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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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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8년 선수협(당시 선수회) 결성 시도
1.1. 배경1.2. 창단 과정1.3. 최동원 회장의 인터뷰1.4. 구단들의 대응1.5. 난처해진 롯데 구단1.6. 실패 원인
2. 선수협 재결성 시도(1993년, 1996년)3. 1차 선수협 사태 (1999년말~2000년초)
3.1. 1차 선수협 사태의 시작3.2. 창립총회3.3. 선수들 간의 극한 대립3.4. 역풍을 초래한 KBO의 어설픈 대응
4. 2차 선수협 사태 (2000년말~2001년초)
4.1. 2차 선수협 사태4.2. 보복성 트레이드4.3. 선수협 설립을 배신한 선동열?4.4. 선수협을 배신하고 구단편에 선 양준혁?
5. 이호성 회장 시대 (2001)
5.1. 3차 선수협 파동 (외국인 선수 슬롯 갈등)
6. 회장 부재 시기7. 김동수 - 이종범 회장 시대8. 손민한 회장 시대 (2008~2011)
8.1. 선수노조 결성 운동 (2009)8.2. 9구단 창단과 용병 기용에 대하여8.3. 야구게임 초상권 비리 사건 (권시형 비리 사건)
9. 박재홍 회장 시대(2012)
9.1. 신임 집행부의 특별 회계 감사9.2. 2012 올스타전 거부 사태
10. 서재응 회장 시대(2013~2016)
10.1. 임찬규 물벼락 사건10.2. 야구 기록사이트 kbreport 오픈10.3. 비시즌 단체훈련 금지 관련 논란10.4. 선수협이 기득권을 위한 단체이다?10.5. 비시즌 단체훈련과 관련한 선수들의 인권 문제
10.5.1. 운동에만 전념하면 과연 경제적으로 풍요로울까10.5.2. 그렇다면 한국 프로야구선수는 어떨까
11. 이호준 회장 시대 (2016~2017)
11.1. 논란의 중심이 된 메리트 제도11.2. 선수협의 개선안 요구11.3. 장강훈으로 인한 비시즌 훈련 규칙 비판
12. 2차 회장 부재 시대(2018~2019)
12.1. FA 상한선 규제 반발
13. 이대호 회장 시대(2019~2020)
13.1. 판공비 셀프 인상 및 갑질 논란
14. 양의지 회장 시대(2020~2022)15. 김현수 회장 시대(2023~)

1. 1988년 선수협(당시 선수회) 결성 시도

1988년 출범했다가 와해되었던 선수협의 정식 명칭은 '프로야구 선수협의회'였고, 당시 언론에서는 줄여서 선수회라고 불렀다.

1.1. 배경

프로야구로 출범한 이후 시즌을 마치고 난 겨울은 당 시즌의 선수의 값어치를 평가 받는 계약의 기간이다.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는데, 연봉 산정 기준 역시 구단마다 편차가 크고 세련되지 못했다. 때문에 비슷한 실력의 선수라 하더라도 연봉이 들쭉날쭉이었고 구단 형편과 방침에 따라 연봉 격차도 상당했다. 모기업의 규모가 크고, 스타 선수들이 많았던 삼성 라이온즈와 삼미-청보 구단과의 연봉 수준 격차는 컸다. 특히 해태 타이거즈의 경우 83년부터 97년까지 15년간 9번의 우승을 거두고, 거의 매해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했으며, 김봉연, 김성한을 시작으로 이순철, 한대화, 선동열, 조계현, 이강철, 이종범, 홍현우 등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들과 팀의 간판 스타급 선수들도 많았지만 모기업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연봉 수준이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며 아무리 뛰어난 활약을 해도 전년도의 25%까지만 인상이 되는 조건이 있었다. 이러한 사정들이 겹치며 당시 연봉 협상 과정은 요즘보다 더 살벌하고 험악한 분위기였다.

선수들은 자기랑 비슷한 선수는 이만큼 받는데 왜 나는 이것밖에 못받느냐는 등 선수들은 뛰어난 성적을 올렸으니 그에 마땅한 대우를 해주길 원했지만 구단에서는 갖은 핑계를 대며를 대며 최대한 연봉을 안 올려주려 하고, 선수들은 그에 반발해 연봉조정 신청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그제야 구단에서 마지 못해 겨우 재계약하는 일이 매해 겨울마다 벌어졌다.

구단은 "실력이 뛰어나니 그 정도 성적을 올리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우리가 말이 프로지 아직 세미프로 수준이지 않냐." 등 각종 핑계를 댔다. 심지어는 연봉을 못 올려주겠다고 대놓고 협박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오늘날의 넥센 히어로즈만큼이나 자금 사정이 열악했던 해태 타이거즈의 경우 부라보콘 드립까지 나올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니 연봉을 주려면 아까시아껌 몇 개를 팔아야 되는지 아냐, 부라보콘 몇 개를 팔아야 되는지 아냐 롯데는 아파트 짓고 삼성은 컴퓨터 조립하면 되지만.이라는 드립을 쳤다. 심지어 이종범이 신인 첫 해에 양준혁이 1억을 넘게 받는 것을 보고 1억을 요구하자 서울에서의 1억보다 광주에서의 7천만원이 더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말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연봉 협상에서의 진통은 삼미, 청보 등 가난한 구간에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당대 역대 최고의 연봉을 받던 최동원, 장효조가 당시 연봉 협상으로 가장 큰 잡음을 일으켰던 선수였다.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이미 각팀의 레전드이자 간판 스타였던 최동원 장효조는 구단과의 불화로 각팀의 또다른 간판인 김용철, 김시진 등과 함께 맞트레이드 당했으며, 삼성의 레전드임에도 불구하고 은퇴 후에도 삼성 구단은 팬들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장효조를 오랜기간 동안 구단 스태프로 발도 못붙이게 하는 등 감정이 완전히 상한 상태가 되었고, 최동원 역시 롯데에서 코치는 물론 시구조차도 리그 스폰서를 통한 한차례만 있었을 뿐이었다.

선수협 결성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건 1988년 8월 27일 야구선수 김대현의 사망사고로 알려져 있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 소속이었던 김대현은 선배인 이순철[1]과 같이 차를 타고 전주에서 다음 경기가 열리는 서울로 향했는데, 도중에 트럭의 후미에 충돌하는 교통사고가 발생해 운전하고 있던 김대현이 즉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소속 선수가 불의 사고를 당했음에도 해태 구단은 김대현의 유가족에게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았다. 이를 참다 못한 주요 선수들이 선수들의 처우개선을 목표로 삼아 선수협 결성을 시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후술된 바와 같이 김대현 사건 이전에 이미 창단 준비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으며, 때마침 김대현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이 사건을 선수협 결성의 이유라고 갖다 붙이게 된 것이다. 김대현의 사망이 8월 27일에 발생했고 이후 장례식 등 사후 절차가 진행되는데 며칠이 더 걸렸는데, 그 후 2주도 안 되는 짧은 기간안에 협회를 조직하고 회칙을 완성하여 창단총회(9월 13일)를 연다는 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6.10 민주 항쟁 6.29 선언 이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발생해 사회적으로 노조 결성이 활발해지고 있던 시기 즈음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수많은 노동 인권 변호사들이 활약했던 시기이기도 하고. 실제로 선수협 창단 당시 최동원에게 법률 자문을 해주었던 변호사는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법률사무소( 법무법인 부산의 전신)에서 노동 인권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던 문재인 변호사였다.

1.2. 창단 과정

앞서 말했듯 언론에 말한 것과 달리 실제로는 김대현 사건과는 무관하게 이 사건이 생기기 전에 물밑에서 선수회 창단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때마침 김대현 사건이 터지자 최동원 부자는 물밑에서 준비해오던 선수회를 수면 위로 드러내는 모멘텀으로 이 사건을 이용했다. 최동원은 이미 1988년 연초부터 언론에 공개적으로 선수협회 결성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다. 1988년 구단과 오랜 진통 끝에 6월 29일에야 가까스로 연봉협상을 마친 최동원과 그의 부친 최윤식은 연봉 협상이 타결된 직후부터 곧바로 선수협 결성 작업에 들어갔다. 최동원과 최윤식은 친척인 이택규 변호사에게 법률적인 자문을 구하며 선수회 결성을 준비했다. 이어 최동원 부자는 각 팀의 고참급 선수들을 중심으로 선수회 결성 의사를 타진했다. 이에 몇몇 선수들이 뜻을 함께 하여 기꺼이 간부 자리를 맡아주자 자신감을 받은 최동원은 8월초에 창단 움직임을 본격화하였고, 8월 10일 선수회 조직이 비밀리에 구성되었다. 또 최동원은 평소 선수회 결성을 주장해오던 야구해설가 이호헌, 그리고 친분이 있던 주간야구 김창웅 사장 등에게 자문을 얻었다. 최동원은 8월 중순부터 체육부와 노동부 등에 선수회 결성의 적법성 여부와 활동범위 등 법률 및 절차적 문제들을 여러차례 문의했다.

선수 노조 설립과 관련하여 가장 큰 난제가 된 사항은 법률적으로 '자유소득자’로 분류돼 있는 선수들이 과연 노사관계에서 구단에 고용된 노동자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 여부였다. 자문 결과 법률적으로 선수 노조의 창설은 어렵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고 한다. 현재 상황으로는 노조 설립이 힘들기 때문에 당시의 노조 설립 붐이 꺼져갈 무렵 각 기업에 모두 노조가 생긴 시점에 즈음까지 기다렸다가 이제 선수들도 노조가 필요하다는 여론전을 펼쳐 관계 법령의 개정한 후 노조 설립을 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사실 변호사들이 제안한 이 방식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고, 훗날 실제로 설립된 선수협도 이러한 방식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평생 타협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왔던 외골수였던 최동원의 부친 최윤식은 일단 선수친목단체로 위장하여 출범부터 시켜 놓고 실질적으로 노조활동을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향후 법률이 개정되는 등 기회가 오면 정식 노조로 전환시키면 된다고 말하면서 선수회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안일한 생각이었고 법을 너무 우습게 여긴 행동이었다. 사실 최동원 부자는 일단 최동원의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앞에서 변호사들이 제안한 방식은 너무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여 일단 당장 최동원부터 선수회의 혜택을 보기 위해 당장 무대뽀로 일단 밀어붙여서 되면 되고 아니면 아니면 할 수 없이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선택은 나중에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마는데, 노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KBO 각 구단들이 노동법의 규제를 받지 않고 손쉽게 협회를 와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참여했던 선수들 또한 최동원 부자가 말했던 것과 달리 자신들이 노동법의 보호를 전혀 못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각 구단들에게 바로 백기 투항하게 되었다.

선수회 회칙은 최윤식이 일선 기업의 노조 회칙들을 입수하여 이를 바탕으로 초안을 잡았고 친척인 이택규 변호사 등의 자문을 거쳐 완성되었다. 후일 최동원의 경남고등학교 선배이자 법무법인 부산 소속 변호사였던 문재인이 과거 자신이 선수회 창단과 관련하여 최동원에게 법률자문을 했다는 사실을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회칙 제정과 관련하여 자문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80년대 당시 부산 경남에서 법무법인 부산의 전신인 노무현 - 문재인 법률사무소가 사실상 유일한 노조 전문 변호사였으므로 최동원이 노무현 법률사무소에 찾아가 노무현 변호사팀에게 자문을 구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할 수 있다. 후일담에 의하면 "노동법에 대해 정통한 법률사무소가 무료상담을 해준다더라."[2]라며, 지인이 노무현-문재인 법률사무소를 소개해줬다고 한다. 이 계기로 노무현 문재인 롯데 자이언츠의 팬이 된다.

최동원과 그의 아버지 최윤식의 주도로 9월 10일 비밀리에 예정되었던 창립총회는 그날 우천취소 경기가 추가 편성되는 바람에 한 차례 연기되어 9월 13일 대전 유성호텔에서 프로야구 선수 1백42명이 모인 가운데 기습적으로 창립총회가 치러졌다. 1988 서울올림픽이 개막하기 사흘 전의 일이었다. 이날 총회에서 최동원이 초대회장으로, 이광은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이 선수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한편 이날 유성에서 중요한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감지한 몇몇 기자들이 유성 창립총회장에 나타났으나, 최윤식이 기자들을 회의장 밖으로 몰아내었다. 이후 따로 모여 있는 기자들에게 스스로 선수회의 주도자라고 자처한 최윤식은 "선수들의 권익옹호와 연금제도는 표면상의 명목일 뿐 궁극적으로 노조를 결성하는 것이 목표", "구단이 선수를 방출하거나 포기할 때 선수회의 승인을 받도록 할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했는데, 이 발언이 각 구단에게 알려졌고, 나중에 기사화되어 대중들에게까지 공개되면서 큰 파장이 일게 되었다.

창립총회가 개최된지 일주일 후 최동원은 선수회 회장 명의로 KBO와 각 구단에 `선수회 창립에 즈음한 인사장'을 띄웠다. 그리고 최동원과 최윤식은 9월 30일 인천 송도비치호텔에서 열릴 예정인 1차 대의원총회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대의원총회는 선수회 임원 및 각 구단에서 5명씩 선발된 대의원들이 참석하도록 되어 있었다. 구단별 대의원 35명과 간부를 포함한 총 44명이 그 대상이었다.

1.3. 최동원 회장의 인터뷰

창립총회가 개최된지 8일만인 9월 21일 최동원은 평소에 친분이 깊었던 주간야구의 김창웅 사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선수회 결성에 대한 소견을 말했다. 김창웅은 선수회 결성에 대해 최동원에게 자문해 주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주간야구와의 인터뷰에서 최동원 회장은 "누군가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사실 제 생각만 한다면 선수회 만들 일 없습니다. 어려운 동료, 불우한 후배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저같이 연봉 많이 받고 여유 있는 선수들이 앞장선 거죠."라고 말했다. 최동원은 "당분간 회비를 모아 회원들의 경조사 및 선수기금 모으기에 전념할 것이나, 결국 하다 보면 미국의 선수협회처럼 회원권익옹호에도 앞장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선수회의 미래에 대해 언급했다.

최동원은 선수협의회의 1차적인 과제는 연봉상승 25% 상한선의 철폐와 하한선의 유지 및 인상이라고 밝혔다. 당시 KBO에서는 연봉상승률과 연봉삭감률을 모두 25%로 제한하고 있었는데, 상승률 제한 25%를 폐지하고, 삭감률 제한선인 25%는 더 낮추겠다는 것이다. 최동원 회장은 "연봉 25% 상한선은 야구규약에 명시된 내용이 아니며, '실행이사회'의 의결사항’일 뿐"이라고 말했다. 참고로 KBO 실행이사회는 당시 프로야구 운영과 관련된 모든 사안을 심의, 결정하는 의결기구다.

두번째 추진과제는 KBO가 '곧 만들겠다 만들겠다’하면서 아직 못 만든 '선수연금’이었다. KBO가 못만든 연금 제도를 만들어 회원으로 일정기간 회비를 납부하면 은퇴 후 연금을 받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밖에 자유계약선수가 당해년도에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규약을 철폐하고, 아울러 대리인(에이전트)을 정식으로 허용하도록 만들겠다고 말했다.

1.4. 구단들의 대응

갑작스런 선수회 창단 소식을 접한 구단들은 당황했으나 올림픽 열기에 휩싸여 있던 처음 며칠간은 매스컴과 여론의 반응을 보며 조용히 관망했다. 아직 노조라는 개념 자체가 익숙지 않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노동자들은 꿈꾸기도 힘든 고액연봉자들이 즐비한 프로야구 선수들이 노조를 만든다는 소식을 접 여론의 반응은 대체로 좋지 못한 편이었다. 여론의 흐름을 파악한 각 구단 고위층은 선수회 창립총회가 열린지 일주일 후인 9월 20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긴급 KBO 사장단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1) 30일로 예정된 대의원총회에 참가한 선수와는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 (2) 선수회에 회비를 납부 선수와도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 (3) 선수회와 관련돼 타구단에서 재계약하지 않은 선수를 받아들인 구단과는 경기를 갖지 않는다. 등 3가지 사항이 결의되었다. 이 3가지 결의 사항은 각 구단주의 재가를 거친 후 선수회 간부들에게 공문으로 통보되었다.

각 구단은 30일로 예정된 대의원총회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구단직원들을 총동원하여 나섰다. 대의원총회를 앞두고 해태, 삼성, 태평양은 자팀 선수단 참여를 원천 봉쇄했다. 해태는 직원들을 선수들 자택에 보내 선수들이 못나가도록 일일이 감시했다. 삼성은 그룹 본사에서 사장단 회의를 가진 후 윤경헌 이사를 대구로 파견하여 대의원으로 선출된 박승호, 장효조, 김시진, 이만수, 오대석에게 그룹 사장단 회의 결정 사장을 통보했다. 또 삼성은 선수 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선수 생명이 끝날 수 있다고 겁을 주기도 했다. 삼성 선수들이 대의원총회에 불참한 것은 부인들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태평양은 대의원으로 뽑힌 소속 선수들에게 각서를 받았다. 그밖의 다른 구단들도 선수들의 참여를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9월 30일 인천 송도비치호텔에서 열기로 되어 있던 대의원총회는 몇차례 장소를 바꾼 끝에 계룡산 동학사 앞 서울식당에서 열렸다. 대의원총회에 참여한 것은 롯데, MBC, OB 소속 선수 20명 뿐이었다. 롯데 최동원, 김용철, 유두열, 김민호, 한영준, 김용운, 윤학길, MBC 이광은, 신언호, 김상훈, 유종겸, 오영일, 김용수, 박흥식, OB 김광수, 김경문, 박종훈, 김진욱, 신경식[3]이 그들이다. 빙그레 소속 대의원 선수들은 대의원총회 장소까지 갔었으나 “거기가서 삼성 선수들이 있으면 참석하고 아니면 그냥가자”고 사전약속했었기 때문에 불참하고 돌아왔다. 결국 44명의 대의원 중 20명의 참가에 그쳐 정족수 미달로 대의원총회는 열리지 못했고 술이나 마시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이 자리에서 일부 선수들은 구단의 방해가 심하게 나올 수록 뭉쳐야 한다고 말했지만 일부는 구단들이 의외로 강경하게 나오자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KBO와 구단들은 여론의 추이를 살펴보며 계속 잠행하고 있다가 대중들이 고액 연봉을 받는 프로야구 선수들이 노조를 만드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많다는 사실을 감지하자 10월 6일 "선수협의회 관련 선수 20명과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이후 10월 12일 KBO 사장단 회의에서 이같은 사항이 재확인되었다. 동시에 구단들은 적자투성이의 야구단을 운영하기 벅차다는 식의 앓는 소리를 하며 여론을 돌리기 위한 언플을 하기도 했다.

앞서도 언급되어 있지만 이 상황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선수회가 법적으로 노조로 인정받을 수 있는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각 구단들이 선수회 와해에 나섰지만 노동부 등 관계 부처는 전혀 나서지 않았고 나서고 싶어도 나설 법적인 근거가 없었다. 게다가 여론 또한 선수회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에 대의원총회에 참석한 20명의 선수들은 대부분 구단에 백기 투항했다. 대의원 총회에 참석했던 선수들 중 다수는 그저 선수회가 친목단체인지 알고 대의원 자리를 맡게 되었다고 구단에 말했다. 일부 선수는 선수회를 노조로 만들겠다는 지도부의 방침에 반대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대의원총회에 갔다고 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선수들의 말이 정말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고 나와 있다. 만약 선수들의 이 말이 사실이라면 최동원 부자가 소수를 제외하고 다수의 대의원급 임원 선수들에게조차도 선수회가 노조를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숨겼다는 말이 된다. 물론 일부 선수은 진짜 노조인지 몰랐을 수도 있지만 다수의 선수들은 비록 직접적으로 노조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모임의 성격상 실질적으로 노조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0월 16일 마침내 KBO는 선수회 백지화를 조건으로 선수 구제 방침을 제안했다.

또 KBO는 선수회 창립의 주요 명분이었던 선수연금제도를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미 선수회가 구성되기 전인 88년 7월 9일 등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KBO가 선수연금을 곧 만들겠다고 한 바 있기 때문에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라고 말했다.[4]

1.5. 난처해진 롯데 구단

사태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려던 시점에서 한 신문 기사에 '회비를 낸 선수들과는 재계약하지 않는다.'는 KBO 방침에도 불구하고 롯데 소속 선수들만 이를 거역하고 거의 전원이 보란듯이 회비를 완납했다는 사실이 실렸다. 게다가 언론에 최동원과 그의 아버지 최윤식의 이름이 계속 오르내리며 선수회 결성의 내막이 대중들에게도 어렴풋이 알려지게 되었다.

구단들은 롯데가 선수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이 지경까지 오게 됐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터트렸다. 롯데 선수들만 회비를 다 냈는데 롯데 선수들에게만큼은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압박도 있었다. 혼자서 선수회를 다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최동원 만큼은 KBO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하는 것 아니냐는 의사를 표출하는 구단도 있었다. 이에 롯데 구단은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5] 다른 구단의 눈을 의식해서라도 뭔가 액션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른 구단의 질타가 아니더라도 롯데 구단은 최동원에게만큼은 화를 참기 힘든 상황이었다. 선수회 활동 자체에 대해서 도의상 눈감아준다 쳐도 연봉 협상 결렬 때문에 후반기에야 복귀한 후 부상을 이유로 등판을 자주 걸렀던 것이 결국은 선수회를 만드느라 그랬던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최동원의 불참으로 전기리그를 죽쒔던 롯데는 후기리그에서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으나, 최동원은 부상을 이유로 83이닝만을 등판하며 불펜투수 수준의 활약에 그쳤고 결국 롯데는 공동3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그해 11월말 롯데 최동원, 오명록, 김성현과 삼성[6] 김시진, 전용권, 오대석, 허규옥, 그리고 다음달 김용철- 장효조[7]의 5대4 대규모 트레이드가 추진되었다.

삼성 김시진, 장효조의 경우 선수회와 관련한 보복 트레이드인지는 확실치 않다. 일반적으로 선수회보다는 한국시리즈에서의 부진을 주원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둘 다 선수회 대의원이긴 했으나 선수회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김시진의 증언에 의하면 창립총회를 가느냐를 두고 단장과 실랑이를 벌인 적이 있었다고 한다. 두 선수는 9월 30일 1차 대의원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KBO 징계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선수회보다는 한국시리즈에서 이 두 선수가 부진했던 것이 트레이드의 주원인으로 보고 있다. 김시진의 경우 한국시리즈 통산 무승 7패로 매우 부진했으며, 장효조는 84년, 87년 한국시리즈 등에서 몇 차례의 에러를 범해 우승 실패의 주범으로 꼽히기도 했다.

