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발리스 Novalis |
|
|
|
이름 |
게오르크 필리프 프리드리히 폰 하르덴베르크 남작 Georg Philipp Friedrich Freiherr von Hardenberg |
출생 | 1772년 5월 2일 |
신성 로마 제국 작센 비더슈테트 | |
사망 | 1801년 3월 25일 (향년 28세) |
신성 로마 제국 작센 베이센펠스 | |
국적 | 독일 |
학력 |
예나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비텐베르크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광산 학교 |
직업 | 시인, 작가, 철학자 |
[clearfix]
1. 개요
독일의 시인, 철학자로 독일의 초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이다.노발리스(Novalis)는 필명이며 본명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하르덴베르크 남작이다.
2. 생애
노발리스는 작센 지방의 몇 안되는 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1명의 자녀 중 둘째였으며, 그의 가족은 독실한 경건주의였다. 그는 예나 대학, 라이프치히 대학,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예나에 있는 동안 그는 첫번째 시를 출판했고 극작가이자 시인인 실러와 친분을 맺었으며, 피히테의 수업을 들었다. 라이프치히에선 슐레겔을 만나 평생의 친구가 된다. 1794년 22세의 나이로 법학 학위를 마쳤고, 졸업 직후 텐슈테트에서 법률 조수로 일했다. 그곳에서 노발리스는 운명의 여인 조피 폰 퀸(Sophie von Kühn)을 만난다. 이듬해 노발리스는 조피 부모의 허락을 받고 비밀리에 약혼했지만, 조피는 약혼 직후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조피의 예상치 못한 죽음은 이후 노발리스에게 문학과 정신적인 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노발리스는 1797년부터 프라이부르크 광산 대학교에 등록하여 전기, 의학, 화학, 물리학, 수학, 광물학 및 자연 철학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다. 이듬해 그는 이 대학교 교수의 딸인 쥘리 폰 샤르팽티에와 두번째로 약혼했는데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노발리스는 그 곳에 있는 동안 여러 곳을 다니면서 괴테, 셸링, 아우구스트 슐레겔 등의 초기 낭만주의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대학의 3년의 교과 과정을 2년만에 수료했다.
노발리스는 1798년에 첫번째 철학 파편집 <꽃가루>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때부터 본명 대신 노발리스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광산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작센과 튀링겐에서 소금 광산 책임자로 일했으며, 이 기간 동안 《밤의 찬가》를 포함한 그의 주요 시 및 문학 작품을 써서 슐레겔의 《아테네움》에 발표하였다. 1800년에 노발리스는 결핵으로 의심되는 질병[1]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고, 1801년 3월 25일 28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다.
3. 사상
4. 작품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에 그의 창작기간은 4년이 채 되지 않는다. 생전에 발표된 작품은 푸른 꽃, 신앙과 사랑 또는 왕과 왕비, 밤의 찬가 3개 뿐이며 다른 작품은 모두 사후에 출판되었다.철학 파편집
< 푸른 꽃 > (1798)[2]
<신앙과 사랑 또는 왕과 왕비> (1798)
시집
<밤의 찬가> (1800)
<종교적 노래들> (1802)
소설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 (1802)
<사이스의 제자들> (1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