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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친노라 불리는 정치세력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접근이 필요할수밖에 없다. 참여정부의 운명과 함께한 정치계파로, 한때는 열린우리당을 창당해 의회 과반까지 차지했었던 거대 정치세력이지만, 워낙 다사다난했던 참여정부와 그 이후의 정치적 격변에 의해 한때 친노 소속이었던 계파가 비노로 떨어져나가거나 한때 비노였던 인물이 친노로 편입해오는 등의 사건이 너무나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러 복잡함 속에서 정치권에서 계파를 나누기가 힘든 정치 세력권이다.또 참여정부를 포함해서 노무현을 지지해서 따른것은 맞지만, 노무현 '만'을 섬기는 패권주의 계파는 아니다. 그가 원했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나라, 국민 모두가 정치에 참여하는 나라, 영호남을 따지지않는 전국민의 지지를 받는 나라라는 이념을 공유할 뿐. 이 때문에 노무현이라는 사람과 갈라지고 그가 원한 이념과 갈라지며 더욱 복잡한 계파 나누기가 일어날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친노는 몰락하지 않고 지속 가능한 계파가 되었다. 노무현이라는 구심점이 죽고 나서도 이념을 중심으로 뭉칠수 있었고, 보수정부의 실정을 기점으로 문재인, 안희정 등의 거물들을 구심점으로 부활했다. 그리고 끝내 한국사에 유일한 민주 정치 세력권으로 2회의 대통령을 배출한 정치 집단이 되었다.
2. 순서
2.1. 꼬마 민주당
일반적인 기준에서 친노는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제16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형성된 계파로 여겨진다.[1]하지만 친노라는 계파의 탄생이 대통령 선거를 통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친노의 전신은 바로 꼬마민주당으로, 1990년 3당 합당을 반대하며 통일민주당을 탈당한 인원들을 말한다. 노무현은 이 꼬마민주당의 핵심 멤버였고 1, 2차 꼬마민주당에 모두 참여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색채를 들어냈다. 꼬마민주당 출신 인사로는 김정길, 이부영, 이철, 김부겸, 조경태, 이광재, 안희정 등이 있었다. 이들의 명단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이 후 노무현의 정치적 행보를 그대로 따라가며 정치 경력 내내 친노 계파에 머물렀던 인물들이다.[2] 꼬마민주당 시절에 형성된 계파였기에, 참여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는 친노라는 명칭보다는 민주계로 불렸다.
이들은 1992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당에 들어가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DJ를 지지했다. 이 선거에서 패배한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연수를 갔지만, 3년 뒤인 1995년 정계에 복귀했다. 김대중은 복귀 이후 민주당을 탈당해 새정치국민회의라는 독자 정당을 창당하는데, 여기서 동교동계와 민주계의 행보가 갈린다. 동교동계는 김대중의 귀국과 함께 그가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로 일괄 입당했지만, 민주당에서도 주류인 동교동계와 밀려 비주류였던 이들은 그대로 민주당에 남는다. 노무현도 DJ의 정계복귀 당시에는 민주당에 그대로 남았지만,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로 당적을 옮겼고 일부 민주계 인사들도 노무현을 따라 김대중 캠프로 들어갔다. 끝까지 민주당에 잔류한 민주계 인사들은 이 후 신한국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 소속이 된다.