1.6. 실패 원인

당시 선수회를 다룬 기사나 저서 등에서 거론되는 실패 원인은 다음과 같다.[8]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공장뿐만 아니라 언론사, 증권사, 대학교, 공기업, 정부출연기관 등지에 노조가 우후죽순으로 설립되던 사회적 분위기였기 때문에 선수회를 만들면 여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노조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된지도 얼마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수천만원의 거액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즐비한 프로야구 선수들이 노조를 만드는 것에 대해 당시 여론은 "너희들처럼 잘사는 자들이 무슨 노조냐"라는 질시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런 여론이 형성되면서 구단들도 더욱 강경하게 나올 수 있었다는 것. 게다가 선수회가 설립되고 가장 먼저 추진한다는 일이 연봉상승률 제한 철폐였으니 일반인들의 반응은 "가진 놈들이 더하다더니"였던 것. 차라리 이런 내용을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선수연금 등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사안을 선별적으로 추진하면서 철저히 선수친목단체로 위장했더라면 우호적인 여론을 얻거나 최소한 부정적인 여론은 크게 줄었을 것이라고 아쉬워 한다. 선수연금 또한 당시 선수회가 추진하던 주요 과제 중 하나였긴 하지만 최윤식이 언론기자들에게 "선수복지와 연금은 노조를 만들기 위한 표면적인 명분일 뿐"이라고 말한 내용이 기사화되면서 결국 진정성이 없는 얘기가 되고 말았다.

두번째로, 너무나 지나치게 비밀리에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창단 전까지는 비밀리에 추진하는 것이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일단 창단 선언을 했다면 공개적으로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당당하게 지지를 호소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성온천 후미진 곳에서 비밀리에 창립총회가 개최되었을 뿐만 아니라 창립회의 개최 사실만을 각 구단에 공문으로 보냈을 뿐, 대중 여론에 호소하기 위한 기자회견 등이 전무했다. 하다 못해 그 흔한 보도자료 같은 것도 뿌리지 않았다. 창립한지 8일 후에야 주간야구에서 최동원이 인터뷰한 기사가 나온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나마 주간야구는 전국적으로 발행되던 일간지 등에 비해 파급력이 매우 작았던 언론매체였다. 이마저 최동원이 주간야구 사장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어진 대의원총회 역시 몇차례 장소를 바꾼 끝에 비밀리에 계룡산의 후미진 식당에서 개최하게 되면서 ' 역적모의’처럼 뭔가 큰 잘못을 하는 것처럼 비춰졌다는 것이다. 비단 대중들뿐만 아니라 처음에 어리둥절해 하며 사태를 지켜보던 구단들도 선수회의 이런 행동을 보고 더욱 수상하게 여겨 조기 강경대응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2. 선수협 재결성 시도(1993년, 1996년)

1993년 선동열, 1996년 이상훈을 주축으로 선수협 재결성이 시도 되었다.

3. 1차 선수협 사태 (1999년말~2000년초)


2000 시즌을 앞둔 1999년 말, 해태 타이거즈 소속 양준혁의 주도로 1차 선수협 결성이 시도되었으나 준비 부족과 선수들 사이의 첨예한 대립, 그리고 KBO와 구단 측의 어설픈 대응 등으로 쌍방에서 삽질을 거듭하며 혼란이 이러지다가 결국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서 시즌 개막이 임박해오자 결국 일단 시즌은 시작하고 보자며 임시 휴전에 합의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이 흐른 2000년 시즌 종료 후, 다시 선수협 재결성이 시도되면서 2차 선수협 파동이 일어나게 된다.

3.1. 1차 선수협 사태의 시작

1999시즌 종료 후 양준혁의 주도로 선수협 결성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양준혁은 선수협 결성 1년 전에 삼성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된 것이 선수협을 결성에 나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나중에 밝혔다. 2011년 강병규 SNS 사태 때 엠팍 등에서 양준혁이 선수협 사태 이후 보복성 트레이드로 삼성에서 해태로 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사실은 양준혁이 삼성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된 것은 선수협 사태가 일어나기 1년 전 일이었다. 이때 양준혁은 신인시절 삼성의 부탁으로 추후 신인지명을 약속 받고 쌍방울에 지명되었으나 먼저 군입대를 하는 등 구단에 충성을 다했는데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해태로 트레이드 당한 것에 대해 극렬히 반발하며 은퇴를 불사하겠다며 잠적하는 등의 소동 끝에 김응용 감독이 1년 후 트레이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여 가까스로 해태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양준혁은 1999시즌이 끝난 후 진행된 한일 슈퍼게임과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예선에서 고참급 선수들의 모임을 주도하면서 선수협 결성을 구체화했다. 당시 이러한 움직임이 기자들에게 포착되기도 했다. 양준혁은 이후 평소에 별 안면도 없는 선수들에게까지 전화로 일일이 접촉해가며 포섭해 나갔다.

한편 양준혁은 당시 민주당 정책전문위원이자 스포츠 에이전트 쪽과 관련된 일을 하던 권시형을 선수협 사무총장으로 영입했다. 선수협 기본 추진 방향은 권시형이 다 설정했다고 한다. 다른 선수들은 평생 운동만 하던 우리가 뭘 알겠나 하면서 무조건 권시형이 하자는 대로 따르는 분위기였다고. 권시형은 선수들에게 에이전트 도입, 선수 초상권 문제, 중계권료 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선수들은 무슨 얘긴지는 잘 모르겠지만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얘기에 권시형에게 찬성을 표시했다고 한다.

양준혁과 그에 동조하는 일부 고참급 선수들과 8개 팀의 주장들이 모여 비밀회동을 가진 후 양준혁과 최태원(쌍방울 주장), 박정태(롯데 주장), 유지현(엘지 주장), 김기태(삼성 주장), 송진우 등이 선수들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선수협을 만들자는데 동의했다. 양준혁은 나아가 노조를 만들자며 강경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양준혁은 "나는 야구를 포기했다, 미련도 없다, 아무도 안 따라와도 나 혼자라도 끝까지 남겠다"라고 말하며 옷 벗는 것을 불사하고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며 선수들을 재촉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기태는 노조 설립에 반대하며 친목단체 성격으로 창립하여 구단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기태와 유지현은 처음에는 선수협에 찬성했으나, 양준혁, 강병규 등 급진강경파에 의해 선수협이 돌아가자 선수협 반대로 돌아서게 된다. 대신 마해영, 심정수 등이 뒤늦게 선수협에 깊이 참여하게 된다. 나중에 회장이 된 송진우는 처음 단계부터 선수협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처음에는 별로 나서지 않고, 김기태나 유지현과 같이 일단 구단 측에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취하는 온건파였다. 얼마 후 김기태와 유지현이 떨어져 나갔지만 송진우는 선수협에 남아 있다가 총회 때 가장 연장자라는 이유로 결국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각팀의 주장들 가운데서 이호성(해태 주장), 김태형(두산 주장), 조경택(한화 주장), 김경기(현대 주장)는 처음부터 양준혁과 권시형이 주도하는 강성 노선의 선수협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팀으로 돌아가 집안 단속을 하기 시작했다. 이호성은 선수협에 가입하려는 팀 선수들을 모아 줄빠따를 때리는 등 선수들을 철저히 단속했다고 한다.

선수협 결정 움직임이 언론에 보도되고 구단들이 대응에 나서려고 하자 강경파는 서둘러 창립총회 개최를 추진하게 된다. 당시 선수협 결성을 주도했던 인물은 해태 양준혁, 한화 송진우, 최익성[9], 롯데 마해영, 박정태, LG 김재현, 두산 심정수, 강병규[10], 박명환, SK 최태원 등이다.

3.2. 창립총회


그리하여 2000년 1월 21일 저녁 63빌딩에서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비밀리에 창립총회가 열리게 되었다. # 당초 390명의 선수들이 서명했으나 실제 회의장에 나타난 선수들은 100여명뿐이었다. 이날 현대 선수들은 참여하지 않았는데, 현대가 총회가 열리기 전에 선수단을 전지훈련에 보냈기 때문이다.

비밀로 하기로 하고 모인 창립총회였음에도 불구하고 100여명의 기자들이 모여들었고, 팬들도 많이 모였다. -비밀이었음에도- 현대의 경우 아예 선수들을 직전에 전지훈련에 보내버렸고, 삼성 등 일부 구단은 일단 총회에 갔다가 중간에 나오는 걸로 미리 얘기를 하고 선수단을 보냈다고 한다.

거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열린 창립총회는 난장판 그 자체였다. 아무도 총회장에 먼저 들어가지 않은 채 총회장 밖에서 100여명의 선수들과 선수만큼 많이 모인 기자들, 그리고 팬들까지 참여하여 북새통 그 자체였다. 이 와중에 선수들간의 극한의 감정 대립으로 고성과 주먹다짐이 오가기도 했다. 또 많은 선수들이 막상 오기는 했지만 뒷일을 걱정하며 다음으로 미루자며 꽁무니 빼려는 선수들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어느 팀이 먼저 회의장에 들어가는가를 두고 서로 늦게 들어가기 위해 버티면서 총회는 몇시간 째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파행을 겪게 되었다. 누가 회장을 할지도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을 정리할 사람도 없었다. LG 주장 유지현과 삼성 주장 김기태가 서로 늦게 들어가겠다고 하다가 말싸움이 붙어 험악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파행이 지속되자 일부 기자들과 선수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파장이 되어 총회 자체가 무산되려던 찰나 결국 행동대장 강병규가 두산 선수들을 이끌고 가장 먼저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두산 주장이었던 선수협 반대파 김태형이 아예 총회장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다른 구단 선수들도 속속 총회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총회 시작 전 김기태가 삼성 선수단을 이끌고 철수하고 말았고, 이어 유지현도 삼성도 가는데 우리도 간다면서 LG 선수단을 데리고 철수했다.

우여곡절 끝에 총회가 열리게 되고 참석한 최종인원은 75명이었다. 약 3시간 동안 총회가 진행되었는데, 회장 선출 문제로 대부분의 시간을 지체했다. 당시 누가 회장을 하기로 전혀 협의가 안 되어 있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선수들은 양준혁이 회장을 맡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양준혁이 회장을 고사했다고 한다. 이에 가장 연장자였던 송진우가 회장으로 추천되었고 송진우가 여러 차례 고사한 끝에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양준혁은 강성 이미지가 강한 자신이 회장을 맡을 경우 구단들의 반발이 커질 것이기 때문에 온건한 이미지의 송진우를 내세우게 되었다고 훗날 말했다.

한편 선수협 창립총회가 열린 당일인 22일 오전 KBO는 긴급회의를 열고 참여 선수 75명 전원을 자유계약 선수로 방출하기로 결의했다.

3.3. 선수들 간의 극한 대립

창립총회가 열렸으나 선수들간의 의견 대립으로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선수들은 선수협 가입측과 비가입측으로 나뉘어 극심한 감정 싸움을 벌였다. 창립총회에는 참여했던 선수들 중 일부는 총회 선수협이 노조로의 방향을 명확히 하자 이후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인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특히 각 팀의 주장급 선수였던 LG 유지현, 삼성 김기태, 현대 김경기, 두산 김태형, 해태 이호성[11] 등은 선수협 결성 움직임을 비판하며 선수협의 중심에 서 있던 선수들과 대립각을 세운다. 선수협에 반대한 5명은[12] 선수협을 지지하는 극성 네티즌들에 의해 일명 ' 선수협 오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선수협 가입에 소극적이었던 이승엽도 선수협 지지 네티즌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히며 '안티 이승엽' 사이트까지 만들어지는 등 고생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팬들이 지칭한 선수협 오적은 온당한 평가는 아니었다. 당시 선수협을 반대했던 인물들은 선수협 그 자체에 반대하기 보다는 초기에 양준혁, 마해영 등에 의해 지나치게 강성으로 나서는 분위기 및 권시형 등 외부세력과 결탁하는 모습 등에 대해 반대했던 측면이 크다. 이호성, 유지현 등은 나중에 송진우, 양준혁, 마해영, 심정수 등 1기 지도부가 물러난 후 선수협에 협조한다. 또 선수협 오적은 선수협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인물이 아니라 반대했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네임밸류 있는 선수 다섯 명에게 붙여진 것에 불과했다. 당시 조경택 등은 선수협에 훨씬 적극적으로 반대했지만 네임 밸류가 한창 딸렸던지라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묻혀 버리고 말았다. 다만 이들도 그 과정에서 타협이나 논의없이 같은 선수들과 다투고 후배들을 위협하거나 행패를 부리는 추태를 부렸기에 비난을 받는 것이다.

또한 선수협 집행부 내부에서도 각종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양준혁을 필두로 한 강경파와 온건파 간에 여러차례 불협화음이 있었고, 강경파 안에도 양준혁, 강병규 등의 의견이 갈리며 혼선과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는 결국 2011년 강병규의 SNS 사건으로 재점화되기도 했는데, 당시 양준혁, 강병규, 최익성 등 강경파 내부에서도 지도부와 행동대원들급들 간에 상당한 갈등이 있었음을 내비췄다.

김기태 양준혁이 서로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선수협 가입 의사가 있었던 이승엽을 창립총회장에서 김기태가 끌고 나간 것도 유명하다. 이승엽은 선수협 측과 구단 측 입장 사이에서 난처해 하는 모습을 몇 차례 연출했다. 그와중에 선수협을 지지하는 네티즌들은 이승엽을 배신자로 몰아갔고, 이승엽은 이듬해 선수협에 가입할 때가지 장장 1년여를 이들의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해태에서는 이호성과 양준혁 간에 심각한 대립이 일어났다. 주장 이호성은 양준혁에게 "주장도 아니고 해태에 온지 얼마나 됐다고 애들을 모으냐"며 매우 험악[13]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고 한다. 창립총회를 앞두고도 주장이 아닌 양준혁이 무슨 권한으로 선수단을 데려가려 하느냐며 갈등이 있었다. 결국 얼마 후 양준혁이 트레이드로 LG로 떠나면서 짧은 갈등을 끝나고 말았다.

또 처음에 선수협을 찬성했다가 반대 입장으로 선회했던 LG 주장 유지현[14]은 일단은 선수단을 데리고 선수협 창립총회에 갔으나 기회를 봐서 중간에 선수단을 데리고 나오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후배였던 이병규의 후일담에 따르면, 당시 LG 선수들은 선수협을 반대하는 유지현과 선수협 핵심 멤버였던 김재현과 양준혁 사이에서 상당한 갈등을 겪었으며 심정적으로는 선수협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LG 선수들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자 유지현은 결국 선수들을 데리고 나오기로 결심했는데, 선수협에 적극적이었던 김재현을 제외한 나머지 LG[15] 선수들을 전부 데리고 나와버렸다. 이 일을 계기로 입단 동기였던 유지현 김재현은 서로 등을 돌리게 된다.

또 창립총회에 현대 선수들은 전원 참석하지 않았는데, 구단이 전지훈련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현대 선수들이 모두 불참한 총회장에서 주장 김경기가 현대 선수들의 불참을 주도하는 댓가로 구단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소문이 총회장에 퍼지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김경기는 평소 선수회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던 전준호가 이런 개소문을 냈다고 짐작하여 전지훈련장에서 대판 싸움이 벌어졌고 전준호는 부상으로 00시즌을 절반밖에 출전하지 못게 된다.[16] 그리고, 김경기는 구단으로부터 토사구팽을 당하여, 결국 현대 유니콘스 옛 연고지 새로 창단된 구단으로 트레이드되었다.

3.4. 역풍을 초래한 KBO의 어설픈 대응

구단 측과 KBO는 곧장 적극적인 언론플레이에 나섰다. 과거 1988년 선수회 결성 때 고액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노조를 만든다는 것에 대해 다수의 대중들이 반감을 가졌기 때문에 선수협이 쉽게 무너졌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2000년 당시 KBO는 자신감을 가지고 88년때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여론전에 나섰던 것. 그러나 KBO의 섣부른 언플은 오히려 엄청난 역풍을 불러오게 된다.

1988년 당시 각 구단과 KBO는 선수회가 창단된 후 일주일 동안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은 채 사태를 관망하고 여론의 추이를 살피는 등 극히 조심스런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2000년 KBO는 1월 22일 선수협 창단총회가 열린 당일 오전에 곧바로 긴급회의를 열어 무려 75명의 선수를 자유계약 선수로 푼다는 무더기 중징계를 결의했다. 선수협 지도부 정도의 징계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당장 이 75명의 선수들은 각 팀의 주축 선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정말로 징계가 이루어진다면 롯데, 해태, 두산, 한화, SK는 엄청난 타격이 불가피했다. 반면 삼성, LG, 현대 선수들은 총회에서 빠지는 바람에 징계를 받지 않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야구팬들은 난리가 났다.

KBO의 중징계 발표 직후 박용오[17] 당시 KBO 총재가 KBS 뉴스 인터뷰에서 "이러면 프로야구를 없애버리면 그만이다"라는 발언을 하여 엄청난 역풍을 불러왔다. 프로야구 총재가 프로야구를 자신의 사유물인 마냥 없앤다 만다고 말하는 것은 최악의 막말이라는 비난과 회사 노조 만들면 회사 문닫으면 된다라는 대기업 회장다운 망언이라는 비난이 펑펑 터졌다. 박용오의 이 발언을 계기로 선수노조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가졌던 많은 야구팬들이 선수협을 만든다는 건 우리가 보기에도 좀 그렇지만 저런 천하의 개쌍놈들이 프로야구를 좌지우지하는 꼴은 못본다.며 선수협 지지로 돌아서게 되었다.

또 박용오의 이 발언은 민주노총, 한국노총, 경실련 등 각계 단체들까지 '선수협 파동'에 적극적으로 가세하는 명분을 제공했다. # 민주노총과 한노총은 처음부터 선수협 사태에 적극 관여하고 있었느나 처음에는 노동계의 참여가 오히려 대중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 그러나 박용오의 발언 이후 여론의 향방이 바뀌게 되었고, 그간 음지에서 선수협을 지원하던 민노총과 한노총이 이후부터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경실련이 나서 “헌법이 보장한 결사의 자유를 인정하라”며 야구위와 구단주들에게 “전향적으로 선수협을 수용할 것을 촉구”했고, 한겨레신문도 "선수협 문제는 단순히 구단과 선수간의 이해다툼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기본권에 관한 문제"라고 주장하며, 선수협 문제에 시민단체가 나설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 민주노총과 한국노총도 적극적으로 나서 선수협을 지원했다.

1월 24일 김기태, 이승엽, 이호성, 김태형이 기자회견을 갖고 현(現) 선수협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현재 선수협이 배후의 기획단(권시형)의 조정을 받아 움직이고 있으며, 이 배후 기획단이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 하기 때문에 배후가 물러나기 전에는 현상태의 선수협에는 가입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이들이 만한 배후의 주범은 당시 민주당 정책위원이자 선수협 사무총장이었던 권시형을 지목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자회견에서 배후 세력을 거론한 것은 커다란 역효과를 불러왔다. 배후 세력으로 지목받은 인물이 멀쩡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당의 정치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박용오의 발언으로 심기가 매우 불편했던 대중들은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댄데 대중을 바보로 알고 배후를 운운하느냐면서, 선수협 오적, 배신자들, 구단의 어용이라는 원색적인 용어를 써가며 격하게 기자회견을 한 선수들을 비난했다. 이후 여론은 더욱 선수협쪽으로 쏠렸다. 10년후에 반전이 일어나는데, 권시형이 선수협 사무총장 시절 배임 및 횡령 등의 비리를 저지른 혐의로 징역 4년 및 추징금 23억3000만원의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다.[18] 어쨌거나 당시 이 기자회견에서 나온 배후세력 발언에 대해 대중들은 "요즘 세상에 간첩이 어디 있습니까"하는 투로 낭설로 치부했지만, 당시 실제 선수들 사이에서는 에이전트, 초상권, 중계권료 등 알아듣기 힘든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권시형에 대해 의심하는 이들이 많았고 이러한 의혹은 1차 선수협 사태 당시 많은 선수들이 선수협에 참여하지 않았고 관망했던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2월 10일 100분 토론에서 선수협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정운영이 사회자를 보던 시절이었다. 선수협 측에서는 당시 선수협 대변인이었던 강병규 민변 소속의 김도형 변호사가 참여했고, KBO측에서는 이상일 당시 사무차장과 김응식 조선대 체육학부 교수가, 그리고 중재인 측으로 허구연 해설과 신문선 해설이 출연했었다. 방청석에는 마해영, 송진우 등 당시 선수협 핵심 주축 멤버들이 앉아 있었고 이들도 토론에 참여했다. 이날 토론에서 방청석에 있던 송진우 선수협 회장과 이상일 KBO 사무차장과의 대화 중 일부다.
이상일: 제가 하나 그러면 보충해서 묻겠습니다. 송진우 선수에게. 그러면은 지금 선수 협의회는 노조입니까, 친목단체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확실하게 좀 해 주십시오.

송진우: 협의회입니다.

이상일: 협의회 성격이 뭡니까? 노조입니까? 아니면 친목단체입니까?

송진우: 노조 아닙니다.

이상일: 노조 아닙니까? 그러면 제가 노조라고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 답변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저는 제가 노조라고 느끼는 부분이 4가지가 있습니다. 선수회는 노조가 아니라면서 노조처럼 행동하는 게 있는데요,
① 선수들을 가입을 은밀하게 일부 선수들에게 가입서를 받으면서 했던 점, ② 시민단체라든가 정당을 쫓아다니면서 서명을 받는 행위, 지원을 부탁하는 행위, 이런 행위, ③ 쌍방울 선수를 강제로 밤중에 납치하면서 데려오는 등 도저히 일반 선수협의회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한 점, ④ 친목단체인데도 선수협의회에 굳이 지금 집행부가 본인들만이 대표여야 된다. 다른 사람은 대표가 안 된다고 주장하고 연연하는 점, 이 부분에 대해서 한번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정운영: 제가 먼저 질문을 좀 정리하겠습니다. 가입의 은밀성, 외부지원을 부탁한다. 경우에 따라선 납치와 같은 그런 무리한 행동이 있었다. 또, 대표성의 어떤 독자성 같은 걸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노조라는 말씀입니까?

