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4:28:00

코다이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
코다이인
高台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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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불명
오와리국 아사히무라
(現 아이치현 키요스시)
사망 1624년 10월 17일[1] (음력 9월 6일)
야마시로국 코다이지
(現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묘소 코다이지(高台寺)
재임기간 키타노만도코로[2]
1585년 8월 6일 ~ 1598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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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네네(寧々, ねね) 또는 오네(おね)
법명 코다이인코겟신코
(高台院湖月心公)
별칭 도요토미 요시코[豊臣吉子]
가문 스기하라 → 아사노[4]
부모 친부 스기하라 사다토시(杉原定利)
친모 아사히도노(朝日殿)
양부 아사노 나가카츠(浅野長勝)
양모 나나마가리도노(七曲殿)
배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1561년 결혼)
종교 불교
위계 종1위(従一位)[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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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6년에 그려진 초상화 #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
2.1.1. 이름 관련
2.2. 히데요시의 정실부인
2.2.1. 결혼과 내조2.2.2. 키타노만도코로
2.3. 남편의 사후
3. 가족관계4. 여담5. 창작물에서6. 관련 서적7. 관련 문서8.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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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실부인이며, 히데요시를 훌륭하게 내조해 그의 출세에 도움을 준 여걸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오와리 스기하라가(키노시타가[6])의 하급무사인 스기하라 사다토시[杉原定利]와 아내 아사히도노(朝日殿)의 차녀로 오와리국 아사히무라(현재의 아이치현 키요스시)에서 태어났다. 네네의 스기하라 가문을 분석한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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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노 가문의 문장 고리 속에 매 깃털(丸に違い鷹の羽)

형제는 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家定], 언니 죠케인[長慶院], 여동생 쵸세인[長生院]이 있다. 네네와 여동생 야야는 어머니의 여동생인 나나마가리(七曲)의 남편 아사노 나가카츠(浅野長勝) 부부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아사노 가문의 양녀로 보내졌다. 아사노 나가카츠는 오다 가문의 병사였고,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오와리 아사히무라에서 살았던 이름없는 졸병이었다. 당시의 오와리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인 오다 노부히데가 활약하고 있었으며, 지위나 권위는 오와리 슈고(守護)인 시바씨를 상회할 정도로, 오와리 국내의 여러 세력을 힘으로 압도해, 전국 다이묘로서의 지위를 쌓아 올려 가는 상황이었다.
스기우라 스케자에몬 사다토시(杉浦助左衛門定利)의 둘째 딸로서 텐몬 17년(1548)에 태어났음. (중략) 간에이 원년 9월 6일 사망, 향년 77세.
쿠와타 다다치카(桑田忠親)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모든 것』 269 페이지 #
1549-1624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인. 키타노만도코로라고 일컬어졌다. 텐몬 18년(1549년) 출생한다. 아명은 네네 (중략) 간에이 원년(1624) 9월 6일 76세 ( 『칸세이 중수 제가보』 3109에서는 83세)에 죽었다
국사대사전 #

네네가 태어난 해는 확실하지 않아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타바타 야스코의 텐몬 11년(1542년) 설, 쿠와타 다다치카와 히토미 아키히코의 텐몬 17년(1548년) 설, 이마이 린타로의 텐몬 18년(1549년) 설 등이 병립한다. 일단 역사학자들은 1540년대에 태어났다고 여기는데, 1549년설이 유력하다고 본다 한다. #

2.1.1. 이름 관련

어릴 적 이름을 두고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대중적으로는 '네네(ねね)'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남편 히데요시나 코다이인의 서명 등에 '오네(おね)[11]', '네(祢)', '네에(寧)'라는 표기가 있기 때문에, '네네' 못지않게 '오네'라고 불리는 경우도 많다. 자기자신이 쓴 편지에서 '네'라고 서명하였음을 근거로, 본명은 '네'이고, 친밀감을 담아 머리에 '오'를 붙여 '오네'라고 불렸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전국시대 여자로서 이름이 문헌자료로 정확히 알려진 사람은 드물다. 다케다 신겐의 정실 산죠 부인(三条夫人)은 교토의 산조 가문에서 왔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긴 하지만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토사 번주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아내 치요( 겐쇼인)의 이름도 문헌자료에는 없다. 대대로 토사 번에서 그렇게 전해져 왔을 뿐이다. 네네의 경우에는 에도 막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호위 무사로 오사카 전투에도 참가했던 츠치야 도모사다(土屋知貞)라는 무사가 쓴 '태합소생기'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에는 확실하게 '네네'라고 적혔다.
아명 네네. 고료닌(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은 훗날 키타노만도코로, 태합 히데요시의 본처이며 아사노 나가카츠의 조카딸이다. 아직 태합 히데요시가 토키치로 시절 아사노 나가카츠의 연립 주택에 들어가 사위가 되었다. 그 연립주택은 초가지붕으로 짚을 엮어 축의금을 올렸다고 키타노만도코로는 말하고 있다.
태합소생기 308 페이지 #
『태합소생기』라는 책 때문에 본명이 '네네'라고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히데요시의 유명한 전기 『태합기』에는 '만도코로 사마(政所様)'나 '키타노만도코로'란 호칭은 있지만 '네네'는 없다. 코다이인의 조카 키노시타 도시후사(木下利房)의 빗추국 아시모리번의 문서인 '키노시타 이에보(木下家譜)'에서는 남편 히데요시가 히젠 나고야로부터 오사카의 네네에게 써 보낸 편지가 발견되었다. 이 편지에 의하면 히데요시가 네네에게 "오사카에 돌아오면 포옹하고 느긋하게 옛날 이야기 등을 하고 싶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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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가 '오네'라고 적은 편지

이 편지의 말미에 '오네에게'라고 히데요시가 서명하였다. 이 때문에 일부 일본사 학자들은 '남편이 아내의 이름을 틀릴 리가 없다.'는 이유로 코다이인의 본명이 '네네'가 아니라 '오네'가 맞는다고 주장하였다. 이 밖에도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전쟁터에서 코다이인에게 보낸 편지의 수신인도 '오네'로 되었다. 코다이인은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기 때문에 조카들(친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의 아이들)을 매우 귀여워하였고, 그들에게 부친 애정 가득한 자상한 편지가 몇 통 남아 전한다. 그런데 이 편지들에서는 '네이(寧)'라든가 '네(祢)'라고 서명하였다. 이는 종1위 위계를 받은 코다이인이 공가풍에 서명한 것이어서 이상할 게 없다.

역사학자 츠노다 후미노에(角田文衞)는 "서명에 자신의 머리글자만 쓰는 예는 그 밖에도 많이 보이고, 아울러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의 여성명에서 '네'라는 이름은 다른 일례도 없지만, '네네'라면 가마쿠라 시대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라고 말했다. # NHK 대하드라마에서는 코다이인이 처음 등장한 1965년의 '태합기'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네네'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1996년의 '히데요시' 이후에는 2006년의 ' 공명의 갈림길'을 제외하고 극중에서는 '오네'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또한 2016년 ' 사나다마루'에서는 '네에'가 사용되었다. #

그러나 2016년 역사학자 호리 신(堀新)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편지에 '네네'라고 적었음을 확인하여 다시 '네네' 설이 나왔다. 2016년 그가 쓴 저서인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실상과 허상』에 코다이인의 이름 논쟁에 대한 논고가 있다. 코다이인의 본명을 두고 현재까지 '네네' / '오네' 로 주장들이 나뉘어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2.2. 히데요시의 정실부인

2.2.1. 결혼과 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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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도요토미 히데요시

네네의 결혼 이전 어린 시절 이야기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자신이 이름을 토키치로(藤吉郎)라고 자칭한 25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결혼한 후, 네네의 본격적인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오케하자마 전투 이듬해인 1561년 8월, 네네는 키노시타 토키치로(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결혼한다. 결혼 당시 네네의 추정 나이는 13세, 14세, 19세다. 일설에 의하면 히데요시는 원래 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스기하라 사다토시에서 개명한 키노시타 유키히사(木下裕久)의 딸 네네와 결혼함으로써 '키노시타 토키치로 히데요시(木下藤吉郎秀吉)'를 자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저택에서 일을 하던 시절로, 아직 오다 가문의 중요한 무장이 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었다.

네네와 히데요시의 결혼은 당시로는 굉장히 드물었던 연애 결혼이었는데, 네네의 어머니 아사히도노는 신분이 낮은 농민 출신인 히데요시와의 결혼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네네의 집안도 가난했고 엄청나게 좋은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신분이 낮은 히데요시와 사무라이 집안의 딸인 네네와의 결혼은 당시로서는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네네는 결혼을 강행한다. 네네의 오빠 이에사다가 스스로 히데요시를 입양하겠다고 타일렀기 때문에 시집을 갈 수 있었다. 네네의 오빠 이에사다는 히데요시의 가인이 되어 스기하라에서 키노시타로 성을 바꾸었다.[12]

원래부터 이모 부부에게 아이가 없어 네네를 입양했는데, 어머니는 혼사를 반대했으나 양부모가 찬성하여 시집가게 됐다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친어머니는 결혼을 반대하고 양어머니 부부는 찬성했음이 확실한 듯. 시즈오카대학 명예교수인 코와다 테츠오(小和田哲男)에 따르면, 네네의 양어머니인 나나마가리도노가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출세하여 다이묘가 된 뒤에도 네네의 어머니는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다.[13] 네네는 시어머니 오만도코로(大政所)와도 사이가 좋아서 돌아가실 때까지 한 집에서 모시고 사는 등 싹싹한 성격이었다.

