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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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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24년 4월 22일 | ||
프로이센 왕국 동프로이센주 쾨니히스베르크[1] | |||
사망 | 1804년 2월 12일 (향년 79세) | ||
프로이센 왕국 동프로이센주 쾨니히스베르크 | |||
국적 |
[[프로이센 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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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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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학력 |
성 조지 병원 근처 독일 학교 (1730~1732) 콜레기움 프리데리키아눔 (1732~1740)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2] (1740~46,[3] 1754~55)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1755 / 석사[4])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1755 / 박사[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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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사강사[6] (1755~1770)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교수 (1770~1796)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총장 (1786, 17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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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 157cm | ||
사상 | 독일 관념론, 고전적 자유주의 | ||
종교 | 개신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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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Zwei Dinge erfüllen das Gemüt mit immer neuer und zunehmender Bewunderung und Ehrfurcht, je öfter und anhaltender sich das Nachdenken damit beschäftigt: der bestirnte Himmel über mir und das moralische Gesetz in mir.
더 자주 끊임없이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로워지고 점점 더 커지는 경탄과 경외감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 내 위의 별로 가득찬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
『실천이성비판』[7]
더 자주 끊임없이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로워지고 점점 더 커지는 경탄과 경외감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 내 위의 별로 가득찬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
『실천이성비판』[7]
프로이센 왕국 출신의 철학자. 서양 근대 철학사에서 대륙의 합리주의와 영국의 경험주의를 종합하여 '선험적 종합 판단'이라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받으며,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미학 등 분야를 막론하고 서양 철학의 전 분야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칸트가 남긴 저작 중 3대 비판서인 『 순수이성비판』, 『 실천이성비판』, 『 판단력비판』이 유명하다.
사망한 지 200년이 흐른 지금도 근현대 철학의 중심 인물로 평가받는다. 칸트의 영향력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근대 철학에 국한되지 않으며, 현대 철학에서도 칸트의 영향력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칸트의 윤리학은 밀의 윤리학과 더불어 현대 윤리학의 중요한 두 축 중 하나이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임마누엘 칸트/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사상
칸트의 사상 체계는 흔히 크게 세 갈래로 나눠진다:이 중 첫째 질문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는 『 순수 이성 비판』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첫째 질문은 자신이 문제삼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와 한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는 어디까지 알 수 있으며, 또한 어떤 것은 알 수 없는지를 논의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순수 이성 비판』은 첫째 질문을 본격적으로 논의하면서, 인간 이성의 능력이 지닌 범위와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적극적으로 검토한다. 이 점에서 『순수 이성 비판』은 인간의 인식과 앎에 대한 논의를 첫째 질문을 통해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이성주의(합리주의) 철학의 전통에서 이성은 그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채, 신, 영혼불멸, 자유와 같은 무제약자들을 함부로 추구했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과 같은 무제약자들은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한계를 아득히 넘어서는 초감성적인 대상들로, 유한한 인간 이성은 자신의 한계로 인해 결코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는 오직 자연 인과성의 지배를 받는 감성적인 경험적 대상들밖에 없으며, 이러한 범위를 넘어서서 초감성적인 대상들을 인식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독단적인dogmatisch 것일 수밖에 없다.
둘째 질문인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는 도덕적 물음으로, 『도덕형이상학 정초』와 『 실천 이성 비판』에서 다루어진다. 둘째 물음에 대한 답변, 즉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결국 도덕적 행동이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도덕적 행동은 무엇인가? 바로 도덕법칙에 따르고자 하는 행위 원리를 받아들여 행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칸트는 『도덕형이상학 정초』와 『 실천 이성 비판』 전반부 「순수 실천이성의 분석론」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물음인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는 칸트의 여러 저서에서 복합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칸트의 저서에서 이 셋째 물음이 최초로 등장한 저서는 『순수 이성 비판』으로,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의 후반부인 「방법론」 중에서도 「순수 실천이성의 규준」 장에서 이 물음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8] 『순수 이성 비판』에 따르면, 우리가 둘째 물음에 따라 도덕성을 확보하는 일은 우리가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갖추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충분히 도덕적 행위 원리를 받아들여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가지게 된다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도덕성에 상응하는 정도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이 행복이 우리에게 실제로 주어진다고 보지 않고, 희망의 대상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칸트는 전통적인 행복주의 윤리학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전통적인 행복주의 윤리학은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될 경우 현세의 삶에서 도덕적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행복주의와는 달리 칸트는 우리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감성계에서는 결코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이 도출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도덕적으로 산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지 행복해도 좋을 자격, 그리고 그 자격에 행복이 따라오리라는 희망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칸트에 따르면,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은 결코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지만, 행복의 분배에 개입하는 전능한 신을 가정한다면 각자의 도덕성에 상응하는 정도만큼 그 행복을 희망할 수 있게 되므로, 이러한 도덕에 상응하는 행복이 보장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신의 현존을 요청해야만 한다. 이 점에서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물음은 신의 현존을 요청하는 요청이론Postulatslehre으로 이행하게 되며, 이는 칸트의 고유한 종교철학 이론인 도덕신학Moralstheologie을 구성하는 주요한 체계가 된다. 그러므로 셋째 물음은 종교적 물음과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순수 이성 비판』에서 제시된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물음은 결국 행복할 자격과 행복이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최고선이라는 도덕적 이상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 세 번째 물음은 최고선의 문제를 다룬 여러 저서들에서 간접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실천 이성 비판』의 후반부인 「변증론」에서는 영혼불멸과 신의 현존의 요청을 통해 최고선의 실현에 대한 희망으로 나타나며,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는 근본악의 문제와 그 원인인 악의 원리에 대항하는 윤리적 공동체구현 내지는 최고선에 대한 희망으로, 또 『판단력비판』에서는 자연과 자유의 통일을 통해 이 지상에서 실현될 수 있을 자연의 궁극목적이자 목적들의 나라인 최고선에 대한 희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3.1. 인식론
자세한 내용은 순수이성비판 문서 참고하십시오.3.2. 윤리학
자세한 내용은 실천이성비판 문서 참고하십시오.3.3. 미학[9]
자세한 내용은 판단력비판 문서 참고하십시오.3.4. 정치철학, 사회철학
칸트 말년의 대표작인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와 <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 이 두 책을 묶어 <윤리형이상학> 이라 부르는데 [10] 이 책에 수록된 제1편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에서 칸트는 정치철학(또는 법철학)과 사회철학을 다룬다.4. 업적
근대부터 현재까지에 이르는 철학 연구가 칸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철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공리주의에서 후기 칸트학파의 사상에 이르는 혁신과 밀접하게 연관된 채로 철학과 사회과학, 인문학 분야 모두에서 유지되었다.경험론[11]과 합리론[12]이 치고받고 싸우던 18세기 유럽 철학계를 평정한 거인. 실제로 칸트 이전 세대에는 경험론과 합리론의 구분이 없었다. 같은 경험주의론자인 여러 영국 철학자조차 자신들이 같은 학파에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들을 플라톤 학파 혹은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라고 지칭하였다.
이러한 학파의 구분은 칸트 이후, 정확히 말해서는 칸트에 대한 연구가 극에 달하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에 와서야 정립되었다. 바꿔 말하면 칸트는 『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 하나로 17-18세기 존재하던 모든 영국, 대륙철학자들을 단 2개의 학파로 양립시키고 그들이 대립하던 본질적인 문제를 파악한 후 이를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풀어낸 대단한 인물. 근대철학은 칸트 전과 후로 나뉜다는 얘기나 칸트를 모든 강들이 흘러 들었다가 다시 갈라져 나가는 호수로 비유한 것도 다 이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의미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도 칸트에서부터 시작됐다.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론적 윤리란 무엇이며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체계적인 인식론과 실천 이성 구분을 통해 그 구조를 펼쳐보였다. 칸트가 인식론뿐만 아니라 근대 윤리학의 시작을 알렸다고 봐도 될 듯. 게다가 판단력 비판을 통해 인간의 미학 인식까지 구분과 과정을 설명 시도했다. 칸트가 인류 지식 세계에 공헌한 바는 이렇듯 어마어마하다. 저명한 철학자 R.샤하트는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을 불완전하게 이해해도 현대 철학 이해에 큰 지장은 없지만, 칸트를 불완전하게 이해하면 현대 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 라고 말했을 정도.
그 스스로 " 데이비드 흄의 책을 읽고 미망에서 깨어났다"고 말하기도 했다.[13] 자칫 어렵게 들리는 이 말은 그냥 흄과 칸트 모두 오직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범위 내로 철학의 탐구 범위를 좁히자는 데에 동의한다는 말이고, 이 점에서 그는 경험론자와 닮았다. 그래서 칸트의 이 고백은 "경험적인 것, 혹은 수학적인 것이 아닌 모든 책은 불태워 버리라"는 흄의 말과 상통한다. (기존의 형이상학이 완전히 쓸모없다는 데에서 칸트는 흄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래서 현대 영미형이상학에서 흄은 형이상학에 대한 회의주의자로 자주 다루어지지만 칸트는 그다지 다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이와 같은 경험적인 범위 내로 철학의 탐구 범위를 좁히면서도 흄의 탐구 방식을 반드시 따라가지는 않았다. 보다 구체적으로 칸트는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되는 지식이 아니라 바로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할 원칙이 무엇일지를 탐구했다. 흄의 경험론은 모든 경험이 공유하는 어떤 일반적인 성질, 이를테면 어떤 대상이든지 그것에 대한 나의 관념(idea)은 나의 인상(impression)에서 기인한다는 것에 주목하는 반면, 칸트는 모든 경험이 가져야만 할 어떤 형식에 주목한다. 이처럼 그는 경험론적인 틀 내에서 합리론적인 정신을 가지고 세계를 탐구하였다고 볼 수 있기에 굳이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경험론과 합리론자의 종합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흄이 자신의 주장에 대한 칸트의 대응에 동의했을지는 알 길이 없다. 칸트는 흄을 알았지만 흄은 칸트를 몰랐는데 흄이 세상을 떠났을 때가 1776년으로 『 순수이성비판』이 출판되려면 5년이 더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5. 영향
이성이 무엇인지 보이려고 자연은 칸트를 낳았다.
