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aa><colcolor=#373A3C> 소 다케유키 宗武志 | Sō Takeyu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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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8년 2월 16일 |
도쿄부
도쿄시 (現 도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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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5년 4월 22일 (향년 77세) |
배우자 |
덕혜옹주 (1930년 ~ 1953년, 이혼) 카츠무라 요시에 (1955년 결혼) |
자녀 |
장녀 소 마사에 (1932 ~ ?)[1] 장남 타츠히토 차녀 와키 차남 나카마사 |
학력 |
가쿠슈인
고등과 (졸업)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영문학 / 학사) |
경력 | 레이타쿠대학 영문과 교수 |
작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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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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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영문학자. 덕혜옹주의 전 배우자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사의 마지막 부마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덕혜옹주와 혼인할 당시에는 이미 대한제국이 멸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의 마지막 부마로 여겨지는 인물은 박영효이다.조선 왕조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으로는 의순공주와 결혼한 청나라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이후 2번째이다. 쓰시마 번주 소 가문의 35대 당주이자 영문학자 겸 시인으로서[3] 말년에는 레이타쿠대학 영문과 교수로 재직한 엘리트였다.
한국식 독음으로 종무지(宗武志)라고 읽는다.
2. 생애
2.1. 결혼 이전
쓰시마 번주 소(宗) 씨 가문의 후손으로, 소 씨는 쓰시마의 다이묘로서 메이지유신 이후 화족으로 편입되어 백작 가문이 되었다.[4] 임진왜란 당시 쓰시마 도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참전했던 소 요시토시가 바로 소 다케유키의 10대조다. 소 다케유키는 소 가문의 화족 시절의 마지막 당주로서 백작의 작위를 지녔다가 패전 이후 작위를 몰수당했다.아버지는 소 요리유키(宗和志), 어머니는 구로다 레이코(黑田鏻子, 1863~1925)이다. 요리유키는 처가인 구로다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어 '구로다 요리유키'로 성씨를 바꾸었고, 아들 다케유키도 본래 외가의 성씨를 따라 구로다 다케유키(黑田武志)라는 이름을 썼다. 그러나 소 가문의 대가 끊길 위기에 놓이자, 다케유키는 구로다에서 소로 성씨를 바꾸어 친가인 소 가문을 계승했다.
'이러한 성씨 문제도 다케유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을 안 좋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소수 있다. 일본에서야 성(姓)과 씨(氏)를 구분해 성과 달리 씨는 자기 편의대로 바꿀 수 있었고, 성씨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 별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번 가지고 태어난 성씨는 죽을 때까지 바꿀 수 없는 것이 철칙인 사회였다. 그러다 보니 소 씨에서 구로다, 다시 소 씨로 성이 바뀐 다케유키에 대해 '제 성씨도 멋대로 갈아치우는 근본도 모르는 왜놈' 정도로 미운털이 하나 더 박혔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그래도 다케유키 본인 입장에서는 조상이 쓰던 본래 성씨로 다시 돌아왔을 뿐이므로, 이러한 비판은 문화적인 차이에서 빚어진 오해이다.
친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데이메이 황후( 다이쇼 천황의 배우자이자 쇼와 천황의 어머니)의 오빠이자 공작(작위)인 쿠죠 미치자네(九条道實, 1870 ~ 1933)가 다케유키의 후견인이 되어주었다.
