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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경(야구)/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김수경(야구)

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프로 시절
3.1. 현대 유니콘스 시절
3.1.1. 1998 시즌3.1.2. 1999 시즌3.1.3. 2000 시즌3.1.4. 2001 시즌3.1.5. 2002 시즌3.1.6. 2003 시즌3.1.7. 2004 시즌3.1.8. 2005 시즌3.1.9. 2006 시즌3.1.10. 2007 시즌
3.2. 넥센 히어로즈 시절
3.2.1. 2008 시즌3.2.2. 2009 시즌3.2.3. 2010 시즌3.2.4. 2011 시즌3.2.5. 2012 시즌
4. 고양 원더스 시절5.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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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수경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인천광역시 출신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인천고 2학년 때인 1996년 당시 3학년이었던 이근용[1] 과 함께 봉황대기 준우승을 이끌었고 감투상을 수상했다. 덕분에 인천고등학교가 간만에 낳은 에이스 투수로 인정받아 학교 측에서 플래카드를 매년 걸어둘 정도였다. 1998년 고졸 우선으로 현대에 지명됐을 때도 인천 연고 야구 팬들에게 인천광역시+ 인천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점을 크게 어필했다.


3. 프로 시절

3.1. 현대 유니콘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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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를 보냈던 현대 유니콘스 시절(2006년)[2]
"슬라이더는 조용준과 김수경이 가장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 박경완 인터뷰

3.1.1. 1998 시즌

인천고 재학 시절만 초기만 해도 직구 최고구속이 139km/h가량 나오는 선수였으며 생각만큼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김시진이 그의 잠재력을 보고 현대 유니콘스 구단에 추천하여 1998년 드래프트 고졸우선 지명으로 뽑혔다. 현대의 나머지 고졸우선 지명자는 초등학교 동창이자 영혼의 배터리인 강귀태.

입단 직후 김수경의 잠재력을 낮게 본 김재박 감독이 해외 전지훈련 명단에서 제외하자, 김용휘 단장이 '투수 1명만 더 데려가라'면서 우격다짐으로 집어넣었다고 한다.[3]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따라간 스프링캠프에서 열린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연습경기에서 3이닝 7탈삼진이라는 호투를 보여주며 김시진 투수코치의 눈에 들게 되었다. 이후 김시진 코치의 집중조련을 받으며 구속이 145km 까지 상승하며 최창호, 안병원, 김홍집, 최영필 등의 선배들을 제치고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했다. 마침 운도 따랐는데 당시 5선발 후보였던 가내영이 스프링캠프에서 부상으로 낙마하자 코치진은 그 빈자리를 잠재력있던 김수경에게 기회를 주게 된다.

그 해 12승 4패, 2.76의 평균자책점을 기록. 김용수와 함께 승률 부문 타이틀을 차지했으며[4], 삼성 라이온즈 강동우(3할, 10홈런, 22도루)와 OB 베어스 김동주(.265, 24홈런, 89타점)를 물리치고 그 해 신인왕을 차지하였다. 이는 투수왕국이라 불리던 현대 유니콘스의 인수 후 첫 투수 신인왕이었다.[5] 특히 이 해에 올린 탈삼진 168개는 1983년 김시진이 기록한 신인 최다 탈삼진 기록(154탈삼진)을 경신한 기록이었다.[6] 그래서 많은 팬들은 신인 때부터 김수경을 '닥터 K'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정민태, 정명원, 위재영, 최원호와 함께 선발투수 전원 10승이라는 대기록을 합작한다.[7]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도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야구 대표팀에는 선발되지 못했는데, 이미 군 면제를 받았기 때문이다.[8][9]

1998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 선발등판하여 당시 현대의 천적이었던 LG 트윈스를 상대로 호투하며 승리. 역대 최연소 한국시리즈 선발 승리투수 & 세이브 투수가 되었다. [10] 한국 시리즈 총 2경기 나와 1승 1세이브 평균자책점 1.61의 쏠쏠한 활약으로 팀의 첫 우승을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아쉬운 점은 1998년 처음으로 도입된 외국인 선수 제도로 현대에 영입된 마무리 투수 조 스트롱 방화범 역할을 하며[11] 김수경의 승리도 몇 차례씩 날려주는 활약을 보여주었다는 것. 신뢰를 잃어버린 스트롱은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은 되었지만 한 경기도 등판하지 않았고 현대는 한국시리즈에서 선발투수로 돌려막기를 해야 했다.[12]

3.1.2. 1999 시즌

1999년에는 현대 유니콘스의 투수진이 박살나면서 중간계투로도 많이 나왔으며 타선이 김수경의 승리를 제대로 도와주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팀 선배인 정민태[13]와 선발진에서 쌍두마차 활약을 해주었다. 1999년 최종 기록은 10승 11패 1세이브 탈삼진 184개 ERA 4.11. 전체적으로 전년보다 성적이 떨어졌지만 탈삼진 갯수는 증가했고, 리그 탈삼진 1위를 기록한다.