프리드리히 카울바흐 (Friedrich Kaulbach, 1912~1992)
독일의 칸트 연구자인 오트프리트 회페는 『임마누엘 칸트』에서 칸트의 영향을 다음 네 가지로 나누었다.프리드리히 카울바흐 (Friedrich Kaulbach, 1912~1992)
- 독일 관념론: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로 대표된다. 피히테는 칸트의 철학을 칭송하며, 자신의 철학을 칸트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이를 더욱 보완시키는 철학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말년의 칸트 본인은 이에 대하여 자신의 철학은 그 자체로 완성된 체계라고 반박하였다. 이후 셸링과 횔덜린(휘페리온 저자)이 칸트의 '주관적' 관념론의 한계를 지적하며 다소 낭만주의적인 관념론을 전개[14]하였고, 이후 셸링과 횔덜린의 친구였던 헤겔이 이들을 다시 비판하며 이른바 '객관적' 관념론을 주장하게 된다.
- 신칸트주의: 1870년부터 1920년까지 약 반세기 동안 유럽의 강단철학을 지배한 사조이다. 에른스트 카시러, 헤르만 코헨, 하인리히 리케르트 등이 대표적이다. 주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주목해 과학주의적 철학을 전개하였다.
- 현상학과 실존주의: 에드문트 후설, 막스 셸러, 칼 야스퍼스, 마르틴 하이데거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주로 칸트가 주장한 '초월성(transzendetal)' 개념을 요리조리 재해석해서 자신들 고유의 사상에 도입하는 방식으로 칸트를 계승하였다.
- 20세기 중반 이후: 영미권에서는 스트로슨, 셀라스 등의 분석철학 계열과 또 다시 이들을 비판한 로티가 칸트를 계승하거나 비판한 학자들이다. 또한 존 롤스와 같은 영미권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들은 칸트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 또한 롤스와 함께 칸트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가장 저명한 철학자로 뽑힌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계몽주의의 정점인 칸트에 우호적일 리가 없을 것 같지만, 놀랍게도 칸트의 『판단력 비판』과 같은 텍스트에서 이질성, 다원성 등의 키워드를 뽑아내기도 했다. 가령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칸트 미학의 숭고를 자신의 이질성의 철학을 옹호하는 데 활용한다.
한국에서는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철학과 = 칸트학과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시절 철학과 교수들은 20%의 고대 그리스 철학과 50%의 칸트철학, 30%의 기타를 공부했고 학생들은 99%의 마르크스주의[15]와 1%의 기타를 공부했다는 농담도 있다. 영미 철학, 프랑스 철학의 균형잡기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21세기 이후에도 한국 철학계에서 가장 깊게 연구되는 인물은 여전히 칸트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보통 철학과 학생들이 넘어야 하는 가장 큰 벽으로 꼽히는 인물이 바로 칸트.
대학교뿐만 아니라 중고교 교육 과정에서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현행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도 칸트는 매우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아무래도 고교 과정에서는 의무론적 윤리와 목적론적 윤리를 대립항으로 간주하여 교육 및 학습하고 있는데, 칸트는 전자의 대표 주자를 넘어서 거의 유일한 주자로 여겨질 정도이다.[16] 2007 개정 교육 과정 이후에는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 칸트 윤리학의 현대적 재해석 및 보완까지 교과서에 공식으로 다루고 있다. 로스라는 20세기 윤리학자가 내세운 조건부적 의무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칸트 윤리의 절대주의적 도덕 원리를 다소 유연한 형태로 변형한 것이다. 물론 중등 교육 수준에선 그 심오한 깊이를 모두 담을 수 없다. 실제 수능 기출문제에서도 도덕적 딜레마가 나올 때 결과 등에 상관하지 말고 실천 이성적 명령에 따르라는 선택지밖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태도가 자신의 대원칙이 어떻게 구체적인 맥락에 적용될 수 있을지를 지속적으로 고민했던 칸트의 입장을 얼마나 대변하는지는 미지수이다. 생활과 윤리 교과서에서도 여러 분야에서 등장하신다. 칸트의 의무론이 단독으로 맨 처음 등장하며, 환경윤리에서는 독특한 인간중심주의의 대표자로 나오고, 평화와 윤리에서는 국제연합에 기초한 영원한 평화 구상이 나온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응보주의 형벌론에 기초한 사형제 찬성론 및 예술에 있어서의 칸트식 도덕주의까지 다뤄진다. 결국 윤리와 사상이든 생활과 윤리든 윤리 계열 교과를 수능에서 택하는 사람들한테 칸트는 넘어야 할 산 중 하나인 셈. 칸트는 정언명법을 토대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도덕 법칙과 의무를 찾아내는 방법을 제시했다.
현대 철학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논쟁에서도 칸트는 곧잘 나온다. 비록 형이상학에서는 흄이 주로 다루어지지만 실천철학에서 그의 입장은 계속되는 떡밥이다. 당장 큼직한 주제만 들어 보더라도 결과주의 vs 비결과주의, 양립 불가능론 vs 양립 가능론, 공리주의 vs 자유주의, 경향성 vs 실천적 추론과정(혹은 이성)과 같은 모든 주제에서 우측의 입장들은 칸트의 영향을 받은 입장들이다.
또한 현대에 들어서 전혀 새로운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는데, 칸트가 『영원한 평화』라는 말년 저작에서 제시한 '세계 시민'이라는 정치적, 윤리적 주제의 선구자이다. 인터넷을 비롯한 미디어가 발달하고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면서 한 나라의 윤리적 문제가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계 시민이라는 주제가 생겨났는데, 이게 나쁘게 말하면 쓸데없는 오지랖이다. 자기 나라의 문제도 다 해결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이러쿵저러쿵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 하지만 조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 것이, 이미 윤리적인 문제를 한 나라에서 해결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우리나라에서 미국이랑 전혀 상관없는 위안부 문제를 미국 의회에서 다루는 데 왜 그리 큰 관심을 가지는지 생각해 보자.[17]
결국 이러한 윤리적 목소리가 독재 국가들이 맨날 하는 말처럼 내정 간섭이 아니라 정당한 윤리적 비판이 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는 현대 윤리학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칸트는 인터넷은커녕 유선 전신이 갓 발명되던 시기인 18세기에 이런 문제를 주목하고 현대적인 세계 시민의 개념을 처음으로 꺼낸다.[18] 그러면서 칸트는 '이성의 공적 사용'을 주장하면서 세계 시민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결국 현대에 세계 시민이라는 주제를 윤리학적으로 다룰 때 첫머리에 나오는 것이 칸트가 되었다.
또한 막스 베버의 사회학, 장 피아제의 심리학, 놈 촘스키의 언어학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사회, 행동 및 신체 과학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칸트의 수학 및 인공적 사전 지식에 대한 연구는 또한 이론 물리학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지적 발달에 일찌감치 영향을 준 것으로 인용되었다. 칸트적 패러다임 전환의 철저함 때문에 그의 영향은 구체적으로 자신의 저작을 언급하거나 자신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상가들에게까지 미치게 됐다.
6. 논란
6.1. 인종차별주의
『물리적 지리학』(ed. by F. T. Rink)을 비롯한 여러 강의록에서 칸트는 뿌리 깊은 인종적 편견을 보여주고 있다.아프리카의 흑인은 본래 유치함을 넘어설 만한 감정이라고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19]
흑백 두 인종 간의 정신적 능력(Gemüthsfähigkeiten)의 차이는 피부색의 차이보다도 더 큰 것처럼 보인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대단히 일찍 분별 있게 되었지만, 그들의 오성은 그 후에 같은 비율로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인간성은 백인 종족에서 가장 큰 완성 상태에 있다. 황색의 인도인들은 보다 떨어지는 재능을 가졌으며, 흑인(니그로)들은 더 낮고, 가장 낮은 종족은 아메리카 인종 중의 일부이다.
백인은 언제나 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종족.
