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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작위 요구자를 다루는 문서.2. 주의할 점
일본에는 정이대장군( 쇼군)이라는 특이한 통치자가 있었는데, 마지막 쇼군을 배출한 도쿠가와 가문 수장[1]을 '일본국 황위 요구자'로 인정하는 것에는 논란이 있다. 일본에는 진짜 군주인 천황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며, 쇼군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직함상 최고사령관이지 황제가 아니기 때문이다.국내에서는 막부라고 번역하는 국가 형태는 영미권에서는 Shogunate(쇼군국)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하던 이들 위에는 명목상의 군주인 천황이 있었고, '쇼군'은 이름부터 장군이라는 뜻이다.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명나라로부터 ' 일본국왕' 칭호를 받은 적은 있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의 감합무역이 쇠퇴한 다음 들어선 도요토미 정권과 에도 막부에서는 왕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에도 막부의 쇼군들은 대외적으로 일본국대군(日本國大君)의 칭호를 사용했다. 이 대군(타이쿤)이 대외 칭호였던 관계로 서양에도 알려져 영어 Tycoon의 어원이 되었다. 그러다 대정봉환 이후 쇼군직이 폐지된 현재의 일본에는 현재 천황만이 있고, 누구도 천황에 맞서 왕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한편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쇼군과 네팔의 재상 라나같은 경우 실질적 군주로 취급되기 때문에 그 자손도 왕위 요구자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곳 나무위키에서도 쇼군을 포함한 일본 무사정권 지도자는 군주로 분류하기도 한다. 다만 나무위키에서는 등재 기준을 정하는 토론에서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스스로 대정봉환을 통해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납한 것이 등재 기준 중 '작위 보유자가 공식적으로 작위를 포기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결론지어졌으므로 에도 막부는 작위 요구자 목록에 없다. 현 도쿠가와 가문 당주는 도쿠가와 이에히로.
따라서 그나마 현재 일본의 "진짜" 왕위 요구자[2]라고 할 수 있는 가문은 舊 류큐 왕국의 왕실이었던 쇼 가문뿐이다. 이마저도 역사적으로는 일본 본토 밖에 있던 나라다.
3. 등재 기준
이 문서는 상위 문서인 작위 요구자의 정의에 따른 일본의 현재 작위 요구자들을 나열한 목록 문서이다.- 해당 국가가 현재까지 존재하거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적법한 근거를 가지고 해당 작위를 주장한 사례가 있었던 경우.
- 혈통을 통해 세습되는 왕위나 작위와 같이 만약 해당 정권이 존속했다면 해당 정권의 주권을 이어받을 수 있는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등재하며, 계승권을 실제로 주장하는지 아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작위 이외에 영토에 대한 권리 주장.
- 작위 소유자가 공식적으로 해당 작위를 포기, 또는 해체한 경우.
- 식민국가나 피정복국가가 독립하고, 상대국이 해당 국가를 인정한 경우에 해당하면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 합의
토론 합의에 따라,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가 직위를 자손에게 계승했거나 계승하려 시도한 경우는 등재하지 않는다. 단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라도 '몽골의 칸' 등 세습 군주의 칭호를 자칭한 경우는 등재한다.
4. 현재 작위 요구자 목록
4.1. 국가
4.1.1. 구황족
자세한 내용은 구황족 문서 참고하십시오.작위 요구자 |
(
구니노미야) 구니 구니아키 |
(
아사카노미야) 아사카 도모히코 |
(
다케다노미야) 다케다 츠네타다 |
(
후시미노미야) 후시미 히로아키 |
계승 실패 원인 | 1947년 미군정의 조치에 의해 강제로 황적이탈 |
일본 황실의 작위 요구자로는 구황족이 있다.
