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모 사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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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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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45 · 1945-46 · 1946-47 · 1949-50 · 1950-51 · 1952-53 | |||
FIFA 월드컵 브론즈슈 19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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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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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모 사라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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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前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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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텔모 사라 Telmo Zar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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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텔모 사라오난디아 몬토야 Telmo Zarraonandia Montoy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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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1년
1월 20일 스페인 왕국 에란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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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6년
2월 23일(향년 85세) 스페인 빌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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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스페인|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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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80cm[2] | 체중72kg | |||
직업 |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 |||
소속 | 선수 |
SD 에란디오 클럽 (1939~1940) 아틀레틱 빌바오 (1940~1955) SD 인다우추 (1955~1956) 바라칼도 CF (1956~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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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20경기 20골 ( 스페인 / 1945~195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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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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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스크 역대 최고의 공격수이자 아틀레틱 클루브의 레전드로 6번의 라리가 득점왕을 차지한 스페인 축구의 전설이며, 라슬로 쿠발라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등장 이전 라리가의 아이콘이었다.2. 생애
2.1. 어린 시절
텔모 사라는 1921년 1월 20일 에란디오에서 태어났다. 사라의 아버지는 에란디오의 아수아 기차역에서 근무하던 기술자였으며 10남매 중 일곱째였고 남자 형제 중에서는 다섯째였다. 성이 사라오난디아로 길었기 때문에 줄여서 사라로 많이 칭해졌다.어린 시절 사라는 큰 형 토마스와 또 다른 형 도밍고의 영향으로 축구를 접했다. 당시 사라의 고향에서는 축구공을 접하기 힘들었지만 사라는 형들 덕분에 진짜 축구공으로 마음껏 축구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아버지는 사라가 축구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형이 축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고, 가정의 수입도 넉넉지 않은데다 부상에 대해 걱정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라의 신발을 숨겼지만 사라는 어떻게든 신발을 찾아 축구를 즐겼다. 어린 시절 사라의 가장 큰 우상은 형 토마스와 이시드로 랑가라였고 매주말에 랑가라의 경기를 직관했다고 회고했다.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라의 재능은 형들의 그것을 능가했고, 특히 골을 넣는 데에 탁월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사라의 별명은 공포의 텔미토였다. 이런 사라를 주목했던 클럽이 고향팀 에란디오였다.
2.2. 선수 생활
2.2.1. 초기 선수 생활
1937년에 사라가 에란디오와 계약할 당시, 에란디오는 세군다 디비시온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처음 출전한 연습경기에서 사라는 팀의 9골 중 7골을 혼자 때려박는 위엄을 보였다. 그리고 1939-40 시즌부터 공식 경기에 나서기 시작한 사라는 에란디오에서 20경기에 출전, 12골을 넣었지만 팀의 강등을 막지는 못했다. 비록 팀은 강등당했지만 사라는 자신의 능력에 큰 자신감을 얻었고, 바스크 지방을 대표하는 클럽 중 하나인 아틀레틱 빌바오가 이런 사라에게 손을 내밀었다.2.2.2. 아틀레틱 클루브
아틀레틱 클루브는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유능한 젊은 선수들을 물색하고 있었고 그 레이더망에 사라가 포착된 것이다. 사라의 이적 당시 에란디오와 아틀레틱 클루브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토마스의 도움으로 중재되었다. 사라는 1940년 9월 29일에 발렌시아 CF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고 데뷔전에서부터 골을 넣었다. 비록, 첫 시즌에는 기회를 많이 잡지는 못했지만 8경기에 나와서 6골을 넣는 활약을 펼쳐보였다.다음 시즌인 1941-42 시즌 초에는 병역 문제로 인해 잠시 팀을 나와 세우타에서 군복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클럽에 돌아와서는 당해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결승에서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승부를 연장전까지 끌고 가는 동점골을 넣었지만 연장에서 팀이 4:3으로 패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3] 하지만 사라는 절치부심해서 이듬해에는 레알 마드리드 CF를 상대로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에서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아틀레틱 빌바오는 이 경기에서 1대0으로 연장전에서 승리를 챙겼고, 결승골의 주인공이 바로 사라였다. 그리고 이 해에 라리가도 우승하는데 성공, 팀의 역사상 세 번째 더블[4]을 달성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사라는 이 시즌에 25경기에 출전하여 25골을 기록했다.
