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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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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발터 벤야민[1]
Walter Benja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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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발터 벤딕스 쇤플리스 벤야민
(Walter Bendix Schoenflies Benjamin)
출생 1892년 7월 15일
독일 제국 베를린
사망 1940년 9월 27일 (향년 48세)
스페인국 카탈루냐 지로나 포르투보
국적
[[독일|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파 대륙철학, 서구 마르크스주의[2], 비판 이론[3]
연구분야 미학, 정치학[4], 문예이론

1. 개요2. 생애
2.1. 문필가의 삶을 택하다2.2. 비극의 시작2.3. 비극의 종점
3. 사상4. 어록5. 주요 저술6. 관련 문서7. 여담

[clearfix]

1. 개요

독일 철학자, 작가, 문예 평론가, 미학자. 잊혀져가는 과거를 재구성하고 그 과거에 어떤 희망이 있었는가를 탐구하여, 유럽의 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 생애

벤야민은 1892년 7월 15일, 독일 제국 베를린에서 유대계 독일인 아버지 에밀 벤야민과 어머니 파울리네 엘리제 쇤필리스 슬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벤야민이 태어난 집은 샤를로텐부르크 지역 마그데부르크 광장(현재 티어가르텐 구역)에 위치했다. 쾰른 출신인 아버지 에밀 벤야민은 은행에서 경력을 쌓고 당시 번창하던 골동품 및 예술품 경매소의 지분을 획득하면서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자본을 증식시킨 전형적인 유대계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벤야민의 집에는 수많은 가내 고용인들과 하녀, 프랑스인 가정 교사와 여름 별장 등이 갖춰져 있었고 이런 환경 속에서 벤야민은 가난에 대한 걱정 없이 윤택한 생활을 영위했다. 거기에 벤야민의 외가인 쇤플리스 가문도 베를린 구시가지에 방이 12개가 넘는 대저택을 소유한 부르주아 계급이었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벤야민은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던 셈이다.

9살이 되었을 때 그는 자비그니 플라츠에 있는 샤를로텐부르크 프리드리히 대제 학교에 등록하여 처음으로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곳은 개혁적인 베를린의 교육 기관이라는 명성과 함께 학생 중 다수가 상류층이었던 명문 학교였지만 건강이 안 좋았던 벤야민은 1년 반 동안 회복을 위해 튀링엔에 있던 하우빈다 기숙 학교에서 보내게 된다. 학생들 다수가 독일의 지방 사투리인 튀링겐 방언을 쓰는 등 이전의 학교와 완전히 다른 생활이었지만 벤야민은 하우빈다에서의 생활에 크게 만족했다. 그곳에서 당대의 교육 개혁자 구스타프 비네켄(Gustav Adolf Wyneken, 1875년 3월 19일 ~ 1964년 12월 8일)을 만나 그에게 독일 문학과 철학을 배우게 되었고 이는 벤야민의 사상과 저술에도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된다.

하우빈다에서의 생활이 끝나고 다시 프리드리히 대제 학교로 돌아온 벤야민은 1909년부터 1년 동안 군 복무를 하게 된다. 원래 독일 제국 청년들은 당시 3년 동안 의무 복무를 해야 했었지만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던 벤야민의 복무 기간은 상당 부분 감면되었다. 그러나 벤야민은 군 복무 자체를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고 제대한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11년부터 정기적으로 인쇄된 학생 잡지 "출발"에 벤야민은 익명으로 시와 산문을 투고했다. 이 시기의 벤야민은 일종의 낭만적인 격정에 차 있었다.

