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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스페인의 방송국 안테나3가 스페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후안 카를로스 1세 | 미겔 데 세르반테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 아돌포 수아레스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 | 펠리페 6세 | 파블로 피카소 | 예수의 테레사 | 펠리페 곤살레스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이사벨 1세 | 세베로 오초아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 호세 사파테로 |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살바도르 달리 | 안토니오 가우디 | 엘 시드 | 알폰소 10세 | 페르난도 알론소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프란시스코 데 고야 | 프란시스코 프랑코 | 안토니오 마차도 | 미겔 인두리안 | 미카엘 세르베투스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로라 플로레스 | 펠리페 2세 | 카를로스 1세 | 로시오 주라도 | 그레고리오 마라뇬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디에고 벨라스케스 | 이사벨 판토하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미겔 데 우나무노 |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비센테 페레르 | 카밀로 호세 셀라 | 페드로 두케 | 다니 페드로사 | 파우 가솔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다비드 비스발 | 라파엘 나달 | 카마롱 데 라 이슬라 | 아스투리아스의 펠라기우스 | 후안 라몬 히메네스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산티아고 카리요 | 안토니오 반데라스 | 이냐시오 데 로욜라 | 페드로 알모도바르 |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 미겔 에르난데스 | 후안 마누엘 세라 | 로페 데 베가 | 엘 그레코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아구스티나 데 아라곤 | 호아킨 사비나 |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 | 앙헬 니에토 | 마누엘 아사냐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조르디 푸졸 |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 알레한드로 산스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 에르난 코르테스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카를로스 사인츠 | 파퀴리 | 텔모 사라 | 몽세라 카바예 | 마누엘 데 파야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이삭 페랄 | 플라시도 도밍고 | 미겔 길라 | 루이스 부뉴엘 | 엘 코르도베스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프란시스코 피사로 | 마리아노 바울바시드 | 라울 곤살레스 |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오초아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아만시오 오르테가 | 마놀레테 | 에두아르도 칠리다 | 페란 아드리아 |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 호아킨 로드리고 | 에밀리오 보틴 |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 프란시스코 헨토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세바 바예스테레스 | 이삭 알베니스 | 페데리코 바하몬테스 |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 카르멘 아마야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빈센트 블라스코 이바네스 | 마누엘 산타나 | 알리시아 코플로비츠 | 안토니오 루이스 솔러 | 자코네로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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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BC가
21세기 새 시대를 맞아 1999년 조사한 지난 천년동안 가장 위대한 작가 조사. 1999년 2월 한 달 동안 BBC 웹사이트에서 진행한 영국인들의 투표로 매겨졌으며, 영국인들이 뽑은 순위라 영국 작가들에게 상당히 편중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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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윌리엄 셰익스피어 | 제인 오스틴 | 조지 오웰 | 찰스 디킨스 | 이언 뱅크스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J. R. R. 톨킨 | 제임스 조이스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미겔 데 세르반테스 | 마크 트웨인 | |||||
출처 | }}}}}}}}} |
미겔 데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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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 본명 |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1] Miguel de Cervantes Saaved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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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47년 9월 29일 | |||
에스파냐 군주국 알칼라 데 에나레스[2] | ||||
사망 | 1616년 4월 23일 (향년 68세) | |||
에스파냐 군주국 마드리드 | ||||
직업 | 소설가, 군인, 시인, 극작가, 세금 징수원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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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000> 언어 | <colbgcolor=#fff,#191919> 스페인어 | ||
묘소 | 마드리드 트리니티 탁발 수녀원 | |||
부모 | 아버지 로드리고 데세르반테스 (1509-1585) | |||
어머니 레오너 데코티나스 (1520-1593) | ||||
배우자 | 카탈리나 데살라자르 이 팔라시오스 (1565-1626 / 1584년 결혼) | |||
자녀 | 딸 이사벨 데사아베드라[혼외자녀] (1584-1659) | |||
종교 | 가톨릭 | |||
별명 |
레판토의 외팔이[4] (El Manco de Lepanto) 지혜의 왕자 (Principe de los Ingenios)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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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소설가, 군인, 시인, 극작가, 세금 징수원.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그의 대표작인 돈키호테는 최초의 근대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1547년 9월 29일에 태어났다고 알려졌으나 이 날짜는 고향 마을 성당에서 보관하던 세례성사 기록부[5]에 적혀 있던 날짜에서 가톨릭 관습상 태어나서 유아 세례를 받는 기간을 역산해서 계산한 것이라,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마드리드 북쪽에 자리잡은 카스티야 지방의 작은 도시인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á de Henares)에서[6] 몰락한 이달고[7] 집안을 뿌리로 둔 이발사 겸 외과 의사인 로드리고 세르반테스의 아들로 태어났다.[8] 할아버지는 종교재판소 변호사였다.
