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6:33:20

도쿠가와 이에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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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한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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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 표시: 생전 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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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720년 11월 27일
724년
737년 8월 25일
(화력 서위일 불명)
요로 4년 10월 23일
진키 원년
덴표 9년 7월 25일
( 고세노 도코타) 후지와라노 후히토 🎎 후지와라노 미야코 🎎 후지와라노 무치마로
737년 11월 3일
749년 5월 4일
760년 9월 20일
762년 2월 28일
덴표 9년 10월 7일
덴표칸포 원년 4월 14일
덴표호지 4년 8월 7일
덴표호지 6년 2월 1일
후지와라노 후사사키 🎎 타치바나노 모로에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 🎎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770년 10월 23일
785년 6월 14일
785년 10월 31일
788년 6월 21일
호키 원년 10월 1일
엔랴쿠 4년 5월 3일
엔랴쿠 4년 9월 24일
엔랴쿠 7년 5월 13일
🎎 후지와라노 나가테 기노 모로히토 후지와라노 다네츠구 후지와라노 다비코
791년 1월
791년 1월
806년 6월
806년 6월
엔랴쿠 9년 12월
엔랴쿠 9년 12월
다이도 원년 6월
다이도 원년 6월
야마토노 오토츠구 하지노 마이모 후지와라노 요시츠구 아베노 고미나
819년 1월 18일
823년 6월 17일
823년 6월 17일
826년 9월 1일
고닌 9년 12월 19일
고닌 14년 5월 6일
고닌 14년 5월 6일
덴초 3년 7월 26일
후지와라노 소노히토 후지와라노 모모카와 후지와라노 모로아네 후지와라노 후유츠구
833년
833년
847년 11월 16일
848년 1월 28일
덴초 10년
덴초 10년
조와 14년 10월 5일
조와 14년 12월 19일
다치바나노 기요토모 다구치노 미치히메 다치바나노 나라마로 다치바나노 우지키미
850년 9월
854년 10월 28일
858년
867년 11월 9일
가쇼(嘉祥) 3년 8월
닌주 4년 10월 4일
덴난 2년
조간 9년 10월 10일
후지와라노 미츠코 미나모토노 도키와 미나모토노 기요히메 후지와라노 요시미
869년 4월
872년 10월 9일
877년 1월
877년 1월
조간 11년 3월
조간 14년 9월 4일
조간 19년 1월
조간 19년 1월
미나모토노 마코토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후지와라노 나가라 후지와라노 오토하루
884년 3월 23일
884년 3월 23일
891년 2월 24일
895년 9월 20일
간교 8년 2월 23일
간교 8년 2월 23일
간표 3년 1월 13일
간표 7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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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7년 7월 19일
898년 1월 3일
900년 4월 15일
906년 6월 24일
간표 9년 6월 16일
간표 9년 12월 7일
쇼타이 3년 3월 14일
엔기 6년 5월 30일
미나모토노 요시아리 소시 여왕 후지와라노 다카후지 후지와라노 슈쿠시
907년
909년 4월 27일
913년 4월 27일
937년 11월
엔기 7년
엔기 9년 4월 5일
엔기 13년 3월 18일
조헤이 7년 10월
미야지노 렛시 후지와라노 도키히라 미나모토노 히카루 후지와라노 미츠코
949년 9월 13일
949년 9월 13일
962년 11월 17일
967년
덴랴쿠 3년 8월 18일
덴랴쿠 3년 8월 18일
오와 2년 10월 18일
고호 4년
후지와라노 다다히라 미나모토노 쇼시 후지와라노 기시 후지와라노 세이시
969년 12월 2일
970년 6월 26일
972년 12월 13일
978년 1월 1일
안나 2년 10월 20일
덴로쿠 원년 5월 20일
덴로쿠 3년 11월 5일
조겐(貞元) 2년 11월 20일
후지와라노 모로타다 후지와라노 사네요리 후지와라노 고레타다 후지와라노 가네미치
987년 3월
989년 8월 23일
992년 7월 18일
993년 6월 12일
간나 3년 2월
에이엔 3년 7월 20일
쇼랴쿠 3년 6월 16일
쇼랴쿠 4년 5월 20일
후지와라노 도키히메 후지와라노 요리타다 후지와라노 다메미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993년 8월 19일
995년 6월 25일
995년 6월 25일
1025년 9월 23일
쇼랴쿠 4년 7월 29일
조토쿠 원년 5월 25일
조토쿠 원년 5월 25일
만주 2년 8월 29일
미나모토노 마사자네 후지와라노 미치카네 미나모토노 시게노부 후지와라노 기시
1029년 11월 25일
1073년 6월
1073년 6월
1075년 11월 16일
조겐(長元) 2년 10월 17일
엔큐 5년 5월
엔큐 5년 5월
조호 2년 10월 6일
후지와라노 긴스에 후지와라노 요시노부 후지와라노 시시 후지와라노 노리미치
(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1094년
1107년
1146년 11월 9일
(화력 서위일 불명)
가호 원년
가쇼(嘉承) 2년
규안 2년 10월 4일
후지와라노 요시나가 후지와라노 아키후사 후지와라노 사네스에 후지와라노 나가자네
1146년 11월 9일
1166년 9월 8일
1168년 7월
1168년 7월
규안 2년 10월 4일
에이만 2년 8월 12일
닌난 3년 6월
닌난 3년 6월
🎎 미나모토노 마사코 고노에 모토자네 다이라노 도키노부 후지와라노 유시
1177년 8월 28일
1190년 5월
1220년
1242년
지쇼 원년 8월 3일
겐큐 원년 4월
조큐 2년
닌지 3년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후지와라노 규시 다이라노 지카노리 미나모토노 미치무네
1617년 4월 14일
1628년 7월
1632년 3월 30일
1651년 7월 4일
겐나 3년 3월 9일
간에이 5년 7월
간에이 9년 2월 10일
게이안 4년 5월 17일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고노츠보네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미츠
1680년 6월 17일
1709년 3월 4일
1709년 10월 9일
1712년 12월 1일
엔호 8년 5월 21일
호에이 6년 1월 23일
호에이 6년 9월 7일
쇼토쿠 2년 11월 3일
도쿠가와 이에츠나 도쿠가와 츠나요시 도쿠가와 츠나시게 도쿠가와 이에노부
1716년 7월 1일
1752년 7월 20일
1761년 8월 24일
1786년 10월 13일
쇼토쿠 6년 5월 12일
호레키 2년 6월 10일
호레키 11년 7월 24일
덴메이 6년 9월 22일
도쿠가와 이에츠구 도쿠가와 요시무네 도쿠가와 이에시게 도쿠가와 이에하루
1841년 4월 8일
1848년 8월 7일
1853년 9월 23일
1858년 8월 29일
덴포 12년 2월 17일
가에이 원년 7월 9일
가에이 6년 8월 21일
안세이 5년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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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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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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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조 사네토미 와케노 기요마로 산조 사네츠무 도쿠가와 미츠쿠니
1901년 5월 16일
1901년 5월 16일
1903년 6월 27일
1904년 3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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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나리아키라 모리 다카치카 도쿠가와 나리아키 고노에 다다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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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9월 9일
1915년 8월 18일
1917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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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제6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노부
徳川家宣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60px-Tokugawa_Ienobu.jpg
생몰년도 1662년 06월 11일 ~ 1712년 11월 12일 (50세)
신체 160cm[1][2], O형
원호 분쇼인(文昭院)
재임기간 1709년 ~ 1712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에도 막부의 제6대 쇼군. 코후의 번주 도쿠가와 츠나시게의 아들로, 제5대 쇼군 츠나요시의 조카이자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손자였다.