3.1.3. 2000 시즌

2000년에는 같은 팀의 정민태, 임선동과 함께 18승을 올리며 공동 다승왕에 오른다.[14] 당시 동갑내기 라이벌이었던, 그리고 기업 간 라이벌이기도 했던 삼성 라이온즈 김진웅[15]과 함께 한국 야구를 이끌 투수라고 극찬을 받기도 했었다.

KBO 리그 현재 한 팀에서 공동 다승왕을 배출한 경우는 1985년 삼성 라이온즈, 2000년 현대 유니콘스와 2017년 KIA 타이거즈뿐이다.[16][17] 한 팀에서 세명이 다승왕을 차지한 것은 현재까지 2000년이 유일하며, 정민태 김수경 임선동 세명이 따낸 18승x3=54승은 그 해 매직리그 4위였던 SK(구단의 한 시즌 총 승수을 말하는 것이다)보다 10승이 더 많았고, 3위였던 한화보다 4승이 더 많았다.

파일:attachment/김수경(투수)/200604271826111101_1.jpg
[18]

2000년 7월 16일 수원구장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전에서 9회 1사에 헤수스 타바레스 안타가 터져서 노히트 노런 기록이 깨진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19] 당시 9회초 1아웃 1스트라이크에서 기습 번트를 댄 것이 내야안타가 되었다. 퍼펙트게임 혹은 노히터가 진행되고 있을 때, 경기 후반 기습번트를 대지 말아야 한다근데 가끔 노히트 노런이나 퍼펙트 게임을 언급하는 기사의 경우 예를 들 때 김수경을 언급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여기서 많이 말싸움이 있었다.[20]

여기까지가 그의 짧은 리즈시절이었다.

3.1.4. 200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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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 투구폼 수정을 시도하다 대실패. 전 해 18승을 기록했던 투수가 고작 6승을 거두는 데 그치고, 195이닝을 소화했던 투수가 97이닝밖에 소화하지 못했으며, 평균자책점도 3.74에서 5.20으로 폭등한다. 그러다 시즌 중간에 부상으로 드러눕는다. 투구폼을 바꾸려 했던 이유로는 오릭스 투수코치의 권유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박동희 칼럼에 의하면 주변의 조언을 본인이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발언도 있다.[21]

2001년 현대의 선발 투수들은 에이스 정민태가 일본으로 진출하면서 그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흔들렸었다. 임선동은 14승을 거두며 선전했지만 작년에 비해서 평균자책점이 급증(00년 3.36, 01년 4.40). 전준호는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12승을 거두지만 평균자책점이 5.09. 외국인 투수 테일러는 8승 10패 평균자책점 4.75를 기록하며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둔다. 유일하게 버틴 선발이 마일영. 중간과 선발을 오가며 10승 5패 평균자책점 3.96을 기록한다.

2001년 포스트 시즌 플레이오프 두산 베어스와의 2차전에서 중간계투로 1이닝을 던지면서 2실점을 한다.[22] 특히 마일영을 제외하면 가장 어린 막내였던 김수경이 무너진 것은 구단에게도 충격이고 스승 김시진 역시 충격이 컸었다. 다만 김수경이 망가진 원인은 김시진 당시 투수코치에게도 있었다.[23]

3.1.5. 2002 시즌

그리고, 2002년에 12승, ERA 4.88을 기록. 2년 연속 부진했고 팀 선발 중 평균자책점이 가장 높았지만 [24][25], 팀 내 최다승을 거둔다. 준플레이오프에서 LG 트윈스와 만나게 되었지만 최동수 매니 마르티네스에게 적시타와 만루홈런을 허용하는 등 결국 패전투수가 되고 팀 역시 탈락한다.

3.1.6. 2003 시즌

2003년 역시 전년도와 비슷한 10승, ERA 4.63 을 기록하는데 그치며 2002년과 비슷한 성적을 냈다. 그에 대한 신뢰도는 점점 떨어졌다. 원조 에이스였던 정민태가 복귀하고 새로 용병 셰인 바워스가 오면서 모든 시선은 정민태와 셰인 바워스에게만 집중 되었다. 팀은 이승엽과 경쟁하던 거포 심정수와 복귀한 정민태의 활약에 힘입어 정규 시즌 1위를 한다.

