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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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늘날 '불가리아인'이라는 말은 주로 불가리아에 거주하며 남슬라브어파에 속하는 불가리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그 후손들[1]을 의미한다. 굳이 이렇게 정의되는 이유는 불가리아인들의 조상 중 하나인 불가르인들이 볼가 강의 유목민으로부터 기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불가리아인 자체는 불가르인들뿐만 아니라 트라키아인, 슬라브인의 혈통도 잇고 있으며, 이외에도 소수의 그리스계, 튀르크계 주민들도 포함되어 있다.
2. 기원
오늘날 불가리아에 해당하는 지역은 고대에 트라키아라고 불리던 지역으로 남쪽의 그리스계 국가들과 맞닿아있었고, 현재의 불가리아에 살던 종족들을 트라키아인이라고 칭했는데 꽤 오랜기간 동안 부족국가 형태를 지니고 있었고 기원전 5세기 무렵에 오드뤼사이 왕국을 형성했지만 여전히 촌동네 취급을 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기원전 146년에 로마 공화국에게 복속되었고 이후로 상당기간 동안 자치권을 가지기도 했지만 왕국 자체는 내분과 혼란한 정국을 거치며 기원전 46년에 멸망했고, 이후의 트라키아인들은 로마 제국의 신민이 되었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계속 전쟁을 벌이는 사이 유연에서 갈라져 나온 유목민 아바르족이 이 지역을 침략하고 정복했는데, 이 와중에 아바르족에게 예속되어 있던 많은 슬라브인들이 대거 이 지역에 정착하였다.당시 동로마 제국의 발칸 외곽 지역 주민들은 인두세 때문에 + 고대 후기 뻑하면 이민족이 다뉴브강을 넘어 침략했었던 탓에[2] 출산율이 낮은 편이었으나 슬라브인들은 척박한 동유럽에서 생활할 당시 사망률이 높은 편이었고, 때문에 출산율도 매우 높았다. 새로 정착한 슬라브인들의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이 지역의 원주민 트라키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슬라브족과 동화가 이루어졌다.
동로마 제국의 이라클리오스 황제 제위 시기 아바르 칸국은 사산 왕조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으나,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불구 대패하였다. 패전으로 아바르족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고 슬라브 부족들이 아바르 칸국에 대항해 봉기하였는데, 이 때를 틈타 볼가강 유역에 거주하던 튀르크계 불가르족들의 일파가 다뉴브 강을 넘어와 흑해 서부의 아바르족과 슬라브인들을 합병하였다. 불가르족들은 681년 동로마 제국의 군대마저 격파한 후(온갈 전투: Battle of Ongal) 흑해 서부 연안에 불가리아 제1제국을 건설했다. 슬라브인들이 계속 인구가 증가하면서 불가르족들도 이름만 남긴 채 결국 슬라브족에 동화되었다.
864년 불가리아인들의 기독교화는 문화적 진보를 뜻했을 뿐만 아니라 슬라브화 과정의 완성을 의미하고, 신생 제국의 국가적, 인종적 통일성을 완결지어준 것이었다. 새로
미하일이라는 이름을 얻은 보리스 아니
보리스-미하일은 기독교화와 슬라브화에 반기를 든 불가르족 귀족들을 제압하고
보야르 52명의 목을 베게 했다. 불가리아 제국은 기독교화를 통해 문화적 발전과 내적 결속이라는 큰 이득을 얻었다.
- 비잔티움 제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저
- 비잔티움 제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저
당시 불가리아 제1제국은 오늘날 슬라브어권인 불가리아 뿐 아니라 로망스어권인 루마니아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가리아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것은 제국의 슬라브인 주민 후손들로, 이는 루마니아인들의 조상들은 자신들이 다키아 왕국이나 로마 제국의 후예라는 정체성이 더 강했던 반면, 불가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중세의 찬란했던 불가리아 제국 &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에 의해 전해진 정교회와 키릴 문자의 원형 글라골 문자 같은데서 찾기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볼가강 유역에 남은 불가르인들은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의 여러 민족들과 지속적으로 혼혈이 이루어지면서 오늘날 러시아의 타타르스탄과 아스트라한을 중심으로 하는 볼가 타타르인들의 실질적인 직계 조상이 되었다. 볼가 타타르인과 밀접한 관계인 추바시인의 경우 중세 불가르어와 같은 오구르어파 추바시어를 사용한다. 그에 비해 볼가 타타르인들은 킵차크 칸국의 정복의 영향인지 킵차크어파에 속하는 타타르어를 사용하고 있다.