이상일: 제가 생각해서는 지금 선수들의 협의회는 결국 노조를 하기 위한...

정운영: 그러면 노조는 지금 말씀하신 그런 것 하는 게 노조입니까?

이상일: 그런 것도 그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정운영: 그건 노조에 대해선 대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방송 전문
이날 토론은 이상일 사무총장의 노조 관련 발언, 양측의 의견을 정리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회자인 정운영의 편파적 태도, 전혀 노조가 아니라는 송진우의 일관된 부인 등 여러가지가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박용오의 발언 이후로 여론의 대세가 이미 선수협 쪽으로 상당히 기운데다가 100분 토론에서 KBO 이상일 사무총장의 고압적이고 비타협적인 토론 자세가 더욱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면서 여론은 선수협에 동정적으로 기울게 되었다. TV 토론 직후 다수의 여론이 선수협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이후 정치인들까지 대거 선수협 지지를 선언하고 나서게 되면서 선수협 결성은 큰 탄력을 받게 된다.

다음 날인 11일에 한국의 양 대표노조인 민주노총, 한국노총에서 이상일 사무처장의 노조 관련 발언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며 KBO를 항의방문했다. 당시 KBO의 인식이 이 지경이었다.

차라리 자유계약선수 제도를 구단 측에서 먼저 허용한 점이라든가, 선수노조와 구단의 대립으로 시즌이 도중에 취소되었던 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등을 근거로 들었더라면 그렇게까지 바보 취급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KBO가 75명의 선수를 자유계약 선수로 방출했지만 해체된 쌍방울 선수들과 개별 계약을 맺으며 창단을 준비 중이던 SK 와이번스가 75명의 선수들에게 접근하자 곧 KBO는 이 징계를 철회하게 되었다.

이렇게 선수단, 구단과 KBO 측 모두 갈팡질팡하며 삽질을 하다가 시즌이 도래하게 되었고 결국 선수협 문제는 흐지부지되고 시즌이 시작되고 말았다.

4. 2차 선수협 사태 (2000년말~2001년초)

2000시즌 종료 후 다시 선수협 결성이 추진되면서 구단 측과 갈등이 이어졌다. 결국 정치권 및 노동계의 개입으로 선수협이 KBO의 승인을 얻어 출범하게 된다.

4.1. 2차 선수협 사태

2000시즌 종료 후 다시 선수협 재결성이 추진되었다. 선수협 지도부는 2000년 11월 총회 개최를 추진했고 이에 다시 선수협과 KBO의 대립이 시작되면서 제2차 선수협 파동이 일어났다.

12월 18일 선수협 집행부는 28명의 선수가 참여한 가운데 총회를 열고 선수협 재결성 및 합법화를 결의했다.[19] 송진우 現 회장을 2대 회장으로 재선출했으며 양준혁, 마해영이 부회장에 선출했다. 그리고 박정태가 감사로 뽑았다. 선수협은 또 다음과 같이 각 구단 선수 대표를 선출했다. 두산: 심정수, 롯데: 마해영, 엘지: 양준혁, 해태: 박충식, SK: 최태원, 한화: 송진우. 선수협은 사단법인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권시형 사무총장이 KBO에 대한 법적 대응을 전담하여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12월 19일 해태 주장 이호성, 두산 주장 김태형, 현대 주장 김인호가 기자회견을 열고 선수협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12월 20일 구단 및 KBO 측은 선수협 관련 주축멤버 6인 송진우, 양준혁, 마해영, 박충식, 최태원, 심정수를 자유계약 공시하며 방출하였다. # 야구계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대거 방출되자 여론의 반응은 거셌다.

이같이 조치가 취해지자 그동안 선수협 가입에 소극적이었던 선수들이 결집하여 대거 선수협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각 팀의 선수단은 잇달아 회의를 가지고 선수협에 참여할 지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12월 21일 오후 4시 30분 선수협 측은 경실련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송진우 회장은 "6명 선수들에 대한 자유선수계약공시는 군사정권때에서나 볼 수 있던 반민주적 폭거"라고 주장하며 KBO를 규탄했다. 이어 인권실천 시민연대 오창익 국장이 11개 시민단체를 대표해 "이번 조치는 헌법에 보장된 결사의 자유와 생존권을 결정적으로 훼손하는 조치"라면서, "KBO와 구단들은 즉각적으로 20일의 반인권적인 조치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 기자회견 말미에는 심정수가 나와 눈시울을 붉히며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어서 나섰습니다"라고 말했다. 심정수는 "사장과의 면담에서 '총회에 참석하는 순간 너는 두산의 선수가 아니다'는 극언을 들었으며, 이어 단장으로부터 '참가이후에 있을 불이익에 대해서는 감당할 각오를 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눈물을 떨구며 기자회견에 임하는 심정수의 모습이 매스컴에 집중 보도되었다.

이에 KBO는 22일 오후 2시 40분 이사회를 열어 6시간에 걸친 회의 끝에 "6명의 대표선수들이 먼저 합의사항을 위반해 이번 사태가 야기됐다는 것을 인정하고 향후 선수로써만 순수하게 행동할 것을 인정한다면 보류권 포기(자유계약선수통보)를 철회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KBO의 이같은 결정에 대해 선수들은 KBO의 입장이 실질적으로 변화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서 개탄했다. 이어 그동안 선수협 가입을 보류해왔던 선수들이 밀물처럼 선수협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21일 밤 LG 선수단이 기자회견을 열어 선수협 지도부 6명을 방출한 각 구단을 비난하며 44명 선수단 전원이 선수협 가입을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각팀의 선수단이 잇달아 회의를 가지고 선수협 가입을 결의했다. 특히 롯데 선수단은 6명 방출에 대한 항의 표시로 전원 재계약 거부를 선언하며 선수협에 가입했다. 12월 18일 선수협 회원은 총 28명에 불과했으나 닷새만인 23일 오전 179명까지 회원이 불어났다. 크리스마스 직후 현대와 삼성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선수들이 선수협에 가입하게 된다.

노동계 단체들 또한 적극적으로 나섰다. 6명의 선수들에 대한 방출이 결정된 다음날 12월 21일 14개 노동 단체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경실련은 “협의회 핵심멤버 6명을 자유계약선수로 푼 것은 지난 3월의 합의를 깬 심각한 위법행위”라면서 “다른 시민단체들과 연계, 선수협을 지지하는 모임을 결성하겠다”고 밝혔다. # 민주노총도 " 프로야구 선수협 탄압하는 KBO 자폭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선수협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섰고, 한국노총도 KBO 규탄 대열에 동참했다. #

여론이 선수협에 동정적으로 흘러가자 정치권도 이에 편승하여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12월 21일 국회 문광위원회 소속 의원 11명이 선수협 결성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날 선수협 결성을 지지한 문광위 의원은 민주당 최용규, 강성구, 신기남, 정범구 의원, 한나라당 남경필, 강신성일, 박종웅, 심규철, 정병국 의원, 자민련 정진석 의원 등 총 11명이다.

다음날인 22일에는 민주당 임종석 의원 등 일부 여야 국회의원들이 국회 귀빈식당에서 선수협 소속 선수들을 참석시킨 가운데 간담회를 갖고 KBO를 규탄하고 선수협 사태 해결을 위해 정부가 나설 것을 적극적으로 촉구했다. # 이자리에서 민주당 임종석, 김경천, 최용규, 김성호, 장성민, 송영길 의원, 한나라당 남경필, 김원웅 의원, 자민련 정진석 의원 등 여야 의원 10여명은 '선수협을 지원하는 의원들의 모임'을 결성했다.

2001년 1월 3일 이승엽이 삼성 선수 중 최초로 선수협에 가입했다. 당시 삼성 선수들은 구단의 압박으로 아무도 선수협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이승엽이 홀로 구단에 반발하며 총대를 맨 셈이 되었다. 당시 선수협 주동 선수들의 방출에 대한 반발로 타 구단 선수들의 선수협 가입이 대세임에도 삼성 선수들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구단뿐만 아니라 선수들까지 많은 비난을 받게 되는데, 삼성의 간판스타라고 할 수 있는 이승엽은 대표격으로 더 까였으며 '안티 이승엽'사이트까지 개설될 정도였다.[20] 이승엽은 선수협에 가입은 하지만 활동은 안 한다며 선을 그으며 가입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당시 삼성 구단만 한명도 선수협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여론의 따가운 눈을 의식해서 삼성이 이승엽을 상징적으로 선수협에 가입하도록 했다는 설이 많은 팬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21] 같은 날 마찬가지로 구단의 압박 때문에 선수협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던 현대 선수단은 비록 선수협 가입은 아니지만 사태 해결 전까지 팀 합동 훈련 거부를 결의하며 힘을 보탰다.

임종석, 오세훈 등 5명의 국회의원들이 정부가 선수협 사태 해결에 나설 것을 적극 촉구하자 2001년 1월 13일 당시 문화관광부장관이었던 김한길이 선수협 사태 해결을 위한 개입을 선언하고 나서게 되었다. # 장관이 직접 개입하자 구단들에게는 커다란 압박으로 다가왔다. 결국 김한길이 개입하자 사태는 급속도로 진전되어 불과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해결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선수협 손을 들어 주었고, KBO가 사실상 백기를 들면서 1월 20일 선수단과 KBO의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선수협이 정식 승인을 받게 된다. # 법적으로 노조가 아니었으나 정부의 묵인 하에 실질적으로 노조 역할을 담당하는 단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정부의 개입으로 2001년 1월 21일 선수협과 KBO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며 선수협은 구단측의 인정을 받고 정식으로 합법 단체로 거듭난다. 1월 21일 체결된 한국 프로야구 선수협회와 KBO 간의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선수협 참여선수에 대한 불이익 금지
  • 구단 대표 6명 방출조치 철회
  • 송진우 회장, 양준혁, 마해영의 집행부 사퇴
  • 선수들의 자율에 따른 새 집행부 구성
  • 선수협 사무국은 새 집행부에서 구성

이날 합의 과정에서 구단 측은 선수협을 인정하는 대신 기존 강성 창립멤버들로 구성된 지도부가 퇴진하고 선수단이 자율적으로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할 것을 요구하여 이 사항이 받아들여졌다. #

이 합의에 따라 양준혁, 송진우, 마해영 등 창립멤버 전원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새로 선수협 임원단이 구성되었다. 새 지도부는 구단들의 압력으로 친구단측 인사로 채워졌다는 식으로 많이 회자되고 있지만, 사실은 선수들의 자율 투표로 구성되었으며, 강성파가 모두 사퇴했기 때문에 온건파로 구성되었을 뿐이다. 기존에 반대파로 알려진 인물들도 기실은 초기의 지나친 강성 노선과 권시형과 같은 특정 노선의 정치 세력과의 결탁에 반대했을 뿐 선수협 자체의 대의에는 찬성했던 인물들이 많았다.

양준혁의 경우 강병규에 의해 선수협의 배신자이고 은퇴이후에도 선수협과 담을 쌓은것으로 묘사되지만, 선수협에서 멀어진것은 오히려 위 서술과 같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오히려 강병규가 은퇴 후 구단측의 특별한 경계를 받지 않았음에도 선수협에 십수년간 관여하지 않다가, 사고치고 방송 막힌 이후에 뜬금 양준혁 비판을 시작으로 선수협에 관여를 시작했다가 박재홍 회장이 선을 긋는 바람에 다시 관계가 끊어졌다.

4.2. 보복성 트레이드

그러나 선수협에 열성이었던 선수들을 곱게 봐 줄 생각이 없었던 구단 측에서는 이후 각 선수들이 팀의 기둥 전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적은 대가로 다른 구단으로 가차없이 보복성 트레이드를 시행했다.
  • 양준혁(해태) - 2000년초 LG 손혁과 트레이드되었다.[22] 일각에서는 보복성 트레이드가 아니라 김응용 감독이 해태에 오면 1년후 트레이드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 뿐 보복성 트레이드는 아니라는 옹호론이 있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는 일제히 보복성 트레이드라고 보도되었고, 양준혁 본인도 당시 인터뷰에서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사실 당시 김응용 감독의 1년 발언은 선수 은퇴도 불사하겠다며 잠적했던 양준혁에게 일단 1년만 뛰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그때가서 그만두든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를 요구하든 그때가서 다시 결정하라는 의미에 가까웠고 일단 어떻게 해서든 양준혁을 해태에서 뛰게 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발언으로 이해되었다. 또 어차피 모기업 해태가 간당간당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고액연봉자 양준혁은 어차피 저절로 트레이드되고 말 것이라는 체념에 가까운 발언이기도 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만약 양준혁이 선수협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김응용 감독이 양준혁을 트레이드하지 않고 더 붙잡으려 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나중에 삼성 감독이 된 김응용은 당시 선수협 사태로 미운털이 밖혀 FA미아설까지 돌던 양준혁이 실제 FA로 풀리자 바로 다음날 영입을 성사시켰다. 당시 해태 양준혁의 LG 트레이드는 이러한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트레이드라고 봐야 한다.
  • 강병규(두산) - 2000시즌이 개막하기 불과 일주일 전 SK 와이번스로 현금 트레이드[23]되었다. 다만 두산 프런트가 이전부터 놀기 좋아하던 강병규를 선수협을 빌미로 팔아버렸다는 설도 있다. SK로 간 후 강병규는 선수 초상권을 주장하며 유니폼에서 광고용 로고를 떼어버리는가 하면, 햇빛알레르기 드립을 치며 8주간 휴식을 요구하다가 결국 SK 프런트에게도 찍혀서 방출되어 은퇴한다. 강병규에 따르면 SK 사장이 처음에 "우리는 선수협을 지지하는 구단"이라고 말하며 보류명단에서 제외된 강병규에게 SK로 올 것을 권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창단과정에 있었던 SK는 강병규 외에도 선수협에 참여하여 각 구단에서 입지가 불안해진 여러 선수들에게 접근한 바 있었다. 강병규는 돈보다 선수협을 지지한다는 말에 SK로의 이적을 택했으나 막상 이적하자 구단의 태도가 변했다는 것.
  • 최익성(한화) - LG 송유석, 신국환 트레이드 (2000년초)
  • 마해영(롯데) - 2000시즌이 끝난 후 삼성 김주찬, 이계성과 트레이드되었다. 마해영은 삼성에서 이마양의 일원으로서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 심정수(두산) - 2001년 초 현대 심재학과 트레이드[24]되었다. 심정수는 트레이드 소식에 펑펑 울었고, 두산 팬들의 항의에 공식 게시판 곰들의 대화가 일시 폐쇄되기까지 했었다.
  • 양준혁, 김재현(LG) 트레이드 무산 - 2000년 후반기 LG는 김재현과 양준혁을 다른 팀으로 보내버리려는 보복성 트레이드를 시도[25][26]했으나 카드 맞추기에 실패하여 결렬되고 말았다. 어차피 양준혁은 그 시즌이 끝나면 FA였기 때문에 트레이드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시즌이 끝나고 FA가 된 양준혁은 한때 FA 미아설이 떠돌기도 했지만 삼성이 그를 영입했다. 당시 기사.
  • 송진우(한화) 트레이드 무산 - 마해영, 양준혁과 동시에 보복 트레이드가 추진되어 삼성행 트레이드가 구단간 합의되었으나 막판에 결렬되었다. 송진우는 FA 때 삼성보다 훨씬 적은 금액을 제시한 한화에 잔류하는 것을 택하여 구단과의 관계가 어느정도 회복된 것으로 보고 있다. 관련기사.

트레이드를 당하지 않은 선수들도 피해를 입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재현은 위에 나와 있듯이 결국 트레이드가 무산되었지만, 선수협 사태 직후 고관절 부상으로 수술을 받아 선수생명의 기로에 섰고 수술 뒤 복귀하여 정상급의 기량을 과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연봉협상 과정에서 부상으로 인한 시즌 중 은퇴는 전적으로 선수 자신의 책임이라는 등 각종 개드립으로 얼룩진 각서에 동의할 것을 구단측으로부터 강요받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김재현은 2004년 말 FA 자격을 얻자마자 당연히 LG를 떠나 SK 와이번스와 계약한다. 그리고 이렇게 양준혁과 김재현을 떠밀어 보낸 LG 트윈스 천벌을 받고 그 이후 한없이 추락했다.(…)

송진우 정도가 이 광풍에서 유일한 생존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삼성으로 트레이드 하려다가 말았다고 한다.[27] 이에 대해선 2000년 FA 당시 3년 7억을 제시했던 한화와 동기간 12억 이상을 제시한 삼성 사이에서 한화를 선택한 송진우의 선택이 크게 미쳤다는 의견이 많다. 송진우는 선수협 파동 이후 오히려 더욱 뛰어난 활약을 했고,[28] 한화는 먹튀가 즐비하던 FA시장에서 돈값을 한 송진우를 아주 제대로 프랜차이즈 대접하기에 이른다.

4.3. 선수협 설립을 배신한 선동열?

사실이 아니다.

선동열은 선수협과 관련하여 양준혁의 주장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양준혁은 "나고야에 전화를 서른 번도 넘게 하고 메시지도 남겼는데 연락이 안 됐다. 배신감 컸다."고 주장하고 있다. 선동열은 이에 대해 어떠한 대응도 지금까지 하지 않았으나 어디까지나 양준혁의 언플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선동열의 귀국시에 양준혁과 만나 찍힌 사진 또한 존재하고 선동열은 양준혁을 피하지 않았다. 해외리그에서 은퇴를 준비하던 선수에게 선수협 설립의 책임을 묻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선수협 관련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은퇴 이후 선동열은 선수협 홍보를 도와주기도 하였다.

4.4. 선수협을 배신하고 구단편에 선 양준혁?

사실이 아니다.

2011년 10월 강병규가 SNS로 양준혁을 비판했다. 강병규의 주장의 요지는 양준혁은 삼성에서 가난한 해태로 이적하게 되자 선수협을 만들어 해태를 탈출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는 것. 양준혁이 해태를 벗어나 LG를 거쳐 삼성으로 돌아가게 되자 결국 선수협을 모른 체 했다는 것이다. 강병규는 양준혁은 선수협에 앞장섰다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구단측에 붙어서 선수협을 배신하였고, 그 이후 삼성으로 이적한 후 선수협을 모른체한 배신자라고 말했다. 또한 선수협 지도부가 모두 구단측에 붙어서 합의한 결과 힘없는 선수들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

일단 강병규의 주장은 양준혁의 실제 행동과 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는 측면이 있다. 일단 양준혁이 선수협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1999년말부터 2000년초 사이의 겨울이었다. 이때 1차 선수협 사태가 진행되었고 1월 22일 창립총회까지 사실상 모든 일을 주도한 것은 양준혁이었다. 총회가 벌어지고 나서 각 구단이 나서면서 일단 선수협은 흐지부지되고 말았고, 그때 양준혁은 해태에서 LG로 트레이드되었다. 2000시즌 후 2차 선수협 파동 때 선수협을 주도했던 것은 송진우였고, 양준혁은 상대적으로 2선으로 물러난 모양새를 취했다. 송진우는 처음에 선수협의 대의에는 찬성하였으나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고 있었는데, 여러차례 고사한 끝에 회장 자리에 오르고 난 후에는 적극적으로 나서 2000시즌이 끝나자마자 선수협 재결성을 선언하면서 전면으로 나섰다. 2차 선수협 파동은 대외적으로 회장인 송진우가 항상 전면에 거론되었다. 이때는 양준혁이 어느 정도 활발하게 활동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2차 선수협 파동으로 2001년 1월 KBO의 합의로 선수협이 정식 출범하게 되었고, 양준혁을 비롯한 1기 지도부는 합의에 따라 동반 퇴진하게 되었다. 이후 양준혁은 선수협에 관여하지 못했다. 그리고 2001시즌이 끝나고 FA로 삼성에 복귀하게 되었다. 강병규가 비판한 점 중 하나는 2001년 합의로 1기 선수협 멤버가 동반퇴진하긴 했지만 이후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직간접적으로 다시 선수협에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경우가 많은데, 양준혁은 삼성 이적 이후 아예 선수협에서 발 빼는 모양새를 취했다는 것이다.

강병규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당시 선수협에 참여했다가 구단측으로부터 일방적 보복을 당한 최익성도 강병규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에 반해 양준혁은 별다은 대응을 하지 않아 의혹을 증폭시켰다. 그러나 강병규가 워낙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주장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이들도 많았다. 게다가 조기은퇴당하고 야구계에서 퇴출되어 이민까지 갔다 온 박충식 등은 양준혁을 지지했다. 결국 그 당시 사회적으로 거의 매장을 당한 강병규의 재기를 위한 몸부림 쯤으로 결론지어지고 있다.
  • 양준혁이 선수협에서 도망갔다?
    강병규의 발언에 의하면 한참 선수협이 힘들 때 양준혁이 도망가서, 삼성에 가서 잘 먹고 잘 산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실상은 2001년 1월 선수협과 KBO와 구단측이 모여서 합의안을 도출할 때까지 주축 멤버중의 하나가 양준혁이다. 더군다나 양준혁은 선수협 경력 때문에 2002 시즌 전 삼성과의 FA계약에서 실력대비 헐값에 계약을 해야 했다.선수협배신하고 대기업에 갔다고하기에는 선수협사태 종결이후 1년후에 대기업 삼성으로 간것이다. 게다가 선수협사태 종결후에 양준혁 마해영 송진우가 선수협에서 손뗀것도 자의가 아니라 구단측의 강경한 요구에 의한 합의사항이었다.
  • 양준혁을 비롯한 선수협 주요 멤버들의 구단 편으로 변절하였다??
    선수협 사태를 강경대응하던 한국야구위원회는 2000년 12월 양준혁, 송진우 등 6명을 전격 방출했다. 선수생명을 끊은 것이었는데 팬들의 엄청난 반발로 주요 6인의 방출을 철회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당시 문화복지부 장관 김한길까지 나서게 된다.[29] 대기업으로써는 장관까지 합의를 종용하는 상황에서 2001년 1월 어쩔수 없이 선수협의 실체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단측에서는 양준혁, 송진우, 마해영은 사퇴하고, 2차 지도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내용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합의문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선수협 사태 종결 당시 기사

    즉, 마지막까지 양준혁, 송진우, 마해영 등 선수협 주요멤버는 구단의 눈엣가시였다. 강병규는 그 당시 이미 티비로 진출해서 구단의 견제 명단에도 없었다. 더군다나 방송인이 되고 연제협 사건에도 가담했으니 양준혁에게 뭐라 할 자격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 선수협 주요멤버들에 대한 구단의 보복
    의리의 회장을 가진 송진우와 이미 트레이드된 양준혁을 제외한 전원이 합의안 발표 한 달도 안 지나서 보복 트레이드되었다. 그 당시 선수협 집행진이 구단편에 붙었다면 그런 일이 있었을까.