오늘날 변호사, 의사 집안이라고 하면 대단하다 생각하겠지만, 이 시대 문맥에서 변호사, 원래 말로 licenciado라 하는 사람들 역할은 공증인에 더 가까웠고, 사실 현대에도 변호사 사회 잘 보면 그렇듯이 왕실 직속 관료 기관에서 일하는 관료 정도라면 몰라도 많은 경우 실제 하는 일은 동네 관공서 서기 정도 지위로 딱히 크게 부유하지도 못했다. 그나마 세르반테스 할아버지 후안 데 세르반테스는 교육도 살라망카 대학 법대 제대로 나왔고, 여기저기 중소도시 시장직도 겸임하며 대귀족 집안 변호사로도 일해보는 등 상당히 성공한 공무원의 삶을 살았던 모양인데, 막상 출세하면서 마누라하고 애들, 즉 세르반테스의 아버지인 로드리고와 삼촌 안드레스는 내팽개쳐두고 자기는 마음대로 고향인 코르도바로 돌아가버려 세르반테스의 집안은 부자 할아버지를 두고도 가난했다. 의사도 피를 뽑거나 땀을 흘리게 해서 환자를 고치는 수준이었다. 그런 일은 이발사도 했다. 당시 스페인은 순수 기독교 집안 혈통을 중시했다.
따라서 의사나 변호사, 세금 징수원 같은 일은 주로 콘베르소, 즉 유대계 개종자들이 했던지라 보수도 안 좋고 사회적으로 멸시까지 받았다. 게다가 아버지 로드리고는 어린 시절부터 청각에 문제가 있었던 데다, 경제적으로 좀 더 나은 삶을 찾아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가족들이 스페인 여러 곳을 떠돌았다. 빚 때문에 옥살이도 했다. 세르반테스의 유년 시절은 가난과 비참함과 부끄러움으로 얼룩졌다. 세르반테스의 학력은 불분명하나 대학은 밟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1568년 당대 최고 지식인 후안 로페스 데 오요스가 낸 수필집에 그의 시 4편이 실린 적이 있다. 돈키호테 전편 제9장에 나오는데,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찢어진 종이라도 주워 읽는 열렬한 독서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554년 빚 때문에 전 재산을 차압당하여 가족들은 13년 동안 스페인 전역을 떠돌아다녔다.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는 것이 없지만, 마드리드로 집안이 이사한 1560년대부터 저명한 인문학자인 로페스 데 오요스(López de Hoyos) 아래에서 학문을 배웠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후 1569년이 되자 교황청에 특사로 파견된 스페인 추기경의 종자로 선발되어 로마 물을 좀 먹고, 이후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동군연합으로 있던 나폴리 왕국으로 가서 그곳에 주둔해 있던 스페인 해군에 지원하게 된다. 당시 세르반테스가 왜 난데없는 군 입대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9월에는 "왕이 머무는 궁정이나 성채 등에서 싸우면서 무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라는 법을 위반해, 오른손이 잘리고 10년 간 마드리드에서 추방당하는 벌에 처해지자 이를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이탈리아 반도로 도망갔다. 로마에서 먼 친척뻘 되는 고위급 사제의 도움을 받고, 훗날 추기경이 되는 다른 사제의 수행원으로도 일하면서 르네상스 문학을 섭렵했다.
그러다 1571년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의 해군에 맞서 결성한 전투함대 휘하 부대에 자원 입대한다. 스페인과 교황청, 베네치아, 제노바가 중심이 된 신성 동맹의 연합함대와 오스만 제국 함대가 맞붙은 레판토 해전이 벌어질 즈음에 재수없게 열병에 걸렸다. 레판토 해협에서 대승했지만, 이때 총상을 입고 왼손이 불구가 되어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그때가 24세였다. 군 생활을 계속하다가 1575년 9월에 막시밀리안 2세 황제가 써준 표창장을 받고 제대하면서 조국 스페인으로 돌아오던 길에 악명 높은 알제 해적들에게 형 로드리고와 함께 포로로 잡히고 5년 동안 알제리에서 갇혀 지내게 되었다.
