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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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74ba3><colcolor=#ece5b6> 후연의 반역자
모용회 | 慕容會 |
|
시호 | 없음 |
작위 | 청하공(清河公) → 청하왕(清河王) |
성 | 모용(慕容) |
휘 | 회(會) |
자 | 도통(道通) |
생몰 | ? ~ 397년 5월 21일 |
출신 | 창려군(昌黎郡) 극성현(棘城縣) |
부황 | 열종 혜민황제 |
형제자매 | 8남 4녀 중 차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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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연의 황족. 열종 혜민제 모용보의 서출 차남. 태자로 책봉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어 태자를 자칭하며 반란하였으나 며칠만에 토벌당했다.2. 생애
전연이 멸망하고 헌무제 모용위가 장안으로 끌려갈 때, 모용성과 모용회도 모용위를 따라서 장안에서 지냈다. 이후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패망하고, 모용위가 장안에서 모반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주살당하면서 모용성, 모용회 형제 또한 멸족당할 위기에 놓였다. 이에 두 형제는 장안을 탈출하여 장자(長子)로 숨었다.건흥 2년(387년) 4월, 연나라가 부활시켜 후연을 건국한 성무제 모용수가 원정을 마치고 확오(碻磝)에서 수도 중산(中山)으로 돌아오자,모용회는 형 모용성과 함께 모용수에게 귀순하였다. 모용수는 모용성을 장락공(長樂公), 모용회를 청하공(清河公)으로 봉하였다.
건흥 9년(394년) 2월, 성무제 모용수가 서연을 정벌하기 위해 업(鄴)에서 출발하면서 모용회를 남겨 업을 지키게 하였다.
모용회의 어머니는 비록 출신이 비천하였으나, 모용회는 재능과 용략이 뛰어나 성무제 모용수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당시 모용보는 후계자가 확정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으나, 이미 모용회에게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어, 모용보가 한창 북벌 준비하느라 바쁠 때 모용회가 그를 대신하여 동궁(東宮)의 일을 처리하였고, 모든 예우를 태자와 동일하게 받았다.
건흥 11년(396년) 정월, 성무제 모용수가 참합피 전투에서의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북위 정벌을 친히 준비하면서 용성(龍城)에 있던 고양왕 모용륭을 중산으로 소환하고, 모용회를 녹유대사(録留臺事)•영 유주자사(領幽州刺史)•정북대장군•유평2주목(幽平二州牧)으로 삼아 모용륭을 대신케 하였다. 모용회는 유주에 부임하여 후연의 동북 지방을 통치하였고, 국관부(國官府)에 뛰어난 인재들을 선발하여 자신의 위엄을 드높였다.
건흥 11년(396년) 2월, 성무제 모용수의 명령을 받아 기주(冀州)로 병력을 징발하러 갔던 정동장군 평규(平規)가 박릉(博陵), 무읍(武邑), 장락(長樂) 세 군(郡)에서 징발한 병력을 들고 노구(魯口)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평규의 동생인 해양(海陽)현령 평한(平翰)도 요서(遼西)에서 거병하여 평규에게 호응하니, 모용회는 동양공 모용근(慕容根)과 더불어 용성에서 출병하여 평한을 토벌해 진압하였다. 평한은 백랑산(白狼山)부터 서무산(徐無山)까지 이어진 산간 지대 남쪽으로 도망쳤다.