    그 이후 선수협 지지하던 선수들 중 기량이 모자라거나 저하된 선수는 야구계에서 밀려나는 경우가 많았고, 기량이 여전히 좋아서 팀에 쓸모가 있는 선수는 선수생활을 유지했다. 강병규나 최익성도 그러했지만, 양준혁을 지지하는 박충식 등도 조기은퇴 후 프로야구계에서 남지 못하고 결국 이민가서 10년이나 호주에서 살다 돌아왔다.

    선수협 5적이라 불리는 선수들은 거의 자기 팀에서 은퇴하고 코치를 하거나 감독까지 되었지만[30], 양준혁을 비롯 선수협 주요멤버들 중에서 보복 트레이드후 선수 생활을 계속한 선수들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은퇴 이후 거의 대부분 코치 등으로 친정 구단에 남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31]
  • 양준혁 FA 미아설
    당시 선수협 사태로 각 구단에게 밉보인 양준혁이 2001 시즌 종료 후 FA 시장에서 어느 구단에도 선택되지 않을 것이라는 미아설이 파다했다. 그런데 실제 FA가 열린 후 우선협상 기간이 끝나고 타구단과도 협상이 가능해지자 바로 다음날 양준혁과 삼성의 계약이 체결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강병규는 양준혁과 삼성 간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의혹을 제시한 것.

    선수협과 구단의 합의가 2001년 1월에 있었고, 그 후 11개월후 2001년 11월 양준혁은 FA가 되었는데 강병규의 말과는 다르게 선수협 사태가 끝난 한참뒤에 FA가 된 것. 강병규에서 촉발된 양준혁에 대한 음모론은 양준혁의 FA미아도 거짓이고, 이미 구단측에 붙어서 삼성에 가기로 합의했다는 식의 내용이 마치 사실인 양 떠돌고 있다. 그러나 FA 미아설은 양준혁이 소설로 쓴 게 아니다. 그 당시 김응용 감독이 영입생각이 없던 삼성사장에게 영입을 요구했다고 직접 언론에 여러 번 밝혔다.[32] 관련기사 김성근 감독 역시 그 당시 FA당시 선수협관련해서 양준혁이 힘들었는데 LG에 잡아 달라고 요구하였다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33]
  • 그 당시 실제 선수협을 구성하는 수백명 선수들과 양준혁
    강병규가 티비에서 잘 나가던 그 시절, 2001년 12월 선수협 500여명의 선수가 모여 총회를 열었고, 그 총회에서 선수협의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에 더불어, 양준혁의 FA 미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컸다. 강병규는 모르는 실제 선수들의 목소리다. 선수협총회 당시기사

5. 이호성 회장 시대 (2001)

2001년 1월 21일 KBO와 선수협의 합의로 선수협이 공식 출범하게 된 직후 기존 집행진이 일괄 사퇴하고 며칠 후 새로운 집행부가 선출되었는데, 그 결과 이호성이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장종훈, 안경현, 김정민 등으로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선수협 5적이라는 오명까지 들은 이호성이 갑자기 회장이 된 것에 대해 구단들이 이호성을 회장에 앉혔다는 식으로 많이 이야기되지만, 사실 이호성은 선수들이 자율적으로 선출한 회장이다. 물론 비선수협 출신으로 1기 선수협에 지속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해왔던 이호성을 구단들이 선호했던 것은 사실이나 회장 선출 자체에 구단이 참여할 수는 없었다. 이전에 선수협을 주도하던 이들이 모두 배제되었기 때문에 뽑을 사람이 마땅치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호성은 이미 팀내에서 해태 상조회장을 맡으며 선수들의 복리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점이 참작되어 선수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

이호성이 1기 선수협에 반대한 것은 엄밀히 말해 선수협 자체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1기 선수협을 주도하던 인물들에 대한 반발이었다. 노조를 결성하여 파업을 하고 연좌 농성을 벌이자는 양준혁, 강병규 등 극소수의 극단적인 강경파에 선수협이 휘둘리면서 지나치게 강성으로 나가고, 권시형이라는 외부인물이 선수협을 좌지우지하면서 이권을 취하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양준혁의 경우 선수협을 만들기 1년전 삼성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로 오면서 가난한 해태에서 뛰느니 은퇴를 하겠다며 잠적하였고, 김응용 감독의 설득으로 간신히 해태에 합류하고 나서도 자신을 용병으로 여겨달라고 하는 등의 행태를 보이며 해태팬들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양준혁 해태 이적 거부 파동을 벌이면서 그가 신인 때 쌍방울 지명을 거부하고 삼성의 월급을 받으며 군복무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며 일반 야구팬들로부터도 비난을 받는 상황이었다. 당시 해태의 주장이었던 이호성은 팀 분위기를 개판으로 만드는 양준혁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시즌 중에서는 용병으로 불러달라고 하더니 시즌이 끝나고 선수협을 만들 때는 양준혁이 주장도 아니면서 해태 선수단을 대표한다며 선수단을 이끌고 상경하려 하는 등의 행동을 하면서 이호성과 감정 대립이 심해졌던 것. 선수협 초기에는 주장이 해당 팀 선수협 대표임이 선수협 규정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양준혁의 행동대장 격인 강병규 또한 생각없이 사고치는 스타일이었는데, 선수협 결성 초창기 강병규는 KBO 사장단 회의장에 찾아가 선수가 찾아왔는데 왜 밥 한 끼 안 주냐면서 난동을 부리는 등 지나치게 의욕만 앞세운 행동으로 구단들의 반발을 키우기도 한 사실도 있었다.

회장 시절의 급진적인 행적을 봐도 이호성이 친구단 성향이라는 것은 완전 어불성설이다. 나중에 강병규가 양준혁을 비난[34]하기 위해 이호성 시절 선수협이 완전 암흑기였다고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어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이와 정반대다.[35]

구단의 어용으로 예상되었던 이호성은 예상과는 다르게 선수협 회장으로서 선수들의 목소리를 아주 잘 대변한 역대급의 유능한 회장이었다. # 회장으로 선출되자마자 이호성은 엄청난 추진력을 보이며 천만원이였던 최저연봉의 단계적 인상, 연봉 상한선 철폐[36], 선수협 복지기금 마련[37], 용병 보유 인원 감축 등 불과 1년 동안의 짧은 시간에 스타 선수들의 이해관계 뿐만 아니라 정말로 힘 없고 빽 없는 무명 선수들의 권익까지 대변할 수 있는 여러 치적을 남겼다.

이호성이 회장으로 있었던 약 1년간은 선수협 역사상 가장 많은 성과를 냈고 활발한 활동을 했던 시기였다. 가까스로 출범하게 된 선수협에서 이호성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선수협 조직 자체가 흐지부지되고 완전 해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강경파 위주의 1기 지도부들이 그대로 남아 선수협이 출범했다면 오히려 선수협이 단명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노조를 추구하며 지나치게 강성으로 흐르는 분위기에 대중들이 거부감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고, 개성이 강한 인물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쉬웠다는 것. 실제로 1기 지도부의 주축 인물들인 양준혁, 강병규, 최익성 등은 선수협에서 물러난 후에 서로 극심한 감정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에 비해 이호성은 현실주의자였고 그 밑에 집행진들은 장종훈을 비롯해 주로 온건한 성향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이호성의 리더십하에 조직이 잡음없이 일사불란하게 한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선수협 회장으로 빼어난 활약을 한 이호성은 불행하게도 해태 구단의 눈밖에 나서 조기 은퇴 당하고 만다. 회장직에 선출된지 얼마되지 않아 플레잉 코치로 발령 #나며 은퇴 수순을 밟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게 되었고, 결국 2001시즌이 끝나고 구단에서 방출되면서 현역에서 강제 은퇴당하고 만다. 물론 방출된 그를 받아들인 구단은 아무도 없었다. 회장은 현역이 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에 의해 자연스레 회장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로는...

이렇게 냉정히 따져봤을 때 선수협이 2대 이호성 회장 시절 이전이나 이후에 이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38]는 점을 볼 때 선수협 역사상 가장 유능하고 많은 치적을 올린 회장인 이호성이 사실상 강제로 은퇴를 당하고 연쇄살인마로 전락하게 된 과정은 일부에서처럼 희화화의 대상이 아니라 정말로 비도덕적 의미에서 불행한 사례가 맞다. 또한 선수협 반대파의 대표주자니 어용이니 하는 식으로 욕 먹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장직을 맡은 게 이호성인데, 이후 2019년 기준으로 20여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호성보다 더 뛰어난 선수협 회장을 배출해내지 못한 현실 역시 선수협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39]

5.1. 3차 선수협 파동 (외국인 선수 슬롯 갈등)

뛰어난 추진력으로 1년간 여러 성과를 낸 이호성은 선수들 및 대중들에게 유능한 회장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보스 기질이 충만했던 이호성은 이러한 여론의 긍정적 분위기 속에서 회장으로서의 자신감이 다소 지나칠 정도로 부풀었고, 한편으로 해태 구단에 의해 플레잉코치로 발령나고 사실상 강제로 은퇴 수순을 밟게 되는 암담한 상황에 몰리자 불행히도 시즌 막판에 무리수를 두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게 된다.

2001년 9월 20일 선수협은 다음 시즌 외국인 선수 보유 상한선을 3명에서 2명으로 줄이지 않으면 2001시즌 포스트시즌 전 경기를 보이콧하겠다고 폭탄선언하면서 제3차 파동이 일어났다. 선수협 측은 연초 김한길의 개입으로 선수협이 결성될 때 사장단이 용병을 2명으로 줄이기로 구두 약속했는데 사장단이 이를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간 선수협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젊은 야구 팬들과 네티즌들이 이에 반발하고 나섰다. ‘당신들은 명색이 프로 선수들인데 수준 높은 경기력을 보고 싶은 야구 팬들의 볼 권리가 최우선 아니냐’고 선수협의 주장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야구 팬들은 '외국인 선수를 확대해도 시원찮을 판에 선수들의 자기 밥 그릇 챙기기가 너무 심한 것 아니냐'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그간 선수협을 지지해줬더니 결국 이렇게 자기 밥그릇만 챙기며 팬들을 배신하는 거냐는 원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그 때까지의 성공적인 일처리에 지나치게 고취돼 이러한 여론을 못 읽은 이호성과 선수협은 10월 4일 대의원총회에서 찬성 43표,반대 4명의 압도적 찬성으로 외국인 선수 고용제를 현행 팀당 "3명 등록, 2명 출전"에서 "2명 등록, 2명 출전"으로 줄이지 않을 경우 포스트시즌 경기를 거부하기로 입장을 확정했다. # 이로써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선수들의 보이콧으로 포스트시즌이 열리지 않을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같은 선수협의 결정이 내려지자 야구 팬들의 비난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야구 팬들의 축제인 포스트시즌을 볼모로 선수협이 이같은 결정을 내리자 야구팬들의 여론은 선수협으로부터 급격히 등을 돌리게 되었다.

결국 그동안 선수협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을 조성하는데 큰 힘이 되어주던 젊은 야구팬들과 네티즌들의 지지가 급격히 떨어지게 되자 결국 포스트시즌 보이콧이라는 폭탄선언을 했던 선수협는 보이콧 입장을 철회하고 물러서고 말았다. #

선수협이 제대로 출범한 첫 회에 회장 이호성이 의욕적으로 활동하며 선수들의 이해관계를 하나둘씩 관철해나가자 구단들은 상당한 위기 의식을 느꼈다. 그러나 결국 이호성이 의욕과다로 막판에 가장 중요한 야구 팬들의 의사에서 한참 벗어난 자충수를 범하며 여론의 역풍을 맞게 된 덕분에 해태는 예상보다 손쉽게 힘 떨어진 이호성을 강제 은퇴시키며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수협이 외국인 보유 상한선을 줄이겠다는 기존의 입장까지 철회한 건 아니었다. 포스트 시즌을 보이콧 하겠다는 초강수가 오히려 대중의 지지를 떨어져나가게 하는 역풍을 초래하자 선수협은 포스트 시즌을 보이콧 하겠다는 플랜은 접어 팬들의 반발을 무마시켰지만 외국인 선수 보유 상한선을 줄이겠다는 입장은 전혀 변함 없었고, 포스트시즌이 끝나고 팬들과 언론의 관심이 멀어진 비시즌기에 소리소문 없이 물밑 작업으로 조용히 일을 추진했다. 이러한 선수협의 이면적 노력에 힘입어 결국 2002년 2월 용병 보유 상한선이 다시 2명으로 줄어든게 된다. 그리고 이 합의는 알다시피 2014 시즌 외국인 선수 3명 보유로 상한선이 늘어날 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된다.

지나친 강경론으로 여론의 큰 반발을 불러와 홍역을 치렀지만 과정이야 어찌됐든 선수협 입장에서는 끝내 자신들의 목표를 관철하는 성공한 셈이다. 이렇듯 팬들의 지지는 잃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이호성을 비롯한 3기 선수협 집행부가 추진했던 일 가운데 무산된 건 하나도 없었다.

6. 회장 부재 시기

주요 창립 멤버들은 선수협 지도부에서 배제되었고 이후 젊은 세대가 집행부에 나서게 되면서 나중에라도 이들이 다시 선수협 지도부로 들어오는 것이 어려워졌다. 게다가 초대 회장 이호성은 구단의 어용이라는 예상을 깨고 선수협 리더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다 1년 만에 구단에서 강제 은퇴당했다. 프로 선수들 입장에서 총대를 매다 강제로 은퇴 당한 이호성의 초라한 뒷모습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연히 회장을 하겠다며 자청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선수협은 난국을 헤쳐나갈 리더십을 잃고 한동안 표류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회장직이 장기간 공석으로 유지되었고, 회장 대신 간사를 두고 의사 진행이나 대외 홍보 역할만 맡겼다. 간사 제도로 운영됐던 명분은 8개 구단 전체 대표가 각자 평등하게 상의한자는 것이었는데, 실상 회장을 아무도 안 하려고 해서였다(..). 회장을 아무도 안 하려고 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앞서 언급했던 이호성의 사례처럼 구단의 보복에 대한 선수들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되었던 선수협 초기 주축 선수들의 강제 트레이드와 더불어 구단에 맞서던 이호성 신임 회장이 조기 은퇴까지 당하게 되자 모두들 회장직을 맡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경주에서 열린 선수협 총회 당시 양준혁이 FA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까지 들리자 이종범, 유지현 등이 회장직을 고사하는 등[40] 더욱더 회장직을 기피하게 되었다. 당시 기사

회장 문제를 떠나서, 당시 선수협은 운영진 구성 방식 자체에 큰 문제가 있었다. 각 구단별로 5명씩 대의원이 정해졌는데, 각 팀의 주장은 자동적으로 대의원이 되며, 이들이 대의원 대표로 자동임명된다는 것. 주장이라는 자리가 민주적인 절차로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선수협 활동을 전제로 한 자리도 아니다. 심지어 구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임명되는 주장도 있었다.대표가 구단 스파이 내지는 쁘락치 게다가 같은 대의원이라 해도 대의원 대표이자 팀의 주장이니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7. 김동수 - 이종범 회장 시대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선수협에서는 2004년 12월에 현대 유니콘스의 포수 김동수를 회장으로 추대했으나, 사실상 회장 직함만 줬을 뿐 실질적으로는 간사와 다르지 않았다. 결국 2005년 12월 회장을 다시 선출직으로 하기로 결정한 것이 김동수 시대의 유일한 업적.

이후 KIA 타이거즈 이종범이 회장직에 선출된다. 하지만, 이종범 역시 선수협 운영에 대한 특별한 운영 목표나 의지는 없었고, 단순히 인망이나 유명세 때문에 뽑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종범이 회장으로 있는 동안에도 선수협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외적으로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게다가 이종범 개인사[41]까지 겹치면서 회장으로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다만, 이종범 회장 두번째 해에 선수협 대표 구성 방식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바로 "주장 = 자동적으로 선수협 대표" 방식이 아니라, 각 팀의 협회원들이 팀 대표를 따로 뽑는 방식으로 바꾼 것.

8. 손민한 회장 시대 (2008~2011)

2007년까지의 활동에 대한 반성으로 선수협이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한 선수협 2기 때 부실하게 운영된 원인 중 하나로 카리스마 없는 사무총장의 무능함으로 보고 나진균을 사퇴시키는 대신 권시형 초대 사무총장[42]을 다시 불러왔다. 그러나 이는 결국 잘못된 선택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8.1. 선수노조 결성 운동 (2009)

공식단체로 결성되었으나 노조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했던 선수협은 2007년 말 손민한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본격적으로 노조를 지향하게 된다. KBO와 각 구단은 예나 지금이나 열렬히 반대하는 중이며 요태까지 그래와꼬 아패로도 계속, 최초 선수협 결성 당시 지지했던 팬들도 지금은 양분되어 있는 상황이다. 히어로즈의 문제가 현재진행형인 상황에서 굳이 지금 노조전환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 공감하는 팬들이 많다고는 보기 힘들다. 특히 수술 뒤 기량을 채 회복하지 못했으며, 강병철, 제리 로이스터 등 감독들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다녔던 손민한이 회장을 맡았다는 점을 비판하는 팬들이 적지 않다.

손민한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갔던 가장 큰 이유는 전임 회장이었던 이종범의 활동이 외국인 엔트리 확대 반대로 대표되는 이른바 밥그릇 지키기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사실상 동대문야구장 철거 반대운동을 빼면 활동이 별로 없는 이종범에 대한 반발심리가 강했을 것이다. 이렇게 강경하게 나간 덕분에 2군 선수 복지향상, 대졸 군필자의 FA 취득년수 개선, 일본 선수협의 지지성명 등 눈에 띄는 성과들을 이뤄낼 수 있었다.

LG 트윈스 삼성 라이온즈 선수단의 경우는 선수노조로 전환하는 표결이 이루어지는 협회장소에서 아예 나와 버리기도 했다. 선수들도 고용인이고 노조를 극도로 싫어하는 모기업을 두고 있으니 아예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지만, 매우 아쉬운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표결 당시 삼성 선수들을 이끌고 퇴장한 것은 선수협의 초대 멤버였던 양준혁이었다는 썰이 돌지만, 근거가 없다. 그런 썰이 돌뿐 구체적인 증언이나 근거가 잘 제시되지 않고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강병규가 삼성 선수단의 퇴장을 두고 양준혁이 책임져야함을 이야기하는 몇 줄의 글에서 비롯된 것으로, 양준혁이 선수단 데리고 갔다는 주장을 강병규가 한 것도 아니다.

2010년 9월, 음주운전으로 입건된 이용찬에 대한 처벌 수위가 과하다고 주장했다. 처벌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처벌수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핵심은 '내년도 연봉 동결'. 프로야구 선수의 고용관계는 일반직장과 같이 사용자와 근로자의 관계가 아닌 사업주와 개인사업자인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한 쪽에서 연봉을 확정지었으며, 다음 해의 연봉을 직무 외적인 일로 판결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결정지은 것을 통해 지나친 권익침해를 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애당초 선수협회는 선수의 권익을 보호하는 '이익단체'지 '공익단체'가 아니다. 메이저리그 선수노조(MLBPA)도 어떤 사안이건간에[43] 지나친 권익침해가 일어났다고 하면 선수를 보호하고 나선다. 그러나 국내 프로야구의 현실은 선수협을 이익단체로만 두게 하지 않고 있다. 선수협이 FA 미아가 된 이도형,[44] 최영필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한 것에서도 보이듯이 선수협은 단순한 이익단체로 머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2006년 이후에 선수협이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 비활동기간(12~1월) 준수인데... 이에 대해서는 매년 겨울마다 되풀이되는 논쟁이며 2014년 12월에 전보다도 논란이 격해졌다. 이에 대해서는 하술.

참고로 미국의 메이저리그선수노조(MLBPA)는 1969년 미국 연방노동위원회 의결에 따라 합법적인 노조 지위를 부여받았다. 일본의 경우는 도쿄지방노동위원회는 1985년 11월 일본프로야구선수회가 제출한 노조자격심사를 통과시켰다. 일단 NPB와 구단은 선수를 근로자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지만, 단체협약을 맺고는 있다.

선수협의 현재 상황은 선수협 결성 초기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구단이나 KBO와 1:1로 대화할 수 있는 정도의 위치가 아니며, KBO가 자발적으로 선의에서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으면 각종 위원회나 자리에 참여할 수 없다. 일반회사에서도 징계위원회를 열 때 노조위원들을 참석시키지만, 현재의 KBO는 KBO에서 일방적으로 구성한 상벌위원회를 통해 처벌하고 있는 상황이다. 선수노조를 설립하고자 하는 것은 이 상황을 탈피하여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기 위함이며, 결론적으로는 현재의 MLBPA처럼 단체규약을 맺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8.2. 9구단 창단과 용병 기용에 대하여

2009년 창원시를 연고로 한 엔씨소프트의 9구단 창단 소식에 대하여 환영하는 의사를 표시했다. 동시에 9구단 창단이 제대로 이루어질 경우 기존에 각 팀에서 보유하는 외국인 선수의 한도를 2명에서 3명으로 증가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찬성할 수도 있다고 표명했다. 기존에 외국인 선수 한도에 대하여 외국인 용병 숫자를 2명을 초과하여 기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죽어도 안 된다고 못박아왔었다.