이 녀석이 머리부터 발까지 꽤 검다. 그가 말한 것이 멍청했다는 명백한 방증이다. [20]
이처럼 칸트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많이 남겼다. 시대 상황에 따른 편견이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칸트의
인종주의 사상은 단순한 편견을 넘어서서 인종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정교한 이론을 세우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21] 그의 이론을 요약하자면, 기후 조건에 따라 피부색이 다르기 때문에 백인, 황인, 흑인, 아메리칸의 네 가지 “인종”으로 구분할 수 있고, 이 중 오직 백인만이 진정으로 인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22] 유색인종은 선천적으로 이성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교육을 받아도 백인만큼의 도덕적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23] 로버트 월드 서스먼은 그의 저서 『인종이라는 신화 (The Myth of Race)』에서 "현대 윤리학과 현대 인종학은 그 아버지가 같다"고 말한 바 있다.[24] 다만 이러한 칸트의 인종주의적 생각들은 『영구평화론』을 펴낸 1795년도 전후로 사라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이 책에서 모든 인종이 동등하게 계약에 서명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 책의 주석에서는 "끔직한 노예무역"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25] 칸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칸트가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의 인종 이론에 대해 점진적으로 문제의식을 느꼈고, 그래서 인종에 대한 이야기를 삼가게 되었던 것이라고 추론한다.[26]
7. 명언
내가 그것들을 더욱 자주,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항상 새롭고 더욱 높아지는 감탄과 경외로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27]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28]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29]
너의 인격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 대해서도, 너는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동하라.[30]
스스로를 벌레로 만드는 사람은 나중에 짓밟혀도 불평할 수 없다.[31]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32]
인류라는 구부러진 목재에서 아직 한번도 곧은 것이 만들어진 적은 없었다.[33]
영원한 평화는 공허한 이념이 아니라, 점차 해결되어 그 목표에 끊임없이 더 가까이 다가서는 하나의 과제이다.[34]
어떻게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35]
외래어는 가난이나 태만을 드러낸다.[36]
해야 하므로, 할 수 있다.[37]
8. 주요 저서
제목 | 발간 연도 |
<colbgcolor=#fff,#1f2023>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38] Beobachtungen über das Gefühl des Schönen und Erhabenen |
<colbgcolor=#fff,#1f2023> 1764년 |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 |
1781년 |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39] Prolegomena zu einer jeden künftigen Metaphysik |
1783년 |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 |
1784년 |
도덕(윤리)형이상학 정초[40]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41] |
1785년 |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42] 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 |
1786년 |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
1788년 |
판단력비판[43] Kritik der Urteilskraft |
1790년 |
단지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44]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 |
1793년 |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45] Zum ewigen Frieden |
1795년 |
도덕(윤리)형이상학[46] Metaphysik der Sitten |
1797년 |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47] Anthropologie in pragmatischer Hinsicht |
1798년 |
학부들의 다툼[48] Der Streit der Fakultäten |
1798년 |
교육학 Über Pädagogik |
1803년 |
이 밖의 책들은 비판기 이전 저작[49], 비판기 저작[50], 서한집, 유작, 강의 등으로 분류되며, 모두 칸트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현재 칸트의 저서를 한국어로 번역한 칸트전집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아카넷에서 나오고 있는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의 역본이며, 다른 전집은 한길사에서 출판중인 한국칸트학회의 역본이다. 백종현도 한국칸트학회의 회원[51]이기는 하나, 후술할 번역논쟁에 의하여 백종현 및 서울대 계열을 제외한 나머지 '칸트학회' 연구자들은 백종현의 번역어 표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체적인 칸트 번역전집을 출간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은 칸트전집 번역이 동시에 2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백종현의 아카넷 판본의 경우 직역에 가까운 일관성있는 한글번역을 추구하고, 칸트학회의 한길사 판본의 경우 축적된 연구를 토대로 가독성을 높히는 번역을 추구한다.[52]
2023년 기준, 백종현의 아카넷 판본과 칸트학회의 한길사 판본 모두 완간되지 않았다.[53] 한편, 이와는 별개로 칸트의 책 일부만 단권으로 번역하는 학자들도 많다. 특히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영원한 평화(영구평화론)'와 '계몽이란 무엇인가'는 자주 번역되어서 번역판본도 여러 개이다.
8.1. 한국 칸트 학계 번역어 논쟁
자세한 내용은 한국 칸트 학계 번역어 논쟁 문서 참고하십시오.9. 여담
-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
판단력비판』이 출간된 1790년에 익명의 화가가 그린 칸트 초상화이다. 대각선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런 구도는 초상화에서 드문 구도라서 흥미롭다. 그림을 그린 화가가 누구인지 확인된 바는 없지만, 아마도 같은 지역의 여류화가 엘리자베스 폰 슈테게만(Elisabeth von Stägemann)이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익명의 화가가 그린 66세의 칸트
- 고등 과정 생활과 윤리와 윤리와 사상을 배운 학생에게는 애증의 대상이다. 칸트의 이성 중심 도덕철학이 서양 근현대 사상사에서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은 분야가 없다. 단원으로 치면 이론 윤리, 낙태 찬반, 자살, 안락사, 생명 과학, 성, 환경 윤리, 법적 정의, 예술과 윤리, 전쟁과 평화, 해외 원조에서 등장한다. 즉 생윤의 세부 파트의 과반수에 출현... 그 덕분에 입시생들에게 '생윤 공무원', '생윤 철밥통' 등으로 불린다. 칸트가 선정된 문제는 오답률도 높은 편. 더불어 교육 과정에서는 앞뒤를 대단히 간소화하고 정언명령만 가져와서 이상하게 꼰대 같은 이미지까지 생겼다. 하지만 워낙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다른 철학자와 구분이 쉬운지라 생윤/윤사를 공부를 잘해놓은 학생들은 시험문제로 나오면 좋아한다. 이는 대학교 철학과 학부생 및 전공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독일 관념론자들의 온갖 해괴한 문장들을 보다보면 칸트가 반갑다(...).
- 평생 자기가 태어난 쾨니히스베르크[54]에서 살았다. 반경 150km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으며, 생전에 현재의 독일 영토인 베를린과 브레멘,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바이에른, 바덴뷔르템베르크나 쾨니히스베르크와 동프로이센처럼 과거 독일에 속해있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영유권을 상실했던 힌터포메른과 슐레지엔, 알자스-로렌 같은 도시와 지역들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칸트의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가 있는 동프로이센 지역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와 폴란드에 편입되면서 현재 칸트의 생가, 대학, 무덤 등 칸트와 관련된 유적지들은 전부 러시아 영토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철학자의 흔적이 현재의 독일이 아닌 러시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겠다.[55] 다만 칸트 생전의 강사 시절에도 쾨니히스베르크는 러시아에 4년간 점령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영토분쟁이 있던 곳이고 칸트는 그 시기에 많은 러시아 장교들을 4년간 가르치면서, 러시아의 여제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에게 교수직을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으니[56] 칸트와 러시아가 아예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통에 러시아 측에서 2024년 칸트 탄생 300주년 기념행사를 하였을 때, 독일의 올라프 숄츠총리가 타국을 상대로 침략전쟁 중인 국가가 감히 칸트 선생의 영구평화론을 들먹이며 이런 기념행사를 여나고 비판한 적도 있었다.
- 보통 사람들은 칸트를 지루한 철학자로 알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생각보다 다정다감하고 농담도 잘하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 밥을 혼자 먹는 건 불행한 일'이라고 말하며 사람들과 식사하기를 즐겨해서 매일 겨자 소스를 만들었는데 자기는 절대로 그 소스를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술을 너무 마시는 사람이나 술을 아예 안 먹는 사람 둘 다 경멸했다[57]고 한다. 칸트는 독일 사람이었지만 맥주를 싫어하고 와인을 좋아했다. 오죽하면 칸트에게 식사를 초대받은 사람 한 명이 선물로 맥주를 꺼냈는데 칸트가 식탁에 놓인 맥주를 보자 정중하게 맥주를 마실 거면 내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고. 한번은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
- 한국에서는 칸트가 결혼할 이유를 '고민'하다가 상대인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려서 결혼을 하지 못했다는 출처불명의 틀린 얘기가 나도는데, 사실 칸트가 그 정도로 괴짜이거나 또는 숙맥이었던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가족을 부양하느라고 늦게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일 뿐이었다. 칸트는 젊었을 때 사교적인 사람이었고, 관심을 가지던 여자도 몇 명 있었다. 하지만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 결혼을 하지 못했던 것이었고, 어느 정도 경제적 여건이 풀려서 제대로 된 집을 살 수 있게 되었을 때는 57세로, 이때는 결혼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였다.[58]
- 젊었을 때와는 대조적으로, 중년 이후로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마도 자신의 책 『순수이성비판』을 저술하면서 가치관이 많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칸트는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연한 차 한 잔과 담배 한 대를 피우면서 강의를 준비했고, 7시부터 11시까지 강의를 했다. 강의가 끝나면 책을 집필했으며, 점심을 먹고 난 후 3시 30분이 되면 산책을 해서 사람들이 그런 칸트를 보면서 시계를 맞추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59] [60] 하지만 그런 그도 딱 두 번, 산책을 빼먹은 적이 있다. 한 번은 프랑스 혁명을 보도한 신문을 읽다가, 또 한 번은 루소가 저술한 책 《 에밀》을 읽다가 였다.
- 장 자크 루소의 저서를 접하기 이전까진 철저한 엘리트주의를 자처했다. 칸트는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고는 번개를 맞은 듯 깨달았다면서, "나는 천성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지식만이 인류의 영광을 이룬다고 믿어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대중을 경멸했다. 루소를 읽고는 이런 맹목스러운 편견이 사라졌다. 나는 인간성을 존경하는 심정으로 도덕에 기초한 평등주의자가 됐다"고 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도덕 철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평생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지만 다년간에 걸친 학문 활동의 결과 대학에서 수많은 과목을 맡아서 학생들에게 가르쳤으며 마음먹고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어디 가 보지도 못한 지역이나 본 적도 없는 동식물들을 주제로 얘기하는데도 학문상으로 하자가 없고 너무도 흥미로운 나머지 학생들은 눈과 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강좌 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끌었던 강좌는 '세계지리'. 지리학에서 칸트는 이전까지 식민 지배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지리학을 넘어서 현상학적 관점에서의 선험적 공간에 대한 담론을 지리학계에서 시작함으로, 지리학에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더했다고 평가받는다. 쉽게 말해 당대의 지리학, 인류학 같은 학문들은 열강들이 다른 나라 쳐들어갈 때 필요한 적성국 연구, 동물 생태 연구(...) 비슷한 취급을 받았는데, 칸트는 학문적으로 지리를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접근했다. 실제로 그가 말년에 쓴 영구평화론(영원한 평화), 윤리형이상학 법이론 등에는 세계 각지의 문화 이야기가 토지의 점유와 획득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조금씩 나오며, 또한 세계 만방의 다른 민족들을 빚에 종속시키거나 총칼을 앞세워 쳐들어가는 나라는 영 좋지 못하다고 돌려까기도 한다.
- 엄청나게 박학다식했다. 칸트는 실제로 지식에 관계된 호기심이 왕성해서 온갖 다양한 분야에 관심하고 공부했다. 실제로 시간강사 시절에도 철학뿐만 아니라 별별 학문을 다 가르쳤다. 천문학, 물리학, 역사,수학, 화학, 지리,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강의했다. 화학 물질들로 불꽃을 만드는 기술도 가르쳤다. 재치 있게 잘 말하고 쏙쏙 귀에 들어오게 잘 요약해서 칸트의 강의실에는 수강생들로 늘 꽉 차 있었다. 다른 도시나 국가에서 학생들이 칸트의 강의를 들으러 온 적도 있었다.
