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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쿠라 도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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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색 칸
검은색 칸
}}}
및 🎎 표시: 생전 서위
}}}
(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720년 11월 27일
724년
737년 8월 25일
(화력 서위일 불명)
요로 4년 10월 23일
진키 원년
덴표 9년 7월 25일
( 고세노 도코타) 후지와라노 후히토 🎎 후지와라노 미야코 🎎 후지와라노 무치마로
737년 11월 3일
749년 5월 4일
760년 9월 20일
762년 2월 28일
덴표 9년 10월 7일
덴표칸포 원년 4월 14일
덴표호지 4년 8월 7일
덴표호지 6년 2월 1일
후지와라노 후사사키 🎎 타치바나노 모로에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 🎎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770년 10월 23일
785년 6월 14일
785년 10월 31일
788년 6월 21일
호키 원년 10월 1일
엔랴쿠 4년 5월 3일
엔랴쿠 4년 9월 24일
엔랴쿠 7년 5월 13일
🎎 후지와라노 나가테 기노 모로히토 후지와라노 다네츠구 후지와라노 다비코
791년 1월
791년 1월
806년 6월
806년 6월
엔랴쿠 9년 12월
엔랴쿠 9년 12월
다이도 원년 6월
다이도 원년 6월
야마토노 오토츠구 하지노 마이모 후지와라노 요시츠구 아베노 고미나
819년 1월 18일
823년 6월 17일
823년 6월 17일
826년 9월 1일
고닌 9년 12월 19일
고닌 14년 5월 6일
고닌 14년 5월 6일
덴초 3년 7월 26일
후지와라노 소노히토 후지와라노 모모카와 후지와라노 모로아네 후지와라노 후유츠구
833년
833년
847년 11월 16일
848년 1월 28일
덴초 10년
덴초 10년
조와 14년 10월 5일
조와 14년 12월 19일
다치바나노 기요토모 다구치노 미치히메 다치바나노 나라마로 다치바나노 우지키미
850년 9월
854년 10월 28일
858년
867년 11월 9일
가쇼(嘉祥) 3년 8월
닌주 4년 10월 4일
덴난 2년
조간 9년 10월 10일
후지와라노 미츠코 미나모토노 도키와 미나모토노 기요히메 후지와라노 요시미
869년 4월
872년 10월 9일
877년 1월
877년 1월
조간 11년 3월
조간 14년 9월 4일
조간 19년 1월
조간 19년 1월
미나모토노 마코토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후지와라노 나가라 후지와라노 오토하루
884년 3월 23일
884년 3월 23일
891년 2월 24일
895년 9월 20일
간교 8년 2월 23일
간교 8년 2월 23일
간표 3년 1월 13일
간표 7년 8월 28일
후지와라노 후사츠구 후지와라노 가즈코 후지와라노 모토츠네 미나모토노 토오루
897년 7월 19일
898년 1월 3일
900년 4월 15일
906년 6월 24일
간표 9년 6월 16일
간표 9년 12월 7일
쇼타이 3년 3월 14일
엔기 6년 5월 30일
미나모토노 요시아리 소시 여왕 후지와라노 다카후지 후지와라노 슈쿠시
907년
909년 4월 27일
913년 4월 27일
937년 11월
엔기 7년
엔기 9년 4월 5일
엔기 13년 3월 18일
조헤이 7년 10월
미야지노 렛시 후지와라노 도키히라 미나모토노 히카루 후지와라노 미츠코
949년 9월 13일
949년 9월 13일
962년 11월 17일
967년
덴랴쿠 3년 8월 18일
덴랴쿠 3년 8월 18일
오와 2년 10월 18일
고호 4년
후지와라노 다다히라 미나모토노 쇼시 후지와라노 기시 후지와라노 세이시
969년 12월 2일
970년 6월 26일
972년 12월 13일
978년 1월 1일
안나 2년 10월 20일
덴로쿠 원년 5월 20일
덴로쿠 3년 11월 5일
조겐(貞元) 2년 11월 20일
후지와라노 모로타다 후지와라노 사네요리 후지와라노 고레타다 후지와라노 가네미치
