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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독자적으로 전개된 과학철학적 전통.2. 역사
영미권에서는 토머스 쿤 이후에 본격적으로 역사적 과학철학의 논의가 시작되지만, 프랑스에서는 그 이전부터 역사적 과학철학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1] 멀리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 이론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하나, 칸트 철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프랑스의 실증주의적 태도가 과학사, 과학철학의 연구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칸트 철학은 간단히 말해 초월적인 형식을 다룬다. 초월적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는 경험되지 않지만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말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감각이나 사고는 직관이나 개념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 철학이 등장한 이후 '역사성'이라는 게 문제가 된다. 두루뭉실하게 이야기하면, 칸트는 인간의 사고가 개념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헤겔은 개념이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프랑스의 실증주의적 태도는 이 문제를 과학이 역사적으로 변화하는데 어떻게 진리를 탐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발전시켰다. 어렵게 말해 이것을 역사적 아 프리오리라고 하는데, 간단하게 말해 과학적 진리의 역사성이 문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쿤이 패러다임을 고민하기 반 세기도 전에 프랑스 철학자들은 과학사를 통해서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칸트주의의 영향 아래서 시작되었지만, 뒤에 에드문트 후설 등의 현상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쿠아레, 가스통 바슐라르 등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거장들이 나타났다.바슐라르는 과학이 직선적, 축적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 이론과 나중 이론 사이에 본질적인 단절이 존재한다는 '인식론적 단절' 개념으로 유명하다. 쿤의 '패러다임 전환' 개념의 선구자라고도 볼 수 있는데, 바슐라르가 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극단적으로 쿤은 바슐라르의 짝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일단 쿤이 바슐라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쿤과 교류가 있었던 프랑스의 학자 쿠아레가 바슐라르의 이론을 쿤에게 소개해 주었으며, 또 쿤과 바슐라르가 직접 만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과 쿤의 '패러다임 전환'이 겉보기에는 같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상당히 다른 점이 많다. 예를 들어 쿤은 패러다임을 어떤 과학 이론 내에서의 '모범적인 문제풀이 사례'(범례, exemplar)로 정의했는데, 이는 바슐라르의 이론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또한 쿤은 '패러다임 전환'뿐만 아니라 '정상과학'에 대해서도 상당히 자세히 서술하는 등, 패러다임 전환만이 쿤 이론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는 없다. (어떤 학자들은 쿤의 책 제목을 『과학혁명의 구조』가 아니라 정상과학의 구조 고 해도 될 정도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바슐라르가 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건 분명해 보이지만, 쿤 이론의 핵심적인 면까지 영향을 줬다고 보기는 힘들다.
바슐라르의 제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조르주 캉길렘인데 미셸 푸코가 그의 제자이다. 루이 알튀세르도 바슐라르 밑에서 학위를 받았다(그런데 알튀세르의 회상에 따르면 논문 지도는 거의 안 했다고 한다). 한국에 소개된 이쪽 계보의 학자로 도미니크 르쿠르나 프랑스와 다고네 등도 있지만 알튀세르나 푸코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쪽 연구는 본격적으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명이 야심차게 부푼 포부를 갖고 유학을 갔지만 결국 제대로 공부를 못했다(과학사, 과학철학 공부하러 갔다가 그냥 스피노자 전공으로 방향을 바꾼 경우도 있다. 따라 갈 수가 없어서). 알튀세르, 바슐라르 등을 번역해 소개하고 프랑스로 유학가 다고네를 주제로 (결국 과학철학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못하고) 교육철학 주제로 공부한 사람도 있었지만 학문을 포기했는지 그냥 증발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 국내에 이쪽을 소개할 수 있는 전문가는 없는 셈이다.
프랑스 과학철학계에서도 독특한 위치에 있는 게 미셸 세르인데, 몇 권이 번역되긴 했지만 그를 소화해 다루는 학자는 없다. 바슐라르의 제자로 과학철학 대신 상상력 이론으로 인류학 쪽으로 뻗어나간 게 질베르 뒤랑인데, 홍익대 불문학과의 진형준 교수가 뒤랑 전문가이다. 하지만 바슐라르가 과학철학 쪽 연구와 4원소의 상상력을 토대로 한 현상학적 시학을 결합하고 있던 반면에(시적 상상력이나 과학적 인식 모두 일상적인 사고방식로부터 비약하는 인식론적 단절을 필요로 한다는 관점이 있다), 뒤랑은 과학철학으로부터는 거리가 있고 진형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과학철학은 대충 생략하고 시학이나 미학에 집중하는 건, 바슐라르에 대해 연구하고 논문을 쓴 문학연구자들 모두에게 공통된다.
영미에서도 프랑스 과학철학 전통에 대해서 무지한 건 마찬가지다. 정확하게 말하면, 무지하다기보다는 무관심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연구 주제와 접근 방식이 판이하게 다른 데다가, 영미 과학철학이 별 문제 없이 잘 굴러가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푸코가 유명해진 뒤에야 비로소 캉길렘이 소개가 되었고, 푸코 전문가들 중에서도 소수만이 이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참고삼아 푸코의 철학적 출발점을 이해하려면 한편으로는 이폴리트에게서 배운 헤겔 철학의 영향과 함께 캉길렘으로부터 배운 과학사적 인식론을 모두 섭렵해야 하는데,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영미권의 푸코 전문가로는 게리 거팅 정도만을 손꼽을 수 있다.
[1]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분야를 'épistémologie'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의 영어형인 'epistemology'와는 뜻이 다르다. 영어의 'epistemology'는 지식 일반에 대한 이론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인다면, 프랑스어 'épistémologie'는 지식 일반이 아니라 과학 지식에 대한 연구만을 가리킨다. 따라서 뜻을 감안한다면 프랑스어 'épistémologie'에 해당하는 영어는 'epistemology'라기보다는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에 가깝다. 한국어로 번역할 때 프랑스어 'épistémologie'와 영어 'epistemology'를 둘 다 '인식론'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하면 혼동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