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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바쿠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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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미하일 바쿠닌
Mikhail Bakunin
파일:Bakunin_Nadar.jpg
본명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акунин
Mikhail Alexandrovich Bakunin
출생 1814년 5월 30일[1]
러시아 제국 트베리현 프레무키노
사망 1876년 7월 1일 (향년 62세)
스위스 베른
국적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철학자, 혁명가
성향 아나키즘
모교 샹트페테르부르크 포병 학교
베를린 대학교
종교 무종교( 무신론)[2]
서명 파일:미하일 바쿠닌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사상
3.1. 집산주의적 아나키즘3.2. 상속권 폐지, 노동과 지성의 조화3.3. 연대적 자유3.4. 권위에 대하여
4. 어록5. 연관 기록물6. 여담

[clearfix]

1. 개요

"바쿠닌 없이도 아나키즘은 존재했겠지만, 아나키즘 운동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Bakunin;The Father of Anarchism』 p.262

러시아 아나키스트. 프루동의 뒤를 이어 나타난 아나키즘 활동가이자 사상가. 프루동은 작은 공동체들의 연맹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의회주의의 역설[3]을 외쳤던 반면에, 바쿠닌은 그것이 의회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혁명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파괴를 향한 열정은 창조의 열정"이라는 그의 유명한 말을 스스로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평생토록 혁명을 쫓아다니며 살았다. 프랑스, 스위스, 폴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떠돌며 사람들을 선동했고 혁명을 주장했다. 그의 거대한 체구와 불같은 열정은 사람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고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냈다. 그의 혁명적 사회주의는 이후 노동자의 총파업을 수단으로 사회를 변혁시켜 나가자는 '혁명적 생디칼리슴'으로 계승된다.[4]

당시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제1 인터내셔널을 이끌었던 사회주의 혁명가의 두 기둥 중 하나였으나[5], 마르크스와는 사상적 견해차이[6]로 갈라섰고, 세르게이 네차예프 사건[7] 등을 이유로 바쿠닌은 마르크스에 의해 인터내셔널에서 내쫒겼다. 이후 아나키즘의 계보는 마르크스적 공산주의에 아나키즘적 요소를 도입한 표트르 크로포트킨으로 이어진다.[8]

아나키스트로서 모든 권위를 부정하였던 바쿠닌의 사상은 자유에서 시작하여 자유에서 끝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한 때 '니힐리즘의 창시자'이자 '무정부주의의 사도'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프리드리히 니체와 같은 허무주의 사상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저명한 역사가이자 바쿠닌 연구 최고 권위자 에드워드 카는 바쿠닌을 가르켜 '역사상 가장 완벽한 자유정신의 구현'이라 평가하였다.[9]

2. 생애

미하일 바쿠닌은 러시아력으로 1814년 5월 18일, 트베르(Tver)주 프레무키노(Premukhino)에서 유서깊은 귀족가문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바쿠닌과 어머니 바르바라 무라비요프의 열명의 자식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쿠닌이 청소년기 때 이미 60대 였기 때문에 서로 소통이 잘 되지 않았었고 어머니는 성격이 소심했던데다가 다정다감하지 못했지만, 열명의 형제들과는 제법 잘 어울리면서 자랐다. 바쿠닌의 성장 배경은 여타 러시아 제국 귀족 명문가 자제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인, 독일인 등 각 나라에서 온 가정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아 5개 국어를 구사했으며, 당시 서구 귀족 사회의 필수 소양 중 하나였던 악기 연주도 배웠었다. 특히 바쿠닌은 바이올린을 잘 켰다.[10]

바쿠닌은 러시아 귀족 자제의 정석 코스를 밟는 듯 했다. 1828년, 14살 때 페테르부르크의 포병사관학교에 입학했고 5년간 고생하여 마침내 19살에 포병 소위로 임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성적 부진으로 퇴교 처분을 받고는 아무도 원하지 않던 폴란드 국경의 한 여단으로 배속되었다. 바쿠닌은 성격상 이를 견딜 수 없었고 임무수행 도중 탈영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바쿠닌은 병을 구실로 뒤늦게 사직서를 보냈는데 가문의 배경 덕분에 가까스로 탈영에 따른 처벌은 피할 수 있었다.