프리드리히 황제 학교를 졸업한 벤야민은 1912년 아비투어를 치른 후 프라이부르크에 소재한 알베르트 루트비히 대학에 등록했다. 여기서 벤야민은 당시 철학자인 하인리히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1863년 5월 25일 ~ 1936년 7월 25일)와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 1862년 10월 30일 ~ 1954년 2월 6일)의 수업을 들었다. 벤야민은 자신의 어릴 적 친구인 헤르베르트 블루멘탈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프라이부르크의 대학에서 학문의 희생자인 자신은 비네켄의 지령을 받은 교육 개혁의 영웅 역할을 했었다고 당시의 심경을 밝히고 있다(몸메 브로더젠, 발터 벤야민, p.26.). 벤야민은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향에 위치한 베를린 대학교를 오가며 당대 석학들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교육 개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벤야민은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자유 학교 조합 연맹 회원으로 대학 내 학교 개혁 분과를 맡았으며 의장단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13년 주최된 제1차 자유 독일 청년 대회 이후 청년 운동 진영은 불안한 유럽 정세와 맞물려 민중주의 사민주의, 공산주의 등 여러 파벌로 나뉘어지게 되고 벤야민은 차츰 당시의 청년 활동과 결별하게 된다. 1차 대전이 차츰 가까워지면서 당시 독일은 찬전 운동과 반전 운동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벤야민과 친했던 2명의 친구들이 반전 데모 중 전쟁 반대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자살을 택하게 되자 벤야민은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1차 대전 직전 전쟁의 광기를 여러 이데올로기로 정당화하는 와중에 벤야민은 침묵을 택하며 간접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뜻을 보였다. 그리고 1914년 베를린 자유 학생 연맹의 회장이자 의장단의 일원으로 재선출되었음에도 벤야민은 일체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으며 대학 강의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야말로 반쯤 자포자기했던 벤야민은 1915년 베를린을 떠나 뮌헨으로 향하게 된다. 벤야민은 뮌헨의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했으며 벤야민은 이때 여러 석학들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같은 유명인과도 친분을 트게 된다. 뮌헨에서 여러 유명인들과 친분을 튼 벤야민은 1917년 외국으로 나갔다. 스위스 베른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던 중 그는 희망철학으로 유명한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년 7월 8일 ~ 1977년 8월 4일)와 다다이스트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후고 발(Hugo Ball, 1886년 2월 22일 ~ 1927년 9월 14일)을 만나게 된다. 이들에게 많은 영감을 받은 벤야민은 베른 대학에서 4학기를 등록한 후 1919년 6월 독일 낭만주의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박사 학위를 따게 된다. 베를린을 떠나 타지 생활을 하는 동안 벤야민은 원래의 약혼녀이자 어릴 적 친구의 여동생이었던 그레테 라트와 결별하고 베를린에서 알고 지내던 유능한 저널리스트 도라 조피 켈너(Dora Sophie Kellner, 1890년 ~ 1964년)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벤야민과 도라의 결혼 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이미 한 번의 결혼 경험이 있던 도라였지만 부모의 지원 없이는 경제적으로 지극히 무능했던 벤야민이었기에, 다년간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은 아내인 도라의 몫이었고 이는 결국 1930년 둘의 결혼 생활이 파경을 맞는 계기가 된다. 비록 이혼은 했지만 그럼에도 언론인로서 도라는 벤야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나치의 발흥으로 벤야민의 목숨이 위태로워졌던 때에도 영국으로 망명했던 도라는 위기에 처한 벤야민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다.