987년 3월
989년 8월 23일
992년 7월 18일
993년 6월 12일
간나 3년 2월
에이엔 3년 7월 20일
쇼랴쿠 3년 6월 16일
쇼랴쿠 4년 5월 20일
후지와라노 도키히메 후지와라노 요리타다 후지와라노 다메미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993년 8월 19일
995년 6월 25일
995년 6월 25일
1025년 9월 23일
쇼랴쿠 4년 7월 29일
조토쿠 원년 5월 25일
조토쿠 원년 5월 25일
만주 2년 8월 29일
미나모토노 마사자네 후지와라노 미치카네 미나모토노 시게노부 후지와라노 기시
1029년 11월 25일
1073년 6월
1073년 6월
1075년 11월 16일
조겐(長元) 2년 10월 17일
엔큐 5년 5월
엔큐 5년 5월
조호 2년 10월 6일
후지와라노 긴스에 후지와라노 요시노부 후지와라노 시시 후지와라노 노리미치
(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1094년
1107년
1146년 11월 9일
(화력 서위일 불명)
가호 원년
가쇼(嘉承) 2년
규안 2년 10월 4일
후지와라노 요시나가 후지와라노 아키후사 후지와라노 사네스에 후지와라노 나가자네
1146년 11월 9일
1166년 9월 8일
1168년 7월
1168년 7월
규안 2년 10월 4일
에이만 2년 8월 12일
닌난 3년 6월
닌난 3년 6월
🎎 미나모토노 마사코 고노에 모토자네 다이라노 도키노부 후지와라노 유시
1177년 8월 28일
1190년 5월
1220년
1242년
지쇼 원년 8월 3일
겐큐 원년 4월
조큐 2년
닌지 3년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후지와라노 규시 다이라노 지카노리 미나모토노 미치무네
1617년 4월 14일
1628년 7월
1632년 3월 30일
1651년 7월 4일
겐나 3년 3월 9일
간에이 5년 7월
간에이 9년 2월 10일
게이안 4년 5월 17일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고노츠보네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미츠
1680년 6월 17일
1709년 3월 4일
1709년 10월 9일
1712년 12월 1일
엔호 8년 5월 21일
호에이 6년 1월 23일
호에이 6년 9월 7일
쇼토쿠 2년 11월 3일
도쿠가와 이에츠나 도쿠가와 츠나요시 도쿠가와 츠나시게 도쿠가와 이에노부
1716년 7월 1일
1752년 7월 20일
1761년 8월 24일
1786년 10월 13일
쇼토쿠 6년 5월 12일
호레키 2년 6월 10일
호레키 11년 7월 24일
덴메이 6년 9월 22일
도쿠가와 이에츠구 도쿠가와 요시무네 도쿠가와 이에시게 도쿠가와 이에하루
1841년 4월 8일
1848년 8월 7일
1853년 9월 23일
1858년 8월 29일
덴포 12년 2월 17일
가에이 원년 7월 9일
가에이 6년 8월 21일
안세이 5년 7월 21일
도쿠가와 이에나리 도쿠가와 이에모토 도쿠가와 이에요시 도쿠가와 이에사다
1866년 8월 29일
1880년 7월 20일
1882년 8월 7일
1885년 7월 20일
게이오 2년 7월 20일
메이지 13년 동월 동일
메이지 15년 동월 동일
메이지 18년 동월 동일
도쿠가와 이에모치 구스노키 마사시게 닛타 요시사다 이와쿠라 도모미
1891년 2월 18일
1898년 3월 18일
1899년 9월 26일
1900년 11월 16일
메이지 24년 동월 동일
메이지 31년 동월 동일
메이지 32년 동월 동일
메이지 33년 동월 동일
🎎 산조 사네토미 와케노 키요마로 산조 사네츠무 도쿠가와 미츠쿠니
1901년 5월 16일
1901년 5월 16일
1903년 6월 27일
1904년 3월 17일
메이지 34년 동월 동일
메이지 34년 동월 동일
메이지 36년 동월 동일
메이지 37년 동월 동일
시마즈 나리아키라 모리 다카치카 도쿠가와 나리아키 고노에 다다히로
1908년 4월 2일
1908년 9월 9일
1915년 8월 18일
1917년 11월 17일
메이지 41년 동월 동일
메이지 41년 동월 동일
다이쇼 4년 동월 동일
다이쇼 6년 동월 동일
모리 모토나리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 }}}}}}}}}}}}