한국시리즈에서는 1승 1패를 기록하였다. 자세한 기록은 2003년 한국시리즈를 참고.

3.1.7. 2004 시즌

2004년, 전반기에는 다승 및 평균자책점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갑자기 부진을 하며 ERA가 4점대까지 치솟았고, 최종적으로 11승, ERA 4.01의 성적을 올리지만 K/9가 부상으로 고생한 2001년 이후 처음으로 6 미만으로 내려갔다. 김수경의 K/9을 보면 데뷔 시즌의 9.45에서 (2001년을 제외하면) 계속 내려가는데, 그 동안은 그래도 7은 기록하고 2003년에 처음 6점대를 기록했는데 1년만에 구위가 크게 하락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5타자 연속 삼진 신기록을 세운다. 이 기록은 김광현 2010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경신(6개)했다. 팀은 2년 연속 우승을 기록했다.

3.1.8. 200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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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는 17경기 90.2이닝 7승 7패 평균자책점 5.76을 기록. 다시 한 번 부진에 빠진다. 팀 역시 7위를 기록, 현대 인수 이후 최악의 순위를 기록하고 만다. 1완투 경기가 있다.

3.1.9. 200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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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역시 17경기 85.2이닝 4승 7패 평균자책점 3.78을 기록하여 부진한다. 첫 승을 7월 중순에서야 얻을 정도. 오랜만에 3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살아난 것처럼 보이지만, 2006년은 규정타석 3할 타자가 5명밖에 없고 26홈런의 이대호가 홈런왕을 차지할 정도로 심각한 투고타저였기에 3점대 평균자책점이면 낮지 않은 기록이었다(리그 평균 ERA가 3.59).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2군 강등을, 그것도 여러 번 당한 시즌이기도 하다. 그 때 감독은 김재박인데 경험 좀 하고 오라고 보냈다고 한다.

3.1.10. 2007 시즌

2006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하였으나 불러주는 팀이 없어서[26] 1+2년 계약으로[27] 현대 유니콘스와 계약했다. 2007년 세부기록은 생각보다 확 좋아지지는 않았으나 오랜만에 176.1이닝을 소화하고 12승 7패 평균자책점 3.88[28]을 기록하며 준수한 선발투수로 시즌을 마감했다.

참고로 현대 유니콘스의 마지막 경기였던 10월 5일 수원 한화전에서 선발 등판해 5이닝 2피안타 7탈삼진 무실점으로 시즌 12번째 승리를 낚았다. 이 시즌 김수경은 데뷔 10년 만에 100승 투수[29]가 되는 동시에 팀의 최다승 투수가 되었고 이렇게 부활하나 싶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던 현대 유니콘스는 결국 새 주인을 찾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김수경은 그렇게 유니콘스의 마지막 선발 투수이자 승리투수로 남았다.

3.2. 넥센 히어로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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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2008 시즌

그렇게 2007 시즌을 마치고 현대 유니콘스는 2008년 1월 사실상 공중분해된 뒤 해체된다. 같은 해 2008년 2월 현대 선수들과 코치진을 승계한 우리 히어로즈가 창단되었으나 창단 첫 해 연봉협상부터 꼬이기 시작하더니[30][31] 그동안 꾸준히 갔던 미국 플로리다로의 전지훈련도 못 가고 국내에서만 훈련한다. 참고로 팀 전지훈련 장소는 제주도[32]였다. 2008년에는 부상과 재활로 다시 주저앉았고, 선발에서의 부진으로 인해 불펜으로 뛰다 선발로 자꾸 보직이 변경되며 106.2이닝 3승 8패 평균자책점 3.88을 기록. 작년보다 소화 이닝이 더 줄어버렸다. 가난했던 팀은 7위를 한다.

3.2.2. 2009 시즌

2009 시즌에 다시 선발 투수로 복귀했다. 이 때부터 배터리도 초등학교 동창인 강귀태와 영혼의 배터리 호흡을 맞추었으나 시즌 도중 강귀태랑 같이 2군행을 통보받는 등 6승 11패 방어율 6.67로 프로 데뷔 후 최악의 성적을 남겼다. 이전에 김시진 감독은 시즌 초반 이숭용& 송지만 두 노장에게도 미안하지만 잠시 10일간 2군 가라는 지시를 했었다. 그 때 당시에 팀 타선이 롤러코스터로 가다가 이 둘이 다시 복귀하더니 폭발해버렸다. 근데 문제는 투수들이 더 터지고 말았다. 즉 얻어터졌다. 당시 김수경과 배영수가 인터넷에서 많은 까임을 당했다.[33]

