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스윙보터인 20대, 30대에게는[20] 윤석열 정부에 대한 비토의견이 제법 큼에도 불구하고, 반일정서는 미미한 편이며 오히려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경우가 많다. 또한 2019년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2019년 일본 상품 불매운동으로 인해 한일관계가 악화된 와중에도 20대~30대와 학생층의 일본에 대한 호감도와 일본인에 대한 호감도는 모두 다른 대조군들에 비해 5~15% 가량 높았다. 이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문화적 교류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여 윤석열 정권 들어서 20대~30대, 넓게는 MZ세대를 통틀어 예스 재팬 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21]

또한 신냉전 이후 중국의 패권주의, 팽창주의적 행보가 심해지며 한국과 일본이 과거사 문제를 일단 접어두고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게 된 것도 있다.

반면 40~50대 중년층에서 반일감정이 매우 두드러지는데 북한, 중국보다도 일본에 대한 반감이 높은 정도이다.[22] #
정치적으로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자, 특히 친문 성향인 사람들이 이러한 성향을 띄는 경우가 많다. 이는 강성 친문 세대인 40대 대부분이 일본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던[23] 문재인 정부의 정책에 크게 호감을 표한다는 것을 한 예로 들 수 있다.[24]

반일감정의 소멸이 '민족주의의 약화에 따른 부차적인 효과' 라고 분석되는 일례로 북한, 일본, 미국이 축구를 하면 어디를 응원할까에 대한 통계가 있다.
  • 일본, 북한이 축구를 할 경우 일본을 응원하겠다는 응답이 20대 25.4%, 30대 24.1%, 40대 9.6%, 50대 11%, 60대 이상 19.2% 순으로 나타났다.
  • 중국, 일본이 축구를 할 경우 어디를 응원하겠냐는 것에 대해서는 20대는 중국 응원 11.8%, 일본 응원 50%었던 반면 50대는 중국 응원 48.8%, 일본 응원 24.4%로 나타났다.
  • 북한과 미국이 축구를 할 경우 어디를 응원하겠냐고 물은 질문에서는 50대의 55.5%가 북한 응원, 33.7%가 미국 응원을 골랐다. 반면 20대의 22.8%가 북한 응원, 57.7%가 미국 응원을 밝혔다. 60대 이상을 제외하곤 나이가 많을수록 북한 응원, 적을수록 미국 응원이 많았다.

기사 본문에서는 이를 “나이가 어려질수록 민족 개념이 옅어지는 경향을 보였다.”라고 분석한다. 허나 스포츠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차이도 있다. 기성세대에게 월드컵은 일종의 국가적 자부심이자 대리전이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K-Pop 아이돌이나 게임 같은 하나의 컨텐츠에 불과하다. 다른 엔터테인먼트에 정신이 팔린 2030 이라면 별 감정 없을테고, 반면에 해외축구 하드팬이라면 EPL이나 세리에 A에서 자주 봐왔던 일본- 미토마 카오루/ 엔도 와타루/ 토미야스 타케히로, 미국- 크리스천 풀리식/ 유누스 무사 등 해외축구에서 자주 봐온 스타들일 것이다. 중국이나 북한은 우레이의 어그로 쿵후 축구 아오지 탄광 같은 조롱성 밈밖에 없다. 아스날, 첼시, AC밀란의 팬이 아니어도 듣보잡 11명 보다는 자주 봐 온 풀리식이나 미토마에게 표를 던질 건 당연지사. 특히 야구에서는 일본인 오타니 쇼헤이가 한국에서도 매우 큰 호감을 얻고 있는데 이것도 한몫한다.

또한 한국의 청년층들이 일본에 대해 나름 우호적인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하다. 2023년 2월에 전경련이 한국의 20대~30대 626명(20대 331명·30대 29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일관계 인식조사에서 응답자의 42.3%가 일본에 대한 인상을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부정적이라는 답변은 17.4%로, 긍정 답변이 부정보다 2.4배 높았다. 보통이라는 답변은 40.3%였다. 또한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과거(45.6%)보다 미래(54.4%)라고 보는 청년들이 많았다.