- 당구 실력도 출중했다. 칸트는 학창시절에 가난해서 개인 교습만으로 학비를 낼 수 없게 되자, 내기 당구로 돈을 벌어서 학비를 충당했다. 너무 많이 이겨서 내기 당구할 상대가 없어지자, 종목을 바꿔서 카드 게임으로 돈을 벌어서 학비를 냈다고.[61]
- 한국에서는 칸트가 가터벨트를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칸트는 가터벨트를 발명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어로 레이스를 "Kant" #라고 하는데, 가터벨트에 레이스가 많이 들어가서 상품 제목에 kant라는 단어가 많이 쓰였고,[62] 이를 두고 한국에서는 칸트가 가터벨트를 발명했다는 식의 오해가 퍼졌던 것.
- 젊은 시절의 칸트는 과학자에 가까웠다. 3대 비판서와 같이 유명한 철학 저서는 50대 후반부터 출간되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철학자로서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는다. 그 이전 시기는 '전-비판기'라고도 부르며, 유명한 학자이며 연구자였지만 세계적인 스타는 아니었다. 리스본 대지진 때 사람들이 지진 피해자들을 두고 '하나님께 큰 죄를 지어서 벌을 받은 것' 이라고 손가락질하자, 그 근거가 없음을 주장하면서 지진의 원인에 대해 자연과학적으로 분석한 논문을 내기도 했다. 칸트가 흄을 읽고 비판서를 쓰기 시작한 동기를 연구할 때, 이 리스본 대지진 및 자연과학 연구하던 시절을 전사(pre-history)로 꼽는 논문이나 책들도 있다. 후술할 신학자 스베덴보리와의 혜성에 대한 대담 이야기도 나온다.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칸트는 오늘날의 주류 천문학계에서 널리 인정받는 은하계의 형성 과정의 모델인 성운설을 처음 제시한 세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성운은 하나의 태양이 아니라 수많은 태양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63]
- 《순수이성비판》은 세계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저서 중 하나이지만, 막상 처음 출판되었을 때는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워낙 책이 장황하고 어려웠기에 제대로 이해했던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 이에 관한 일화로 칸트가 이번에 내가 발표한 책을 봤느냐고 친구[64]에게 편지를 보내자 친구가 손가락이 모자라다는 식으로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말하자면 "친구야, 나는 네 책을 읽으려고 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야. 네 책을 읽어 나아가면서 이해가 안 될 때마다 내 손가락을 하나씩 꼽고 있거든." 과 같은 식으로 편지가 돌아왔다고 한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19살 때 백작 발트시타인의 주선으로 본대학에서 철학을 비롯한 인문과학 과목들을 청강할 때 칸트로 대표되는 계몽주의를 접했다. 그래서 그런지 칸트 철학에 심취해 "하늘엔 빛나는 별. 가슴엔 실천이성"이라는 칸트의 명언을 어디엔가 써 놓았다.
- 칸트 철학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인물은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 1841~1910)으로, 1868년 청나라로 파견되는 사신단을 수행하여 북경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지은 저술인 『연석산방미정문고(燕石山房未定文藁)』에 베이컨과 칸트의 사상을 논한 글이 부록으로 수록되었는데, 이 글이 수록된 별책의 원본이 현재 행방불명이다. 이 별책은 석정 이정직의 문중에서 보관하다가 서울대학교 최재희 철학과 교수의 요청으로 대출되었는데, 최재희 교수가 그만 이를 분실해버렸고, 미처 찾아내지 못한 채 작고하는 바람에 원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 되고 말았다. 다만 영인본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013년 러시아에서 칸트와 관련해 철학적인 논쟁을 하다가 총격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다. ( 로이터 통신, 문화일보, #) 칼리닌그라드가 현재 러시아 영토이기도 하고, 러시아에도 일정 수준의 칸트 덕후들이 꾸준히 있다.
- 교육학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칸트를 떼 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데, 세계 최초로 교육학에 대한 주제로 대학 강좌를 개설한 주인공이기 때문.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1776년 겨울학기에 총 4번에 걸쳐서 개설했다. 인지주의적 교육심리학자들의 계보를 이야기할 때에도 칸트의 영향이 크다고 자주 얘기한다.
- 말년에 칸트는 저녁 식사를 마치면 즉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습관에 빠졌다. 얼마나 좋아했으면 하인이 끓이는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견딜 수 없어 했다. 식사를 같이 하는 친구들이 커피가 곧 나올 것이라고 얘기를 해줘도, 칸트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커피! 커피!" 라고 작게 외치면서, 기다리는 시간이 익사하는 것마냥 힘들다고 투덜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커피를 가지고 올라오는 하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육지다! 육지! 여러분, 육지가 보입니다!"[67]
- 한국에서는 칸트의 묘비명에 다음과 같은 구절,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 일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 법칙."이 새겨져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틀린 이야기다. 이런 오해는 외국 사이트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묘비명(?)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알려진 해당 청동 판넬은 칸트 묘비석에 걸려 있는 판넬이 아니라, 칸트 사후 100주년을 기념하여 해당 지역에서 쾨니히스베르크 서쪽 성벽에 부착한 '기념물'이다. 이 '기념물'의 원본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소실되었고, 현재는 복사품 두 개를 만들어 한 개는 박물관에, 다른 하나는 원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걸어 두었다고 한다.[68]
[1]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칼리닌그라드주 칼리닌그라드
[2]
알베르투스 대학교 (Albertus-Universität)라고 부르기도 한다.
[3]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를 떠나 1748~54의 6년 동안 가정교사를 전전함.
[4]
「불에 관한 성찰의 간략한 서술 (Meditationum quarundam de igne succincta delineatio)」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 취득.
[5]
석사 학위를 받은 해에 교수자격 취득 논문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1명제에 대한 새로운 조명 (Principiorum primorum cognitionis Metaphysicae nova dilucidatio)」으로 박사학위 취득.
[6]
키프케 교수 저택에서 방을 빌려 강의했으며, 1762년 이후에는 출판업자인 칸터(칸트가 아니다)의 집 2층 다락방을 세내어 거기서 강의도 했다.
[7]
빛나는 밤하늘의 별은 순수이성비판의 인과율로 돌아가는 객관적 세계, 내 안의 도덕 법칙은 실천이성비판의 자율에 의한 목적을 뜻한다. 그리고 이 원리에 대한 경탄과 경외감이 바로 판단력비판의 숭고를 의미한다.
[8]
정확히 말하면, 이 세 질문은 해당 부분에서 같이 나타난다. 이는 「순수 실천이성의 규준」이라는 장이 칸트가 자신의 철학의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는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9]
다만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미학'이라는(특히 현대적 의미에서의) 카테고리로 일대일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 미학의 주요 텍스트에서 많이 인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칸트가 해당 저서에서 다루는 것은 주관적인 판단 일반이며, 그중 1부는(미감적 판단력) 미학과, 2부는(목적론적 판단력) 윤리학 내지는 종교철학과 연결된다.
[10]
<윤리형이상학 정초>와는 다른 책이다.
[11]
인간의 모든 인식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무언가 경험을 쌓기 전까지는 인식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영국에서 주창되었고 주요 학자로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있다.
[12]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본유관념(本有觀念)은 신에게 선물받은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경험 없이도 인간은 사색을 통해 진리를 도출할 수 있다. 수학 공식 같은 거라든지. 주창자로
데카르트가 대표적.
[13]
여기서 칸트가 읽은 흄의 책은 『인간오성론』으로 추정되는데 이 책은 흄의 첫 번째 저서이자 대표작인 『인성론』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고 문체도 좀 더 다듬은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흄은 『인간오성론』에서는 나오지 않는 "인격동일성"에 관한 문제를 『인성론』에서만 논의했다. 만약 칸트가 『인성론』을 읽었다면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칸트는 흄의 인격동일성 문제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후대 연구자들은 칸트가 『인성론』은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14]
칸트의 유고를 보면, 피히테 때와는 달리, 청년 셸링의 칸트철학 개혁에 대해서는 칸트 자신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5]
1980년대 군부 독재에 대한 반감으로 대학생들이 좌익으로 폭주하였고, 그 잔향이 1990년대까지도 이어졌다.
[16]
오죽 자주 나오면 대충 서양 사상가 같고 모르겠으면 칸트로 찍고 푸는 것이
윤리와 사상 선택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수법이다.
[17]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자유진영의 대장이자 세계 1위 국력, 세계경찰 역할을 하는 나라이며 위안부는 미국의 심복들인 한국과 일본이 가장 주된 당사자에 이들의 화합을 해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이며 네덜란드 등을 비롯 자유진영의 여러 나라들이 얽혀 있으며 미국이 일본을 쓰러트렸던 2차대전의 사건이므로 미국과 관련이 없다기보다는 오히려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18]
그 전에도 이와 유사한 단어는 있었지만 지금의 세계 시민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19]
이 말까지는 칸트가 한 말이지만, 이 뒤의 말은
흄의 말을 인용한 말로써 칸트가 직접적으로 한 말은 아니다. 원문은 이렇다.
