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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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高詡(? ~ 344)
전연의 인물. 자는 불명. 유주(幽州) 요동군(遼東郡) 출신.
2. 생애
영가의 난이 일어나자 집을 떠나 은거하였다.건무 원년(317년) 4월, 건강(建康)에서 진왕(晉王)을 자칭한 낭야왕 사마예가 요동에서 할거하던 모용부의 대인 모용외에게 사자를 보내어 용양장군, 대선우로 삼고 창려공(昌黎公)에 봉하였다. 하지만 모용외는 사마예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꺼려 받지 않으려 했는데, 이를 들은 고후가 말채찍을 잡고 말을 달려 모용외를 만나 말했다.
"패왕(霸王)의 자질은 의(義)가 없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지금 진나라 황실이 쇠하였다고는 하나 아직 민심이 이를 따르고 있으니, 의당 강동으로 사자를 파견해 받드는 모습을 보이십시오. 그런 후에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여러 부락들을 평정한다면 누가 감히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패왕의 자질을 갖추는 길이옵니다."
모용외는 고후의 말을 따랐고, 그를 마음에 들어하며 낭중령(郎中令)으로 삼았다.함화 8년(333년) 6월, 모용외 사후 요동공의 작위를 이은 모용황이 고후를 현도태수로 삼았다.
함화 8년(333년) 11월, 모용황의 동생인 모용인이 모용황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평곽(平郭)에서 거병하였다. 모용황은 고후를 광무장군으로 삼아 5,000여 군사를 주고, 건무장군 모용유(慕容幼), 모용치(慕容稚), 광위장군 모용군(慕容軍), 영원장군 모용한(慕容汗), 사마 동수와 함께 평곽을 공략케 하였다. 그러나 고후의 토벌군은 문성(汶城) 북쪽에서 모용인에게 대패하여 모용유, 모용치, 모용군이 포로로 사로잡혔고, 본래 모용인과 인연이 있던 동수는 적에게 투항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전(前) 대사농 손기(孫機)와 양평현령 왕영(王永)이 요동성을 들어 모용인에게 바치니, 고후는 요동성을 빠져나온 동이교위 봉추(封抽), 호군 을일, 요동상 한교(韓矯)와 더불어 요동에서 철수하였다.
함화 9년(334년) 11월, 모용황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을 치기 위해 양평(襄平)에 이르자, 요동성 내에서 왕급(王岌)이 밀서를 보내 투항을 청하였다. 모용황은 투항을 받아들인 후 진격하여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요동성을 탈환하였고, 모용인의 부하인 동이교위 적해(翟楷)와 요동상 방감(龐鑒)은 제각기 홀로 말에 올라 도망치면서 거취(居就), 신창(新昌) 등 여러 현들도 아울러 항복하였다. 요동성에 입성한 모용황이 모용인에게 호응한 죄를 물어 요동성의 백성들을 장차 생매장하여 죽이려 하니, 고후가 나아가 간했다.
"요동의 반란은 그들 본래의 뜻이 아니라 모용인의 흉악한 위세에 눌려 마지못해 따랐을 뿐입니다. 지금 그 원흉이 아직 멀쩡히 살아있고, 우리는 성을 얻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마당에 그러한 일을 자행한다면 앞으로 성 내부에서 투항해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모용황은 고후의 말에 동의하여 갱살 명령을 취소하고, 두군(杜群)을 요동상으로 삼아 요동의 백성들을 위로케 하는 한편, 요동의 호족들만 도읍 극성(棘城)으로 옮겨 자신의 감시 하에 두었다.함강 2년(336년) 정월, 모용황은 장차 모용인을 치기 위해 고후를 불러 의논하였다. 고후가 말했다.
"모용인이 반역하여 임금과 친족을 저버리니, 신령과 백성들이 분노함에 따라 일찍이 언 적이 없던 바다가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킨 이래로는 세 차례에 걸쳐 얼었습니다. 또, 모용인은 오로지 육로만 방비하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그를 습격하라 이르는 것입니다."
군신들은 바다가 얼어있다고는 해도 그 위를 건너는 것은 위험하다 반대하였지만 모용황은"내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이를 감히 저지하려는 자는 베겠다!"
라 선언하고, 창려(昌黎) 동쪽에서부터 얼어붙은 바닷길을 이용해 진군하였다. 평곽성 7리 밖으로 무사히 진입한 모용황의 군대를 본 모용인은 별동대인 줄로만 알고 전군을 성 서북쪽으로 내보내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모용군이 갑자기 휘하 부대를 이끌고 모용황에게 투항하면서 모용인의 병사들은 모두 동요하였고, 이 기회를 이용해 총공격을 감행한 모용황에 의해 모용인의 군대는 궤멸하여 흩어졌다. 모용인은 부하들의 배신으로 붙잡혀 모용황에게 자결을 명령받고 사망하였다. 모용인을 평정한 모용황은 여음후(汝陰侯)로 봉하고 좌장사로 승진시켰다가 얼마 뒤에 요동내사로 삼았다.함강 2년(338년) 5월, 후조의 천왕 석호가 대군을 동원해 전연을 정벌하려 하니, 전연의 사람들이 모두 동요하여 불안에 떨었다. 모용황이 고후에게 후조군을 막을 방도를 묻자, 고후가 답했다.
"조나라의 병사들은 정예이지만 우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굳게 지키면서 응전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후 후조군이 수도 극성을 포위하여 개미떼처럼 성벽에 달려들었지만
모여근,
모용각 등이 단단히 방어한 덕에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후 고후는 좌사마로 옮겨졌다.건원 2년(344년) 정월, 고후가 모용황에게 나아가 말했다.
"우문부는 강성하여 지금 취하지 않는다면 필시 나라의 우환이 될 것입니다. 정벌한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나, 그러하지 않으면 불리해질 것입니다."
이에 모용황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우문부 정벌에 나섰고 고후는 이에 종군하였다. 고후는 출진하면서"내가 이번 원정에 참여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나, 충신으로서 이를 피하지 않겠다."
라 말하며 자신의 처에게 작별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그녀에게 사람을 보내 집안일을 알아서 처리하라 하였다. 모용황의 우문부 정벌은 대성공이었지만, 고후는 전투 중 유시에 맞아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