3. 원인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만이 아니어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경우도 반일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어 한 가지만으로 그 원인을 분석할 수는 없다. 단순히 일본과 관련한 부정적인 과거사뿐만이 아니어도 일본 사회의 폐쇄성과 지독할 정도의 보수성, 우경화된 정치, 사회적인 고루함이나 여전히 곳곳에 온존한 아날로그적인 사고 방식 등등의 이유를 들어, 단지 역사적인 문제만이 아니어도 일본이라는 나라나 사회에 반감을 가지는 한국인들은 많이 있기 때문이다.[25]

일단 1차적인 원인으로 거론되는 것이 일제강점기이며, 일제강점기의 피해자인 한국이 일본 제국에 의해 겪은 식민지 피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제대로 된 사과나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이 지적된다.[26] 일제강점기 배상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한일기본조약이다. 이는 박정희 정부가 산업화에 필요한 급전이 필요하던 상황에 직면해 일본에게 먼저 접근하여 피해자들의 의견을 듣지도 않은채 얼렁뚱땅 체결하며 산업화에 써버렸고 일본 주류여당 자민당은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위안부/강제징용 등 문제를 배상했다고 해석하지만 한국은 완전한 배상이 아니었다는 입장이 되버린 셈이다. 양측의 해석이 다르기에 한국은 한국대로 일본은 배상은 미완료했으니 배상하라고 하고 일본 자민당은 '이 조약으로 끝난거 아니냐'며 첨예하게 갈등하는 요인이 되었다.

배상은 둘째치더라도 일본은 과거사 문제에 관해서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같은 추축국이었던 독일은 빌리 브란트 총리가 매국노 소리를 듣더라도 동방정책을 포기하고 브란트의 무릎꿇기 사건으로 진정한 반성을 보여주며 교육과정에서도 나치의 만행과 독일의 잘못을 철저하게 가르치는데에 비해 일본은 마치 한국을 도발하듯 독도 영유권 문제와 역사왜곡을 벌이며 대조되는 행보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최소한 독일처럼 과거사 문제에 대해 반성[27]을 제대로 비추기만 했다면 해결되었을 일이었다.

두번째는 정치적인 이유와 언론의 자극이며 보통 정치적인 이유로는 지지율을 위해서이다. 흔히 지지율이 안 좋거나 지지율을 올리고 싶은 지도자들은 대개 국민의 집결을 위해 '자신들을 위협하는 외적'을 강조해 위기감을 부추겨 지지율 집중을 시키는 방법으로 대표적인 예시로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의 대미정책과 일본의 아베 전 총리의 북한 미사일 위협이 있었다. 다음으로는 한국 한정으로는 한국은 과거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일제강점기~근현대사를 중요하게 가르치는데 일제의 만행은 그야말로 심각한 자료는 넘쳐나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은 일본의 과거사 문제로 인한 반일 감정 있을 수 밖에 없으며, 뉴라이트 계열과 같은 극우들의 친일 행동 또한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한 몫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나름 원만한 한일관계가 지속되었으나, 2010년대 아베 신조의 집권 이후 본격적인 관계 악화가 시작되었다. 아베 당시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강제는 없었다’고 발언하며 해당 문제에 대해 사과했던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을 뒤집었으며[28],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재개하는 행보를 보였다.[29][30]

이후 일본 해상초계기 저공위협 비행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대해 대한민국의 잘못이라고 주장하며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등의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고, 일본제철 강제징용 소송 판결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고[31],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제조 핵심 소재의 수출을 제한하기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의 일본 불매운동으로 이어지게 됐다.

혹자는 " 일제 시대에 근대적 발전과 의료 기술 법률 철도 교육 항만 등 다양한 면에서 발전된 측면도 있다"며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무조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감정적인 반일은 지양해야 하고, 또한 "일본은 주권국가이며 사죄를 강요하는 것은 일방적"이라고 일본을 두둔하지만[32]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 조차도 일본의 식민지 경제 정책은 일본 본국(내지)과는 차별된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결코 온전하거나 정상적인 경제 정책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한계도 뚜렷했음은[33]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백 번 양보해서 일제강점기를 계기로 '근대적'이라 부를 만한 제도가 식민지 조선에 도입되었다 한들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차별은 분명히 존재했으며, 3.1운동을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나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정부가 보인 조선인 학살 피해 조장 및 선동이나 한국 독립운동 탄압, 나아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강제징용, 위안부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인 성노예 동원은[34] 명백하게 일본 제국이 식민지 조선에 자행한 식민지 탄압이자 전쟁 범죄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더구나 강제징용이나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역사 교과서 왜곡 및 일본 내각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은 한국의 식민지 지배 과거사 문제뿐 아니라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세계적 전쟁을 발발시키고 적극 주도했던 전범(戰犯) 국가로써의 일본의 또 한 가지 어두운 과거사를 숨기고 미화하려 한다는[35] 점에서도 문제가 크며, 무엇보다 일본측이 독도와 관련해 일으키는 영유권 문제는 식민지 과거사 담론을 넘어 21세기 대한민국의 고유 영토에 대한 주권이 침해를 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안보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는 엄연한 현재진행형 문제이다.

