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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장관 (1948~현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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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권승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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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금실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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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대한민국 제55대 법무부장관 강금실 康錦實 | Kang Keum-sil |
|||
출생 | 1957년 2월 12일 ([age(1957-02-12)]세) | ||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면 행원리
#[1]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
|||
본관 | 신천 강씨[2] | ||
호 | 향덕(香德) | ||
현직 |
법무법인 원 대표변호사 사단법인 선 이사장 경기도 기후대사 위성락· 서왕진 국회의원 후원회장 |
||
재임기간 | 제55대 법무부장관 | ||
2003년 2월 27일 ~ 2004년 7월 28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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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강계돈, 어머니 김계옥 | |
형제자매 | 2남 4녀 중 4녀 | ||
학력 |
숙명여자중학교 (졸업) 경기여자고등학교 ( 졸업 / 63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생명문화학 / 석사) |
||
종교 | 불교 → 천주교 ( 세례명: 에스테르) | ||
신체 | 160cm, A형 | ||
소속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경력 |
제23회
사법시험 합격 제13기 사법연수원 수료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서울고등법원 판사 국무총리실 행정심판위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부회장 제55대 법무부장관 ( 참여정부)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 외교통상부 여성인권대사 (참여정부) 대통합민주신당 최고위원 통합민주당 최고위원 법무법인 원 고문변호사 사단법인 선 이사장 법무법인 원 대표변호사 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기후환경회의 자문위원 ( 문재인 정부) 제4대 강원문화재단 이사장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선거 경선 후보자 이재명 후원회장 경기도 기후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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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 전 정무직 공무원, 전 정당인, 전 법무부장관. 헌정사 이래 역대 최연소 법무부장관이었으며, 동시에 최초의 여성 법무부장관이기도 했다. 대통합민주신당과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2. 생애
2.1. 법무부장관 이전
1957년 2월 12일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면 행원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서 교육자인 아버지 강계돈(康季敦)[3]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계옥(金癸玉)[4] 사이의 2남 4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5],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판사로 재직하였다. 1990년 여성 최초로 형사단독판사가 됐다.
1988년 2차 사법 파동을 계기로 박시환, 김종훈 등과 개혁 성향 법조인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창립을 주도했다. 강금실 등 우리법연구회 창립했던 주축은 1993년 3차 사법 파동을 이끌며 김덕주 전 대법원장의 퇴진을 이끌어냈다.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끝으로 판사에서 물러나 1996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2000년에는 논문 《호주제 폐지를 위한 법적 접근》를 이석태 변호사와 함께 저술하며 호주제의 위헌성을 설파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약칭 민변)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2.2. 법무부장관
2003년 참여정부에서 초대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된 후 2004년 7월 28일까지 봉직하였다.[6] 이로써 강금실은 헌정 사상 최연소 법무부장관이자 최초의 여성 법무부장관이었다. 이때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강금실을 천거한 사람이 강금실의 사법연수원 1기수 선배인 문재인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다. 문재인은 노무현에게 강금실을 환경부장관이나 보건복지부장관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여성이 그런 부처 장관에만 임명되는 것은 고정관념"이라며 노동부나 법무부장관에 기용할 뜻을 밝힌다. 강금실은 노 전 대통령의 뜻을 전달한 문재인에게 "노동부 업무는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여서 망설여지지만, 권력기관인 법무부에서 일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며 법무부장관직에 뜻을 보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강금실의 뜻대로 그녀를 법무부장관에 임명한다.이로 인해 검찰 내 비주류가 계속 지적했었던 조직순혈주의, 남성중심주의, 기수중심주의, 관료이기주의가 깨졌다. 참여정부는 여성, 법관, 변호사, 낮은 기수 출신의 장관을 임명함으로서 의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7]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개혁에 대한 의지와 여성이 임명되는 영역이 특정 부처에 국한되어야 하냐는 고정관념 타파를 이유로 임명을 강행한다.