바쿠닌의 아버지는 바쿠닌이 군인이 되기를 바랬지만 바쿠닌은 철학자로서의 꿈을 품고 모스크바에 가서 수학하였다. 여기서 그는 피히테의 책을 독일어에서 러시아어로 번역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헤겔의 저서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는데도 열심이었다. 헤겔 철학에 대한 본격적인 공부를 위해 1840년 베를린 대학으로 유학한 바쿠닌은 그곳에서 엥겔스, 키르케고르 등과 함께 헤겔 철학을 공부했고 셸링에게 강의를 들었으며 이후 드레스덴으로 가서 공부를 지속했다. 1841년에 비로소 바쿠닌은 헤겔의 사상이 '파괴적 실천에 있다'는 《독일에서의 반동》을 저술하면서 헤겔을 '혁명의 철학자'로 전환시키고는, 이 때부터 세상의 모든 혁명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다녔다. 이 무렵 공산주의자 바이틀링의 영향을 받아 스위스에서 그와 함께 지냈는데, 이를 문제삼은 러시아 제국 정부는 바쿠닌의 귀족 지위를 박탈하고는 무기한 강제 노역과 시베리아 유형에 처한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하지만 바쿠닌은 러시아 정부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고 이후 이나라 저나라를 정처없이 떠돌아 다닌다. 2년 뒤에는, 파리로 가서 카를 마르크스, 피에르조제프 프루동과 친분을 쌓았다.

1848년 혁명 당시 파리 혁명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독일로 건너가서는 《슬라브 민족에게 보내는 호소》라는 글을 써서 오스트리아 제국 내 슬라브 민족들이 오스트리아의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하여 동유럽에 자유슬라브공화국 연방을 건설할 것을 호소하였다.[11] 이듬해에는 드레스덴에서 작센군에 대항하여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바리케이트를 지켰다. 작센군에게 체포된 바쿠닌은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슬라브 민족주의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던 그를 처벌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제국이 그를 요구했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올뮈츠 요새에서 9개월간 감금되었다가 재판에서 교수형을 언도받은 직후, 러시아 제국이 바쿠닌을 요구하자 다시 러시아로 인도되었다. 11년만에 고국에 발을 디딘 바쿠닌은 이렇게 소리쳤다. "어이, 이보게들. 고국에 돌아온다는 건 좋은 일이군. 비록 죽으러 왔지만 말이야" 당연하게도 러시아 감옥 내에서 바쿠닌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보다 못한 바쿠닌의 어머니는 끊임없이 당국에 탄원서를 작성했다. 이 덕분인지 알렉산드르 2세로부터 지금 그대로 있는 것과 시베리아로 종신 유형을 떠나는 것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는 말을 들었고, 바쿠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시베리아행을 택했다.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하던 바쿠닌은 1858년 폴란드 상인의 딸 안토니아 크비아트콥스키와 결혼했다. 1861년엔 시베리아를 탈출할 계획을 세웠고, 교역을 한다는 명목으로 아무르 강까지 갔다가 그 강의 입구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로 갈아탔다. 그 배를 타고 일본 홋카이도를 거쳐 요코하마로 이동한 후 다시 미국행 배로 갈아타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배를 타고 파나마 해협을 통과해 뉴욕으로 이동한 다음 런던으로 건너갔다. 이로써 1851년 러시아 정부에 인도된 그는 수감ㆍ유배ㆍ탈주ㆍ망명생활을 거쳐 10년만에(1861년) 자유의 몸으로 런던에 도착하였다. 이러는 과정에서 그는 '러시아 감옥에서 탈출한 혁명가'라는 소문으로 유럽 전역에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그는 이 유명세를 바탕으로 혁명가로서 제2의 삶을 시작한다. 수많은 편지를 보내 조직을 만들고 신문에 투고하여 영향력을 키웠으며, 입장은 비록 달랐지만 농민공동체를 꿈꾸었던 어린 시절 친구 게르첸의 잡지 《코로코르》 발행에 협력하였고, 1867년에는 스위스로 가서 유럽 각지의 사회주의자들을 모아 '평화와 자유의 동맹'을 결성하였다.