현대 불가리아인의 유전자는 약 55% 트라키아계, 40% 슬라브계, 2.3% 불가르계로 측정된다. #
2.1. 동로마 제국 지배 시기 불가리아인
불가리아 제국 주민의 복식은 동로마 제국 복식과 거의 흡사했다. |
오늘날 불가리아인의 기원이 된 불가리아 제1제국은 바실리오스 2세 제위 시기 동로마 제국에 병합되었다. 당시 불가리아인들은 자급자족적인 농경 사회였으며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못했고, 조세를 화폐로 징수하던 동로마 제국도 불가리아의 예외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이들에게 화폐 대신 곡물로 조세를 납부받았다.
당시 조세를 현물 대신 화폐로 거두려는 개혁이 시도된 적도 있었으나 당시 불가리아인들 사이의 큰 소요가 일어나면서, 유야무야되었다. 중세 불가리아는 도로망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고, 농민들에게 화폐로 조세를 납부하라는 말은 화폐를 먼 데서 곡식을 주고 구입해와서 납부하라는 이중의 수고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당시 동로마 제국에는 불가리아 외에도 많은 슬라브인과 튀르크인 신민을 보유했으며, 불가리아는 동로마 성직자들에 의해 정교회가 전파되어 서로 이단 논란이 없는 같은 종파의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3] 12세기 후반 앙겔로스 왕조 시기가 시작될 무렵 동로마 전국적으로 창궐하던 분리주의의 성공으로 불가리아 제2제국이 건국되면서 2세기 동안 이어진 동로마 제국의 불가리아인 지배도 끝을 맺었다.
2.2. 오스만 제국 지배시기 불가리아인
오스만 제국은 피지배 민족들을 언어가 아닌 종교를 기준으로 분류하였으며 불가리아인에 대해서는 역사 기록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 불가리아가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한 이후 불가리아인들은 “ 룸 밀레트”라는 정교회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었다.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들과 함께 당시 불가리아인들은 파나리오테스라는 오스만 제국에 충성하는 그리스인 및 봉건 기병 시파히의 지배를 받았다.오스만 제국 지배 시기의 다른 룸 밀레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불가리아인 농부들은 이슬람 교리와 기독교 교리의 차이를 헷갈려하고 동시에 다 믿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인들과 오스만 위정자들 모두 불가리아인들을 방치한데다가, 불가리아인 대다수가 교통이 불편한 산지에서 자급자족하는 농민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4] 이들 중 이슬람으로 신앙을 완전히 고정시킨 이들이 오늘날 포마크인의 조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불가리아 요리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기 시작하는데,[5] 당시 아직 상공업 경제가 미흡했던 불가리아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향으로 지중해 세계의 여러 요리법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은 근세 스페인에서 추방하던 세파르딤 유대인들을 수용했는데, 상당수의 세파르딤 유대인들이 오늘날 불가리아 영토에 정착하여 지중해식 레시피를 불가리아인들에게 전파시컸던 것. 덕분에 오늘날 불가리아의 전통 요리는 유대인의 할라 빵(Challah)부터 튀르키예식으로 고기를 포도잎에 말아 요리한 음식[6]이나 피망에 소를 넣고 찐 음식 등 유럽과 중동 레시피가 골고루 잘 조화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 관리들은 이웃 국가들 러시아 제국이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주들보다는 농민들에게 훨씬 관대한 편이었고,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식민지에 지나친 중과세를 부과한 것과 다르게 세율을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불가리아 농촌의 조세 부담은 비교적 가벼운 편이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불가리아 산간 농촌에 도로를 놓고 농법을 개선하는데는 아예 관심이 없었고, 결국 오스만 제국의 불가리아 지배는 불가리아인들이 서유럽에 비해 문명도가 급속히 뒤쳐지는 계기가 되었다.