2.1. 문필가의 삶을 택하다

스위스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벤야민은 1920년 3월 1차 세계 대전 후의 어수선한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시기의 벤야민은 부모와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진 상황이었다. 아버지 에밀 벤야민은 아들이 학문에 열중하는 대신 돈벌이가 되는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길 원했고 벤야민도 한때 출판사를 차리거나 골동품 중개상이 되는 것을 생각했을 정도였다. 거기에 세계 전쟁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고 대공황이 찾아오면서 경제적으로 윤택했던 벤야민의 집안은 이미 많은 자본을 잃은 상황이었다. 즉 이제 벤야민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줬던 윤택한 부르주아 계급의 생활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고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결국 벤야민은 학자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벤야민은 그동안 자신이 써왔던 산문집을 투고하거나 1차 대전 중 번역을 시작했던 샤를 보들레르의 『 악의 꽃』을 출판하는 등 번역가로 명성을 알리고자 했다. 이외에도 벤야민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잡지의 이름을 따 "앙겔루스 노부스"라는 이름의 잡지를 출판하거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교수 자격 취득 논문 심사에 도전하는 등 학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쯤 되면 아예 운이 없는 것인지 정작 벤야민이 글을 투고했던 잡지들은 인플레이션 때문에 출판되지도 못했고 1923년에 결국 출간된 보들레르의 번역본은 판매와 문단의 반응 모두가 시원찮은 상황이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벤야민이 1925년부터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온 교수 자격 취득 논문 심사에서도 결국 탈락하게 되었다. 학자의 길을 꿈꾸었던 벤야민이었지만 불행의 동시다발적인 테러 속에서 문필가의 길을 택하게 되었고 당시 독일 공론계를 주도하던 언론 매체들 속에서 벤야민은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문필가로서 여러 매체에 글을 쓰면서 벤야민은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쌓고 그들과 지적 교류를 이어가게 되었다. 블로흐 브레히트, 법학자 슈미트 아도르노 등 쟁쟁한 석학들과 벤야민은 지적 교류를 이어나간다. 이때 프랑크푸르트에서 알게 되었던 아도르노는 벤야민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벤야민은 딱히 학문적 분과나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많은 분야의 사람들과 다발적으로 교류를 이어나갔으며 이는 하버마스의 언급을 빌리자면 "그의 지식에는 초현실적인 것이 많이 섞여있으니 여기에 쓸데없이 일관성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독특한 사상 체계를 꾸려나가는 것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필가로서 경력을 쌓던 벤야민은 1924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화폐개혁으로 경제공황이 잠시 누그러들게 되자 이 시기부터 자주 유럽 곳곳을 여행하게 된다. 이 시기의 벤야민은 프랑스에 자주 머무르면서 프랑스의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저작을 번역하기 위한 계획을 짜기도 하고 유럽 여러 잡지에 자신의 글을 기고했다. 물론 벤야민에게 유럽 여행은 지식 교류와 관련된 일만은 아니었다. 이때의 벤야민은 1924년 베니토 무솔리니의 등장 이후 파시즘으로 기울어 가던 이탈리아에 방문하게 되고 벤야민이 파시즘을 본격적으로 부정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탈리아를 뒤로 한 벤야민은 1926년 겨울 동안 러시아 혁명 이후 성장하고 있던 소련에 잠시간 머무르며 소비에트 대백과 사전 중 괴테와 관련된 항목을 채워넣는 일거리를 얻기도 했다. 물론 벤야민의 성향상 소련 당국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글을 써줄 리가 없었고 그렇게 쓰인 항목은 당연히 검열로 크게 손질된 상태에서 출간되었다. 소련 여행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벤야민은 모스크바에서 겪은 일들을 생생하게 적은 모스크바 일기를 출간하기도 했으며 소련에서의 생활은 벤야민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소련을 여행하고 여러 경험을 쌓으면서 벤야민은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그의 세계관과 사상이 차츰 바뀌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소련을 뒤로하고 독일로 돌아온 벤야민은 이전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고 그에 영향을 받기 전의 벤야민이 낭만주의적 문필가와 같은 개념이었다면 영향을 받은 이후의 벤야민은 자신의 낭만주의에 마르크스주의의 특질 중 하나인 유물론을 더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벤야민의 사상이 완전히 마르크스주의로 변형된 것은 아니다. 벤야민은 자신의 사상에 마르크스주의의 특질들을 더했고 그런 사상은 분명히 급진적이기는 했지만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리고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창한 이데올로기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벤야민은 이후로도 사회주의에 대한 호의를 드러낸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제한적인 차원에 그쳤고 정작 벤야민 자신은 공산당에 당원으로 가입하는 등의 정치적 활동에는 거리를 두었다.
그대는 나로 하여금 붉은 깃발을 창문에 내다 걸지 못하도록 막을 참인가? ····· 만일 "반혁명적인 글"을 이미 써놓았다면(그대가 당의 입장에서 내 글에 내리는 아주 정당한 평가일세) 곧장 반혁명 진영으로 가서 그 글을 가져다 쓰라고 선전해야 한단 말인가? 그보다는 오히려 그 글이 변질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알코올 음료처럼 말일세. 그 글을 저 반혁명 주의자들이 절대로 즐길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살아가면서 피하는게 더 낫다고 깨닫게 되는 그런 사람들의 공고같은 언어와 자신을 구분하는 명쾌함이 언제 너무 컸던 적이 있던가? 그런 뚜렷한 점이 내 글에서는 오히려 적은 편이라네. 그리고 그것은 공산주의보다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더 큰 것 아닌가?
베를린에서 1931년 4월 17일에 게르숌 숄렘에게 보낸 편지