1868년에 바쿠닌은 제1차 인터내셔널의 제네바 지부에 합류했고, 이후 인터내셔널의 주도권을 두고 마르크스, 엥겔스와 싸우기 시작했다.[12]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가 활발했던 바쿠닌은 이탈리아 및 스페인의 인터내셔널 지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었으나, 세르게이 네차예프 사건과 바쿠닌의 인터내셔널 헤이그 대회 불참 등으로 인해, 결국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위시한 공산주의자들에게 밀려났고 1872년부로 인터내셔널에서 탈퇴당했다.

1873년 바쿠닌은 심장병이 악화되자 현역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스위스 루가노에서 요양하다가 1876년 7월 1일 토요일 아침, 베른의 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장례식은 7월 3일에 치러졌다. 추도사를 하던 제임스 기욤은 연설 도중에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하고 심하게 흐느꼈다. 그의 무덤은 베른의 브렘가르텐 공동묘지에 있다. 비문에는 원래 "조국의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그를 기억하라."[13]라고 쓰여있었으나, 2015년 추가된 동판에는 그가 했던 말, "불가능한 것을 하기위해 애씀으로써 사람은 가능한 것을 항상 성취해왔다."[14]가 쓰여져 있다. 그와 부인 안토니아 사이에서 낳은 3명의 딸[15]은 이탈리아에 정착했는데, 그 중에서 마리아 바쿠닌은 이탈리아에서 화학자가 되었고 소피아 바쿠닌은 후일 이탈리아의 수학자로 유명해진 레나토 카치오폴리의 어머니이다.

3. 사상

3.1. 집산주의적 아나키즘

저는 공유를 싫어합니다. 공유는 자유의 부정이고, 저로서는 자유 없는 인간성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국가에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사회의 모든 힘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고, 그것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또한 국가의 수중에 모든 소유를 집중시키는 방향으로 반드시 나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국가의 폐지를 원합니다. 도덕으로 무장하고 문명화된 인간을 구실로 삼아 이제껏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박해하며, 착취하고, 타락시켜온 국가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권위와 보호에 관한 신념을 뿌리째 완전히 뽑아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어떤 권위라도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그 권위를 가지고 위에서 아래로 조직되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로운 연합으로서 아래에서 위로 조직되는 사회와 집산체적 소유 또는 사회적 소유를 목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국가의 폐지를 바라는 저로서는 동시에 개인의 상속재산 또한 폐지되기를 기원합니다. 개인의 상속재산은 국가 제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뿐더러 국가라는 구조의 직접적인 결과물에 다름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점이야말로 제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집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화와 자유의 동맹'에서의 연설 중...[16]
바쿠닌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폐지하자'고 주장한다. 주요 생산수단인 토지ㆍ공장ㆍ철도ㆍ광산 등은 개인이 소유해선 안되고 그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노동조합이 소유'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집산체적 소유 또는 사회적 소유라고 한다. 노동조합의 소유가 된 생산수단은 그 조합의 생산자들 스스로에 의해 통제되고 관리된다. 우선, 생산수단이 노동조합의 소유가 되기위해서는, 초기에는 "남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지주들로부터 땅(생산수단)을 강제로 빼앗는 반란", 즉 혁명이 필요하다. 한번 공동소유가 자리잡으면 '돈'은 폐지되고, 노동에 기여한 질과 시간에 따라 주어지는 '노동전표'로 대체된다. 노동의 질과 시간을 정하는 기준은 민주적으로 조직된 기관을 통해 결정되며, 이렇게 얻은 노동전표를 가지고 자신이 필요로 하는 생산물을 공용마켓에서 구입하고 소비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평등에 의해 정치적 평등이 확립되기를 추구"한다. 이것은 타고난 개인의 차이를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모든 개인의 사회적 권리가 평등하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아동, 소년, 소녀는 어른이 될 때까지 평등한 최저생활 수단, 지원, 교육, 기회 등이 필요하며, 어른들에게는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의 복지를 창출할 수 있는 물자과 생산수단들이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의 복지를 창출한다는 점에선 생 시몽이나 샤를 푸리에처럼 '노동에 따른 분배'를 주장한다고 볼 수 있다.[17]

물론 바쿠닌은 아나키스트이므로, 마르크스주의처럼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이 공적소유가 된 생산수단을 통제하고 관리하자는 것이 아니며, 비중앙화된 수많은 노동조합들이 각각의 생산수단을 공적소유하자고 주장한다. 이들 노동조합들은 그들의 공적소유를 지켜나가기 위해, 서로 다른 노동조합들과 연대ㆍ협력한다. 바쿠닌은 공산주의를 언급하며 공유를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모든 공적소유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적소유가 권위주의적으로 강제되는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주의를 싫어한다는 것을 말한다.[18]