본래 일본의 구 황실전범에 따르면, 메이지 유신 천황직을 계승한 자를 빼면 어떤 천황의 5대손까지는 친왕/내친왕(각각 남, 녀에게 붙이는 칭호)의 작위를 받고,[3] 그 이후에는 왕/여왕의 칭호를 받으며, 왕/여왕에서 분가를 하게 되면 황적이탈하게 되어 황족 신분을 잃게 된다. 그러나 구황족의 미야케 11곳은 당대 천황의 촌수와는 상관없이 왕작을 세습하였다. 하지만 현재 일본에는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11미야케는 모두 왕위 요구자 신세로 전락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1947년에 미군정이 강제로 이들을 황적이탈시켰기 폐지했기 때문이다. 전쟁범죄에 관여한 전과 때문이라고 오해를 받지만, 사실이 아니다. 사실 미군정은 전범으로 기소된 황족들만 지위를 박탈하려고 했는데, 히가시쿠니노미야 가문의 당주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 11미야케의 작위를 박탈해달라고 요구하여,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방계 황족 전체가 황적이탈되었다, 물론 가야노미야 가문의 당주인 츠네노리와 같이 스스로 황적이탈을 자청한 경우도 있었다.
황족 지위가 박탈된 구황족 가문들은 더 많이 있지만, 이 문서에 왕위 요구자로 올라가 있는 계통 및 가야노미야·히가시쿠니노미야 계통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문이 끊겨 단절된 경우에 속한다. 아직 가문을 유지하고 있는 구황족 중 하나에는 가야노미야 계통과 히가시쿠니노미야 계통도 존재하지만, 방계 황족들의 지위가 박탈될 때 당시 히가시쿠니노미야 계통의 당주였던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은 오히려 황적이탈에 찬동했고 다른 구황족의 황족 지위 박탈에 협력했으며, 가야노미야 계통도 당주였던 츠네노리(恒憲)가 구황족들이 황적이탈되기 직전에 황적이탈을 자청했다. 물론 이후에 그의 후손들이 다시금 왕작위를 요구하면 당연히 이 항목에 등재할 수 있다.
한편 이들이 "왕작위 요구자"로 전락하게 된 1947년 미군정의 조치는 훗날 일본 황실에 커다란 문제점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히로히토 사후 아키히토, 나루히토 시대에 들어 황위를 계승할 후계자의 부재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일단 아키히토 덴노에게는 나루히토와 후미히토 두 아들이 있어 아키히토의 차기 계승자까지는 문제가 없으나 그 뒤를 이을 계승자가 진짜 문제인 것이다. 일본은 현대 유럽 왕실처럼 남녀 구분 없이 무조건 첫째 자식이 계승하는 제도가 아니라 메이지 시대에 확립된 무조건 남자만 계승 가능이라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어, 천황가를 계승할 '아키히토의 직계 남자 후손'이 지극히 부족하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괜히 아키히토의 둘째 아들 후미히토가 히사히토라는 아들을 낳았을 때 엄청난 파장이 된 것이 아니다.[4] 하지만 후미히토 일가가 수많은 논란을 벌이고 히사히토 본인의 자질 문제까지 불거지자 다시금 " 아이코 공주의 황위 계승 인정" 또는 구황족(왕작위 요구자 신세로 전락한 세습친왕가)의 복직 등 별의별 썰이 나오고, 현 자민당 정권은 그에 맞서 "황실전범 변경 불가" 라고 맞서는 등 천황가 계승 문제는 일본 황실 입장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만일 세습친왕가의 폐지가 없었다면 문제는 별로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습친왕가의 존재 자체가 "직계 단절 등의 상황을 대비하는 보험"이었으므로, 현재처럼 아키히토 계통의 직계가 위태롭다 할지라도 황족 지위를 유지한 방계 일족에서 한 명이 황위를 계승하면 되기 때문이다. 현 천황의 직계 조상인 고카쿠 덴노도 천황의 직계가 단절되자 세습친왕가에서 방계 황족 한 명을 양자로 입양 후 계승자로 삼은 것이다.