2. 생애

이에미츠의 3남인 도쿠가와 츠나시게(徳川綱重, 1644 ~ 1678)가 정실이 아닌 유모의 하녀인 조쇼인(長昌院, 1637 ~ 1664)로부터 얻은 아들로, 츠나시게가 정실을 맞을 즈음이었기 때문에 파혼을 염려한 센히메[3]의 수배로 어린 시절에는 가신 신미 마사노부(新見正信, ? ~ ?)의 아들로서 신미 사콘(新見左近) 살았다가 츠나시게가 다른 아들을 얻지 못하자 9세에 다시 츠나시게의 아들로 정식 인정받았다. 1678년 부친인 츠나시게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코후의 번주가 되었다.

원래는 제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후계자로도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에노부는 정실 소생이 아니었던 탓에 이에츠나의 동생인 도쿠가와 츠나요시가 제5대 쇼군에 오르게 되었다.

츠나요시가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게 되자 1709년 48세의 나이로 제6대 쇼군에 오르게 되었다. 츠나요시 치세에 가장 큰 문제였던 동물 애호 법령인 <생류연령>을 즉각 폐지하고, 츠나요시 치세의 실권자였던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를 막부에서 쫓아냈으며 제4대 쇼군 이에츠나의 문치정치를 계승했다.

츠나요시는 죽어가면서 후임인 이에노부에게
"내가 죽더라도 <생류연령>은 계속 유지해달라"
고 말했으나, 이에노부는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에게
"돌아가신 분의 유지는 받드는 것이 원칙이나, <생류연령>때문에 졸지에 죄인이 돼버린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천하만민을 위해서 <생류연령>을 폐지할 수밖에 없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 법령을 보면, 처벌한다는 법령은 폐지하지만, 동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계속 유지하라고 했다. 불만이 많으니 없애긴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생명 중시의 마음가짐을 나쁘다고 몰아가기도 뭣하니 일부러 마음가짐은 유지하라고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전임 세이이다이쇼군(정이대장군)이었던 츠나요시의 <화폐주조령>을 유지하여 재임 2년차( 1710년)에 '겐로쿠 금•은'을 또 발행하는 실책[4]을 빼면 그다지 큰 우를 범한 적은 없었다. 쇼군직에 오른지 3년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큰 실책을 찾기가 더 어렵지만.