독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 정부는 한 번도 독도에 대해 "다케시마는 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입장을 바꾼 적이 없다. 당장 한 가지만 들면, 2005년 이후 2023년까지 19년 동안 일본 방위성의 방위백서에서는 독도를 '다케시마'라 부르며 다케시마를 자국의 고유 영토 내지 '분쟁 지역'으로 분류해 놓고 있다. #

저 방위백서가 나온 2023년은 윤석열 행정부가 강제징용 문제 해결에 나서며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되살리고, 오염수 방류에 대해서도 국제원자력기구 등 국제기준에 부합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일본과의 관계 회복에 나선 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이 해에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태평양 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하고 일본 여당 의원 90여 명이 집단으로 야스쿠니 참배를 단행하는가 하면, 오사카의 자민당 소속 스키다 미오 중의원이 한복을 입은 재일교포( 자이니치) 여성을 비하하는[36] 내용의 트윗을 올린 것이 알려져 # 빈축을 샀다. 군마현은 2024년 1월 8일 현지에 세워져 있던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위령 추모비를 우익단체들이 ‘정치적 행사’라며항의해 결국 설치 연장을 불허하고 중장비를 동원해 철거했다. #

2024년에는 일본이 네이버 해외지사 라인을 매각하라고 압박하는 사건으로 다시 반일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윤석열 정부는 측근들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자꾸 장관 인선에 뉴라이트 인사들을 꽂아넣는데다가 장관 후보자들은 친일 발언을 자꾸 하면서 윤석열 행정부에 대한 반감이 반일 감정으로 직결되는 중이다.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 역으로 스스로를 피해자인양 주장하는 행태 또한 반일의 원인이 된다.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해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자주 거론되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한 모퉁이를 지옥으로 만들었다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당시의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일본 입장은 몰라도 미국 입장에서, 나아가 연합국 입장에서는 문제가 아니었다. 엄연히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에게 있어서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 주체가 일본이었으므로. 참전 군인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결코 일본에 대한 대대적인 본토 공습, 나아가 수만의 피해자[37]를 낸 원폭 투하에 대해서 일본에게 죄책감이나 죄의식을 가지지도, 일본 정부에 대한 '사과'의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 # # 원폭으로 피해를 입은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 연민이나 그런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전쟁에 대한 회의감은 가질 수 있지만, 일본 정부의 식민지 가해자로서, 그리고 전범으로서의 책임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얘기다.

4. 부작용

4.1. 반일 감정을 이용하는 자들

한국은 일단 역사적으로 일본에게 겪은 식민지배의 기억이나 관련된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한 이상[38] 반일 감정이 뿌리깊게 남아있으며, 일본 역시 이와 관련한 한국의 감정을 잘 알고 있다. 때로 그것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이들이 나오기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사실 반일 감정과 관련해 한국에서 지나친 낭설들이 난무했고, 일본의 Korea 표기 조작설, 아인 지우개 논란, 동해 표기 조작설과 같은 사례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일본인을 겨냥하여 일본 내의 혐한 단체만 보여주며, 이와 반대되는 한국과의 친선을 바라는 일본인은 없는 취급 하는 등 일본과 일본인은 악한 존재라는 여론을 이용하며 자극적인 여론을 조장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경우들까지 인터넷 댓글상에서 확인된다.

혹자는 한 술 더 떠서 북한의 갓끈전술을 철저히 신봉하는 종북세력이 반일 감정을 선동해 한국과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파탄 내어 양국의 협력관계를 약화시킬려는 의도가 숨어있다며 한국인의 역사적 피해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 시도때도 없이 반일 선동과 친일몰이로 한국-일본간의 우호관계를 끊을려고 하는 공작의 일환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 #2, #3, #4, #5

반일 행보는 보수 진영에서도 포퓰리즘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지곤조기 논란, 뉴라이트 논란 등으로 친일 의혹이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은 지지율 회복과 친일 이미지 불식을 위해 대통령 최초로 독도를 직접 방문하고 일본 천황에게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행위로 야기된 한일 간의 외교 갈등에 대해 여당에서도 “청와대가 일종의 포퓰리즘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 일본의 보수 언론인 요미우리 신문 이명박 대통령 천황 사과 요구 발언이 일본 내에서 반한 감정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분석했다. #