이와 같이 벤야민은 당의 입장과 전혀 다른 자신의 입장을 추구했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권을 보며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의 조약을 통해 두 전체주의 체제가 본 모습을 드러냈다."는 카를 티메의 발언에 동의하기도 했다. 벤야민은 막스 라이크너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유물론적 세계관에 가깝다"라고 말했지만 이것이 유물론적 세계관을 열렬하게 신봉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 편지를 통해 벤야민은 유물론적 세계관들이 영원한 이념이나 시간을 초월한 가치는 아니라고 밝힌 것도 특기할 만한 부분이다.

소련에서의 생활을 접어두고 독일로 돌아온 벤야민은 본격적으로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게 된다. 벤야민은 파시즘적 성향을 보이던 보수 우파를 맹렬히 공격했다. 좌파 급진주의 문단에도 벤야민은 그들이 "더이상 어떤 정치적 행위에도 상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어떠한 경향으로부터 좌측을 택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좌파가 되는 것을 택한다. 정치적 투쟁이 반드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강제 앞에서 만족의 대상으로 변하며 생산수단이어야 하는 것이 소비재로 뒤바뀌어 버린다"라며 혹독한 비판을 가한 것이다. 이와 함께 벤야민은 여러 이념을 가진 필진들이 모여 글을 쓰는 형식의 잡지를 출판하는 것을 계획하기도 했지만 필진들의 불화로 잡지 프로젝트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외에도 벤야민은 짧은 결혼 생활 이후 거의 별거상태에 들어가 있었던 도라 소피 겔르너와 완전히 결별하고 이탈리아 카프리섬에서 처음 만난 라트비아인 작가 아샤 라치스(Asja Lācis, 1891년 10월 19일 ~ 1979년 11월 21일, 본명은 안나 라체·Anna Lāce)와 새로운 생활을 꾸려나가게 되지만 이미 파탄나있던 벤야민의 경제적 여건은 새로운 결혼생활을 감당할 수 있을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결국 새로운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게 되고 시오니즘 운동가로서 그와 절친했던 게르숌 숄렘과의 관계도 어긋나게 되면서 벤야민은 또 다른 위기를 맞게 된다. 물론 그때 벤야민이 맞게 된 위기는 이후에 닥쳐온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2.2. 비극의 시작

바이마르 공화국의 해체를 공공연히 다짐하며 1932년 4월 프로이센 주의회 선거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권력을 잠식해오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내게 된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해체와 함께 유대인의 절멸을 거리낌없이 입에 담았던 파시스트 도당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곳곳에서 정치적 테러를 일으켰다. 테러가 일상이 된 와중에 벤야민이 1932년 11월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거친 유럽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의 베를린은 이미 그가 알고 있던 베를린이 아니었다. 1933년 2월 28일 숄렘에게 보낸 편지에서 더 이상 숨쉬고 싶지 않은 베를린의 공기를 언급하던 벤야민에겐 "어차피 경제적으로는 이미 내 목이 날아간 상태라서 그런 것들은 나에게 큰 힘을 못 쓴다."는 너스레를 떨만한 여유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경제와 언론 등 사회분야 전체가 나치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독일의 정치적 상황은 급속도로 벤야민에게 나쁜 쪽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당장 그가 글을 투고하던 프랑크푸르트 신문과 같은 언론기관들도 나치의 눈치를 보면서 벤야민과 거리를 두는 등 이미 독일에서 그가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차라리 경제적인 여건만 나빠진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나치가 권력장악을 위해 급조한 제국의회 사건에 에른스트 쇤, 프린츠 프렝켈 등 그와 가까웠던 운동가들이 끌려들어가면서 벤야민은 이제 자신의 목숨을 걱정해야 했다.