유신십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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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고마쓰 다테와키 오무라 마스지로 기도 다카요시
마에바라 잇세이 히로사와 사네오미 에토 신페이 요코이 쇼난 이와쿠라 도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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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경 (1869년~1879년) · 외무사무총재 (1873년)
초대
사와 노부요시
2대
이와쿠라 도모미
3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4대
데라시마 무네노리
5대
이노우에 가오루
전전 외무대신 (1885년~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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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이노우에 가오루
6대
이토 히로부미
7대
오쿠마 시게노부
8대
아오키 슈조
9대
에노모토 다케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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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무쓰 무네미쓰
11대
사이온지 긴모치
12대
오쿠마 시게노부
13대
니시 토쿠지로
14대
오쿠마 시게노부
15대
아오키 슈조
16대
가토 다카아키
17대
소네 아라스케
18대
코무라 주타로
19대
가토 다카아키
20대
사이온지 긴모치
21대
하야시 타다스
22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3대
코무라 주타로
24대
우치다 고사이
25대
가쓰라 다로
26대
가토 다카아키
27대
마키노 노부아키
28대
가토 다카아키
29대
오쿠마 시게노부
30대
이시이 키쿠지로
3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32대
모토노 이치로
33대
고토 신페이
34대
우치다 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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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우치다 고사이
35대
야마모토 곤노효에
36대
이주인 히코키치
37대
마츠이 케이시로
38대
시데하라 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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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다나카 기이치
40대
시데하라 기주로
41대
이누카이 쓰요시
42대
요시자와 겐키치
43대
사이토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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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대
우치다 고사이
45대
히로타 고키
46대
아리타 하치로
47대
하야시 센주로
48대
사토 나오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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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
히로타 고키
50대
우가키 가즈시게
51대
고노에 후미마로
52대
아리타 하치로
53대
아베 노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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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대
노무라 기치사부로
55대
아리타 하치로
56대
마츠오카 요스케
57대
토요다 테이지로
58대
도고 시게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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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대
도조 히데키
60대
타니 마사유키
61대
시게미쓰 마모루
62대
스즈키 간타로
63대
도고 시게노리
전후 외무대신 (1945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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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대
시게미쓰 마모루
65대
요시다 시게루
66대
가타야마 데쓰
67·68대
아시다 히토시
69·70·71대
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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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3·74대
오카자키 카츠오
75·76·77대
시게미쓰 마모루
78대
이시바시 단잔
79·80대
기시 노부스케
81·82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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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4대
고사카 젠타로
85·86대
오히라 마사요시
87·8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89·90대
미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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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대
사토 에이사쿠
92·93대
아이치 기이치
94대
후쿠다 다케오
95·96대
오히라 마사요시
97대
키무라 토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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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대
미야자와 기이치
99대
고사카 젠타로
100대
하토야마 이이치로
101·102대
소노다 스나오
103대
오키타 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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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대
이토 마사요시
105대
소노다 스나오
106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107·108대
아베 신타로
109대
쿠라나리 타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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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대
우노 소스케
111대
미쓰즈카 히로시
112대
나카야마 타로
113·114대
와타나베 미치오
115대
무토 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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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대
하타 쓰토무
117대
가키자와 고지
118대
고노 요헤이
119·120대
이케다 유키히코
121대
오부치 게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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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대
고무라 마사히코
123·124·125대
고노 요헤이
126대
다나카 마키코
12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128·129대
카와구치 요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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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31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2·133대
아소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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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무라 노부타카
135대
고무라 마사히코
136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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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3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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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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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노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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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후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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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엔의 도안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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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토쿠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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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토미노 카마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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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와라노 미치자네
(5엔)
와케노 키요마로
(10엔)
쇼토쿠 태자
(100엔)
후지와라노 카마타리
(200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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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미야 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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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토쿠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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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미야 손토쿠
(1엔)
쇼토쿠 태자
(100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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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고레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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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가키 다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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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쿠라 도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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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고레키요
(50엔)
이타가키 다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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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토쿠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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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토쿠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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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쿠라 도모미
(500엔)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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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사키 시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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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토베 이나조|]] [[후쿠자와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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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2대 외무경
일본 제국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
岩倉具視 | Iwakura Tomomi
파일:Iwakura_tomomi.jpg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출생 1825년 10월 26일
야마시로국 교토
(現 교토부 교토시)
사망 1883년 7월 20일 (향년 57세)
교토부 교토시
재임기간 제2대 외무경
1871년 8월 29일 ~ 1871년 12월 15일
우대신
1871년 11월 20일 ~ 1883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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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아명 가네마루(周丸)
법명 유잔(友山)[1]
아호 다이가쿠(対岳)
신체 160cm[2]
부모 양부 도모야스
생부 호리카와 야스치카
배우자 전처 세이코
후처 마키코
자녀 장남 도모요시
장녀 마스코
차남 도모사다
차녀 이토코
삼남 도모츠네
삼녀 토다 키와코
사남 미치토모
사녀 하루코
오녀 요시다 야스코
육녀 모리 히로코
주요 업적 메이지 유신
이와쿠라 사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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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생애
2.1. 초기2.2. 개혁2.3. 메이지 유신2.4. 사망
3. 평가4. 여담