4.1.2. 도요토미 정권 수장
관련 칭호 |
관백 태정대신 태합 도요토미 정권 수장 오사카 성주 |
작위 요구자 | 기노시타 무네토시 |
계승 실패 원인 |
1603년 도요토미 정권 멸망 1615년 직계 혈통 단절, 오사카 성주직 폐지[5] |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의 당주인 기노시타 무네토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방계 후손인데, 오사카 전투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손자인 도요토미 쿠니마츠가 어린 나이에 에도 막부에 의해 참수형에 처해지면서 도요토미 가문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방계 후손들은 메이지 유신으로 에도 막부가 무너지기 전까지 자신들의 혈통을 대놓고 밝히는 일이 없었으며 더 나아가 도요토미라는 성을 쓰는 일도 없었다. 이 때문에 쿠니마츠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의 역대 당주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원래 성이었던 기노시타라는 성을 쓰게 되었으며, 오늘날 도요토미라는 성을 쓰는 일본인들은 혈통상 전국시대와 에도 시대의 도요토미 가문과 무관하다. 사실 도요토미 가문이 이미 힘을 잃은 데다, 다이묘들은 몰라도 민중들 사이에서는 도요토미 세력에 대한 지지가 꽤 있는 편이어서, 에도 막부는 성씨를 바꾸고 숨어버린 도요토미 가문 방계 후손들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고 구태여 숙청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는 조선이 창건 직후에는 고려의 왕가였던 개성 왕씨를 대거 숙청하다가, 이후 민중들 사이에서 고려에 대한 향수가 없어진 뒤에는 왕씨임이 드러나도 그냥 모른 척하거나 고려의 왕릉들을 보존하는 능참봉으로 기용하는 등 개성 왕씨에 대해 유화적으로 대한 것과도 같다.
본 문서의 개요에 나온 것처럼 대정봉환으로 쇼군의 통치권이 천황에게 반납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에도 막부 쇼군위 요구자는 등재되지 않았으나, 도요토미 정권 수장위 요구자는 이를 인정할 이유가 없기에 등재되었다.
4.1.3. 오다 정권 수장
관련 칭호 |
오다 정권 수장 오와리 번주 우다 마츠야마 번주 |
작위 요구자 | 오다 코이치 |
계승 실패 원인 | 1583년 오다 정권 멸망 |
오와리 오다 가문의 현 수장은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츠의 후손인 오다 코이치다. 한편 전직 피겨 스케이팅 선수 오다 노부나리가 자신이 오다 노부나가의 17대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6], 오다 노부나리 항목에 들어가봐도 알 수 있겠지만 여러 정황상 그저 자칭 후손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는 오다 정권 수장직 요구자로 간주되지 않는다. 다만 만약 오다 노부나리가 속한 오다 가문이 오와리 오다 가문의 피가 흐르는 집안과의 사이에서 통혼이 이루어져 자식을 얻는다면 그 자식 세대부터는 정통성 문제와 별개로 어쨌든 오와리 오다 가문의 후손이 맞게 되므로 오다 정권 수장직의 비정통 요구자로 인정받을 수는 있다.
본 문서의 개요에 나온 것처럼 대정봉환으로 쇼군의 통치권이 천황에게 반납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에도 막부 쇼군위 요구자는 등재되지 않았으나, 오다 정권 수장위 요구자는 이를 인정할 이유가 없기에 등재되었다.
4.1.4. 무로마치 막부 정이대장군
관련 칭호 | 무로마치 막부 정이대장군 | |
작위 요구자 |
(키츠레카와 계통) 아시카가 코헤이 |
(히라시마 계통) 아시카가 요시히로 |
전임자 | 아시카가 아츠우지 | |
계승 실패 원인 |
1467년
오닌의 난의 영향으로
막부 유명무실화 1573년 막부 멸망 |
무로마치 아시카가 가문은 무로마치 막부 15대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두 아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직계가 단절되었다. 현재 이론상의 무로마치 막부 정이대장군직 요구자는 키츠레카와 계통의 당주 아시카가 코헤이와 히라시마 계통의 당주 아시카가 요시히로다.[7]
본 문서의 개요에 나온 것처럼 대정봉환으로 쇼군의 통치권이 천황에게 반납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에도 막부 쇼군위 요구자는 등재되지 않았으나, 무로마치 막부 쇼군위 요구자는 이를 인정할 이유가 없기에 등재되었다.