중학교까지는 쓰시마섬에서 마쳤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도쿄에서 마쳤다. 황족과 화족 전용 관립 학교인 가쿠슈인[5] 고등과와 일본 최고 명문인 도쿄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영어 작문과[6] 라틴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문학을 좋아했는지, 소 씨 당주와 백작 작위를 계승한 1923년 10월에 자신의 친구들과 문예 동인지를 만들고 그 이듬해에 시와 동시 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가쿠슈인 고등과 시절에는 평소 존경하던 하이쿠 시인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1885~1942)의 문하에 들어가는 기회를 얻었고, 1927년에 하쿠슈가 발행하던 시가 종합월간지 <근대풍경> 6월호에 다케유키의 자작시 <송림의 밤>이 실리기도 했다. 나중에 다케유키가 쓰시마섬 구전 민요를 모아 펴냈을 때도, 기타하라 하쿠슈가 추천사를 써주었다고 한다. #
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현재는 2020년까지 내부수리중) 입구에는 소 다케유키가 그린 '바닷가를 배경으로 하는 외로운 섬의 그림'이 있었는데, 어떤 승려는 이 그림을 보고 소 다케유키를 '자기 세계가 강한 고독하고 외골수적인 인간'이었을 것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
2.2. 덕혜옹주와의 정략결혼
1931년 덕혜옹주와 사실상 정략결혼을 했다. 일본인과의 사실상 강제결혼이기 때문인지, 결혼 사진을 보면 전날 울다 잠들어 덕혜옹주의 눈이 부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덕혜옹주의 올케 이방자 여사가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 따르면, 덕혜옹주는 이 결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
때문인지 일제강점기 당시엔 세간에 소 다케유키가 애꾸눈에 못생겼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사실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훤칠한 키와 외모를 가졌고, 도쿄제국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7] 이런 소문이 난 이유는 민족감정 + 귀천상혼으로 해석될 수 있는, 소 다케유키가 귀족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낮은 백작 신분이었기 때문인 듯 하다.[8] 당시 방계이긴 했지만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 궁가의 딸인 이방자와 영친왕이 혼인했던 것과 달리, 소 다케유키는 화족인 백작에 불과했다. 덕혜옹주의 신분이 화족보다 높으며, 황족보다 아래인 왕공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급이 낮은 결혼이었다.
사실은 소 가문의 특징 때문에 더 시선이 나빴던 면도 있다. 이 집안은 교토의 공가는커녕 옛날 왜구들의 섬이던 대마도의 주인으로 일본과 조선 사이 통신이나 전담하던 곳에 불과하기에 대한제국 황실에는 격이 맞지 않는 혼처였는데, 그런 집안에 옹주를 내어준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는 것.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는 결혼이 확정되고 나서, 결혼식 전에 사실상 얼굴 확인이나 다름없는 맞선을 보았다.
2.3. 덕혜옹주와의 관계
하지만 과거 알려져왔던 것과 달리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진 않았고, 소 다케유키는 오히려 아내를 신경 써주고 걱정하는 자상한 남편상에 가까웠다고 한다. 아내의 상태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한 것은 진심이었는지 아내를 향한 장문의 시를 남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1932년 8월 14일에 딸 마사에를 출산한 이후 덕혜옹주의 정신질환이 더 심해졌고, 다케유키와 주변인들은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 부족과 신분상의 이유 등으로 한동안 덕혜옹주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그저 안마사를 집에 불러 마사지만 받게 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의 의학 수준으로는 병원을 가도 딱히 해결책이 없고 "조선에서 온 옹주가 미쳤다"는 사회적 낙인만 찍혔을 확률도 있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이에 대해 덕혜옹주를 주제로 얘기한 역사저널 그날 116화에서 출연진들은 "당시 의학 기술 및 시대 상황을 고려해볼 때, 소 다케유키는 할 만큼 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2.4. 이혼