1561년 8월, 네네와 히데요시는 초가집의 흙바닥과 나무판자의 멍석을 깔고 마주앉아 술을 주고 받으며 검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히데요시는 아직 이름 없는 아시가루에다 외모도 볼품없었는데, 그 남자가 나중에 천하인이 되었으니 네네는 엄청나게 남자 보는 눈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후 이 결혼은 뒷배경이 없던 히데요시에게 어느정도 기반을 만들어주었다. 네네가 결혼한 이후 네네의 친정 사람들 역시 도요토미 가문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가신이 되어 히데요시에게 큰 도움을 줬다.[14] 또한 이때부터 히데요시는 그의 외가 친척이자 소년인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지도했다. 이들을 밥을 해 먹이거나 옷을 해 먹이거나 싸움이나 장난을 치면 야단을 치거나 중재하고 뒷바라지를 하며 어머니 역할을 한 사람이 네네였다. 특히 네네는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매우 귀여워하고 잘 돌봐주었다고 한다. 이시다 미츠나리도 네네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다. #

히데요시와 네네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본인들의 친척을 양자나 가신으로 키웠다. 히데요시의 조카 중에서 양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츠구, 도요토미 히데카츠와 네네의 조카 중에서 양자가 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대표적이다. 그 중에는 하시바 히데카츠[羽柴秀勝], 유키 히데야스 등 오다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을 비롯한 여러 다이묘로부터 맞이한 양자들도 있었다. 여기서 노부나가의 넷째 아들인 하시바 히데카츠를 양자로 맞이했음을 두고, 역사학자들은 친자를 출산할 수 없었던 네네가 노부나가에게 간청해 주군의 아이를 자기 부부의 아이로 삼아 집안의 안정을 도모했던 게 아닐까 추측한다. # 인질로 맡아진 구로다 요시타카의 아들 구로다 나가마사나 12살에 인질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 등도 네네는 정성스럽게 돌봤다. 그래서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쇼군이 되어서도 인질 시절에 자신을 상냥하게 보살펴 주었던 것을 잊지 않고 말년에 교토에 갈 때마다 네네를 방문하고 네네의 봉토도 향상시켰다고 할 만큼 효성이 대단했다.
誠にご実子の如く慈しみ給う
참으로 친자식처럼 자애로우시다.
평성스기하라씨어계도부언찬[平姓杉原氏御系図附言纂] #

이와 같이 양자나 인질의 양육을 맡은 네네의 활동은 대대로 가신이 없는 도요토미 가문을 내부에서 지탱하는 큰 힘이 되었다. 이런 똑부러졌던 네네를 히데요시는 무슨 일이든 제일 먼저 아내와 상의했다고 한다. 이후 남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중에서도 가장 출세했다.

결혼 후 6년이 지나 1567년, 사이토 가문의 거대한 성이었던 '이나바 산성'을 오다 노부나가가 낙성하고 미노를 평정했다. 히데요시도 오다 가문을 지탱하는 장수 중 한 명으로 출세하고, 네네는 히데요시의 가족과 함께 새로 오다 가문의 본성이 된 기후 성으로 옮겨갔다. 1573년에는 아자이 가문이 멸망했는데, 이 가문의 영지인 기타오미 3군을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부여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에서 아케치 미츠히데에 이어 2번째로 다이묘가 되었다. 원래는 아시가루라는 낮은 신분이었기 때문에 '나가하마성(長浜城, 현재의 시가현 나가하마시)'의 성주가 된 시점에서 일생일대의 대출세였다. 동시에 네네는 '다이묘의 정실'이라는 지위가 되었다. 이때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네네는 '나가하마성'에서 옮겨 살았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아들 구로다 나가마사도 인질 시절에 나가하마성에서 네네에게 보살핌을 받았다. 나가마사는 네네에게 실제 자식같이 귀여움을 받고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야마우치 카즈토요와 결혼한 정실 치요( 겐쇼인)도 나가하마에 영지를 얻게 되면서 이후 가까운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이 무렵 고니시 유키나가의 어머니로 알려진 고니시 와쿠사(ワクサ)가 네네의 시녀가 되어 네네를 모시기 시작했다. 나가하마에 거주하던 네네는 여러 차례 원정길에 나선 히데요시의 집안 정무를 도왔고, 안목이 좋은 자신의 장점을 활용해 많은 인재를 추천하기도 했다. 네네가 히데요시에게 추천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코조스(孝蔵主)다. 코조스는 네네의 최측근으로 히데요시가 천하인이 되었을 무렵에는 안채를 총괄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네네는 히데요시를 안팎으로 보좌하였는데 탁월한 관리능력과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또한 불화조정 등에 있어서도 활약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네네는 히데요시가 천하를 잡은 이후 여러 다이묘나 조정과 교섭했고 이후 에도 막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교섭을 하며 수완을 발휘했다.

네네는 히데요시의 상담역으로서 조언을 하는 역할로 정치에 관여했다. 남편 히데요시가 던지는 의문이나 고민에 적확한 조언을 하고 협력, 실행하는 모범적인 전국 다이묘의 아내였다. 네네는 히데요시에게 정치 문제부터 성을 운영하는 방법까지 모든 것에 대해 조언했다. 그는 전쟁 중에 네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모든 정치적 결정과 군사적 행동에 대해 설명했다. # 대표적인 예시로 나가하마 성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는 소작료를 가지고 두 사람이 의논한 적이 있다. 히데요시가 성주가 되고 나서, 나가하마의 마을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부담이 적어지도록 세금에 관해 두 사람은 너그러운 정책을 시행하였다. 세금 부담이 적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나가하마로 이사 오면서 과도한 인구 유입이 새로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소작료와 여러가지 잡세에 대해 엄격하게 하려고 세수입의 인상을 결정했지만, 부담이 증가하면 거주자들은 반발할 것이 뻔했다. 네네는 정책 전환에 반대했고 히데요시는 일단 결정한 가격 인상을 취하하기로 결정했다. # 이 편지를 보면 네네는 확실하게 발언하며 정치에 관여하는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또한 당시 히데요시가 각지의 전쟁으로 바빴기 때문에, 남편을 대신해 나가하마 성주의 일을 대행했다.[17] 이 때의 히데요시의 서신들을 보면 나가하마의 성하의 사무에 대해서는 네네가 관리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
마을의 연공(세금의 일종, 소작료), 제역(여러 가지 잡세)을 면제하고, 성하(城下, 성의 아래) 마을 진흥을 도모했는데, 영지의 백성이 연공을 바치고, 마을로 도망쳐 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므로, 마을에 통상대로 연공과 제역을 걸기로 했다. 하지만, 네네가 마을의 연공을 징수하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했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원래대로 되돌렸다.
나고야시 박물관편 『도요토미 히데요시 문장집』 #

네네가 오다 노부나가 아즈치 성에 초대받았을 때의 에피소드에서도 네네의 성격을 볼 수 있다. 나가하마 12만 석의 영주가 되어 첩들을 갖게 된 히데요시는 바람을 피기 시작한다. 허구헌날 바람을 피는 색욕마인이었던 히데요시의 바람기를 참다 못한 네네가 노부나가에게 이를 일러바친 일이 있었는데, 노부나가가 네네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편지를 보냈다.[18] 실제 노부나가의 편지 원문에는 부하의 부인에게 도노[殿]라고 호칭할 정도로 격식을 갖춘 정중한 문체로 쓰여 있는데, 이 편지는 노부나가의 인간적인 면모와 히데요시와 네네의 부부 사이를 알려주는 자료로 꼽힌다. 부하의 정실에게 공식 체재로 보내진 매우 드문 공식 문서다. 밑에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노부나가의 천하포무 붉은 도장이 찍혀있다. 그만큼 노부나가와 네네가 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또 이 편지에서 노부나가는 "다만 남편을 돌보는 것이 여자의 몫이니까 앞으로 너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말고 잘 돌봐 줘라."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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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의 편지[21]
이번에 처음으로 이 아즈치 성에 와서 다시 그대와 만나게 되어 너무 좋았소. 또 많은 선물의 물건,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물건들로 뭔가 축의금을 전하려 했으나 그대의 것이 너무나 훌륭하여 생각지 못하고 이번에는 그만두기로 하였소. 다음에 하지요. 일전에 보았을 때 그대는 더 아름다워지셨소. 토키치로(히데요시)가 부족하다고 하다니 괘씸한 이야기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대같은 여인은 다시는 저 대머리 쥐새끼[禿げ鼠] 녀석이 찾을 수 없을 테니 이제부터는 그대도 마음을 더 밝게 갖고, 부인답게 당당하게 행동하고 질투는 하지 않도록 하시오. 다만 남편을 돌보는 것이 여자의 몫이니까 앞으로 너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말고 잘 돌봐 주시오. 그리고 이 편지에 있듯이 토키치로에게 충고해 주시오.
오다 노부나가 #

이후 남편 히데요시의 주고쿠 공격도 막바지에 이른 1582년,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에 의해 히데요시의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사건인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다. 이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과 화목하고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되돌아갔다. 이때 나가하마성에 있었던 네네는 아케치 미츠히데 편에 섰던 쿄고쿠 다카쓰구(쿄고쿠 타츠코의 오빠)의 거병에 쫓겨 도망가야 했다. 이때 네네는 시어머니 오만도코로와 히데요시의 측실과 시녀들을 데리고 즉시 성을 탈출하여 피신해 모두를 보호하였다.[23]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혼노지 변의 약 10일 후에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는 것에 성공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입후보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 통일로 돌진해 간다. 남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인의 접근함에 따라 네네의 영향력도 커지게 된다.

