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d0000, #d40000 20%, #d40000 80%, #cd0000); color: #ffd700; min-height: 31px" {{{#!folding[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d700> 국가원수 | |||
<rowcolor=#ffd700>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주석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레프 카메네프 |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 미하일 블라디미르스키 | 미하일 칼리닌 | |
<rowcolor=#ffd700> 러시아 최고회의 주석 | 러시아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안드레이 즈다노프 | 알렉세이 바다예프 | 이반 블라소프 | 니콜라이 슈베르니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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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
이반 블라소프 | 미하일 타라소프 | 니콜라이 이그나토프 | 니콜라이 오르가노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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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
니콜라이 이그나토프 | 미하일 야스노프 | 블라디미르 오를로프 | 비탈리 보로트니코프 | |
<rowcolor=#ffd700> 러시아 최고회의 주석 |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 |||
제15대 | 초대 | |||
보리스 옐친 | 보리스 옐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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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레닌 | 알렉세이 리코프 | 세르게이 시르초프 | 다닐 술리모프 | |
<rowcolor=#ffd700> 러시아 인민위원장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니콜라이 불가닌 | 바실리 바흐루셰프 | 이반 호흘로프 | 알렉세이 코시긴 | |
<rowcolor=#ffd700> 러시아 장관회의 주석 |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미하일 로디오노프 | 보리스 체르누소프 | 알렉산드르 푸자노프 | 미하일 야스노프 | |
<rowcolor=#ffd700> 러시아 장관회의 주석 |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프롤 코즐로프 | 드미트리 폴랸스키 | 겐나디 보로노프 | 미하일 솔로멘체프 | |
<rowcolor=#ffd700> 러시아 장관회의 주석 |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보로트니코프 | 알렉산드르 블라소프 | 이반 실라예프 | 올레그 로보프 | |
<rowcolor=#ffd700> 러시아 장관회의 주석 | ||||
제21대 | ||||
보리스 옐친 | ||||
<rowcolor=#ffd700> 서기장 | ||||
<rowcolor=#ffd700>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
초대 | 제2대 | |||
이반 폴로즈코프 | 발렌틴 쿠프초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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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카메네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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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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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레프 보리소비치 카메네프 Лев Бори́сович Ка́менев Lev Borisovich Kamene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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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3년 7월 18일 |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 |||
사망 | 1936년 8월 25일 (항년 53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주 | |||
재임기간 | 초대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주석 | ||
1917년 11월 9일 ~ 1917년 11월 21일 | |||
초대 소련 인민위원회 부의장 | |||
1923년 1월 17일 ~ 1926년 3월 1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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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본명 |
레프 보리소비치 로젠펠트 (Лев Борисович Розенфелеьд) |
|
형제자매 | 남동생 니콜라이 보리소비치 로젠펠트 | ||
배우자 |
올가 브론시테인(1928년 이혼)[1] 타티아나 글레보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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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아들 알렉산드르, 유리, 블라디미르 | ||
학력 | 제국 모스크바 대학 | ||
정당 | 볼셰비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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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혁명가이자 정치인. 스탈린, 지노비예프와의 삼두정치로 유명했던 인물로 대숙청 시기 고참 볼셰비키 중에서 가장 먼저 숙청당했다.2. 생애
2.1. 초기
1883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유대인 아버지와 기독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였고 정치에 적극적이었다.[2] 그는 티플리스에 있는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제국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한다. 거기서 그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하고 혁명가 경력을 시작한다. 1902년 러시아 당국에 의해 체포된 이후 카메네프란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1903년 사회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의 볼셰비키에 합류한다. 그는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와 막심 고리키의 초좌익 분파를 비판하며 레닌의 충직한 동료로 이름을 날렸다.2.2. 러시아 혁명에서