3.2.3. 2010 시즌

2010년에는 4월 6일 대구구장에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 선발로 올라가 3⅓이닝 피홈런 1개 포함 5실점으로 조기 강판당한 후 자진해서 2군으로 갔다. 그리고 검진을 받은 결과 부상이 발견되면서 재활에 매진하긴 했는데, 잔부상들이 연이어 일어나며 긴시간 동안 재활에 임해야만 했었다. 결국 4월 6일 단 한경기를 끝으로 시즌 내내 1군에 올라오지 못하고 2군에서 시즌을 마쳤다.[34]

3.2.4. 2011 시즌

시즌 시작 후에도 2군에 계속 머무르다가 이정훈이 강진으로 내려가면서 430일 만에 1군으로 콜업되었다.

6월 11일 삼성와의 경기에서 박한이에게 쓰리런을 맞은 문성현을 구원하여 4회 1사 상황에 등판, 3⅔이닝 3피안타 무사사구 2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직구 최고구속이 136km/h이고[35] 야수진의 호수비로 겨우 막아낸 감이 없잖아 있지만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투구. 이후 6월 15일 3이닝 1실점, 6월 21일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7월 7일 KIA전에서 1⅔이닝 무실점. 정말 감질나게 나오다가 7월 9일 한화전에서 4이닝 무실점으로 다시 등장. 3회말 1사 만루의 상황에서 구원등판해 병살로 깔끔하게 이닝 마무리. 이후 나머지 3⅓이닝도 단 1안타로 막아냈다. 평균자책점은 0.68까지 내려갔고 이 경기에서 통산 1,700이닝(1,701이닝)을 달성했다. 구속이 처음 올라왔을 때보다 더 빨라지고 있다는 게 포인트. 이날 최고 구속은 140km/h. 이후 등판은 없었으며 7월 21일까지 5경기 13⅓이닝 7피안타 5K 1실점 평균자책점 0.68을 기록했다. 구속이 점점 올라오고 있다고 하였다. 143km/h까지 나왔다는 듯.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된 김성현의 빈 자리를 대신하여 선발진에 합류했다. 2011년 8월 11일 롯데와의 원정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나왔지만 강민호 황재균의 홈런으로 492일 만의 선발등판 경기에서 3⅔이닝 만에 강판당했다.[36] 황재균의 홈런이 파울인지 홈런인지 논란이 있었는데 심판진에 의해 홈런으로 인정된 후 흔들리면서 무너졌다.

2011년 8월 19일 KIA와의 홈경기에 원래 선발로 예고되었던 김성태가 어깨 통증 때문에 공을 한 개도 안 던지고 내려갔고 그 대신 김수경이 깜짝 등판했다. KBO에서는 김수경을 선발 투수[37] 기록하였고 그 날 5이닝 3피안타 3볼넷 1실점 1탈삼진으로 호투했다. 중계진의 방화로 승은 거두지 못했지만 팬들은 호투한 김수경에게 박수를 보냈다. 오재영, 이보근, 박준수 이 셋이 이 날 방화의 주범이었다.[38]

8월 31일에 두산전에 등판해서 1실점 호투했지만 손승락의 1피홈런 블론세이브로 승리가 날아갔다.

9월 6일에 SK전에 등판, 3실점으로 비교적 호투했으나 역시나 또 불펜진들의 방화로 인하여 승리는 날아가고 말았다.

9월 11일 롯데전에 등판 2실점 QS를 기록했으나 타선의 득점 지원 부족으로 경기가 12회말 무승부로 끝났기 때문에 승리를 챙기지 못하였다.[39]

9월 16일 두산전에서는 6회까지는 잘 막았으나 그 후에 실점하여 동점을 허용하면서 강판당했다. 팀의 역전승으로 패배는 면했지만 승을 올리지는 못했다. 이쯤 되면 심수창 시즌2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9월 28일 SK전에서 6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745일만에 승리투수가 되었고 112승을 달성하였다. 간만에 인터뷰에서 745일만에 승리투수가 되니 너무 힘들었다고 하지만 이날 거둔 승리가 통산 마지막 승리가 되고 말았다.