16,17세기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새로운 종자의 곡식과 과일 등이 유입된 것을 계기로 영농 기술 발전이 급격히 진행되었는데, 오스만 제국도 옥수수, 토마토,
2.3. 근대 이후의 불가리아인
자세한 내용은 불가리아 왕국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2.4. 관련 문서
3. 해외 분포
3.1. 베사라비아 불가리아인
1806~1812년과 1828~1829년 러시아 튀르크 전쟁 사이에 오스만 제국에서 러시아 제국으로 귀순한 불가리아인들의 후손들이 베사라비아(오늘날 몰도바 + 우크라이나의 부자크 지역)에 정착한 것이 그 기원이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노가이족이 오스만 제국으로 탈주하고 남은 빈 공터에 불가리아인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였다. 1817년에는 불가리아 출신 이주민 마을이 12개가 있었다 하며, 그 가운데 7개는 가가우즈인, 5개는 불가리아인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후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인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1861년 루마니아 일대에 살던 불가리아인 2만여 명이 추가로 러시아 제국으로 귀순하면서, 20세기 초 시점에서 러시아 제국 내 불가리아인 17만여 명 정도로 증가했다. 베사라비아의 불가리아인은 당시 이들을 받아준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 영향으로 고유 언어와 불가리아 정교회를 명목상이나마 보호받을 수 있었다.
과거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오늘날 몰도바 내에는 8만여 명, 우크라이나에서는 20만여 명(불가리아계 조상을 둔 경우는 50만여 명 추산), 러시아 내 2만 4천여 명(불가리아계 조상을 둔 경우는 33만여 명 이상 추산)의 불가리아인들이 남아 있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후신 소련이 들어서면서 일부 베사라비아 불가리아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는데, 오늘날까지도 카자흐스탄에 4천여 명 정도의 불가리아인이 남아 있다고 한다.
3.1.1. 관련 문서
3.2. 포마크인
불가리아 무슬림 포마크인, Kosta Nachev 사진 |
오스만 제국군이 불가리아에서 후퇴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러시아 제국군이 불가리아인 무슬림들을 상대로 약탈과 잔혹행위를 일삼았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에 복수심을 품던 불가리아인 정교도들은 튀르크인들은 물론 예전까지 같이 잘 지내던 불가리아인 무슬림들까지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불가리아인 무슬림들은 대부분 오스만 제국 영내로 피신하거나 아니면 정교회인으로 위장한 후 산간벽지에 살게 되었다.
제1차 발칸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이던 1913년 1~2월에는 불가리아 왕국 영토 내 불가리아인 무슬림 수만여 명을 대상으로 불가리아 정교회로의 반강제 개종이 이루어졌다.[8] 불가리아 왕국의 국가 정체성을 불가리아 정교회로부터 찾던 불가리아 내셔널리스트들은 당시 불가리아 문화 내 폭넓게 퍼져 있던 이슬람 관련 부분을 골라냈으며, 이에 저항하는 불가리아인 무슬림은 추방하는 정책을 폈다. 여기에 순응 못하고 반발하는 무슬림들은 대다수 튀르키예로 이주하였다. 불가리아가 이런 이유는 이슬람인에 대한 증오가 컸기 때문인데 바로 체르케스인들이 불가리아 독립 전쟁 당시에 벌인 학살과 약탈에 대한 보복이었다. 하지만, 포마크인들에겐 화풀이였을 뿐. 씁쓸하게도 이들도 당시 오스만 제국으로 가서 살면서 증오에 미쳐버렸는데 이들을 군인으로 쓰면서 벌어진 게 바로 아르메니아 대학살이었다.