[clearfix]

1. 소개

파일:Sasa_Rindō_inverted.png
이와쿠라 가문
일본 공가(公家) 귀족, 정치인. 유신십걸(維新の十傑)[3] 중 한 명이며, 이와쿠라 사절단의 대표로서도 저명하다.

2. 생애

2.1. 초기

호리카와 야스치카(堀河康親, 1797 ~ 1859)의 차남으로 현재의 교토부 교토시에서 출생하였다. 귀족인 공가 출신이었으나, 행색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어린 시절은 유학을 배웠으며, 1838년 8월 8일, 이와쿠라 토모야스(岩倉具慶, 1807 ~ 1873)의 양자가 되어 "도모미"라는 이름을 썼다. 10월 28일에는 작위를 수여받아, 궁중에 등록하고 이듬해 출사하게 되었다.

호리카와()는 후지와라 북가(家) 타카쿠라류()로, 히구치(樋口)도 여기에 속하며, 이와쿠라(岩倉)는 호리카와처럼 우림가에 속한 무라카미 천황()의 후손인 무라카미 겐지(村上)에 속하는 가문으로 청화가(清華家)의 분가다.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전상( 殿)에 오르는 것이 허락된 공가 중에서 우림가()에 속하던 가문으로, 섭가(家)-청화가(家)-대신가(家) 다음 가는 4번째 서열이자 명가(名家)와는 동렬이고, 반가(家)보다 위였다. 그 이하의 지하가는 전상에 오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하급 귀족이다. 정작 이들의 본가인 타카쿠라()는 이들보다 격이 낮은 반가에 속했다.

대신(大臣) 다음인 대납언()까지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공경(公) 중에서는 아래지만, 귀족 전체로서는 상위에 속한다. 하지만 이것은 형식적인 벼슬직의 이야기고, 하위 공가는 막부 시대 이후로 실권과 경제력을 잃으면서 유신 이후에는 웬만한 다이묘보다 밑의 작위를 받는 경우가 많았고, 호리카와와 이와쿠라도 마찬가지로 자작가에 속했다.

