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容徽
( 195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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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야구위원회 2008년 제1차 이사회 당시 모습. 왼쪽 정장을 입은 이가 김용휘 현대 유니콘스 사장. 오른쪽 야구 점퍼를 입은 사람은 하일성 KBO 사무총장.
현대 유니콘스 김용휘 사장은 국내 프로야구 사상 손꼽히는 유능한 프런트였다.
- SPORTS2.0 제 96호 해당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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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현대 유니콘스 사장.
한국 스포츠에서 유능한 프런트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경동고등학교(24회)[1]와 국민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78년 현대건설 총무부에 입사했던 그는 "운동부를 좀 맡아 봐라"라는 상부의 지시로 1978년 7월부터 현대건설 배구단 관리를 맡게 된다. 그가 운영에 참가하면서 그 해 11월에 3차 실업배구연맹전을 우승했다. 1980년 현대건설이 현대 농구단 운영을 담당하게 되자[2] 당시 최고의 대어인 이충희 스카우트를 담당해 결국 영입에 성공한 전력도 있다.
이후 역도단 등을 관리하다 본격적으로 전문 스포츠 경영인이 된 것은 1996년 현대 유니콘스를 창단하고 초대 단장으로 임명되면서 부터이다.
대략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주인공인 백승수 단장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2. 행정 경력
3. 현대 유니콘스 사장
1990년대 초반 국내 굴지의 재벌인 현대그룹이 프로 야구단을 창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만 이미 프로 야구팀을 운영하고 있던 여타 경쟁 그룹들의 견제로 프로 진입은 무산되고[3] 일단 실업야구 팀인 현대 피닉스를 창단하게 된다.
그리고 1996년 현대그룹이 450억원을 들여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 현대 유니콘스로 창단하는데 초대 사장에 정몽헌 구단주의 최측근 인사였던 강명구 현대전자 전무를 임명하고 초대 단장에 현대 피닉스 운영을 총괄했던 김용휘를 임명했다.
당시 현대는 선수층이 열악했던 하위권 수준의 태평양의 전력을 그대로 인수했기에 김용휘 단장은 창단 초기부터 선수단 뎁스 강화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준족 외야수 전준호, 초특급 포수 박경완, 좌완 강속구 마무리 투수 조규제, 스위치 히터 2루수 박종호, 1990년대 대학야구 최고 투수 임선동 등을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아울러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경산 볼파크만이 가지고 있던 실내 연습장을 현대도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주장하며 당시로서는 국내 최고의 연습 시설을 가진 원당 연습구장의 신설을 주도했다.
그 결과 창단한 지 3년 만인 1998년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동시에 이사에서 상무로 승진했다.
단장으로서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린 그는 2001년 7월 야구단 사장[4]으로 승진했고 그 해 시즌이 끝날 때까지 사장과 단장을 겸임했다. 그러다가 2002년부터 정재호 부장이 단장으로 승진하면서 해체시까지 대표이사 김용휘 - 단장 정재호 투톱 체제가 되었다.
3.1. 프런트로서의 능력
현장이 눈앞의 성적을 본다면, 프런트는 그보다 멀리 내다보고 팀을 운영해야 한다.
기본적인 철칙은 "현장과 프런트는 별개의 업무를 담당해야 된다. 선수 영입과 신인 스카우트의 문제는 프런트가, 경기 내적인 문제는 현장이 담당해야 팀이 돌아간다."라는 것이다.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고 처음 시작한 현장 업무가 바로 "연봉 고과기준"을 확실하게 확립한 것이다. 연봉 고과기준을 선수들에게 공개하고, 구단이 이러이러한 기준으로 선수 연봉을 책정하니 이에 대해 선수들도 연봉 협상 등에서 "일방적인 주장"이 아닌 토론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특이하게도 관중 동원과 관련해서도 연봉 고과기준 점수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 이 또한 현대 유니콘스가 처음 도입한 것이다. 프로야구 뿐만 아니라 국내 스포츠팀들의 일방적인 프로팀의 연봉 협상 문화를 생각하면 굉장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리고 선수단의 장점과 약점, 문제점을 파악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단적인 예로 1997년 1번타자 전준호를 트레이드로 롯데에서 데려 왔지만 그 해 6위에 머물렀다. 시즌이 끝나고 김용휘 사장이 김재박 감독에게 " 팀이 우승하기 위해서 포수가 필요합니까 아니면 4번 타자인 1루수가 필요합니까??"라고 물었다. 김재박 감독이 "포수가 더 보탬이 됩니다."라고 대답하자 김용휘 사장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합니까?"라는 말을 했었다. 당시 현대에는 둘 다 필요했지만 1루수에는 장타가 받쳐주는 김경기가 있었기 때문에 포수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을 던졌을 때 이미 김용휘 사장은 판단을 내렸던 상황이었고 자신의 판단이 확실한지 현장에 확인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경영난이었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박경완을 이근엽+김형남+9억으로 트레이드해오면서 창단 첫 우승을 하고 팀의 전성기를 열게 된다.