오늘날 튀르키예로 이주하지 않고 불가리아와 그리스 내 잔존한 포마크인은 불가리아인과 방언 수준의 차이만 나는 사실상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
포마크인의 전승 중에는 자신들이 오스만 제국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불가르 칸국의 영향으로 이슬람을 믿고 있었다고 주장도 있다. 포마크의 어원이 불가리아어로 도움을 뜻하는 포모그네(помогне)에서 비롯되었다는데, 메흐메트 2세가 이 지역에 들어왔을 때 이미 이슬람을 믿는 불가리아인들을 보고 그렇게 불렀다는 내용도 추가된다. 다만 이는 리투아니아에서 자신들의 기원의 로마 제국이며 리투아니아 왕족은 네로 황제의 쫓겨난 친척이라는 내용의 연대기가 있는 것처럼, 민족 정체성을 규정하는 신화일 뿐이지 실제 역사 혹은 역사 왜곡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오늘날에는 튀르키예에 35만여 명에서 60만여 명 정도의 불가리아계 튀르키예인들이 거주한다. 불가리아와 그리스에서 계속 포마크인들을 차별하고 따돌리기 때문에 현대에 튀르키예로 이민 온 사람도 많은 편이다. 불가리아에서는 불가리아가 유럽 내 후진국이 된 이유가 전부 오스만 제국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9] 포마크인들은 잠재적인 매국노 취급을 받고 있다. 또한 그리스 내 포마크인들은 그리스의 반이슬람 정서 뿐만 아니라 반불가리아 정서로도 배척받는 분위기이다. 오늘날 불가리아 내에는 67,350여 명 정도만 남아있고,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무슬림인 것을 숨기는 사람을 포함하면 25만여 명 가까이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리스에도 불가리아 국경 지방을 중심으로 7만여 명이 남아있으며 이들 역시 그리스인들로부터 차별과 박해의 대상이다. 북마케도니아에서도 4만~10만여 명의 포마크인( 토르베시인)이 거주하며 이 쪽은 비교적 박해가 덜한 편이다.
3.2.1. 관련 문서
3.3. 바나트 불가리아인
의외로 바로 옆에 붙어있는 루마니아에는 불가리아인 인구가 7천여 명 밖에 없는 걸로 나오는데, 이들 중 대다수는 가톨릭을 믿고 있다. 이들은 바오로파를 믿던 소수의 불가리아 사람들이 오스만 제국에서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로 이주하고 나중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에 기원을 두고 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바나트 지방에 정착했던 이유로 이들은 바나트 불가리아인으로 분류된다. 이들이 쓰는 이른바 바나트 불가리아어는 불가리아어와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나며, 믿는 종파도 달랐기 때문에 이웃나라의 불가리아인들이 불가리아로 이주하던 시점에도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한다.1차 대전 이후 바나트(Banat) 지역은 루마니아, 세르비아, 헝가리로 쪼개졌는데, 이 와중에 바나트 불가리아인들도 세 나라로 찢어져 흩어지게 되었다. 세르비아에 2천여 명, 헝가리에도 4천여 명이 거주한다.
의외로 불가리아 주변 국가인 루마니아, 세르비아[10]에 정교도 불가리아인 인구가 적게 나오는데 그 이유는 발칸 전쟁과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당시 불가리아 주변 국가들이 자국 내 불가리아인들을 추방하거나 강제로 동화시켰기 때문이다. 바나트 불가리아인은 불가리아인이 아닌 것으로 분류되어 추방에서 제외되었다. 그리스 내에도 불가리아계 주민 후손이 30만여 명 정도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리스 정부에서는 그리스 영내 불가리아인은 무슬림 포마크인 7만여 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3.3.1. 관련 문서
3.4. 노동인구 유출
공산권 붕괴 이후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유럽권 국가로 이민을 가게 되었고, 때 마침 출산율도 급속히 하락하면서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로 출산율은 어느정도 회복은 하였지만 1.6명대로 인구대체수준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또한 불가리아의 임금수준이 인구감소의 영향으로 급격히 상승했지만 여전히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서유럽에 크게 못미치기 때문에 인구감소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농어촌과 지방 소도시가 매우 큰 타격을 입어서 사람이 살고있지 않는 집들이 매우 많다고 한다.독일 내 31만여 명, 스페인 내 13만여 명, 영국 내 11만여 명, 이탈리아 내 6만여 명이 거주하며, 실제 체류하는 인원은 이보다 더 많다.
공산권 붕괴 이후 인구 유출이 극심했던 불가리아였지만, 2020년 코로나 19 범유행 이후 서유럽에서 불가리아로 귀환한 불가리아인 인구가 무려 50만여 명에 달하면서 30년만에 인구가 다시 증가하였다. # 여기에는 코로나 19 외에도 브렉시트 같은 요인도 적지 않았다.