무로마치 막부의 역대 쇼군들은 아시카가 요시미츠 이래로 일본 국왕을 대외적으로 칭했으나, 이는 명나라와의 감합무역을 위한 것일 뿐, 대내적으로는 일본 황실의 존재를 의식해서 칭왕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위 요구자들은 일본 왕위의 요구자가 아니다.[8]
4.2. 혼슈
4.2.1. 가이 번주
관련 칭호 | 가이 번주 |
작위 요구자 | 다케다 구니노부 |
계승 실패 원인 | 1575년 나가시노 전투의 여파로 가이 다케다 가문이 몰락함 |
다케다 신겐의 가문으로 유명한 가이 다케다 가문은 나가시노 전투에서 패배한 것의 여파로 몰락하고 말았다. 가이 다케다 가문의 현 당주는 다케다 구니노부다.
4.2.2. 데와 요네자와 번주
관련 칭호 | 데와 요네자와 번주 |
작위 요구자 | 우에스기 쿠니노리 |
계승 실패 원인 |
1871년 봉건제 폐지로 영지 상실 1947년 신 헌법 공포로 화족 작위 폐지 |
지금의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 일대에 있었던 요네자와번은 우에스기 겐신의 조카이자 양자인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초대 번주였으며, 이후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다스렸다. 요네자와 우에스기 가문은 무진전쟁 때 에도 막부를 지지하여 막부파가 되었다가 막부파의 패배로 인해 요네자와의 통치권을 잃고 화족에 편입되었으며, 훗날 1947년에 화족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명목상의 지배계급 지위마저 상실하였다. 요네자와 우에스기 가문의 현 당주는 우에스기 쿠니노리인데, 그는 우주공학자였다가 2006년 정년 은퇴했으며, 우에스기 가문과 관련한 학술대회나 각종 행사에도 참석하고 있다고 한다.
4.2.3. 무츠 센다이 번주
관련 칭호 | 무츠 센다이 번주 |
작위 요구자 | 다테 야스무네 |
계승 실패 원인 | 1871년 봉건제 폐지로 영지 상실 |
다테 마사무네는 지금의 미야기현 센다이시에 있었던 센다이 번의 초대 번주였다. 센다이 다테 가문의 현 당주는 다테 마사무네의 직계 후손인 다테 야스무네다.
4.2.4. 비젠 오카야마 번주
관련 칭호 | 비젠 오카야마 번주 |
작위 요구자 | 우키타 후지오 |
계승 실패 원인 | 1600년 번주직 박탈 |
우키타 히데이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서군 다이묘로 참전했다가 서군이 패하는 바람에 결국 비젠 오카야마 번주직을 박탈당하고 하치죠지마로 유배되었다. 우키타 가문의 현 당주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후손인 우키타 후지오다.
4.2.5. 에도 성주
관련 칭호 |
에도 막부
정이대장군 에도 성주 |
작위 요구자 | 도쿠가와 츠네나리 |
전임자 | 도쿠가와 요시토모 |
후임자 | 도쿠가와 이에히로 |
계승 실패 원인 | 1868년 막부 멸망, 도쿄로 개편 |
에도 막부의 마지막 정이대장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통해 정이대장군이 가진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반납하였다. 일본의 길고 긴 막부 시대에서도 형식적으로는 일본의 제1인자가 천황이라는 것은 인정하였다. 다만 천황이 그 통치권을 쇼군에게 '위임' 하였다는 것이 막부제의 논리였다. 따라서 대정봉환이 이루어진 시점에서 정이대장군은 단지 천황을 섬기는 관직 1에 지나지 않게 되었으며 '세습되는 통치자'로서는 그 작위를 스스로 포기한 것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 대정봉환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천황의 권한으로 정이대장군직이 폐지되어 요시노부는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에도 성의 성주직은 공식적으로 포기를 선언하지 않았다.[9] 그에 따라 에도 막부 멸망 이후의 도쿠가와 가문 역대 당주들은 에도 성의 성주직 요구자로 볼 수 있다. 에도 막부 멸망 이후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종가를 이탈하여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의 선조가 되었는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증손자 도쿠가와 요시토모가 이혼하면서 요시토모의 자식들이 요시토모의 전처이기도 한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되어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은 족보상으로 단절되었으며, 그에 따라 도쿠가와 종가가 도쿠가와 가문 전체를 대표하게 되었다. 도쿠가와 종가의 현 당주는 도쿠가와 이에히로다.