아프리카의 흑인은 본래 유치함을 넘어설 만한 감정이라고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어떤 흑인이 재능을 보여주었다는 한 가지 예를 인용한 모든 이들에게 흄Hume은 이의를 제기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자신의 조국에서 다른 나라로 끌려온 수십만 명의 흑인들 중에서, 물론 많은 수가 자유를 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에서나 학문에서, 아니면 다른 훌륭한 특성에서 어떤 위대함을 보여주었던 사람은 아직 한 명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백인들 중 몇몇은 밑바닥 삶에서 끈질기게 일어서서 빼어난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세상의 존경을 얻는다. 이처럼 두 인종간의 차이는 본질적이며, 그것은 피부색에서와 마찬가지로 심성의 역량에서도 크게 나타난다. "그들에게 만연된 물신 숭배의 종교는 인간 본성에서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기괴함으로 깊이 빠져들고 마는 어쩌면 일종의 우상 숭배일 것이다. 깃털이나 소뿔, 조개, 혹은 몇 마디 말로도 신성해지는 여러 가지 흔한 일들이 신성에 대한 맹세에서 숭배와 기원의 대상이 된다. 흑인들은 너무도 허황되지만 흑인의 방식에서 그렇다. 그래서 그들은 요상한 말로 지껄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분명 매질만이 그들을 서로 흩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1764) [20] Kant’s position on the importance of skin color not only as encoding but as proof of this codification of rational superiority or inferiority is evident in a comment he made on the subject of the reasoning capacity of a “black” person. When he evaluated a statement made by an African, Kant dismissed the statement with the comment: “this fellow was quite black from head to foot, a clear proof that what he said was stupid.” It cannot, therefore, be argued that skin color for Kant was merely a physical characteristic. It is, rather, evidence of an unchanging and unchangeable moral quality. ㅡ Emmanuel Chukwudi Eze, "The Color of Reason: The Idea of ‘Race’ in Kant’s Anthropology", Postcolonial African Philosophy: A Critical Reader (1997) [21] Kant made an active contribution to racial ideology. To call Kant a racist is particularly legitimate because he was not simply “a child of his time” who would have parroted passively spread prejudices without being able to get out of this skin. On the contrary, he made an active, independent and elaborate contribution to the development of racial ideology, which he also regarded as a relevant part of his work. He explicitly represented his race theories in intellectual disputes against authors like Johann Gottfried Herder, who rejected this theory. (Racism allegations against Kant criticism of white reason) [22] 정확히 말하면, 인종에 대한 구분은, 피부색이라는, 경계가 모호한 기준을 통해서 인간을 구분하는 것이고, 이는 과학적으로 엄밀하고 보편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런데 칸트는 인종에 대해 발표한 소논문들에서, 다소의 임의적인, 혹은 사람들끼리 합의된 기준을 통해서 도입된 기준에 따르는 인종 개념을 인간이 잘 사용할 수 있다고 논한다. 또한 그는 이러한 인종들 간에 도덕적인 차이까지 있다고 주장하였다. [23] 칸트는 자신의 도덕 철학 체계를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가던 1785~1793년 무렵에도 강의에서 인종차별적인 언급을 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도덕 철학이 인종차별과 양립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즉, 그의 도덕 철학이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실천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르면 유색인종은 선천적으로 그런 인간 이성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도덕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다. [24] 원래는 철학자 찰스 W. 밀스의 말을 로버트 월드 서스먼이 인용한 것이다. (로버트 월드 서스먼 『인종이라는 신화』 김승진 옮김, 지와사랑, 2022, p.42 참조) [25] There is no evidence of any change in Kant's views at the beginning of the 1790s. In the 1792 version of his Physical Geography course, he still mentions, with apparent approval, Hume's claim that Blacks are naturally inferior. Kleingeld, who stresses this last point, does see a sharp change in Kant's views by the time he writes “Toward Perpetual Peace” in 1795, however, and the Metaphysics of Morals in 1797. In these texts, he condemns European colonialism, saying that Europeans had no right to appropriate other people's lands without their consent. That itself, as she notes, “grants a full juridical right” to the nonwhite peoples in these lands, which would seem to be incompatible with enslaving them. “The very fact that Kant regards Native Americans, Africans and Asians as (equally) capable of signing contracts,” she says, “indicates a shift in perspective.” Kant here explicitly rejects subjugating these peoples, moreover, even in the name of “civilizing” them. In notes for the “Perpetual Peace” essay, he also sharply condemns the slave trade (Ak 23:173–74), and in the essay itself he speaks of the “most gruesome and most calculated slavery” on the Sugar Islands (Ak 8:359). Finally, in the Metaphysics of Morals he argues against slavery altogether, except as punishment for a crime (Ak 6:283). Kleingeld takes all this to be evidence of a full change of heart, on Kant's part, as regards treating anyone with less than the full set of rights that white people grant to other whites. # [26] Kleingeld picks 1794–95 for the change in Kant's views that she describes, suggesting that Kant may have moved toward greater egalitarianism under the impact of the French Revolution. # [27] 『 실천이성비판』의 맺음말 첫 문단에 있는 말이다. 워낙 유명해서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칸트의 기념물에도 새겨져 있다. [28] 원문은 "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 거칠게 의미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무언가 나에게 나타나는 것 없이는 우리는 어떤 사물도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러나 우리 자신이 가지는 어떤 형식도 없다면 여전히 그 사물은 지각될 수 없을 것이다." 정도가 될 것이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순수이성비판 참조.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칸트의 이 말과 비슷한 형식의 말을 했다.(A 없는 B는 공허하며, B 없는 A는 맹목적이다는 식의 말) 아인슈타인은 1941년에 출판된 『과학과 종교(Science and Religion)』에서 "신앙 없는 과학은 공허하며, 과학 없는 신앙은 맹목적이다."라고 말했고,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1986년 『위험사회 – 새로운 근대(성)를 향하여』“사회적 합리성이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라는 말을 했다. # 다만 양자가 비슷한 모양이라고 내용이 함축하는 바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매우 곤란하다. 김대중 대통령의 논리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잡담이며, 경험의 검증을 거치지 않는 논리는 공론이다라는 어록 또한 칸트의 이 말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29] Handle nur nach derjenigen Maxime, durch die du zugleich wollen kannst, dass sie ein allgemeines Gesetz werde. [30] Handle so, daß du die Menschheit, sowohl in deiner Person als in der Person eines jeden anderen, jederzeit zugleich als Zweck, niemals bloß als Mittel brauchest. [31] Wer sich zum Wurm macht, kann nachher nicht klagen, wenn er mit Füßen getreten wird. "윤리 형이상학"의 덕 이론에서, 비굴하지 말아야 할 의무를 설명하는 대목이다(6: 437). 재미있게도 그 앞 부분에는 독일인들은 카스트제가 있는 인도 다음으로 허례허식이 담긴 존칭을 남발하고 있을 것이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나온다. [32] Aufklärung ist der Ausgang des Menschen aus seiner selbstverschuldeten Unmündigkeit. [33] Aus dem krummen Holz der Menschheit noch niemals ein gerades Ding gemacht wurde.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1784)』에 나오는 유명한 명언이다(7: 23).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면서 이기적인 동물적 성향도 지니고 있어서, 자신을 지배하는 법이 필요하지만 그 법에서 제외되고 싶어하므로, 법의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vollkommene Auflösung)'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어렵기는 하지만 인류가 반드시 해결해야만 되는 문제이기도 하기에, 1) 헌법의 본질에 대한 가능한 한 올바른 개념, 2) 수많은 세계사적 사건들을 통해 실천된 훌륭한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도 3)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선의지가 갖춰진다면,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아주 늦게나마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칸트는 얘기한다. [34] Der ewige Friede ist keine leere Idee, sondern eine Aufgabe, die, nach und nach aufgelöst, ihrem Ziele beständig näher kommt. 영원한 평화(영구평화론)에서. [35] 원문은 "denn wie kann ein böser Baum gute Früchte bringen?" (6: 44-5) 이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 나오는 말로서, '선한 나무에서 선한 열매가 열리고 악한 나무에서 악한 열매가 열린다'는 마태복음 7장 17-8절을 변형한 구절이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이 선천적인 악함을 극복하고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이해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긴 하지만, 선천적인 선함을 극복하고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이해하기란 더욱 힘든 일이기 때문에, 가능성만으로 따진다면 악한 사람이 선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순 없다. 우리가 그 타락에도 불구하고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즉, 악한 나무에도 '선의 싹(Keim des Guten)'이 순결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36] 원문은 "Fremdwörter verraten entweder Armut oder Nachlässigkeit." 후술할 번역논쟁을 상기시키는 듯한 칸트의 명언. 독일 내에서 자주 언급되는 명언이다. [37] "du kannst denn du sollst. (영문: Ought implies can.)" 이 말은 칸트가 한 말이 아니다. 이 말은 프리드리히 실러가 '철학자들(Die Philosophen, 1796)'이란 시에서, 칸트의 사상을 요약하면서 한 말이다. 칸트가 실제로 한 말은 이렇다. "daß solche geschehen sollen, so müssen sie auch geschehen können, (그런 일이 마땅히 일어나야만 한다면, 그것 또한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순수이성비판(1781)』)" "Denn, wenn das moralische Gesetz gebietet, wir sollen jetzt bessere Menschen sein: so folgt unumgänglich, wir müssen es auch können. (왜냐하면 도덕 법칙이 우리에게 이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명령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불가피하게 따른다.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1793)』)" 이후 피히테, 헤겔, 쇼펜하우어가 실러의 말(du kannst denn du sollst)을 마치 칸트가 한 말인양 말함으로써 이 말이 칸트가 한 말인 것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 [38] 『판단력 비판』이 쓰여지기 26년 전에 나온, 칸트 미학의 초기저술. [39] 보통 『형이상학 서설』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이 독일어 원제의 가장 마지막 단어만을 따서 원음 그대로 『프롤레고메나』라고도 번역되기도 한다. 『순수이성비판』의 방대함을 덜기 위해 칸트 자신이 좀 더 짧고 쉽게 쓴 이론 철학 교본이다. [40] 주제 면에서는 『실천이성비판』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서술이 평범한 인간 인식과 대중적 윤리 지혜로부터 분석적으로 진전해가고 있어 일반 독자의 접근이 비교적 용이하다. 단, 어떤 연구자들은 이 책의 3장 부분이 실천이성비판에서 개정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 책의 3장에서 칸트는 자유에서부터 도덕 법칙이 맞다는 서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도덕 법칙이 먼저 인식되고 그 다음 그 근거인 자유가 참임을 알게 된다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41] Sitte(Sitten은 Sitte의 속격)이라는 단어는 한국어로 1:1 대응하기가 쉽지 않아, '윤리'로도 번역 가능하고 '도덕'으로도 번역 가능하다. 다만, 칸트에게서 헤겔 이후의 철학자들에게는 친숙하다고 할 수 있는, Moralitat과 Sitte간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각각에 상응하는 도덕과 윤리라는 번역어 또한 의미상으로는 큰 문제 없이 교차적으로 사용가능하다. [42] 칸트전집에서는 보통 『형이상학 서설』과 같이 포함되어 수록된다. 19세기 독일어권 과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책이다. 외르스테드가 강한 영향을 받았고, 쿠르트 괴델 역시도 비엔나 서클에서 이 책을 공부한 적이 있다고 한다. [43] 참고로 판단력 비판 서문은 1790년에 나온 제1판의 서문과 1799년에 나온 제2판의 서문이 다른데, 제2판 서문은 칸트가 출판사로부터 서문이 너무 길다는 항의를 받아 제1판의 서문을 삭제하고 새로 쓴 것이다. 다만 삭제된 제1판 서문에는 3대 비판서에 대한 칸트 본인의 개괄적인 설명이 들어 있어 칸트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길잡이로서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 국내에 나온 판단력 비판 번역본들에는 모두 이 제1판 서문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44] 종교는 인간의 "모든 의무들을 신의 계명들로 인식함"에 그 참뜻이 있고, 진정한 성스러움은 인간이 선한 원리에 따라 '윤리적 공동체' 내지 '덕의 나라'를 지상에서 이룩하는 데 있음을 역설하는 저서. 백종현 및 김덕영은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에 이어 성스러움(聖)을 다룬 제4비판서라고 칭하기도 했다. 내용상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 2부와 겹치는 부분이 많으며, 칸트 스스로는 해당 저작이 자신의 3질문, 즉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에 대한 답을 다룬다고 한 바 있다. [45] 보통 『영구평화론』로 불린다. 칸트는 인권이란 "인간들 사이에만 있을 수 있는 가장 신성한 것"이자 "신이 지상에서 가지고 있는 가장 신성한 것"이라고 보았다. 신성성은 "우리가 인간들을 결코 한낱 수단으로 쓰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런 인권 보장이 법치 국가에서만, 나아가 국제적으로는 '보편적 국가 연합'을 이룸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 책. 이후 국제정치학의 이상주의(후에는 자유주의)적 '세계정부' 구상이나, "민주 국가들끼리는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는 도일의 민주평화론의 기초가 되었다. [46] 1부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와 2부 「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윤리형이상학이란 ‘자유의 형이상학’으로서 자유의 법칙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말한다. 1부는 법철학(정치철학)을 다루며, 2부는 『실천이성비판』에 뒤이어 도덕철학을 다룬다. 법은 외면적인 자유의 법칙을, 도덕은 내면적인 자유의 법칙을 그 내용으로 갖기에, 양자는 하나로 묶이면서도 서로 구별된다. [47] 칸트가 오래 수행해 온 인간학 강의의 강의노트를 편집한 책이며, 그가 마지막으로 출판한 책 중 하나이다. [48] 이 작품은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과 함께 칸트의 생전에 그 스스로 출간한 마지막 저술이다.