2.2. 제16대 대통령 선거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른바 노풍을 앞세운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대통령 후보가 되었지만, 이에 대한 반발은 막심했다. 당시 여당 주류 동교동계는 이에 소속된 한화갑, 최소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위력을 발휘한 이인제를 고려하고 있었지 노무현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노무현은 고졸 출신이었으므로 동교동계 다음가는 영향력이 있던 386으로 대표되는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과도 거리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이 후보 재신임을 건 제3회 지방선거에서 패배하고, 2002년 월드컵의 영향으로 정몽준이 돌풍을 일으키자 대통령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가 출범된다, 통칭 후단협이라고 불리는 이 단체는 노무현 대신 정몽준을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영입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한화갑을 필두로 한 동교동계는 아무런 입장도 취하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있었다.[3] 후단협에는 동교동계 인사들을 포함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인적 인프라를 넓히기 위해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 등 구 여권에서 스카우트해온 정치인들까지 가세했으며 노무현 후보가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자 집단 탈당해 항명하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다시 새천년민주당으로 돌아왔지만,[4] 일부는 한나라당이나 자유민주연합으로 이적하며 자신의 친정으로 되돌아갔다.이 시점에서, 노무현을 지지한 것은 노무현의 측근들과 꼬마민주당출신 영남 세력[5], 김근태로 대표되는 386, 운동권출신 정치인 계파[6], 정풍운동을 주도한 정동영과 천정배가 이끄는 개혁파들이었으며[7], 여기에 당 바깥에 있었던 김원웅을 위시로 한[8] 개혁국민정당 [9]과 노사모 세력[10]도 더해져, 이 들은 친노로 지칭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친노라는 계파의 시작이 된다.
결국 노무현이 당선되고 참여정부가 출범하게 되자 새천년민주당내 비주류였던 이들은 일약 주류로 급부상하게 된다.
2.3. 열린우리당의 창당과 탄핵역풍
제16대 대통령 선거의 승리 이후, 신주류가 된 친노, 곧 노무현의 측근 및 영남 출신 세력과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천신정)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 신주류, 당 개혁세력들은 새천년민주당의 쇄신 및 재창당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부패한 이미지[11] 에 호남색이 강해보이는 낡은 민주당으로선[12]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물론 새천년민주당 역시 김대중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의 외연확대와 전국정당화를 위해서 2000년 재창당했던 정당이었지만, 대선 때의 혼란과 "실용주의" 노선으로 보수야당인 한나라당과의 구분점이 희미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들은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며, 이 시점에서 친노는 열린우리당 소속 정치인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한편 舊주류가 된 동교동계와 집권 新주류 친노와의 갈등은 이미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걸치며 심각할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이는 불법 대북송금 사건에서 노무현이 한나라당이 요구한 특검을 받아들이는데서 일촉측발의 상황까지 몰린다. 특검에 의해 동교동계의 중진 박지원 前 비서실장이 징역형에 처해지기까지 하자, 동교동계는 신당 창당에 참여를 거부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의해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서는 친노로 불리던 김상현, 조순형, 추미애등은 새천년민주당에 잔류했으며, 도리어 대선 때 노무현에게 반기를 들었던 김명섭, 송석찬, 설송웅 등 후단협 세력이 신당 참여를 선언하는 등 다소 애매한 경우도 있었고, 한나라당에서 당의 보수성에 반기를 들고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한 이른바 독수리 오형제들[13]과 개혁국민정당을 이끌고 온 유시민이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친노의 첫번째 재편이 이뤄진 셈.