그러나 강금실의 장관직 수행은 순탄치 않았다. 강금실 전 장관 자신도 평가하듯 검찰을 개혁하는 힘이 부족했다. 임명으로 인한 상징성은 컸지만, 조직 실태 파악 및 팀을 꾸리는 데 실패했다는 자평이다. 천정배 전 원내대표[8]의 생각도 유사하다. 법무부 자체가 주요 포스트를 검찰파견인력으로 채웠기에 검찰 주류 시각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 법무부 파견 검사도 친정으로 돌아가면 인사권을 가진 검찰 주요책임자의 눈치를 봐야 한다. 임명 직후 법무부+청와대에서 기존 관례를 깨고 검찰총장과의 상의 없이 검찰 인사를 단행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검찰이 반대건의서를 올리는 등 집단반발했으며, 이 때문에 검찰총장의 의견을 들어 인사를 하도록 검찰청법 34조 1항이 개정되는 일도 벌어졌다. 노 전 대통령은 강금실과 법무부의 손을 들어줬지만 일부 평검사들은 인사권과 예산권 이관 등 검찰의 독립을 요구했다. 검찰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노 전 대통령과 강금실은 평 검사와의 대화를 기획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중수부)와의 존폐 문제 등을 두고 송광수 전 검찰총장[9]을 비롯한 검찰 지도부와 참여정부의 갈등도 계속됐다. 검찰 개혁에 대한 평검사와 여론의 지지를 얻는데는 성공했지만 대선자금 수사가 이어지며 개혁을 밀어붙이는 데 실패했다. 검찰의 인기가 올라가며 개혁의 설득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2004년 7월 개각 때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다.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의 성과로는 호주제 폐지가 있다. 재임 초기인 2003년 3월, "법무부는 법의 집행뿐 아니라 ‘소수자 집단’의 인권 향상에도 적극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 남녀불평등을 야기하는 대표적인 독소 조항 '호주제'의 폐지에 적극 나설 방침이다"라고 말하며 호주제 폐지를 공언하였다. 이후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고, 2005년 3월에 민법 개정이 이루어졌으며, 3년 후인 2008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가족관계등록법이 시행되었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구치소, 교도소 재소자들의 인권향상에 노력한 점이 있다.
대표적인 실책으로는 외국인 지문날인 폐지가 있다. 2003년 5월 7일 정책간담회에서 "2년 이상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지문을 날인하도록 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투자하러 오는 사람에게까지 지문날인을 요구하는 것은 곤란해 (관련 법 조항을) 삭제하라고 했다"며 외국인의 지문날인 폐지를 암시하였고 #, 22일 법무부가 공식적으로 외국인 지문날인을 폐지하기로 정했다. #
그런데 정작 내국인에 대해서는 17세 이상일 경우 주민등록증 발급을 통해 전부 지문채취를 하는데, 외국인은 지문채취도 하지 않는 데에 대해 역차별 논란이 있었다. # 한편으로 2001년 9.11 테러로 인해 미국,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 국가들이 입국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생체 정보 취득 정책을 추진하던 세계적 추세와도 전혀 맞지 않았다. # 결정적으로 외국인 범죄가 발생하여 지문까지 남겨져도 지문 일치 대상이 없어 잡지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실제로 지문이 등록되지 않은 외국인이 범죄를 저질러 사건이 미궁에 빠졌다가, 외국인 지문 채취 시행 이후 해결된 사례도 있었다. 결국 다음 정권인 이명박 정부 때 17세 이상의 모든 외국인에 대해 지문과 얼굴 등의 생체정보 취득이 다시 시행되었다. #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대선 자금 관련 질의 중 코미디네 코미디라는 앞담 비슷한 발언이 포착되어 사과하기도 했다.