4.2.6. 조자이 번주
관련 칭호 | 조자이 번주 |
작위 요구자 | 하야시 미츠 |
전임자 | 하야시 타다타카 |
계승 실패 원인 | 1869년 번주직 박탈 |
조자이 번의 마지막 번주인 하야시 타다타카는 일본 역사상 마지막으로 개역당한 다이묘로 유명하다. 그는 보신 전쟁 당시 메이지 신정부에 맞서 싸우기 위해 탈번(자신의 번에서 이탈)하였는데, 이는 에도 시대 기준으로 사형에 처해질 만큼 무거운 죄였지만, 번주가 탈번을 하는 전례 없는 상황에다가 에도 시대 말기와 일본 제국 초기의 혼란기라서 결과적으로는 개역만 당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는 말년에 둘째 딸의 아파트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로 인해 아파트에서 살아본 처음이자 마지막 다이묘라는 타이틀까지 얻었다.
4.2.7. 키이 토바 번주
관련 칭호 | 키이 토바 번주 |
작위 요구자 | 구키 다카쿠니 |
계승 실패 원인 | 1871년 봉건제 폐지로 영지 상실 |
지금의 미에현 토바시에 있었던 토바번은 구키 요시타카의 아들 구키 모리타카가 초대 번주였다. 토바 구키 가문의 현 당주는 구키 다카쿠니다.
4.3. 규슈
4.3.1. 사쓰마 번주
관련 칭호 |
사쓰마 번주 일본 제국 공작 |
작위 요구자 | 시마즈 노부히사 |
전임자 | 시마즈 타다히데 |
계승 실패 원인 |
1871년 봉건제 폐지로 영지 상실 1947년 신 헌법 공포로 화족 작위 폐지 |
사쓰마 시마즈 가문은 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 센고쿠 시대 및 에도 시대의 다이묘 가문으로서도, 일본 제국 화족 가문으로서도 모두 명성을 떨친 명문가다. 사쓰마 시마즈 가문의 현 당주인 시마즈 노부히사는 조상인 27대 당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모시는 테루쿠니 신사에서 궁사(최고 신관)로 일하고 있다.
4.3.2. 쓰시마 후추 번주
관련 칭호 |
쓰시마 후추 번주 일본 제국 백작 |
작위 요구자 | 소 타츠히토 |
전임자 | 소 다케유키 |
계승 실패 원인 |
1871년 봉건제 폐지로 영지 상실 1947년 신 헌법 공포로 화족 작위 폐지 |
현 쓰시마 섬의 번주위 요구자인 소 타츠히토는 그 유명한 덕혜옹주의 남편인 소 다케유키 백작의 아들이며[10], 1871년에 폐번치현으로 쓰시마 후추 번주 직위가 폐지되고 1947년에 화족 작위가 모두 폐지되었음에도 소씨 가문이 명목상의 쓰시마 후추 번주 칭호를 공식적으로 포기하지 않아서, 2023년 현재까지 명목상의 번주를 자칭하고 있다.
4.3.3. 아마쿠사 번주
관련 칭호 | 아마쿠사 번주 |
작위 요구자 | 고니시 다카노리 |
계승 실패 원인 | 1600년 번주직 계승권 박탈 |
아마쿠사 번주였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자신이 속한 서군이 패하는 바람에 결국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고니시 가문의 다른 사람들도 죄다 죽임을 당하여 일부만 살아남으면서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의 직계 혈통은 단절되었다. 그로 인해 고니시 가문의 그나마 남은 생존자들은 아마쿠사 번주직 계승권마저 박탈당한 채 몰래 숨어서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아마쿠사 고니시 가문의 현 당주 고니시 다카노리는 그렇게 몰래 숨어서 지내던 고니시 가문 생존자들의 후손이며, 당연히 고니시 유키나가의 방계 후손이다.