한편 친노, 곧 열린우리당과 동교동계, 즉 새천년민주당의 갈등은 더욱 극심해진다. 특히 노무현이 대선 때 경비로 쓴 44억은 그대로 새천년민주당의 빚이 되었는데 노무현이 열린우리당으로 가버리자 말 그대로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는 것이었다.[14] 그 결과 노무현 탄핵 사태로 이어지게 된다. 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 탄핵 사태를 사실상 주도했으며 이낙연 의원을 제외한 모든 새천년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탄핵에 찬성표를 던졌고, 이후 당시 새천년민주당에 소속되었던 인사들과 친노는 불구대천의 원수나 다름없게 된다. 하지만 탄핵 역풍으로 인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을 넘는 압승을 거둔 반면 새천년민주당은 의석을 거의 모두 상실하며 민주노동당에도 밀리는 원내 4당으로 전락하였고, 동교동계는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는다. 따라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시점에서는 이후에 민주당계 정당에 소속되어 활동한 정치인은 거의 다 친노였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친노의 정의가 고무줄처럼 바뀌며 야권 인사 누구나 친노로 거론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2.4. 열린우리당의 내홍과 친노의 분열
하지만 총선 전후로 열린우리당은 곧 심각한 내홍에 휩싸이며, 이 과정에서 친노로 싸잡아 불리던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계파는 수없이 분화된다. 특히 당 내에서 큰 계파만 여러개였고 분열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 중 상당수는 친노 세력을 이탈했고, 이러한 다양한 계파들의 이탈을 통해 친노의 두 번째 재편이 이뤄지게 된다. 정동영이 이끄는 정동영계, 김근태가 이끄는 386계/김근태계, 김한길계,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안개모) 등이 비노로 이탈했으며, 이부영, 김부겸 등의 '독수리 오형제'들 역시 이 시점에 비노로 이탈한 인사들로 취급된다.게다가 이 중 정동영계는 이런 외형적인 격변 뒤로 노무현을 지지해왔던 노사모를 흡수하고 있었다. 총선을 앞두고 다양한 시민단체가 뭉치기 시작했는데, 이 중 개나리 봉사단[15]이란 단체는 정동영의 지지자 모임인 정사모를 주축으로 한 세력이었다. 노사모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인 문성근과 명계남, 이른바 미키루크라고 불린 이상호, 정청래 등이 이미 노사모라고 볼 수 있는 국민참여0415에서 개나리봉사단으로 회원들을 옮겨가는 모습을 보였다. # ## 특정한 계파보단 국민의 지지를 자산으로 삼았던 노무현은 노사모의 와해로 인해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되었고, 적극적 단체를 흡수해나간 정동영은 박스떼기까지 강행하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을 무너트리면서 대선에 나섰고, 민주당계 대통령 후보로 참패를 당하며 당이 분열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현재 친노로 분류되는 중진들은 대개 이 시점까지도 친노로 고수한 이들이다.[16] 대표적으로 이해찬과 문희상은 무려 평화민주당(!) 출신임에도 이 시점에 친노를 고수했기에 친노로 분류되며, 새정치국민회의 출신 정세균도 마찬가지이다. 한명숙도 마찬가지. 이들 4명은 친노의 최고 어른으로 꼽히며, 수사로 인해 잡혀들어간 한명숙을 제외한 3명은 그대로 친문으로 넘어와 문재인 정부시절 당대표와 국회의장을 돌아가며 맞는다. 압도적인 정치경륜과 엄청난 카리스마로 이들 친노원로 세력 앞에는 친노와 관계가 없던 모든 친문 세력도 한수 접고 들어간다. 심심하면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하던 당시 민주당/열린우리당원 의원들과 달리, 문 정권때는 대통령은 커녕 친노원로에게 조차 비난하는 목소리 한번 없었다.
유시민이 이끌던 개혁국민정당 출신 세력, 곧 오늘날의 참여계 역시 이 시점에 친노를 자처했다는 점 때문에 정의당의 계파임에도 친노로 분류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참여정부의 청와대의 대통령비서실 출신 인사들이 이 시점부터의 친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통령비서실장 문재인, 전직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장 이광재, 노무현 대통령 후보 비서실 정무팀장 안희정[17]등이 있으며, 그 외에 천호선, 김용익, 박재호, 전재수, 김경수, 최인호 등이 이에 속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였던 친노원로들과는 달리, 유시민, 이광재, 안희정, 문재인 대통령등은 노무현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친문들에게는 유시민, 이광재, 안희정의 존재는 무협지로 치면 사숙 정도 되며, 친노원로들은 사조부급이다.