일제 패망 이후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그 와중에 1947년 5월 3일 신헌법에 따라 신분제가 폐지되자 지위를 잃고 평민이 되어 생활이 어려워졌고, 결혼 20여 년이 지난 1955년 이혼했다.[9] 다만 강제 이혼은 아니었고, 덕혜옹주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오빠 영친왕, 올케 이방자 부부와 합의하여 이혼했다. (일본 위키백과에는 덕혜옹주의 친가의 요청으로 인해 이혼했다고 나온다.)신헌법 시행으로 왕공족(조선왕가왕족)과 화족이 신분을 상실했고, 이후 10월 14일 일본 황실의 구황족 역시 대부분 막대한 경제적 손실로 인한 고충이 있었는데 바로 이혼한 것은 아니었고 이혼 전까지 막대한 병원비도 소 다케유키가 부담한 것으로 보아 그가 옹주와 사이가 안 좋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가 정말 옹주와 사이가 나빴고 박대했다면 막대한 병원비를 부담해내지도 않았을 것이고 훗날 한국으로 와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혼이 정략이었듯 이혼도 어느 정도 목적이 있어 보인다. 덕혜는 정신질환도 그렇고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둘 사이에는 딸 하나만 있었다. 소 가문의 당주로 가문을 이어야 했으므로 소 다케유키는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카츠무라 요시에(勝村良江)라는 일본 여성과 재혼하였고, 이후 치바현으로 이주했다. 장남 타츠히토(立人), 차녀 와키(和木), 차남 나카마사(中正)의 2남 1녀를 더 낳았다. 장녀인 마사에까지 합치면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2.5. 딸 정혜의 행방불명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은 정혜( 正 惠)로, 바를 정(正)과 덕혜의 은혜 혜(惠)로 지었으며 일본식 발음으로는 마사에였다. 그러나 덕혜옹주가 병이 있다 보니 딸의 육아는 다케유키 본인이 많이 한 듯하다. 다케유키가 정혜를 데리고 조선 왕실 행사에 참여하고, 직접 정혜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그러나 마사에는 항상 병들어 있어 자신을 챙겨주지 못하는 어머니 덕혜옹주에게 그닥 정을 느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학교 친구들에게 따돌림까지 당하면서 덕혜옹주를 격하게 원망하여 모녀간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다고 한다.
마사에는 여자가쿠슈인을 졸업한 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 동문인 스즈키 노보루(鈴木昇)와 결혼했다. 결혼 후로도 마사에는 남편의 성씨를 따르지 않았고, 대신 노보루가 처가의 성씨를 따라 '스즈키'에서 '소'로 성을 바꾸었다. 이는 장인 다케유키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덕혜옹주와 다케유키가 이혼하고 약 1년 후인 1956년, 갓 결혼한 24살의 새댁이었던 마사에는 갑작스레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유서에 의하면 야마나시현과 나가노현을 경계로 하는 고마가타케 산에 자살하러 간다고 했는데, 사실인지는 불명. 현해탄( 대한해협)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신뢰할 만한 근거는 없다. 분명한 건 이후 마사에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다케유키는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끝내 장녀 마사에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다. 다케유키 사후 마사에의 이해 관계인에 의하여 일본 민법 제30조 조항에 따라 마사에의 실종신고 후 7년이 경과할 때까지 그 어떠한 생존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종선고가 성립되어 사망 처리되었다.
아마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와 이혼 후 재혼하여 낳은 마사에의 이복 동생들이 실종선고를 청구한 것으로 보인다.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고, 아버지도 죽은 마당에 수십년간 실종 상태에 있었던 이복 누나 / 언니를 위해 호적을 한도 끝도 없이 그대로 두기에는 상속 문제도 걸려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원만한 법적 해결을 위하여 결단한 부득이한 조치였을 것이다.
마사에(정혜)의 실종 이후 수색대의 노력에도 마사에의 생사를 알 수 없자 부재자의 상태로 노보루와의 이혼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 남편이 된 노보루가 2007년 4월 발표한 시집에 의하면, 실종 후 50년 가까이 경과한 시점에서야 사체가 발견되었고, 유품인 수첩으로 신원을 특정하여 마사에의 사망이 실체적으로 확인된 것으로 보인다.
기억의 모든 것(手帳), 소 노보루(宗昇)[10]
가끔은 여기 온천에 나갔다 오지 않겠어요?
(たまにはここの鉱泉に出かけてきませんか)
지금 마을은 일제히 신록의 싹이 트고 있습니다.
(いま里はいっせいに新緑の芽吹き.)
그 싹이 능선을 넘어 산은 하루하루 그 모습을 바꾸고 있습니다.
(その芽吹きが尾根を走り, 山はいちにちいちにちその相貌を変えていきます.)
많은 눈도 녹아서 정상 근처에 조금 남아 있을 뿐이고 두릅나무의 새싹도 지금이 가장 맛있을 때입니다.
(沢の雪もとけて頂上ちかくにわずかに残っているだけで ほどなく山開きになりましょう。たらの木の芽もいまがいちばん美味しいときです。)
이제 산천의 소식은 신록의 향으로 열릴 때가 되어갑니다.