영강 원년(396년) 8월, 본래 성무제 모용수가 붕어하기 직전에 모용보에게 모용회를 태자로 삼을 것을 유언으로 당부하고 붕어하였는데, 혜민제 모용보는 황위를 계승한 이후로 모용회에게 흥미를 잃고 막내인 복양공 모용책(慕容策)을 총애하였다. 이때 장락공 모용성은 모용회가 태자로 책봉받을 것을 시기하여, 조왕 모용린과 함께 모용보에게 나아가 선제의 유언을 무시하고 모용책을 태자로 삼을 것을 권하였다. 결국, 모용보가 이들의 말에 넘어가 모용책을 태자로 세우고 모용회 등의 황자들은 모두 왕으로 승작시키자, 모용회는 나약하고 어린 막내에게 밀려 태자가 되지 못한 것에 불만과 분노를 품게 되었다. 그래서 모용보가 아직 용성에 있는 고양왕 모용륭의 참좌, 부곡, 가솔들을 중산으로 보내라 요구했을 때, 일부러 명령을 어겨 많은 부곡을 남겨두고 즉시 보내지 않았다. 또, 매번 황족들 중 연장자에 속하는 장무왕 모용주를 능멸하니, 이를 본 자들은 모두 모용회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영강 원년(396년) 11월, 북위의 위왕 탁발규가 군대를 거느리고 내려와 중산을 공격하였다. 모용회는 사자를 보내 출정하겠다는 표문을 올렸고, 혜민제 모용보 역시 이를 허하였다. 모용회는 애초부터 실제로 출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일단 정남장군 고녹관위(庫傉官偉)와 건위장군 여숭(餘崇)에게 병사 5,000명을 주어 선봉으로 삼아 먼저 나아가게 하였다.
영강 2년(397년) 3월, 고녹관위와 여숭이 노룡(盧龍)에 머무른지 100여 일이나 지나면서 가지고 온 식량도 다 떨어져 군영의 말과 소까지 다 먹어 치웠으나, 모용회의 본대는 아직 출발조차 하지 않았다. 혜민제 모용보가 크게 분노하여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모용회를 엄히 꾸짖으니, 모용회는 마지못해 간단히 준비만 한겠다며 다시 한 달을 미루었다. 그 사이에 적군이 길을 막자, 고녹관위는 적은 수의 군대를 먼저 보내 북위군의 강약을 정탐한 뒤에 길을 열어 위세를 떨치고자 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이를 두려워하여 나서기를 꺼렸다. 이에 여숭은 분노하여 자청하며 말했다.
"지금 위나라의 큰 적이 하늘을 뒤덮고, 수도인 중산이 위험에 처하였다. 한낱 평민조차도 목숨을 바쳐 임금을 구하려고 하는데, 그대들은 나라의 은혜를 입고도 어찌 생명을 아끼려 하는가? 만약 나라가 기울고 신하의 절개가 세워지지 못하면 죽음 역시 수치스러울 것이다. 그대들은 이곳에 편히 있으려 하나, 나는 그럴 수 없다."
고녹관위는 기뻐하며 보•기 500명을 여숭에게 주었다.여숭은 어양(漁陽)까지 진격하여 위나라의 1,000여 기병과 맞닥뜨렸다. 여숭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저들이 많고 우리는 적으니, 먼저 싸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여숭은 북을 울리면서 진격하여, 직접 10명 이상의 적을 베어 죽였다. 위나라 기병은 무너져 도망갔고, 여숭은 돌아와 참수하거나 체포한 적의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에 병사들의 사기가 조금씩 회복되었고, 모용회는 비로소 출발하여 천천히 전진하여 겨우 계성(薊城)에 이르렀다. 하지만 중산이 공격받은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데다, 군사(軍事)를 일임받은 조왕 모용린의 행패로 인해 후연군의 작전이 모두 틀어져, 혜민제 모용보는 결국 중산을 버리고 모용회가 있는 계로 도망치는 것을 택하였다.3월 16일[1], 혜민제 모용보가 계에 도착했을 때, 함께하던 궁내의 측근들은 거의 다 흩어졌고, 오직 모용륭이 이끄는 몇백 기병만이 좌우를 호위하고 있었다. 청하왕 모용회가 기병 20,000명을 이끌고 성에서 나와 계 남쪽에서 모용보를 맞이하였는데, 모용보는 모용회의 태도가 불만스럽고 원망스러운 듯해 모용륭과 요서왕 모용농에게 비밀리에 이에 대해 물었다. 이에 모용농과 모용륭이 답했다.
"모용회는 아직 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다 보니 교만해진 것입니다.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 신들이 마땅히 예로써 꾸짖으면 됩니다."