이 시절 친노는 이후 시점에서 보기에 의외지만, 특히 사회경제적 이슈에서 우파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광재가 대표하는 친노 우파가 세를 갖고 있었던 점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참여정부의 국정운영기조 자체가 사회자유주의를 따랐던 측면에서 중도적인 측면이 강했다. 대표적인게 한미FTA나 제주해군기지 문제. 물론 국가보안법 폐지 시도 등 반대 사례도 많긴 했지만. 여튼 당시 친노 계파에 속했던 인물 중 가장 개혁적 색채가 강했던 유시민조차도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에서 가장 진보적인 축에 속하던 김근태[18]계와 천정배계와 계속해서 충돌했으며, 민주노동당은 일명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다'고 참여정부를 통렬히 비판하던 시기였다.[19] 때문에 훗날 통합진보당 창당 과정에서 유시민의 국민참여당 참여에 대한 진보세력의 거부반응이 나타나기도 했고, 현재도 정의당을 노동당(한국) 등의 군소진보정당들이 꺼리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2.5. 참여정부의 종언과 몰락
참여정부의 종언에 이르러 친노는 완벽하게 몰락한다. 그 자신이 친노 유력 인사였던 안희정이 친노를 일컬어 폐족이라고 지칭한 것이 이를 대표하는 일이다. 열린우리당이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바뀌던 정계개편, 제17대 대통령 선거과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을 걸치며 친노는 막심한 타격을 입는다. 이 시기 한나라당 출신인 손학규의 입당으로 손학규계라는 거대 비노 계파가 다시 등장했으며[20]가장 강경한 비노라고 할 수 있는 새천년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복권되었다. 친노의 경우 당연히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대권주자를 내보내지 못했고,[21]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시 5선의 이해찬을 위시한 많은 수의 친노 인사들이 불출마하거나 공천에서 배제된다.하지만 그럼에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의 영향으로 다수의 친노인사들이 정계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이 시기 대통합민주신당과 통합민주당, 민주당(2008년)에 모두 참여하며 원내에 남은 친노인사들의 수장이 된 것이 정세균이며, 여기서 범친노 최대계파로 손꼽히는 정세균계가 탄생한다. 정세균은 민주당 당 대표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정세균계의 세력을 유지했고,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친노에 대한 동정론이 퍼지면서 범 친노 세력은 유시민이 국민참여당을 창당하는 등 재기를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정세균이 이끄는 민주당이 무상급식 이슈와 한명숙, 이광재, 안희정 등의 친노인사들을 전면에 내세워 승리하면서 다시 부활하게 된다.
2.6. 친노의 부활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친노에게 있어 많은 의미를 갖는 선거이다. 이 선거를 통해 친노는 부활에 성공했으며, 민주당내 제일세력으로 자리매김한 정세균계의 협조를 통해 민주통합당에서 전면적으로 복귀한다. 또한 무상급식을 이슈로한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성공을 계기로 친노는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진보적인 성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이후 민주통합당에 입당한 대부분의 주류 친노 인사들은 노무현의 최측근이었던 노무현재단 이사장 문재인을 노무현의 사실상 후계자로 간주하였으며, 문재인은 이를 통해 친노계를 대표하는 대권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22]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에 반발한 김두관, 조경태 등이 비문계로 빠져나가게 되었다. 어찌됐든 문재인은 사실상 노무현의 후계자이자, 친노의 수장이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수년간의 정치생활 동안 자신만의 정치세력을 만든다. 이것이 현재의 친문이다. 모든 친노가 친문이 된것은 아니지만 문재인, 본인부터 하여 친문의 뿌리는 친노라고 볼 수 있다.반면 국민참여당을 이끌던 유시민은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선거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친노계의 주류와 궤도를 달리하고[23] 진보정당 운동과 힘을 합치게 된다. 유시민의 은퇴는 국민참여당이 통합진보당 출범에 참여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참여계는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건을 통해 통합진보당이 찢어지고 나온 정의당에 속하게 된다.