(たよりは新緑の匂いにあふれていた。)
골짜기에는 3개의 큰 폭포가 있는데 산꼭대기에 가까운 G폭포에서 등산로를 지나 200m 북쪽으로 들어간 곳에서 그것은 발견되었습니다.
(沢には三つの大きい滝がかかっているが 山頂にちかいG滝から登山道をそれて二百数十メートル北にはいった所でそれは発見された。)
산막에서 버섯 따기에 열중한 사람들이 산 속 깊이 있을 때였습니다.
(山小屋の使用人が茸狩りに深く分け入ったときだった。)
그들은 그 때 버섯의 형상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そのときそこにどんな茸を見たのだろう。)
덮고 있는 흙을 걷어내자 구덩이에 등을 기대고 발을 내던진 형태로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覆っている土を取りのぞくと窪地に背をもたせ足を投げだしたかたちですわっていたという。)
소식이 끊어진지 반 세기가 지나고 있을 무렵, 그 구덩이에도 신록의 향이 가득할까요?
(消息を絶ってから半世紀がたっていた。その窪地にもいまは新緑がざわめいているだろうか。)
먹고 살아온 만큼의 시간을 제하면 이제 나의 삶은 그 10분의 1도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食べて生きてきただけの時間を差し引いたらわたしの生はその十分の一も残るまい。)
그 혼자만의 시간 동안 당신이 등을 기대고 발을 내던진 형태로 앉아 있던 모습 속에서 반세기 동안 나 역시 같은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そのひとりだけの時間にはいつもその時々の何ものかに背をもたせ足を投げだして半世紀 わたしもまた同じ闇をみつめていただけなのかもしれない。)
우리는 대개 서로의 시간만을 맞춰서 살아왔기에 되돌아보면 그런 기억만 있었다는 것이 떠오릅니다.
(わたしたちはたがいの時間を食いあいながらでしか生きてこられなかったのだろう。振りかえってみてもそんなものだったという記憶ばかりが想起されてくる。)
진열된 유품 속에 수첩이 있었습니다.
(並べられた遺品のなかに手帳があった。)
구덩이에 기대어 더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계속 쓰고 있었을 겁니다.
(窪地にもたれて目が見えなくなるまで書き続けていたのだろう。)
수첩의 페이지마다 잔글씨로 채워져 있었지만 잉크가 완전히 번져버려서 한 글자도 판독할 수 없었습니다.
(どのページも細かな文字で埋められていたが インクがすっかりにじんでしまって一字も判読できない。)
게다가 반쯤 흙으로 변해 붙어 있는 페이지를 억지로 넘기면 희미하게 흙집 냄새마저 나면서 무너질 뿐이었습니다.
(その上半ば土に化して貼りついているページを無理にめくれば かすかに土くれの匂いさえして崩れてしまうばかり。)
거의 반세기 동안 수첩 한 권 안에 갇혀 있던 어둠은 끝내 판독불능의 결과만 남긴 채 밝은 회의실 책상 위로 주르륵 쏟아집니다.
(ほぼ半世紀のあいだ手帳一冊のなかに閉じ込められていた闇は ついに判読不能のまま 明るい会議室の机の上にぽろぽろとこぼれていった。)
가끔은 여기 온천에 나갔다 오지 않겠어요?
(たまにはここの鉱泉に出かけてきませんか)
지금 마을은 일제히 신록의 싹이 트고 있습니다.
(いま里はいっせいに新緑の芽吹き.)
그 싹이 능선을 넘어 산은 하루하루 그 모습을 바꾸고 있습니다.
(その芽吹きが尾根を走り, 山はいちにちいちにちその相貌を変えていきます.)
많은 눈도 녹아서 정상 근처에 조금 남아 있을 뿐이고 두릅나무의 새싹도 지금이 가장 맛있을 때입니다.
(沢の雪もとけて頂上ちかくにわずかに残っているだけで ほどなく山開きになりましょう。たらの木の芽もいまがいちばん美味しいときです。)
이제 산천의 소식은 신록의 향으로 열릴 때가 되어갑니다.
