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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라노 무네모리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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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내대신
타이라노 무네모리 平宗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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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생몰년도 | 1147년 ~ 1185년 |
재임기간 | 내대신 |
1182년 ~ 1183년 |
[clearfix]
1. 개요
일본 헤이안 시대 말기의 사무라이이자 정치가. 헤이케 무사 정권의 마지막 수장. 통칭 야시마노다이진(屋島大臣)2. 생애
2.1. 헤이케의 도련님
이세 헤이시 가문의 수장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두 번째 정실 부인인 타이라노 토키코였다. 아버지가 상당한 권력을 잡은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빠르게 관위를 받아 도련님처럼 자란 것으로 보인다.키요모리가 쿠게 및 황가와 인척 관계를 맺어 절대권력을 구축하자 무네모리 역시 높은 관위를 계속 받으며 올라갔고, 엔랴쿠지 등의 교토 주변 불교세력이 깽판[1]을 부릴 때 군을 지휘하는 등 약간이지만 군무 경험도 쌓은 것으로 보인다.2.2. 헤이케 독재 정권
1170년 7월 3일, 홋쇼지(法勝寺)의 법화팔강(法華八講) 도중에, 쿠게 마츠도노 모토후사[2]의 수레[牛車]와 여자용 수레가 마주쳤는데, 모토후사의 하인들이 이 수레의 무례를 지적하며 구타하거나 모욕을 주었다. 이 여자용 수레에 타고 있던 사람이 타이라노 시게모리의 아들인 타이라노 스케모리라는 것을 알게 된 모토후사는 당황하여 시게모리에게 사자를 보내어 용서를 구하면서, 폭력을 휘두른 장본인들을 내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에 격노한 타이라노 시게모리[4]는 이를 거부하면서 사자를 쫓아 보냈고, 이런 시게모리를 두려워한 모토후사는 장본인들을 호적에서 파 버리고 케비이시[検非違使]에 출두시키는 등, 성의있는 모습을 보여서 시게모리의 화를 풀어주고자 했다. 그러나 화가 가라앉지 않은 시게모리는 병사들을 모아 모토후사에게 복수를 할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고, 모토후사는 섭정임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출사하지 못할 정도로 겁에 질려 버렸다. 모토후사는 석 달 넘게 칩거 아닌 칩거를 이어갔지만, 천황의 관례에는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고, 10월 21일에 할 수 없이 조정에 출사하던 차에 시게모리와 병사들의 습격을 받아 앞장서던 기마무사 다섯이 말에서 끌려 떨어지고, 그중 넷이 상투(髻)를 잘렸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히 관례는 연기(...). 일명 덴카 노리아이[乗り合い] 사건. 다만 사흘 뒤인 24일에는 모토후사와 시게모리가 나란히 출사한 것을 보면, 이 시점에서는 양자가 화해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모토후사는 한 달여쯤 뒤인 12월에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이 사건을 미안하게 여긴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천거였다고 한다.하지만 헤이케와 조정의 사이를 잇는 교두보였던 켄슌몬인[8]이 죽으면서 모략가인 고시라카와 법황[法皇]이나 여타 반대파들이 시시가타니의 음모 사건 등 헤이케 타도 계획을 꾸미는 등 헤이케 정권이 상당히 불안해졌고 고시라카와 호오와 헤이케 정권간의 알력이 극심해진다. 이 시기에 다카쿠라 덴노의 비로 들어간 키요모리의 딸 토쿠코가 후일의 안토쿠 덴노을 낳는 경사도 있었지만, 무네모리는 그 유모가 될 예정이던 아내를 잃고 비탄에 빠져 벼슬을 일체 관둬버렸다. 원래는 무네모리의 무능함이나 나약함으로 해석되던 부분이지만 근래에는 가정적인 면모라며 나쁘지 않게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2.3. 헤이케 정권의 위기