3.2. 상속권 폐지, 노동과 지성의 조화

바쿠닌은 사적소유의 문제에 있어서, '상속권'으로 부가 세습되는 것이 사회적 불평등을 존속시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ㆍ경제적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사회는 돈을 가진 소수와 돈이 없는 다수로 분열되고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구조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정치적 평등 없이는 보편적, 인간적, 그리고 진정으로 민주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상속권'으로 부가 세습되는 것을 막는 것이 현시대의 가장 절실한 문제라고 바쿠닌은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를 지탱하고 부가 세습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 바로 '국가'다. 그러므로 국가는 상속권과 마찬가지로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쿠닌의 주장이다.

한편, 노동과 지성의 분리 또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구분되는 것은 좀 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실제로 기존사회에서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구별은 연구, 행정, 산업경영, 예술 등 고상한 일에 종사하는 자들과 순전히 기계적인 육체노동에 시달리는 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육체노동이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일 자체가 고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지성'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부 똑똑한 사람도 매일같이 힘겹고 불유쾌한 일에 종사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수술의, 해부학자, 유독물질을 다루는 화학자 등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일은 사회적으로 평가절하 당하거나 수치스럽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들의 작업에는 지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쿠닌은 모든 산업 및 농업에서의 노동도 지성과 결합되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포괄적인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이야말로 배고픔을 면하려는 노동자에게 기계적 작업을 강요해 온 지배계급의 지식 독점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역으로, 정신노동만 하는 학자들은 일정부분 육체노동에 종사함으로서 서로의 이해범위를 확장시켜 나갈 줄 알아야 한다.
"학자가 육체 노동을 생소하게 여기지 않게 될 때, 그의 지식은 좀 더 성과적이고 유용하고 폭넓은 것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교육받는 노동자의 노동은 좀 더 지혜롭고 결과적으로, 무식한 노동자의 노동보다, 좀 더 생산적인 것으로 될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노동자도 과학자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인간들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노동과 과학 양쪽 모두의 이해에 합치되게 된다."

3.3. 연대적 자유

"자유는 개개인의 그리고 모든 사람의 전체적인 연대성 속에서만 정당하고 완전하다. 고립된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격상 본질적으로 상호적이며 사회적이다."
바쿠닌은 평생을 걸쳐 자유를 외친 혁명가로 유명하다. 그의 자유론에서 아나키즘이 나왔고 아나키즘은 세상의 모든 권위를 부정한다. 바쿠닌의 자유론에서 특징적인 점은 '이웃의 자유가 자기 자신의 자유에 대한 필수조건'이라는 데에 있다. 심지어 바쿠닌는 '지상의 한 인간이라도 노예상태에 있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모든 사람의 자유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다른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그들 자신의 자유에 대한 제 1의 요건이 된다. 어느 한 쪽의 행복과 불행은 동시에 다른 한 쪽의 행복과 불행이 되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이 자유롭지 않는 한, 그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고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을 비판한다. 사회계약론은 사회질서라는 명분으로 권력을 지닌 국가를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3.4. 권위에 대하여

"내가 모든 권위를 거부해야하는가? 내 생각은 결코 그렇지 않다. 부츠의 경우를 보자면, 나는 부츠 장인의 권위를 참고할 수 있다. 또한 주택, 운하, 철도등에 대해서 나는 기술자나 건축가의 의견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특별한 지식에 대해서 나는 그런 종류의 학자들의 뜻에 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츠장인이나 건축가 또는 기술자들이 그들의 권위를 나에게 행사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지성, 인격, 지식들을 존중하며 경청할 것이지만, 한편으로 나의 비난과 비판의 권리는 언제나 남겨둘 것이다. 어떤 종류의 특별한 부분일지라도 나는 단독적인 권위에 자문하는 것에 만족 하지 않을 것이며, 여러 종류의 의견을 비교하여 나에게 적합해 보이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 특별한 물음일 지라도, 무결한 권위가 없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그러한 사람들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존중하고 말고에 상관 없이, 나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절대적인 믿음을 갖지 않는다.”
권위는 무엇인가?
모든 권위를 거부하는 아나키스트였던 바쿠닌은 전문적 권위에 대해서는 거부하지 않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바쿠닌이 말하는 전문적 권위는, 그가 평생을 거부했던 독재적 권위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는 점이다. '독재적 권위'의 속성이란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에 있는 반면, 그에게 있어서 지식에 의한 '전문적 권위'는 단지 참고사항일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그 '전문적 권위'가 강제된다면 그건 또다른 '독재적 권위'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런 맥락을 알고 있어야만, 바쿠닌이 지식에 의한 전문적 권위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권위가 자신에게 행사되는 것은 거부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언행을 이해할 수 있다.