전반적으로 2011시즌을 평하면,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고 본인 스스로 이번 시즌도 안되면 은퇴도 불사하겠다고 했던 선수가 1군 등록된 이후 날카로운 제구력과 위기관리능력[40] 등을 보여주며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려 팀과 선수 모두 큰 수확을 거둔 시즌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40km/h도 나오지 않던 구속이 143km/h까지 상승하고 시즌 중반 이후 무너진 선발의 한 축을 메꿔주어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내년 시즌이 기대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2군에서 재활을 마치고 1군으로 콜업될 때 재활을 도운 정명원[41] 투수코치의 얘기로는 더 이상의 구속 상승 여지는 거의 없다고. 슬라이더의 구속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130km/h 초반을 찍었다. 하지만 직구 최고 구속이 143km/h에 머무른다는 건 슬라이더의 위력이 반감한다는 것. 결국 본인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약점이었다. 자신도 알고 있는지 2011시즌 후반에는 커브와 체인지업의 비중을 높였다. 흠이 있다면 중계진들이 김수경의 승을 4번이나 까먹은 것이었다.

2011시즌 최종 성적은 69이닝 1승 2패 평균자책점 3.39.

3.2.5. 2012 시즌

팬들은 이제나 저제나 현대 유니콘스 시절의 영광의 재현을 보고 싶어했지만 스프링캠프 때 부터 시범경기까지 단 1차례 등판하여 1이닝 3실점을 기록, 결국 팬들에게 깨알같은 웃음을 줬다. 개막 전때는[42] 1군 엔트리에 포함되어 잠실 야구장에서 선수 소개할 때 마침 나왔다. 그러나 이후 주장 강병식[43]과 같이 강진에서 나왔다. 2군에서 3승 3패 1세이브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6월 12일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전에서 1군에 드디어 올라왔다.[44] 팀이 스코어 0:13으로 앞선 9회초에 등판하여 1이닝 17투구수 1피안타 무실점으로 성공적인 등판이었고 팀도 0:13으로 이겼다.

팀이 대망의 중위권에 오른 상태에서 6월 16일 목동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전에 강윤구 선발 투수로 등판했는데, 강윤구가 그 놈의 밀어내기(야구)포함 4실점 헌납하여 스코어 4:2로 지던 5회초 무사 1, 2루 상황에서 김수경이 마운드에 올랐다. 2루 수비 서건창의 환성적인 수비로 병살을 잡고 6회 2루 주자 김주찬과 1루 주자 손아섭의 더블 스틸로 무사 2, 3루의 위기에서 김수경이 강민호를 루킹삼진으로 잡아냈다. 이 때 강민호가 더그아웃으로 돌아가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는데 이 표정이 TV 중계화면에 10초간 뜬 것이 화제가 되었다. 이후 박종윤을 3루수 파울 플라이로 잡고 조성환에게 볼넷을 내준 뒤 황재균을 3루수 땅볼로 막으며 이닝을 무실점으로 마쳤다. 이날 3이닝 49투구수 5피안타 1볼넷 2탈삼진 1실점 1자책점으로 호투했지만, 하필이면 스코어 4:4인 7회초에 실점을 한 데다가 팀 타선이 7회부터 9회까지 무기력하게 막히는 바람에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다.

6월까지의 성적은 5경기 6⅔이닝 1패 평균자책점 1.35로 괜찮은 편이었으나, 가면 갈수록 피안타율이 높아져서 결국 피안타율이 무려 .333이 되었기 때문에 팬들은 불안해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팬들은 김수경이 선발 투수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더 궁금해했다. 그러나 이후 별다른 활약 없이 시즌을 끝내고 말았다. 그러나 시즌 중간 스승이던 김시진이 팀에 성적을 만족시키지[45] 못해 전격 해임이 되자 김수경 본인 역시 자진 2군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2012년 10월 17일 현역 선수 생활 은퇴를 발표했다. 현역 200승 투수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릴 것이라 다들 기대했는데... 화려한 전성기 및 긴 재활의 시간을 거친 것은 같지만 2012 시즌 12승을 따내며 부활의 날갯짓을 펼친 배영수와 달리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선택한 것은 아쉬울 따름. 배영수와 고작 2살 차이이다.

2013 시즌 넥센 히어로즈의 1군 불펜코치로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방화로 시청률을 올리는 불펜진을 보며 마음 고생이 많았다. 시즌 도중 친정팀으로 복귀한 송신영은 김수경에게 불안하면 니가 나와 던지라고 했다 카더라.