정작 구단들이 9구단 NC 다이노스의 1군 승격을 논의하면서 외국인 선수 보유를 현행대로 하고 NC만 2년간 3명 보유로 하기로 하면서 외국인 선수 한도 확대는 다시 미뤄졌다. #

그러나 결국 9구단과 10구단인 kt wiz의 창단이 허가되면서 기존 구단들의 외국인 선수도 3명 보유, 2명 출전으로 늘어났고 NC 와 kt 는 창단 후 2년간 4명 보유, 3명 출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8.3. 야구게임 초상권 비리 사건 (권시형 비리 사건)

2011년 5월 온라인 야구게임 슬러거의 개발사 와이즈캣이 프로야구 선수들의 초상권을 독점계약하기 위한 로비관련 검찰이 선수협 권시형 사무총장을 기소했다. 선수협 최악의 흑역사의 시작 권시형은 수십억 원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고 선수협에서 간부의 비리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미온적으로 대처한 것으로 밝혀져 개인 차원이 아닌 조직적인 비리로 의심받고 있다. 이후 강병규가 여러 의혹들을 계속해서 주장하며 관심을 끌었다.

결국 각 구단의 대표선수들이 대전에서 모여 이 문제를 집중 성토했고 이어 열린 대의원 회의에서는 당초 손민한 회장과 비리혐의로 재판 중인 간부를 사퇴시키고 이대진을 임시회장으로 임명하려다가 12월까지 현 집행부 체제를 유지하는 것으로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에 FA 파동으로 옷을 벗게 된 이도형은 '고참 선수들이 잘 했어야 했다'면서 선수협 파동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수사과정에서 권시형은 초상권 관련 비리와는 별도로 선수협 기금 16억원을 횡령하여 이를 담보로 사적으로 6억원을 빌려 투자한 사실도 밝혀졌다. 결국 권시형은 배임수재 및 횡령 혐의로 징역 4년과 추징금 23억3000만원을 선고받았다. #

9. 박재홍 회장 시대(2012)

9.1. 신임 집행부의 특별 회계 감사

이 사건을 통해 집행부가 바뀌게 되었으며, 표결 끝에 서재응을 누르고 박재홍이 2011년 12월 9일자로 신임 회장이 되어 특별감사를 시작하였다.

선수협 특별회계감사결과 공식보도자료

12월 15일부터 약 2주 간 회계감사를 실시한 결과는 전임 권시형 사무총장이 거액의 횡령을 한 점이 발견되어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야구게임 초상권으로 커진 선수협의 재정을 유령회사를 통해 마음대로 자기 주머니처럼 빼내어썼다. 그나마 그 초상권 계약 조건조차도 선수협에게 불리하다는 모양. 게다가 전임 회장인 손민한은 자의적으로 3년인 사무총장의 임기를 2018년까지 보장했다. 서로 주고 받은 게 있다는 추측이 힘을 얻는 상황. 이후 박재홍 신임 회장에 대한 야구팬들의 지지가 급격히 늘었다.

박재홍은 투표 결과에 의해 박충식을 신임 사무총장으로 선임했다. 은퇴 이후 호주에서 거주하고 있었기에 현재의 야구계에서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 그러나 이에 대해 각 구단의 대표임을 천명하고 나선 박명환, 현재윤, 이혜천, 김상현[45]이 12월 28일 보도자료를 내면서 반발하였다. 결국 2012년 1월 3일 임시총회에서 긴 토의를 거쳐 박재홍 회장이 박충식에 대한 신임대표 대신 반대파가 주장한 절차 재진행에 동의하여 재투표를 거쳤고, 박충식(182표)- 이도형(139표)- 이종열(4표)- 양준혁(0표)[46] 중에 결국 박충식이 확정되었다. 최종적으로 박충식이 확정되자 반대측에 섰던 3개 구단 선수단도 문제가 봉합되었음을 선언하였다. 한편 박재홍은 입방정 강병규와 거리를 두겠다고 밝혔다. 강병규가 선수협을 쥐락펴락하려 한다는 의혹에 대한 나름의 대처.

사무차장은 투명성을 위해 인터넷을 통해 공모하겠다고하며, 매달 회계감사를 받겠다고 했으나 그건 불가능에 가깝고 6개월마다 하는 것도 힘들다는 지적에 따라 6개월마다 회계자료를 공개하고 감사를 받기로 결정하였다.

박재홍 회장은 1월 3일 임시총회에서 초상권의 대가로 받은 61억 중에 선수들에게 지급된 금액과 경비를 제외한 20억가량이 행방을 알 수 없음을 밝히고, 이에 관한 진정을 인천지방검찰청 부천지청에 냈음을 밝혔다.

9.2. 2012 올스타전 거부 사태

2012년 6월 KBO 임시 이사회에서 10구단 창단에 대해 당분간 유보 결정이 나오자 선수협에서 올스타전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자세한 내용은 프로야구 제10구단 관련 논란 참조. 선수협과 관련된 부분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신의 한 수.

무엇보다도 언론과 팬들이 선수협을 지지하고 있으며, 올스타전 거부 이유가 자신들의 이익이 아닌 프로야구 전체의 이익 문제라는 점에서 강력한 명분이 있다. 게다가 사실상 파업에 가까운 행동이지만, 파업으로 보기 애매하다는 것도 그럴 듯한 부분. 시즌 전체나 일부를 거부하는 파업과는 달리 보너스 성격의 올스타전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다 올스타전에 참가하는 선수는 프로야구 전체 중 일부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파업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만약 실제로 올스타전이 열리지 않게 되면 선수들이 실제로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전례가 될 수 있으므로, 구단 입장에서는 결코 가볍게 넘길만한 문제가 아니다. 이 때문에 시즌 중단이나 징계, 제2의 선수협사태라는 얘기까지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7월 13일, 일단 선수협은 올스타전 보이콧은 철회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KBO로부터 한국시리즈 직후 10구단 창단 승인을 위한 이사회를 소집하여 연내에 10구단 창단을 승인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과 의지를 확인했다."는 공식 발표를 했지만, 구절을 확인해보면 창단을 승인한다는 말은 결국 없다. 구단은 KBO에게, KBO는 다시 구단에게 책임을 돌리며 시간을 끈 꼴. 팬들은 더 강하게 밀어붙였어야 했다며 언짢아하였다. 롯데만 신났다 하지만 선수협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선수들의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그리고 나름 출구전략을 잘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10. 서재응 회장 시대(2013~2016)

2013년 1월, 박재홍이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공석이 된 회장 자리를 서재응이 맡게 되었다. 7월에는 오랜 진통 끝에 '사단 법인'으로써 등기를 마쳤다.

10.1. 임찬규 물벼락 사건

2013년 5월 26일 LG 트윈스 SK 와이번스와의 경기 후 선수 인터뷰에서 일어난 사건. 이날의 경기는 LG의 정의윤의 끝내기 안타로 LG가 1:0 승리를 거두어 정의윤이 수훈선수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인터뷰에서 LG의 임찬규가 정의윤에게 물벼락을 날렸고 그 옆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던 아나운서 정인영도 정의윤과 함께 물벼락을 맞고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다.

KBS N 스포츠 제작 팀장은 위의 사건이 재발한 것에 대해 선수들의 인성을 비난하며 LG의 인터뷰를 보이콧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이에 관해 선수협은 임찬규의 행동에 대해서는 사과하지만 뒤이어 방송사 쪽에서 인성 운운하는 등 집단을 비하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 대처하겠다고 한다. 사과의 뜻을 밝히는 입장표명이라는데 내용은 어째 사과 반 선전포고 반이라서, 모든 운동선수들을 싸잡아 비난하기에 선수협 측을 지지하는 의견과 사과를 할 거면 확실히 해야지 거기에 무슨 협박이 들어가냐 사과의 뜻도 모르냐며 비난하는 의견이 엇갈리는 덕분에 선수협 홈페이지 서버는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10.2. 야구 기록사이트 kbreport 오픈

홈페이지

기존에 있던 스탯티즈와 이닝이 사라진후 야구 기록 사이트가 전무한 상황에서 2013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에서 "우리가 스탯티즈를 인수하겠다"라고 밝혔다. 그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2014년 4월, 박동희가 블러그에서 kbreport가 개장된다고 밝혔다.

웹 디자인은 조금 아쉽지만 그동안 야구기록에 목말라 했던 팬들의 기대치에 만족할만한 사이트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이다.

10.3. 비시즌 단체훈련 금지 관련 논란

한국프로야구는 창립부터 선수활동시기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고 바뀐적이 없다. 그 조항에 비추어 보면 활동기간이 아닌 시기는 자동으로 비활동기간이 되며 이때는 당연히 구단에 의한 단체훈련을 할 수 없다. 애초에 연봉도 활동기간 10개월 동안만 나눠서 준다. 비시즌 동안 서류상 실업자인 선수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권리행사지만, 처음부터 이것은 무시되어왔고 프로초창기에도 용기있는 기자들에 의해 지적을 당해왔으나 한국사회 전체가 긴 근로시간과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받던 시기가 아니라서 그냥 넘어가는 실정이었다. 소위 다음 시즌 잘하자고 훈련하는데 왜 반대하냐는 논리가 깔린 것이다. 2000년대 초 선수협이 생기는 과정에서 최저연봉 상승 뿐 아니라 비활동기간 단체훈련 금지도 수면위로 올라왔다. 그러다가 2008년 말 단장회의에서 당시 단장들은 '비시즌 훈련금지'를 결의하였는데, 이는 훈련을 강조하는 SK가 2007년과 2008년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를 모두 쓸어 담자 SK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너도나도 캠프를 차리는 악순환이었다. 김성근이 저렇게 훈련을 많이 시키니 우승하는 것 아니냐? 너희들은 놀면서 잘하려고 하냐는 압력은 구단 고위층 뿐 아니라 팬들 사이에서도 나왔다. 이런 현상 때문에 당시 선수협 회장 손민한 을 비롯하여 비시즌 단체훈련 금지 결의안을 지키라는 목소리가 선수들 사이에서 높아져갔고, 이에 다음과 같은 규정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합동훈련은 구단 코칭스태프가 관여된 훈련을 뜻한다. 3년차 이하 선수·군 제대 선수·재활 선수는 비활동기간에도 합동훈련이 가능하다. 구단 시설을 이용해도 되고, 구단 코치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 재활 선수의 경우, 연차에 상관없이 구단이 11월말까지 진단서와 명단을 제출해주면 된다. 명단에 포함된 선수들은 구단 시설과 구단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규정이 실질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후임 박재홍 회장 때 부터이다. 김성근 감독의 경질 이후에 이 규정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비시즌 단체훈련 문제가 김성근이라는 사람의 존재와 상당히 관련이 깊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이 현역으로 복귀한 이후에, 비시즌 단체훈련 문제는 마치 운명처럼 다시 수면위로 올라오게 된다. 이 문제가 언론을 통해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한화 이글스 김성근 감독이 재활선수 명단에 김태균, 김태완 등 상대적으로 부상정도가 경미한 선수들을 포함한 주전급 20명을 재활훈련 명단에 포함한 것이 확인된 이후였다. 이에 선수협은 총회를 거쳐 비시즌 단체훈련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고, 투표를 통해 야구규약 제 144조에 규정되어 있는 '비활동 단체훈련 금지'를 지킬 것을 재확인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벌금을 부과하는 등 강력한 제제를 하겠다며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이 규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재활훈련이 금지된 것이다. 아래에서 다루겠지만, 재활훈련은 그간 2군선수들과 신고선수들을 위한 규정이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1군선수들을 위한 훈련으로 변질된 상태였다. 박충식 사무총장 역시 재활훈련이 실질적으로 기량향상을 위한 추가훈련으로 변질될 것을 우려하여 재활훈련을 폐지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한화 이글스 구단은 재활훈련을 위한 오키나와 훈련 일정을 출발 직전 취소하였고, 김성근 감독은 “비시즌활동 단체훈련 금지는 자살행위”라는 인터뷰를 통해 비시즌 단체훈련 금지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여러 포털의 댓글에서 확인되듯이, 이 조치는 여론의 상당한 반발에 부딪쳐야 했다. 성적을 올리기 위한 훈련이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느냐는 것이 주요 논지였다. 이 문제가 단장들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고, 아래에서 설명할 선수들의 계약과 관련이 깊은 부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선수협의 강경한 태도는 일단 맞는 말이다.

거기에 원칙적으로는 이 시기 구단의 비시즌 기간에 선수가 심각한 부상을 당한다 하더라도, 구단은 그 선수를 책임질 의무가 없다. 어떤 선수가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훈련에 참가하려 하겠는가? 정말로 성적이 절실한 2군 선수들이다. 임수혁선수 사건 이후로, 그리고 야구팬의 수가 증가한 이후로 구단은 선수들의 의료적 지원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지만, 그것은 1군 선수들의 이야기이고 2군 선수들은 훈련 중에 부상을 당한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2군 선수들의 처우를 앞세우면서 비시즌 기간의 훈련에 대해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주장이다.[47]

선수노조와 비활동기간 준수 등의 문제도, 여론에서는 있는 놈들의 자기 뱃속 챙기기라는 비판을 듣고 있지만, 그 근원을 논하자면, 구단에 근무하고 임금을 받는 사실상의 근로자인 야구선수를 구단측의 편의로 개인사업자로 보는 것이 야기한 것이다.

처음부터 비시즌 기간을 근무기간으로 인정하고 계약서 쓰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며, 다들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현행 제도상 프로야구 선수들은 개인사업자로 분류되고 매년 10개월짜리 고용계약을 받은뒤 2개월동안 서류상 실업자로 지내다가 재취업하길 반복한다. 엄연히 비시즌도 근무활동의 연장선(시즌 준비)에 있음에도 이를 계약서상에 빼는 건, 1년 12개월 전체계약을 할 경우 프로야구 구단은 선수들에게 현행법상 퇴직금을 지급할 의무가 생기고 4대보험도 직장보험으로 의무가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법리상 근로계약 중단없이 2년 이상 계약이 지속될경우 무기계약직 전환되어 해고가 제한되는 노동법 법리까지 인정받아서 선수단 인원제한이나 임의탈퇴같은 제도를 근본적으로 다시 써야한다. 1982년 프로야구의 출발때부터 구단이 지출해야하는 노동법상 선수의 권리와 복지에 들일 돈을 주지 않기 위해 정부와 프로야구협회가 선수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규약을 만들어 쓴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

따라서 모든 프로야구 선수들은 이렇게 개인사업자를 내고 매년 3월 구단과 10개월 계약이란 것을 하게 되고, 선수들은 12월 1일부터 2월까지 백수로 지내다가 재취업하는 것을 반복한다. 결국 비시즌 훈련은 계약서도 쓰지 않은 백수를 "지금까지 일했으니까 너 돈 안 받아도 나와서 훈련해"라는 말과 똑같다. 당신이 일개 아르바이트생이라도, 계약서도 쓰지않고 급여도 못받는 일을 두달동안 하라면 하겠는가? 돈을 못 받는 건 둘째치고 프로훈련이라는 육체적 고통과 부상의 위험이 매우 높은 일을 추가근무 수당은커녕 다치면 보험처리도 안 되는 일을 자기 돈들여 하는 것이다.

현재의 계약된 근로자로서의 지위를 보장해주면 비활동기간 문제는 생길 이유가 없지만 그것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그 무슨 전과를 들먹이며 선수협 측의 변명을 봉쇄해도, 이것이 근본적 원인임은 부정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사실 선수들에게 최상의 결과는 단체훈련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두 달에도 돈을 줘가며 훈련시키는 방식으로 '비활동기간 준수'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지적한 글 구단들은 저연봉 선수들이 훈련비용에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단체훈련을 하자고 하지만, 그렇다면 연봉을 올려면 해결되는 문제인데 실제로는 최저연봉 인상에 매우 인색한 모습을 리그 창립부터 지금까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선수협의 고질적인 정치력및 일관적인 협회 운영 철학 부재 및 자가당착이란 말이 전혀 틀리지 않을 정도로 언론 플레이에서 보여주는 무능한 모습에 싸늘한 시선만 받는 것이 현실. 따라서 인과응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한편으로는 제도가 어느 방향으로 바뀌던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선수들은 무명 2군 선수들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재활훈련을 금지시키면서까지 비활동기간을 준수하게끔 박충식 사무총장이 강하게 주장한 배경에는 2군선수들의 처우 문제도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군 선수는 어차피 해외에 가지 못한다 고 선수협 관계자가 인터뷰한 것을 보면, 재활훈련도 구단은 이미 1군 선수들과 1.5군 선수들에게만 코치를 붙여서, 해외까지 내보내며 수행하던 중이었다. 재활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여 기량 향상을 위한 훈련이었다고 선수협이 판단할 근거는 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화에서 주전명단이 대거 포함된 재활훈련 명단을 받아든 이후에 재활훈련 폐지를 선언한 것은 명백하게 선수들의 무기명투표를 통해 의결된 것임음 분명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말 명단이 문제가 있었는지에 대한 지적도 있다.

계약과 관련된 문제 이외에도, 재활훈련이 과연 선수의 재활에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정말 재활이 필요한 선수들은 재활이 아닌, 의료시설에서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세심한 관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단 트레이너가 아무리 전문가라 할지라도 부상정도가 심한 선수들은 트레이너의 역량 밖일 수밖에 없다. 다른 예를 들면, 해외축구에서는 구단 트레이너의 역할과 구단 의료진의 재활치료가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그런 분업이 삼성 라이온즈를 제외하고는 확실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의 부상을 입은 선수는 회복하지 못하거나 원래의 기량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런 선수들이 병원에 입원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냐는 병원만능주의 역시 등장하고 있는데, 4대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병원비를 모두 자비로 부담해야 하는 선수들의 입장을 생각해볼 때 이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나마 1군 주전급의 선수들은 구단의 배려를 받아 일본이나 미국 등에서 전문적인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신고선수나 2군 선수에게는 얄짤없다. 그리고 병원의 재활치료 과정과, 구단 의료진의 재활치료 과정, 트레이너의 관리작업은 해외의 경우 각각의 전문적인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병원이 다가 아니라는 것. 모범사례로 바이에른 뮌헨이 있다.

선수협의 기자회견이 있은지 며칠후 넥센 히어로즈가 선수협의 결의안을 어긴 사실이 보기 좋게 발각되었다. 하지만 선수협 측은 강경한 입장을 전달했을 뿐 징계는 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자가당착에 빠졌다는 비판을 피해가기가 어렵다. 박충식 사무총장의 발언을 되짚어 보면, 그는 인터뷰에서 "한화에서는 개인 운동이라고 하는데, 코칭스태프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어떻게 개인 운동이 되는가."라고 말했었으나, "넥센의 경우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훈련을 했다. 코치들은 선수들의 요청에 조언을 해줬다고 한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충식 사무총장은 거기에 더해 한화 이글스와 김성근 감독을 논란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완전히 기름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박충식 사무총장의 인터뷰의 요지는 이번 비활동기간 활동금지 규정 위반 사태의 원인이 김성근 감독에게 있다는 것으로, 한화의 전 감독인 김응룡 감독도 취임했을 때 하려고 했으나 선수협의 입장을 듣고 뜻을 철회하는 등 그동안 잘 지켜지고 있던 규칙이 김성근 감독의 12월 해외 전지훈련 진행 시도와 비활동기간 활동금지 비판으로 인해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넥센의 경우 "규칙에 위반되는 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나면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고 했으나 뒤에 “어떻게 보면 넥센도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 한화 김성근 감독이 정해놓은 규칙을 준수하지 않으려 하면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라는 말을 덧붙여 결국 이번 논란의 원인이 김성근 감독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물론 박충식 사무총장의 다른 인터뷰를 보면, 김성근 감독은 마무리 훈련을 12월까지 연장하려고 했었다. 여기에 마무리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에 비시즌 훈련에 대한 반대의견을 야구계에 영향력이 매우 강한 김성근 감독이 낸 것을 보고 비시즌훈련의 근간이 흔들렸다고 선수협이 판단할 근거는 충분히 있었다. 게다가 이 문제가 김성근 감독과 무관하지도 않은 점을 고려한다면, 선수협의 예민한 반응은 이해할만 하다.

결국 선수들이 제대로 된 지위를 가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현 야구계의 총체적인 시스템의 문제가 이번 비시즌 기간 훈련 문제를 통해 촉발된 것이다. 그러나 선수협은 문제의 총제적 원인인 구단들을 공격하지 않고 엉뚱한 사람을 타깃으로 잡았다. 이것이 아니었으면 선수협의 행동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12월 19일, 선수협은 훈련 가이드라인을 다시 제시했다. 여기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재활선수의 훈련 참가 여부이다. 선수협은 기존의 재활선수 훈련 참가 금지 입장에서 크게 후퇴하였다.
신인선수, 군 제대 선수, 재활 선수, 신고 선수의 경우 구단이 단체 훈련을 할 수 있다. 단 재활 선수의 경우 수술을 했거나 지난 시즌(2014시즌)에 경기에 나서지 못했거나 앞으로 수술이 예정되어 있는 선수를 뜻한다.
말 그대로, 1군경기에 참여하지 못할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던 선수에게만 재활훈련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박충식 사무총장은 이번에도 2군선수가 재활훈련에 참가하지 못하는 현실을 강조하였지만, 여전히 아무 죄 없는 한화 이글스와 김성근 감독이 재활훈련을 악용하려 했다는 태도를 고수하면서 악화된 여론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숨은 이유가 2016년 5월 11일 알려졌다. 선수협에 구원을 요청한 건 바로 한화 선수였다.
SK 시절과는 달리, 김 감독은 한화에서 선수단 장악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 감독은 과거부터 강도 높은 훈련을 체벌처럼 활용해서 자신의 권위를 세워 왔다. 한화 부임 직후에도 마무리훈련에서 주력 선수들을 초주검으로 만들면서 기선제압에 나섰다. 마무리훈련이 끝난 뒤에는 곧바로 대규모 국외 전지훈련을 계획했다. 비활동기간인 12월에도 휴식 없이 지옥훈련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선수단에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국 한화 최고참 선수가 총대를 메고 선수협에 구원 요청을 했다.
선수협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선수협은 과거 김성근 감독의 SK 시절에도 비활동기간 준수 문제로 대립한 바 있다”며 다음과 같이 전했다. “김성근 감독이 리그에서 사라진 이후,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는 비활동기간이 정착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김 감독 복귀와 함께 다시 비활동기간을 무시하고 대규모 팀 훈련을 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선수들이 거듭 문제 제기를 하자 선수협이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당시 선수협이 이례적으로 김성근 감독과 강하게 대립각을 세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김성근과 한화의 잘못된 만남

10.4. 선수협이 기득권을 위한 단체이다?

