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8 16:58:23

모여근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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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慕輿根
(? ~ 360)

전연의 인물. 합노성(榼盧城)에 거주하던 선비족 부락의 대인이었으나 모용부에 복속되어 전연의 장수로 활약했다.

2. 생애

기마사격에 능하여 모용황이 사냥에 나설 때마다 그를 수행하여 따라다녔는데, 어느 날 모용황이 양 한 마리가 높은 절벽 위에 서있는 모습을 보고 좌우의 수행원들에게 맞춰보라 지시하였다. 수행원들은 아무리 활을 쏘아도 양을 맞출 수 없었으나, 이윽고 모여근의 차례가 되었을 때 모여근은 단 한 발만에 양을 명중시켰다. 모용황은 그를 심히 범상치 않다 여기고 장수로 삼았다.

함강 4년(338년) 5월, 후조의 천왕 석호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전연을 정벌하자, 전연의 36개의 성이 후조군에게 투항하고 낙랑(樂浪), 기양(冀陽) 등의 백성들도 전연의 지방관을 쫓아내거나 죽인 뒤 석호에게 호응하였다. 후조군이 어느새 전연의 도읍인 극성(棘城)까지 밀고 들어오니, 모용황은 요동으로 도망쳐 후일을 도모하려 하였다. 이때 모여근이 나아가 말했다.
"조나라는 강대하고 우리는 약소하여, 만약 대왕께서 물러나신다면 조나라는 더욱 기세를 올려 진격할 것입니다. 적이 이곳을 차지하여 계속 진군한다면 그 군대는 더욱 강해질 것이고, 식량 역시 이전보다 많이 확보함에 따라 저희로서는 막을 길이 없어집니다. 적은 분명 대왕이 도망가기만을 바라고 있을 터인데, 어찌 구태여 적의 바람대로 움직이려 하십니까! 지금 굳게 지키고 농성한다면 오히려 아군의 사기는 100배가 될 것이고, 적의 공격을 버티다보면 파고들 틈도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 싸우기도 전에 도망친다면 그때는 재기할 가망조차 없습니다!"
이에 모용황은 도망을 중지하였으나 안색에 두려운 빛은 여전하였다. 이후 후조군이 이르러 극성을 포위하고 개미떼처럼 성벽에 달라붙어 공략을 시도하였다. 모여근, 모용각 등은 성벽 위에서 올라오는 후조군을 손수 베면서 밤낮으로 열흘 동안 싸워 적의 공격을 막아냈고, 무리한 공성으로 이내 지쳐버린 후조군은 하는 수 없이 퇴각하였다. 후조군이 돌아가자 이전에 석호에게 호응했던 자들은 모두 도망쳐 고구려로 망명하였고, 이로써 전연은 다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모용황은 전투에서 공을 세운 모여근을 포상하면서 절충장군으로 승진시켰다.

함강 5년(339년) 4월, 전군사 모용평(慕容評), 광위장군 모용군(慕容軍), 탕구장군 모여니(慕輿泥)와 함께 후조의 요서군을 공격하여 1,000여 호를 약취하고 돌아왔다. 후조의 진원장군 석성(石成), 적노장군 호연황(呼延晃), 건위장군 장지(張支)가 돌아가는 전연군을 추격하자, 모여근 등은 곧바로 반격하여 적을 격파하고 호연황과 장지를 참수하였다.

건원 2년(344년) 2월, 모용황이 우문부 우문일두귀를 토벌하기 위해 친정을 선포하고, 모용군, 모용각, 모용한, 유패(劉佩), 모용패 등과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눠서 진군하였다. 우문일두귀는 남라(南羅)의 대인 섭야간(渉夜干)을 파견해 전연군을 막았으나, 모용한의 활약으로 섭야간을 전사하였고 나머지 우문부의 군사들은 모두 전의를 상실하여 도주하였다. 전연군은 그대로 우문부의 도읍까지 함락시켰고, 우문일두귀는 막북(漠北)으로 도망쳐 객사함으로써 우문부가 멸망하였다.

영화 2년(346년) 정월,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모용군, 모용각, 모여근과 17,000여 기병을 거느리고 부여를 정벌케 하였다. 모용준과 모용각의 지휘 아래 모여근은 휘하 장수들을 이끌고 직접 적의 화살과 돌을 막아내며 앞으로 나아가 일거에 적진을 무너뜨렸고, 부여왕 과 부락민 50,000여명을 포로로 잡고 귀환하였다.