2.2.2. 키타노만도코로

1585년 히데요시가 관백에 등극[24]함으로써 히데요시의 관백 취임과 함께 네네는 원래는 섭관[25]의 정실에게 주어지는 칭호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를 받았다. 네네가 이 칭호를 받은 이후부터 네네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정착했다. 또한 네네는 '종3위'라는 엄청나게 높은 품계를 받았다. 이렇게 네네의 사회적 지위는 공가의 일원으로서 눈에 보이는 형태로 확립되어 갔다. 히데요시가 관백에 등극하고, 네네가 키타노만도코로 된 당시의 추정 나이는 네네가 36세, 37세, 43세, 히데요시는 48세 정도였다. 1588년에는 107대 천황 고요제이 덴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저택인 주라쿠다이[聚楽第]에 행차하게 된다. 이때 네네가 여러 가지 절차를 마련해, 덴노의 행차의 공을 세운 덕분에 모든게 잘 풀리게 된다. 이 행차는 오다 노부나가의 시대에서도 실현하지 못한 중대사이자 영예였다. 네네는 여러 가지 일을 다 갖춘 공으로 파격적으로 '종1위'의 품계를 받게 되었다. 남편 히데요시와 같은 위계였다.[27]

'종1위'는 당시 여성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자리였다.[28]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최고의 자리였다. 생전에 종1위에 오른 여인은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에 파격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히데요시가 네네에게 준 영지는 약 1만 5천 석으로 다이묘들과도 맞먹는 것이었다.[29] 당시 다이묘의 아내가 영지를 부여받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1만 석이 넘었음은 확실히 드물었다. 네네는 남편과 함께 당대 최고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많은 다이묘들이 오사카 성을 방문했을 때, 네네에게 문안인사를 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네네는 천하인의 아내로서 조정과의 관계를 맡는 업무를 맡아 각종 교섭을 도맡았다. 낮은 신분에서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는 조정에서 부여받은 섭관가라는 권위로 정권 운영을 추진하였고, 아내 네네는 적극적으로 발걸음을 옮겨 조정과의 어려운 교섭을 마무리해 나갔다. 네네는 분주히 오가며 절기마다 답례품을 들고 교토고쇼를 방문하여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 가문에 배령한 물건이 있으면 네네가 답례를 해 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조정의 관계에 있어서 도요토미 가문의 명대(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가문이 섭관가로서 천황이나 공가로부터 인정받아 좋은 관계를 구축한 것은 이러한 작용이 컸다.

또 인질로 모아진 넓은 영토를 가진 다이묘들의 부인들과 자식들을 감독하는 역할도 했다. 네네의 역할은 그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돌보고 아이에겐 교양이나 무술 등도 익히게 해줌으로써, 도요토미 가문에 친애의 정을 갖도록 기르는 것이었다. 또한 네네는 많은 신사 사찰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각지의 사찰에 빈번히 참배나 기부[30]를 실시한 것 외, 히데요시가 사찰과 분쟁을 일으키자 네네가 중재한 적도 있었다. 당시 최대의 불교세력인 혼간지(本願寺)에 대해서는 종주 켄뇨의 부인과 연락을 긴밀히 하여 갈등을 미연에 방지했다. # 네네는 히데요시가 교토에 지은 저택인 주라쿠다이를 관리하기도 했다. 주라쿠다이 주변에는 여러 곳의 저택이 건설되어 다이묘들에게 저택을 짓게 하고, 그곳에 다이묘의 배우자들을 살게 했다. 또 이곳에는 인질들이 살고 공가도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네네의 주변에는 일종의 문화살롱 같은 것이 형성되었고, 사교장같은 기능을 하기도 했다. 네네가 궁중 행사를 주최하기도 했다. 이 역할은 네네 자신도 상당히 만족스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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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쿠다이(聚楽第)

관백직에 오른 히데요시와 키타노만도코로에 칭호를 얻은 네네는 교토에 주라쿠다이를 두고 독자적인 과도정부 체제를 더욱 공고히 했다. 교토에는 천황가와 황족, 나아가 사찰 불각의 주지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네네와 히데요시는 쇼군 가문을 열어 무사의 정점에 서는 것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옛부터 있던 조정과 황족의 권한을 잘 이용하면서 통치자로서의 힘을 늘려 갔다. 당시 네네는 오사카 성에서 큰 정치적 권한과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日本史]』에서 네네를 " 여왕(女王)"이라고 표현했다[32]. 또한 루이스는 남편 히데요시[33]를 마구 디스[34]했지만 네네에 대해서는 "관백 전하의 아내는 이교도이지만 대단한 인격자라 그녀에게 부탁하면 해결되지 않는 일은 없다."라고 상당히 호의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 중세사 연구자인 역사학자 타바타 야스코(田端泰子)는 네네의 평전에서 네네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네네는 말 그대로 조강지처로 히데요시를 받들어 남편의 입신출세에 일조했다. 그녀는 단순히 주부였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히데요시가 부재중에는 사실상의 성주 대행자로서 거성(居城, 늘 거주하는 성)들을 맡아 가신·영민(영주 지배하에 있는 백성)의 지휘 감독도 실시하는 등 그 역할은 다방면에 걸치고 있었다. 네네가 자식을 얻지 못해 많은 양자를 두었지만 이들의 양육도 네네의 노릇이었고 인질들의 처우도 그에게 달려 있었다. 히데요시가 천하인이 되자 네네의 역할은 더욱 늘었고 왕실이나 공가들과의 교제도 그의 몫이 됐다. 히데요시가 요도도노를 측실로 하여 츠루마츠· 히데요리의 부탁을 받더라도 네네의 정실로서의 지위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 역사학자 미야모토 요시미(宮本義己)는 "네네는 정치면에서도 모모야마 성의 여걸이며, 히데요시도 꼼짝 못했다."고 말했다. #

또 1586년 규슈 정벌전 시기의 히데요시가 네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신의 부인 네네에게 '보고'하고 있는것을 볼 수 있다. 이 편지는 도요토미군의 행동 보고서라고 볼 수 있다.
이쪽은 건강하오. 부재중 경호도 잘 하라는 말을 해 두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계시오. 4월 8일에 받은 당신의 글인데, 9일에 사쓰마가와치가와에 있는 타이헤이지에서 읽고 있소. 우선 별일 없이 건강해 보여서 기쁘게 생각하오.

지쿠시는 단번에 평정하여 시마즈가 있는 가고시마까지 5~6리 거리까지 와 있소. 지금부터 말을 몰아 시마즈 공의 목을 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머리를 구부리고 투항해 왔기 때문에, 목숨은 구하기로 했소. 2~3일 중으로 가고시마에 가서 전후처리를 하고, 24~25일에는 하카타에까지 돌아와 선착장을 고치고 성을 개축하여 군사를 주둔시키겠소. 쓰시마 이키 섬의 장수들도 모두 빠짐없이 공순 출사해 왔소. 시마즈에는 일족의 무장을 데리고 상경하도록 굳게 명령해 두겠소. 7월 초에 말을 타고 개선할 테니 안심하시오.
나고야시 박물관편 『도요토미 히데요시 문장집』 #

또 1590년 역시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작전을 세세하게, 네네에게 보고를 하고 있다. 자신의 재진 중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요도도노를 오다와라에 불러달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학자들은 오다와라 공세 당시 히데요시가 측실 요도도노를 불러들인 것은 요도도노의 아들 도요토미 츠루마츠의 양육과 내정의 총람(総覧) 등 뒷일을 모두 네네에게 맡기려 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 오다와라 정벌 당시, 장기간에 걸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부재 중인 병문안이라 칭했고, 조정은 네네에게 기모노나 띠, 향과 종이 등을 대량으로 주었다. 히데요시가 전투에 나가있는 동안 네네가 도요토미 가문의 정무를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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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 5월 14일, 호조 공격을 위해 출진중의 히데요시가 네네에게 보낸 답장문. #
성 공격의 모습이나, 이시가키산에 축성중의 성에 대해서 기록했다. 축벽이나 부엌이 생겨 큰 방이나 텐슈카쿠[天守]의 완성이 가깝다고 적었다.
이미 적을 가마(성)에 가두었으니 위험할 것은 없으니 안심하시오. 와카군( 츠루마츠)은 그립지만, 장래를 위해, 또 천하의 평화를 위해서, 그리운 일도 단념하겠소 나는 으로 등을 뜨고, 몸의 양생의 노력하고 있으므로, 신경쓸 필요는 없소. 모두에게 말하고 다이묘들에게도 마누라를 불러 오다와라에 들어가라고 말하고 있소. 위와 같이 한 곳에 오래동안 진을 치는 것(장진, 長陣)을 준비 할 것을 명하였으니 요도도노를 불러들이려고 하오. 당신이 요도도노에게 준비하라고 전해주시오. 요도도노도 내 마음에 드는 것처럼 신경을 쓰겠지만, 마음 편하게 오면 좋기 때문에, 그 뜻을 요도도노에게 전해 주었으면 하오. 이쪽에서도 사람을 보내겠소. 나는 나이를 먹었지만 연내에는 한 번 그곳에 가서 어머니와 와카군을 만나러 갈 테니 안심하시오

종종 응원병을 보내줘서 기쁘게 생각하오. 오다와라 성의 2~3개 마을에 걸쳐 포위한 뒤 해자(堀)와 담을 이중으로 설치하고 단 한 사람도 적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게 했오. 그 중에는 관동팔주의 군사가 농성하고 있으니, 오다와라성을 군량 공격하면 오슈까지 공터가 되어, 이것으로 만족할 것은 당연하며, 일본의 1/3 정도가 되기 때문에, 여기서 시간이 걸려도 장래를 위할 것이니, 세상에 도움이 되도록 하려고 하오. 이 싸움은 열심히 해서 오래동안 진도 치고 군량도 돈도 써서 나중에 이름이 남도록 하여 개선하려 하므로 그 취지를 모두에게 설명해 두려 하오.
나고야시 박물관편 『도요토미 히데요시 문장집』 #