1943-44 시즌에 사라는 쇄골이 깨지는 부상을 입었고 이 때문에 리그에서의 득점은 다소 부진했다. 하지만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에서는 10경기에 출전, 10골을 넣는 대활약을 펼쳤고 이듬해에는 14골을 넣으면서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3년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라리가에서도 처음으로 20골을 넘기면서 처음으로 득점왕을 차지했고, 이 활약을 바탕으로 사라는 하신토 킨코세스에 의해 스페인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었고 스페인에서 가장 뛰어난 공격수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5]
사라의 득점포는 멈추지 않았고, 그 이후로 3년 연속 피치치 트로피를 차지했다. 특히 1946-47시즌에는 33골을 넣으면서 라리가 선수 중 최초로 30골 돌파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1950년에는 사라 인생의 유일한 국제 메이저 대회인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사라는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에서 다시 한 번 우승을 맛봤는데. 단 7경기에 출전하여 13골을 넣었다. 특히 결승전에서 레알 바야돌리드 CF를 상대로 전반에 1골을 넣고, 연장에서만 해트 트릭을 기록, 총 4골을 넣으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활약은 그야말로 백미였다. 그리고 라리가에서도 24골로 다시 한 번 득점왕을 차지했다.
2.2.3. 1950년 월드컵
스페인은 잉글랜드, 칠레, 미국과 한 조가 되었고, 사라는 모든 경기에서 주전 스트라이커로 나섰다. 특히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잉글랜드전은 세기의 시합이라 불릴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다. 여기에서 사라는 결승골을 넣으면서 스페인의 1대0 승리를 이끌었고, 이는 스페인 국가대표팀이 2010년 월드컵에서 우승하기 이전에 가장 유명한 골 장면이었다.이 대회에서 사라는 4골을 넣어 에스타니슬라오 바소라와 함께 팀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올렸다.
2.2.4. 월드컵 이후
1950-51 시즌에 아틀레틱 빌바오에 돌아온 사라는 골 폭풍을 몰아쳤고 그 결과는 38골이라는 자신의 라리가 최다골 기록 경신이었다.[6] 하지만 다음 시즌에 사라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골키퍼와 충돌하면서 다리가 부러져 시즌을 통으로 날려먹게 되었다.다음 시즌에 복귀한 사라는 24골을 기록하여 6번째 피치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이 사라의 마지막 불꽃이었고 이후에는 조금씩 젊은 선수들에게 밀리게 되었다. 결국 사라는 2시즌간 이렇다 할 활약을 펼쳐보이지 못했고 결국 빌바오를 떠나게 되었다.
15년간의 빌바오 생활에서 사라가 남긴 기록은 리그 271경기 출전 251골[7], 코파 델 레이에서의 81골, 6번의 피치치로 바스크 역대 최고의 선수라는 표현에 이의를 달 수 없을만한 활약이었다.
2.2.5. 아틀레틱 클루브 이후
인다우추와 바라칼도에서 잠시 뛰긴 했지만 큰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고 이 위대한 스트라이커는 1956-57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정리했다.은퇴 이후 사라는 종종 은퇴 선수들의 친선 경기나 자선 경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은퇴 후에는 빌바오에서 스포츠 용품 가게와 레스토랑을 경영하며 살아갔다. 1997년 아틀레틱 빌바오의 회장이었던 호세 마리아 아라테는 사라의 레스토랑에 찾아가 그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열기 위해 그를 산 마메스에 초청했고, 이 자리에는 바스크인들은 물론이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라디슬라오 쿠발라 등 스페인 축구계의 많은 원로들이 참가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다.[8]그리고 스페인의 왕 후안 카를로스 1세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초청을 받기도 했다.