세르반테스 형제는 5년만에 마드리드에 있는 트리니타리아스 수녀원에서 그를 위해 해적들에게 몸값을 지불해줌으로서 풀려나게 된다. 이 과정이 상당히 드라마틱한데, 세르반테스를 데리고 있던 쪽이 원래 수녀원에 요구한 금액보다 더 높은 금액을 부르자 수녀원은 세르반테스 가족에게 받은 돈 외에 부랴부랴 주변 상인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간신히 돈을 마련할 수 있었고, 세르반테스가 코스탄티니예로 가는 배에 강제로 태워져 막 출발하려고 하기 전 협상이 타결되었다. 그렇게 노예 신분으로 5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가, 가족이 모은 돈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풀려났다. 그때가 33세였다. 그때 자유의 중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돈키호테의 주제 중 하나가 자유다. 인간이 어떻게 인간을 구속할 수 있나 묻는다. 집에 돌아왔지만 가세는 더 기울어 있었다.생계를 위해 포르투갈로 가서 왕실 업무를 봤고 이때 첫 번째 소설 ‘라 갈라테아’를 집필한다. 그는 당시 꿈의 대륙인 중남미 파견을 청원했지만 불발에 그쳤다. 아마 집안이 개종 유대인이라서 그랬을 걸로 추측한다
세르반테스는 풀려난 뒤 군사 식량을 납입하는 식량 조달원으로 안달루시아 지방을 떠돌아다니는 직책을 맡았으나, 그런 중에도 교회 소유 밀을 징발했다고 파문당하고, 당국 허락 없이 밀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풀려난 뒤로 그라나다에서 세금 징수원을 했는데, 책임자의 먹튀와 기타 억울한 과정으로 인해 다시 세비야 감옥에 7개월 동안 갇힌다.[9]
갇혀 있던 동안에 그는 돈키호테를 구상했다. 그리고 풀려난 뒤 바야돌리드에 가정을 꾸렸고 거기에서 돈키호테 1권을 탈고하며 1605년 돈키호테 1권이 출판된다.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지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이 되었고 문학사를 대표하는 걸작의 반열에 오른다. 이때의 나이가 58세. 라 갈라테아 이후 무려 20년 만에 내놓은 소설이다. 돈키호테는 당대 유럽 최고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 어마어마한 인기로 끌었고 1614년에 다른 작가가 무단으로 돈키호테 속편을 출간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런 광경을 본 세르반테스는 1615년 정식 돈키호테 속편을 낸다. 그 뒤 마드리드로 거주지를 옮기고 1616년 4월 22일 당뇨병과[10] 간경변으로 한편의 영화같은 생을 마감한다. 향년 68세. 숨질 때까지 트리니티 탁발 수녀원의 일을 도왔다고 한다. 결국 사후에 그 수녀원에 묻혔다.