이와쿠라 가문은 하급 공가였기 때문에 그렇게 유복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사실 막부 말기까지 덴노나 공가가 풍족하지 못한 것은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막부가 일본의 유일한 군주 대접을 해주고 해마다 막부가 있는 에도에 덴노의 이름으로 칙사를 보내는 등 나름 예우도 받았다고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고, 덴노(天皇)나 공가(公家)들은 무로마치 막부 이래로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려 황실 보물들을 교토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4] 공가 인물들은 부업으로 꽃꽂이나 다도, 고서 필사 등을 하면서 돈을 벌었고, 심지어 귀족들의 집은 검문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의 저택을 도박장으로 빌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2.2. 개혁

1853년, 관백이었던 타카츠카사 마사미치(鷹司政通, 1789 ~ 1868)의 유파로 들어가게 되면서, 조정에 대한 발언권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조정개혁의 의견서를 제출하여 가쿠슈인의 확대, 인재육성과 실력주의에 의한 등용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일수호통상조약이 큰 정치 이슈가 되자, 여기에 반발하여 공가 인사 88명의 반조약체결파를 집결하여 관백 구조 히사타다(九条尚忠)에게 항의하는 사건을 일으킨다.(88공경 사건; 1858년 3월 12일) 고메이 덴노는 이에, 어느 정도 호응하여 미일수호통상조약 비준이 늦춰지게 되었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여기에서 첫 정치적인 승리를 얻었다.

기세를 몰아, 정치의견서를 조정에 건의한다. 그 내용으로는 미일화친조약에 따른 개항 항구수를 하나로 줄이고[5], 기독교의 포교를 반대하고 아울러 서구에 대해서 알기 위하여 조사단을 파견하며,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조정과 막부로 나뉘어진 정부를 하나로 합쳐야한다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관점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이와쿠라 도모미의 식견은 매우 높았으며 정확했다. 그는 이때부터 대정봉환 이와쿠라 사절단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안세이 5년(1858년) 6월 19일, 막부 가로 이이 나오스케가 독단으로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고메이 덴노는 이에 격노하고 존황양이파가 크게 준동하기 시작한다. 이이 나오스케는 여기에서 반대파를 숙청하는 안세이 대옥을 일으킨다. 당시 이와쿠라 도모미는 대옥의 칼끝이 공가에 미칠까 두려워하여 친막부 노선에 선다.

이후,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 문 밖의 변을 통하여 암살당하고 막부 내에서 공무합체파가 대두되기 시작한다. 막부는 이 일환으로,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고메이 덴노의 이복 여동생인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和宮親子内親王)과 혼인시키려고 추진한다. 문제는, 고메이 덴노가 이 상황에 그리 탐탁지 않아 했다는 것이다. 이때 이와쿠라 도모미는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의 혼인에 관한 상신서"를 천황에게 제출한다. 그는 천황에게 이 혼인이야말로, 진정으로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는 답이며 이 기회에 정치적 결정은 조정이, 그 집행은 막부가 하는 "대정 위임론"을 확고히 해야하고, 정 내치기 않는다면 막부에게 미일수호통상조약의 파기와 양이를 조건으로 내세우면 된다고 주장하였다.[6] 고메이 덴노는 이를 받아들여 혼인에 응하게 된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이때 모든 혼인 절차를 주관하였고 천황과 독대하면서 권력의 정점에 섰다. 그는 막부에게 "당장 조약파기와 양이를 하겠다는 쇼군의 친필서명을 제출해라" 등의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일련의 일이 끝나자 고메이 천황은 그를 절대적으로 잠깐이나마 신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이때부터 천황을 자신의 권력 의지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천황의 지령인 듯 각종 "비밀칙서"를 꾸며 각 번에 하달하여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를 바랬다. 천황의 말이 곧 내말

혼인을 통하여, 조정과 막부가 화해무드로 접어들자 존황양이파는 조정의 행동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특히 조슈 번은 이와쿠라 도모미가 가운데에서 장난질 치며, 사실은 막부측 인사인 좌막파라고 주장하였다. 계속되는 상서에 급기야 고메이 덴노마저도 이와쿠라 도모미를 의심하게 되고 관직 사퇴와 출가를 명한다. 도모미는 아무런 항변도 없이 깨끗하게 물러난다.