하지만 헤이케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정권을 노리는 일이 끊이지 않는 등 헤이케 정권의 기반은 불안한 것이었다. 1177년에는 승려 사이코(西光)과 쿠게 후지와라노 나리치카가 결탁하여 헤이케 정권 타도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살해되었고(시시가타니의 음모), 1179년 헤이케 정권의 차기 주자로서 전도가 유망하던 시게모리가 요절하자 고시라카와 법황은 시게모리의 영지를 몰수하고, 이미 헤이케와 덴카 노리아이 사건으로 원수가 진 마츠도노 모토후사를 기용하여 헤이케를 몰아내고 친정을 할 뜻을 내비쳤는데, 여기에 키요모리가 격노해서 일종의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묘하게 근왕가(천황 충성파) 기질이 있던 무네모리는 이 때도 쿠데타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키요모리가 워낙 과격한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별 수 없었던 듯. 모토후사를 유배형에 처하고, 조정의 여러 신료들을 숙청하거나 영지를 몰수하는 등 흉흉한 분위기[10]가 감돌았는데, 무네모리가 이때 생각없이 황가의 일원인 모치히토 왕의 영지를 몰수한 것이 후일 전면적인 반 헤이케 봉기의 시작이 되었다.2.4. 모치히토 왕의 거병
1180년에 다카쿠라 천황이 황자에게 양위하여 다카쿠라 상황의 인세이가 시작되었고, 안토쿠 천황이 즉위했다. 하지만 헤이케 정권에서는 수도의 불온한 움직임과 도적의 발호, 엔랴쿠지, 온죠지 등 주변 사찰의 봉기 때문에 극도로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었는데, 헤이케 정권을 파멸로 몰아넣은 겐페이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인 모치히토 왕의 거병이 일어났다.겐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헤이케(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정권을 놓고 격돌한 헤이지의 난에서, 겐지이면서도 헤이케에 붙은 미나모토노 요리마사[11]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편을 들어주긴 했지만 결국 자기네 집안 중심으로 돌아가던 헤이케 정권하에서는 어지간히 존재감이 없었는지 키요모리에게 잊혀져서 벼슬이 오르지 않자, 은근슬쩍 벼슬을 달라는 내용의 시를 읇어서 눈치를 주는 방법으로(...) 벼슬을 타냈다는 일화도 있을 만큼 위치가 미묘한 사람이었다. 헌데 이 요리마사가 영지를 몰수당해 불만에 차 있던 모치히토 왕[12]을 구워삶아 반란을 일으켰다.
워낙 임팩트가 강한 사건이어서 요리마사의 배신 동기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제일 널리 알려진 것이 < 헤이케모노가타리>에 실린 이야기이다. <헤이케모노가타리>에 따르면 찌질이 무네모리가 요리마사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나카츠나가 가지고 있던 '코노시타(木下)'라는 명마가 탐이 나 마구잡이로 강탈해간 뒤에 그 말에 '나카츠나'란 이름을 붙이고 모욕해서 나카츠나와 요리마사 부자가 격노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거병은 아쉽게도 준비단계에서 발각되어 나카츠나와 요리마사 부자는 곧 포위당해 자결하고, 모치히토 왕은 도망가다 잡혀 죽었지만, 이 사건은 본격적인 겐페이 전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죽기 전에 모치히토 왕은 몸을 숨기고 있던 겐지 미나모토노 유키이에를 통해 전국의 겐지에게 헤이케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고, 이것을 이용한 겐지가 헤이케 타도를 명분으로 거병한 것이었다.