히데요시는 간토 지방으로 출병할 때 네네에게 5통, 요도도노에게 1통, 도요토미 츠루마츠에게 1통, 어머니에게 1통,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에게 1통의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의 양으로 미루어 히데요시는 네네를 부재중 부대의 통괄자로 보고 있었다고 평하고 있다. 출처 2017년 도쿄대학 사료편찬소가 발견한 히데요시의 자필 편지는 100통 이상이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네네에게 보낸 편지가 가장 많으며, 그 밖에는 측실[37]이나 가신들에게 보낸 편지다. # # 히데요시의 강점 중 하나는 최측근으로 군사와 정치를 담당한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지원이 있었고, 후방으로는 네네라는 대행자가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현대에 들어 도요토미 정권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어온 사람이 정실 네네와 동생 히데나가이다. #

또 이 당시 바람기가 다분한 남편 히데요시가 이미 셀 수 없는 미인들을 끌어모았다. 당시 히데요시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첩들이 있었고 모든 첩들은 히데요시가 선택한 여인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바람을 펴대도 네네의 정실로서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히데요시가 "후궁은 3천 명의 미녀가 있고, 3천 명의 총애는 요도도노에게 있다."라고 말을 했지만, 히데요시는 네네를 등한시하지는 않고, 오히려 곳곳에서 네네를 추켜올렸다.[38]

예를 들어 측실 요도도노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자, 히데요시는 아들 히데요리에게 생모 요도도노를 어머니님, 네네를 부를 때는 큰어머니어른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한마디로 아이를 낳는 것으로 요도도노의 지위가 네네 이상으로 높아지지 않았다. 그 증거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히데요시가 네네와 요도도노를 "양쪽의 어머님(両人の御かかさま)"이라고 불렀다. 정식적으로 츠루마츠는 히데요시의 정부인 네네의 아이로 여겨졌다. 또 히데요시는 밑의 네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겠지만 히데요리를 자신의 자식으로 정실 삼아 다루듯이 말하고, 네네도 당연한 것으로 취급하는 듯한 느낌으로 말하였다. 후궁이 생모가 어떻든 상관없고, 태어난 남자아이는 적장자로 취급하며, 어머니는 정실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줬다.
아이의 이름은 히로이(ひろい)라고 이름 붙이도록 하시오. 여기를 8월 25일에 출발하기 때문에, 바로 가서, 만나서 이야기를 할려고 하오. 빨리 마츠우라 사누키 마모루가 사람을 보내 연락해 주어서 만족하고 있소. 그쪽에서도 사례해 두시오. 마츠우라 사누키 마모루가 주워서, 곧바로 연락해 주었기 때문에, 이 아이의 이름은 '히로이'라고 지으려고 하오. 은근히 '오'자를 붙이지 않고 '넓다'고 말하는 듯하오. 금방이라도 개선할 테니 안심해주시오. 경사스러운 일이었소.
나고야시 박물관편 『도요토미 히데요시 문장집』 #

일반적으로 미래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아이를 낳으면 그 어머니도 지위가 상승함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 요도도노는 관백의 정실 다음가는 지위의 자리 매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치적인 역할은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 네네가 도맡아 했다. 즉, 요도도노는 자식의 양육과 싸움터에서 돌아온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미디어에서 묘사하곤 하는 정실 대 후궁의 불꽃 튀는 구도는 찾기 힘들었다. 또 히데요시가 네네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가장 마음이 맞는 것은 물론 당신이지만, 그 다음에 마음이 맞는 것이 요도(요도도노)이기 때문"이라고 명시하기도 했다. # 아무리 요도도노를 총애해도 네네만은 못하다는 뜻이다. 히데요시는 요도도노나 쿄고쿠 타츠코(京極竜子)를 총애해 규슈 정벌이나 오다와라에서는 전쟁터로 불러들였을 정도지만, 히데요시와 연락을 취해 두 사람을 내보낸 인물이 네네였다. 요도도노가 임신을 했을 때도 히데요시는 곧바로 네네에게 알려주었다. 당시 히데요시는 전쟁 중에도 네네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五もじと八郎より小袖が届きました。とても気に入り、さっそく着ています。できる限り早く大坂に凱陣するようにしますので、ご安心ください。お目にかかり、お話をしましょう。
"이츠지와 하치로로부터 오소데(小袖, 통소매의 평상복)가 도착했소. 너무 마음에 들어서 바로 입고 있소. 가능한 한 빨리 오사카로 개진을 하도록 할 테니, 안심해 주시기 바라오. 만나 뵙고 얘기 좀 합시다."

이 편지에 히데요시에게 오소데를 보낸 이츠지와 하치로는 네네와 히데요시의 양자들이다. 이츠지는 마에다 토시이에와 막내 넷째 딸로 태어난 고히메(豪姫)다. 고히메는 히데요시가 특히 마음에 들어한 아이였다. 하치로란 우키타 나오이에의 아들로 나중에 고히메의 남편이 될 우키타 히데이에다. 이 편지가 쓰일 무렵에는 고히메와 히데이에도 어린 아이로, 네네와 함께 살고 있었다. 네네의 오빠 이에사다의 다섯 번째 아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도 '킨고(金吾)'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네네와 히데요시에게 소중히 양육되었다. 당시 센고쿠 시대의 양자라고 하면 전략의 일부로서 명목상 입양이 많았지만, 네네와 히데요시의 집처럼 실제로 함께 살면서 키워지는 일도 있었다. 네네와 히데요시에게는 아이가 없었지만, 양자·양녀의 입양을 거듭하는 것으로, 네네는 많은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후계자뿐만 아니라 충성을 바칠 가신단도 키워야 된다고 생각해 많은 아이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양육하기 시작한 것이다.

1590년 4월 13일에 히데요시가 호조 우지마사, 호조 우지나오를 상대로 오다와라에서 대립하고 있었다. 장기전이 된 오다와라 공세 사이에 네네는 오사카 성에 머물렀다고 한다. 성에는 앞서 소개한 대로 같이 살던 양자와 양녀가 네네 곁에 있었고, 네네는 아내로서가 아니라 양자와 양녀들의 어머니로서도 바쁘게 살고 있었다. 1590년 8월, 양녀 중 오히메(小姫)가 병에 걸렸다. 오히메는 오다 노부카츠의 장녀로 1585년 정도에 태어났다. 곧바로 네네와 히데요시의 양녀가 되어 네네 밑에서 다른 양녀와 함께 살았다. 오히메는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계자가 되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1590년 6세에 약혼했다. 오다 가문의 피를 이어받아 도요토미의 딸로 자란 오히메지만, 도쿠가와에 시집갈 무렵에도 병에서 회복되지 않아 결국 1591년 7세로 요절하고 말았다.[39] 게다가 오히메가 죽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8월 2일 양자 도요토미 츠루마츠도 병을 얻었다. 신사와 사찰에서 즉시 회복을 기원하는 대규모 기도가 거행되었지만, 그 보람 없이 8월 5일에 츠루마츠는 숨을 거두었다. 죽었을 때의 나이가 겨우 3살이었다.

이후 양녀와 양자를 잃은 후, 네네와 히데요시 부부의 사이도 점점 멀어져 갔다. 히데요시가 일본을 넘어 한반도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망을 품었으나 네네는 반대했다. 그래서 네네는 잘 알고 지내던[40] 고요제이 덴노에게 교섭하여 히데요시의 출병을 그만두도록 칙지를 내달라고 했다.[41] # 정작 히데요시는 누구의 간언도 받아들이지 않고 조선 출병을 추진했다. 조선으로 진군하면서 네네가 기르던 양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도 참가하여 오사카를 떠나 히데요시가 있는 규슈로 떠났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기분이 좋지 않은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그는 "어머니께 부탁드린 무구(武具, 투구와 갑옷)나 도구는 아무 것도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기분이 나쁘셨습니다." 하고 히데요시에게 말했다. 그는 네네와 히데요시가 소중히 하던 양자이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무슨 일이야, 네네가 귀여워하지 않으면 어디서 누가 귀여워해 준다는 거야!"라고 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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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5월 6일 임진왜란 원년, 히데요시가 네네에게 보낸 자필 편지. #
임진왜란 당시 전황을 네네에게 알렸다. 이 서신을 쓸 때는 첫 전투에 승리를 이어갔을 무렵으로, 4개월 후인 9월 9일의 선물을 중국에서 받는다고 호언장담하며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글을 네네에게 보냈다.[42]
1593년 5월 22일 임진왜란 2년, 히데요시가 네네에게 보낸 자필 편지. #
편지의 내용은 명나라 칙사가 사죄를 위해 나고야에 와서 강화조건을 제시한 것과 동시에 히데요시가 한반도에 성 건설을 명하였음을 네네에게 알렸다.[43]