이때 트리니티 탁발 수녀원에 묻혔으나, 수녀들 및 수녀원 관계자들만이 참석한 채 장례 미사가 치러졌고, 그 후 4세기가 지나 누구도 그가 묻힌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약 400년 만인 2014년, 스페인 정부에서 10만 유로(약 1억 4천만 원)가까이를 들여 트리니티 탁발 수녀원 내의 세르반테스의 유해를 찾았다. 하지만 DNA 검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세르반테스의 유해라고 확신하느냐는 반론이 있어서 새 무덤을 만드는 것은 흐지부지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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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에스파냐 광장 세르반테스 기념 동상 |
20세기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 단테 이후 서양의 중심 작가는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였으며 그 이후에 나온 톨스토이나 괴테, 디킨스, 프루스트, 조이스도 그에 못 미친다"라고 평했다. # 현대 스페인에선 당연히 자국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추앙하고 있다. 수도 마드리드의 중심부인 에스파냐 광장에는 그와 돈키호테, 산초의 동상이 있으며, 스페인 심장부에 동상이 있다는 의미로 국가의 아이콘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3. 문학적 특징
세르반테스는 당대 거의 모든 문학 장르를 섭렵했다. 소네트가 발달한 르네상스 시대의 탁월한 시인이기도 했으며, 연극의 시대를 비판적으로 극복한 극작가이기도 했다. 또 산문가로 목가 소설, 기사 소설, 비잔틴 소설 등 로망스 장르를 다양하게 편력했다.하지만 단연 돋보인 것은 소설가 세르반테스였다. 운문 연극 시대에 극작가로 출세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그만큼 타고난 불세출의 산문가요 소설가였음을 증명한다. 단 한 편도 무대에 올리지 못하고 책으로 묶어내는 데 만족해야 했던 『여덟 편의 코메디아와 여덟 편의 막간극』 서문에서도 연극을 볼 관객이 아니라 읽어서 감상할 독자를 향해 작품의 이해를 구하고 있었다. 관객에게 공연으로 호소하기에는 너무 진지하고 산문적이었다. 자신이 스페인어 최초의 소설가라고 자부하게 만들었던 12편의 모범 소설집은 이탈리아 노벨레 형식을 받아들여 한층 도덕적이면서 사실적으로 발전시킨 소설 실험이었다. 마침내 과거와 당대의 다양한 스토리텔링 양식을 실험하고 융합해 시대 변화를 통찰한 창의적 문학 지평을 열었다. 독창적으로 창조한 주인공 돈키호테의 방랑과 대화에 민담, 고전 우화와 노벨레 등 모든 형식의 이야기들을 망라해 녹여낸 서양 최초의 근대 소설 『 돈키호테』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 전의 기사 소설은 전지전능한 3인칭 시점에서 이야기를 묘사해 나갔다. 반면 돈키호테에서는 등장인물이 대화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 전에는 주인공의 이름이 정해져 있었다. 그 사람의 운명이 알려져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작중 주인공이면서 자신을 창조해 나가며 자신이 신의 입장이 된다. 작품 도입부에 라만차 마을에 이달고가 살고 있었다고 소개하고는, 그의 이름이 불분명해 ‘키하다’, ‘케사다’, ‘케하나’ 여러 가지로 불렸다고 나온다. 주인공이 기사로 나서기로 결심하면서 열흘간 고민 끝에 스스로 지어준 이름이 돈키호테다. ‘돈’은 경칭이고, ‘키호테’는 갑옷의 허벅지 보호 장비 이름이다. 자기가 말 이름도 정한다. 로시난테다. ‘그 전에는 비쩍 말랐지만 지금은 어느 말보다 뛰어난’ 말이라는 뜻이다. 기사에게 필요한 귀부인도 이웃집 여인 알돈사를 상상의 여인 ‘둘시네아’로 부른다. 자기가 자기 삶을 만들어 가기 위해 이름을 부여한다. 유대인 스콜라 철학에 보면 호칭이 정체성을 바꾼다고 나온다. 이름이 불명이던 사람이 자기 삶을 살기 위해 자기 이름을 정한다. 그리고 행동한다. 인간은 가문이나 혈통의 자식이 아니라, 자기 행위의 자식이라고 선언한다. 실존이 기능을 결정짓는 게 아니라 기능이 실존을 결정한다는 거다.
책을 읽다 미치는 주인공도 문자 그대로 열린 근대 사회를 그럴 듯하게 웅변한다. 책에 박식한 돈키호테와 구전 속담에 능통한 산초가 맞서 펼치는 풍부한 유머와 넘치는 재담, 그리고 수많은 일화들은 후대 문학과 예술에 무한한 사색과 영감의 원천이 됐다. 도스토옙스키는 세상에 『돈키호테』만큼 심오하고 강렬한 것은 없으며 인간 사유의 궁극적이고도 가장 위대한 표현이라고 예찬했다.『돈키호테』는 중세 기사 로망스를 패러디해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리얼리즘 소설의 효시로 꼽혀왔고, 오늘날 소설 이론 일반의 시금석이 됐다.『돈키호테』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가 ‘진리/진실’이었음은 의미심장하다. 인쇄술 발명으로 도래한 활자 문명 시대에 언어에 갇힌 이성 중심주의의 본질과 한계를 되새기게 한다는 점에서 세르반테스는 책은 인문주의로 빛난다.