사실 별다른 은퇴식 행사도 치르지 않았기에[46], 몸만 꾸준하게 관리한다면 플레잉 코치로 복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히어로즈 팬들이 많았다. 시즌 종료를 앞두고 이강철[47] 수석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연습투구를 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4. 고양 원더스 시절

파일:attachment/김수경(투수)/Exampㅇlㅇe.jpg

2013 시즌 종료 후, 고양 원더스 소속 선수로 현역에 복귀했다. 구단에서는 올 시즌 중 성대한 은퇴식을 치러 주겠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제안했었지만 선수 복귀 의사가 있었기 때문에 은퇴식을 거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구단에서는 넥센 소속 선수로 복귀할 것을 권유했지만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면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라고 말하며 고양 원더스로 갔다. 김성근 감독 인터뷰 참조
넥센에서 현역 복귀해도 됐을 텐데, 고양 원더스에 입단하는 이유는 뭔가.
사실 현역에서 물러날 때, 구위에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자신감이 충분하지 않다. 자신감이 없는 상태에서 프로에 뛰어드는 건 다소 무리라 생각했다. ‘야구’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고. 넥센 구단에선 “네가 현역으로 복귀한다면 우리 팀에서 뛰라”며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하셨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자신이 없는 상태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넥센에서 뛰는 건 부담을 드리는 일이라 생각했다. 일단 구위를 회복하는데 집중할 생각이다. 그런 다음에 프로 무대로 다시 뛰어들지 판단하는 게 맞지 싶었다.
- 박동희 인터뷰 중에서



2014년 2월 11일 일본 독립리그 팀 가가와 올리브가이너즈와의 연습경기에서 3.2이닝 2피안타 4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김성근 감독은 공끝이 살아나고 있으며 날이 따뜻해지면 140km 정도는 우습게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즌 들어와서는 그리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구위도 폼도 회복하지 못한 상태가 이어졌다.

2014년 7월 14일 BCS 베이스볼 퍼포먼스에 찾아와서 점검을 받았다는 페이스북 글이 떴다.

2014 시즌 성적은 10경기 등판해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6.83. 시즌 후 고양 원더스가 해체되면서 소속팀이 없는 선수가 되었다.

재활 훈련을 하면서 프로에 복귀하겠다는 의지를 계속 불태웠으나, 결국 2015년 10월 26일 정식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5. 국가대표 경력

5.1.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표

2000 시드니 올림픽 야구대표팀에 선발되었고 쿠바전에 선발 등판하여 호세 콘트레라스와 선발 맞대결을 펼친다. 5이닝까지 쿠바 타선을 2안타로 틀어막았지만 6회 갑자기 난조를 보여 4실점을 하고 만다(박석진이 1점 분식). 사실 현대 투수들이 올림픽에서는 전부 부진하긴 했지만. 그래도 박종호,[48] 박진만,[49] 박재홍,[50] 박경완,[51] 임선동, 정민태 등 한 팀에서만 국가대표팀에 7명이나 뽑혔다는 점은 2000년 현대가 최강의 팀이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52]