4. 어록

"파괴를 향한 열정은 창조적인 열정이다!"
1842년 《독일에서의 반동》
"사람들이 몽둥이로 맞고 있을 때, 그 몽둥이가 “민중의 지팡이”라고 불린다고 해서 행복해하진 않을 것이다."
(When the people are being beaten with a stick, they are not much happier if it is called "the People's Stick".)
《국가주의와 아나키(Statism and Anarchy)》
우리는 사회주의 없는 자유는 특권이자 불의이며 자유없는 사회주의는 노예제이자 야만이라고 굳게 확신한다.
국가 없는 사회주의: 아나키즘
우리는 인민의 경제적, 사회적 해방을 추구한다. 이것이 없는 자유는 모호한 말장난이나 역겨운 거짓말 외에 아무 것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강령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노예다. 이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고,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니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우린 그를 죽여야할 것이다.
신과 국가

5. 연관 기록물

6. 여담

  • 그는 수많은 명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한편으로는 《신과 국가》를 제외하곤 책을 제대로 완결한 적이 없다. 이는 바쿠닌이 이론가보다 행동가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아쉽게도 이러한 연유로 그의 저술 중 한국어로 완역된 것은 아직까지 없다. 대신 에드워드 카가 지은 《미하일 바쿠닌》 평전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문제는 E. H. 카가 원래 대중들을 대상으로 책을 쓰는 게 아닌 사람인 것도 있고, 분량도 번역된 책 기준 700페이지가 넘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되지 않으면 완독하기 버겁다.
  • 미국 캘리포니아의 AK press에서 미하일 바쿠닌의 글들을 영어로 번역하여 8권 분량의 전집을 출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다시 말해서 아직도 그의 저서들이 영어로 번역, 정리가 제대로 안 되어있다. 다만 이는 영어권에서 바쿠닌을 무시해서는 아니다. 바쿠닌이 강경 반유대주의자라서 미국 학계에서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후술할 이유가 더 크다. 쉽게 말해서 바쿠닌은 라이벌 마르크스와 성격상 공통점이 많았다.[19] 바쿠닌도 마르크스처럼 글은 잘 쓰는데, 글을 잘 정리해서 책으로 출간하는 일을 못하는 편이었다.[20][21] 그나마 마르크스의 경우 그의 친구 엥겔스가 수십년동안 마르크스가 쓴 글들을 일일이 꼼꼼하게 편집하고 정리라도 해주었지,[22] 바쿠닌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동안 장기간 체계적으로 그의 글을 편집, 정리해 줄 수 있는 친구도 없었고, 그의 제자들도 그와 노선 차이로 싸우고 다투는 일이 많았다. 만약에 바쿠닌이 엥겔스 같은 친구를 만났다면 그 역시 《자본론》 시리즈 비슷한 저작들을 출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가 엥겔스를 만나지 못했다면 마르크스 역시 미하일 바쿠닌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삶면서 이런저런 단편적인 글들만 남기고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 바쿠닌이 1849년 드레스덴에 있을 때 바그너가 지휘하던 공연을 봤고 그들은 평생 친구가 되었다. 특히 바쿠닌은 바그너가 지휘하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좋아했고, 바그너에게 "전세계에 큰 불길이 일어나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음악이 사라져야 한다고 해도 이 교향곡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맹세를 해야 한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웬만해서는 무던한 성격을 지녔던 바그너도, 우람한 체격에 남을 압도하는 모습을 지닌 이 야만인(!) 곁에 서 있으면 자신이 너무나 보잘것 없이 느껴질 정도로 위압감을 느꼈다고..
  • 러시아인이었지만 폴란드 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는데 늦은 나이에 얻은 부인이 폴란드인이었으며, 1863년 1월 폴란드 봉기 때 반러 독립군에 합류하는 것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 봉기에 나섰던 폴란드 사람들은 반-부르주아가 아니라 반-러시아주의로 뭉쳤기 때문에, 러시아인이었던 바쿠닌을 대놓고 배척하였고, 바쿠닌은 이에 실망하여 민족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활동기 초중반, 슬라브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세상에 아나키즘을 퍼뜨릴 생각을 하였던 것과 비교해보면, 후반기 그의 활동에서는 민족주의에 대한 그 어떠한 미련도 남아있지 않는 걸 볼 수 있다.
  • 김제동 오늘밤 김제동에서 전원책과 대담 도중에 전원책이 바쿠닌을 언급하자, 김제동은 바쿠닌이 누군지 몰랐고 이를 답답하게 여긴 전원책이 바쿠닌을 러시아 사람이라고 설명하자 갑자기 김제동이 아는 척을 하며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USSR 사람이라고 우기며 성질을 낸 적이 있다. #1 #2[25] 이때 전원책이 바쿠닌을 극우라고 불러서 전원책도 뻘짓을 했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전원책은 방송에서 일관되게 바쿠닌을 좌파라고 소개했고, 극우가 아니라 '거구'였다고 말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 스페인 미니어쳐 게임 인피니티 노매드 소유의 함선들 중 바쿠닌 관할군이 소속된 함선 '바쿠닌 호'의 명칭을 이 사람으로부터 따왔다, 노매드의 떠돌이 아나키즘 성향에 걸맞은 작명.