또한 선수단 지원에도 아낌없이 지원해줬는데 현대가 원정경기 때 사용하는 호텔은 연간계약을 맺어 저렴한 값에 숙박을 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5] 유니폼도 미즈노 사에서 스폰서를 받아서 당시 최고 수준의 실착유니폼을 가지게 된 것도[6] 그의 공이다. [7]
당시 42살의 생초짜였던 김재박을 감독직에 앉힌 것도 그의 일이었다. 김재박을 감독에 임명하면서 했던 말은 프런트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신이 감독이고 내가 단장이다. 고유 영역은 서로 건드리지 말자. 코치나 선수를 쓰는 건 당신 마음이다. 대신 선수들을 스카우트하거나 트레이드하는 건 내 권한이다. 선수가 필요하다면 계획서를 내라. 계획서대로 선수를 뽑아주는 게 프런트의 일이다. 능력이 이만큼밖에 되지 않는 선수들로 성적을 내지 못했다면 그건 프런트 책임이다. 성적이 나쁘다고 감독의 목을 치진 않는다. 그 걱정은 하지 마라. 좋은 선수를 주지 못한 사장이나 단장이 갈려야지 왜 감독이 옷을 벗어야 하나. 다만 선수는 구단의 재산이다. 구단에 돈이 없으면 팔아먹기라도 해야 한다. 이 부분은 절대 당신이 건드려선 안된다."
이후 김재박은 현대를 10여년을 이끌면서 단 한 번도 프런트 업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대 출신 코칭 스태프는 이상할 정도로 다른 구단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도 김용휘의 능력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대표적으로 LG로 이적한 후의 김재박이나 김용달 등을 봐도 알 수 있다. 프런트가 알아서 선수단 구성과 관리를 도맡아서 다해주고 코칭스탭은 철저하게 현장 경기 운영만 전담하던 현대의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가 코치가 모든 것을 알아서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다른 팀으로 이적하면서 적응을 하지 못한 것이다.
2001년 이후 모기업의 지원이 사실상 끊어지고, 1차 지명도 못하는 막장 상황에서도 적절한 트레이드와 KBO FA 제도보상 선수, 신인 육성으로 팀을 우승 2회 포함 4강권으로 유지한 점 때문에 명단장으로 칭송받는다. 프런트와 현장의 역할 분담 등 국내에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식 단장 야구에 가장 근접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3.2. 비판
하지만 비판 여론도 있다. 구단 프런트의 임무 분담이 명확하긴 했지만 더불어 사장이 현장에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평가도 존재했다. 선수단 기용에 있어서 특히, 베테랑 선수와 신인 선수 기용 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모습들은 보수적인 야구계에서 바라봤을 땐 썩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8]대표적으로 주전 기용을 요구했던 신인이 김수경, 이택근, 황재균 등이다. 특히 김수경의 경우 입단 첫해인 1998년에 김용휘는 신인이었던 김수경을 전지훈련에 데려가라고 요구했지만, 김재박은 김수경의 기량이 떨어지고 선수단 정원이 다 찼다며 거절. 이에 김용휘는 1명분 경비를 더 내줄테니까 김수경을 데리고 가라고 했고, 결국 그 해 김수경은 신인왕을 수상할 정도로 활약했다.
본인도 신인 선수 기용 문제에 대해서 관여한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것이 본인 입맛 때문이 아닌 구단과 선수의 상품 가치를 높이고 장기적인 구단의 미래를 고려해서라고 밝혔다. 그러나 2005년 말 상무에서 전역한 이종욱을 곧바로 방출하고 두 달 가까이 쉬쉬한 것은 빼도 박도 못할 흑역사다.[9]
현대 유니콘스의 르네상스를 이끈 장본인이었고 쌍방울 레이더스에 현금과 박정현, 가내영 등을 주고 박경완, 조규제, 김광림 등을 영입하여 현대 유니콘스 왕조를 건설했으나한편으로 무지막지한 현질로 선수들을 싹쓸이하던 삼성 라이온즈와 함께 프로야구 전체의 전력 불균형을 불러와 KBO 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듣는다.