(たよりは新緑の匂いにあふれていた。)
골짜기에는 3개의 큰 폭포가 있는데 산꼭대기에 가까운 G폭포에서 등산로를 지나 200m 북쪽으로 들어간 곳에서 그것은 발견되었습니다.
(沢には三つの大きい滝がかかっているが 山頂にちかいG滝から登山道をそれて二百数十メートル北にはいった所でそれは発見された。)
산막에서 버섯 따기에 열중한 사람들이 산 속 깊이 있을 때였습니다.
(山小屋の使用人が茸狩りに深く分け入ったときだった。)
그들은 그 때 버섯의 형상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そのときそこにどんな茸を見たのだろう。)
덮고 있는 흙을 걷어내자 구덩이에 등을 기대고 발을 내던진 형태로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覆っている土を取りのぞくと窪地に背をもたせ足を投げだしたかたちですわっていたという。)
소식이 끊어진지 반 세기가 지나고 있을 무렵, 그 구덩이에도 신록의 향이 가득할까요?
(消息を絶ってから半世紀がたっていた。その窪地にもいまは新緑がざわめいているだろうか。)
먹고 살아온 만큼의 시간을 제하면 이제 나의 삶은 그 10분의 1도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食べて生きてきただけの時間を差し引いたらわたしの生はその十分の一も残るまい。)
그 혼자만의 시간 동안 당신이 등을 기대고 발을 내던진 형태로 앉아 있던 모습 속에서 반세기 동안 나 역시 같은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そのひとりだけの時間にはいつもその時々の何ものかに背をもたせ足を投げだして半世紀 わたしもまた同じ闇をみつめていただけなのかもしれない。)
우리는 대개 서로의 시간만을 맞춰서 살아왔기에 되돌아보면 그런 기억만 있었다는 것이 떠오릅니다.
(わたしたちはたがいの時間を食いあいながらでしか生きてこられなかったのだろう。振りかえってみてもそんなものだったという記憶ばかりが想起されてくる。)
진열된 유품 속에 수첩이 있었습니다.
(並べられた遺品のなかに手帳があった。)
구덩이에 기대어 더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계속 쓰고 있었을 겁니다.
(窪地にもたれて目が見えなくなるまで書き続けていたのだろう。)
수첩의 페이지마다 잔글씨로 채워져 있었지만 잉크가 완전히 번져버려서 한 글자도 판독할 수 없었습니다.
(どのページも細かな文字で埋められていたが インクがすっかりにじんでしまって一字も判読できない。)
게다가 반쯤 흙으로 변해 붙어 있는 페이지를 억지로 넘기면 희미하게 흙집 냄새마저 나면서 무너질 뿐이었습니다.
(その上半ば土に化して貼りついているページを無理にめくれば かすかに土くれの匂いさえして崩れてしまうばかり。)
거의 반세기 동안 수첩 한 권 안에 갇혀 있던 어둠은 끝내 판독불능의 결과만 남긴 채 밝은 회의실 책상 위로 주르륵 쏟아집니다.
(ほぼ半世紀のあいだ手帳一冊のなかに閉じ込められていた闇は ついに判読不能のまま 明るい会議室の机の上にぽろぽろとこぼれていった。)
2.6. 이후
1972년에 덕혜옹주를 만나러 한국에 찾아왔지만 만나지 못했다. '한국사 전(傳)'에서 밝히기로는 당시 창덕궁 낙선재의 비서실장이었던 이공재 앞에 소 다케유키가 찾아와 아내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는데, 이공재는 "만나봤자 할 얘기도 없고, 꼭 만나야 할 이유도 없다.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옛날 생각이 나서 오히려 병세가 더 악화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당신 같은 사람한테는 면회를 일절 허용치 않으니 돌아가시오."라고 문전박대했다고 한다.[11]그 뒤 치바현에 머무르면서 레이타쿠대학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1985년 사망, 쓰시마섬에 있는 역대 쓰시마 다이묘 선친들의 묘지인 반쇼인(滿松院)에 함께 안장되었다. 이 묘원 반쇼인은 이즈하라 항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한국에서 보기 힘든 거목이 즐비하고 조선 국왕이 하사한 물건이 전시되어 있는 등, 대마도에서 그나마 역사적인 볼거리라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가는 곳이다.