4. 대표작
그가 쓴 희곡은 약 30여 개에 이르지만 가난 속에 헐값에 판권을 팔고[11]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 돈키호테>와 <알제리에서 삶>, <누만시아>이다. 참고로 기사도 문학을 싫어했다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세르반테스야말로 진정 기사도 문학 덕후라는 의혹이 있다. 이를 테면, 세르반테스 시절의 기사도 문학은, 실존하는 어떤 이야기를 작가가 단지 전달만 할 뿐이라고 설정하는 클리셰가 있었다. 반지의 제왕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이 클리셰를 그대로 가져왔다. 음모론 중에서는 검열을 피하기 위한 거짓말 아니냐는 소리가 있는데, 이는 당대 클리셰의 충실한 계승으로 보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 돈키호테는 검열을 당당히 통과하여 왕실 인가까지 받았고, 당연히 작가는 세르반테스의 이름으로 검열을 받아서 통과했다.또 다른 대표작으로 <모범 소설집>이라는 단편집도 있다. 수작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으니, 읽어보기 바란다. 한국어로 번역도 되어 있다.[12] 1613년에 출간된 모범 소설집은 크게 귀족을 주인공으로 이상주의적 교훈을 담은 소설과 도시 서민과 날품팔이, 떠돌이 악사, 건달, 도둑 같은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로 나뉜다. 두 부류의 문체와 소설의 짜임새 및 완성도에서 보이는 차이는 이들이 긴 시간에 걸쳐 쓰인 작품들임을 알려준다. 여러 우여곡절이 얽혀 전개되며 르네상스적 사랑을 주제로 하는 전자에 비해 리얼리즘적 시각에서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펼쳐지는 후자가 더 나중에 쓰인 작품들이다. 이는 세르반테스가 작가로서 보이는 발전 양상일 뿐 아니라 소설이라는 장르의 발전상을 드러내주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5. 세르반테스에 대한 평가
최초의 근대 소설인 돈키호테는 여전히 가장 훌륭한 소설로 남아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만이 세르반테스의 천재성에 근접합니다.[13]
거의 동시에 죽은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는 적어도 단테 이후 서양의 중심 작가이며, 그 이후로는 톨스토이나 괴테, 디킨스, 프루스트, 조이스도 그들에 근접하지 못했습니다.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는 문맥에 속할 수 없습니다: 스페인의 황금 시대와 엘리자벳-자코베안 시대는 우리가 주어진 것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 부차적인 것입니다.
돈키호테의 미학적 진리는 다시 단테나 셰익스피어처럼 우리가 위대함과 직접 대면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돈키호테의 탐구와 그것의 동기, 그리고 원하는 목적을 완전히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쁨에 굴복하는 동안에도 우리를 놀라게 하는 반사 거울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세르반테스는 항상 우리 앞에 있고, 우리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헨리 필딩, 로렌스 스턴, 괴테와 토마스 만, 플로베르와 스탕달, 허먼 멜빌과 마크 트웨인, 도스토옙스키, 이 작가들은 세르반테스의 숭배자이자 제자들 중 하나입니다.
해럴드 블룸 #
거의 동시에 죽은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는 적어도 단테 이후 서양의 중심 작가이며, 그 이후로는 톨스토이나 괴테, 디킨스, 프루스트, 조이스도 그들에 근접하지 못했습니다.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는 문맥에 속할 수 없습니다: 스페인의 황금 시대와 엘리자벳-자코베안 시대는 우리가 주어진 것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 부차적인 것입니다.
돈키호테의 미학적 진리는 다시 단테나 셰익스피어처럼 우리가 위대함과 직접 대면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돈키호테의 탐구와 그것의 동기, 그리고 원하는 목적을 완전히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쁨에 굴복하는 동안에도 우리를 놀라게 하는 반사 거울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세르반테스는 항상 우리 앞에 있고, 우리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헨리 필딩, 로렌스 스턴, 괴테와 토마스 만, 플로베르와 스탕달, 허먼 멜빌과 마크 트웨인, 도스토옙스키, 이 작가들은 세르반테스의 숭배자이자 제자들 중 하나입니다.
해럴드 블룸 #
세르반테스의 삶은 온갖 사건과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에스파냐어권의 뛰어난 작가가 쓴 소설처럼 드라마틱하다. 그의 명성은 서양 언어권에서 단테, 셰익스피어,
몽테뉴, 괴테와 톨스토이가 보여주었던 탁월함처럼 영원한 것이다. (중략) 세르반테스는 글 쓰는 방법을 알았고, 돈키호테는 행동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오로지 서로를 위해 태어난 하나다.