모용보는 일단 수긍하였으나, 여전히 모용회를 믿지 못하여 그의 군대를 해체하고 모용륭에게 맡기려 하였다. 모용륭은 이를 굳게 사양하였지만, 모용보는 모용회의 병력을 나누어 모용농과 모용륭에게 주었다.3월 18일[2], 혜민제 모용보가 계성 안의 부고(府庫)를 모두 용성으로 옮기고 북쪽 용성으로 향하였다. 이때 북위의 장수 석하두(石河頭)가 추격하여 20일에 그 하겸택(夏謙澤)에서 그 후미를 따라잡으니, 청하왕 모용회가 모용보에게 말했다.
"신은 병사들을 훈련시켜 적과 싸우기만을 원합니다. 지금 폐하께서 수모를 당하시어 사람들은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려 합니다. 이런 때에 마침 적이 감히 스스로 찾아왔으니, 모두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병법에 따르면 '귀환하는 군사를 막지 말라'고 했고, 또 '사지(死地)에 놓여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이러하니, 어찌 승리에 대한 걱정을 하겠습니까? 만약 지금 물러난다면 적은 사람들을 잡아갈 것이고, 또다시 변고가 생길 것입니다."
모용보는 전투를 최대한 피하고 싶었으나, 하는 수 없이 모용회의 청을 들어주어 전투를 허하였다. 모용회는 군대를 정비해 북위군과 전투를 벌였고, 모용농과 모용륭 등은 남쪽에서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였다. 석하두는 크게 패하고 100여 리를 추격당하면서 병력 수천 명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모용회는 북위군을 격퇴시킨 이후로 점점 교만해졌고, 모용륭은 여러 차례 그를 훈계했지만 그럴수록 모용회는 더욱 분개하는 마음을 품었다. 또, 모용회는 모용농과 모용륭이 모두 용성을 한때 다스렸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지지기반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였고, 이미 태자가 되기는 글렀다는 것을 알아 반란을 모의하기 시작하였다.유주와 평주의 군사들은 모두 청하왕 모용회의 은혜를 입었기에, 모용농과 모용륭에게 속하기를 기뻐하지 않아 혜민제 모용보에게 청하였다.
"청하왕의 용맹과 지략은 이 세상을 뛰어넘었습니다. 신들은 청하왕과 맹세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하였으니, 폐하께서는 황태자와 여러 왕자들을 계궁(薊宫)에 머물게 하십시오. 신들이 청하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경사(京師)의 포위를 풀고, 다시 폐하를 맞이하러 돌아오겠습니다."
하지만 모용보를 따라온 좌우의 신하들은 모용회를 싫어하여 모두 반대하며 모용보에게 말했다."청하왕이 안그래도 황태자가 되지 못하여 심기가 매우 불편한 마당에, 그의 재주와 무용이 뛰어나 사람들의 마음도 잘 얻습니다. 폐하께서 만약 저들의 청을 따르신다면, 저들이 포위가 푼 후에 반드시 위걸(衞輒)의 일이 벌일까 두렵습니다."
이에 모용보가 모용회의 무리에게 말했다."도통(道通: 모용회의 字)은 나이가 젊고 재주가 두 왕들에게 미치지 못하니, 어찌 그에게 전쟁의 임무를 맡길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짐 스스로 6사(六師)를 통솔하고 있으니, 모용회는 마땅히 우익(羽翼)이 되어야 한다. 어찌 그를 좌우에서 떨어뜨릴 수 있겠는가?"
그러자 모용회의 무리는 불쾌해하며 물러갔고, 좌우의 신하들은 모용보에게 모용회를 죽이라 권하였다. 시어사 구니귀(仇尼歸)가 이를 듣고 모용회에게 알렸다."대왕께서 의지할 것은 아버지인데, 그 아버지가 이미 다른 꾀를 품고 계시고, 의지할 군사들은 이미 손에서 떠났습니다. 이제 어디에 몸을 의지하시겠습니까? 차라리 두 왕을 죽이시고 태자를 폐하신 후에, 대왕께서 스스로 동궁(東宮)에 머무르며 장상(將相)의 임무를 겸하여 사직을 바로잡는 것이 최상의 계책입니다."