츠나요시의 정책을 상당 부분 계승한 흔적이 보이는데 사실 <생류연령>과 사찰 및 천황가의 능묘 재건사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은 다 계승했다. 주자학(성리학)을 이용한 명분론이라든가 낮은 계급의 인재들을 뽑아쓰는 것은 츠나요시의 정치철학을 계승한 부분이었다.

특히 낮은 계급을 등용한 부분은 도자마 다이묘들을 우대한 츠나요시의 그것을 넘어서 로닌[5]들을 최고 관직에 두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 ~ 1725)로 주자학자를 최고 관직에 두었다는 점과 로닌(낭인) 계급이 최고 관직에 올랐다는 사실은 츠나요시의 정치철학을 계승했다는 좋은 반증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제대로 먹혀들어가 이때의 치세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아이디어로 상당 부분 효과를 보게 된다.

재정정책으로는 츠나요시가 했던 사업들의 대부분을 접어서 긴축재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 겐로쿠 금•은'의 실책 이후, 의 함량을 초대 쇼군 이에야스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711년에는 아라이 하쿠세키가 직접 나서서 (조선에서 일개 왕자 따위의 칭호인) 대군이라고 부르지 말고 일본국왕[6]이라고 부를 것을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조선 통신사에 대한 예우도 상의 없이 간소화시키려고 했으나, 쇼군인 이에노부가 고작 1년 뒤에 죽고 아라이 하쿠세키도 따라 실각하자 롤백되었다. 허나 이를 기점으로 일본에 대한 조선통신사들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달리게 되었다.

나가사키 데지마를 통한 본격적인 무역 통제가 이루어진 시기도 이에노부의 치세하였다. 물가를 안정시키고 수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서 총수입 규모를 낮추는 한편, 대금 결재 방식을 금, 은, 구리같은 현금화하기 쉬운 귀금속류 내지는 광물류에서 전복 같은 해산물로 교체하는 방식을 취했다.[7]

감정음미방(勘定吟味方)이라는 재정 감찰 기구를 두고 상인들의 부정을 막고자 하는 시도도 했다. 다만 이 부분은 시도는 좋았으나 선대 츠나요시때 이미 막부의 상인에 대한 재정 의존도가 너무 높았기에 설치는 했으나 성과는 그다지 낸 것이 없었다.

워낙 츠나요시 치세가 빡빡했었던(적어도 서민들에게는 그랬다) 탓에 <생류연령>을 폐지한 것만으로도 서민들의 지지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재정 개혁을 시도하던 중인 1712년, 51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뒤는 이에노부의 넷째 아들 도쿠가와 이에츠구가 이었다. 당시 이에츠구의 나이는 5세.

상냥한 성격에 학문을 좋아하는 쇼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대 쇼군 츠나요시와는 썩 관계가 좋지는 못했는데 츠나요시의 아들 도쿠마츠가 사망하자 츠나요시에게 후계자로 지명을 받았다고 한다.

재위 4년만에 사망한 탓에 많은 사람들과 당시의 나카미카도 덴노 및 교토 조정에서는 아쉬워했다고 한다. 더 오래 살았다면 제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치세를 재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에도 시대의 역사서들에는 진정한 인자(仁者)라고 평가받았다고. 학문을 좋아했고 덕이 있었으며, 나름의 업적을 남겼으나 어린 후계자를 남기고 짧은 치세 끝에 죽었다는 점에서는 조선의 문종과 이미지가 비슷하다.

짧은 그의 재임기는 조선 숙종 재위기 후반과 일치하며 청나라의 제4대 황제 강희제 재위기하고 일치하다.

[1] 156cm는 위패의 키이고, 160cm와 혈액형 O형은 유골 조사의 키와 혈액형인데 유골 조사인 160cm가 신빙성이 높다. [2] 당시 일본인 평균보다도 컸으며, 역대 쇼군 중 유일하게 키가 160cm여서 역대 쇼군 중 키가 가장 컸다. [3] 츠나시게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츠나시게의 유모는 그녀의 시녀이기도 했다. 여기에서의 센히메는 초대 쇼군 이에야스의 손녀이자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정실을 말한다. [4] 하쿠세키의 불황을 초래했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경기가 회복하기 시작했다. [5] 여기에서는 추신구라의 죄인을 가리키는 낭인이 아니라 다이묘급 가문이 아닌 그에 훨씬 못미치는 계급을 의미한다. [6] 참 아이러니 한 게, 무로마치 막부시절 명나라에게서 일본국왕 칭호를 하사받았는데, 19세기에 국학의 발흥으로 요시미츠는 "외세에 굴종했다" 등의 악평을 받았고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조부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자신 3대의 목상이 참수되어 길바닥에 효수되었다. [7] 네덜란드 상인들은 처음에는 좀 많이 당황했으나 네덜란드(서양물품) → 나가사키(서양물품 - 해산물) → 난징(해산물 - 중국산 차 및 도자기 등) → 네덜란드(중국산 물품 - 서양물품) 무역 루트로 전환하여 이익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이때는 전 세계적으로 광물의 생산이 많았기 때문에 광물류로 결재하는 것보다는 해산물을 통해 중국측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무역 루트의 다변화가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