2.3. 정치 활동
퇴임 이후 본업인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6년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다. 열린우리당의 참패가 예고됐던 선거에서 강금실은 한때 홍준표, 맹형규 등 한나라당 후보군을 앞지르며 열린우리당의 희망으로 떠오르며 첫 여성 광역자치단체장 당선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한나라당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뒤 정치를 떠나있던 오세훈을 불러들여 출마시켰다. 결국 강금실은 선거 과정 내내 뒤지다 더블 스코어로 참패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는다.대선 패배 직후인 2008년 대통합민주신당의 최고위원에 임명된다. 이때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제의를 받았으나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후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가 2016년 총선에선
8회 지선에서 참패한 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8월 전당대회까지 당을 이끌어갈 혁신 비대위원장으로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을 추천하며 다시 언론에 이름이 올랐다. #
2022년 7월 15일, 7월까지만 강원문화재단 이사장직을 수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
2023년 4월 26일에는 김동연 경기도지사의 요청으로 경기도 기후대사에 임명되었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열린우리당| |
2006 - 2007 | 정계 입문 |
[[대통합민주신당| |
2007 - 2008 | 합당[11] |
[[통합민주당(2008년)| |
2008 | 합당[12] |
[[민주당(2008년)| |
2008 - 2011 | 당명 변경 |
[[민주통합당| |
2011 - 2012 | 합당[13]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12 - 현재 |
탈당 정계 은퇴[14] |
4.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8080><tablebgcolor=#fff,#1c1d1f><tablewidth=100%><rowcolor=#fff><rowbgcolor=#808080>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06 |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서울특별시장 |
[[열린우리당| |
1,077,890 (27.31%) | 낙선 (2위)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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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지선 ( 서울특별시장) | }}}}}}}}} |
역대 후보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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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담
- 서울대 캠퍼스 커플이던 출판인 김태경과 1984년 결혼했다. 1988년 김태경이 자본론을 출판해 구속되자 현직 판사 신분으로 검찰에 부당함을 호소하는 의견서를 내기도 했다. 2000년 김태경의 사업 실패 등으로 이혼했으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금실이 장관이 되었을 당시, 전 남편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 이혼한 사이임에도 서로 연락을 할 정도로 친구 같은 사이라고 인터뷰했다. 하지만, 2014년에 지병인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기사
- 본래는 불교 신자였으나 2004년 천주교 세례를 받고 개종하였다. 세례명은 에스더. 고등학교, 대학교 선배이자 법조계 선배였던 이영애가 대모가 됐다.
- 김영란 전 대법관, 조배숙 전 의원과 고교, 대학 동기이다.
-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 시절, ABL생명(당시 제일생명) 여직원 우선 해고 사건 때 원고 측을 변호한 적 있다. 해당 판결문에 나와 있다., 참고로 결과는 원고 승소 해당 기사
- 전인권이 1999년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됐을 때 변호사를 맡기도 했다. 강금실은 전인권의 건강상태와 예술가로서의 정신적 고통을 피력하며 처벌보다는 치료를 위해 선처해줄 것을 법원에 호소하였고 그 결과 전인권은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강금실의 토크콘서트에 게스트로 오는 등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2000년대 후반 전인권이 또 다시 마약 복용으로 구속되고 정신병원까지 입원하면서 잠시 연락이 끊겼다가[15] 2012년 전인권이 재활에 성공해 복귀한 뒤로 다시 인연이 닿았다.
-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을 때, '보람이가 행복한 서울'이라는 참신한 선거구호를 내세운 적이 있다. 보람이라는 서민층 자녀를 상징하는 가상의 아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서울을 만들겠다는 의미였는데, 당시에 딱히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전이나 이후 선거에서도 전무후무한 참신한 선거구호이자 선거전략이었다.
- 경기도 의왕·과천의 제21대 국회의원 이소영의 후원회장을 맡은 바 있다.
[1]
인근의 종달리, 김녕리와 함께
곡산 강씨 집성촌이다.
[2]
제주파(곡산계) 41세.
[3]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애월심상소학교에서 훈도로 근무했다.
# 이후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4]
김영우(金英友)의 딸이다.
[5]
박한철,
황교안 등이 사법시험 동기다.
[6]
이후
두 번째 여성 법무부장관이 나오기까지는 16여년이나 걸렸으며, 강금실을 천거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직접 지명하게 된다.
[7]
그러나 강금실이 검사가 아닌 판사 출신이고
김각영 전
검찰총장보다 사법시험 및 연수원 기수가 한참 후배로 현직 차장/부장검사와 비슷한 기수라는 점 때문에 검찰을 통솔해야 하는 법무부장관 자리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강금실을 추천한 문재인 전 민정수석조차도 법무부장관 임명에는 반대했다.
[8]
천정배는 사법시험 18회로, 강금실의 대선배였다. 이후 강금실의 다음다음 법무부장관이 된다.
[9]
중수부를 폐지하려는
참여정부에 "차라리 내 목을 치라"며 저항했다.
[10]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선임 후 계속된 우클릭에 대한 반발이 가능성이 크다.
[11]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 합당.
[12]
민주당과 신설 합당.
[13]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
[14]
#
[15]
인터뷰에서 또 다시 마약을 한 것에 대해 너무 미안해서 연락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