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총독에 대한 내용은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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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스페인의 방송국 안테나3가 스페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후안 카를로스 1세 | 미겔 데 세르반테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 아돌포 수아레스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 | 펠리페 6세 | 파블로 피카소 | 예수의 테레사 | 펠리페 곤살레스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이사벨 1세 | 세베로 오초아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 호세 사파테로 |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살바도르 달리 | 안토니오 가우디 | 엘 시드 | 알폰소 10세 | 페르난도 알론소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프란시스코 데 고야 | 프란시스코 프랑코 | 안토니오 마차도 | 미겔 인두리안 | 미카엘 세르베투스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로라 플로레스 | 펠리페 2세 | 카를로스 1세 | 로시오 주라도 | 그레고리오 마라뇬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디에고 벨라스케스 | 이사벨 판토하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미겔 데 우나무노 |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비센테 페레르 | 카밀로 호세 셀라 | 페드로 두케 | 다니 페드로사 | 파우 가솔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다비드 비스발 | 라파엘 나달 | 카마롱 데 라 이슬라 | 아스투리아스의 펠라기우스 | 후안 라몬 히메네스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산티아고 카리요 | 안토니오 반데라스 | 이냐시오 데 로욜라 | 페드로 알모도바르 |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 미겔 에르난데스 | 후안 마누엘 세라 | 로페 데 베가 | 엘 그레코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아구스티나 데 아라곤 | 호아킨 사비나 |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 | 앙헬 니에토 | 마누엘 아사냐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조르디 푸졸 |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 알레한드로 산스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 에르난 코르테스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카를로스 사인츠 | 파퀴리 | 텔모 사라 | 몽세라 카바예 | 마누엘 데 파야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이삭 페랄 | 플라시도 도밍고 | 미겔 길라 | 루이스 부뉴엘 | 엘 코르도베스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프란시스코 피사로 | 마리아노 바울바시드 | 라울 곤살레스 |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오초아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아만시오 오르테가 | 마놀레테 | 에두아르도 칠리다 | 페란 아드리아 |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 호아킨 로드리고 | 에밀리오 보틴 |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 프란시스코 헨토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세바 바예스테레스 | 이삭 알베니스 | 페데리코 바하몬테스 |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 카르멘 아마야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빈센트 블라스코 이바네스 | 마누엘 산타나 | 알리시아 코플로비츠 | 안토니오 루이스 솔러 | 자코네로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0><colcolor=#fff>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Velazque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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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
출생 | 1599년 6월 6일 |
스페인 세비야 | |
사망 | 1660년 8월 6일 (향년 61세) |
스페인 마드리드 | |
국적 | 스페인 |
직업 | 궁정화가 |
스승 | 프란시스코 파체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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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화가. 압스부르고 왕조 말기인 펠리페 4세 시절, 궁정화가가 된 이후 평생 궁정화가로 지냈다. 바로크 시기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1]사실적인 초상화로 유명하며, 특히 <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는 역대 최고의 초상화로 자주 거론되는 작품이다. 또한 대표작인 <시녀들>은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후대의 화가들에게까지 큰 영감을 주었다.
2. 생애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재능은 그의 고향 세비야에서 연마되었다. 하급 귀족 정도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 르네상스기의 예술의 인기와 맞물려[2] 화가의 지위가 높아지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3]그는 어린 시절 부모의 지원 하에 프란시스코 에레라의 공방을 거쳐, 12세 때는 화가 프란시스 파체코의 작업실과 아카데미에서 실력을 쌓았다. 벨라스케스는 1617년에 독립 화가로서 일할 세비야 길드의 면허증을 얻었다. 그는 이론가와 인문주의자로서 유력한 친구들을 둔 스승으로부터 문화적인 교육을 받았고, 지적인 르네상스 사상들을 소개받았다.
또한, 그는 스승의 학술적인 동료들로 구성된 영향력 있는 모임에 소개되었다. 1618년에는 파체코의 딸인 후안나와 결혼하여 그와 파체코의 끈끈한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벨라스케스의 초기 작품들로는 솜씨있게 그린 종교화와 풍속화가 있다. 스페인은 풍속화의 역사가 짧았으나, 벨라스케스는 <세비야의 물장수>와 같은 작품들에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불어넣으며 새롭고 정직한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1622년, 젊은 화가가 된 벨라스케스는 스페인의 새로운 국왕인 펠리페 4세의 후원을 얻고자 마드리드로 향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망감을 안은 채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1년 후에 왕의 초상화를 그려 궁정화가라는 공직에 임명되었다. 그 후 곧바로 마드리드로 이사했고, 왕자, 공주들이나 올리바레스 백작 가스파르 데 구스만 등 정치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평생 궁정화가로 지냈다. 펠리페 4세는 자신의 초상화를 벨라스케스 외에는 아무도 그리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3. 작품 목록
<시녀들>(Las Meninas) |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Portrait of pope Innocent X) |
<비너스의 단장>(The Toilet of Venus) |
영국 런던의 영국 국립미술관(내셔널 갤러리)이 1906년에 구입하여 소장한다. 2023년 11월 7일 2명의 Just Stop Oil 시위자가 안전망치로 보호유리를 깨트린 일이 일어났다.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La infanta María Teresa de España) |
펠리페 4세와 그의 첫 번째 왕비였던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자 루이 14세의 왕비였던 마리아 테레사의 14살 때 모습을 그린 것이다. 상술한 <시녀들>의 주인공인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이복언니이기도 하다. 초기에는 마리아 테레사의 새어머니인 마리아나의 초상화로 추정되었지만 후에 마리아 테레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드레스가 당시 기준으로 구식이어서 그런 듯하다.[5] 초상화 속 저 패션은 이미 당대 유럽에서 구닥다리 패션으로 악명높았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사가 처음 시집갔을 때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궁정에서 꽤나 비웃음을 샀다고 한다.
그 밖에 작품으로는 <후안 데 파레하>, <무염시태>, <계란을 부치는 노파>, <펠리페 4세의 입상>, <펠리페 4세의 기마상>, <천상모후의 관을 쓰는 성모>, <세비야의 물장수> 등이 있다.
4. 기타
[1]
후대의 화가들인 마네, 클림트, 고야 등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전부 그의 이름을 찬양했으며, 자기애가 엄청났던 피카소 역시 그를 높이 평가했다. 이른바 화가들의 화가였다.
[2]
엘 그레코, 바르톨로메 베르메호, 페드로 베레구에테 같은 화가는 벨라스케스의 동 시대나 그 이전의 시대부터 귀족, 교회, 스페인에서는 지위가 높던 유력 상인으로부터 주문이나 후원을 받고는 했다. 후원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한다는 생각이 있을 정도였다. 오히려 일반 대중은 그런 생활에 동떨어진 측면에 가까웠다.
[3]
한 한국의 기사에서는 당시 화가가 천한 직업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손가락질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이 주장은 2024년 4월 29일자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다루었다. 이것은 글공부를 안하는 직업은 다 천한 것으로 보던 동양의
과거 시험과 결부되던 악습을 서양에 대입하는 오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전근대에는 뛰어난 직업적 성취, 결혼, 종교 같은 것으로 성공이 이루어지고는 했다.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다면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특히 저런 풍습이 있었다면 아예 귀족들이 받던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 작위를 받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4]
펠리페 4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였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사이에서의 소생으로,
압스부르고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카를로스 2세의 친누나였다. 훗날 외삼촌이었던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5]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르가리타 공주의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의 초상화를 보면 드레스며, 헤어스타일이 비슷하다. 적어도 한 세대 전 유행이었다는 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