2.7. 후계자의 계승과 외연확장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친노 측 인사 대부분이 친문으로 들어가게 되고 비노계 인사들도 이후 친문에 합류하면서 친노 세력은 발전적으로 사라졌다. 이후 역사는 친문 참조.2016년 18대 대선때만 해도 문재인 후보의 지지세력을 언론에서는 친노라고 불으며, 문재인 후보 본인도 '친노의 수장'이라고 불렸다. 대선 이후인 2016년 20대 총선 과정을 거치면서 인터뷰나 토론회에서 친노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보수쪽 인사가 '요즘 친노가 어디 있습니까? 다 친문이지!'하며 타박하는 것이 주 패턴이었다. 특히 19대 대선 과정에서는 친노 직계의 거두인 안희정이 출마하면서 더이상 친노=친문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민주당에서 호남계가 안철수, 김한길과 함께 떨어져 나간후 더불어민주당이 만들어지자 당 전체가 친문이라는 단일계파가 되었다. 경선과정에서 죽자고 싸운 박영선의원이나, 노무현 탄핵 당시 한 축을 담당한 추미애는 친문 중진으로 변신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비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대권을 노리거나 경선과정에서 싸운 안희정, 이재명, 박원순, 김부겸, 김두관 의원등 일부 친노인사들 정도인데 재임기간 내내 문재인의 지지율이 고공행진하니 당내 쓴소리는 전혀 없고 조용히 지내는 편. 그냥 뭉뜽그려 '친노친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친노친문'으로 부르면 더불어민주당은 여기에 벗어나는 사람이 거의 없다.
7대 지선과 21대 총선의 유례없는 대승은, 진흙탕 계파싸움을 하는 야당에 비해 '친노친문'이라는 단일대오의 움직임이 그이유로 꼽쳤다. 특히 21대 총선은 친노의 가장 큰 어른인 이해찬 당대표가 지휘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잡음 없이 일사불란하였다. 총선이 대승으로 끝나자 마자 이해찬 당대표는 “열린우리당 때의 아픔 깊이 반성해야”라고 말함으로써 계파싸움의 반복을 경계하였다.
'친노친문'의 정신적 지주인 이해찬 당대표, 정세균 국무총리,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모두 21대 총선에 불출마를 선언하며 친문의 점진적인 세대교체 바람이 불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친문은 이재명이라는 강력한 대권주자를 만나며 그 외연을 확장하게 된다.
2.8. 새로운 친노
소위 친노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연관된 청년 세대들이다. 이런 젊은 노무현 지지층을 신친노 내지는 '새로운 노무현계'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인물로 더불어민주당 전 공동선거대책위원장 황희두, 시대전환 당대표 비서실장 최병현, 영화 <시민 노무현> 감독 백재호 등이 있다.에코세대, 에코붐세대가 주를 이루는 '새로운 친노'들은 팟캐스트와 유튜브 등 기성 매체와는 다른 신매체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그 활용법에 대해서도 상당히 익숙하다. 이들은 노무현이 외쳤던 권위적 태도 타파, 참여민주주의, 사회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경제적 불평등과 신자유주의가 소외시키는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 문제와 사회문화적 억압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흐름에 따라 최근에는 중도주의보다 진보적 자유주의에 더 가까운 행보를 보이는 중이다.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을 가지는 경우도 있는데 주류적 경향은 아니며 정의당에서 노회찬등의 사민주의 성향의 진보정치인들과 교류하던 참여계의 영향을 받아 노무현의 진보적 측면을 계승하는 사회민주당 같은 정치 세력도 존재한다.
[1]
실제로 대선 당시 노무현 캠프에서 일했던 상당수의 인원들이
참여정부 내각에 등용되거나,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다.
[2]
물론 꼬마민주당 당시의 정치적 위상과 현재의 위상은 개개인별로 매우 다르다. 김정길은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12대 총선에서
민주한국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여당인
민주정의당 후보를 3등으로 밀어버리는 괴력을 보였다. 꼬마민주당 시절만 해도 노무현보다 정치적 위상이 높았고, 그보다 연배도 위였으며 정치 경력으로도 선배였다. 다만 김정길은
참여정부 이후로는 이렇다할 정치적 활동이 없다. 훗날 왼팔, 오른팔 소리를 듣는
이광재와
안희정도 꼬마민주당 당시에는 비서관이나 선거운동원 정도의 위치로 중앙정치와는 거리가 있었다.