위에서 얘기한 비시즌 단체 훈련과 관련해서 음모론이 퍼졌다. 이 음모론의 구체적 내용들을 보면
1. 선수협은 기득권 스타 선수들이 구성하고 있다.
2. 2군 선수 재활 선수들의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는 기관이다.
3. 2군 선수, 재활 선수들은 비시즌에도 단체훈련을 하고 싶은데, 기득권층에서 그들의 기량이 좋아지면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 비시즌에 훈련을 못 하게 하는 목적으로 선수협의 여론을 강압적으로 조성하였다.
이 내용들은 쉽게 반박이 가능하다. 일정 경력 이상을 쌓은 스타급들이 선수협 간부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할 것인가? 그들이라고 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협회장만 해도 투표로 결정되며, 각 팀에서 1명씩 선수협 간부를 의무적으로 맡아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스타급이 간부자리를 차지하는 게 불만이라면 2군급 선수들이 하면 될 텐데 과연 그들이 하려고 할까? 팬들도 야구 못해서 2군에나 있으면서 감투 쓰고 있다고 말할 게 뻔하다. 선수협에서 1군, 2군 할 것 없이 600여명의 선수가 모인 총회에서 처리한 안건이 바로 비시즌 단체 훈련 금지 조항 재확인이다. 프로야구 구단에는 주전급 스타선수들보다 비주전, 2군 선수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1인 1표인데 이 안건이 총회에서 처리되었다는 것은 2군 선수들도 이에 동의한다는 뜻이 된다. 그런 사안을 제 3자가 나서서 "이번 결정은 선수협이 2군선수의 인권을 생각하지 않는 걸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건 코미디나 다름없다. 그리고 총회에서는 비밀투표를 통해 해당 안건을 처리하였다. 무슨 투표함을 빼돌렸다는 식의 구체적 정황이 있다면 모를까, 선수협의 저 결정에 특정 몇몇 스타들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볼 만한 근거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이런 근거 없이 무작정 음모론이 퍼진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여기가 최고인 것 같아요". 정근우(한화)는 괌에 들어설 새로운 야구장 부지를 보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이하 선수협)는 지난 2일 정기총회를 열고 괌 관광청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괌 관광 활성화와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의 복지 향상이 주된 목적이다. 선수협의 서재응(KIA) 회장은 "이번 MOU를 통해 2~3군 선수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서재응 회장과 이호준(NC)·박진만(SK) 이사, 정근우(한화)·김주찬(KIA) 등은 괌 관광청의 초청으로 지난 8일부터 괌 현지의 훈련 시설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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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충분치는 않지만 선수협은 괌과 협력해서 2~3군 선수들이 적은 비용으로 괌에서 훈련할 수 있도록 노력했고, 저 기사에 나오는 선수협의 한화 대표가 누구인지 유심히 보라.

10.5. 비시즌 단체훈련과 관련한 선수들의 인권 문제

결국 비시즌 단체훈련 논란이 커진 것은 박충식 사무총장이 넥센과 한화 관련해서 대처과정에 공평치 못한 대응과 말실수를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일부에서는 어떤 직장이 일년에 10개월만 일하고 2개월을 쉬느냐는 원색적 비난도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기준으로 남도 똑같이 일한다고 착각하고 실제로 선수들이 어떤 식으로 시즌을 치르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프로야구 선수는 주5일제가 아니다. 5일 일하면 주휴 하루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경기 있는 6일동안은 경기장에서 10시간 이상 경기 준비와 훈련, 본경기를 위해 일터인 구장에 나온다. 민족의 양대 명절이라는 추석과 설날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 부인이 출산 시에도 맘대로 가지 못하며, 부모가 위독할 때 임종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즌 중에도 마찬가지지만, 전지훈련 시에는 더욱 자유가 없다. 더욱이 위에도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비시즌 중에는 급료는 커녕 부상을 당해도 구단이 절대 책임지지 않는다. 계약조차 되어 있지 않으니까. 프로야구 선수는 서류상으로만 개인사업자이자 자영업자이지 실질적으로는 구단 스태프, 감독, 코치의 지시,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들의 결정으로 경기 출장을 못하는 불이익까지 감수해야 하는 실질적으로는 근로자이다. 그나마도 1년 내내 고용되어 일하는 정직원이 아니라 4대보험, 퇴직금을 피하려고 10개월 단위로 계약하고 2개월 동안은 구단에서 1원 한푼 나오지 않는다. 비시즌 훈련이라는 것은 단순히 돈을 받냐 못 받냐의 문제가 아니라, 아무런 권한도 없는 구단이 "나와서 훈련해, 단 다치면 치료비는 없다"라는 잠재적 압력을 거부할 수 없는 선수들의 인권이 달린 문제다.

2015시즌 중에 롯데 손아섭 선수가 부친의 임종을 보지 못할 뻔한 사건이 터지면서 롯데 코칭스텝의 선수인권 유린이야기가 나오지만, 실제로 손아섭이니까 불거진 것이지 대다수의 선수가 아예 말도 못하고 임종을 못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송은범 선수가 부모님이 이혼하고 막노동까지 하면서 자신을 키워준 조부의 발인식에 가고 싶었으나 당시 감독이었던 조범현 감독이 못하게해서 임종도 못보고 깊은 상처를 입었고, 김성근 감독은 2군 코치가 2군 경기 없는날 조부제사에 갔다왔다가 전쟁 중에 장수가 어떻게 이탈을 하느냐며 심한 질책을 했던 사례도 있다. 그리고 본인은 송창식을 벌투시키고 경기중에 아픈 걸 핑계로 튀는 막장 행위를 보여주었다 더욱이 무명 선수의 경우는 아예 부모가 사망할 때 전지훈련 기간이면 아예 알리지 않는 것이 미담처럼 나오는 판이다. 이 자체가 많이 이상한 것 같은데...?

저니맨 최익성 선수는 시즌 중에 경기장 근처 얻은 방에 빨래를 물에 불려놨다가 졸지에 트레이드가 되는 바람에 몇 달이 지나서야 다시 그 집에 가서 썩은 빨래를 치운 사례가 있다. 즉, 자기 자신을 돌볼 시간적 여유가 없다. 이렇듯 야구 이외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를 챙길 여유 따위는 없다. 비단 야구뿐만 아니라 프로 스포츠 선수들은 선수생활이 길어질수록 감옥 아닌 감옥 속에서 경기와 훈련만 하게 되고, 따라서 점점 더 사회, 심지어 친구, 가족과도 멀어진다.

물론 평생 야구란 직업으로만 먹고 살수 있고, 장가 잘가서 부인에게 통장에 충분한 돈만 넣어주면 나머지는 부인과 가족들이 알아서 해결주는 스타 플레이어들은 아무 문제가 없을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스타가 야구판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다. 장윤정처럼 돈벌었더니 엉둥한 놈이 펑펑탕진하는 경우는 가족이 원수지만 1년동안 드래프트에 600명이 나오지만, 그 중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는 선수는 100명 남짓이다. 그리고 그 100명 중에서 몇 년 안에 대다수가 운동을 그만두게 된다. 즉, 그 드래프트에 나온 600명 중에서 최대 10명 정도만이 선수로써 돈벌고, 나중에 코치나 해설가 등으로 평생 야구만 보고 살아도 문제없는 경우가 되고 나머지는 대부분 야구 이외의 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게 현실이다.

반면 최저연봉 2,700만 원(2018년 기준)[48]만 받고[49], 선수생활이 언제 끝날지도 알수없는 무명 선수와 비주전 선수에게는 사회와 잠시라도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 더욱 절실하다. 가족과 여행을 가거나, 오랜 친구와 술 한잔하면서 인맥을 유지하는 등등의 소통을 할 수 있는 시기는 1년 중에 이 때밖에 없다. 아무리 친한 친구도 10년동안 안 만나면 서로 할말이 없어진다.

최근에서야 학생 체육 선수들에 관한 제도가 바뀌어서, 중고교 선수들은 정규 수업을 반드시 듣고, 방과 후나 주말에만 훈련 및 경기 출전을 할 수 있다. 물론 야구와 학업을 병행해서 좋은 학자가 나온다면 더욱 좋겠지만, 우리는 그 선수들이 수능을 쳐서 명문대를 가는 것까지 바라진 않는다. 교실에서 야구부원이 아닌 친구들과의 생활도 해보고, 다른 아이들이 노는 것처럼 놀아봐야 기본적인 사회성과 인성을 함양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제도를 시행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학생들이 운동만 하지 말고 사회에서도 참된 사람이 될 수 있게 가르치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장성우 사생활 폭로 사건 당시 조범현 감독이 주전 포수를 전반기에 출전시키지 않는 리스크를 각오하고 남긴 명포수로는 못 만들어도, 된 사람으로는 만들겠다.는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50]

이런 사례는 예체능이 다 비슷한데, 인생을 피겨에 올인한 김연아가 그저 그런 성적으로 은퇴해서 사회에 나왔다면 앞이 막막했을 것이다. 이런 사정은 연예계 또한 마찬가지라서, 수만 명의 아이돌 지망생 중에 기획사 소속의 정식 연습생이 되는 것은 수백 명에 불과하며, 그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정식 데뷔에 성공한다. 나머지 절대 다수는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 현실이며, 이 중에는 안 좋은 길로 들어서는 경우도 많다. 악성재고가 된 아이돌 연습생들
10.5.1. 운동에만 전념하면 과연 경제적으로 풍요로울까
한국에서는 운동선수에게 100% 운동에만 올인하고 운동으로 성공하는 것 외에는 다른 모든걸 끊는 생활을 하도록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운동기계가 된다면 풍요로운 미래가 저절로 와줄까?

일단 이렇게 죽도록 운동에 매달려봤자 프로진출 자체가 무척 힘들다. 아주 일부의 학생 선수만이 프로에 진출하며, 프로진출한 선수의 대부분 역시 선수생활 이후의 대책은 없는 게 현실이다.
필자는 우선,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운동선수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 얼마나 프로에 들어가는지를 알아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심각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10명 중 한 명만이 프로의 문을 통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경우는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 대학(NCAA) 디비전I 소속 대학 출신 가운데 남자농구의 경우 1.2%만이 프로 입문에 성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자농구는 1.9%.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미식축구는 1.6%에 불과했다. 축구는 1.9%였으며 아이스하키의 경우 불과 0.8%였다. 야구는 9.4%로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볼 때, 대학교에서 운동선수로 뛰었던 선수가 프로에 입단할 수 있는 확률은 불과 2%라는 것이다. 98%는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미국 선수들은 대학 후 진로에 대해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우리나라와 다르다. 이들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제2의 플랜’을 미리 마련해 놓는다. 프로에 들어가지 못해도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직업을 찾기 위해서다. 그래서 대학 4년 동안 공부와 운동을 병행한다. 결국, 졸업과 동시에 이들은 일반 학생들에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중략)...이렇듯 운동선수들이 비록 프로 진출에 실패했다 해도 다른 직업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미국 대학들이 실시하고 있는 ‘운동선수들에 대한 특별 프로그램’ 덕분이다. 운동 선수일지라도 학점이 4.0 만점에 2.0이 되지 않을 경우,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놓고 있는 것이다. 또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현실을 인정하기에 이들 대학은 1대1 과외와 같은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운동선수들의 학업을 돕고 있다.
....(중략)...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너무나 비참하다. 대학을 졸업해도 영어로 입국 신고서를 작성하지 못하는 운동선수들이 부지기수다. 자연히 이들은 프로에 들어가지 못하면, 달리 취업할 방법이 없다. 그나마 메달리스트가 아니면 체육 관련 기관에도 취업할 수도 없다. 설사 운이 좋아 프로에 들어간다 해도 경쟁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
프로에 입단했지만, 불미스러운 일로 중도 하차한 선수들의 그 후 생활상을 접하다 보면 안타까운 사연을 목도하는 경우도 있다. 프로농구 A 선수는 실력도 출중하여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좋지 않은 일에 휘말려 중도에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은퇴 후 그는 마땅한 일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또 다른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고 말았다. 운동선수들이여, 인생의 '플랜 B'에도 충실하라
미국같이 학업과 운동을 겸할 경우 프로운동 선수로 성공하지 못해도 플랜B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지만, 한국처럼 엘리트 스포츠에서 운동에만 올인하면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럼 만약 일부 프로스포츠에서 크게 성공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선수는 인생이 계속 풍요로울까?
‘프로는 돈’이라는 공식으로 통하는 프로스포츠 세계에서 큰 부를 획득한 선수들이 운동 선수 이후 파산하는 이유는 이러한 심리적 요인을 들어 설명이 가능하다.
미국도 스포츠 스타들이 은퇴이후 사업에 뛰어들거나 돈 관리를 제대로 못해 파산하는 경우가 많다. 2009년 3월 미국 스포츠 주간지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지는 ‘운동선수들이 파산하는 이유’라는 특집기사에서 불경기든 불경기가 아니든 간에 많은 NFL, NBA, MLB 선수들이 재산을 탕진해 선수들이 얼마나 많이 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 잡지는 NFL 선수들 가운데 78%가 은퇴이후 2년 안에 파산하거나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으며 NBA 선수들 중 60%가 은퇴 후 5년 안에 비슷하게 재정적인 어려움을 당한다고 밝혔다. 운동선수들이 파산하는 이유
한국이 아닌 미국이 운동선수의 플랜 B가 더 많은 것도 사실이고, NBA나 NFL같은 경우 일단 선수로 뛰기만 해도 최소 수십억에서 수천억의 거액을 벌 수 있는데도 이게 현실이다. 결론은 미국도 운동선수가 은퇴하자 얼마 안 돼서 파산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특히 젊은시절 돈을 엄청나게 벌어도 순식간에 재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경제적으로 실패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스포츠 선수들의 경우에는 운동에만 집중해서 공부를 안 하고, 사회를 모를수록 인생이 파탄날 확률이 높다. 여기에는 NBA가 얼리 엔트리(early entry) 제도를 도입하여 고졸선수를 빠르게 프로구단에 입단시키는 일이 늘어난 것도 큰 원인이다. 그 결과 아직 인성이 덜 발달했고 사회경험이 없는 어린 선수가 프로에서 좌절하고 방황하거나, 성공하였더라도 무절제한 생활을 통해서 망가지고 은퇴 이후 경제적으로 금방 파산하는 식의 경우가 더욱 늘어났다. 대학에 진학한 운동선수들은 학교에서 선수들이 운동뿐 아니라 사회적 경쟁력을 가진 인간이 되도록 지원해 주지만, 그 과정을 거치지 않은 고졸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더욱 사회에 안착하기 힘든 것이다.

거물들 중에서도 은퇴이후 몰락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최근에도 앨런 아이버슨, 커트 실링 등 거물들이 잇따라 파산을 했으며, 한국의 스타 박종팔, 김재엽, 현주엽 등도 경제적으로 몰락했다. 심지어, 이호성은 사업실패로 수십억의 빚을 지고 내연녀 가족을 살해하는 짓까지 저지르고 자살했다. 그 이외에 셀수도 없는 선수들이 경제적으로 급락했다. 커트 실링이야 사업실패가 원인이지만, 앨런 아이버슨이나 타이슨 등은 무절제한 생활과 낭비 등이 주원인이다. 야오밍, 매직존슨, 서장훈, 강호동처럼 은퇴이후 더욱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고 재산도 많이 늘어나는 상황은 아주 일부의 예일뿐이다. 물론 은퇴이후 더욱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대인관계나 사회성 등이 좋은 경우가 많다는 공통점이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 일반적으로 운동을 해서 프로에 진출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고, 프로진출이후에도 경제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생각보다 낮다.
* 특히 운동에만 올인하는 한국의 경우 운동으로 경제적 풍요를 잡지 못하는 대부분의 운동선수는 운동이외의 다른 것으로 평생 재테크를 해야하는데, 운동 이외에 다른 사회생활을 모르기 때문에 적응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결국,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든처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 젊은 시절 경제적으로 성공한 프로 선수가 은퇴 이후 그 경제적 성공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 이유는 사회성 부족이 크다.
* 대부분의 운동선수는 결국 운동이 아닌 다른 것으로 평생 먹고 살아야 하는데 운동에만 올인한 경우 사회성이 부족해서 나락에 빠질 가능성이 더 높고, 운동해서 돈을 많이 번 아주 일부의 경우도 그 부를 유지하거나 다른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사회성과 인성이 상당히 중요하다.
10.5.2. 그렇다면 한국 프로야구선수는 어떨까
위 문단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와 연금, 연봉을 받는 NFL, MLB선수들이 은퇴 후에 겪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서 말했다. 그렇다면 그보다는 대우가 열약한 한국프로야구 선수라면 어떨까?

만화 그라제니에서 간접적으로 다루어진 이야기이므로 다음과 같은 가정을 통해 생각해보자. A라는 선수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드래프트되어 1년차부터 1군에서 2년간의 군대를 제외한 15년동안 2018년 프로야구 선수 연봉의 평균인 1억3883만원을 받으며 선수 생활을 하고 은퇴를 했다고 생각해보자.

15년 동안의 생활 중 세금을 낸다면 월 실수령액이 815만원, 1년간 실수령액이 9780만원이 된다. 15년 동안 받는 총 수령액은 약 15억 원 정도. 일반적인 경우 이 정도면 노후 자금 정도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다.

그러나 연봉 5천만 원의 회사원이 최대한 허리띠를 졸라매고 산다면 연간 2천만 원의 저축을 할 수 있는 거와 달리, 프로야구 선수에게는 몸이 자산이므로 어느 정도의 몸관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렇게 아끼면서 살 수가 없으며, 여기에 구단의 시설 이용료라거나 개인훈련 때의 트레이너의 인건비를 낸다면 위와 같이 저축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운동선수이기 때문에 식비도 무시할 수 없고, 자신의 억대연봉에 취해 유흥비로 쓰는 비용을 생각한다면 저축가능 액수가 한없이 줄어들어 은퇴할 쯤에는 3~4억 정도의 잔고로 35세부터 노후를 살아가야 한다.

물론 은퇴 후에 일자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일자리라는 것이 구단 프론트의 직원이나 해설가, 코치에 한정되어 있고 연봉은 선수 시절의 반도 못 받으며 매년 은퇴하는 선수가 있으므로 고용도 불안하다.

그런데 사실 위에서 가정한 A라는 선수는 현실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매우 성공한 야구선수라는 것이 문제다. KBO의 수준이 올라가면서 고졸신인이 1년차에 리그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경우가 줄어들고, 인재풀의 세대교체가 빨라진 지금은 리그에서 15년 동안이나 선수생활을 한다는 사례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심지어 저 평균연봉이라는 것도 일부 FA와 일류 선수들에 의해 매우 올라간 것이지, 태반의 프로야구선수들은 1억 미만인 경우가 많다.

결국 일부 리그 최고의 선수들을 제외한다면 프로야구 선수들이 복지와 처우를 개선해 달라고 요구를 하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아닌 것이다.

11. 이호준 회장 시대 (2016~2017)

2017년 개막전에 터진 고척돔 참사로 한국 야구리그가 거품이니 비난이나 반발이 큰 와중에 이호준 문서에서 나오듯이 난데없이 승리수당 제도 부활을 선수협이 요구했다고 논란이 된 상황이다. 선수협은 기자회견을 열어 구단과 크보의 프로파간다이며 메리트 요구는 사실이 아니라고 변명했으나, 기자회견 중 요구한 건 메리트가 아니며 복지수당이라느니, 수당이 사라져 구단과의 정이 사라졌다느니 횡설수설. 이후 언론에서 각 구단 프런트에 문의한 결과 몇몇 구단에서는 아직 접촉이 없었다 하고, 몇몇 구단은 주장들이 찾아와 구단 행사를 볼모로 메리트 지급을 요구했다고 한다. 선수협은 기자회견 이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시즌개막에 맞춰 조용히 넘어가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고척돔 참사에 이은 선수협의 안일함으로 인해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되었고 결국 이호준은 이 일에 책임을 지고 선수협 회장직에서 사퇴했다.

11.1. 논란의 중심이 된 메리트 제도

메리트 제도는 흔히 말하는 승리수당으로 구단에서 선수들이 패넌트레이스에서 매 경기마다 승리를 할경우 해당 경기에 우승 공헌도가 높은 선수들에게 상금을 주는 방식이다. 하지만 공헌도라는 시스템 때문에 벤치에 머물러야 하는 저연봉 선수들은 참여를 못하는 게 대부분이고 대부분 연봉이 높고 자리가 보장된 선수들에게 좋은 제도이다. 실제로 이런 상대적 박탈감과 부작용으로 KBO 이사회는 마침내 2016년 3월에 메리트 제도 금지를 선언하였는데... 2017년 3월 28일 선수협에서 메리트 제도 부활을 대놓고 요구한 것이다. 이들이 이를 주장하는 내용은 "작년에 폐지되고서 경기외 참여하는 선수들의 외적부담이 커지고 있어서" 라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선수협은 엄청난 사건을 저질렀는데 "바로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 안 해줄시 구단에서 개최하는 팬서비스 이벤트와 사인 이벤트를 보이콧하겠다."라며 팬을 볼모인질로 삼아 구단에 일방적인 통보를 하였고 이에 관련된 소식이 매스컴이 기사를 내놓으면서 엄청난 논란이 되었다. 사실 메리트가 있었던 시기에도 야구선수들의 팬서비스는 개판5분전이었다. 야까들이 하는 소리도 아니고, 야구팬들이 많은 엠팍에서도 프로야구 선수들 팬서비스 가지고도 파도파도 괴담뿐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는가? 그런 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을 벌인 시점도 별로였던게, 2017년 서울 고척돔에서 열린 WBC에서 국가대표 일부 선수진들의 태도와 2013년 WBC보다 더한 처참한 결과로 현재 한국야구에서의 좁은 스트라이크 존과 이로인한 타저투병타고투저 현상, 2013년부터 너무 판이 커져버린 FA시장에 비해 떨어진 국제 경기력에 대한 야구 팬들의 분노가 쌓인 직후였는데 이제는 팬을 핑계로 자신들의 이익을 높이려는 태도에 10개구단 및 야구팬들이 뒷목을 잡게 만들며 엄청난 비난과 이에 대한 기사가 나오자 결국 그 다음날 29일에 "그런일 없다."라며 와전된 말이라고 주장하면서 구단에 그런 이야기를 통보 하지 않았다는 성명을 표했는데 당연히 대부분 팬들은 "선수협이 여론이 너무 안 좋아지자 말을 바꾸기 시작한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기자들로 인해 일부 구단주에게 물어본 결과 특정 구단은 선수단 주장을 통해 선수협의 이러한 요구를 통보하였다고 하여 더더욱 욕을 먹었다. 이로인해 선수협에 대한 비난이 더더욱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선수협은 해명 기자회견에서 또 한번 사고를 저지르는데...