파일:external/blogs.c.yimg.jp/img_12?1385743452.jpg
말년의 소 다케유키.
3. 평가
소 다케유키의 개인적인 인물됨은 그와 관련된 자료가 거의 없어 사실 정확히 평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얼마 없는 사료들을 조합해보면, 적어도 됨됨이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결혼 전부터 있던 덕혜옹주의 정신질환 증세가 출산 후 더 심해졌음에도 결혼생활을 유지하려고 애를 쓴 정황이 보인다.아내를 동정했는지 <환상 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며>라는 장문의 시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황족과의 결혼으로 상당한 지참금을 받아 부유한 생활을 누리다 신분제 폐지 이후 재산을 몰수당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덕혜옹주의 정신병원 입원 및 이혼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해도 좋은 남편이라고 보기도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이 부분도 위의 정신질환 관련 내용과 더불어 참작해볼 여지는 있다. 신분제 폐지 이후 집안 하인의 숫자가 수십 명에서 단 1명으로 감소했기 때문에 사실상 정신질환자를 수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병자와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진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당장 전두엽 절제술 같은 막장스런 방법이 획기적인 치료법이랍시고 떠들어지던 시대에, 완치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현대에 와서도 아내가 미쳤다고 가정한다면 수발 들다 본인조차 피폐해져 이혼을 고려할 충분한 현실적 사유가 될 판국에, 정신질환에 대한 병명조차 생소하던 당시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위해서 그래도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한거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이다. 정신질환이 아니라도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있고, 병든 자식을 돌보다가 가족 자체가 해체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육체적인 병에 비해 정신질환이나 치매가 심각한 상황이라면 환자와 제대로 된 소통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환자가 극렬히 치료를 거부하면서 가족들에게 가정폭력을 저지르거나 하는 일도 있기 때문에 부부는 물론이고 부모자식 간에도 관계가 파탄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충분히 입원치료가 가능한 2020년에도 23년간 조현병을 앓는 딸을 돌봐오다 결국 어머니가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 하물며 1930-40년대에 그래도 아내를 내치거나 숨겨두지 않고 이만큼이라도 했다는 것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 아예 없고서는 있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신분제 폐지 이후 바로 이혼한 것도 아니었고 1955년에 가서야 합의 이혼을 했다.[12] 물론 이혼하고 얼마 안 가서 재혼한 모습에 대해서는 각자 판단에 맡겨야겠지만 사실상 10년 가까이 별거 상태였던데다가,[13] 이혼 당시 자식이라고는 딸 마사에 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48세였던 소 다케유키가 재혼을 서두른 것은 쓰시마 종가의 당주로서 대를 잇기 위함도 어느 정도는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봉건적 관념이 강한 동북아시아에서는 막 아내와 이혼하거나 사별한 남성에게 재혼을 강요하는 일이 아직도 많다. 이런 낡은 관념이 여전히 지배적이던 1950년대인데다, 귀족 집안의 자제인 다케유키는 그 압박을 더 심하게 받았을 터였다. 봉건적 관념이 상대적으로 덜한 서유럽 같으면 전근대부터 귀천상혼으로 당주직 계승권이 먼 방계로 넘어가는 일도 잦았던 만큼 먼 친척을 후계자로 삼으면 될 일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소 다케유키의 조국인 일본은 21세기 기준으로도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남북한과 중화권보다도 더욱 강하게 남아 있는 나라다. 당장에 다케유키 자신부터 친가가 대가 끊겨서 그 대를 잇기 위해 성을 바꿨고, 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 가문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2차대전 이후 소리소문 없이 끊긴 가문들이 꽤 된다.
한편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도 남기지 않았으며, 평소에도 입에 일절 올리지 않아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에 대해 뭐라 했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증언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만년의 수필에서 "25년은 내 인생의 공백기였다"라고 짧게 언급했을 뿐이다. 당시 소 다케유키에게는 덕혜옹주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꽤나 공허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아내를 안타까워해서 시를 쓰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덕혜옹주를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한번 찾아왔던 것도 생각해보면, 소 다케유키도 마음 한켠에는 덕혜옹주를 안고 사는 인생이었을 것이다. 어찌됐든 연을 맺었던 부부였으니까.