[1] 1997년 현대 고졸우선지명자. 프로 기록은 2001년 2경기 3.2이닝 ERA 0.00이 전부이다. 2009년부터 중고등학교 야구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2015년 마산고 코치를 끝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는 묘연한 상황이다. [2] 정작 사진에 있는 저 해에는 10승도 못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2000년대 마지막 투고타저이며 4승 7패를 마크하고 죽을쒔다. 허나, 이듬해 12승을 하며 재기에 성공한다. [3] 김용휘 단장의 뛰어난 선수 선구안을 증명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4] 신인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단일시즌 승률 1위를 선발투수로 달성했다. [5] 현대는 이후 02-04년간 3년 연속 신인왕을 배출하는데, 모두 투수였다(02년 조용준, 03년 이동학, 04년 오재영). 삼청태현의 신인왕 중 타자는 96년 박재홍이 유일하다. [6] 2002년 김진우가 177개로 경신한 다음 2006년 류현진이 204개로 경신했다. [7] 다만 이 당시 최원호의 10승 중에는 구원승 1승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선발투수 전원 10선발승 기록은 2015년에야 삼성 라이온즈의 윤성환- 피가로- 차우찬- 클로이드- 장원삼이 기록하게 된다. [8] 1998 아시안게임 대표팀은 전원 군 미필자로 뽑았다. [9] 흔히 김수경이 2년 후인 2000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로 병역혜택을 받은 걸로 알려져 있었지만 해당 기사를 통해 신인 시절 이미 군 면제를 받았다는게 알려졌는데, 왜 병역을 면제받았는지 사유는 불명이다. 다만 이 시기는 IMF 사태로 인해 군대에 가려는 지원자가 너무 많았던 때라, 징병검사를 받은 사람들 중 조금이라도 결격사유가 발견되면 칼같이 병무청에서 면제 내지는 보충역 처리를 하고 돌려보냈던 시기라서 이상할 것은 아니긴 하다. [10] 당시 19세 2개월 10일. 종전 기록은 롯데 자이언츠 염종석의 19세 6개월이다. [11] 여기에 질려버린 것인지, 외국인 선수를 마무리투수로 기용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는지 현대 유니콘스는 02년의 다리오 베라스(21경기-중도 퇴출, 1승 4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7.33) 이외에는 더 이상 외국인 마무리투수를 영입하지 않는다. [12] 당장 김수경 본인도 한국시리즈 1차전, 2차전, 5차전에 계투 등판을 했고, 당해 3선발 위재영도 3차전, 5차전에 계투로 등판했다. 마지막 6차전에서는 8회에 정민태를 올려버렸으니 말 다한 셈이다. [13] 역사에 남을 타고투저였던 99년에 유일하게 20승을 찍었으며, 당시 중무리로 활약하던 임창용과 함께 리그에서 단 둘뿐인 2점대 평균자책점 투수였다. [14] 8월 30일까지 17승을 기록, 최연소 20승 기록(종전 기록은 83년 이상윤의 22세 8개월 21일, 김수경은 2000시즌 종료일까지 만 21세)에 도전했지만 올림픽이 끝나고 9월 29일부터 재개된 리그전에서 급격히 무너지면서 실패한다. [15] 1999-2001년 동안의 김진웅은 삼성에서도 촉망받는 에이스 재목이었다. 2000년 15승, 136탈삼진(당해 5위)을 기록. [16] 1985 삼성은 김시진 김일융이 무려 25승을 거두었다. [17] 2017 KIA는 20승 듀오( 양현종 헥터 노에시). 모두 타고투저에 기록했다. [18] 이 사진은 2006년 국민체육공단이 주관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기념 핸드프린팅 행사에서 찍은 사진이다. [19] 2000년에는 앞서 5월 18일 광주에서 원정 팀인 한화 이글스의 투수 송진우가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바 있다. [20] 안타깝게도 타이거즈 팬들이 부정하는 이유가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송진우 투수가 기록한 날이 5.18 민주화운동의 기념일인데 하필 완봉패 및 노히트 노런을 당했기 때문이며, 그리고 리그 최초로 한 시즌 두 번이나 기록 당하기 싫어서라는 썰이 있다. 뭐 물론 판단은 개인의 자유다. [21] 현재는 페이지를 볼 수 없다. [22] 7회말 두산이 3:1로 리드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하필 1차전에서 거하게 삽질을 하던 홍원기에게 홈런을 맞는다. 두산 타자들이 이 홈런을 계기로 깨어났고, 정규리그 2위 현대는 결국 3위 두산에 업셋을 당한다. [23] 우선 김시진이 혹사를 잘 시킨다는 문제가 하나 있고, 구속을 짜내는 코칭스타일 문제가 있다. 김시진이 투수코치로 있는 동안 현대 투수들은 3-4년 잘 하다가 갑자기 부상을 입고 부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의 공통점이 구속 좋고 삼진 잘 잡는 파워피처였고, 김수경의 경우와 유사하게 갑자기 구속이 늘어 파워피쳐가 된 케이스가 많았다. [24] 02년 현대의 선발투수들은 모두 평균자책점 4점대를 기록한다. [25] 사족으로 151.1이닝동안 피홈런 25개를 맞았는데 이는 204.1이닝을 던져 이닝 2위를 기록한 임창용(24피홈런, 당해 피홈런 2위)보다도 많이 맞은 것이었다. [26] 06시즌 종료 후 계약이 끝나고 LG 트윈스로 이적한 김재박 감독이 구단에 직접 박명환-김수경 영입을 요청했으나 구단은 박명환만 영입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이 때 김수경을 안 산 건 LG의 패착이 되고 말았다. [27] 계약 첫 해인 2007년 연봉 4억+옵션 1억이고, 옵션 조건 충족 시 계약이 자동으로 2년 더 연장되는 방식이었다. [28] 2000년 이 후 가장 좋은 평균자책점(...) [29] 2007년 8월 2일 롯데전에서 100승을 기록, 27세에 100승 투수가 되었다. 