본래 이 작품은 칸트가 순수한 종교론과 경험적 계시 종교론의 충돌로서의 철학부와 신학부와의 논쟁만을 기획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글의 서두에는, 종교를 검열했던 당시 황제가 죽었으니 이제 그의 신민인 한 해당 내용을 출판하지 않겠다는 맘에 안드는 맹세는 깨도 되는 거 아니냐는 내용이 있다(...)
추가로 ‘영혼의 장소’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부학적-심리학적 분과인 의학부와 심리학적-형이상학적 분과인 철학부 사이의 논쟁, 순수한 법론과 경험적 정치의 충돌에 대한 철학부와 법학부의 논쟁으로까지 확대 구성하게 된 것이다. [49]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포함. [50] 『계몽이란 무엇인가』, 『영원한 평화』, 『학부들의 다툼』 포함. [51] 한국칸트학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52] 칸트학회의 한길사 번역판본은 칸트의 저서가 방대하여 그 안에서도 세부적으로 연구가 갈리는 이유 때문에, 해당 저서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한 한국 학자 위주로 배정되어 번역되었다. [53] 칸트학회의 경우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칸트전집 소개 페이지에서 책의 역제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홈페이지에 안내된 대로 출판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칸트학회의 경우 한 권에 칸트의 여러 저서를 묶어서 출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한국 칸트학회가 임의로 묶은 것이 아니라 칸트 후대의 '베를린 학술원판' 칸트 묶음집의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54] 현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 [55] 러시아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의 시설을 활용해 1967년에 칼리닌그라드 대학교를 설립했고, 이 학교는 2005년에 임마누엘 칸트 발틱 연방대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56] 물론 교수직을 얻지 못했다. [57] 윤리형이상학 덕론에서 '술과 아편 등은 우리를 자연의 경향성에 종속시킨다'고 비판하면서도, 진정한 악덕은 그런 술을 절제하지 못하게 하는 준칙(일상적으로 말하면 즐거움을 위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을 마시기 위해 술을 마시는 행동방식)에 있다고 한 적 있다. 덤으로 술은 금지하면서 오히려 아편은 기호식품으로 권하는 이슬람교의 율법이 이상하다고 깐다(...). [58] According to Kühn, whose acclaimed biography of the philosopher has just been published in Germany, Kant also had "amorous interests" in two women - though there is no evidence these were consummated. It was only at the age of 57, after Kant had published his most famous work, his Critique of Pure Reason, that he was in a position to support a wife. "By this time it was too late," Kühn said. # [59]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연한 차 한 잔과 담배 한 대를 피우면서 연구를 하는 등의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에 나온다.(p.446) 다만 이 시기에 '유고'가 작성되었다고 나오지, 3시 30분의 산책과 시계 이야기는 평전에 나오지 않는다. 3시 30분의 산책으로 사람들이 시간을 맞췄다는 이야기는 하인리히 하이네가 한 이야기로, 하이네의 이야기는 그 자신의 편견이 많이 들어가 있는 이야기라서 신뢰성이 부족하긴 하다.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칸트는 사교적인 사람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긴 했지만 그것이 병적으로 '강박적'일 정도는 아니었다. 하이네가 칸트의 엄격한 도덕 법칙을 보고선 그의 규칙적인 생활을 마치 강박적인 방식(시계 이야기)으로 표현했던 것. (비슷하게 하이네는 헤겔이 "나도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비꼬아 말한 적이 있는데, 헤겔 학계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이네가 만들어낸 것으로 취급한다.) [60] 이마누엘 칸트의 생애를 기술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삶도 사건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의 북동쪽 경계에 있는 옛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의 조용하고 외진 조그만 골목길에서 기계적인 질서의 엄격한 독신의 삶을 살았다. 나는 그곳의 성당에 걸려 있는 커다란 시계가 지역 주민인 이마누엘 칸트만큼 건조하고 기계적으로 자신의 일과를 수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고, 강의 원고를 읽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 모든 일과가 정해진 시간에 이루어졌다. 그의 이웃들은 이마누엘 칸트가 회색 연미복을 입고 손에 스페인산 작은 지팡이를 든 채 문 밖으로 나와 작은 보리수 가로수 길을 걸어가면, 수도원의 시계가 3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중략) 칸트의 외적인 삶과 그의 파괴적이고 세계를 으스러뜨리는 사유는 놀라운 대조를 보인다! 실로, 쾨니히스베르크의 시민들은 이러한 사유의 완전한 의미를 예감할 수도 있었고, 단지 인간만을 처형하는 사형집행인에게서보다 칸트에게서 더 무서운 공포심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칸트에게서 철학 교수의 모습만을 보았고, 정해진 시간에 칸트가 지나가면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면서 그들의 손목시계를 맞추었을 뿐이다. ( 하인리히 하이네, 저서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제3장 중(中). / 회화나무판 국내 번역본 166p ~ 167p.) [61] Das Billiard Spiel war seine eintzige Erholung; Wlömer und ich, waren dabey stets seine Begleiter. Wir hatten die Geschicklichkeit in diesem Spiel beynahe aufs höchste gebracht, giengen selten ohne Gewinn nach Hause; ich habe den frantzösischen Sprachmeister gantz von dieser Einnahme bezalt; Weil aber in der Folge Niemand mehr mit uns spielen wolte; so gaben wir diesen Erwerbs Artickel gantz auf, und wählten das l'ombre Spiel welches Kant gut spielte. (Reicke 1860, 49; rpt. Malter 1990, 19) # [62] 실제로 프랑스 란제리 브랜드 Louisa Bracq의 '칸트 여성 란제리 컬렉션(Kant women's lingerie collection)'으로 가터벨터가 판매되고 있는 등 구글링하면 많이 찾아볼 수 있다. [63] 나머지 둘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69]와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다. [64] 요한 하인리히 블뢰머 [65] 야코비는 칸트와 같은 시대 사람이지만 칸트 철학의 비판자였다. 특히 그가 제시한 일명 '야코비의 딜레마'는 칸트 철학의 근간을 흔들 만한 결정적 치명타로서 칸트적 이원론의 한계를 대두시켰으며, 이를 극복하고자 독일관념론이 피히테- 셸링- 헤겔의 일원론적 경향으로 이행하게 되는 데에 주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야코비는 또한 당대 독일 사상계 내에서 스피노자의 재조명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칸트적 이원론의 대안으로서 셸링과 헤겔 등의 스피노자적 일원론 경향이 자연스레 나타났다. 참조 오늘날의 칸트주의자 중에서는 야코비에 대한 재반박으로 칸트를 옹호하려고 시도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66] 해당 초상화는 원래 요한 크리스티안 폰 만리히(1742~1822)가 그린 야코비의 초상화를 칼 윙엔더(1812~1894)가 따라 그린 사본이다. # [67] 동시대의 저널리스트, 토마스 드 퀸시의 『임마누엘 칸트의 마지막 날』에 나오는 일화다. # 외국에서는 "커피! 커피!", "육지다! 육지!"가 밈으로 자주 쓰이기도 한다. [68]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73085.html
아프리카의 흑인은 본래 유치함을 넘어설 만한 감정이라고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어떤 흑인이 재능을 보여주었다는 한 가지 예를 인용한 모든 이들에게 흄Hume은 이의를 제기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자신의 조국에서 다른 나라로 끌려온 수십만 명의 흑인들 중에서, 물론 많은 수가 자유를 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에서나 학문에서, 아니면 다른 훌륭한 특성에서 어떤 위대함을 보여주었던 사람은 아직 한 명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백인들 중 몇몇은 밑바닥 삶에서 끈질기게 일어서서 빼어난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세상의 존경을 얻는다. 이처럼 두 인종간의 차이는 본질적이며, 그것은 피부색에서와 마찬가지로 심성의 역량에서도 크게 나타난다. "그들에게 만연된 물신 숭배의 종교는 인간 본성에서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기괴함으로 깊이 빠져들고 마는 어쩌면 일종의 우상 숭배일 것이다. 깃털이나 소뿔, 조개, 혹은 몇 마디 말로도 신성해지는 여러 가지 흔한 일들이 신성에 대한 맹세에서 숭배와 기원의 대상이 된다. 흑인들은 너무도 허황되지만 흑인의 방식에서 그렇다. 그래서 그들은 요상한 말로 지껄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분명 매질만이 그들을 서로 흩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1764) [20] Kant’s position on the importance of skin color not only as encoding but as proof of this codification of rational superiority or inferiority is evident in a comment he made on the subject of the reasoning capacity of a “black” person. When he evaluated a statement made by an African, Kant dismissed the statement with the comment: “this fellow was quite black from head to foot, a clear proof that what he said was stupid.” It cannot, therefore, be argued that skin color for Kant was merely a physical characteristic. It is, rather, evidence of an unchanging and unchangeable moral quality. ㅡ Emmanuel Chukwudi Eze, "The Color of Reason: The Idea of ‘Race’ in Kant’s Anthropology", Postcolonial African Philosophy: A Critical Reader (1997) [21] Kant made an active contribution to racial ideology. To call Kant a racist is particularly legitimate because he was not simply “a child of his time” who would have parroted passively spread prejudices without being able to get out of this skin. On the contrary, he made an active, independent and elaborate contribution to the development of racial ideology, which he also regarded as a relevant part of his work. He explicitly represented his race theories in intellectual disputes against authors like Johann Gottfried Herder, who rejected this theory. (Racism allegations against Kant criticism of white reason) [22] 정확히 말하면, 인종에 대한 구분은, 피부색이라는, 경계가 모호한 기준을 통해서 인간을 구분하는 것이고, 이는 과학적으로 엄밀하고 보편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런데 칸트는 인종에 대해 발표한 소논문들에서, 다소의 임의적인, 혹은 사람들끼리 합의된 기준을 통해서 도입된 기준에 따르는 인종 개념을 인간이 잘 사용할 수 있다고 논한다. 