반대로 일본 내 혐한 감정 조장을 위하여 극우가 역으로 반일을 조장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일본 극우들은 한국의 반일 감정을 이용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성장시켜 왔으며 그러한 연장선 상에서 한국 내 반일 감정을 조장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넷 우익들이 한국 포털이나 커뮤니티에서 어그로 댓글이나 글을 적은 뒤, 한국인들이 원색적인 반응을 보이면 그것을 캡쳐해 2ch 등지에 올려 혐한을 부추기는 것은 이미 고전적인 방법이고, 최근에는 아베 정부의 한일 레이더 갈등때 한일관계를 위해서 방위성은 영상 공개를 반대 했는데도 공개를 강행하고 # 대 한국 무역제재도 한국 내 반일 감정 조장을 통한 일본 내 한류 등 친한 정서 축출 역시 목적 중 하나일지 모른다는 지적이 있다. 기사

4.2. 일본 문화 자체에 대한 부정과 혐오 확산

현대 일본 문화를 퍼뜨리는 오타쿠 종주국[39]이라는 이유로 케바케로 갈린다.

일본의 무분별한 저질 오타쿠 애니와[40] 현대 일본 문화 양산 행위 때문에 동아시아, 아니, 세계가 오염되고 있다거나 한류가 강해졌다고 주장한다. 국내 문화 산업에서 이미 일본 문화를 활용하는 이들이 꽤 있는 반면에, 디시인사이드 등에서 활동하는 오타쿠 중엔 일본 애니를 찬양하는 것을 넘어 일본 찬양하는[41] 부류도 있다.

사실상 오타쿠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만은 없는 게,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평소엔 일본에 대해 관심이 없다가도 몇몇 극렬 오타쿠들의 행태에 대한 반발로 반일로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넷 우익이나 극우 정치인들의 어그로성 발언이야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트려주지만, 이들은 정말 꾸준하다. 오히려 일본 넷 우익이나 정치인들보다도 이들의 이해가 안 가는 행태나 발언에 더 충격을 받는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

게다가 이런 '오타쿠'들을 양산해 내는 일본의 만화가, 소설가, 혹은 애니메이터(감독)라고 해서 마냥 일본의 부정적인 과거사를 두둔하고 왜곡하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일본 요괴 만화의 대부라 평가되는 미즈키 시게루는 자신이 전쟁을 겪은 당사자로서 자신이 파병되어 복무했던 남방 라바울 전선에서 목격한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증언을 만화로 그리며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역시 사과와 배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고 # # 데즈카 오사무는 아예 일본 사회의 자이니치 차별을 소재로 그것을 고발하는 내용의 만화 '긴 땅굴'을 그리기도 했다. #[42]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작품 왕도의 개, 하늘의 혈맥에는 조선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이나 독립운동가인 안중근이 상당히 비중 있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미즈키 시게루나 데즈카 오사무처럼 제2차 세계 대전을 직접 겪고 그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이었는지를 목격한 이들은 일본의 군국주의적 과거사를 비판하며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것을 작품으로 그려냈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 가운데 일본 우익 세력에 동조하여 일본의 부정적인 과거사를 미화하고 왜곡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된다. 마법과고교의 열등생이나 혐한류처럼 한류 자체를 비웃는 내용으로 만화를 그리는가 하면, 태권더 박, 헤타리아처럼 노골적으로 한국 문화를 부정하는 애니도 방영되었다.

이러한 일본 만화나 애니에서 한국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일본의 전쟁 책임을 미화 내지 왜곡하는 경우가 벌어지면서 한국에서도 일종의 노이로제가 생겨났으니, 어떻게 보면 악순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노사카 아키유키의 동명의 동화를 원작으로 하는 반딧불이의 묘는 엄연히 일본의 전쟁 책임을 비판하는 내용임에도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이용되었다고 작가인 노사카 아키유키가[43] 본의 아니게 비판을 당해야 했고, 진격의 거인은 하필 작가가 아키야마 요시후루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바람에 우익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블리치의 작가인 쿠보 타이토는 본인 트위터에서 "한국인은 항일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독도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한다"[44]는 내용이 담긴 소설가 이와이 시마코[45] 트위터 리트윗했다가 빈축을 샀다.[46]

4.3. 반일에 대한 일방적 염증과 비방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일본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일 경우 발화자를 불순분자로 몰아가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원래부터 일뽕 성향이었던 사람들에 더해서 2019년 일본 상품 불매운동 강요나 국뽕에 대한 반발심, 또는 신냉전 체제의 대두로 인해 일본과의 협력관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 원인이다. 그로 인해 오히려 한일 무역 분쟁 이후로 디시인사이드 일베저장소 같은 커뮤니티에서는 반일에 대한 비판과 반감 여론이 형성됐고, 그것이 한국 인터넷 내 자국 혐오 또는 혐중 풍조와 결합하여 소위 일뽕이라 불리는 극단적 친일정서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청년층이 많이 이용하는 남초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47]에서 주로 나타나지만, 비교적 일본에 대해 비판적인 루리웹, 디시의 주요 여론과 반대인 더불어민주당 마이너 갤러리 등 진보 성향 커뮤니티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비교적 덜하다.