하지만 모용회는 망설이며 따르지 않았다. 이때 모용회는 모용보가 모용농과 모용륭을 불러 은밀히 자신을 주살하는 것에 대해 모의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더욱 불안해 하였다.영강 2년(397년) 4월 6일[3], 혜민제 모용보가 광도(廣都)의 황유곡(黄榆谷)에 유숙하게 되었다. 모용회는 이 때를 노려 구니귀와 오제염간(吳提染干)에게 장사(壯士) 20여 명을 나누어주어 모용농과 모용륭 암살을 시도하였다. 오제염간은 모용륭의 암살을 성공하였으나, 모용농은 중상을 입어 피투성이된 몸으로도 구니귀를 제압한 뒤, 그를 납치해 산속으로 도망쳤다. 모용회는 구니귀가 잡혀간 것으로 인해 진실이 밝혀질 것이 두려워 모용보에게 나아가 말했다.
"모용농과 모용륭이 반역을 모의하여 신이 미리 그들을 제거하였습니다."
대충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눈치챈 모용보는 모용회를 베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겉으로는 좋은 말로 그를 안심시키며 말했다."나는 두 왕을 오래 전부터 의심해왔으니, 그들을 제거한 것은 무척 잘한 일이다."
4월 7일[4] 아침, 모용회는 군사를 엄히 정돈하고, 도망친 모용농을 쫓아 혜민제 모용보와 함께 산 속으로 진입하였다. 모용회는 출발하기 전에 모용륭의 시신을 두고 가려 하였는데, 건위장군 여숭(餘崇)이 눈물 흘리며 간청하여 하는 수 없이 시신을 수레에 싣고 따르게 하였다. 모용보가 산 속으로 진입하였을 때 모용농이 나타나니, 모용보가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어찌하여 홀로 모든 것을 부담하려 하였느냐?"
그리고 군사들에게 명해 그를 붙잡아 끌고 오게 하였다. 그런 후에 10여 리 정도 가다가 진군을 멈추고 식사를 하면서 여러 신하들과 모용농의 죄를 논하였다. 잠시 후에 도착한 모용회도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착석하자, 모용보는 위군장군 모여등(慕輿騰)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 모용회의 목을 내려치게 하였으나, 목에 상처만 내고 죽이는 데에 실패하였다. 모용회는 그대로 도망쳐 자신의 군사들을 이끌고 모용보를 공격하였다. 모용보는 기병 수백 기와 함께 모용회의 군사들의 추격을 떨쳐내고 그 날 포시(晡時: 15시부터 17시 사이)에 용성으로 들어갔다.4월 8일[5], 시어사 구니귀를 보내 용성을 쳤으나, 혜민제 모용보가 밤에 군대를 보내 기습하여 구니귀를 격파하였다. 모용회는 사자를 보내 모용보에게 간신을 제거하고 자신을 태자로 삼아줄 것을 요구했으나, 모용보는 이를 불허하였다. 모용보의 답변을 들은 모용회는 승여와 황제의 의복, 기물을 모두 수거하여 장수들에게 나누어주고, 후궁들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관리를 마음대로 임명하면서 스스로 황태자•녹상서사를 자칭하였다. 그런 후에 군사를 이끌고 용성으로 향하여 모여등(慕輿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병력을 집결시켰다.
4월 9일[6], 모용회의 군대가 용성 아래에 이르러 진을 치자, 혜민제 모용보가 서문(西門)으로 나와 이를 맞이하였다. 모용회는 말을 탄 채로 멀리서 모용보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모용보가 그를 계속하여 꾸짖으니, 모용회는 군사들에게 모용보를 향해 큰 소리를 외치도록 명령하여 무리의 위세를 과시했다. 성 안의 장수와 병사들은 이를 보고 분노하여, 저녁 무렵에 출전하여 모용회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모용회의 무리는 많은 사상자를 내고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시위랑 고운이 결사대 100여 명을 모아 모용회의 진영을 야습하였다. 모용회의 군사들은 모두 패주했고, 모용회는 열여 명의 기병과 함께 중산으로 도망쳤으나, 개봉공 모용상(慕容詳)에 의해 살해당했다. 모용보는 모용회의 생모와 모용회의 세 아들을 모두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