또한 그는 이러한 인종들 간에 도덕적인 차이까지 있다고 주장하였다. [23] 칸트는 자신의 도덕 철학 체계를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가던 1785~1793년 무렵에도 강의에서 인종차별적인 언급을 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도덕 철학이 인종차별과 양립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즉, 그의 도덕 철학이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실천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르면 유색인종은 선천적으로 그런 인간 이성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도덕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다. [24] 원래는 철학자 찰스 W. 밀스의 말을 로버트 월드 서스먼이 인용한 것이다. (로버트 월드 서스먼 『인종이라는 신화』 김승진 옮김, 지와사랑, 2022, p.42 참조) [25] There is no evidence of any change in Kant's views at the beginning of the 1790s. In the 1792 version of his Physical Geography course, he still mentions, with apparent approval, Hume's claim that Blacks are naturally inferior. Kleingeld, who stresses this last point, does see a sharp change in Kant's views by the time he writes “Toward Perpetual Peace” in 1795, however, and the Metaphysics of Morals in 1797. In these texts, he condemns European colonialism, saying that Europeans had no right to appropriate other people's lands without their consent. That itself, as she notes, “grants a full juridical right” to the nonwhite peoples in these lands, which would seem to be incompatible with enslaving them. “The very fact that Kant regards Native Americans, Africans and Asians as (equally) capable of signing contracts,” she says, “indicates a shift in perspective.” Kant here explicitly rejects subjugating these peoples, moreover, even in the name of “civilizing” them. In notes for the “Perpetual Peace” essay, he also sharply condemns the slave trade (Ak 23:173–74), and in the essay itself he speaks of the “most gruesome and most calculated slavery” on the Sugar Islands (Ak 8:359). Finally, in the Metaphysics of Morals he argues against slavery altogether, except as punishment for a crime (Ak 6:283). Kleingeld takes all this to be evidence of a full change of heart, on Kant's part, as regards treating anyone with less than the full set of rights that white people grant to other whites. # [26] Kleingeld picks 1794–95 for the change in Kant's views that she describes, suggesting that Kant may have moved toward greater egalitarianism under the impact of the French Revolution. # [27] 『 실천이성비판』의 맺음말 첫 문단에 있는 말이다. 워낙 유명해서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칸트의 기념물에도 새겨져 있다. [28] 원문은 "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 거칠게 의미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무언가 나에게 나타나는 것 없이는 우리는 어떤 사물도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러나 우리 자신이 가지는 어떤 형식도 없다면 여전히 그 사물은 지각될 수 없을 것이다." 정도가 될 것이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순수이성비판 참조.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칸트의 이 말과 비슷한 형식의 말을 했다.(A 없는 B는 공허하며, B 없는 A는 맹목적이다는 식의 말) 아인슈타인은 1941년에 출판된 『과학과 종교(Science and Religion)』에서 "신앙 없는 과학은 공허하며, 과학 없는 신앙은 맹목적이다."라고 말했고,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1986년 『위험사회 – 새로운 근대(성)를 향하여』“사회적 합리성이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라는 말을 했다. # 다만 양자가 비슷한 모양이라고 내용이 함축하는 바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매우 곤란하다. 김대중 대통령의 논리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잡담이며, 경험의 검증을 거치지 않는 논리는 공론이다라는 어록 또한 칸트의 이 말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29] Handle nur nach derjenigen Maxime, durch die du zugleich wollen kannst, dass sie ein allgemeines Gesetz werde. [30] Handle so, daß du die Menschheit, sowohl in deiner Person als in der Person eines jeden anderen, jederzeit zugleich als Zweck, niemals bloß als Mittel brauchest. [31] Wer sich zum Wurm macht, kann nachher nicht klagen, wenn er mit Füßen getreten wird. "윤리 형이상학"의 덕 이론에서, 비굴하지 말아야 할 의무를 설명하는 대목이다(6: 437). 재미있게도 그 앞 부분에는 독일인들은 카스트제가 있는 인도 다음으로 허례허식이 담긴 존칭을 남발하고 있을 것이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나온다. [32] Aufklärung ist der Ausgang des Menschen aus seiner selbstverschuldeten Unmündigkeit. [33] Aus dem krummen Holz der Menschheit noch niemals ein gerades Ding gemacht wurde.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1784)』에 나오는 유명한 명언이다(7: 23).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면서 이기적인 동물적 성향도 지니고 있어서, 자신을 지배하는 법이 필요하지만 그 법에서 제외되고 싶어하므로, 법의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vollkommene Auflösung)'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어렵기는 하지만 인류가 반드시 해결해야만 되는 문제이기도 하기에, 1) 헌법의 본질에 대한 가능한 한 올바른 개념, 2) 수많은 세계사적 사건들을 통해 실천된 훌륭한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도 3)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선의지가 갖춰진다면,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아주 늦게나마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칸트는 얘기한다. [34] Der ewige Friede ist keine leere Idee, sondern eine Aufgabe, die, nach und nach aufgelöst, ihrem Ziele beständig näher kommt. 영원한 평화(영구평화론)에서. [35] 원문은 "denn wie kann ein böser Baum gute Früchte bringen?" (6: 44-5) 이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 나오는 말로서, '선한 나무에서 선한 열매가 열리고 악한 나무에서 악한 열매가 열린다'는 마태복음 7장 17-8절을 변형한 구절이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이 선천적인 악함을 극복하고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이해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긴 하지만, 선천적인 선함을 극복하고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이해하기란 더욱 힘든 일이기 때문에, 가능성만으로 따진다면 악한 사람이 선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순 없다. 우리가 그 타락에도 불구하고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즉, 악한 나무에도 '선의 싹(Keim des Guten)'이 순결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36] 원문은 "Fremdwörter verraten entweder Armut oder Nachlässigkeit." 후술할 번역논쟁을 상기시키는 듯한 칸트의 명언. 독일 내에서 자주 언급되는 명언이다. [37] "du kannst denn du sollst. (영문: Ought implies can.)" 이 말은 칸트가 한 말이 아니다. 이 말은 프리드리히 실러가 '철학자들(Die Philosophen, 1796)'이란 시에서, 칸트의 사상을 요약하면서 한 말이다. 칸트가 실제로 한 말은 이렇다. "daß solche geschehen sollen, so müssen sie auch geschehen können, (그런 일이 마땅히 일어나야만 한다면, 그것 또한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순수이성비판(1781)』)" "Denn, wenn das moralische Gesetz gebietet, wir sollen jetzt bessere Menschen sein: so folgt unumgänglich, wir müssen es auch können. (왜냐하면 도덕 법칙이 우리에게 이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명령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불가피하게 따른다.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1793)』)" 이후 피히테, 헤겔, 쇼펜하우어가 실러의 말(du kannst denn du sollst)을 마치 칸트가 한 말인양 말함으로써 이 말이 칸트가 한 말인 것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 [38] 『판단력 비판』이 쓰여지기 26년 전에 나온, 칸트 미학의 초기저술. [39] 보통 『형이상학 서설』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이 독일어 원제의 가장 마지막 단어만을 따서 원음 그대로 『프롤레고메나』라고도 번역되기도 한다. 『순수이성비판』의 방대함을 덜기 위해 칸트 자신이 좀 더 짧고 쉽게 쓴 이론 철학 교본이다. [40] 주제 면에서는 『실천이성비판』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서술이 평범한 인간 인식과 대중적 윤리 지혜로부터 분석적으로 진전해가고 있어 일반 독자의 접근이 비교적 용이하다. 