결국 벤야민은 베를린을 등지고 황급히 프랑스 파리로 떠나오게 된다. 나치 도당의 손길에서 벗어나는 것에는 가까스로 성공했지만 벤야민에게는 너무 상황이 안좋았다. 이미 벤야민 자신도 친구 게르숌 숄렘에게 보낸 편지에서 씁쓸하게 인정했듯이 자신은 경제적으로 목이 날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파리로 나왔다고 해서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벤야민을 괴롭히던 건강 문제는 치명적인 심장병으로 발전해 있었고 프랑스에도 나치에 동조하는 파시스트 세력이 차츰 고개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벤야민은 살아남기 위해 정말 필사적으로 일했다. 벤야민과 함께 피난왔던 지식인들 중 일부는 나치의 준동을 "곧 끝날 정치적 스캔들"로 여기던 것과 다르게 벤야민은 장기간의 망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벤야민은 프랑스와 스위스를 넘어 덴마크에서 발행하던 신문이나 뉴욕, 러시아에서 발행하던 저널에도 글을 투고하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조차도 대개는 원고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편집부의 의향에 맞춰 글을 써주는 등의 우울한 결말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전 당신의 연구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 주의깊게 읽었습니다. 새로운 자극을 주는 좋은 생각들 그리고 당신의 그 탁월한 동기에 대해서도 매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 사이에서 발생한 이런 문제들에 대해 당신에게 알리겠다는 우리 편집진의 결정을 저는 즉각 허락했으며 당신의 글을 읽는 동안 내게는 ·····>이런 의구심이 드는것이 사실입니다. 당신의 글을 프랑스에서 발간되는 우리 잡지의 작은 홍보 책자에 싣는 게 옳은 일인지 ···· 당신의 연구는 모험적입니다. 개별적인 사항들 중에서는 의문스러운 문제제기가 너무 많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잡지가 그처럼 강령적인 방식의 문제제기를 유포할 수 있을 지 자신할 수 없습니다. 뉴욕에서 열렸던 첫 편집회의를 끝낸 후 나는 그곳에서도 마찬가지의 염려가 제기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프리드리히 폴로크가 1936년 5월 12일 뉴욕에서 벤야민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벤야민에게 망명생활은 큰 상처였다. 경제적 곤궁은 끊임없이 벤야민을 괴롭혔고 외국에서 벤야민은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탁월한 사상가였기는 했지만 주류집단에 완전히 편입될 수 없는 망명자와 같은 처지였다. 거기에 경제적 곤궁과 함께 건강문제까지 벤야민을 괴롭히고 있었다. 1933년 벤야민은 혹독한 말라리아 증세로 인해 파리로 다시 되돌아와 값싼 호텔방을 전전하며 지내야 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소식들은 하나같이 우울했다. 일찌감치 공산당에 입당하여 베를린 노동자 거주지역에서 의사로 지내던 벤야민의 남동생은 나치에 의해 감옥으로 끌려들어갔고 그것은 독일에 남아있던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건강은 건강대로 악화되고 경제적 여건도 손쓸 도리가 없을 정도인 망명생활 속에서도 벤야민은 곤궁할지 언정 생기를 잃지는 않았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발행되던 망명지식인들의 잡지인 <총서>에 벤야민은 글을 투고했다. 글에서 벤야민은 "파시즘의 야만성이 위험한 것처럼 야만에 대한 이성의 정신적 지배를 찬양하는 자들도 정치적으로 맹목적이며 심지어는 위험할 수 있다. 파시즘의 이름으로 자신이 횡령되도록 만들어진 정신은 사라져야만 한다."면서 혹독하게 비판을 가했다. 물론 이 때의 독설은 파시즘이 전 유럽을 침식하는 상황에서 인문주의에만 호소하는 이성주의자들에게 그치지 않았다. 벤야민은 행동주의자들에게도 "오늘날에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그 무엇이 내일에는 이미 유해한 것으로 될 수 있다. 자신의 경이로운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총체주의적 정권에 대적하는 정신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혁명적인 투쟁은 자본주의와 정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비판을 남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비판은 벤야민이 원했던 것처럼 생산적인 방향으로 가지 못했다. 벤야민은 <총서>에서 내놓은 강령 중 하나인 야만적인 파시즘에 대한 정신적인 대항에 대한 언급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지만 그 비판은 무시되었다. 그리고 벤야민이 총서에 투고한 글은 당시 총서의 편집자였던 클라우스 만이 남긴 당신은 극단주의에 빠져있다는 비난에 끌려들어가서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다. 상황이 더욱 나빠지는 와중에서도 벤야민을 도와준 것은 그가 유럽 여행 때 사귀었던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전 아내였던 도라 등 지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이었다. 지인들의 노력으로 기력을 찾은 벤야민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산문들과 함께 쓴 추리소설이 미국에 팔렸으니 이제 슬슬 바다 건너에서 달러가 이곳으로 찾아오지 않겠냐며 약간의 여유를 되찾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3. 비극의 종점