2.5. 겐페이 전쟁
2.5.1. 전쟁 개시
1180년의 모치히토 왕의 거병 이후 기다렸다는 듯이 각지의 겐지가 반란을 일으켰다. 시나노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이즈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이 일제히 거병했고, 곧이어 후지가와의 전투에서 헤이케 군이 새들이 날아오르는 소리에 놀라서 모랄빵이 나 패배하면서(...) 사태가 심각해져 가는 가운데 키요모리가 갑자기 병들어 숨을 거두고 무네모리가 뒤를 잇게 되었다.일설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키요모리가 '무네모리와 잘 상담해서 나랏일을 봐 달라'라고 부탁했는데도 씹혔기 때문에 원한을 가지고 죽었다고도 하는 판에, 어수룩한 무네모리는 헤이케를 내칠 기회만 보고 있는 법황에게 굽신굽신하는 태도를 취하였고, 법황에게 '우리 아버지가 한 짓은 절대 내 본의가 아니다. 앞으로는 말 잘 듣겠다'는 내용의 상소까지 한다(...) 심지어 대놓고 고시라카와 법황이 적인 요리토모와 연락을 주고받는데도 그냥 보고만 있을 만큼 이상하게 무네모리는 법황에게 심하게 저자세로 나갔다.
1183년, 무네모리는 마음먹고, 야심차게 엄청난 대군을 편성해서 우선 근처까지 진출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군대를 토벌하러 보냈는데, 화우의 계책을 사용한 요시나카에 의해 쿠리카라 고개의 전투에서 괴멸당했다. 승기를 잡은 요시나카는 그대로 막힘없이 오우미까지 진출했다. 수도 코앞에 겐지가 닥친 것이었다.
2.5.2. 도주
당장 닥닥 긁어모은 전력이 전멸해서 병사도 거의 없고 식량도 없는 데다 주변 사찰들이 또 난리를 칠 조짐까지 보이자 결국 무네모리는 결단을 내려 헤이케 일족과 함께 교토에서 도주(都落ち)했다. 헤이케의 세력권이던 츄고쿠와 규슈 일대에서 힘을 회복해서 반격을 하려는 셈이었겠지만, 따르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정신이 없던 헤이케는 경황중에 겐페이 전쟁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는데, 고시라카와 법황이 혼란을 틈타 탈출해버린 것을 놓친 것이었다. 법황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무네모리는 뒷통수를 맞아 멘탈붕괴 상태에 빠졌지만, 어쩔 수 없이 안토쿠 천황과 삼종의 신기만 챙겨서 탈출했다. 한편 고시라카와 법황은 재빨리 헤이케를 역적으로 공인했다.하지만 헤이케는 해상 세력이었기 때문에 세토 내해의 수군을 대부분 거느리고 있었고, 육로로는 진격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밑천을 들어먹은 건 아니었다. 게다가 겐지의 복잡하게 꼬인 족보 때문에 요시나카는 교토를 점령하고 '아사히 쇼군'을 자칭하며 숨통이 트이자 헤이케 토벌은 중단하고 같은 겐지이지만 부모의 원수이기도 한(...) 요리토모[13]를 깨부술 궁리를 하기 시작한 상황이어서, 이를 이용하려 하는 헤이케와 화친 교섭을 개시했기 때문에 아직 전쟁의 승패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2.5.3. 요시츠네 등장
헌데 여기서 겐페이 전쟁의 영웅이자 대스타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혜성같이 등장해서 헤이케와의 동맹 교섭이 좌절되고 교토의 치안 관리에 실패해 입지가 약화된 요시나카를 격파하여 살해했다. 세력을 회복해서 교토 근방까지 진출해 있던 헤이케는 전후에는 요새화되고 좁은 입구, 옆에는 헤이케의 함대가 지키고 있는 바다와 깎아지른 절벽으로 막혀 있는 천연의 요새 이치노타니에서 결전을 시도하였지만, 바다나 전후 어느 쪽도 아닌, 불과 70여 기만 이끌고 절벽 쪽에서 달려내려온 요시츠네에게 기습당해 참패했다. 그럭저럭 싸워볼만한 상태였던 헤이케는 일족의 유명 무장이 대거 전사하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도주했다. 이때 입은 손실이 너무 커서 이후로도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육로로 진격하는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의 대군을 어찌어찌 막아내고는 있었으나 이번에는 본진을 비우고 겐지 세력의 소요를 진압하던 중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를 과감히 건너는 비상식적인(...) 선택을 한 요시츠네의 기습부대에 텅 빈 야시마의 본진을 털렸다. 야시마 전투에서도 패배한 헤이케 세력은 갈 곳이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2.5.4. 헤이케 멸망
무네모리는 이 상황에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빌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지만 냉혹한 법황은 삼종신기와 천황을 데리고 도주한 무네모리의 굽신굽신 모드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 결국 결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헤이케는 이제 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모든 세력을 닥닥 긁어모아 1185년 해상인 단노우라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였다.전투 초반에는 바다에 익숙한 헤이케 쪽이 그럭저럭 잘 싸우고 있었는데 요시츠네가 헤이케의 노잡이를 조준사격하고 돌격전을 벌이면서 대세가 넘어갔고, 패색이 짙어진 헤이케 사람들은 안토쿠 천황을 포함해서 모두 바다에 몸을 던졌다. 헌데 무네모리는 빠져죽지 못하고 수면에서 허우적대다 구출되어서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한다(...)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는 아예 다들 비장하게 각오하고 빠져 죽고 있는데 살고 싶어서 허둥대는 무네모리를 빡친 아군이 붙들어서 바다로 던져 버렸다고 써 있다.