11.2. 선수협의 개선안 요구

메리트와는 별개로 해명 기자회견에서 선수협이 당당하게 요구한 10가지 개선안을 보면,
  1. FA 등급제 실시
  2. KBO 연금 확대
  3. 육성 선수 보류제도 폐지
  4. 부상자제도 도입
  5. 군 보류 선수 경력 인정
  6. 물가 상승 고려해 1군 등록 시 보장 연봉 (현 5,000만 원) 확대
  7. 최저 연봉 3년마다 조정
  8. 연봉조정제도 개선 (연봉조정위원 선임)
  9. 외국인 선수 엔트리 재검토
  10. 에이전트 제도 차질 없는 시행

당연히 여기서 제일 욕을 먹는 부분은 9번 항목인 외인 선수 엔트리 재검토인데 2012년까지 운용하던 외인 보유 2명을 2013년부터 외인 3명 보유 2명 출전으로 확대하였는데 선수협의 주장은 "외인 엔트리가 많아져서 가능성 많은 선수들이 1군에 콜업이 안 된다."라는 주장을 이제까지 펼쳐왔는데 하지만 외인 엔트리를 확대한 2013년부터 의 미친듯한 활약과 에스밀 로저스, 릭 밴덴헐크와 같은 구속 150이상 되는 강속구 유형 투수진들한테 속수무책으로 삼진 당하거나 땅볼 밖에 못치는 타자 실력이라든가 좁아진 스트라이크 존과 더불어 고교때의 혹사로 구속이 140중반이면 강속구 투수라고 불릴정도로 하향평준화된 투수들은 대부분 외인 타자들을 압도하지 못하는 상황이 나오는 상황에 심지어 4점대 선발투수가 FA로 95억을 받고 결국 150억 받고 한국으로 돌아온 조선 4번타자 등 실력에 비해 너무 판이 커진 FA 시장으로 한국야구가 하향평준화가 될 무렵 옆나라 야구는 대표적으로 오타니 쇼헤이를 필두로 넘쳐나는 고교 유망주 자원과 외인선수 제한을 두지 않아서 국제 스카우터를 고용하여 외인을 다수 영입한 뒤에 실력이 없는 선수는 보내버리고 실력 있는 선수들은 남기는 피터지는 경쟁을 펼치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 1군 선수들은 다양한 외인 선수를 상대를 하기 때문에 실력이 상승한다는 주장에 힘이 쏠리면서 자신의 실력은 생각하지 않고 밥줄만을 지키려는 한국 선수협의 모습에 댓글만 봐도 욕설과 분노가 가득한 상황이다. 귀족협이라느니 이것들이 배때기가 불렀다느니... 이 참에 외인제한은 폐지하고 일본처럼 외인선수를 무제한으로 보유하게 해야 한다는 반응이 대다수이다.[51]

11.3. 장강훈으로 인한 비시즌 훈련 규칙 비판

장강훈이 2017년 12월 7일 휴식을 강제하는 프로야구 훈련할 권리는? 이라는 기사를 올리며 "신인들은 구단에서 마련한 야구선수에 최적화 된 트레이닝 운동기구를 비 시즌에 훈련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사설 체육관서 몸관리를 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으며 정작 이들을 이끌어나가야 할 고액 연봉자 또는 베테랑들은 저액 연봉자 신인들이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며 말 하는 것이 현실" 이라며 내용을 담았다. 이러한 기사로 인해 여러 번 참사와 타고투저, 리그 질 저하에 불만이 많았던 야구 팬 대부분은 귀족 협회,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저 연봉을 짓 밟는 협회라는 비난과 오명을 얻게된다. 물론 그동안 이러한 이미지를 쌓아온 선수협도 인과응보가 있다. 그리고 더욱이 이런 기사로 선수협에 비판이 간 이유는 장강훈이 언급한 고액 연봉자, 저액 연봉자를 부각하며 고액 연봉자들은 언제 해외에 나가서 훈련 할 여유가 있는 기득권으로 저액 연봉자는 구단 트레이닝 시스템을 이용 못 하고 사설 트레이닝 시설도 못 쓰면 겨울에 훈련을 못 하는 피해자로 묘사하는 방식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을 하자면 위의 문단 다시 읽고 오자. 비시즌 단체훈련 금지는 상호 계약상 당연한 것이다.

일반 프로야구 선수들은 기존 월급을 받는 회사원과 달리 시즌 시작인 1월부터 정규리그 마지막인 10월. 즉 10개월 치만 계약을 하며 연봉을 받는다. 그리고 구단에서 10개월 계약 하는 것을 암묵적인 규칙인데 그 이유는 야구선수 한 명을 개인 사업체로 보고 있으며 만약 12개월치 계약을 하면 구단 측에서 4대보험을 보장해 줘야 하기 때문에 10개월 계약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장강훈은 베테랑들은 저액 연봉자 신인들이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라는 말을 비난 했지만 오히려 정상적인 발언이다. 프로는 말 그대로 코칭을 받으면서 코칭 받은 내용에서 자신에게 맞게 자신의 몸을 자기가 스스로 가꾸고 이것을 어떻게 해야 나가는 것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 정상이며, 더욱이 각 선수마다 자신에게 적합한 훈련이 존재하는데 베테랑 본인의 노하우를 가르쳐주면 신인들은 그 노하우를 따라하기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런 발언을 한 것이다.
  • 반론
    다만 이 논리대로라면 코치들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코치는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본인의 습득한 노하우를 가르쳐주고 보수를 받는다. 따라하는 걸 막고 싶다면 코치는 고용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코치 없는 구단은 없고, 선수들 역시 코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차라리 다른 어린 선수들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걸 꺼려서, 즉 자신의 노하우로 신인들이 각성할까봐, 자신이 푹쉬는 동안 어린 선수들이 훈련으로 자신을 따라잡을까봐 불안하니, 다 같이 쉬자는 쪽이 휠씬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덧붙여 고졸 신인이나 저연차 선수들이 자신에게 맞는 훈련법을 찾으려면 먼저 많은 훈련을 해봐야 하는데, 경제적으로 그럴 여건이 안 된다는 게 핵심이다. 그리고 운동인 만큼 선생님이 있고 없고에 따라 효율이 달라진다는 것도 크다. 예를 들어 수학은 스스로 이해하고 푸는 학문이지만, 책만 보고 스스로 고민해서 푸는 것과 인강을 들으며 이해하고 푸는 것 어느쪽이 효율이 좋았을까?

    더구나 고연봉자는 자신의 몸을 관리하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치지 못해도, 헬스케어 전문가를 고용하면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따뜻한 해외에서 훈련하면 된다. 하지만 신인이나 저연봉자는 그게 안 된다. 안 그래도 경험에서 불리한데 경제력이 그 문제를 가중시키는 셈이다.

    • 재반론
      코칭스태프들은 각 분야에서 코칭을 하는 것도 사실이고 본인들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존재인 것은 맞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코치진들은 필요한 존재들이며 이들은 자신들의 노하우를 구단에게 보수를 받고 잠재력 있는 선수들이 애먹는 부분을 최대한 해결해 주려고 하는 도우미들이지만 코치진들도 비활동 시기에는 활동을 하지 않는다. 왜냐면 일을 하는 기간이 명시된 계약사항이고 어찌보면 이들은 셀러입장이기도 하다. 게다가 리그는 다르지만 야구의 본고장 미국리그도 상황도 똑같다. 마이너 리그에서도 시즌 중 코칭은 해주되 메이저리그를 도전하려는 마이너리거들이 코칭을 받은 내용을 자기에게 적합한 강도와 훈련량을 어떻게 정하고 자신의 툴을 얼마나 더 향상시킬 수 있는 훈련을 스스로 챙긴다. 게다가 한국 신인 선수들보다 박봉[52]에 마이너리그 식사도 땅콩버터, 잼, 식빵으로만 버티는 것도 모자라 이들은 겨울내에 생계 문제로 투잡을 뛰면서 자신에게 알맞는 훈련을 스스로 챙긴다. 상술한 반론대로 선생님이 있고 없고 차이가 큰 것은 분명히 있을지도 모르지만 학생들이 공부를 할때 명스승을 붙여도 이를 이해하고 자신의 스타일로 흡수하는 것은 학생의 몫인 것과 프로리그는 엄연히 생존을 위한 경쟁터이고 선수 개개인의 몸상태와 유연성, 파워, 주력 등 본인이 부족한 부분은 선수 본인이 알고 있을 테니 고참 선수의 말은 어디까지나 참고로 하고 자신에게 알맞는 훈련을 하는 것이 좋다. 대표적으로 라이언 킹이라 불리는 이승엽은 투수로 지명되었지만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입단하자 마자 타격재능을 본 코치진과 감독에 의해 타자로 전향했고 이 당시 삼성의 타자진의 베테랑인 양준혁은 이승엽에게 타격 시범을 보여줬는데 다음날 이승엽은 자신이 편하다고 느낀 여러가지 타격 스윙을 보이며 양준혁에게 보여줬다. 이처럼 선배가 시범을 보여줘도 선수에게 맞는 타격폼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회사원이라면 명절에 휴식을 가지지만 프로선수들은 아니다 월요일에 경기를 안 하는 날에는 휴식 또는 훈련을 하거나 나머지 일은 경기를 뛰며 설날, 추석같은 명절에도 캠프에 있거나 경기를 뛴다. 그리고 그들 입장에서는 11~12월은 휴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이며 계약기간도 아니기 때문에 구단 주도 훈련을 뛰는 것에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즉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회사 명부에는 휴가중인데 실적 올려야하니 회사 나오라와 똑같다.
  • 반론
    이것도 반론을 하자면, 프로야구선수들은 자영업자다. 즉, 비활동시기에 매출이 뛰어난 자영업자가 일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건 자영업자의 자유이지만, 매출이 별로 없어서 자기 개발이 절실한 자영업자들의 활동을, 매출이 뛰어난 자영업자들이 제한하는 게 문제인 셈이다. 훈련에 안 나갔다가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돌아올까봐 무서워서. 쉬고 있는 자신들보다 다음 해 매출이 잘 나올까봐 무서워서.

    무엇보다 휴가 중에 일 시키면 개인은 손해를 보고, 회사는 이득을 보지만, 신인들이나 저연봉자들이 훈련에 참가하면 가장 이득을 보는 건 자신이다. 자영업자랑 계약관계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 구단은, 항상 적자라서 야구단 정리하는 게 가장 이익이다. ( ....)

    그런 구단이 비시즌 기간에 선수들 놀게 하면 밥값도 줄고해서 돈도 덜 나가고, 신경 쓸 일도 적어서 좋을 테지만 결과적으로는 팀이 우승하는 걸 보고 싶기 때문이다. 쉬고 싶다는 자영업자에게 훈련을 강요해서도 훈련에 불참했다고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되겠지만, 훈련하고 싶은데 환경이 안 되는 자영업자들에게 훈련장소랑 코치를 제공하지 말라고 하는 불이익 역시 강요해선 안 될 것이다.
  • 재반론
    재반론을 하자면 프로야구선수들이 자영업자인 신분은 맞다. 그렇기에 4대보험을 구단이 보장해주지 않는 10개월분 계약을 해서 계약서에 명시된 기간이 끝난 비시즌 기간, 서비스타임을 못 채운 선수들과 FA상태의 선수들은 신분으로는 구단 소속이나 알맹이는 2월~11월까지의 상호 계약기간이 끝났기에 선수들은 구단이 자발적으로 훈련시설을 열어주지 않을 때 이용을 요구할 명분이 없다.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상호계약상의 관계가 끝났기에 구단측에서도 구단이 훈련시설을 열어주지 않기로 결정한 와중에 해당 년도 계약기간이 끝난 선수들이 열어달라는 요구에 훈련시설을 열어줄 명분조차 없다. 만약 고참들이 신인, 후임선수들의 비상이 두려워했다면 선수협이 아예 비시즌에 개인 훈련을 금지시키는 조항을 만들면됐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고참을 비롯해 선수협은 후임들이 개인 헬스장에서 훈련은 해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해외는 따뜻해서 근육이 경직되지 않아 훈련하기 매우 좋은 것은 증명된 사실이긴 하지만 대다수가 개개인의 투자로 여기기 때문에 구단이 직접 지원해줄 이유도 없기에 지금은 해체되었지만 해체되기 이전 호주 독립리그 구단인 질롱 코리아에 가서 실전경험을 유지하고 싶어하기를 희망하는 유망주들을 파견시켰음에도 선수협은 이를 가지고 반발 혹은 비난조차 안 했으며 어디까지나 구단이 비시즌 기간에 꼼수를 써서 훈련시키려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것이지 선수 개개인의 실력향상과 경험쌓기용 해외 독립리그 출전에는 반발하지 않았다.

    상술하듯 오프시즌에는 계약 기간이 남아있는 코치진도 선수랑 비슷한 계약 기간이라 이들도 영업이 잘 안 된 자영업자의 성장을 위해 코칭을 할 이유와 명분이 없다. 이들은 자신의 경험과 코치생활을 하며 선수들에게 조언과 관리를 해주는 자들이자 구단에게 보수를 받고 선수들에게 이를 제공하는 셀러이다. 이들도 시즌이 끝나면 구단도 이들에게 신인, 저연봉 선수들을 코칭하라는 지시를 내릴 입장이 안 되며 만약 팀성적에 사명감을 가진 코치가 독단적으로 가르치려 할 경우 구단은 아예 선수협하고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 국내야구단 운영이 적자이고 각 구단이 우승하기를 원하는 건 맞으나 이미 구단들은 2001년도에 KBO 회의를 통해 비시즌 훈련 금지라는 규정에 싸인하고 제도화 하였으며 김성근 감독이 SK 왕조를 이끌던 시절 김성근 특유의 강도높은 지옥훈련 효과에 눈이 멀어 각 구단이 합의를 깨며 유명무실 되었다가 무보수 근무에 규정을 지키라며 반발한 서재응을 비롯한 선수협이 들고 일어나서 다시 지키게 되었다. 나머지 구단에게 비판받는 사유가 되고 선수들과도 갈등이 일어나기에 구단측도 안 하는 것이다.

    그 한국보다 수준이 높다는 일본/미국 리그조차 비시즌이면 구단이 자발적으로 열어주지 않는 이상 구단 훈련장을 안 열어준다. 왜냐면 상호계약 기간이 끝났기에 구단측도 선수측도 서로간에 간섭을 할 명분과 권한이 없기 때문이며 일본인 경우 시즌이 마무리되고 10월 중순에 피닉스 리그가 열리고 11월 초~하순까지는 자발적 참가 + 유망주 순위가 높은 자들이 불려가며 이후에는 일본도 비시즌 기간인 12월~1월까지는 구단이 아무런 터치조차 안 하고 1월에 선수단 정리 및 연봉협상을 시작해 부르기만 할 뿐이고 저연봉 선수, 신인 대부분이 휴식을 취하거나 몸상태 유지를 위해 자발적으로 훈련 및 육체노동 알바를 한다. 한국리그보다 수준이 높다는 일본리그, 메이저리그도 이런다. 한마디로 위의 반론은 자영업자라는 사실은 잘 짚어냈으나 선수와 구단은 어디까지나 상호간의 계약을 했기에 터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반론이다.

12. 2차 회장 부재 시대(2018~2019)

12.1. FA 상한선 규제 반발

KBO는 "외인 선수 계약금 상한선 및 국내 FA 총액 상한선을 설정"하기로 한다. KBO 1년차 외인들은 계약금, 연봉, MLB 구단에게 주는 이적료를 포함하여 100만 달러로 제한하는 것이다. 다만 재계약 시에는 다년 계약은 물론 100만 달러 상한선에 속하지 않도록 해 1년차의 동기부여를 강하게 했다. 또한 국내 FA 선수들은 아무리 대어급 FA여도 계약금 포함 80억을 넘지 못하게 했다. FA는 선수의 권리이자 활약하여 큰 돈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에 선수협 측은 크게 반발하였다. KBO측은 반대급부로 FA 등급제[53]와 FA 기간 취득 기간 단축을 제시했으나 선수협은 반발, 저연봉 선수들도 올 시즌부터 적용하는 것은 강력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1.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을 시작으로 2018년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서 터진 일부 야구 선수들이 노골적인 병역특례 수단으로 국가대표 활동을 바라보며 병역이 걸리지 않은 경기에서는 장난을 치고 처참한 국제 경기력에 경각심을 가지지 않고 웃는 것, 2. 고액 연봉 을 받는 스포츠 스타 들임에도 야까가 아닌 야빠 도 인정 하는 프로의 프 자도 못 댈만한 형편없는 팬 서비스, 3. 국제경쟁력도 낮은 주제에 자신들의 가치가 폭락할 요소 중 하나인 외인 엔트리 확대에 결사반대하면서 양보없이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려는 프로선수들의 모습 등에 삭히고 모아왔던 팬들의 분노가 자카르타 참사를 통해 터졌다. 관중 급감은 물론 팬들은 오히려 KBO측을 지지할 정도. 그러나 100억 이상 지불해야 된다며 한숨 쉬던 모 구단 팬들은 매우 기뻐했다 카더라 육체노동자인 환경미화원의 초봉이 4,000만원이고 정년 보장이 되지만 선수들은 1년마다 해고될 가능성이 있다는 망언을 한 탓에 반응은 더더욱 싸늘해졌다. # 뒤늦게 사과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선 여론은 되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기사의 댓글 반응을 잘 보면 "일반 회사원은 잘해야 1억 벌까 말까인데 선수협 귀족들은 1억은 쉽게 버니 귀족 노조[54]이다"라는 내용이 많은데 이에 관해서는 작년 겨울 한 기자가 선수의 연봉 개념을 일반 회사원의 연봉 개념을 일반적인 인상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일단 구단측이 유명 선수들을 비싼 돈으로 사오는 일반적인 이유는 이들을 데리고 오는 돈보다 데리고 와서 버는 돈이 더욱 많기 때문이며 더욱이 팀 전력이 매우 튼실하여 우승도 바라 볼 수 있는 팀이라면 더더욱 시너지 효과를 내며 이익을 가져온다. 간단한 예로 들면 유벤투스가 세계적인 축구 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영입해오자 그의 이름과 번호가 박힌 유니폼 수익이 상당한 것과 관중이 더 많이 오는 시너지 효과처럼 실력이 뛰어나고 먹튀만 안 하면 존재만으로 구단은 그 만큼의 이익을 벌 수가 있다.

다만 한국처럼 구단의 지원금으로 운영되며, 매년 적자가 나는 상황에서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일 뿐이다. (...) 구단이 선수에게 큰 돈을 쓰는 이유는 돈을 벌어오기 때문이 아니라 기업의 자존심을 세우며 우승하기 위해서이기 때문. 게다가 인구의 크기에 비해 너무 많은 구단수도 임금인상에 한몫했다. 인구가 1억 2천이 넘는 일본도 구단수는 12개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린 인구가 고작 5천만인데, 구단은 10개나 된다. 선수가 귀하니 임금이 오를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팬들의 입장에서는 팀이 꼴찌나 하위권에서 계속 맴돌아도, 많은 연봉을 매년 꼬박꼬박 챙겨가고 있으니 팔자좋은 귀족으로 보이는 것. 특히 비밀번호 찍고 있는 구단들은, 전체 연봉이 깎여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프로에 입단하거나 1군에 정착하지 못하고 2군에서만 전전하는 선수 또는 방출당한 선수들은 명퇴당한 회사원처럼 재취업문이 좁아 자금난에 시달리며, 1군에서 꾸준히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한 분야의 전문가임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일반 회사원의 연봉과 1대1로 비교하긴 무리가 있다. 일반 회사면 이사급,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과 비교하는 게 맞을 것이다.

특히 선수협을 두고 FA 상한선 규제가 도입되게 한 것은 자신들이 자초한 일(자뻑과 개판인 팬 서비스, 국제 경기력 저하 및 프로 의식 부재 등)이 많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아쉽게도 KBO는 구단 지출 줄이려고 FA 상한선 규제를 도입시킨 것이지, 선수협의 프로 의식 부재 때문에 FA 상한선 규제를 도입시킨 것이 아니다.

이 제도는 FA 시장이 과열되어 100억 이상을 받는 선수가 나오면서 구단 재정에 악 영향을 끼치자 FA 과열을 식히기 위해 KBO가 개입하여 규제를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데 이 제도 도입으로 벌어질 만한 악영향도 만만치가 않다. 일단 겉으로는 80억 계약인데 뒤로는 구단측이 세금까지 대신 내준다든가 더 주는 이면계약이 다시 생긴다는 점이며 외인도 옛날 30만 달러 상한선이 존재했을 때 겉으로는 30만 달러고 뒤로는 더 줬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던 만큼 이면계약이 부활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80억으로 제한 한다는 것은 선수의 권리를 강제적으로 규제한다는 면도 있다. 특히 이런 상한제 제도는 수도권 구단에게 전적으로 유리하다라는 비판도 피할 수 없었는데, 상식적으로 같은 80억이면 서울팀이랑 지방팀 중에서 십중팔구가 서울팀을 선택할 것이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상한제가 시행되면 웬만한 S급 FA들은 죄다 수도권팀에서 오퍼가 오면 그곳으로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방구단이랑 수도권 구단이랑 전력 편차가 심하게 나는 건 불보듯 뻔한 일이다.

당장 2018년 겨울 서울팀 두산에서 창원팀 NC로 이적한 양의지를 보자. 자녀 교육 인프라, 지역의 입지조건, 여러 오락거리 등 서울이 창원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는 건 초등학생도 알 것이다. 거기에 원 소속팀과 낯선 타팀과의 차이랑 작년 준우승팀과 작년 꼴지팀의 차이까지 고려하면 더더욱. 무엇 하나 두산보다 나을 게 없었던 NC가 양의지 영입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른 것도 아닌 돈이었다. 100억 이상 주기 힘들었던 두산의 사정과는 달리 125억을 주고도 더 줄 수 있었다는 말까지 나오던 NC. 근데 여기서 상한제를 실시한다? 같은 80억이면 양의지가 과연 NC에 왔을까? 양의지 사례만 보더라도 FA 상한제는 수도권팀에 편향적인 말도 안 되는 제도라고 볼 수 있다.