5. 관련 문서



[1] 다만 광개토대왕 시절 신라를 도와 일본을 적대할 때는 일본 정규군을 왜구라고 부르며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백제, 신라와 달리 고구려는 워낙 먼 데다 험한 동해 바다가 가로막아 고구려와는 교류, 접촉이 적었다. [3] 이승재(2017)는 삼국 시대 목간의 내용을 토대로, 옛 신라어로 일본을 뜻하던 '여리'라는 단어가 ' 원수', ''을 뜻하던 사어화된 고대 한국어 어휘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4] 가령 조선 통신사 파견이 조선 후기 200여년간 고작 9회에 불과했지만 신라 때는 한일 양국의 사료를 종합해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1세기 동안 신라에서 일본으로 사신단이 39차례나 파견됐고, 동시기 일본 사신단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다. 사신단의 규모에 있어서도 성덕왕 2년(703)에 204명의 사신단을 파견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까지 감안했을 때 1회에 3~5백명을 파견한 조선 통신사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5]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목욕탕이었다. 일제 치하 조선에서 목욕탕은 유독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두드러지는 공간이었으며, 총독부조차 목욕탕 주인들에게 조선인을 차별하지 말라고 했지만 사장들은 총독부의 권고를 씹은지라 해방 직전까지 조선인의 입장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 많았다. 이후 해방 직후 조선에서, 한국인들은 미처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히키아게샤를 목욕탕 잡부로 부리며 그동안 쌓였던 원한을 풀기도 했다. [6] 이과정에서 독도 대첩이라는 사상자까지 발생하는 전투도 벌어졌다 [7] 이들은 친일 문제는 비판했지만, 내치에서는 권위주의 정치 및 국가주의를 옹호하거나 최소한 유보적인 입장이었다. 이승만 시대의 주류 반일•반공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 우파라도 권위주의•국가주의에 반감을 가졌던 사람들은 좌파와 손잡고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으며, 훗날 김영삼으로 이어져 민주화 이후 우파의 뿌리가 된다. 좌파의 경우 독재정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견해뿐 아니라 사상적 지향조차 정반대였기 때문에 협력하지 않았다. [8] 이승만이 얼마나 격렬한 반일주의자였느냐면, 당장 6.25 전쟁으로 부산까지 쫓기듯 내려오게 된 상황에서도 '일본군도 UN군에 포함시켜 북한군과 맞서게 하자'는 주장에 " 그랬다간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는 그날로 총부리를 북한군이 아니라 일본군에 돌려 버리겠다"고 단언했을 정도였다. 월간조선에 인용된 이른바 '왜관성명'으로,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박실(朴實) 전 의원의 《벼랑 끝 외교의 승리》(청미디어)에 따르면 부산에서 육군병원에 문병 갔다가 한국어를 잘 못하는 부상병을 발견했는데, ‘일본에서 온 군인들이라 그렇다’는 설명에 미국이 자신도 모르게 일본 군인을 참전시킨 것이라고 오해한 이승만이 “미국이 일본인을 미군에 넣어 참전시켰는데, 우리는 공산군과 싸우던 총부리를 일본으로 돌려 싸우겠다”고 한 발언이 저렇게 전해진 것이다. 나중에 가서 그 부상병은 일본 군인이 아니라 교포(자이니치) 출신 의용병임이 밝혀졌지만, 당장 북한군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일본군이 미군에 끼어 한국 땅에 와 있다는 오해만으로 저런 반응을 보였을 정도니 이승만의 반일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 얄궃게도 이승만은 이런 점에서 국가원수로서 한국에서 '반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선례를 제공한 첫 번째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심지어 1952년 5월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발췌 개헌을 강행한 뒤에 '비상 계엄'을 선포, 이종찬에게 전방부대 1개 사단을 부산에 배치해서(참고로 이게 1952년의 일이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것을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이 "군대는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며 병력 배치를 거부하고 더 나아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육군본부 훈령 217호를 전 육군에 하달하자, 이승만은 결국 헌병대를 동원해 따로 병력 동원을 명령하고 이종찬을 총장에서 해임하는데, 심지어 이종찬이 해임되기 얼마 전에 부임해 온 신임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앞에서 한국군 장군들을 소개하며 인사시키는 자리에서 이승만은 이종찬을 두고 "이 사람(이종찬)의 할아버지 한일합방 때 도장 찍어 나라 팔아먹은 양반"이라고 소개했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2). 