그는 권력에서 물러나기 했지만, 토사 번 다케치 한페이타 등은 그를 귀양보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며 극단적인 존황양이파들은 그의 집에 당장 교토에서 나가지 않으면 머리를 잘라 강가에 전시하겠다는 천벌 예고문[7]까지 보냈다. 이쯤되자, 이와쿠라 도모미는 자택에서 나와 레이겐지로 숨어들어 오랜기간 중 노릇을 하게 된다. 강제 출가행
무념[8] 절치(切歯)[9]가 끊이질 않는다.
이번 사건, 실제로 꿈인지 현실인지 어렵고, 어떤 숙연(宿緣)의 결과인지 조금도 납득할 수 없다.
당시 그의 일기는, 이에 대해 분함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1864년 7월 19일 금문의 변이 발생하여 교토 내 존황양이 극단파가 제거되어 이와쿠라 도모미의 무고죄가 입증되었으나, 사면은 되지 않았다. 이 시기 그는 사쓰마 번 인사, 과거 조정 대신들과 연락을 취하여 각종 정치의견서를 여기저기 제출하며 활동을 개시한다.[10] 또한, 기존의 공무합체파 노선을 조금 수정하여 도막파의 입장에 선다.

1866년에 접어들어, 막부의 조슈 정벌도 실패로 돌아가고 전황은 점차 도막파에게 유리하게 조성되고 있었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조정을 까면서 묘하게 사쓰마 번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장을 계속해서 내뱉는다. 12월 25일에는 고메이 덴노가 돌연사하는데, 공식적인 사인은 천연두이지만 당대에는 이와쿠라 도모미가 독살했다는 루머가 존재한다.[11][12]

2.3. 메이지 유신

게이오 3년(1867년) 1월 9일, 메이지 덴노가 15세로 즉위하고 10월 14일에는 대정봉환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이와쿠라 도모미는 특기인 비밀칙서 남발을 감행, 각 웅번에게 막부 타도를 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정봉환이 이루어짐으로써 잠시 그 계략은 정지되었다가 1868년 1월 3일에 왕정복고령을 선포하도록 한다. 이후 고고쇼 회의에서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관직과 영지를 반납하라는 주장을 반복, 이를 관철시킨다.

혼란스런 와중에 보신 전쟁이 발생, 막부는 대역죄인으로 찍히고 도막파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후, 정부기구의 개편이 행해진다. 미국의 정치제도를 참고로 하여 행정부, 입헌부, 사법부로 나뉜 권력 분립형 정부로 이행하였다. 이와쿠라는 이때 행정관 중의 보상(輔相)이라고 하는 국내행정 전반과 궁중의 서무를 감독하는 역할로 취임하게 된다.

산조 사네토미와 같이 2인체재로 취임하였지만, 산조는 도쿠가와 가의 처분의 전권을 맡아 사이고 다카모리를 거느리고 에도로 나와있었기 때문에 이와쿠라가 실질적인 수반이 되었다. 이와쿠라는 취임 하자마자 한 궁중 개혁을 감행한다. 또한 에도( 도쿄)로의 황거 변경을 추진하다가 반발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가자 갑자기 병을 이유로 보상(補相)의 사직을 요구한다.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는 만류하였지만, 끝내 사퇴하고 만다.

이와쿠라가 사퇴한 후, 신정부에 의하여 판적봉환 폐번치현이 검토에 들어간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재야의 신분으로 각종 정치의견서를 제출하여 이 두가지 행정 규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과시한다. 폐번치현이 이루어지고 이와쿠라 도모미는 외무경[13]에 취임한다.

외무경으로서 그의 주된 과업은 이이 나오스케가 불평등한 조건으로 맺어놓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신정부는 유럽과 미국에 사절단을 보내, 일본이 여전히 문명개화하지 않은 것을 전하고, 각 나라에 근대화의 모습을 시찰한 뒤, 귀국 후 그것을 일본에 도입하여 문명개화를 성취한 단계에서 조약교섭을 하도록 요청하여 조약 개정 교섭을 늘리도록 하는 것을 정부방침으로 정하였다.