사라는 2006년 2월 23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산 마메스에서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 CF의 홈인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도 마찬가지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사라는 라리가에서 252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2014년 리오넬 메시가 253번째 골을 넣기 전까지 라리가 최다 득점이었다.[9]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스트라이커로서 체격도 좋고 골 냄새를 잘 맡았다. 특히 그의 장기는 헤더였는데 당시 유럽 선수들 중 제일이라고 손꼽혔으며 스웨덴과의 원정 경기에 앞서 그를 소개했던 문장이 인상적이다.라리가의 스페인 국적 선수들 중 시즌 최다 득점자에게 수여되는 상이 바로 사람의 이름을 딴 텔모 사라 상이다.[10]
4. 여담
- 그를 축구로 인도한 형 중 한 명인 도밍고는 스페인 내전에서 전사했다.
- 1945년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결승전에서 사라는 장난 한 번 잘못 쳤다가 퇴장을 당했다. 후반 41분에 상대팀 발렌시아 CF의 선수가 쓰러져 있는데 사라는 장난으로 그 옆에서 발을 굴러댔다. 그런데 그걸 본 심판은 사라가 비신사적 도발행위를 했다고 판단, 사라를 퇴장시켜버렸다. 이것이 사라 커리어의 유일한 퇴장이다.
5. 수상
5.1. 클럽
- 라리가 우승 1회: 1942-43( 아틀레틱 클루브)
-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우승 5회: 1943, 1944, 1945, 1950, 1955(아틀레틱 클루브)
- 라리가 준우승 3회: 1940–41, 1946–47, 1951–52(아틀레틱 클루브)
-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준우승 3회: 1942, 1949, 1953(이상 아틀레틱 클루브)
5.2. 개인
- 라리가 득점왕 6회: 1944–45, 1945–46, 1946–47, 1949–50, 1950–51, 1952–53 ( 아틀레틱 클루브)[11]
- 코파 델 레이 역대 최다 득점: 81골(74경기 출전)
- 코파 델 레이 결승전 역대 최다 득점: 4골
[1]
시쿠,
알시데스 기지아,
에스타니슬라오 바소라와 공동 득점 3위. 골든슈, 실버슈, 브론즈슈는 1982년부터 수여했으므로 비공식 상.
[2]
성인 남성 평균신장이 160cm 대 초중반 수준인 당시 기준으로 엄청나게 큰 덩치였다. 지금 기준이라면 가히 192cm는 될법한 수준이다.
[3]
이 경기에서 사라는 결정적인 득점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팀의 승리를 날려버렸고, 사라는 이것을 선수 생활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순간으로 꼽았다.
[4]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라 리가의 초창기였던 1930년과 1931년에 연속 더블을 달성한 것이었다.
[5]
하지만 사라가 바스크 출신이었기 때문에 스페인 대표팀에서 활약하는 데에는 제약이 따랐다. 그래서 통산 출전횟수가 20경기로 많지는 않지만 득점수도 같다.
[6]
멕시코 출신의
우고 산체스가 38골로 타이를 기록했었지만 산체스는 38경기에서 기록했고, 사라는 30경기에서 기록했기 때문에 사라의 기록을 더 가치있게 다뤘었다. 현재
라리가 시즌 최다 득점 기록 보유자는 50골을 기록한
리오넬 메시이다.
[7]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 의해 최다골 기록은 깨졌지만 251골을 기록하면서 뛴 경기 수는 메시보다 사라가 적고, 호날두가 사라보다 적다. 그리고 코파 델 레이와 리그를 합친 사라의 모든 기록은 351경기 332골
[8]
이 행사에서 가장 의외의 참석자는
1950년 월드컵 당시 그에게 골을 허용했던 골키퍼
버트 윌리엄스였고 그의 참석에 사라는 매우 감격했다고 한다.
[9]
경기당 0.91골로 리오넬 메시와 출장경기 득점 비율이 동일한 수준이다.
[10]
피치치는 라리가 전체 득점 1위, 텔모 사라 상은 이 중
스페인 국적 선수들에게만 해당된다. 최근의 사라상은
비야레알 CF의
제라르 모레노에게 돌아갔다.
[11]
메시 이전 역대 최다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