영화 5년(349년) 5월, 국경 지대를 방비하던 평적장군 모용패가 도읍 용성(龍城)으로 달려와 연왕 모용준에게 후조 정벌을 주장하였다. 이에 모여근과 오재장군 봉혁, 종사중랑 황홍 모두 찬성하는 의견을 표시하니, 연왕 모용준은 마침내 정벌을 결심하여 정예병 200,000여 명을 선발하고 계획을 논의하였다.

영화 6년(350년) 3월, 연왕 모용준의 친정에 종군하여 후조의 계(薊)를 함락시켰다. 연왕 모용준은 계를 도읍으로 하고, 이어서 후조의 정동장군 등항(鄧恒)이 수비하는 노구(魯口)를 향해 진군하였다. 전연군이 청량(淸梁)에 이르렀을 때, 등항의 장수 녹발조(鹿勃早)가 수천 명의 병력으로 전연군의 진영을 야습하였다가, 전봉도독 모용패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물러나 대치하였다. 이때 녹발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전연군 진영에 절반 가까이 들어왔었기에, 연왕 모용준은 불안하여 모여근을 불러 물었다.
"적의 기세가 강성한데, 일단 퇴각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모여근이 안색을 고치고 답했다.
"우리의 병력이 많으나 적의 병력은 적으므로, 적은 정면 승부에서는 승산이 없는 것을 알고 야습한 것일 뿐입니다. 저희들은 도적을 토벌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고, 지금 도적이 눈 앞에 있는데 어찌 주저하십니까! 대왕께서 그냥 누워계시기만 하셔도 신들이 대왕을 위해 적을 격파해 보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던 모용준은 군영을 나와서 내사 이홍과 함께 인근의 높은 무덤 위에 따로 주둔하였다. 모여근은 좌우에 정예병 수백 명을 이끌며, 중앙의 군영문을 박차고 나와 녹발조의 진영으로 돌격하자, 무덤 위에 주둔해있던 연왕 모용준도 이홍에게 기병을 주어 모여근을 원호하게 하였다. 녹발조는 패하여 40리 가량 전연군의 추격을 받으면서 도망쳤고, 홀로 목숨만 겨우 보존할 수 있었으나 데리고 온 병력은 대부분 전사하였다. 연왕 모용준은 일단 계로 퇴각하였고, 모여근은 이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전중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영화 6년(352년) 5월, 보필장군 모용평과 장수 후감(侯龕)이 정예 기병 10,000기를 거느리고 염위의 수도인 업(鄴)을 공략하였지만 염위의 대장군 장간(蔣幹)이 굳게 막아 한 달째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연왕 모용준은 모여근과 광위장군 모용군, 우사마 황보진 등에게 20,000여 군사를 주어 모용평의 업성 공략을 돕게 하였다.

영화 6년(352년) 8월, 대장군 장간이 몰래 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와 동진의 영역인 창원(倉垣)으로 도망쳤다. 이로 인해 업성은 금방 함락되었고, 연왕 모용준은 염위를 멸망시킨 공으로 모여근을 광위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영화 6년(352년) 10월, 중산(中山)의 무극현(無極縣)에서 소림(蘇林)이 천자를 칭하며 거병하니, 모용각이 소림을 공격하였고, 연왕 모용준도 모여근을 보내 모용각을 돕게하였다. 모용각과 모여근은 소림을 참수하여 그 세력을 멸하였고, 이 공으로 모여근은 영군장군에 제수받았다.

광수 2년(358년) 3월, 경소제 모용준이 사도 모용평을 보내 동진과 전연 사이에서 투항과 배신을 반복하던 자칭 상당(上黨)태수 풍앙(馮鴦)을 토벌하였으나, 모용평이 이번에도 한 달째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경소제 모용준은 또 모여근을 보내 모용평을 돕게 하였다. 당시 모용평은 느긋하게 성 아래 주둔하여 교전하지 않고 있었는데, 모여근이 도착해 급히 나아가 싸우려 하니, 그를 말리며 말했다.
"풍앙이 성을 굳게 지키고 있으니 진정하는 편이 좋을 것이오."
모여근 답했다.
"아니 됩니다. 공께서 성벽 아래에 주둔하셨으면서 한 달이 넘도록 한 차례의 교전조차 하지 않으시는 바람에 적들은 우리의 국력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오신하여 요행만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저의 군사가 당도한 이래로 형세가 바뀌어 적들은 두려워하고 있으며, 모두 마음이 떠나 아직 계책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바로 공격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후 급히 나아가 공격하자 과연 풍앙의 무리는 서로 갈등하다가 패하여 모두 전연에 항복하였고, 풍앙은 도망쳐 야왕(野王)의 여호(呂護)에게 의지하였다.