히데요시가 대륙 출병을 개시해 규슈 나고야성으로 거처를 옮기자, 이때부터 네네는 오사카 성에 들어가 정무를 대행하고, 주라쿠다이를 정무로 한 히데요시의 양자 도요토미 히데츠구와 협력해 후방 지원을 담당했다. 또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거점이 된 나고야(후쿠오카현)와 오사카의 물자 수송에는 네네의 허가(흑인장, 黒印状)가 필요한 체제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진행중인 1593년 8월 9일 요도도노가 둘째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출산했다. 히데요리의 양육은 츠루마츠와 달리 친모 요도도노의 손에 돌아갔으며, 이후 히데요시-히데요리 부자가 도요토미 정권의 중추에 자리 잡게 된다. 요도도노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자 히데요시가 네네에게 보내는 편지는 끊기기 일쑤였다. 지금까지 발견된, 히데요시가 네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노를 배우느라 바빠서 종종 편지를 받으면서도 답장을 못 보냈다고 변명하는 1594년의 편지이다. # 다만, 히데요시는 조선 출병에서 돌아왔을 때는 가장 먼저 네네에게 인사하러 갈 정도로 신경을 썼다. #

히데요시는 1597년에 들어서자 은거를 위한 성을 교토에 만들었다. 9월에는 아들에게 '히데요리'라는 이름을 주고 새로운 성으로 이사했다. 1598년 네네는 1596년에 일어난 게이초 대지진(慶長大地震)으로 피해를 입은 사찰 도지(東寺)[44]의 복원에 상당한 기부를 하기도 했다.[45] # 1598년 3월 15일 교토 다이묘사에서 히데요시의 생전 마지막 대규모 꽃놀이 연회(醍醐の花見)를 열었는데, 이때의 가마 입장 첫 번째 순서가 네네였다.[46]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애서 대패하고 병상에 누워버렸다. 네네는 후시미에서 병상의 남편을 시중을 들었고 쾌차를 위해 신사와 사찰에 기도를 의뢰했지만, 히데요시는 네네의 친어머니 아사히도노가 사망한 지 7일 후인 9월 18일에 61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2.3. 남편의 사후

2.3.1.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

1599년 1월 히데요시의 죽음이 공표되자, 히데요시가 억누르던 여러 다이묘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3월, 후시미에서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가 이주인 다다무네(伊集院忠棟)를 살해했고, 같은 달에는 정권의 실무를 담당하는 오봉행 이시다 미츠나리 가토 기요마사 등에게 습격당했다.

후시미에서 발생한 혼란은 교토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는 네네가 스스로 나서 중재했지만, 이 사건들로 인해 도요토미 정권의 권위는 현저하게 손상되었다. 네네는 여러 다이묘를 거느리고 히데요시를 모시는 도요쿠니 신사[豊国神社]와 호코지에 참배해, 사람들의 불안을 가라앉히는 것과 동시에 도요토미 정권의 세력 회복에 노력했다. 히데요시 사후도 어느 정도 권력을 유지했던 듯하다. 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상의해 교토에 히데요시의 명복을 비는 절 코다이지(高台寺)를 세우기로 했는데, 히데요시가 죽은 지 8년이 지난 1606년에 완공되어 조동종의 사찰이 되었다.[48] 이에야스의 정치적 배려로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하였기에, 절의 경관은 극히 장엄하고 화려했다. 절이 완공된 이후 네네는 여기에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도쿠가와 막부는 히데요시를 으로 모시는 도요쿠니 신사를 1615년 도요토미 가문의 멸문과 함께 없애버렸지만, 네네가 있던 코다이지는 보호했다. 역사학자 타바타 야스코는 "만약 코다이지가 세워지지 않았다면, 히데요시의 유품은 현대에 거의 남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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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생을 보낸 코다이지(高台寺)

한편 두 사건을 중재하며 위세를 떨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후시미 성으로 옮겨 반대파를 늘려갔다. 9월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암살을 계획했다고 해서 오봉행의 아사노 나가마사(네네의 처남)가 실각한다. 이 사건으로 오오쿠라 쿄쿠(大蔵卿局)도 실각한다. 오오쿠라는 요도도노 유모이자 히데요시의 공무로 활약하였다. 같은 달, 네네는 정무로 사용하고 있던 오사카성 니시노마루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양도했고, 자신의 측근인 코조스(幸蔵主) 등과 함께 이주해 교토로 거주지를 옮겼다. 정계에서 은퇴를 한 것이다. 하지만 네네는 여전히 '키타노만도코로'라고 불리며 를 감상하고 '카구라'라는 궁중연희를 개최하기도 했다. 무장의 과부로서가 아니라 공가의 일원으로서 황궁 내의 교토신성[京都新城]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한것이다. 또 네네는 남편을 모시는 도요쿠니 신사에 참예 할 때, 도요토미 정권의 오봉행의 일원이 마에다 겐이(前田玄以)나 마스다 나가모리(増田長盛)를 거느리고 행차해 여전한 영향력을 보여줬다.

이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한다. 당시 네네가 동군과 서군 어느 쪽을 지지했냐는 것도 계속해서 연구되는 주제다. 보통 창작물에서는 네네가 요도도노 쪽과 대립하여 오사카 성에서 나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여 니시노마루를 양보했고, 이에야스의 동군을 지지했다는 줄거리가 많다. 네네가 정실로서 격이 다른 높은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히데요시 사후에 요도도노, 도요토미 히데요리 모자가 자기 주장을 강화해 권력을 독점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의 연구에서는 이 둘이 오히려 협조를 하며 제휴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학자들은 히데요시 사후, 네네와 요도도노가 쌍방이 적극적으로 협력관계를 맺어갔고, 네네는 죽은 남편의 신사와 불교 의식에 전념했으며, 요도도노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후견인이 되어 과부의 역할이 분할되었다고 추측들 한다. # 실제로 네네는 매월 히데요시의 기일에는 빠뜨리지 않고 히데요시를 모시는 도요쿠니 신사에 참배하였다. 한편, 네네는 조정과도 계속 교류했다. 도요토미 가문을 대표하여 조정과의 유대를 유지하는 역할은 계속 네네가 수행했다. 안쪽으로 향하는 일은 요도도노, 바깥쪽으로 향하는 일은 네네가 맡은 것이다. 두 사람은 이렇게 역할을 분담하고 서로 연계하여 도요토미 가문을 유지하려고 애썼다고 평한다. #

또한 최근의 연구에서는 네네가 요도도노와 연계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으로 불리는 오츠성 전투(大津城の戦い)에서 교섭에 임하는 등 강화 교섭을 했고, 네네의 집사이자 최측근인 코조스(孝蔵主)를 파견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후 처리를 위한 절충의 움직임이 확인되었다. 또 도요쿠니 신사에서의 참예를 이용하여, 서군의 주력을 담당한 우키타 히데이에나 그 아내인 고히메와 연락을 주고 받았고, 이시다 미츠나리의 딸을 보호하고 양육했고, 세키가하라의 결과가 전해진 바로 후에, 덴노의 자당 저택으로 피난했다는 것을 근거로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다며 네네가 서군 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피난한 이유는 전투의 여파로 자신이 사는 저택(교토신성)이 불타 버린다는 소문에 놀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언비어라고 판명되자 며칠 후 고쇼에서 귀가했다. # 한마디로 네네가 서군인지 동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느 편도 들지 않은 중립적인 입장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이후 세키가하라에서 승리를 거둔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열리고 천하인이 아닌 도요토미 가문의 존속을 위해, 네네는 히데요시의 유언인 도요토미 히데요리 센히메의 혼인 실현에 진력했고, 1603년 센히메는 무사히 시집갔다. 큰일을 마친 네네는 그즈음 양어머니 나나마가리도노가 돌아가신 적도 있어서 공식 무대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리고 고요제이 덴노로부터 '코다이인코츠키신니(高台院湖月心尼)'라는 법명을 받고 삭발을 하고 비구니가 되어 도요쿠니 신사에서 참예를 빈번히 했다. 여기서 히데요시를 공양하고 히데요리가 건강히 자라기를 기원하며 절에 참배했다. 공식 무대에서는 물러났지만 교류가 있었던 승려와 신관을 통해 오사카성 사람들과는 연락을 주고받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1603년 네네가 아꼈던 양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비롯해 조카들이 요절해 각각의 가문이 단절되었다. 또한 조카 키노시타 가쓰토시(木下勝俊), 키노시타 도시후사(利房)가 다투어 각 봉토를 막부로부터 몰수( 가이에키)당하는 등 불행이 이어졌다. 네네는 키노시타 형제를 구하기 위해 분주했다. 이때 이에야스는 네네의 요구에 격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1614년 오사카 전투가 발발한다. 네네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이에야스를 중재하기 위해 오사카 성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토바의 관문에서 막부 관리에게 저지당했다. 이듬해 오사카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네네는 다시 오사카성 입성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는 조카인 키노시타 토시후사가 말렸다. 이윽고 도요토미 가문은 막부군에게 멸문당했고, 도요토미 히데요리 요도도노 할복했다. 오사카 성 천수각의 아토베 노부아키(跡部信) 주임 학예사는 네네의 친척 관계인 키노시타 가문이 보존한 사료들을 분석하고 "키타만도코로(네네)는 히데요리, 요도도노와 함께 오사카성에 농성해 싸울 각오였다. 그러나 오사카로 가는 도중 이에야스가 오사카행을 막아 교토로 되돌아왔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네네가 "이에야스에게 농락당해 억울했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 # 네네는 교토에서 '오사카낙성'(大坂落城)이라는 소식을 듣고 "오사카의 건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쓴 편지를 다테 마사무네[50]에게 보냈다. #

2.3.2. 말년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이후에도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나 여러 다이묘들에게 소중히 여겨져,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도 영지까지 받으며 권세를 누렸다.