[3]
동교동계와 노무현의 악연은 1995년 지방선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노무현이 지방선거에서 김대중이 지역등권론을 가지고 온다고 비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4]
DJ가 비서실장이었던
박지원을 통해 노무현을 후보로 인정하라고 부탁하면서 갈등이 봉합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DJ가 정권 말기에 새천년민주당 총재직도 내려놓은 상태였다지만, 당정분리가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대통령의 오더는 여당에서 절대적이었다.
[5]
위에서 서술한 김정길, 조경태가 이런 유형. 다만 꼬마민주당 출신은 아니었지만 문민정부 시절의 해수부 장관을 지낸 부산상고 선배
신상우나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원하러 민주당으로 들어온
이기택도 이런 유형으로 구분된다.
[6]
임종석,
우상호,
오영식,
허동준 등등. 다만 김근태는 386 세력의 정신적 지주였지만 막상 386세대와는 10년이상의 세대차이가 있었다.
[7]
특히 천정배는 노무현이 대선출마를 선언하자 혼자서 노무현을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8]
김원웅 역시
노무현과 같은 꼬마민주당 출신이었다. 그러나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삼김 청산을 외치며 노무현과 결별해 민주당에 남았고 그대로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다. 한나라당에서 활동했던 당시에도 국가보안법 폐지 등 국민회의보다 더욱 진보적인 아젠다를 들고 나와
이회창을 비롯한 한나라당 지도부들과 끊임없이 부딫쳤다. 결국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탈당해 개혁당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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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정청래가 여기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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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문성근이 노사모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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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대선 경선에서 김근태에게 뇌물을 준 권노갑이나 홍삼트리오로 대표되는 DJ 아들 삼형제의 비리가 큰 타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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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이 민주당에게 호남지역 정당 프레임을 뒤집어 씌우면 이게 꼭 먹혀서 영남에서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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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민주당 출신이 대부분인
김부겸,
김영춘,
이부영,
이우재,
안영근 등 5명의 의원들을 말한다. "독수리 5형제"라는 별명은 좋지 않게 말하자면
철새지만, 정치성향적으로 따지면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등 기존의 한나라당과 줄곳 충돌하는 의원들이었다는 점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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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모두 민주당의 대선빚 변제 요구는 계속 무시로 일관했으며 끝내 이 44억을 변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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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의 기원은 과거 정동영이 집필한
개나리 아저씨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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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진이 아닌 인사들의 경우
그런거 없다. 대표적으로 상술된, 비노의 수장 격이던
정동영계에게 노사모를 들어다 바친 사람들이 다 현재는 친노로 분류된다. 손학규계의
정봉주도 당시에는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하고 BBK 수사검사의 탄핵소추에 비관적인 청와대를 보고
'국민들은 청와대와 이명박의 거래가 있을것이란 의혹에 동조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망언을 서슴치 않았지만 현재는 친노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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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자금 문제로 징역을 살아
대통령비서실 출신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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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시장원리에 배치된다며 결국 반대한 분양원가제공개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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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유진의 정치까페에서 함께 활동하는
진중권과는 당시 시도때도 없이
키배로 대혈투를 벌이던 관계였다.(...) 토론회에서 진중권은 유시민에게 가짜진보이고, 내가 진짜 진보라고 하였다. 유시민은 자기도 진보라고 하였지만 씨알도 안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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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7대 대선 경선을 앞두고 DJ가 손학규를 암묵적으로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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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이나
한명숙,
강금실은 경선 중간에 기권했다. 그나마
이해찬은 경선을 완주했지만 정동영에게 밀려서 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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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과 노무현은 1982년 노무현&문재인 법률사무소 변호사로 일한 인연을 포함하면 20년 넘게 인연을 맺은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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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친노계의 주류와 정치 행보를 달리 한다고 해서 유시민이 친노가 아니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