외무경인 이와쿠라 자신이 특별 전권 대사로 대표되고 여기에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야마구치 마스카가 멤버로 참가하여 이와쿠라 사절단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메이지 4년(1871년) 11월에 요코하마 항을 떠나, 1년 10개월에 걸쳐 유럽과 미국 여러 나라를 돌며 각국 원수와 만나 국서를 직접 건넸지만 조약 개정의 실마리는 잡을 수 없었다. 와중에, 이와쿠라 사절단은 서구권을 둘러보면서 일대 쇼크를 받아, 조약 개정보다도 유학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이들은 선진화된 서구권을 둘러보면서 일본에 미래를 다시 설계하기 시작하였다.

1873년 9월, 일본으로 돌아온 이와쿠라 도모미는 선진화된 서구를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내정 중심으로 기조를 잡는다. 이와쿠라가 해외를 떠돌고 있을 때, 사다 하쿠보 정한론이 한창 대두되고 있었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신이 조선에 사절로 가서 국왕을 모욕해 목이 잘리면 이를 계기로 조선을 치자고 스스로를 제물로 내놓았지만, 이와쿠라는 돌아오자마자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이를 분쇄한다. 이 과정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실각하고, 낙향하여 후에 서남전쟁을 일으킨다.

1875년 4월 14일에 메이지 덴노가 헌법 체계를 수립하라는 조서를 하달한다. 처음에, 이와쿠라 도모미는 입헌을 거부하였으나 자유민권운동 오쿠보 도시미치의 끈질간 설득으로, 생각을 바꾸어 헌법제정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태정관 우대신을 맡던 1877년 3월 29일에는 후대의 ' 독도 무주지 선점론'이 허구임을 알려주는 ' 태정관 지령'을 작성하여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전달했다.

1878년 오쿠보 도시미치가 마차에서 돌연 시마다 이치로 일당에게 암살당한다. 이와쿠라는 오쿠보의 유지를 이어가기로 결심. 독일헌법을 모티브로 한 의원내각제를 따오면서, 덴노의 권위를 인정하는 헌법을 주장하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헌법 제정의 힘을 실어주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하여 이토의 정적이자,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주장하는 오쿠마 시게노부를 각종 방법을 통하여 날려버린다. 결국, 1882년 3월 14일 이토가 헌법조사를 위해 유럽 각국에 파견가는데 성공한다.

2.4. 사망

파일:이와쿠라 도모미 병문안.jpg
암투병 중인 이와쿠라를 방문한 메이지 덴노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1883년부터 인두암 증상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을 들은 메이지 덴노는 칙명을 내려 도쿄대학 의학부 교수인 에르빈 폰 발츠[14]를 교토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방법은 없었다. 메이지 덴노로부터 위문도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하였고, 7월 20일 일본 헌법 제정을 눈앞에 두고 사망했다.[15]

향년 58세. 7월 25일에 국장이 거행되었다.

3. 평가

어찌보면, 전형적인 일본식 정치를 추구한 노회한 정치가이다. 일선에 나서기 싫어하고 늘 막후에서 활약하기 좋아하였다.

천황의 이름으로 비밀칙서를 남발하여 정국을 지배하려고 했었고, 정적들에게 집중포화를 맞게되면 여지없이 야인 신분으로 내려가, 거기에서 막후 노릇을 즐겨했다.

때문에, 간신으로 찍히거나 음험한 정치인의 대명사로 취급되기도 한다. 고메이 덴노 독살설에 그가 연루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일본의 혼란기에 그의 안목과 식견은 탁월한 수준으로, 대정봉환, 신정부 수립, 정한론 논쟁, 헌법 제정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에 관여하였고 그 결과는 특기할 만하다.

수완도 여타 일본 정치인이 그래했듯 당대 아시아의 정점이라 불릴 만했으며, 그의 정적들도 그를 높이 평가하는 편이었고 언제든지 자신들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당대 유신지사들은 암살되는 게 트렌드였는데, 용케 안 죽고 살아남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16] 여러모로 일본의 기틀을 바로잡으며 근대 일본을 성립시킨 인물.