하지만 에도 막부는 네네가 후원하며 지원했던 히데요시를 모시는 도요쿠니 신사를 박해했다.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시한 것이다. 사령과 보물, 설비까지 빼앗긴 도요쿠니 신사는 근무하던 신관들이 대거 흩어져서 존속 위기에 빠졌고, 결국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철거했다. 네네는 전후에도 도쿠가와 가문과 사이가 좋아 막부로부터 '도요토미 가문의 대모격'으로 정중하게 대접받고 있었지만, 시녀들과 함께 도요쿠니 신사의 참예와 자금 원조를 계속해 철거된 신사를 지지했다. 도요쿠니 신사에 지원 활동은 후에 히데요시의 측실 쿄고쿠 타츠코(京極竜子)도 실시했다. 이때 네네는 사망한 도요토미 히데요리 요도도노의 제사도 주최했다.

대개의 창작물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집안에 그나마 동정적이거나 도요토미 집안 내에서 제일 친 도쿠가와적인 것이 네네라는 식으로 묘사되고 냉혹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켰다고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는 정반대이다. 히데타다는 불안한 신분이던 인질 시절 네네에게 다정하게 보살핌을 받은 인연으로 네네를 평생 보살펴주었고, 네네가 세운 사찰 코다이지에도 자주 방문했다. 적 집안의 최고 원로 격인 네네에게 웬만한 다이묘급 영지를 떼어주는 무리수까지 두었을 정도다. 네네가 사망할 때까지 약 1만 7천 석에 달하는 봉토를 가졌다고 추정된다.[51] 이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살아있던 때에 네네에게 주어졌던 것인데, 히데타다는 이 영지를 네네에게 다시 주고 약간이나마 영지를 늘려줬다. 교토로 올라올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네네를 찾았고, 부탁을 받으면 웬만한 것들은 거의 다 들어주었다. 이 시기에 네네가 주최한 니조 성 내에서의 노가쿠 흥행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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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토쿠인(円徳院)

이후 네네는 자신이 세운 코다이지에 있는 탑두[52] 중 하나인 엔토쿠인(円徳院)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으며, 엔토쿠인에는 네네를 사모하는 다이묘, 다이묘의 부인들, 다인(茶人, 다도를 즐기는 사람), 화가들이 많이 찾아왔다고 한다. 선대 주지 고토 노리오는 "다이묘 부인들의 살롱과 같았다고 보여져, 각각 꽃을 가지고 와서 심었다는 전승도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엔토쿠인은 19년간 네네가 자신의 본거지로 한 것으로 알려진것 외에는 종언의 땅(終焉の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정원의 홍귤(타치바나) 꽃을 혼자 바라보면 구름 위 같았던 나날을 그리워한다."며 히데요시와 함께 걸었던 삶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말년에 읊기도 했다. #

말년의 네네는 병이 잦았지만 도요쿠니 신사를 계속 지원하는 한편 조카의 아들 키노시타 도시츠구[木下利次]를 양자로 삼아 도요토미 가문을 잇는 것을 막부가 인정하도록 교섭에 나섰다. 도쿠가와 가문으로서도 이전에는 주군으로 섬긴 적도 있는 도요토미의 가문을 완전하게 뿌리 뽑기는 마음에 걸렸거니와 네네에게도 은혜를 입었으므로, 코다이인과 도시츠구의 양자 관계를 승인했다. 이로써 도시츠구는 하시바의 성을 자칭해 하시바 도시츠쿠가 됐다.[54] 이후 도요토미 성씨를 이어받은 양자의 성장을 지켜본 뒤, 네네는 1624년 10월 17일 오랜 투병생활 끝에 병사했다. 출생년이 알려지지 않아서 몇 살에 죽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보통 77세, 78세, 82세 나이로 사망했다고 여긴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장수했다. 네네의 시신은 코다이지 목상 마루 밑 약 2 m 아래에 봉안되었다.

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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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모 아사히도노(朝日殿) 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家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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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 쵸세인(長生院) 제부 아사노 나가마사(木下家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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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조카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

4. 여담

  • 말년의 숙청이나 임진왜란과 관련해 삽질로 혹평받는 경우가 많은 히데요시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인들은 네네의 인품이나 내조의 공을 높게 평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네네는 오늘날에도 전국시대 다이묘의 가장 이상적인 부인으로 평가받는다. # # # 현처(賢妻)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
  • 네네에게 양육된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등 히데요시의 친척들로부터 어머니와 같은 사모의 대상이었다. 이시다 미츠나리도 네네를 숭상하기도 했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셋째딸 타츠히메(大舘御前)는 네네의 양녀인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버지 미츠나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해 처형됐지만 타츠히메는 네네에 의해 보호되었다고 한다. 이후 히로아키번의 2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라 결혼한다. 또한 인질의 아이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했으며[65] 친자가 없었던 탓에[66] 가문의 자녀를 아끼고[67] 특히 오빠의 자식들에게는 엄청난 애정을 쏟았다.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이후에도 네네의 친정 집안은 일정한 지위를 유지했다. 네네의 친정 집안이었던 키노시타 가문(네네의 친오빠의 집안)은 크게 번성하지는 않아도 에도 시대 때 안정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즈음하여 2만 5천 석을 영유해 히메지 성주였던 친오빠 이에사다는 네네를 수호하고 중립을 취해 전투 후인 3월 27일에 이시타카에서 빗추코쿠 아시모리로 영지가 바뀌었다. 여기에 아시모리 번주 키노시타 가문이 시작되어 일시 중단이 있었지만 이에사다의 자손이 메이지 유신까지 13대에 걸쳐 번주로서 이어졌다. 아사노 가문(네네 양부의 집안)은 평지 풍파를 겪기는 했어도 에도 막부 마지막까지 다이묘 집안으로 살아남았다. #
  • 네네의 친오빠의 아들이자 조카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네네가 자식같이 길렀다. 네네의 여동생 야야의 남편이 네네의 양부의 양자가 되어 아사노가의 대를 이은 후 네네와 히데요시의 큰 힘이 되어주기도 했는데 그가 바로 도요토미 정권 오봉행 중 최대의 다이묘인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다. 이렇게 히데요시의 가까운 측근들이 바로 네네의 영향력이 많이 끼쳐진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도요토미 가문의 커다란 주축이 되며 이후 요도도노의 오우미파가 생겨나자 네네와 친한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 지인 오와리파로 불리게 된다.
  • 네네의 흑인장(黒印状)이 찍힌 서신이다. 실제의 발신인(필자)은, 도요토미 가문의 필두상등으로서 네네에게 깊은 신임을 받은 여성 코조스(孝蔵主)다. 네네가 아리마 노리요리(有馬則頼)에게 빌려주었던 황금 5장의 반납을 증명해 준 지극히 사무적인 수취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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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네네에게 보낸 자필 편지다. 예전에 모셨던 여인이 용서를 빌어와서 불쌍히 여겨 네네에게 사면을 부탁하고 있는 편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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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에다 토시이에의 부인인 마츠와도 사이가 좋았다. 기요스 성 아래에 살 때부터 친분이 있었으며, 마에다 토시이에와의 혼인에서는 네네가 중매쟁이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은 고령이 되어서도 함께 온천에 간 기록이 있다. 또 네네와 히데요시는 고히메(마에다 도시이에와 막내딸)를 양녀로 맞아 양육했고, 네네와 히데요시가 양육한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시집을 보냈다. 고히메와 히데이에는 성장한 뒤에도 히데요시와 네네 내외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았다.
  •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정실 치요( 겐쇼인, 見性院)와도 친했다.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치요가 니시진오리나 중국에서 건너온 가라오리 등의 천을 꿰매어 하나의 옷으로 만들어 관백부인인 네네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 네네는 매우 기뻐하며 남편 히데요시에게 보였고, 히데요시가 감복하여 107대 천황 고요제이 덴노에게 바쳤다는 일화가 있다. 남편 야마우치 카즈토요가 사망한 후, 치요는 토사에서부터 네네의 교토 저택 근처(묘심사 근처)로 이주해 네네와 교류했다.
  • 네네는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편의를 제공했으며,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 직후인 기독교 추방령(바테렌 추방령)을 내렸을 때는 그들을 동정해 예수회 선교사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네네를 보필하는 시녀 중에서 막달레나라는 세례명을 가진 기독교인도 있었다. 그 시녀가 바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어머니 와쿠사다.
  • 히데요시는 네네의 영향력을 인정하였으므로 생전에 (말년을 제외하고) 자주 네네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는 네네에게 신경통에 걸렸냐고 물어보면서 그곳은 온천이 좋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 바람기가 엄청 났던 히데요시지만 남아있는 편지를 보면 늘 네네에게 몸조심을 하라고하며 네네를 만나고 싶다는 연애편지까지 보내고 있다. # "언제나 당신의 마음씀씀이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라며 네네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편지도 있다. 또 1593년에 히데요시가 네네에게 보낸 편지에는 '느릿느릿 안아올 테니, 물건이 충분하리라'고 씌어 있다. 돌아오면 천천히 끌어안고 쌓인 이야기라도 하자는 것이다. #
  • 히데요시가 호조 공세의 와중에 오다와라에서 쿄토에 있는 네네에게 보낸 자필 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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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편지를 받지 못했소. 그리워서 이걸 쓰고 있소. 당신에게 오래도록 연락 드리지 못하였으니, 마음 편치 않게 생각하여, 일부러 붓을 대령하였소. 오만도코로(어머니), 그대, 와카군(도요토미 츠루마츠), 오히메(양녀), 킨고(양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건강하오? 오사카도노(요도도노)는 어떠오? 너무 오랫동안 편지가 없기 때문에 불안해져 쓰고 있소. 진심으로 답장을 기다리고 있겠소.