건희 원년(360년) 정월, 경소제 모용준이 붕어하고 태자인 헌무제 모용위가 황위에 올랐다. 모여근은 경소제 모용준의 유언에 따라 대사마 모용각, 사공 양무, 사도 모용평과 더불어 나란히 국정을 보정하였다.

건희 원년(360년) 2월, 헌무제 모용위가 모용각을 태재로 삼아 홀로 조정을 이끌게 하고, 모용평을 태부, 양무를 태보, 모여근을 태사로 삼아 모용각을 보정케 하였다.

남에게 굽히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던 모여근은 문명제 모용황, 경소제 모용준 재위기에 세웠던 공훈을 자랑하고 오만하게 굴면서 태재 모용각에게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았다. 당시 가족혼 태후가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에, 모여근은 모용각에게 이에 대해 건의하며 말했다.
"지금 주상께서 아직 어리시고, 모후께서 정전(政殿)에 깊이 간섭하고 계십니다. 전하께서는 의당 양준 제갈원손에게 일어난 변고를 돌이켜 스스로의 신변을 보전키 위해 어떻게 해야할지 심사숙고하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천하를 평정한 것은 전하의 공적이며, 형이 죽고 동생이 물려받는 것은 고금(古今)에 걸쳐 있어왔던 법이었습니다. 따라서 화산(畢山)의 릉에서 선제의 장례가 마쳐지는대로 주상을 폐위시키고, 전하께서 직접 황제로 즉위하십시오. 전하께서 친히 존위에 의함으로써 대연(大燕)을 위해 무궁한 복을 세우심이 옳습니다."
그러자 모용각이 놀라 말했다.
"공은 술에 취하기라도 하였소? 어찌 그런 패역한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소! 나와 공은 더불어 선제의 유조를 받은 마당에 어찌 이와 같은 논의를 하려 하는가? 과거 조나라 자장(子臧)[1]과 오나라의 계찰(季札)은 집안에 재난이 닥쳐 변경에 머무를 때도 임금의 자리를 탐내지 않고 절개를 지켰소. 더욱이 지금 저하께서 후사를 이으시고도 사해(四海)에 근심이 없는데, 유조를 받들어 보정하여야 할 재상이 어찌 사사로이 의논할 수 있는가! 공은 선제의 말씀을 잊기라도 하였는가?"
이에 모여근은 몹시 부끄럽고 두려워 즉시 사죄하고 자리를 떠났다. 오왕 모용수와 비서감 황보진은 이를 듣고 모여근을 주살하라 권했지만 모용각은 듣지 않았다.

모용각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모여근은 무위장군 모여건(慕輿乾)과 함께 모용각, 모용평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가족혼 태후와 헌무제 모용위를 알현해
"태재와 태부가 모반을 꾀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신이 금병(禁兵)을 거느리고 그들을 주살함으로써 사직을 편안히 하겠습니다."
라 고하였다. 가족혼 태후는 모여근의 말을 믿고 이를 허락하려 하였으나, 헌무제 모용위가
"두 공은 국가의 인척이자, 선제께서 발탁하시어 과부와 고아를 도와주는 자들로, 그들은 반드시 배반하지 않으리라. 무엇보다 반란을 꾀하려는 이는 다름 아닌 태사 당신 아닌가?"
라 하고, 가족혼 태후의 허락을 취소시켰다. 또, 모여근은 이전의 도읍이었던 용성을 그리워하여 가족혼 태후와 헌무제 모용위에게 상소하여 용성 환도를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여근이 용성 환도를 주장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용각은 모여근의 반역할 뜻이 점차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판단하여 모용평과 함께 모여근의 죄상을 상주하고, 비서감 황보진과 우위장군 부안(傅顔)을 보내 모여근을 체포케 하였다. 모여근은 그의 처자식, 측근들과 함께 내성(內省)에서 사로잡혀 처형되었고, 그 수급들은 모두 동시(東市)에 효수되었다.


[1] 조선공의 아들인 공자 흔시(欣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