당시 그에 대한 한국( 조선), 중국( 청나라), 홍콩, 대만, 마카오 등지의 인식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4. 여담

  • 성격은 대체로 냉정, 침착하였으나 간혹 물불 안가릴 때가 있었다고 한다. 멘탈도 은근히 약한 편이라서 자주 삐지기도 했다고 한다.
  •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미국을 방문할 때까지, "일본인의 혼"이라고 주장하며 상투를 자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먼저 미국 유학 중이던 셋째 아들 이와쿠라 도모사다에게 설득당하여 시카고에서 잘랐다고 한다. 그래서 유신 시절 인사들을 기록한 그림을 보면 다른 이들은 서양식 군복이나 정장을 입는데 이와쿠라 혼자만 상투에 일본 전통 관복을 입고 있다.
  • 의사에게 암 선고를 받은 최초의 일본인이다.


[1] 실각 이후 출가하면서 지은 법명. [2] 19세기 당시 동양인의 신장을 감안하면 딱히 작은 키는 아니다. [3] 메이지 유신의 최대 공로자 10명을 지칭하며 나머지 9명으로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 히로사와 사네오미, 오무라 마스지로, 마에바라 잇세이,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고마쓰 다테와키, 히젠 사가 번의 에토 신페이, 히고 구마모토 번의 요코이 쇼난이 있다. [4] 만화 히카루의 바둑에서도 작중 후지와라노 사이의 대사로 이를 암시하는 내용이 포함된 에피소드가 있다. [5] 조약으로 인하여 시모다와 하코다테의 2개의 항구가 개항되었다. [6] 야사에서는 그가 막부 고위층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상소문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7] 이른바 천주라고 하는 것으로, 존황양이파들은 자신의 암살 행동을 이렇게 지칭하였다. 이런식으로 미리 경고하거나 사람 죽여놓고 천벌이라고 적어 놓은 글자를 폼나게 던져놓고 갔다. [8] 無念(むねん)은 일본어에서 원통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9] 가만히 있어도 위아래 이가 서로 맞부딪치는, 그러니까 이가 부득부득 갈리는 상황을 말한다. [10] 이 시기에 그는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11] 고메이 덴노는 단지, 막부를 찍어눌러 천황가의 위신을 세우는데 족했으나 도막파는 완벽한 막부의 타도를 바랬다. 고메이 덴노는 집권 후기에 들어설수록 막부에 대한 관대한 조치를 취하는데 이것이 존황양이파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했다. 이른바 "고메이 덴노 독살설"은 여기에서 그 동기가 발생한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천황과 가까웠고, 이 시기 사쓰마 번의 입장을 대변했기 때문에, 독살 방법에 대한 가능성 또한 상존한다. 하지만 정확한 증거는 없으며 음모론에 그치고 있다. [12] 이 음모론은 조선에서도 퍼졌는데, 이와쿠라 토모미 대신 이토 히로부미 고메이 덴노를 암살했다고 퍼졌다. 이 루머는 안중근의 귀에도 들어가서 훗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내세우는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조 중의 하나가 된다. [13] 이 당시에는 내각 제도가 발족하기 이전이라 외무대신이 아니라 외무경이었다. [14] 몽고반점을 의학계에 처음으로 보고하고 이름붙인 사람이다. 쿠사츠 온천을 재발견하기도 했다. [15] 발츠의 일기에 따르면 헌법 제정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해 죽음을 눈 앞에 둔 와중에도 이토 히로부미를 애타게 찾다가 그가 없자 이노우에 카오루를 불러 헌법에 관한 유언을 헐떡이며 남겼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발츠는 '그의 육신은 강철같은 의지 그 자체였다.' 라고 기록했다. [16] 물론 위협은 몇 번이나 존재했었다. 유명한 일화로 메이지 6년 정변 직후 1874년 1월 14일, 퇴근길에 정한파 잔당 9명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 즉시 궁성 해자로 몸을 던져 암살 미수에 그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담으로 이때 경시청이 최신 수사 기법을 도입해 단 사흘 만에 범인 9명을 모두 검거해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