정확히는 27세 11개월 13일. 27세 3개월 2일에 최연소 100승 투수가 된 정민철, 그 다음으로 27세 7개월 23일에 100승 투수가 된 선동열 다음 가는 기록이었다. 지금은 이 사이에 김광현(27세 9개월 2일)이 있다. [30] 당시 박노준 단장이 저비용 고효율 팀을 목표로 내걸고 송지만, 이숭용 등 베테랑 고액연봉자들의 연봉을 모두 삭감해버렸고, 이 과정에서 현대 투수진의 정신적 지주였던 정민태는 구단과의 갈등 끝에 방출 통보를 받았고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으나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쓸쓸히 은퇴하고 만다. [31] 사실 김수경의 FA 계약은 1+2였기 때문에 구단이 해체 후 재창단 된 이상 계약 자체가 연장되지 못 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12승에 평균자책점 3.88이라는 나름의 호성적에도 불구하고 긴축경영이 이어지며 결국 4억원에서 15% 삭감된 3억 4천만원에 재계약한다. [32] 21세기 들어서 제주도에서 스프링캠프를 진행한 세 팀 중 하나다. 첫 번째는 유승안 감독이 막 부임했던 2003년의 한화 이글스였는데 난로를 피워도 추운 마당에 유승안 감독이 한겨울 내내 속옷만 입히고 훈련을 시키는 등(...) 온갖 기행을 많이 저질렀고 그 탓에 스프링캠프 부상자가 속출했다(...). 다만 한화의 제주도 전지훈련은 지원이 미비했던 구단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행동이었으며 유승안도 어찌 보면 구단의 독단적 행정으로 인한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2008년의 우리 히어로즈였는데 이쪽은 해외로 나갈 자금 형편이 도저히 안돼서 어쩔 수 없이 국내 스프링캠프를 제주도에서 진행했다. 세 번째는 2021년의 SSG 랜더스였는데 여기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해외 스프링캠프 진행이 어려워져서 제주도에서 캠프를 진행했다. [33] 훗날 밝히기를 배영수는 은퇴까지 고려했다고. 당시 배영수는 1승 12패를 기록했다. [34] 김시진이 하도 김수경에 대해서 평가를 받았는데 김수경이 무릎 수술 이후로 구위가 떨어졌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그대로 콜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민태 코치는 아예 이걸 모르고 있었나보다. 먼저 알게 된 것이 정명원 2군 투수코치가 보고 바로 눈치챘다고. [35] 토미 존 서저리 수술을 받은 그 배영수보다도 못 나오는 수치였다. [36] 롯데팬들이 홈런이라고 소리를 왕창 질렀는데 이때 심판들이 홈런으로 인정. [37] 만약 구원 투수라면 선발승과 구원승에 대한 기록이 달라지며 4이닝만 던져도 승리 투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선발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최소 5회를 채워야 승리 조건을 달성할 수 있었다. [38] 팀 고참이던 송신영 마저 LG 트윈스 15억에 팔려간 상태여서 투수들이 엄청 부진했었다. [39] 이날 강정호가 연장전 포수로 뛰었다. [40] 피안타율이 0.248인데 득점권 피안타율은 0.100이다. [41] 위에 서술하다시피 1군에서 어린 투수들을 키우고 싶다는 김시진 감독에게 어필을 했으나 쌩까고 다른 팀 가서 잘해 라고 무시를 했다. 이 때는 아무런 연수 없이 정민태가 3년 내내 투수 코치를 했었다. [42] 이날은 두산 베어스를 상대하여 두산의 선발 더스틴 니퍼트를 상대하여 넥센 선발 브랜든 나이트 신고선수 서건창과 신인 한현희가 선전하며 6:2 역전 승을 했다. [43] 무기한 2군 생활로 이 후 주장은 이택근에게 넘어간다. [44] 초반부터 나지완에게 2루타를 맞자마자 팬들을 놀래켰다. [45] KBO 올스타전 이 후 팀 뎁스가 얇다 보니 DTD를 하지 않나, 심판한테 따지다가 퇴장을 당하지를 않나 여튼 다산다난 했던 넥센의 2012년이였다. [46] 비슷한 시기에 은퇴를 선언한 강병식의 경우 2013년 7월 7일 목동 구장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이날은 넥센이 LG를 개박살을 내며 강 코치의 은퇴식 승리를 짜릿하게 만들어줬다. [47] 이강철 코치는 넥센에 와서 김병현, 김병현 외에는 나머지 투수들의 폼을 건들이는 것 보다 구질을 전수하거나 좀 더 지도를 하는 것 외에는 뭐라하지 않는 타입의 시절이였다. [48] LG 시절 방위복무를 통해 군 문제를 해결했다. [49] 고교 시절 무릎 부상으로 면제 판정을 받았고 올림픽 직전 병역 비리에 연루되면서 병역 면제가 취소되었으나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로 병역특례를 받았다. [50] 1998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이미 병역특례를 받았다. [51] 쌍방울 시절 방위복무를 통해 군 문제를 해결했다. [52] 현대는 그 해 골든글러브 또한 5개를 가져간다. ( 임선동, 박경완, 박종호, 박진만, 박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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