4.3.4. 치쿠고 야나가와 번주
관련 칭호 | 치쿠고 야나가와 번주 |
작위 요구자 | 카마치 미츠히코 |
전임자 | 카마치 츠토무 |
계승 실패 원인 | 1871년 봉건제 폐지로 영지 상실 |
치쿠고 카마치 가문의 현 당주인 카마치 미츠히코는 마츠다 세이코의 오빠이자 칸다 사야카의 외삼촌이며, 동생 마츠다 세이코의 소속사인 펠리시아 클럽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
4.3.5. 히고 구마모토 번주
관련 칭호 | 히고 구마모토 번주 |
작위 요구자 | 호소카와 모리히로 |
전임자 | 호소카와 모리사다 |
계승 실패 원인 |
1871년 봉건제 폐지로 영지 상실 1947년 신 헌법 공포로 화족 작위 폐지 |
호소카와 가문은 개역되어 평민으로 전락한 가토 가문을 대신하여 구마모토번의 새로운 번주 가문이 되었다. 현 당주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일본의 전직 총리이기도 하기 때문에 구마모토 호소카와 가문은 단순히 옛 명문가 정도에 그친 게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명문가 지위를 유지하는 셈이다.
4.4. 시코쿠
4.4.1. 이요 오즈 번주
관련 칭호 | 이요 오즈 번주 |
작위 요구자 | 와키자카 겐지 |
계승 실패 원인 | 1871년 봉건제 폐지로 영지 상실 |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1609년에 이요 오즈 번 5만석에 봉해졌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본래 이름이 다무라 진나이였고 생물학적으로 와키자카 가문 사람이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재혼으로 와키자카 야스아키의 양자가 되면서 오즈 와키자카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이요 오즈 번주직의 현 요구자는 와키자카 겐지다.
4.5. 오키나와
4.5.1. 류큐 국왕
관련 칭호 |
유구국 중산왕(琉球國中山王) 류큐 번왕(琉球藩王) 일본 제국 후작 일본 제국 남작 |
작위 요구자 | 쇼 마모루 |
전임자 | 쇼 히로시 |
후임자 | 쇼 타케시 |
계승 실패 원인 |
1872년 류큐 번으로 강등 1879년 번왕국 멸망 1947년 신 헌법 공포로 화족 작위 폐지 |
만국진량(萬國津梁)으로서 번영을 누려 오던 류큐 왕국은 1872년 일본 제국에 의해 ' 류큐 번'으로 강등되었으며, 1879년에는 오키나와현을 설치해 류큐 왕국은 멸망했다. 류큐 왕국의 왕은 삼산시대 이래로 명· 청으로부터 유구국 중산왕의 칭호를 책봉 받아 썼다. 일본이 일방적으로 합병을 선언하고 류큐 번을 설치한 뒤 일본에서는 류큐 번왕의 칭호를 내렸지만 류큐 왕국은 계속 유구국 중산왕 칭호를 사용하며 청과 교류하였다. 류큐 번 폐지와 오키나와 현 설치 이후 류큐의 마지막 군주인 쇼타이(尚泰)는 왕위에서 강제로 퇴위돼 도쿄로 강제이주되고, 1885년 후작에 봉해졌다. 두 아들은 남작위를 받았으며, 장남이 후작위를 계승했다. 쇼타이의 차남 쇼인(尚寅) 남작과 사남 쇼준(尚順) 남작은 일본의 오키나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자치 형태로 쇼 씨 일가를 지배자로 복귀시키는 복번 운동을 벌였으나 일본 정부는 당연히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고 현 일본국 헌법이 발효되면서 귀족 작위는 폐지되었다.
