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界の狂人は狂わせることを知らず。
삼계의 광인은 미친 것을 모른다.
四生の盲者は盲なることを識らず。
사생의 맹인은 눈이 먼 것을 알지 못한다.
生まれ生まれ生まれ生まれて生の始めに暗く、
우리는 태어나고 태어나고 태어나고 태어나도 삶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死に死に死に死んで死の終りに冥し。
죽고 죽고 죽고 죽어도 죽음의 끝을 알지 못하리라.
삼계의 광인은 미친 것을 모른다.
四生の盲者は盲なることを識らず。
사생의 맹인은 눈이 먼 것을 알지 못한다.
生まれ生まれ生まれ生まれて生の始めに暗く、
우리는 태어나고 태어나고 태어나고 태어나도 삶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死に死に死に死んで死の終りに冥し。
죽고 죽고 죽고 죽어도 죽음의 끝을 알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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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空海, ruby=くうかい)]일본 헤이안 시대 초기에 활동한 일본 불교의 초석을 다진 승려로 속명(俗名)은 사에키노아타이 마오([ruby(佐伯, ruby=さへきノ)][ruby(直, ruby=あたひ)][ruby(眞魚, ruby=まうお)])라고 한다.
2. 생애
774년(호키 5년) 사누키국(지금의 카가와현)에서 태어났으며 일찍이 논어를 배우고 791년 나가오카쿄의 대학에 입학하여 3교( 불교, 도교, 유교)를 두루 배웠다. 법명을 구카이라고 한 것은 그 직후의 일이다. 804년 사이초와 함께 견당사의 일원으로 당나라에 가서 유학했다.[1] 구카이는 당나라 청룡사(靑龍寺)에 있던 밀교의 고승 혜과(惠果) 밑에서 밀교를 공부하여 혜과로부터 밀교 승려로서 관정[2]과 변조금강(遍照金剛)이라는 밀호[3]를 받았다고 한다. 사이초가 805년에 먼저 일본으로 돌아갔고, 구카이는 이듬해(806년) 귀국하였다.일본으로 돌아간 뒤 사가 덴노의 자문에 응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지만 당나라에서 불교를 배운 구카이와 사이초 두 사람은 처음에는 다소 협력하는 듯 보였으나 끝내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았고[4] 기어코 사이초는 히에이산의 천태종, 구카이는 고야산의 진언종을 개창하여 완전히 각자 따로 길을 갔다. 835년 4월 22일(죠와 2년 3월 21일) 고야산에서 향년 62세로 입적하였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스스로 입적할 날을 미리 예언하고 그날 가부좌를 틀고 손으로 수인을 맺은 자세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942년 다이고 덴노가 구카이에게 홍법대사(弘法大師)라는 시호를 내렸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홍법대사'의 일본어식 발음인 고보다이시(こうぼうだいし)로 통할 때가 많다. 일본의 진언종 승려들이나 신자들은 구카이가 입적하지 않고 그저 고야산 오쿠노인(奥之院)에서 선정에 들었을 뿐이라고 믿는다고 한다.[5]
8세기 당나라 승려 지광(智廣)이 산스크리트어 발음법을 정리하여 실담자기(悉曇字記)란 책을 집필했는데 구카이가 일본으로 이 책을 가져감으로써 (산스크리트어 발음을 논하는) 실담학(悉曇學)이 성립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반도와도 약간의 인연이 있는 인물이기도 한데, 부계인 사에키씨는 규슈 지방의 토착 씨족이나 모계인 아토씨의 경우 그 뿌리가 가와치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고구려/백제 도래인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공해와 깊이 관련된 도래계 씨족과 그 주변(일본어 원문)
3. 일화
일본에는 구카이의 여러 가지 전설적인 일화가 전한다. 당나라 유학 당시 구카이는 붓을 입과 사지에 쥐고 달필을 피로하는 퍼포먼스를 보인 적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에 칠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도입했다고 한다. 일본어에는 '뛰어난 전문가나 숙련자라도 실수할 수 있다.'는 뜻으로 "고보 대사도 붓을 잘못 놀릴 때가 있다."(弘法も筆の誤り)라는 속담이 있다. 구카이가 605년 헤이안궁(平安宮)에 건립되는 응천문(應天門)의 현판을 달필로 쓴 후 걸었는데, 응할 응( 應) 자의 맨 위의 점을 빠트린 바람에[6] 구카이가 재빨리 붓을 던져 점을 찍었다는 야사에서 유래했다. 일설에 의하면 차와 우동을 일본에 처음 도입한 장본인도 구카이라고 하지만 이견이 많다. 이 외에도 출처가 불분명한 온갖 좋은 것들을 구카이가 들여왔다는 식으로 전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 특유의 '위인 만들기'의 시초인 셈. 이쪽 분야에서는 쇼토쿠 태자와 더불어 투탑이다.그 외에도 구카이가 활동한 일본 시코쿠에선 구카이가 등장하는 수많은 전설이 전한다.
4. 여담
일제강점기에 전라남도 목포시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유달산 바위에 구카이와 부동명왕을 조각하였다. 두 마애상들은 일본 시코쿠 88개 사찰순례를 대체하는 의미로 행하는 오스나후미(お砂踏み)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유달산을 등산하면서 오스나후미를 할 수 있도록 등산로 들머리부터 정상 가까이까지 88개 사찰을 상징하는 불상들을 참배하고 마지막으로 구카이 대사와 부동명왕의 상을 참배하도록 하는 구조였다.광복 후에 시코쿠 88개 사찰을 상징하는 불상 88좌는 모두 철거되었으나 일본인들이 유달산 정상 근처 바위에 새긴 두 마애상은 철거인원이 황당하게도 "저 상을 철거하면 내가 급살을 맞을 것 같다."면서 철거를 거부해 오늘날까지 남았다. # 이 때문에 한국에 유일하게 조각상이 남은 일본인 승려가 되었다. 상기한 한반도 출신설과 같이 보면 재미있는 일화.
[1]
사이초는
국가직속 유학생 신분이었지만 구카이는 사비를 털어 당나라로 갔다.
[2]
밀교에서 입문자가 밀교수행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입문식이다.
[3]
밀교 승려가 스승에게 받는 법호. 속명이나 법명과는 따로 받는 호칭이다.
[4]
평소 구카이의 법을 흠모한 사이초는 그에게서 많은 걸 배우려 했고 제자 한 명이 구카이의 제자로 들어서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러나 밀교 공부를 위해 밀교 서적을 빌려달라고 구카이에게 부탁했지만, 구카이가 "불법을 종이에 담아 배우려는가?"라고 하며 빌려주지 않자 서운함이 폭발해 결국 교류를 단절했다.
[5]
불교에서는 고도의 명상상태(선정)가 되면 스스로 숨이 끊어지게 하거나 반대로 죽지 않고 계속 살 수도 있다고 여긴다.
석가모니의 직제자
마하가섭 또한 계족산 밑에서
미륵이 지상에 나툴 때까지 선정에 들어간 채로 기다린다는 전승이 있다. 그러니까 구카이 또한 이렇게 선정 상태로 죽지 않고 계속 살아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6]
엄호(广)여야 하는데 민엄호(厂)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