해럴드 블룸 #
해럴드 블룸 #
아!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떤 것이며, 사물에 접하는 그의 방식이 어떠한 것이지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텐데. 언제가 될 것인지는 몰라도 만일 누군가 와서 세르반테스가 지니고 있는 문체의 신비로움을 폭로해 낸다면, 그래서 그 사실이 다른 여러 문제들로 연계되어 간다면, 단지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삶으로 깨어날 수 있을 텐데!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스페인 철학자)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스페인 철학자) #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와 산초라 불리는 밭에 사상의 씨앗을 뿌렸을 뿐인데, 그 땅과 씨앗이 워낙 풍요한 것이라서 대대손손 열매를 맺어 가고 있다.
살바도르 데 마다리아가 (스페인 작가, 외교관) #
살바도르 데 마다리아가 (스페인 작가, 외교관) #
아, 그 세르반테스라는 친구는 오래전부터 나와 아주 절친한 사이지. 내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시 쓰는 일보다는 불행에 더 이력이 난 것 같아. 그 친구 책은 무언가 독창성이 보이긴 해. 하지만 시작만 해놓고 무엇 하나 끝내놓은 게 있어야지.
돈키호테 1권에 나오는 구절[14]
돈키호테 1권에 나오는 구절[14]
6.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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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오브 라만차
세르반테스 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동료 죄수들 앞에서 돈 키호테를 상연하는 극중극 뮤지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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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온라인
에스파니아의 해상 NPC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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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5
에스파냐에서 성실한 징수관이었지만 공금을 맡긴 은행이 도산하고 야반도주하면서 돈이 전부 사라지자 공금횡령죄로 체포되었으며, 세르반테스의 친구가 그를 석방하기 위해 주인공 일행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세르반테스의 친구는 석방하기 위해 20만 정도의 보석금이 더 필요하지만 친척, 지인에게 돈을 얻지 못해 후원자를 찾은 것이라고 한다. 주인공 일행이 보석금을 내서 풀려나자 감사하다고 하면서 나폴리에 간다고 하며, 에스파냐 해군에 입대해 오스만의 군사와 싸울 것이라고 한다. 주인공 일행의 도움으로 나폴리까지 가며, 포르투갈 왕궁에서 주인공 일행을 찾고 있다는 정보를 주고 해군에 입대하러 떠난다. 해군에 입대해 아프리카 방면으로 출장갔다가 총탄이 박힌 고대인의 유골을 발견했으며, 이 유골을 발견한 일은 잉글랜드 왕궁에서 화제가 되었다. 주인공 일행이 이 유골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아프리카 남단의 아프리카 대폭포 거점을 조사했는데, 총알이 박힌 유골이 아닌 땅속의 유골을 발견하자 세르반테스에게 그 유골에 대해 듣기 위해 다시 런던으로 돌아갔는데, 집무관이 세르반테스는 에스파냐 선박으로 지중해를 항해하다가 오스만 함대에게 공격받아 실종된 사실을 전하면서 세르반테스를 찾아낼 것을 부탁하고 나폴리에 있는 에스파냐 주둔 함대의 사령관인 페르난도 로아이사를 찾아가라고 한다. 오스만 함대의 공격으로 나포되어 포로가 되었는데, 런던에서의 명성, 사관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인해 엄청난 거물로 오해받아 알제에서 포로로 지내게 되었다고 하며,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에서 세르반테스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100만을 요구했지만 에스파냐에서는 세르반테스는 그런 막대한 금액을 지불할 수 없었기에 니나가 나서서 보석금을 내서 석방된다. 석방되자 주인공 일행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답례로 소설의 등장인물로 출연시켜 주겠다"라는 말을 하지만 니나가 사양하는데, "이스탄불에서 어떤 왕족의 공주가 모험담을 듣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는 어떠냐"라고 하자 니나는 세르반테스가 말한 사람이 에미나 압둘라인 것을 깨닫고 정보에 대해 감사하다면서 이스탄불에 가기로 한다. 세르반테스는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여기 있는 사람이 배웅해준다며 마음대로 배에 타고 오스만 병사가 자신의 분위기에 말려들게 한다. 주인공 일행이 이스탄불에 가서 에미나 압둘라로부터 그 유골에 박힌 총 자국이 처음부터 있었는지 만들려고 한 것인지에 대해 지적하고 총은 지금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총흔도 만들 수 있다고 지적당하자 런던으로 왔는데, 주인공 일행은 세르반테스가 앨런 블랙에게 금화 50만으로 가짜 유골을 받아 세르반테스가 사기당한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 일행이 진상을 확인하고 런던에 이를 보고하자 선의의 실수이지만 위작을 왕실에 반입해 그 신뢰를 훼손한 죄를 갚아야 한다면서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심문을 받게 된다.