마케팅 부분에 있어서도 약점을 드러냈는데 현대가 좋은 성적을 거둠에도 팬층은 두텁지 않았으며 지역 연고 문제에 있어서도 확실하게 일처리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 꼽힌다. 다만 기습적인 연고지 이전은 현대그룹 차원의 결정이었고 이후 정주영 명예회장의 사망, 왕자의 난, 정몽헌 회장의 자살 등으로 모기업이 흔들리면서 계획이 모두 어그러졌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불가항력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애초에 현대그룹은 서울 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200억 정도를 투자해서 목동 야구장을 최신식으로 리모델링하고 그룹 차원에서 대대적인 야구 마케팅을 계획했지만 모기업이 흔들리면서 야구단은 완전히 방치되고 모든 게 무산됐다.
4. 기타
- 2008년에 한 인터뷰에 따르면 구단에서는 원래 문학 야구장을 쓰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문학 야구장 설계를 3번이나 바꿨다고 한다. 그렇게 건설하던 중에 현대그룹에서 연고 이전을 하기로 결정했고 선수단뿐만 아니라 구단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지만 결정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참고로 이 양반 밑에서 프런트 직원으로 일한 사람 중 1명이 바로 염경엽 前 넥센 히어로즈 감독이다. 당시 김용휘는 염경엽을 두고 머리가 비상하고 집념이 대단하다고 했다. 김대호 MK스포츠 국장이 회고하는 염감독의 프런트 시절
- 2018년 장모상을 당했다.
5. 관련 항목
[1]
백인천 감독이 고교 선배(17회)다. 김용휘의 동기생으로
남상태 前
대우조선해양 대표이사와 이동희 前
포스코인터내셔널 대표이사가 있다.
[2]
원래 1978년에 창단해
현대중공업에서 관리했다.
[3]
이 과정에서 현대그룹은 당시 프로야구에 관심을 보이고 있던
쌍용그룹,
진로 등 여타 4~5개 재벌을 끌여들여서 독자 리그를 창설하는 방안을 모색하나, 현실적인 제약에 부딪혀서 무산된다. 일단 야구장이 없잖아
[4]
현대그룹 內 직급은 전무.
[5]
실제 하루 숙박비 20만원대의 방을 6만원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2007년에도 이 계약 덕분에 현대가 힘들 때 지원을 쭉 해주던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이 이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고. 실제로 이런 사실을 모르는 다른 7개팀 팬들에게 돈 없다는 팀이 호텔 쓰면서 KBO 돈 낭비하냐고 욕먹었다.
[6]
현대 실착 유니폼을 거래해 본 사람이라면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히 수준이 높다는 걸 안다.
[7]
이숭용의 이야기에 따르면 비싼 일제 미즈노 유니폼은 1군 선수들만 주고,
2군은 평범한 국산이었다고 한다. 일부러 1군과 2군 사이에 격차를 둬서 2군선수들의 분발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실제 미국에서도 메이저리거는 천연소가죽 허리띠를 주고, 마이너리거 한테는 중국산 인조가죽 허리띠를 주는 구단도 있다. 다만 이에 대해
현대 유니콘스의 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8]
이러한 프론트 감독 구분론의 대척점에 선 이는 다름 아닌
김성근 감독과
삼성 라이온즈 사장 시절의
김응용 감독. 김성근 감독이 가는 곳마다 프론트와 대립을 했던 이유는 감독이 알아서 할테니 프론트는 일체 감독에게 간섭치 말고 지원만 해 주고 성적이 안 나올 때 책임을 물어라는 주장 때문이었고 사장 시절 김응용이 애제자
선동열 당시 삼성 감독에게 보여준 행보는 그야말로 김성근이 원하는 프런트의 모습. 어떻게 보면 대표 라이벌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김성근 감독이 성적부진과 선수단 장악 실패 등 순수하게 본인 실책으로 잘린 곳도 삼성이란 점도 아이러니하다. 이 부분은 본인도 자서전에서 삼성은 최고의 대우를 해줬으나 자신의 실책이 컸다며 지금의 삼성으로 간다면 잘할텐데라고 아쉬워했다. 여기서 말하는 '지금'은 2009년 초다. 실제로 2011년부터 삼성은 왕조를 건설했다지만
야만없.
[9]
2005년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
정수성을 믿어서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고교 졸업 당시 2차 2라운드에 지명되었고 고교, 대학 시절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이종욱과 2차 마지막 라운드(12라운드) 지명으로 프로에 발을 디딘 정수성은 애초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종욱 방출은 이후 팀이 넥센 히어로즈로 넘어오면서 전준호의 후임 리드오프를 찾는 데에 애를 먹는 원인이 되었고 2012년
서건창이 등장하고 나서야 비로소 해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