정작 이종찬 본인은 일본군으로 있으면서 작위를 세습하기를 거부했고, 해방 뒤에는 "일본군에 부역한 내가 무슨 염치가 있느냐"며 공직에서 물러나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9]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바로 안두희 피살 사건이다. [10] 사실 당장 일식당이 대중화된것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지금은 홍대거리 외에도 여기저기 일본 라멘집이나 이자카야가 흔하게 들어서 있지만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일본 라멘집은 커녕 타코야끼를 파는 노점상도 존재하지 않았을 정도이다. 2000년대 초부터 타코야키를 파는 노점상을 시작으로 조금씩 늘어나며 지금에 이르게 된것. [11] 관련 작품 중 가장 이슈화된 것은 1992년작 MBC 특별기획 드라마 < 분노의 왕국>이 있다. [12] 일본인들과 무리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일본어도 매우 잘 했다. [13] 이후락 윤필용 사건으로 입지가 좁아지자 독단적으로 벌인 짓이다. [14]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일수교 반대시위로 촉발된 6.3 항쟁을 주도한 바 있고, 박정희 정부의 한일수교 또한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런 사진도 남겼다. [15] 자세한 내용은 2012년 이명박 대통령 천황 사과 요구 문서 참고. [16] 이명박 정부 이후 [17] 민주화가 이뤄진 1990년대부터 운동권의 영향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2000년대에는 점차 대학교들에서 비운동권 학생회가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2010년대 들어서는 이것이 완전한 황혼을 맞이하여 운동권의 영향력이 거의 소멸되는 수준에 놓였다. # [18] 해당 조사는 '가장' 싫어하는 국가를 뽑은 것이므로 후술할 글에 대한 근거가 되기엔 부족한 측면이 있다. 다만 "한반도 주변 5개국 각각에 대해 평소 느끼고 있는 감정을 0도에서 100도 사이(0에 가까울수록 차갑고 부정적인 감정, 100에 가까울수록 뜨겁고 긍정적인 감정)"으로 표시하라는 여론조사에서 20대에게 비교적 높은 일본에 대한 선호가 나타난다. 해당 기사에서 앞선 여론조사의 기존 결과가 시각자료로 나타나 있는데, 2022년 7월(60대 이상에 밀린 2위)을 제외하곤 20대에서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가장 높아왔다. 2023년 10월 조사에서 근소한 차이로 60대 이상에 밀려 2위가 되었다. # 2024년 1월 조사에서는 60대외 70대가 따로 분리되었으며, 20대의 일본 호감도는 70대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 2024년 4월 조사에서 역시 70대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 [19] 통계에서 북한 다음으로 혐오하는 국가가 일본인 것에서 볼 수 있듯이 60대 이상 또한 반일정서가 상당 수준 존재한다. [20] 30대의 반일감정에 대한 여론조사는 상이한 결과를 보여준다. 몇몇 여론조사에서는 20대의 경향을 따르는 반면 몇몇 여론조사에서는 40대만큼 반일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50대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반일감정에 관하여) 40대의 경향을 따르기도 하는 반면, 60대의 경향을 따르는 경우도 있다. [21] 다만 30대는 20대와 다르게 일본에 대해 덜 우호적이라는 여론조사 결과 또한 존재한다. [22] 참고로 일본의 혐한 세력 역시 중년 남성층이 주류이다. [23] 다만 문재인도 임기 말인 2021년에는 신년사에서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24] 대표적인 문재인 정부의 대일 강경 정책인 지소미아 연장 종료 결정에 대해, 이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20대에 비해 40대가 20% 더 높고, 60대 이상과 비교해서는 30%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25] 대표적으로 한국의 소설가 박경리자신을 취재하러 온 일본 잡지사 편집장 앞에서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의 비극이다", "나는 철두철미한 반일 작가다"라고 공언했을 뿐 아니라, 일본의 우파 역사학자 다나카 아키라가 1990년 8.15에 즈음하여 "한국인의 '통속민족주의'에 실망합니다"라는 글을 써서 '통속민주주의의 성행', '타자에게 얽메이는 한국인', '반일도 대중화 시대로', '사죄는 마음의 문제' 등의 소제목으로 한국인의 반일감정을 비판한 내용에 대해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충고할 자격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신랄하게 반박하기도 했다. 