러시아 혁명 동안 그는 소비에트 원내 볼셰비키를 이끄는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 소비에트 중앙위원회와 러시아 임시정부처럼 레닌의 급진적인 폭력혁명을 지양하던 인물이었다.[3] 부르주아 정권에 대한 비협조 노선을 담은 4월 테제, 페트로그라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외친 7월 시위, 그리고 10월 혁명에 이르기까지 카메네프는 늘 아직은 때가 아니라면서 혁명 노선을 반대하였다. 레닌이 10월 혁명을 제안했을 때도 다른 이들이 레닌에게 설득당해 찬성을 표했을 때 끝까지 반대한 2인이었다.[4] 그리고 혁명이 시작되자 그는 임시정부에 이 사실을 알렸고 케렌스키는 즉각 볼셰비키 당원들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프라우다를 폐쇄했으나 이미 병력 면에서 쿠데타군이 승기를 잡고 10월 9일 새벽 겨울궁전을 제외한 시내 전체를 점령했다. 볼셰비키는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를 신설하고 주석직에 카메네프를 임명한다. 갑자기 소집된 의회와 도시의 불법점령에 사회혁명당, 멘셰비키, 카데트 위원들은 반발하지만 볼셰비키는 표결을 강요했다. 결국 볼셰비키와 좌파 사회혁명당을 제외한 나머지 당들은 모두 이 소집이 불법이라 주장하며 참여를 거부했다.2.3. 늑대를 잡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다
1922년 레닌이 뇌졸중으로 중태에 빠지자 볼셰비키 내부에서 후계 싸움이 일어난다. 당시 주요 파벌들로는 NEP 정책을 지지하던 우익 반대파와 노동자 자결권을 주장하던 노동자 반대파, 당내 민주주의의 약화를 우려하던 민주집중파, 그리고 트로츠키파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당내의 소수였다. 대부분은 기존의 관료 집단을 유지하려는 중앙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들 중 단연 많은 미움을 받던 집단은 트로츠키파였다.[5] 트로츠키는 1903년 당대회에서 율리 마르토프와 함께 멘셰비키에 가담했고 러시아 혁명기 통일된 사회민주노동당을 재건하려는 중간파, 메즈라이온치에 있다가 7월 시위 후에 합류한, 소위 굴러온 돌이었다. 그러나 10월 혁명, 제헌의회 해산, 러시아 내전과 적군의 건설 등 주요 임무들을 혼자 수행해내며 이론적 능력도 실무적 능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레닌도 유언장에서 유일하게 트로츠키에겐 최고지도자가 안 될 이유가 없다며 사실상 트로츠키를 최고지도자에 앉히고 고참 볼셰비키들이 그를 보조해주길 원했으나 유언장에 지명된 볼셰비키( 부하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누구도 트로츠키의 들러리를 설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이 점을 스탈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레닌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깨어나기를 반복하자 그는 서기장직을 이용해서 정치국 위원들을 자기 사람들로 채워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에게 트로츠키를 실각시키기를 제안했다. 안그래도 입지가 약해진 둘은 덥석 스탈린의 제안을 수락한다. 1927년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 삼두정은 트로츠키를 따르는 이들을 당 분파 금지 명령을 어겼다면서 하나둘 당중앙에서 멀리 좌천시킨다.2.4. 야당 생활
이들의 동맹관계는 그리 길게 유지되지 못했다. 천성이 기회주의적이었던 지노비예프는 스탈린의 일방적인 정책 결정에 점차 그와 연합해서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다. 카메네프는 지노비예프에게 상당히 의존적인 모습을 보여왔는데 자연스레 카메네프도 스탈린과 척을 지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4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의 해임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주장하며 삼두정이 깨지게 되자 그들은 세력확보를 위해 신 야당이란 반대파를 설립한다. 신 야당은 스탈린의 중앙파와 정책면에서 차이는 없었으나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경질해야 한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 이후 트로츠키의 좌익 반대파[6]와 연합하여 연합 반대파라는 당내 최후의 야당을 설립하며 버티려 하였다. 그러나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와 연합한 스탈린은 연합 반대파 전원을 파벌주의자로 몰아서 출당 조치를 내리고 트로츠키는 아예 국외추방을 시켰다.2.5. 최후
이렇듯 스탈린에게 완전히 패하자 카메네프는 자신의 행적을 자아비판하는 각서를 쓰고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에야 복당될 수 있었다.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가 1929년 이후 적극적인 반스탈린 운동을 할 때에도 그나마 있는 권력도 사라질까 참여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 제안은 부하린이 트로츠키주의자라는얼마 지나지 않아 키로프 암살 사건으로 대숙청의 첫 희생양이 되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그리고 그들을 따르던 자들은 모두 출당+체포되고 카메네프는 5년형, 지노비예프는 10년형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 형량을 모두 살고 나오지는 않았다.
1936년 8월 25일 모스크바에서 총살당하며 5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3. 평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10월에 있었던 일은
물론 우연이 아니었지만,
비볼셰비즘이 트로츠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에 대한 책임을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돌릴 수도 없습니다.
- 블라디미르 레닌
- 블라디미르 레닌
4. 여담
- 트로츠키의 매제였다. 국외활동을 할 때 트로츠키의 여동생을 만나 결혼했다.
- 주변 볼셰비키 당원들은 그가 노동자 출신으로 부르주아적 태도나 엘리트주의적 태도를 보이지 않고 성실한 인물이라 평가했다. 동시에 기존의 노선을 고집하고 모험을 극도로 경계하는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다.
- 2월 혁명 당시 야당 당원들은 다른 볼셰비키들보다 유화적이고 말이 통하는 그를 좋아했고, 독선적이고 선민의식에 찬 트로츠키를 가장 싫어했다고 한다.[7]
- 그는 트로츠키나 레닌, 지노비예프와 같이 남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지는 않았으며 몰로토프 같은 기술관료 체질이었다.
- 2월 혁명으로 귀국한 이후에는 모스크바를 잘 떠나지 않았으며 모스크바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고 한다. 레닌그라드 소비에트가 지노비예프의 강한 우위 하에 있었다면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카메네프가 움켜쥐고 있었다.
-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 스탈린을 축출하고 카메네프를 소련의 지도자로 만들 수 있다. 빛바랜 별 특성이 있어 유저들이 자주 카메네프를 지도자로 만드는 편이다. 다만 중점으로 미리 석방시켜야 한다.
5. 둘러보기
[1]
트로츠키의 여동생이다.
[2]
이는 보수적인 농부 집안의 스탈린과 소위 소부르주아 집안 출신이었던 트로츠키와 대비된다.
[3]
니콜라이 2세의 양위를 거부하고 임시 국가원수직만 수락한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에게 감사 전보를 보내길 제안할 정도로 타협적인 모습을 보였다. 만약 러시아 공화국이 유지되었다면 볼셰비키의 지도자로 레닌이 아니라 카메네프가 기억되었을지도.
[4]
나머지 한명은 지노비예프
[5]
민주집중파와 노동자 반대파는 제10차 공산당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당해 세력이 미약했고 우익 반대파의 경우 NEP의 시행은 중앙파도 동감하였기 때문에 큰 갈등이 없었다.
[6]
트로츠키가 대권에서 밀려난 이후 노동자 반대파 등 당내 비주류들이 연합한 정당이었다. 트로츠키는 이들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이들의 대변인 행세를 하며 스탈린의 중앙파를 비판했다.
[7]
하지만 이 구도는 러시아 내전이 끝나고 완전히 뒤바뀐다. 트로츠키가 반대파에 대해 실력행사를 하지않고 인신공격에서 끝내지만 레닌과 스탈린의 공산당 주류 노선은 무력행사였고 카메네프는 이같은 당 중앙에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