2.6. 죽음
붙들린 무네모리는 아들 키요무네와 함께 가마쿠라까지 압송되었고, 필사적으로 목숨을 구걸했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누구던가. 친족도 마구 죽일 정도로 냉혹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고[14] 또 본인도 어중간하게 적에게 자비를 베푼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실수 덕에 오늘까지 올라온 사람이었다.(...) 무네모리는 결국 실컷 비웃음만 당하고 다시 교토로 압송되던 도중 타치바나노 키미나가에게 처형당했다. 향년 39세. 이것으로 이세 헤이시의 종가 혈통은 단절되고 말았다.[15] 아들인 키요무네는 같은 날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종자인 호리 카게미츠에게 처형당했다. 향년 15세.3. 평가
헤이케 멸망의 여러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었고, 어리숙한 행동이 많아서 그런지 평가는 당연히 안 좋다. 특히 <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선 타이라노 시게모리에게 현인 포지션을 주기 위해 일부러 시게모리나 기타 헤이케 일족의 난폭한 행동은 키요모리에게 전가하고 어리석은 행동은 무네모리에게 전가하고 있어서 완전히 멍청하고 횡포만 부릴 줄 아는 바보로 묘사되어 있다.하지만 최근에는 여러 가지로 재평가되고 있는데, 우선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권신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던 아버지 키요모리와 달리 황가를 깍듯이 존중하는 '신하'로서의 자세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교토의 조정에서 보여준 정치적인 조정능력은 사실 나쁘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무엇보다 잔인하고 난폭한 다른 무사들과 달리 인간미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과거에는 이게 나약하다느니, 찌질하다느니 하며 매도됐지만 현대에는 상당히 공감을 받는지라 무네모리를 동정하는 사람이 많다. 유배중 그래도 귀한 몸인데 평민의 아이들과도 놀아주는 모습을 보고 감동한 주민들이 무네모리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는 얘기도 있다. 뭣보다 이 당시의 사료는 아예 창작물인 < 헤이케모노가타리>나 대놓고 가마쿠라 막부(정확히는 호조 정권)의 프로파간다를 위해 마구 곡필한 < 아즈마카가미> 등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이 많아서 무네모리가 진짜 찌질이였다고 단언하기 힘든 것도 문제.
사이사이 멘탈붕괴했다(...)는 기록이 많은 걸 보아 상당히 감성이 풍부하고 맘이 약한 사람이었던 모양인데, 개중에 가족을 사랑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 것도 특징. 아내가 죽은 것 때문에 만사를 제치고 슬퍼하거나, 아들을 아끼는 언행[16]도 많다.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는 '사이고쿠[西國]에서 마땅히 죽었어야 할 몸이지만, 이렇게 교토와 가마쿠라에서 치욕을 당하는 것도 다 키요무네(무네모리의 적자) (를 걱정하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죽을 때 키요무네가 먼저 처형당했는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키요무네가 벌써 갔는가...'였다고 한다.