단, 어떤 연구자들은 이 책의 3장 부분이 실천이성비판에서 개정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 책의 3장에서 칸트는 자유에서부터 도덕 법칙이 맞다는 서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도덕 법칙이 먼저 인식되고 그 다음 그 근거인 자유가 참임을 알게 된다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41] Sitte(Sitten은 Sitte의 속격)이라는 단어는 한국어로 1:1 대응하기가 쉽지 않아, '윤리'로도 번역 가능하고 '도덕'으로도 번역 가능하다. 다만, 칸트에게서 헤겔 이후의 철학자들에게는 친숙하다고 할 수 있는, Moralitat과 Sitte간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각각에 상응하는 도덕과 윤리라는 번역어 또한 의미상으로는 큰 문제 없이 교차적으로 사용가능하다. [42] 칸트전집에서는 보통 『형이상학 서설』과 같이 포함되어 수록된다. 19세기 독일어권 과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책이다. 외르스테드가 강한 영향을 받았고, 쿠르트 괴델 역시도 비엔나 서클에서 이 책을 공부한 적이 있다고 한다. [43] 참고로 판단력 비판 서문은 1790년에 나온 제1판의 서문과 1799년에 나온 제2판의 서문이 다른데, 제2판 서문은 칸트가 출판사로부터 서문이 너무 길다는 항의를 받아 제1판의 서문을 삭제하고 새로 쓴 것이다. 다만 삭제된 제1판 서문에는 3대 비판서에 대한 칸트 본인의 개괄적인 설명이 들어 있어 칸트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길잡이로서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 국내에 나온 판단력 비판 번역본들에는 모두 이 제1판 서문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44] 종교는 인간의 "모든 의무들을 신의 계명들로 인식함"에 그 참뜻이 있고, 진정한 성스러움은 인간이 선한 원리에 따라 '윤리적 공동체' 내지 '덕의 나라'를 지상에서 이룩하는 데 있음을 역설하는 저서. 백종현 및 김덕영은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에 이어 성스러움(聖)을 다룬 제4비판서라고 칭하기도 했다. 내용상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 2부와 겹치는 부분이 많으며, 칸트 스스로는 해당 저작이 자신의 3질문, 즉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에 대한 답을 다룬다고 한 바 있다. [45] 보통 『영구평화론』로 불린다. 칸트는 인권이란 "인간들 사이에만 있을 수 있는 가장 신성한 것"이자 "신이 지상에서 가지고 있는 가장 신성한 것"이라고 보았다. 신성성은 "우리가 인간들을 결코 한낱 수단으로 쓰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런 인권 보장이 법치 국가에서만, 나아가 국제적으로는 '보편적 국가 연합'을 이룸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 책. 이후 국제정치학의 이상주의(후에는 자유주의)적 '세계정부' 구상이나, "민주 국가들끼리는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는 도일의 민주평화론의 기초가 되었다. [46] 1부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와 2부 「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윤리형이상학이란 ‘자유의 형이상학’으로서 자유의 법칙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말한다. 1부는 법철학(정치철학)을 다루며, 2부는 『실천이성비판』에 뒤이어 도덕철학을 다룬다. 법은 외면적인 자유의 법칙을, 도덕은 내면적인 자유의 법칙을 그 내용으로 갖기에, 양자는 하나로 묶이면서도 서로 구별된다. [47] 칸트가 오래 수행해 온 인간학 강의의 강의노트를 편집한 책이며, 그가 마지막으로 출판한 책 중 하나이다. [48] 이 작품은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과 함께 칸트의 생전에 그 스스로 출간한 마지막 저술이다.
본래 이 작품은 칸트가 순수한 종교론과 경험적 계시 종교론의 충돌로서의 철학부와 신학부와의 논쟁만을 기획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글의 서두에는, 종교를 검열했던 당시 황제가 죽었으니 이제 그의 신민인 한 해당 내용을 출판하지 않겠다는 맘에 안드는 맹세는 깨도 되는 거 아니냐는 내용이 있다(...)
추가로 ‘영혼의 장소’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부학적-심리학적 분과인 의학부와 심리학적-형이상학적 분과인 철학부 사이의 논쟁, 순수한 법론과 경험적 정치의 충돌에 대한 철학부와 법학부의 논쟁으로까지 확대 구성하게 된 것이다. [49]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포함. [50] 『계몽이란 무엇인가』, 『영원한 평화』, 『학부들의 다툼』 포함. [51] 한국칸트학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52] 칸트학회의 한길사 번역판본은 칸트의 저서가 방대하여 그 안에서도 세부적으로 연구가 갈리는 이유 때문에, 해당 저서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한 한국 학자 위주로 배정되어 번역되었다. [53] 칸트학회의 경우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칸트전집 소개 페이지에서 책의 역제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홈페이지에 안내된 대로 출판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칸트학회의 경우 한 권에 칸트의 여러 저서를 묶어서 출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한국 칸트학회가 임의로 묶은 것이 아니라 칸트 후대의 '베를린 학술원판' 칸트 묶음집의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54] 현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 [55] 러시아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의 시설을 활용해 1967년에 칼리닌그라드 대학교를 설립했고, 이 학교는 2005년에 임마누엘 칸트 발틱 연방대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56] 물론 교수직을 얻지 못했다. [57] 윤리형이상학 덕론에서 '술과 아편 등은 우리를 자연의 경향성에 종속시킨다'고 비판하면서도, 진정한 악덕은 그런 술을 절제하지 못하게 하는 준칙(일상적으로 말하면 즐거움을 위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을 마시기 위해 술을 마시는 행동방식)에 있다고 한 적 있다. 덤으로 술은 금지하면서 오히려 아편은 기호식품으로 권하는 이슬람교의 율법이 이상하다고 깐다(...). [58] According to Kühn, whose acclaimed biography of the philosopher has just been published in Germany, Kant also had "amorous interests" in two women - though there is no evidence these were consummated. It was only at the age of 57, after Kant had published his most famous work, his Critique of Pure Reason, that he was in a position to support a wife. "By this time it was too late," Kühn said. # [59]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연한 차 한 잔과 담배 한 대를 피우면서 연구를 하는 등의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에 나온다.(p.446) 다만 이 시기에 '유고'가 작성되었다고 나오지, 3시 30분의 산책과 시계 이야기는 평전에 나오지 않는다. 3시 30분의 산책으로 사람들이 시간을 맞췄다는 이야기는 하인리히 하이네가 한 이야기로, 하이네의 이야기는 그 자신의 편견이 많이 들어가 있는 이야기라서 신뢰성이 부족하긴 하다.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칸트는 사교적인 사람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긴 했지만 그것이 병적으로 '강박적'일 정도는 아니었다. 하이네가 칸트의 엄격한 도덕 법칙을 보고선 그의 규칙적인 생활을 마치 강박적인 방식(시계 이야기)으로 표현했던 것. (비슷하게 하이네는 헤겔이 "나도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비꼬아 말한 적이 있는데, 헤겔 학계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이네가 만들어낸 것으로 취급한다.) [60] 이마누엘 칸트의 생애를 기술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삶도 사건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의 북동쪽 경계에 있는 옛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의 조용하고 외진 조그만 골목길에서 기계적인 질서의 엄격한 독신의 삶을 살았다. 나는 그곳의 성당에 걸려 있는 커다란 시계가 지역 주민인 이마누엘 칸트만큼 건조하고 기계적으로 자신의 일과를 수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고, 강의 원고를 읽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 모든 일과가 정해진 시간에 이루어졌다. 그의 이웃들은 이마누엘 칸트가 회색 연미복을 입고 손에 스페인산 작은 지팡이를 든 채 문 밖으로 나와 작은 보리수 가로수 길을 걸어가면, 수도원의 시계가 3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중략) 칸트의 외적인 삶과 그의 파괴적이고 세계를 으스러뜨리는 사유는 놀라운 대조를 보인다! 실로, 쾨니히스베르크의 시민들은 이러한 사유의 완전한 의미를 예감할 수도 있었고, 단지 인간만을 처형하는 사형집행인에게서보다 칸트에게서 더 무서운 공포심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칸트에게서 철학 교수의 모습만을 보았고, 정해진 시간에 칸트가 지나가면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면서 그들의 손목시계를 맞추었을 뿐이다. ( 하인리히 하이네, 저서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제3장 중(中). / 회화나무판 국내 번역본 166p ~ 167p.) [61] Das Billiard Spiel war seine eintzige Erholung; Wlömer und ich, waren dabey stets seine Begleiter. Wir hatten die Geschicklichkeit in diesem Spiel beynahe aufs höchste gebracht, giengen selten ohne Gewinn nach Hause; ich habe den frantzösischen Sprachmeister gantz von dieser Einnahme bezalt; Weil aber in der Folge Niemand mehr mit uns spielen wolte; so gaben wir diesen Erwerbs Artickel gantz auf, und wählten das l'ombre Spiel welches Kant gut spielte. (Reicke 1860, 49; rpt. Malter 1990, 19) # [62] 실제로 프랑스 란제리 브랜드 Louisa Bracq의 '칸트 여성 란제리 컬렉션(Kant women's lingerie collection)'으로 가터벨터가 판매되고 있는 등 구글링하면 많이 찾아볼 수 있다. [63] 나머지 둘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69]와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다. [64] 요한 하인리히 블뢰머 [65] 야코비는 칸트와 같은 시대 사람이지만 칸트 철학의 비판자였다. 특히 그가 제시한 일명 '야코비의 딜레마'는 칸트 철학의 근간을 흔들 만한 결정적 치명타로서 칸트적 이원론의 한계를 대두시켰으며, 이를 극복하고자 독일관념론이 피히테- 셸링- 헤겔의 일원론적 경향으로 이행하게 되는 데에 주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야코비는 또한 당대 독일 사상계 내에서 스피노자의 재조명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칸트적 이원론의 대안으로서 셸링과 헤겔 등의 스피노자적 일원론 경향이 자연스레 나타났다. 참조 오늘날의 칸트주의자 중에서는 야코비에 대한 재반박으로 칸트를 옹호하려고 시도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66] 해당 초상화는 원래 요한 크리스티안 폰 만리히(1742~1822)가 그린 야코비의 초상화를 칼 윙엔더(1812~1894)가 따라 그린 사본이다. # [67] 동시대의 저널리스트, 토마스 드 퀸시의 『임마누엘 칸트의 마지막 날』에 나오는 일화다. # 외국에서는 "커피! 커피!", "육지다! 육지!"가 밈으로 자주 쓰이기도 한다. [68]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7308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