3.5. 신대륙 이주
주로 1890년에서 1917년 사이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신대륙으로 이민을 떠났다. 또한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시절과 붕괴 직후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캐나다 등지로 이주했다. 현재 캐나다 내 7만여 명의 불가리아인들이 거주하며, 미국에서 자신을 불가리아계 미국인으로 응답한 인구는 11만여 명이 나왔다. 불가리아계 미국인 단체에서는 미국인 중 조상이 불가리아계인 경우 30만여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이 외에도 아르헨티나 내 7만여 명, 브라질 내 6만 2천여 명의 불가리아계 인구가 거주한다. 브라질 출신 불가리아인 후손으로는 지우마 호세프가 유명하다.4. 종교
불가리아인 대다수는 불가리아 정교회를 믿으나 불가리아인은 과거 공산정권 시기의 국가무신론의 영향 및 다른 유럽 국가들의 세속주의 성향의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을 믿는 불가리아인들은 근대에 대부분 튀르키예로 이주하여 불가리아계 튀르키예인이 되었다. 불가리아인은 북마케도니아의 주민이나, 가가우즈인과 친척 관계이다.불가리아 내 불가리아인 인구는 2011년 인구조사 기준 6백만여명(84%)이며, 이 외에도 유럽 각지에 불가리아 정교회 신도로 등록된 인구는 150~20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포마크인으로도 불리는 무슬림 불가리아인은 주로 튀르키예를 중심으로 80만여 명으로 추산되며, 튀르키예 내 무슬림 불가리아인들은 대부분 이제 불가리아어를 구사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 외에도 종교 문제로 헝가리로 이주했던 바나트 불가리아인도 있으며, 이들은 후에 개신교나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오늘날의 불가리아는 유구한 정교회권 국가이지만 여성의 노출에는 관대한지 톱리스로 선탠하는 여성들이 많다. 스페인인 중에서도 톱리스 선탠하는 여자들이 많지만, 스페인은 프랑코 정권 시절 악질 파시즘 정권에 유착했던 일부 막장 성직자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톨릭에 대한 냉담 성향도 있는 반면, 불가리아는 불가리아 정교회가 국민 정체성의 상징인데도 그러하다. 물론 과거 공산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나체로 수영하는 것이 대세였던 동독을 생각하면 그렇게 이상할 것 없다. 물론 구 공산권이 노출에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5. 인물
- 니나 도브레브
- 네비아나 블라디노바
- 네오피트
- 디미터르 베르바토프
- 디미터르 이바노프
- 마리야 페트로바
- 마린 페트코프
- 마테이 카지스키
- 미할 스파소프 아슈미노프
- 바바 반가
- 바실 카잔지에프
- 발레리 보지노프
- 보리스 1세
- 보이코 보리소프
- 블라고이 이바노프
- 비앙카 파노바
- 시메온 대제
- 시메온 2세
- 스틸리얀 페트로프
- 아지스
- 이바일로
- 일리안 미찬스키
- 카트린 타세바
- 크룸
-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 토도르 지프코프
- 판초 블라디게로프
- 필리프 필리포프
-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6. 관련 문서
[1]
불가리아계 튀르키예인, 불가리아계 우크라이나인 등
[2]
3세기 중반
고트족,
4세기 후반~
5세기 초반 고트족, 5세기 초~중반
훈족, 6세기 초중반
게피드족과
랑고바르드족 등
[3]
물론
영지주의 계열 이단 종파가 산간 벽지를 중심으로 보급되기 했지만 이는 예외에 속한다.
[4]
오스만 제국에서는
발칸반도의 도로 미비로 많은 세수 손실이 발생하였음에도 불구 이 지역에 도로망을 끝끝내 오스만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설치하지 않았다.
[5]
원래 요리 문화는 먹을 게 있다고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도시
부르주아들이
귀족들의 식문화를 보다 간편하고 저렴한 방법으로 따라하며
레시피를 개발해야 발전하기 시작한다.
[6]
카프카스에서도 애용하는 레시피다.
[7]
불가리아 왕국의 전신
[8]
반강제라는 말을 쓴 이유는 이들이 대개
기독교 신앙과 이슬람 신앙을 동시에 가진 경우였기 때문. 당시 발칸 반도에선 흔한 상황이었다.
[9]
물론
내셔널리즘이 다 그렇듯이 과장도 섞여있다. 적어도 오스만 제국은
이란의
카자르 왕조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10]
1만 6천여 명에 달하는 불가리아계 세르비아인 정교도 대다수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르비아로 편입된 불가리아 국경 지대 불가리아인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