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8 00:31:48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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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스페인의 방송국 안테나3가 스페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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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 7위 8위 9위 10위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 펠리페 6세 파블로 피카소 예수의 테레사 펠리페 곤살레스
11위~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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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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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센테 페레르 카밀로 호세 셀라 페드로 두케 다니 페드로사 파우 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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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카리요 안토니오 반데라스 이냐시오 데 로욜라 페드로 알모도바르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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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디 푸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알레한드로 산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에르난 코르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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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사인츠 파퀴리 텔모 사라 몽세라 카바예 마누엘 데 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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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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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Federico García Lorca
파일:페데리코 로르카.jpg
본명 페데리코 델 사그라도 코라손 데 헤수스 가르시아 로르카
Federico del Sagrado Corazón de Jesús García Lorca
출생 1898년 6월 5일
에스파냐 왕국 안달루시아 그라나다 푸엔테 바케로스[1]
사망 1936년 8월 18일 (향년 38세)
스페인 제2공화국 안달루시아 그라나다
국적
[[스페인|]][[틀:국기|]][[틀:국기|]]
직업 시인, 극작가
서명
1. 개요2. 달리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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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국민 시인, 극작가. 유럽 여러 나라의 연극의 영향 밑에 놓여 있었던 스페인 연극을 혁신하고, 더욱이 외국의 극단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동성애자, 집시를 옹호하여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1936년 7월 17일 스페인은 내전에 돌입했고 로르카는 시인이자 고향 친구인 루이스 로살레스의 집에 피신했다가 그라나다 국민전선 사령관에 의해 체포되었다. 1936년 8월 20일 새벽, 청색 하늘 밑에서 로르카는 임시 감옥에서 끌려 나와 비스나르와 알파카르 사이에 있는 벼랑에서 재판도 없이 처형당했다.

2. 달리와의 관계

파일:external/blog.joins.com/re_550421bd494fe.jpg
파일:amor_fg_1.jpg
질문: 로르카 얘기로 되돌아가 보자. 그가 살바도르 달리에 부치는 노래를 썼을 무렵 당신들 두 사람은 어떻게 같이 지냈는가?

달리: 모두들 아는 것처럼 그는 동성애자였고, 나를 미친 듯이 사랑했다. 그는 나에게 두 번 달려들어 하려고 했는데…. 나로서는 그게 매우 싫었던 까닭은, 내가 동성애자가 아니었기 때문이고 또 그가 내 항문에다 그것을 하는 데 대해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건 아프다. 그러니 아무 재미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매료되었다는 사실에) 꽤나 우쭐했었다. 마음 속 깊이 나는 그를 위대한 시인이라고 생각했고 '성 달리'의 항문에 관한 한 그의 신세를 좀 졌다고 느꼈다. 그는 때때로 한 아가씨에게 그걸 요구했는데, 그녀가 자기 대신 나를 희생물이 되게 했다. 그가 하라는 대로 내가 항문을 제공하지 않자 그는 그녀를 정복했는데, 그녀와 자기가 궁합이 아주 잘 맞았다고 그는 단언했다. 그가 여자와 잠잔 건 그게 처음이었다.
"알라인 보스케와의 대담 중에서, 1969"[2]
그것은 아름답고 비극적인 사랑이었다.
살바도르 달리
스페인에서 칭송받는 국민적인 시인인 그와 동문이었던 달리는 인터뷰에서 그를 아웃팅시키며 동성애적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3]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가 '리틀 애쉬'. 로르카의 부고를 들은 달리는 "한 때 그의 절친한 지기였던 나는 이제 신과 역사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는 바이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그는 100% 순수한 시인이었으며 내가 만났던 사람 중 가장 완벽하게 비정치적인 사람이었음을 맹세한다’ 라고 말이다."라며 매우 애통해했다.

한때 스페인 정부는 로르카와 달리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다. 이 인터뷰와는 별개로 달리는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야 자서전 집필작가에게 “그것은 아름답고(관능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이었다”고 두 사람의 연인관계를 암시했다.[4]

여담으로 로르카가 1925년 낙서처럼 그린 달리의 초상화가 남아있다. 로르카는 생전에 이런 낙서 같은 그림들을 몇 장 남겼는데 하나 같이 글자가 쓰이지 말아야 할 곳에 글자가 쓰여 있다. 말풍선 안의 'bleu azul verde negro girl'은 의미가 불분명하지만[5] 팔레트를 그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으며 아래의 Retrato De Dali는 스페인어로 "달리의 초상화"라는 뜻이다.
[1] Fuente Vaqueros [2] 대담의 전문은 해당 사이트에서 PDF파일로 제공되고 있다. [3] 이 인터뷰를 할 당시 로르카는 스페인 내전에 휘말려 사살된 후였다. [4] 이것에 대해서는 이안 깁슨이 집필한 Lorca-Dalí: el amor que no pudo ser 와 The Shameful Life of Salvador Dalí를 참조할 것. [5] bleu: (F) 파란 / azul: (E) 파란 / verde: (E) 초록의 / negro: (E) 검은. (F): 프랑스어, (E): 스페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