7. 기타
- 세르반테스의 이름을 딴 ' 미겔 데 세르반테스 상'은 스페인어 작가에게 수여되는 문학상으로 '스페인어권의 노벨문학상'이라고 불리는 최고 권위의 상이다.
- 현재 그의 집과 출생지는 1965년, 스페인 정부에서 사들여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고, 매년 10월 9일이면 그의 고향 알칼라 데 에나레스는 세르반테스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세르반테스 축제를 연다.
- 상술된 대로 레판토 해전 참전 용사였고 전투 중 부상을 입어 한쪽 팔을 못 쓰게 됐다. 따라서 실질적 외팔이로 여생을 살았고 스페인어권에서도 세르반테스를 부르는 별칭으로 '레판토의 외팔이 (el manco de Lepanto)'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걸 진짜로 부상당한 팔이 절단당한 줄 착각해서 아예 한쪽 팔이 없는 완전 외팔이로 그린 후대 일러스트레이션, 그림들도 꽤 있는데 고증 오류이다. 부상으로 실질적 외팔이 신세가 되긴 했지만 아예 절단하진 않았다.
- 멕시코에도 그의 이름을 딴 축제 ‘세르반티노 국제 페스티벌(Festiva Internacional Cervantino)’이 있다. 해마다 10월 멕시코 과나후아토(Guanajuato)에서 열리는 중남미 최대의 문화 예술 행사다. 인구 10만여 명이 살고 있는 소도시에 축제 기간 동안 전 세계 예술가 3000명이 찾아와 연극·음악·춤 등 다채로운 공연을 펼친다. 도심 곳곳의 역사 유적이 축제 무대로 활용된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덕분에 과나후아토 시민은 문화적인 관심과 욕구가 높았다.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문화 예술 공연이 열렸는데, 1952년 과나후아토 대학생이 대학교 광장에서 개최한 연극 무대도 그중 하나였다. 대학생은 근대 소설의 시초라 평가받는 『돈키호테』의 저자 ‘미구엘 드세르반테스’ 희곡을 바탕으로 연극 무대를 올렸고, 바로 이 행사가 과나후아토 예술 축제 ‘세르반티노 국제 페스티벌’의 효시가 됐다. 연극 축제가 춤 공연, 클래식 공연, 영화제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포괄하면서 1972년부터는 아예 멕시코 정부가 나서 행사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 3000여 명의 예술가가 댄스·연극·콘서트·전시회 등 다채로운 이벤트를 통해 세르반테스의 삶과 작품을 공연한다. 세르반테스의 대표작 『돈키호테』는 오페라· 뮤지컬· 영화· 퍼포먼스 등으로 재해석된다.
- 동시대의 활동한 작가로 또다른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있었는지를 놓고 아직도 치열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정설은 셰익스피어가 생전에 마드리드 근처를 방문한 적이 있다는 것으로 당시 셰익스피어는 영국 사절단의 일원으로 스페인을 방문했다. 그래서 당대에 이미 명성을 얻은 두 문호가 한 번쯤은 조우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다. 2014년 말 런던에서는 셰익스피어 작품이 하나 발견됐는데, 돈키호테의 내러티브를 각색한 극작품이었다. 제목이 '거만한, 지나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신부들'이란 뜻인데, 세르반테스의 서사 작품을 드라마로 옮긴 것이다. 이것은 셰익스피어가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읽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한편 동시대 인물인 두 사람은 같은 날(1616년 4월 23일)에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대륙에서 채택한 그레고리우스력 대신 여전히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정확하게 같은 날은 아니다.