[1] 율리우스력 기준. 따라서 그레고리력으로 변환하면 5월 30일이 된다. [2] 반신론적 무신론. [3] 무정부주의자가 그의 목표를, 정부를 통해 이루고자 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프루동은 스스로를 '역설의 인간(a man of paradox)'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4] 다만 혁명적 생디칼리슴 아나키즘 생디칼리슴은 다른 존재다. 바쿠닌은 둘다에 영향을 준 것은 맞지만 둘의 존재는 다르다. 이에 대해서 바담 다미예의 20세기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를 읽어보길 추천한다. [5] 각각 바쿠닌은 무정부주의,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대표한다. [6] 특히 혁명 이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있어야 되느냐는 문제로, 둘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바쿠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또 다른 권력 기관이나 독재적 국가로 변질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였고, 마르크스는 혁명의 이념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권위주의적 국가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7] 바쿠닌이 자본론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려 하자 네차예프가 그런 책을 번역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면 당신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는데 문제는 바쿠닌은 혁명 조직을 운영하느라 돈이 필요해 출판사에서 번역료를 일부 가불받은 상황이었다. 네차예프는 출판사에게 돈은 바쿠닌에게 기부한 셈치고 번역을 중단하라고 협박했다. 당시까지는 네차예프는 바쿠닌이 운영하던 조직 소속이었기에 제3자가 보기에 해당 행동은 바쿠닌이 자본론을 명목으로 출판사를 삥뜯는 행동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8] 크로포트킨의 이러한 사상을 '아나코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크로포트킨의 '아나코 공산주의'적 측면은 바쿠닌을 지나치게 집산주의적이라 비판하는데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임금을 '노동전표'로 주는 '노동에 따른 분배'를 비판하고,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필요에 따른 분배'를 주장하였다. 빵의 쟁취 13장의 "집산주의적 임금제도" 참조. [9] 단, 바쿠닌은 개인의 자유가 집단과 서로 대립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는 집단에서의 상호적 사회연대를 통해서만 확보되고 발전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0] 19세기 당시는 클래식 음악이 대중화되었지만 아직 오디오 기기들이 개발되기 이전이었고 이 때문에 당시 서구 상류층 사회에서는 악기 연주가 기초 소양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물론 멜로디언이나 하모니카 같은 거 말고 피아노나 바이올린, 플룻 같은 물론 비싼 악기 [11] 그리고 이 주장은 70년 뒤인 1918년 11월에 현실이 된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공화국으로 전환했으며, 슬라브 지역에서 여러 독립국들이 생겨났다. [12]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 모두 최종적으로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철폐'를 혁명을 통해 이루고자 했지만, 혁명 이후에 혁명의 이념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견해가 완전 달랐다. 바쿠닌은 혁명 이후에 수많은 노동조합들의 연대를 통한 비중앙집권적 연맹을 주장했던 반면에,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의 공적소유를 통제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 권위주의 국가를 주장하였다. 