결론을 종합하면 최근 불거진 FA 상한선 제도는 어디까지나 KBO측에 선수협과의 협의도 없이 일방적인 규제안을 내민 잘못이 있다.

13. 이대호 회장 시대(2019~2020)

2019년 3월 24일, 롯데 자이언츠 소속 이대호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신임 회장으로 선임됐다.

2019년 7월 18일, 선수협은 FA 80억원 상한제를 조건부로 수용하기로 언급했다. FA 80억원 상한제 수용에 대한 조건은 FA 취득 기간 단축, 보상선수 제도 폐지, 최저연봉 인상, 재취득 기간 폐지 등의 제도 개선이며, FA 80억원 상한제를 수용하는 것으로 양보를 하며 최대한 많은 제도 개선을 이뤄내려고 하는 행보로 보인다.

2019년 12월 1일, 등급제를 비롯한 FA 개선안 대부분을 수용했다. 다만, 샐러리캡 부분은 아직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 받은 게 아니라 추후에 KBO 측에서 샐러리캡 기준점을 제시하면 선수협 이사들이 각 구단 선수들에게 의견을 물어 수용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 언급했고, 선수협측 요구 중 하나였던 FA 재취득 기간 폐지에 대한 논의는 이사회와 단장들이 모이는 실행위원회 양쪽 모두 안건에 조차 올라가지 않았다고 한다.

2020년 1월 21일 KBO는 이사회에서 샐러리캡 도입, FA 등급제 도입, FA 취득기간 단축, 최저연봉 인상, 부상자명단 제도, 육성형 외국인 선수 제도 도입 등에 대한 내용을 발표했다.

이에 선수협 측에서는 22일 "KBO에서 요구했던 FA 80억원 상한선, 총액 계약금 상한선 30% 이하, 육성형 용병 수락 등 모든 것을 수용했다. 한 가지 요청사항으로 보상선수 제도 폐지만을 요구했으나, KBO는 보상선수 제도 폐지는 협의 자체를 할 수 없다는 취지로 답변하며 수용하지 않고 KBO 이사회 안건으로 상정조차 안 했다"고 반응했다.

결론은 FA 80억원 상한선, 계약금 상한선 연봉 총액의 30% 이하, 육성형 용병 수락등을 수용하며, FA 취득 기간 단축, 보상선수 제도 폐지, 최저연봉 인상, FA 재취득 기간 폐지 등의 제도 개선을 시도하였지만, 그중 FA 취득 기간 단축, 최저연봉 인상, 두 가지만 이뤄냈으므로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았고, 그 협상 과정에 선수협측 요구였던 최저연봉 인상을 빌미로 언론에게 KBO측은 저연봉 저연차 선수를 위하는데, 선수협은 고연봉 선수들을 기득권만을 지키려한다는 식의 내용으로 귀족노조라고 원색적인 비난과, 비아냥을 들어야했다. 인상된 최저연봉 조차도 당초 선수협 측에서 요청했던 4,000만원보다 더 낮은 3,000만원으로 올리는 데 그쳤다.

박동희 야구기자가 선수협에 대한 비난을 했지만 # 주로 판공비 논란에 대한 비난과 오직 FA만을 신경쓴 점을 지적했는데, 후자는 앞서 언급했듯 FA 취득 기간 단축, 보상선수 제도 폐지, 최저연봉 인상, 재취득 기간 폐지등을 이루기 위해 기존에 거부해왔던 협상의 문을 열어두고, 전반적인 제도 개선을 노렸으나, 구단측에서 최저연봉 인상만을 소폭 수용한 이후 구단측은 저연차, 저연봉 선수를 위하는데 선수협측은 잇속만 챙기기 급급하다는 식으로 여론을 형성하여 언론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찾이했고, 선수협측의 요청 대부분을 신경쓰지 않은 채 그대로 경기가 종료되었으므로 선수협이 저연차 선수나 저연봉 선수에대한 제도 개선을 신경쓰지 않았다는 평가는 애매하다.

FA 재취득 기간 폐지와 보상선수 제도 폐지에 대해서는 안건으로 상정 조차 되지 않은 모습은 선수협이 얼마나 힘이 없는지에 대해서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사실 고연봉의 베태랑, 노장이 선수협에 중진으로 있는 것은 구단의 보복성 조치를 최대한 막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들은 KBO측 요구 중에서 야구선수에게 불리한 내용을 거절하거나, 수용하는 대신에 선수에게 불리한 제도를 개선을 요구해야하는 입장에 있다. 요구에 대한 논의도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확실한 내용이 아닌 부분에 대해서 거절하거나 유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엔 그나마 그동안 선수협에서 거절해왔던 내용을 받아 들이면서 그대신 개선하려고 했지만 여론전에 밀려서 수포로 돌아갔다.

13.1. 판공비 셀프 인상 및 갑질 논란

2020년 12월 1일, 이대호 회장과 김태현 사무총장이 사임 의사를 밝혔고, 당일에 회장과 사무총장이 협회 판공비를 2배 인상해 사용했다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해당 논란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이후 그 동안 선수협의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있던 선수들은 11월 25일~30일 사이에 치러진 선수협 회장 선거를 다시 진행하자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

그리고 12월 3일, 김태현 사무총장이 사무국 직원들한테 갑질을 했고, 이를 견디지 못한 직원이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진정서를 냈다는 기사까지 보도되면서 논란은 더 커지게 되었다. #

2021년 4월 7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서초경찰서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배임) 혐의를 받는 이 전 회장과 김태현 전 사무총장, 오동현 고문변호사 등을 모두 불송치하기로 지난달 31일 결정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고발인들에게 수차례 연락했지만 경찰에 출석하지 않았고, 범죄 사실을 특정하지 못했으므로 검·경 수사권 조정에 따라 경찰은 범죄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무혐의로 종결된 것이라고 한다.

14. 양의지 회장 시대(2020~2022)

2020년 12월 7일 열린 제 4차 임시 이사회에서 총 투표수 456표중 103표를 득표한 양의지가 제11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2020년 12월 09일, 입장문을 통해 KBO 실행위원회에서 진행된 2차 드래프트 폐지 합의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재논의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이야기했으며, 만일 2차 드래프트 폐지가 최종적으로 결정될 경우 MLB의 '마이너리그 FA제도'처럼 '퓨처스리그 FA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제고해 달라고 건의했다.

2020년 12월 15일, 부회장에 황재균 김현수, 이재원이 임명되었다.

회장 선임 이후 중고신인과 중고 유망주들의 주 기회인 2차 드래프트 폐지에도 반발 및 유감의사를 밝히거나,[55] 이번 키움의 갑질 및 팬 사찰 사건에도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등 이대호 회장 시절 선수협에 비해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고 있다.

2021년 7월 15일 NC 다이노스 원정숙소 방역수칙 위반 사건으로 사과문을 발표하였다.[56] 하지만 리그가 중단되는 사태까지 일어났는데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며 문제를 일으킨 박석민, 권희동, 박민우, 이명기를 자체 징계한다는 말 등은 전혀 없어 매우 비판을 받는다.[57]

이후 2년 임기가 만료되었고, 새로운 회장이 선출되었으나 당선인이 회장직을 고사하면서 회장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

15. 김현수 회장 시대(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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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수석에 앉아 있었던 이순철은 안전벨트를 하고 의자를 뒤로 젖혀놓고 있어서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전도유망한 후배를 잃고 말았다. 그리고 198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고 선수단 모두가 묘에 갔다. [2] 파일:external/www.amn.kr/2016112806072002.jpg [3] 빙그레 유승안은 불참을 선언한 후 뒷풀이로 술을 함께 마시기로 하고 그 자리에 남아 기다렸으나 대회에 참석한 20명에 포함되고 말았다. [4] 연금 운용을 담당할 업체 선정 및 연금 규모를 얼만큼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옥신각신하느라 실제로 선수연금제도가 실현된 것은 1992년이었다. 1992년 기준으로 선수 1인당 매년 16만8천원씩 총 10년간 납입하면 KBO가 절반을 부담하여 3백36만원의 원금에 대해 20년의 거치기간을 철쳐 총액 5천4백만원을 일시불로 받거나 매월 56만원을 받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연금 보조를 위한 KBO의 분담금은 쌍방울 레이더스의 가입금을 재원으로 삼았다. 이후 선수연금제는 5년마다 물가상승률을 반영하여 재조정을 거치도록 했다. [5] 나중에 2000년 선수협 사태 때도 미슷한 일이 벌어진다. 당시 양준혁과 함께 선수협을 이끄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강병규를 영입했던 SK 사장은 처음에 강병규에게 우리는 선수협을 지지한다고 말했는데 결국 강병규를 내치고 만다. 강병규의 태업이 영향을 미쳤으나 이와 별도로 사장단 회의에서 다른 7개 구단이 강병규를 처리하라고 지속적으로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물론 다른 구단이 SK에 이렇게 강경하게 나온 이유는 창단 초기에 SK가 인수 비용의 지출을 꺼려 쌍방울 인수를 거부하고 스스로 해체하기를 기다렸다가 무적 상태가 된 선수들과 개별 계약을 맺으며 연봉을 후려치며 창단하고, 또한 이 과정에서 타팀의 선수협 관련 제제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려 하는 등 각종 편법적인 행동을 하면서 구단측은 물론 야구팬들의 눈 밖에 난 이유도 있었다. [6]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삼성은 무노조 경영으로 악명 높았다. 그나마 삼성은 예나 지금이나 철옹성이다. 물론 삼성도 노조가 있긴 하다. 근데 그게 어용 몸빵 노조라서... [7] 장효조는 1984년 한국시리즈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큰 에러를 범하며 김시진과 더불어 팀의 우승 실패의 원흉으로 꼽히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에러는 만세 동작을 하면서 팀에 민폐를 줬는데 하필이면 1984년의 만세 사건은 이건희 당시 구단주가 잠실 야구장에서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8] 80~90년대 야구관련 저서로 유명한 이종남 등의 저서 등을 참고. [9] 최익성은 FA 보상선수가 되어서 LG로 가버렸다. [10] 강병규는 이후의 행보 때문에 그 진실성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초기에 선수협 대변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11] 그러나 그는, 선수협 사태 이후 3대 선수협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 [12] 사실 칰무원 조경택도 초반엔 이들 못지않은 대활약을 했다. 그러나 김경기가 전준호 폭행을 하는가하면, 이호성이 사회주의자 드립을 치는바람에 곧 잊혀졌다. 김태형은 당시 네임밸류가 5적 중 가장 떨어졌는지 조경택보다도 묻혔다...듣도보동 그래서 선수협 5적하면 이호성과 김기태, 유지현, 김경기는 무조건 들어가지만, 마지막 한자리는 서술마다 늘 바뀐다. 그나마 근래는 김태형이 감독으로 오래 활동하기도 해 유명세도 많이 얻었고, 과거 OB-두산 출신 선수들의 폭로 아닌 폭로(?)로 원래 구단 내에서 선수단을 강하게 휘어잡던 군기반장으로 알려진 김태형이 5적의 마지막에 들어가곤 한다. [13] 이 양반은 애초에 경기를 연패 하거나 엿 같이 플레이를 한 선수를 보면 존나 갈구는 악명높은 똥군기 스타일 선수였다. 사실 해태에서 똥군기 안 한 인간이 없다 [14] 유지현의 아버지가 LG가 하청을 맡기던 회사의 높은 자리에 있어서 그랬다는 말도 있다. [15] 당시 LG에서는 프랜차이즈 선수 겸 베테랑 김기범과 프랜차이즈는 아니여도 주장인 송유석이 주가 되어 선수협에 참여하였다. 결국, 노장 송유석 FA 신청 + 선수협 때문에 제대로 찍혔고 헐값 FA로 한화로 이적한다. [16] 133경기의 70경기 절반 가량 살짝 뛰었다. [17] 후에 두산 그룹 경영문제로 인해 동생들에 의해 축출되고 자신 몫으로 돌아온 성지건설의 운영을 비관하여 자살한다. [18] 권시형의 비리가 선수협 창단 시절과도 연관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19] 5명의 선수는 전지훈련 중이라 실제로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선수협 측은 이들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고 했다. 또 강병규는 당시 SK에서 방출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수협은 강병규를 포함하여 29명이라 밝혔다. [20] 다만 사이트 제작자는 이승엽을 비난하는 목적보단 선수협 가입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고 밝혔고, 실제로 이승엽이 선수협에 가입하자 사과문을 띄우고 사이트를 자진 폐쇄했다. [21]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김시진을 트레이드 시킬 때와 같이 삼성이 좋든 싫든 욕을 먹게 된 이유가 자기 팀 관리도 못하면서 이승엽 하나는 잘 관리 했다 라는 형식이였고, 김기태는 그냥 공기 취급을 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설의 신빙성을 더하는 이유 중 하나가 삼성은 선수협에 가입하는 선수는 곧바로 퇴단시킨다고 엄포를 놓아 선수단을 단속했음에도, 이승엽이 가입하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22] 손혁은 해태에는 안 간다고 트레이드 거부를 했으나, 후에 팀에 합류하였다. [23] 선수협 반대파 대표선수 중 하나인 김경기도 이 때 SK로 트레이드되었으나 이는 자신이 자원하기도 했고 당시 신생팀이었던 SK 측에서도 흔쾌히 승락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24] 마해영과 심정수, 이 두 트레이드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뻘트레이드가 되었다. 다만 두산도 단 1시즌이긴 하지만 심재학이 2001년 우승의 주역이었던지라... [25] 김응룡이 양준혁 재영입을 원했으나 엘지가 임창용, 노장진 원해서 결렬. [26] 중심타자 둘을 받아오는 트레이드였지만, 팀의 기둥 마무리 투수와 선발 투수를 내주는 건 모험에 가깝다. 특히 김응용 입장에서는, 중무리 투수인 임창용을 내주고 양준혁을 받아왔지만 마무리 부재에 시달린 적이 있었기에 거절했다. [27] 2000년, 2004년 즈음에 시도되었다고 한다. 2000년의 경우 위에 링크된 기사에 나와 있으며, 2004년 트레이드설에 대해서는 추가 작성이 필요하다. [28] 송진우 본인은 2000년 선수협 파동으로 동계훈련을 전혀 안 했는데 이상하게 다음 시즌 성적이 훨씬 좋아졌다고 말했다. [29] 정치인으로서의 김한길은 좋은 평을 받지 못하나, 저 일은 잘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30] 당장 칰무원의 상징인 조경택만 봐도 한화에서 공무원으로 오래 살았으며 김기태도 이승엽과의 계약조건에 맞춰 삼성의 제안을 받아 요미우리에 코치로 파견되었다. 그러다가 LG를 거쳐서 KIA의 감독이 되었다. 또한 김태형도 친정팀인 두산에서 오랫동안 코치를 했으며 2015년 감독 자리에 올라 우승시키기도 했다. 김경기의 경우가 예외(?)인데 김경기는 이숭용과 용병에게 기량에서 밀렸고 결국 자진해서 연고 이전한 옛 고향 연고팀을 떠나서 새로 창단된 고향 연고팀으로 가서 2002년에 은퇴해서 코치를 하고 있다. [31] 양준혁, 마해영, 심정수, 박충식 등은 야구단 아닌 다른일을 주로 하는 상태고, 박충식과 심정수(다만 심정수는 유학 성격이 컸다)는 이민까지 갔다. 과거 1차 선수협 당시 최동원 역시 은퇴 후 야구로 돌아가지 못하고 방송등을 전전하다가 거의 20년 만에 잠시 코치 생활을 했었다. 다만 송진우,최태원,박정태는 역시 코치 생활을 제법 했고, 김재현도 해설위원을 몇 년 하다 2015년에 코치를 하고 있다. [32] 김응용 감독은 우승 청부사로 삼성에 영입된 감독. 그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것이 그 당시 삼성 방침이었다. 게다가 김응용이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의 고교선배로 삼성 구단 사장도 정말 선배처럼 예우해 줬다. [33] 출처 김 감독은 "양준혁은 효자다. 기본적으로 착하다. 2001 시즌이 끝나고 FA로 풀렸는데, 당시 선수협 문제가 있었다. LG 구단에게 '양준혁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한다. 기본적으로 착한 아이다. 내가 책임질 테니 LG에서 꼭 계약을 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는데, 결국 LG에서 잡지 못하고 삼성으로 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34] 강병규는 후일 인터뷰에서 선수협에 극렬히 반대했던 "해태 L선배"(이호성)가 선수협 2기 회장이 되면서 "선수협이 망가지기 시작했다"라고 비판하며 "(선수협에) 열정도 없는 사람들이 하니 잘 운영되겠냐"라고 이호성을 비롯한 3기 집행부를 폄하 #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선수협 결성을 통해 제 이득만 챙기고 그 후론 선수협 반대파 이호성에게 선수협을 헌납하고 골치 아픈 선수협에서 손을 완전히 땐 무책임한 양준혁'이란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혹은 '내가 선수협을 주도하던 시절엔 선수협이 잘 굴러갔는데 그 후로는 완전히 망했다'는 식의 자기 미화를 위한 사실 왜곡이다. 이제와서 더욱 분명해졌지만 이호성이 회장이던 3기 집행부 시절보다 간부들이 열정을 갖고 일했던 적은 없었으며 그때만큼 선수협이 제 역할을 다 했던 적은 없었다. 게다가 백번천번 양보해서 양준혁이 선수협 반대파 이호성에게 선수협을 떠넘긴 게(?) '잘못'이라면, 선수협 초기 간부이지 실질적인 행동대장인 강병규 역시 당연히 그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무책임한 양준혁이 구단 어용 이호성에게 선수협을 떠넘길 때 강병규는 대체 뭘 하고 있던 걸까. 이렇듯, 한때는 강병규의 자극적인 발언이 야구 팬덤에서 칭송받을 때도 있었지만 실상 하나하나 따져보면 자가당착인 경우가 많다. [35] 이렇게 정작 선수협 회장으로 취임하고 나서는 많은 치적을 남긴 이호성이 선수협 반대파의 대표주자로 이미지가 고착화된 이유는 훗날의 범죄 행위도 크지만, 당시 방송에서 대놓고 사회주의자 망언으로 레드 콤플렉스가 팽배한 사회에서 대놓고 선수협을 이적단체 취급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배 선수들을 막는답시고 줄빠따로 똥군기를 부렸으니 더더욱 그런 이미지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36] 기존 연봉은 무조건 100% 이상 인상이 불가능했다. [37] 당시 초상권과 같은 선수협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1군 선수들의 연봉에서 10%를 각출하고, 구단들이 만든 기금으로 이를 마련했다. [38] 2013년 임찬규 물벼락 사건의 경우 더 퇴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KT신고선수 사태에도 손 놓고 있었으니... [39] 하지만 2012년 당선된 박재홍이 특별감사를 도입하고 6개월마다 회계자료를 공개하고 감사를 받기로 결정하면서 기존의 비리 협회의 이미지를 청산했고, KBO측의 10구단 창단 유보 결정에 대한 항의로 올스타전 거부라는 초강수를 두면서 10구단 창단을 이끌어내면서 박재홍은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회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재홍의 은퇴로 1년만에 회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는 점이 두고두고 아쉬운 점. 물론 이호성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사실이나, 이호성 이후로 더 뛰어난 회장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40] 사실 이종범 입장에서는 당시 국내복귀 첫 시즌이란걸 감안하면 나서봐야 오히려 구단내의 입지가 큰 편은 아니여서 나서지 않는 게 더 나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유지현은 구단측의 징계성 트레이드에 반발하여 선수협에 가입했지만 구단의 눈치가 보였던 건 사실이다. [41] 노쇠화에 따른 성적하락. 특히 2007년은 이종범이 선수생활 중에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은퇴의 기로에 서야 했다. [42] 본업은 정치인으로 2000년에는 민주당 내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43] 천하의 #망나니존 로커 같은 민감한 인종차별 발언을 한 경우에도(...) [44] 이도형은 결국 본인이 은퇴를 감수를 해가며 개크보KBO의 FA 계약의 보상규정 및 계약제한기간 규정의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소송을 벌였고, 결국 승소판결을 받았다. [45] 김상현은 처음에는 참여하였으나 2012년 1월 3일 임시총회에 불참하였고, KIA의 주장인 차일목은 이들이 발표한 보도자료에 선수단이 동의한 적이 없음을 밝혔다. [46] 현재윤 삼성대표가 양준혁을 후보로 올렸으나, 정작 자기도 양준혁을 안 뽑았다. [47] 다만 이 부분에 있어 김성근 감독을 지적한 것이 또 애매한 문제가 된다. 이번 한화 이글스 전지훈련 명단은 밝혀진 바가 없어 알기 어렵지만, SK 와이번스 시절 김성근 감독의 전지 훈련은 보통 50-60명에 달하는 인원이 이동하였고, 2군 선수들의 훈련이 중요하다는 김성근 감독의 신념에 따라 1.5군을 넘어 2군 선수도 다수가 포함되었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드는 비용 문제는 김성근 감독 경질건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48] 2,400만원이었다가 2015년부터 2,700만원으로 적용. [49] 유감이지만 이마저도 프로야구는 많이 받는 거다. 라이벌 프로축구조차도 몇 해전만 해도 최저연봉 1200만원이었다가 중국인들이 연루된 승부조작 사건이 터지며 2천만원으로 최저연봉이 올랐다... [50] 참고로 조범현 감독은 KT 구단에서 장성우에 대한 징계 수위를 결정하는 회의에 직접 참석하였고, 구단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51] 단 일본도 1군 외국인 쿼터는 2017년 현재 4명으로 제한되어 있다. [52] 연봉이 1만 5천만 달러로 대략 1,800만원이다. [53] 일본 리그의 등급제를 도입하는 방식. 현 제도에서는 보상 선수 문제로 인해 30대 중반 FA 선수들이 타 팀으로 이적하기 힘들며 원 소속 구단이 후려친 가격에 도장을 찍어 왔다. [54] 맨 위에도 적혀 있지만 선수협은 귀족 노조는 커녕 노조화조차 실패했다. [55] 이러한 선수협의 의견을 받아 들였는지 2차 드래프트 폐지는 다음 실행위원회로 유보되었다. [56] 선수협 NC 선수단 확진 사건 두고 사과문 전달 [57] 양의지 선수협 회장의 본질 회피한 사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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