- 지금도 스페인에서는 책의 날인 4월 23일이면 돈키호테 읽기 대회가 열린다. 마을마다 릴레이로 독회를 한다. 스페인 대도시나 시골 구석구석 마을에도 타일(아랍에서 전수받은 전통 문화)에 돈키호테의 명문구가 적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 당대에 그려진 세르반테스의 공식적인 초상화는 없다. 모든 세르반테스의 초상화는 어디까지나 상상도다.
- 머리카락은 금발이었다.
- 베이징대학의 교내 공원에 세르반테스의 전신 동상이 놓여 있다. 1986년에 마드리드와 베이징이 자매 도시 결연을 맺을 때 마드리드 시에서 보내준 것이다. 2.35m로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자세를 하고 있어 역동적이다. #
8. 관련 문서
9. 외부 링크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데세르반테스'가 되지만 '세르반테스'로 알려져 있어서 관용적 예외가 인정된다.
[2]
현재 마을 중앙에는 세르반테스 광장이 있으며, 광장의 중심에는 세르반테스 동상이 있다.
[혼외자녀]
미래의 아내인 카탈리나와 만나기 몇 달 전에 유부녀인 ‘아나‘라는 여성과의 부적절한 관계에서 낳은 사생아다.
[4]
실제로는 왼팔의 부상으로
불수가 된 건 맞지만 절단까진 안 돼서 외팔이는 아니었다.
[5]
이사 등으로 여러 성당을 옮겨 다니더라도,
교적은 옮겨지지만 세례 기록은 세례성사를 받았던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
[6]
알칼라 데 에나레스가 아니라 다른 소도시인 알카사르 데 산후안(Alcázar de San Juan) 출생이란 설도 있다. 일단 세르반테스 가문은 원래 지명 그대로
구호기사단 영지였던 알카사르 데 산후안에서 온 가문은 맞고, 현지인들은 알칼라 데 에나레스 출생으로 등록된 건 당시 서류 미비, 행정 오류, 뒤늦은
출생신고 때문이라고 굳게 주장하고 있다. 하술된 대로 어린 시절에도 집안 경제적 사정 때문에 한 곳에 쭉 붙어 있지 않고 계속 돌아다녔고 세르반테스 본인도 카스티야란 큰 지역적 정체성은 강하게 의식했지만 카스티야 안의 특정 동네에는 큰 애착을 보이지 않았던 반면, 안 그래도 산업도 딱히 없고 인구도 폭락한
카스티야라만차 지방에서 세르반테스 관련 관광 수익은 막대하기 때문에 스페인 현지 지자체들 사이에서 세르반테스 관련 연고지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7]
스페인의 하급
귀족. 당시 시대상을 비추어 보면 귀족은 땅 파 먹고 일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책무와 시선은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막상 진짜 평생 일 안 하고 일가족이 먹고살 만한 대귀족들의 재산은 없는 가장 고달픈 경우였기 때문에, 그나마 사회적 위신과 경제난 둘 다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인
군대,
성직,
공무원 업종에 집중적으로 뛰어들며 스페인 제국의 행정 관료, 식자층, 장교단 중추를 형성했다.
[8]
7남매 중 넷째로 출생.
[9]
돈키호테에서도 세르반테스의 노예 생활이 지나가는 식으로 언급된다. 돈키호테 일행과 만난
참전용사가 사아베드라라는 전쟁 포로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인물은 명백히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다.
[10]
말년에 가면 갈증에 심하게 시달렸다.
[11]
돈키호테는 인기를 끌었지만 본인은 생활고로
출판사에 판권을 팔아 큰 이득을 보지 못했다.
[12]
창비 번역.
[13]
동시대의 두 위인은 서양 문화사의 전환점을 제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작품 속에서 근대적인 인물상을 그려냈으며, 세르반테스가 근대 소설의 신기원을 열었다면 셰익스피어는 희곡과 연극의 근대성을 확보했다.
[14]
신부가 돈키호테의 광증의 원인을 그가 읽던 소설 때문이라 보고 돈키호테의 서가에 있던 책들을
불쏘시개로 만들지 말지 하나 하나 평가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에 저자의 첫 소설 '라 갈라테아(La Galatea)'를 등장시킨 대목이다.
[15]
비슷한 기관으로
괴테의 이름을 딴 '괴테 문화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