혹독한 망명 생활에서 자살까지도 생각했던 벤야민에게는 아직 목표가 남아 있었다. 이제 친구들에게 돈을 부탁하는 전보를 보내는 것도 진력이 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이걸 계속해야 된다는 푸념을 늘어놓는 벤야민에게 삶을 이어나갈 만한 자극을 주는 것은 어떤 꼼꼼한 작업이었다. 소위 아케이드 프로젝트, 미완의 고찰로 알려진 파사젠베르크(Passagenwerk)가 그것이다. 망명 생활 통에 건강까지 악화되는 상황에서도 벤야민은 파사젠베르크를 계속 진행해 나갔다.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논평과 모아왔던 인용문, 현실에 대한 비평 등 모든 요소가 집약된 파사젠베르크는 벤야민에게 꼭 완성해야 할 무언가와도 같았다. 그러나 파사젠베르크는 그 규모와 다루는 주제에 비해서 너무 광대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벤야민 자신도 이 프로젝트가 망명 생활이라는 비정상적인 삶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방대한 작업이라는 것을 인정했을 정도일 만큼 말이다. 그래서 벤야민은 자신의 언급대로 "전쟁과 경주라도 하는 기분으로" 파사젠베르크를 채워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사젠베르크는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었고 벤야민은 결국 자신을 도와주던 사회조사 연구소와 상의해서 파사젠베르크의 축소판을 먼저 내놓기로 했다. "파리, 19세기의 수도"로 명명된 이 글은 벤야민 자신이 사회조사 연구소가 발행하던 잡지에 싣을 예정이었던 보들레르 원고를 축약한 것이었으며 그 글은 <보들레르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라는 제목으로 파사젠베르크라는 거대한 조형물의 첫 번째 조각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포화는 이미 벤야민이 살고 있던 프랑스에도 차츰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벤야민이 글을 싣던 사회조사 연구소도 위협을 느끼고 미국으로 옮겨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벤야민은 파사젠베르크를 끝마치기 위해 프랑스에 남아 저술 작업을 계속했고 연구소와의 갈등이 있긴 했지만 수정된 채로 자신의 에세이가 출간된 것에 벤야민은 "세계가 종말을 고하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었다는 승리의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벤야민은 그 자신의 안위에는 소홀했다. 프랑스 당국은 벤야민이 히틀러에 대해 명백히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벤야민과 일단의 망명인들이 히틀러의 첩자라며 억류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다행히도 벤야민은 프랑스에서 사귀었던 지식인들의 도움으로 풀려나올 수 있었지만 이렇게 풀려난 이후에도 벤야민은 파리로 돌아와 파사젠베르크를 완성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때 벤야민은 <역사 개념에 대하여>를 완성하고 자신이 쓴 수필집인 <1900년 베를린의 유년 시절>을 출판하기 위해 이 와중에도 출판사를 몰색하고 있었다. 결국 1940년 5월 독일 군대가 프랑스 국경을 넘어 진군해오게 되자 그는 수백만 명의 프랑스인들과 함께 미국으로 가기 위해 에스파냐로 향하게 된다. 에스파냐 국경은 이미 막혀 있었고 결국 벤야민은 자신의 지병인 심장병에도 불구하고 피레네 산맥까지 넘어가며 프랑스를 간신히 탈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말 운이 없게도 벤야민과 그들이 속해 있었던 난민 대열은 에스파냐 세관에 붙잡혔다. 에스파냐 세관은 벤야민과 함께 온 난민 집단을 출국시키겠다고 협박했고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버린 그는 결국 음독자살을 택했다. 시대를 풍미했던 한 문필가의 최후는 이렇게 허망했다.[5]