박경리가 일본에 대해 쓴 산문들은 《일본산고》이라는 제목으로 정리되어 출간되었는데, 본인이 식민지 시절을 직접 겪은 인물인지라 읽어 보면 일본이 과거 한국에 자행한 식민 지배 가해나 그것을 미화, 왜곡하는 작태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뿐 아니라 일본 문화 자체가 '그들의 극한점인 그 가냘픈 로맨시티즘을 극복하지 못하면 거기서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 그러한 자살을 마치 당연하고 아름다운 것인양 미화'하는 풍조라며 비판한다. 나아가 전쟁의 책임이 천황에게 있다 하여 테러를 당한 나가사키 시장이나 왜곡된 자기 저술을 바로잡기 위해 재판을 건 학자 등 일본 사회에도 분명히 사실을 직시하며 왜곡되지 않은 진실을 말하는 이들이 많음을 부정하지 않았고, "옛날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지만 그런 양심이 많아져야 진정한 평화를 일본은 누릴 수 있을 것이며 세계 평화에도 이바지하게 되는 것"이라는 기대를 내비치기도 했다. [26] 정확히 말하면, 분명 정부 차원에서 사과했으나, 한국은 한국대로 강제징용과 위안부에 관한 판결을 진행한다는 소식에 주로 자민당 계열 정치인들이 한일기본조약을 거론하며 계속 들춰내며 스스로 그 입장을 계속 뒤집는다는 것이다. [27] 자민당이 반성을 하지 않는 이유는 한일기본조약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당시 제국주의 시대에는 일상적이었다고 변호하는 것이며 미영프를 비롯한 선진국들도 제국주의를 통해 엄청난 발전과 이득을 봤기에 일본 입장을 두둔하는 스탠스를 취해온다. [28] 특히 이렇게 계속 입장을 뒤집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거리‘라고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위안부의 강제성 문제는 이미 입증되었고, 결론난 사항이다. [29]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한국의 현충원과 달리 사설 종교법인이며, 이곳에 참배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다. [30] 야스쿠니 신사의 전쟁범죄자 합사에 대해서는 당시 쇼와 덴노도 불쾌감을 드러내었으며, 전쟁과 학살의 주범들이 합사된 신사에 참배한다는 것은 명백한 극우적, 군국주의적 행보이다. [31]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한국에 대한 보복이 아닌,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를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32] 그런 식으로 "주권국가에 대해 사죄를 강요하는 것은 일방적"이라고 한다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해서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사죄'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성립이 가능하다. 애초에 '사죄를 강요'라는 말 자체에는 사죄가 요구되는 측에 잘못한 것이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고, 다분히 사죄가 요구되는 측에 치우친 입장으로 친일적인 논자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과도 거리가 멀다. [33] 일본인으로 한국역사연구소 상임연구원 도리우미 유타카(鳥海豊)는 <일본 학자가 본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책에서 조선총독부가 입찰 자격을 제한해 조선인 참여를 억제한 행위를 수탈로 보기는 쉽지 않고, "일제가 진정한 의미에서 조선을 발전시키려고 했다면 메이지 시대 일본 정부처럼 많은 관영 공장을 건설해 민간에 불하했을 테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며 식민지 근대화론을 '수탈'이라는 개념으로 반박하기보다 '구조적 폭력 지배'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책으로 한국 경제가 발전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공업 발전을 경계했다는 것이다. # [34]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는 조선인이나 중국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네덜란드인도 포함되어 있었고, 심지어 패전 뒤에 일본군이 본토로 철수하면서 만주 지역의 일본 자국민들을 방기해 버리는 바람에 만주에 남아 있던 일본 여성들 가운데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학살당하거나, 그들을 만주까지 데리고 온 '개척단' 간부들에게 내몰려 구소련군, 중국군을 대상으로 하는 성접대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이나 중국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까스로 일본에 귀국한 뒤에도 멸시와 차별을 당했다. # [35] 이는 일본 사회에서 여전히 기득권을 누리며 행사하는 우익 세력뿐 아니라 그런 우익 기업의 후원을 받는 이영훈, 존 마크 램지어 같은 어용 학자나 민간단체들이 그 주구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램지어의 경우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왜곡뿐 