現 류큐 왕실 수장이자 왕위 요구자 쇼 마모루(尚衞)는 쇼타이의 현손자로 1996년부터 왕위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류큐 독립이 이뤄질 가능성도 희박하고 현 일본 내에서 황족 외에는 임명되지 않는 왕으로 책봉해줄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보다 낮은 오등작 역시 현행 헌법 제정 후 폐지되었는데 오직 쇼 마모루만을 위해 예외적으로 부활시켜 줄 가능성도 제로에 수렴한다.[11] 그리고 그나마 있는 소수의 류큐 독립 운동 참여자들은 대다수가 류큐 공화국 건국을 추구하고 있다. 또 대다수의 류큐인들은 류큐국이 부활할 경우, A2/D2 계획에 따라서 주변국의 위성국화를 추진하던 중국의 실질적인 괴뢰국으로 전락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때문에 오랫동안 오키나와의 골칫거리였던 후텐마 미군 기지의 철수가 이뤄질 가능성 또한 낮아진다는 점을 들어서, 현 상태의 유지를 바라거나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받는 것을 원하고 있다.[12] 게다가 류큐 왕국의 주변부 피지배 지역이었던 사키시마 주민들 중에는 옛 류큐 왕국의 영역에 기초한 독립 운동이나 자치 운동 자체에 적대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쇼 마모루가 왕위를 되찾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13]
4.6. 홋카이도
4.6.1. 마츠마에 번주
관련 칭호 |
마츠마에 번주 일본 제국 자작 |
작위 요구자 | 마츠마에 요시히로 |
전임자 | 마츠마에 나가히로 |
계승 실패 원인 |
1871년 봉건제 폐지로 영지 상실 1947년 신 헌법 공포로 화족 작위 폐지 |
마츠마에 번은 에도 시대 일본의 여러 번들 중 유일하게 홋카이도에 있었으며, 오시마 반도를 다스렸다.
4.7. 일본 본토 밖
4.7.1. 일본 제국 이왕
관련 칭호 |
대한제국 황제 조선 국왕 조선 대군주 일본 제국령 조선 창덕궁 이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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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요구자 | 이원 | |
전임자 | 이구 | |
후임자 | 이권[14] | |
계승 실패 원인 | 1947년 이왕가 폐지 |
일본 제국은 대한제국 합병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대한제국 황가의 처우 또한 논의하였으며, '대한제국을 합병하되 그 황가는 우대한다'는 방침을 확정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대한제국을 통치하던 왕가는 " 왕공족"이라는 일본 황족보다는 낮되 일본의 화족들보다는 높은 신분을 얻었으며, 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은 왕공족의 수장 ' 이왕'이 되었다. 1947년 5월 3일 새 일본국 헌법 시행에 따라 화족 제도가 폐지될 때 왕공족과 이왕도 폐지되었다.
비록 현재 전주 이씨 가문이 '이왕가의 계승권을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명백한 선언'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진지하게 이왕 작위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일본 제국 이왕 작위를 진지하게 요구한다고 했다가는 전주 이씨 가문을 민족반역자라고 처벌하라는 여론이 들끓을 것이며,[15] 상당수의 전주 이씨 왕족이 일제강점기 내내 왕공족 신분으로 친일 행각을 했던 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다. 다만 상술한 대로 '우리는 이왕 작위를 부정하며 왕공족이었던 것을 원천적으로 부정한다'는 선언이 없으니 일단은 이왕가 왕위 요구자를 기재한다.
계승 법칙에 따라 "이왕직 요구자"에 해당하는 이원은 대한제국 황제위 요구자이다. 한편 대한제국 황제위 요구자에는 전임자들 중 1명으로 '이해원'이 등재되어 있으나, 메이지 시대에 제정된 황실전범에서는 여성의 황위 계승을 인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해당 사례를 적용하여 이해원은 이왕직 요구자가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4.7.2. 리노이에 후작
관련 칭호 | 리노이에 후작 |
작위 요구자 | 이윤형 |
전임자 | 이병길 |
계승 실패 원인 | 1947년 귀족 작위 폐지 |
리노이에 후작은 리노이에 칸요로 창씨개명한 이완용이 일본 제국 수뇌부에 의해 조선귀족 후작이 되면서 생겨난 작위다. 1947년에 일본국 헌법이 제정됨에 따라 조선귀족을 포함한 일본 제국 귀족들이 작위를 잃으면서 리노이에 후작의 계보는 단절되었다. 비록 이완용 가문(舊 리노이에 가문)에서 공식적으로 리노이에 후작 칭호를 쓰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완용 가문에서 공식적으로 해당 칭호의 폐지를 인정한 것도 아니므로, 이론상으로는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이 명목상의 리노이에 후작이 된다.
이완용은 한국에서 매국노의 대명사이고 오늘날의 이완용 가문 또한 매국노의 후손으로 낙인찍혔으며, 일본 제국 시절에 이완용을 극진히 대했던 일본 또한 우경화 문제와 별개로 일본 제국 시절의 귀족 작위를 부활시키지는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완용 가문이 후작위를 되찾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애초에 리노이에 후작위를 포함한 조선귀족 작위 자체가 조선을 강제병합한 일본 제국 체제 하에서 존재하는 것이기에 리노이에 후작위 요구는 곧 일본 제국 부활 + 제2차 한일 강제합방을 염원하는 것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다.