즉, 바쿠닌의 주장은 프루동이 그러하듯 '개인들의 의식 개선과 그 개인들의 연대'를 통해 '국가가 폐지'되기를 꿈꿨지만, 마르크스는 '중앙집권적 권력을 통해 그것을 강제'는 '국가의 존속'을 필요로 했다는 데서 그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13] "Remember he who sacrificed everything for the freedom of his country" [14] "By striving to do the impossible, man has always achieved what is possible" [15] 사실 바쿠닌은 남자구실을 잘 못했고, 그의 딸은 실제 친딸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자신의 책에서 이 의견을 비중있게 실었다. 그 딸들은 사실 바쿠닌의 부관인 카를로 감부치와 안토니아 사이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16] E. H. 카의 『미하일 바쿠닌』 p.478 [17] '노동(노동 시간, 노동의 질)에 따른 분배'는 이후 마르크스의 『고타 강령 비판』에서 비판받는다. 마르크스는 그 대안으로 '필요에 따른 분배'를 주장한다.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에는 절대적 한계가 있으며, 개인마다 그 필요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인 표트르 크로포트킨도 마찬가지로 '필요에 따른 분배'를 주장한다. [18] 이러한 집산주의적인 바쿠닌의 사상은 20세기의 노동자들의 자가관리성을 주장하던 혁명적 생디칼리슴과 크게 접목되었고 곧 아나키즘 생디칼리슴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특히 CNT-FAI의 내전기의 모습, CGT(General Confederation of Labour; 노동총연맹: 프랑스에서 세워진 노동자들의 총조합이며 이후 스페인, 독일등으로 확산된 노동조합)의 아미엥 헌장등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19] 일부 아나키스트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나키즘 마르크스주의는 90%가 같고 10%가 다르다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이 바쿠닌의 영향이다. 그는 확고한 유물론자였고 그렇기에 마르크스와 함께 1인터에서도 같이 활동해갔으며 오직 단 하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시하는 과도기의 대한 입장차이 때문에 둘이 갈라섰다. 그의 저서 우리의 강령, 국가 없는 사회주의: 아나키즘에서의 공산주의 비판 대부분이 프롤레타리아 독재관련인 것도 이런 이유다. [20] 당장 그의 저서중 하나인 신과 국가부터가 각주 하나의 분량이 2~3페이지를 넘어가는 분량을 가질 정도다. [21] 러셀 曰 "문체에서 일종의 아나키즘이 느껴진다." [22] 엥겔스는 마르크스 대신 신문 기사를 대필(...)할 수 있는 수준의 능력자이기도 했다. 마르크스가 독일어로 쓴 글이 영어, 러시아어 등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번역에 도움을 주고 검토 작업을 맡은 것도 엥겔스 몫이었다. [23] 막스 네틀라우 - 아나키즘과 민족주의(Анархизм и национализм)에서는 바쿠닌은 열렬한 범슬라브주의적 민족주의를 지원가였고 연방제적 민족주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카를 마르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민족에 대해서 너무 과소평가한다며 비판한 적도 있다. 출처: M. A. 바쿠닌. 1872년 브뤼셀 신문 La Liberte에 보낸 편지 [24]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혁명은 노동계급을 설득하여 그들을 혁명으로 끌고 오는 것에 있었던 반면에, 블랑키주의(Blanquism)는 소규모의 비밀결사가 조직적이고 비밀스런 공모로 혁명을 달성해야 한다는 개념을 가리킨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블랑키주의자가 노동계급과의 융합을 충분히 이루어내지 못한 혁명가로 봐서 멸시했다. [25] 전원책 변호사 말대로 바쿠닌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약 40년 전에 죽은 사람이다. 전원책이 " 마르크스와 싸웠던..."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김제동이 "소련'유에스에스알' 때 사람 아니냐"며 "제대로 알고..." 라며 역으로 다그치는 모습이 볼 만하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소련 성립 전 러시아 제국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