아니라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일본 정부의 의도적인 가짜 뉴스 유포)마저도 "경찰 민영화의 한 사례이자 정당방위"라고 왜곡했고(<경찰 민영화: 일본의 경찰, 조선인 학살 그리고 민간 경비 회사>) 이러한 램지어의 주장을 일본의 아사히 신문 기자 출신인 와타나베 노부유키가 나서서 반박한 책이 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 - 램지어 교수의 논거를 검증한다(원제: 關東大震災「虐殺否定」の眞相 ハ-バ-ド大學敎授の論據を檢證する)이며, 2023년 한국에도 번역 출판되었다. [36] 재일교포뿐 아니라 일본 원주민인 아이누족 전통의상을 입은 것까지 싸잡아서 조롱했다. [37] 여기에는 심지어 이민 내지 강제동원으로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식민지 조선인들도 있었다. [38] 1965년 한일기본조약 협상 과정은 국민들에게는 명백히 반일감정의 기폭제가 되기 충분했다. [39] 당연하지만 일본 문화라고 마냥 오타쿠로 대표되는 애니만 있는 것도 아니다. 겐지 이야기, 헤이케 이야기나 태평기 등 일본의 전통 모노가타리나 일본 가요인 J-POP, 일본 소설도 엄연히 일본 문화의 범주에 속한다. [40] '무분별한 저질 오타쿠'라는 말이 어느 정도는 들어맞는 게 일본 애니 중에는 표현 수위가 과도하게 선정적인 것을 넘어 아예 소아성애를 미화하는 듯한 것까지 있고, 한국의 연예인들 중에 그런 작품을 소개했다가 빈축을 산 이들도 있다. # [41] 사실 이런 부류들이 작성하는 글들을 읽어보면 정말 제정신으로 쓴 것인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패전하지 않았으면 한국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하고 애니메이션 등이 흥행했을 거라며 아쉽다고 한다거나, 독립투사 등을 욕하는 경우 궤변을 펼치는 등이 대다수. 물론 이걸 가지고 애니메이션을 빠는 오타쿠 문화 전체를 비난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는 하지만, 대체로 일본 오타쿠 문화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데에 이들의 역할(?)도 한몫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42] 본 작품은 정작 데즈카 오사무 전집에도 오르지 못해서,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만화가 있었단 말이야?'라며 놀란다고. # [43] 이 사람은 전쟁 때에 여동생을 잃은 기억으로 본작을 썼으며, 평생을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 비판하는 입장을 피력해 왔고, 사망하기 몇 시간 전에 쓴 글에서까지 "이 나라에 전전(戰前)이 차츰 다가오고 있음이 확실하다(この国に、戦前がひたひたと迫っていることは確かだろう)" 즉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기 전처럼 사회 곳곳에 우익들을 중심으로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군국주의를 부채질하고 이를 동조하는 움직임이 슬슬 일어나고 있다는 비판을 남길 정도였다. # # # [44] 자국 영토에 대한 도발에 국가간 감정을 떠나 민감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일이다. [45] 웃긴 건 이 사람은 한국인하고 결혼했다. 그것도 18세 연하... 또 2019년 4월 6일과 5월 18일에는 일본 간사이TV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가슴 가득 서밋'에 나와 그 해 2월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왕의 사과' 운운한 발언을 패널들과 얘기하다가 진행자가 "이와이 씨는 남편이 한국 분이니 한국인의 기질을 알고 있지 않으냐"고 질문하자, "손목을 긋겠다는 추녀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대개 정리된다"며 한국인을 비하했고, 결국 일본 방송윤리검증위는 "인종과 성별, 직업, 처지, 신조 등을 다룰 때 차별하지 않는다", "인종과 민족, 국가에 관해 다룰 때는 그 감정을 존중해야 한다"라는 일본 민방연맹의 방송기준을 위반했다고 판단해 경고를 날렸고, 무엇보다 "녹화 방송이어서 한국인을 모욕하는 발언을 편집할 수 있었는데 그대로 내보낸 것은 방송윤리 차원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취지의 의견도 간사이TV에 제시했다. # [46] 물론 작가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쿠보가 트위터에서 보인 언행들이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라는 항목에 딱 어울리는 게 많다. 요즘은 후배들에게 "내가 젊어서는 진짜 사람들하고 많이 부딪치면서 모나게 살았는데 나이 먹고 돌아보니 진짜 내가 개차반으로 살았더라. 니들은 그러지 마라"라는 자기반성을 많이 보인다. [47] 일본에 대하여 비토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은 오지도 말라는 식으로 욱일기를 게시판 주제와 관련된 사진과 합성하여 프로필에 올려놓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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