4.7.3. 민영휘 가문 자작
관련 칭호 | 조선귀족 자작 |
작위 요구자 | 민덕기 |
계승 실패 원인 | 1947년 귀족 작위 폐지 |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민영휘는 일본 제국에 의해 조선귀족 자작이 되었다. 민영휘 가문은 명목상 조선귀족 자작위 요구자라고 볼 수 있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한국 대중의 냉혹한 인식 때문인지 그들 스스로도 공식적으로 조선귀족 자작위를 요구하지는 않고 있다.
[1]
현 도쿠가와 가문 수장은
도쿠가와 츠네나리이다.
[2]
단순한 칭호 또는 작위로서의 왕이 아니라, 한 나라의 최고 인물이자 주권자로서의 왕.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현 황실전범에서는 2대손까지만 친왕 칭호를 받을 수 있다.
[4]
현 시점에서 나루히토와 후미히토가 모두 죽거나 아버지 아키히토처럼 퇴위할 경우, 천황위 계승 자격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 히사히토밖에 없다. 만일 히사히토가 요절하기라도 하면 일본 황실은 말 그대로 대가 끊기는 셈이다.
[5]
에도 막부는 도요토미 가문을 멸문시키고 오사카 성주직을 폐지한 후 오사카를 막부의 직할지로 만들었다.
[6]
정확히는 그의 증조할아버지 세대부터 대대로 오다 노부나가의 후손을 자칭했다.
[7]
이는 에도 시대로 거슬러가서 설명해야 하는데 이유는 에도 막부가 카츠레카와 가문을 아시카가 가의 후계라는 이유로 석고가 5천석밖에 안 됨에도 10만석 격 다이묘 대우라는 우대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8]
당초에 일본국왕 칭호 자체가 막부가 먼저 칭하고 인가받은게 아니라 중국이 먼저 내려준 것이기에 현 중일관계를 고려하면 요구 자체로도 일본인들을 자극할 일이다.
[9]
에도 막부의 정이대장군은 봉건제의 영향으로 에도 성주 칭호를 따로 가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성주 칭호 자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시대 이전인 도요토미 정권 시절에 에도 성의 성주가 되면서 처음 생겨난 것이다.
[10]
다만,
덕혜옹주의 아들은 아니다.
소 다케유키는
조현병으로 투병 중인 덕혜옹주와 1955년에 합의이혼했고, 이후 재혼하여 후처와의 사이에서 소 타츠히토를 낳았다.
[11]
어차피 구 일본 제국의 오등작 제도를 그대로 부활시키는 것이라면 쇼씨 왕가의 숙원을 달성할 수 없다. 구 일본 제국의 오등작은 봉토가 없는 작위이기 때문에 쇼 마모루가 쇼타이처럼 후작에 봉해져도 류큐 지역의 명목상 지배자로 군림할 수 없다. 과거에 쇼인 남작과 쇼준 남작이 괜히 복번 운동을 한 게 아니다.
[12]
류큐가 오랫동안 식민지배를 받아서 그런지 오키나와 반환 당시에 이를 지지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도 중앙정부가 암암리에 후텐마 기지 같은 혐오시설을
오키나와에 처박아놓거나, 과거
일본 제국 시절부터 자기들을 수탈하거나
오키나와 전투같이 학살을 자행한 역사들을 부정하고있어 사회적 차별이 희석된 현대에서도 야마토 민족에 대한 악감정은 많이 존재한다.
[13]
쇼 마모루 본인도 이런 현실을 알고 있는지,
류큐 왕실 소유의 유물과 유적지의 대부분을
일본 정부와
오키나와현 현청에 기증했다.
[14]
이원의 큰아들.
[15]
애초에 이왕작 자체가 조선을 병합한 일본 제국 체제 하에서 존재하는 것이기에 이왕작 요구는 곧 일본 제국 부활 염원+
제2차 한일합방 염원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