    도요토미 히데요시 #
  • 히데요시가 중국과 한반도 정복의 야망을 실행에 옮겨, 조선에서 전쟁을 일으킨 이후, 임진왜란 2년(1593년) 5월 22일 나고야(사가현 가라쓰시)에서 네네에게 보낸 편지다. 이 편지에서 히데요시는 아이를 낳지 못한 네네의 심정을 고려해 일부러 자제하며 말하고 있다.
    나는 요즘 기침을 하여 편지를 쓸 수 없었소. 이것은 내가 회복 후 처음으로 쓴 편지요. 나는 니노마루도노( 요도도노)가 회임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소. 참으로 기쁜 소식이오. 당신과 나는 우리의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 바 있고, 그것이 미래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 이야기 했었소. 태합의 자식은 쓰루마쓰였지만, 그는 세상을 떠났소. 이번에 니노마루도노(요도도노)가 가진 아이는 그녀만의 아이라 여기는 편이 좋겠소.



    도요토미 히데요시 # #
  •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에도 둘만 있을 때는 남편과 사투리를 써가며 부부 싸움을 벌였다. 어느 시녀는 서로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관백 부부가 무슨 싸움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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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네가 남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고 남은 여생을 보낸 코다이지는 현재 교토시의 유명 관광지로 꼽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코다이인을 모시는 영묘의 성격이 있는 사원이다. 사찰 이름은 히데요시 사후 네네가 출가할 때 얻은 법명 '코다이인'에서 가져온 것이다. 코다이지에는 모모야마 시대에 제작된 네네의 목상이 사당 내진에 안치되었는데, 남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목상도 있다. 목상도 보통은 울타리 너머로만 볼 수 있는데, 목상 밑에는 네네의 시신이 안치되었다.

    코다이지에는 현재 카이산도(開山堂), 오타마야(霊屋), 카사테이(傘亭), 시구레테이(時雨亭), 오모테몬(表門), 칸게츠다이(観月台) 등이 국가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슈미단(須弥壇: 불상을 안치한 단)과 즈시(厨子: 불상 등을 안치한 장)에는 화려한 마키에(蒔絵) 장식이 입혀져 있으며 모모야마 시대의 미술을 대표하는 '고다이지마키에'로 유명하다. 카이산도를 중심으로 동서로 펼쳐져 있는 연못의 정원은 고보리 엔슈(小堀遠州)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또 카이산도우와 칸게츠다이를 잇는 주변이 사적으로 지정된 정원이다. 칸게츠다이에서 네네는 죽은 자신의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을 바라봤다고 하는 설화도 있다.
  • 변비 때문에 고생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네네의 지병을 걱정하여 설사약을 사용할 것을 권장하거나 배변에 대해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는 등 내용으로 편지를 쓰기도 했다. #
  • 호탕한 성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첫 주라쿠다이 방문을 마치고 오사카성에 머물던 모리 데루모토 일행에게 네네가 술안주를 엄청나게 보내었다고 한다. #
  • 인품이 좋아 네네를 끝까지 모신 사람들이 많다. 히데요시 가신들의 가족, 옛 주인인 오다 가문의 여인들도 네네를 모셨다. 히데요시를 대적했던 사람들도 순순히 따랐다. 나아가 승려와 신관, 공가들도 네네에게 협력하였다. 도요토미 정권의 관료들은 당연히 네네를 따랐다.
  • 네네의 친정 가문인 키노시타 가문이나 사찰 코다이지에서 네네를 유품을 보호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많은 유품이 남아 있다. 네네처럼 전국 시대의 여성이 다수의 유품이 남는 예는 드물다. 또한 다른 여성들에 비해 비교적 기록도 많은 편이다. 많은 전국시대 여성들의 발자취는 기록이 적기 때문에 한정된 몇 안 되는 자료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
  • 유일하게 히데요시의 자식을 낳았던 요도도노와의 대립으로 도요토미 가의 몰락에 일조했다는 설도 존재했었으나, 이 설은 현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실제로는 요도도노나 이시다 미츠나리와의 사이는 좋았으며 협력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네네와 요도도노가 대립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이들이 대립했다는 설을 믿는 사람이 많다. 당시의 사료에서는 사이가 좋았다기 보다는 친정이 두 번이나 멸족당해 뒷방패가 없었던 요도도노를 네네가 도와줬다는 기록이 있다. 역사학자이자 도쿄대학 교수 혼고 카즈토(本郷和人)는 "적어도 히데요시 생존 중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히데요시는 네네를 신경을 써, 정실로서의 면목을 세우도록 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
  • 이시다 미츠나리의 후손이자 역사학자인 시라카와 토오루(白川亨)는 "미츠나리와 네네는 친밀한 사이였고, 반대로 히데요리의 어머니로서 정치에 개입한 요도도노와 그의 측근을 싫어했다"는 연구서(이시다 미츠나리와 그 일족, 石田三成とその一族)를 발표하기도 했다.
  • 히데요시와 요도도노 사이에서 태어난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히데요시가 죽고 네네가 오사카성을 떠난 후, 네네와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던 것 같지만 네네를 또 한 사람의 어머니로 사모했다. 네네도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건강한 성장을 기원하며 절에 자주 참배했다.
  • 아리마온천[69]의 중심부에는 네네의 동상이 있다. 이 네네 동상은 아리마강을 사이에 둔 곳에 있는 유즈케 광장의 히데요시 동상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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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화재나 토사 붕괴에 습격당한 아리마 온천의 부흥이나 도로 정비 등에 히데요시와 네네는 고액의 자금을 투입하기도 했다. #
  • 남편처럼 온천을 좋아했다고 한다. 아리마는 교토나 오사카로부터도 가까운 온천장으로, 네네도 히데요시와 함께 이따금씩 아리마 온천에 온천욕을 하러 나갔었다. 아리마의 원천 근처에 히데요시의 대궐과는 별도로 네네 전용의 대궐도 지어서 가지고 있었다. 또, 네네의 친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에 의해 시작된 아시모리 키노시타 가문에는, 여행지등에서 이용했다고 생각되는 '전북정소도중목욕탕'이 전해지고 있다. 몸가짐도 겸한 목욕으로 늘 청결을 유지했던 것도 네네의 건강의 비결이었다고 한다. #
  • 교토 히가시야마의 코다이지 주변 관광지를 도보로 잇는 참배길이 정비되어 '네네의 거리(ねねの道)'라는 애칭으로 관광지로 사랑받고 있다. 별로 넓은 길은 아니지만, 관광객이 많다. 전통적인 교토 양식으로 지어진 구조물들이 줄지어 남아 있다. '네네의 거리'를 빠져 동쪽으로 가면 사카모토 료마의 무덤이 있는 유신의 길이 있다. 교토부 동부의 히가시야마구에 위치해 코다이지, 마루야마 공원, 야사카 신사와 가깝다. 2021년 길을 자갈길로 바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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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물에서는 미녀로 묘사될 때가 많다. 노부나가가 네네에게 실제로 보낸 편지에서 "더 아름다워지셨소"라는 구절 때문에 그런 듯하다.
  • 2017년 일본인들에게 설문조사한 '가장 좋아하는 전국 시대의 여성 랭킹'에서 1위를 차지했다.[70] #
  • 2018년에는 네네가 자필로 쓴 편지가 공개됐다.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의 주치의 마나세 도산(曲直瀬道三)에게 보낸 이 편지는 천연두를 앓아 중태에 빠진 히데요리를 걱정하며 병세를 물었고 도산의 치료의 노고를 위로하는 내용에 편지다. #
  • 2019년 코다이지 불단을 장식하는 깔개(우치시키, 17세기)가 네네 자신이 입었던 듯한 코소데(일본 옷의 일종)를 고쳐 만들었음이 교토국립박물관의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깔개 뒷면에는 1607년 7월 네네가 절에 시주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전문업자가 수리하는 과정에서 실밥을 뜯어서 분해한 결과 그 내용이 입증됐다. 교토국립박물관의 기획공예실장은 "자신이 입은 옷을 생전에 기부해 오래도록 부처의 세계를 장식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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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개 문양을 참고하여 재현된 당시의 오소데
  • 2020년 사찰 코다이지에서 네네가 입었던 의복을 복원했다. #
  • 2021년 네네에게 보내진 편지가 코다이지에서 공개됐다. 대표적으로 의붓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로부터의 사례 편지나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네네에게 보낸 서신이다. # 히데요리의 편지는 오사카 전투의 화목 후에 쓰여졌다고 생각되는 편지다. 히데요리는 편지에서 네네에게 '뵙고 싶사옵니다'라는 글을 썼다. 히데타다의 편지는 선물에 대한 답례장으로, 이쪽도 친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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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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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서적

관련 서적들
  • 태합의 편지(太閤の手紙): 1943년 저서. 역사학자 쿠와타 타다치카[桑田忠親]의 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네네에게 보낸 편지로부터 네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에 조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저서다.