덕분에 최근의 겐페이 전쟁 관련 창작물이 죄다 훈훈한 헤이케 홈드라마화(...)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골육끼리 죽고 죽이기 바빴던 겐지 세력에 비해 키요모리라는 강한 가장 밑에 단결해 서로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다 귀족에 가까운 헤이케 세력 쪽은 동정이 가는 악역으로 창작하기가 더 쉽기 때문인 듯 하다.
딴 재능은 없지만 생존수영 하나는 잘했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는 허우적거리다 잡혔다고 나와 있으나 그것은 비웃기 위한 말일 가능성이 높고, 이 해역은 물살이 세어서 허우적거린다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헤엄쳐 나와서 뭍에 닿은 후 재기를 노리려다가 잡혔다는 게 더 가능성이 높다.
[1]
주로 '고소(强訴)'라는 형태로, 자신들에게 밉보인 아무개를 처벌하라느니 아무아무 일을 들어달라는 식으로 무장한 승병을 소집해 무력시위를 벌이는 형태였다. 엔랴쿠지 등 불교세력은 정상적인 종교세력이라기보단 정치 군사세력이었기 때문에 많은 무가 권력자들이 속을 썩였다. 괜히 후일의 오다 노부나가가 이들을 다 쳐죽이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나온 게 아니다.
[2]
조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셋쇼(攝政)에 앉은 상당한 인물이었다.
[牛車]
우차
[4]
키요모리를 폭군, 무네모리를 암군, 그리고 시게모리를 (비록 악역인 헤이케이지만) 현인 포지션으로 규정짓는 <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는 키요모리가 한 짓으로 되어 있는데, 분명히 역사상으로는 시게모리가 한 짓이다.
[検非違使]
지금의 경찰청
[乗り合い]
'노리아이'란 귀인을 만났을 때 탑승물에서 내려서 예를 표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행위를 일컫는다. 당연히 결례다.
[太政大臣]
조정 최고위
[8]
타이라노 시게코, 키요모리의 친척이자 처제로
고시라카와 덴노의 후비.
[法皇]
'호오'. 천황 자리를 물러나서
인세이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출가했기 때문에 불교적인 '법(法)'자를 붙여 '호오'라 불렸다.
[10]
라고는 해도 헤이안 말기의 무사들은 후일의 전국시대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점잖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숙청이 반드시 목숨을 빼앗는다는 뜻이 아님을 상기하자.
[11]
겐지이고, 관위가 종3위(쥬산미)였기 때문에 '겐잔미 요리마사'라고도 알려진 인물이다. 요괴인 누에를 활로 쏘아 격퇴했다는 전설이 있다.
[12]
고시라카와 덴노의 3남.
[13]
요리토모의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호겐의 난 때 그와 대립하던 요시나카의 아버지인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카타를 죽였기 때문이다.
[14]
겐페이 전쟁의 일등공신인 자기 아우 요시츠네를 사소한 명령위반을 핑계삼아 결국 죽인 게 요리토모다.
[15]
타이라노 시게모리의 손자로써 출가했던 고레모리의 아들 로쿠다이(六代)라는 인물이 있기는 했는데, 요리토모는 그나마 덕망이 높았던 시게모리의 이름을 봐서 그를 살려주었지만 요리토모 사후 2대 쇼군이 된 요리이에(賴家)가 "머리는 잘랐어도 그 마음은 못 잘랐을 것"이라며 자결하도록 명령했다. 물론 요리이에도 결국 호조 일가에 의해 독살당함으로써
인과응보. 키요모리의 다른 형제로 키요모리와 사이가 안 좋았던 요리모리의 계통은 그 뒤로 이어졌다는 듯하다.
[16]
헌데 자기 아들을 위하는 맘에 시게모리 쪽 혈통인 조카들을 견제하거나 박대한 일이 많아서 좀 미묘(...) 아예 죽이려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
[西國]
단노우라가 위치한 서일본을 뜻한다. 가마쿠라가 위치한 동일본을 뜻하는 토고쿠의 반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