만약 정혜가 요절하지 않고 더 나아가 결혼하여 자식을 얻었다면 소 다케유키는 정혜에게 쓰시마 소 가문 당주직을 물려줬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정혜는 여성인 만큼, 남성에게 가문을 계승시키는 일본의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딸 정혜가 아니라 정혜의 남편 스즈키 노보루를 데릴사위로 삼아 당주직을 물려주는 식으로. 마침 노보루는 이미 장인인 소 다케유키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성씨를 소씨로 바꾸기도 했고.
하지만 정혜가 자살한 것이 거의 확실해졌고 손주도 없으니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현재 소 가문의 당주는 다케유키가 재혼하여 낳은 다츠히토이며, 스즈키 노보루와의 관계는 어느 시점에서 정리된 듯하다.
덕혜옹주와 신장 차이가 매우 컸다.
4. 대중 매체에서
여러 사료와 정황으로 보아 실제로는 개인적인 성품이 악하진 않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기도 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보니 부정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1995년작 연극 <덕혜옹주>에선 배우 한명구가, 1996년 MBC에서 8.15 광복 특집극으로 방영했던 <덕혜-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에선 정승호가 각각 연기한 바 있다.2016년에 나온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배우 김재욱이 분했다. 이전보단 묘사가 나아져서 결혼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는 덕혜를 위해 조선식으로 식단을 준비하라고 하고, 옆에 앉아 다정히 말을 건네주는 모습도 나온다. 이후 작중 늙어 재혼한 뒤 자신의 집으로 덕혜를 찾아온 김장한[14]과 몸싸움을 벌이지만, 결국 서로의 처지를 알게 되고 "나는 덕혜를 버리지 않았다. 내 딸 정혜는 내가 덕혜와 이혼한 뒤에 자살했다"며 눈물을 흘린다.
[1]
덕혜옹주와 사이에서 낳은 딸로,
1956년 8월 26일에 자살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행방불명이 되었다.
[폐지]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후
화족(
귀족) 제도를 폐지했다.
[3]
본인의 시집도 있고,
쓰시마섬 전래 구전 민요를 모은 저서도 있다.
[4]
원칙상으로는
고쿠다카 기준으로는
자작이었으나 조선과의 외교를 맡아 온 특수성을 감안하여 메이지 정부가 1등급 높여주었던 것.
[5]
패전 후로는
사립학교로 전환되었고 평민에게도 개방되었으나, 여전히
부유하고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들이 다닌다고. 일본의 명문 사립학교들이 대개 그러하듯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전 과정을 갖추고 있으며,
한 번 입학하면 별도의 수험 없이 상급학교로 진학할 수 있다.
[6]
나가사키현에서 주최한 중학생
영어 웅변대회에 나가서 우승한 적도 있다.
[7]
다만
사시였는데, 애꾸눈이라는 소문도 여기서 비롯된 듯 하다.
[8]
소 가문은
다이묘로써 2만 석에도 미치지 않는 수준이었기에 원칙적으로는 더 낮은
자작에 봉해져야 했지만, 대대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해왔다는 점이 감안되어
백작으로 봉해졌다고 한다.
[9]
시기는 사실 여러 설이 있는데,
이방자 여사가 회고록에 1955년으로 기록했으므로 이 해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10]
#
[11]
신병주 교수에 따르면
덕혜옹주 자신이 다케유키를 만나기를 거부했다는 얘기도 있다.(출처: 조선평전)
[12]
덕혜옹주는 의사 표현이 불가능했기에 오빠
영친왕, 올케
이방자 여사가 후견인으로서 이혼 합의를 해주었다.
[13]
이 별거도 사이가 나빠서 한 게 아니라 당시의 정신질환의 치료 방식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4]
영화는 각색이고, 덕혜옹주를 찾으러 뛰어다닌 실제 인물은 김장한의 형
김을한 기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