3. 사상

벤야민은 문필과 역사, 철학 등 하나의 분과를 집중적으로 파고들기 보다는 다수의 분과를 다양한 관점으로 파고든 것이 특징이었다. 거기에 역사 개념에 대해서와 같이 은유적 개념과 초현실적인 개념을 통해 전개되는 그의 사유과정은 하버마스가 그에 대해 했던 말처럼 비일관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좀더 들여다보면 벤야민의 사유과정에서는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벤야민 자신이 강조한 '유물론적 사유'에 대한 것이다. 유물론적 사유에서 중요시 되는 것은 파사젠베르크에서 이어지는 문제의식과 궤를 같이한다. 그것은 빛이 번쩍거리지만 기만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 판타즈마고리아'를 걷어내고 현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역사 개념에 대해서란 글에서 나타나듯 벤야민은 르네 데카르트를 모티브로 삼아 사람들에겐 매우 친숙하고, 심지어 희망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지는 '유행'과 '새로움', 그리고 '역사적 진보'라는 개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벤야민은 우군으로 여겨지던 새로움이란 개념은 단지 사람들을 꾀어내기 위한 착취자들의 장식품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역사적 진보라는 개념 때문에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현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다.

예술 분야에서 그의 저작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필독서가 되었다. 사진이나 영화 등의 기술 발전을 복제의 관점에서 고민하고, 이것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숙고한 벤야민의 시도는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은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었고, 확실히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아우라 개념이 나오게 된다.

4. 어록

도구로부터 자유로운 실재는 이제 가장 인공적인 것이 되었고, 직접적 현실의 광경은 기술의 나라 안에서 푸른 꽃[6]이 되었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문자에 정통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사진에 정통하지 못한 사람이 미래의 문맹자가 될 것이다.
─『사진의 작은 역사』
Aber ein Sturm weht vom Paradiese her, der sich in seinen Flügeln verfangen hat und so stark ist, daß der Engel sie nicht mehr schließen kann. Dieser Sturm treibt ihn unaufhaltsam in die Zukunft, der er den Rücken kehrt, während der Trümmerhaufen vor ihm zum Himmel wächst. Das, was wir den Fortschritt nennen, ist dieser Sturm.
그러나 천사의 날개짓을 방해하며 날개를 접을 수 없을만큼 강한 폭풍이 낙원에서 불어오고 있다. 그의 앞에 쌓인 폐허 더미들이 하늘만큼 높이 치솟는 사이, 천사가 등을 돌린 미래를 향해 폭풍은 쉴새없이 그를 내몬다. 우리가 진보라고 이름붙인 것이 바로 이 폭풍이다.
─『역사의 개념의 관하여』, 9번 테제[7]
Solange es noch einen Bettler gibt, solange gibt es noch Mythos.
여전히 거지가 있는 한, 신화는 있다.[8]
─『아케이드 프로젝트』 2권