7. 관련 문서

8. 외부 링크



[1] 보통 향년 76세, 77세, 83세로 추정한다. [2] 北政所. 섭정 혹은 관백의 정실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퇴임한 관백을 일컫는 칭호인 '타이코( 태합: 太閤)'가 히데요시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된 것처럼, 원래는 '관백의 부인'을 가리키던 키타노만도코로라는 명칭도 이 사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되어버렸다. [豊臣吉子] 종1위의 위계를 받았을때 조정의 문서에 기록된 이름이다. 남편 히데요시의 성을 받은 것이다. [4] 아사노 가문의 양녀로 들어갔다. [5] 1588년 4월 19일 수여. [6] 사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스기하라에서 키노시타로 성이 바뀐다. [杉原定利] 별명은 키노시타 사다토시. [木下家定] 빗추 국 아시모리 번 초대 번주. 말년에는 출가해서 스님이 되기도 했다. [長慶院] 아명은 쿠마(くま). 1624년 8월 사망. 언니가 죽고 한달 뒤 네네도 사망한다. [長生院] 아명은 야야(やや). 도요토미 정권 오봉행의 최대 다이묘인 아사노 나가마사의 정실. [11] 당시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흔히 '오'를 붙였으므로, '네네'에 '오'를 붙여 나온 다른 호칭일 수도 있다. [12] 전란(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 중, 네네의 경호를 맡아 중립의 입장을 지켜, 에도시대까지 살아 남아 아시모리 번주가 됐다. [13] 네네의 어머니는 이 결혼을 은밀히 맺어진 야합으로 간주해 평생 인정하지 않았다. 역사학자 핫토리 히데오(服部英雄)는 '네네' 자신도 실은 키요스의 행상인인 '연작(連雀) 상인의 집의 딸'이었다고 주장했다. 핫토리는 어머니의 여동생(나나마가리)이 오다 노부나가 아시가루 구미토 아사노 마타에몬( 아사노 나가카츠)의 아내가 되었던 것으로부터, 아사노 마타에몬의 양녀가 되어 모처럼 최하층의 신분에서 벗어났는데, 하필이면 하층민 출신 히데요시가 혼담을 꺼내니 네네의 친모 아사히도노가 맹렬히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 [14] 아사노 가문과 키노시타(스기하라) 가문은 히데요시에 가장 가까운 인척이 되어 출세했고, 도요토미 정권의 주축이 된다. [羽柴秀勝] 오다 노부나가의 4번째 아들. 아명은 오츠기(於次). [平姓杉原氏御系図附言纂] 인질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키웠을 때의 기록이다. [17] 영주인 히데요시가 낸 법령을 취소하고, 새롭게 자신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린 일화도 있다. # [18] 이 편지는 현재도 나고야에 있는 도쿠가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殿] '~공', 또는 '~님'이라는 뜻이다. [20] 나가하마의 소작료 인상에 반대했을 때처럼 네네가 히데요시에게 의견을 말하고 있는 것을 노부나가는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 [21] 이 편지를 보낸 정확한 연도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혼노지의 변이 터지기 전인 1581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 [禿げ鼠] 히데요시의 별명은 '원숭이'가 유명하지만, 노부나가가 보낸 이 서신에는 '대머리 쥐(禿げ鼠)'라고 칭하고 있다. [23] 네네와 히데요시 어머니의 도피를 도운 것은 혼간지 교단 쇼묘지(称名寺)다. [24] 섭관가 출신 이외에 처음으로 관백에 등극한 사건이다. [25] 섭정과 관백을 통틀어 부르는 용어. [聚楽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의 나이야에 지은 대저택이다 [27] 남편은 1585년 종1위의 품계를 받았다. [28] 율령제 하에서는 여왕 내지 신하인 여성에게 주어지는 최고 지위였다. 태정대신(정종1위상당관)이나 원래는 위계 서열에 포함되지 않는 영외관인 관백의 대부분이 종1위에 올랐다. [29] 이 영지는 이 후에도 계속 증가해 최종적으로는 1만 7천 석 가까이 됐다. [30] 대표적으로 사찰 호곤지(宝厳寺)를 부흥시켰다. '죽부섬 봉가장'이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네네가 성안에서 여성들의 기부를 모아 부흥을 도왔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 [日本史] 전국시대 말기의 일본에서 기독교 포교 활동을 실시한 프로이스가 저술한 편년체 역사서다. [32] 왕비라고 말하기도 했다. [33] 프로이스는 히데요시에 대해 "우수한 기사로 전투에 숙련되어 있으나 기품이 부족하다. 키가 작고 추악한 용모에 한 손에 여섯 손가락이 있었다. 빈틈없는 책모가이다. 음탕하고 악덕에 오염되어있어 그가 지은 오사카 성에는 300여 명의 여자들이 우글거렸는데, 성이라기보다는 유곽에 가까웠다."라고 폭풍 디스했다. [34] 루이스 프로이스는 원래 자신의 기록에서 기독교에 호의적인 다이묘는 좋게 써 주고 그렇지 않은 다이묘들은 마구 까기 바빴다. [天守] 성의 중심부 아성(牙城)에 3층 또는 5층으로 높게 쌓은 망루. [吉川広家]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 깃카와 가문의 당주. [37] 요도도노에게 보낸 편지는 세 통정도가 발견됐다. 요도도노에게 쓴 러브레터가 발견되기도 했다. [38] 창작물에서 요도도노 때문에 네네를 홀대했다는 장면을 넣기도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또 요도도노를 도요토미 가문을 망친 사악한 악녀처럼 묘사할 때도 있는데, 이것도 후세의 창작이라고 보고 있다. [39] 이 오히메가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 연립의 요체가 됐으리라는 의견도 있다. 오히메가 살아 있었다면 역사는 확실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40] 히데요시가 관백이 되기 전에 고노에 마에히사의 양자가 된 경위가 이유에 있다. 입양 후, 고노에 사키히사의 딸인 마에코자키 가나네와 히데요시의 양녀로 되어 있고, 마에코는 즉위가 확정된 고요제이 덴노와 결혼했다. 이 혼인을 통해 네네는 천황의 시어머니이기도 했다. [41] 이 전쟁은 덴노도 반발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는 강행한 것. [42] 장문의 추신에는 네네에게 예를 표하고 불조심을 당부하였다. [43] 편지 오른쪽이 추신 부분인데, '지난 번 잠깐 기침했어'라며 감기에 걸린 일과 요도도노가 임신했음을 적었다. [44] 구카이의 진언종의 총본산 사원. 진언 밀교의 근본도량(道場)으로 번창했다. [45] 이 문서에서 네네는 남편의 성(도요토미)을 칭하였다. [46] 두 번째가 요도도노, 세 번째가 측실 쿄고쿠 타츠코, 네 번째가 측실 산노마루도노(三の丸殿), 다섯 번째가 마아히메(摩阿姫), 여섯 번째가 마에다 토시이에의 아내 호슌인(마츠)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나 하녀만 약 1300명을 초대됐으며, 남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요토미 히데요리 외, 마에다 토시이에의 이름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豊国神社]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시는 신사다.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과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사라졌다가 후에 메이지 덴노의 칙명으로 다시 부활했다. [48] 1624년에 임제종으로 개종하여 현재도 임제종의 사찰로 남아 있다. [京都新城] 도요토미 가문의 정식 저택으로 교토고쇼 동남쪽에 자리 잡은 성곽풍의 저택이다. [50] 마사무네는 네네와 가장 친했던 다이묘 중 한 명이다. 다른 한 명은 사타케 요시노부 #. [51] 이 영지의 3천 석을 양자 키노시타 도시츠구가 상속받았다. [52] 본사에 속하는 자원 중의 큰절 [木下利次]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사촌 형인 기노시타 도시후사의 둘째 아들이다. 히데요리의 오촌 조카뻘이다. [54] 하지만 네네가 사망한 후 막부가 성씨를 다시 키노시타로 바꿔버렸다. 도시츠구는 하타모토로서 오미-기노시타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네네의 유품을 지키고 전승하는 것이 이 집안의 중요한 사명이 된었다. 이렇게 남겨진 물품의 중심 부분은 정리되어 현재에 전해져 나고야시 지정 문화재가 되었다. # [55] 친자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양자와 양녀를 길렀다. [木下利房] 빗추 아사모리 번 2대 번주. [木下延俊] 분고 히지 번 초대 번주. [小早川秀秋] 히데요시와 네네의 양자이기도 했다. [木下勝俊] 아버지 이에사다의 빗추 아시모리 번을 이어 제2대 번주가 되었지만, 이복 동생 도시후사와 다투어 가이에키됐다. 이후 문인이 되어 마츠오 바쇼의 스승이 되기도 했다. [三折全友] 정확한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직업은 의사라고 한다. [浅野長政] 도요토미 정권 오봉행 중 한 명. 삼촌이 네네의 양부인 아사노 나가카츠다. 추신구라의 발단이 되는 아코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의 고조부이다. [浅野幸長] 기이 와카야마 번 초대 번주. 아사노 가문 15대 당주. [浅野長晟] 아키국 히로시마번 초대 번주. 아사노 가문 16대 당주.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이에키된 후에는 그의 영토를 받아 아키국 히로시마의 42만석을 받았다. [浅野長重] 에도 시대의 도자마 다이묘였다. [65] 오오기마치 덴노의 손자 하치조노미야 도시히토 친왕(八条宮智仁親王)을 유코( 양자에 준한다는 것)로 해 정성스럽게 돌보기도 했다. [66] 만약 네네가 자식을 낳았다면 일본 역사가 바뀌었으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 [67] 양자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네네에게 500냥에 달하는 막대한 을 지었는데,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사치로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친구들과 을 먹으며 돌아다녔기 때문에 네네의 속을 썩이기도 했다. [浅野長政] 도요토미 정권 오봉행 중 한 명. 삼촌이 네네의 양부인 아사노 나가카츠다. 추신구라의 발단이 되는 아코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의 고조부이다. [69] 히데요시는 아리마 온천을 자주 들른것으로 알려져 있다. [70] 2위는 오이치, 3위는 가라샤, 4위는 요도도노, 5위는 이이 나오토라. [71] 입장객이 200만 명이 넘는 대규모 축제다. [桑田忠親] 일본 중세사의 전문가. NHK 대하드라마의 고증을 다뤘던 역사학자다. [小和田哲男] 일본 중세사의 전문가. 위의 책을 지은 쿠와타 타다치카와 함께 NHK 대하드라마의 고증 담당으로 유명한 역사학자다. [74] 네네와 요도도노의 불화가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켰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을 한 서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