5. 주요 저술

제목 발간 연도[9]
<colbgcolor=#fff,#1f2023>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
Der Begriff der Kunstkritik in der deutschen Romantik
<colbgcolor=#fff,#1f2023> 1920년
번역자의 과제
Die Aufgabe des Übersetzers
1921년
폭력비판을 위하여
Zur Kritik der Gewalt
1921년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Kapitalismus als Religion
1921년
괴테의 친화력
Goethes Wahlverwandtschaften
1921 /22년
독일 비희극의 원천
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
1928년
일방통행로
Einbahnstraße
1928년
초현실주의
Der Surrealismus
1929년
사진의 작은 역사
Kleine Geschichte der Photographie
1931년
독일인들, 일련의 편지들
Deutsche Menschen. Eine Folge von Briefen
1936년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1936년
보를레르의 몇가지 모티브에 관하여
Über einige Motive bei Baudelaire
1939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1942년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Berliner Kindheit um neunzehnhundert
1950년
파사주 프로젝트
Passagen-Werk
1982년

6. 관련 문서

7. 여담

  • 테오도어 아도르노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심지어 아도르노는 벤야민의 아이디어와 모티프를 그대로 많이 베끼기까지 했다. 아도르노의 대표작 『계몽의 변증법』은 사실 벤야민의 아이디어를 '인용한다는 언급도 없이' 가지고 와서 지은 책이다. 재밌는 건 정작 아도르노는 벤야민이 살아있을 때, 벤야민의 많은 작품들을 비판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그것을 베낀 것. 그래서 벤야민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물론 아도르노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도 많이 있고, 벤야민의 아이디어도 그대로 베끼진 않고 나름 자신의 용어로 바꾸긴 했다. 하지만 정말 용어 그대로인 경우도 많은데, 그런건 인용했다는 언급없이 그대로 넘어가거나, 정말로 부정할 수 없는 것들은 "발표 여부와 상관없이 이전에 자신도 비슷한 것을 생각한 적이 있다"[10]라는 주석을 달면서 핑계를 대기도 한다.
  •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친분이 있었는데, 벤야민의 사후 브레히트는 벤야민의 죽음을 기리는 시를 쓴 적도 있다.

[1] [ˈvaltɐ ˈbɛnjamiːn\]. 외래어 표기법을 따른 표기는 베냐민이겠지만 실제 학계에선 벤야민이 더 많다. [2] 자신만의 철학을 심도 있게 진행한 다음에서야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고로, 동세대 맑시스트 중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색체가 그렇게까지 선명하지 않은 축에 속한다. [3] 외부 서클에 속하고 또 2차 대전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인 다수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달리, 활동 시간대도 2차대전 이전으로 한정되어 미묘하게 어긋나기 때문에 비판 이론으로 분류하기도 하고 분류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벤야민은 아도르노를 포함해 많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므로 1세대 비판이론가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4] 조르조 아감벤, 자크 랑시에르 등 후대 정치 철학자들에 의해 벤야민의 정치적 연구가 재발굴되며 현재에는 마르크스주의 정치철학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5] 그리고 더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벤야민의 자살 다음날 그와 함께 망명을 시도한 일행의 입국이 허용됐다는 것이다. 게슈타포가 벤야민의 탈출을 막으라는 특별 지령을 내렸다는 설도 있다. [6]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로부터 유래된 상징으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 대한 추구를 가리킨다. [7] 파울 클레가 그에게 선물로 준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라는 수채화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은 문구로, 벤야민의 저작 중 가장 높은 인지도를 갖고 있는 글이다. 해당 글의 원문 및 번역 전문은 해당 링크 참조 [8] 가난한 사람이 있는 한, 마르크스주의는 지속될 것이라는 얘기. [9] 일부 에세이의 경우 발간 연도가 아닌 저술 연도를 기입. [10] "er selber Ähnliches, ob nun veröffentlicht oder nicht, schon früher gedacht ha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