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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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a11> ||
}}}}}}}}}}}}}}} ||1. 개요
慕容令(? ~ 370)
전연의 인물. 훗날 후연을 건국하는 세조 성무제 모용수의 장남. 모후는 성소황후 단씨(段). 《 진서》에는 이름이 모용전(全)으로 나오나, 《 자치통감》, 《 십육국춘추》 모두 모용령(令)이라 기록하였으므로 본 문서도 이에 따른다.
2. 생애
건희 10년(369년) 11월, 거기대장군•오왕 모용수는 태부•상용왕 모용평과 자주 조정에서 언쟁하면서 상당히 많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 헌무제 모용위의 모후인 가족혼 태후 역시 모용수를 무척 미워하여 자주 그의 전공을 폄훼하고, 모용평과 더불어 은밀히 모용수 주살을 논의하였다. 모용수는 항상 모용평에게 해를 입을까 내심 걱정하면서도 자식들에게조차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장남 모용령만이 아버지의 마음을 눈치채고 모용수에게 물었다."존귀하신 분께서 요즘 이와 같이 근심을 하고 계시다니,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혹시 주상의 나이가 아직 어리시고, 태부가 아버님의 전공과 지혜로움 때문에 시기심을 품고 있어 그러시는 겁니까?"
이에 모용수가 말했다."그렇다. 내가 힘을 다해 적을 무찔러 나라를 지키고자 했으나, 공을 세운 후에 오히려 몸을 편히 쉴 곳이 없게 되었다. 네가 이미 내 마음을 안다면, 무슨 계책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러자 모용령이 답했다."주상께서는 아직 어리시고 태부는 시기심이 많으니, 만일 일이 터지면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가문을 보호하고 몸을 지키려면 일단 대의(大義)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용성(龍城)으로 도망쳐서 사죄하시고 주상의 판단을 기다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마치
주공(周公)이 동쪽에 거처한 것과 같아, 주상이 감동하고 돌아오게 된다면 큰 행운일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안으로는 연•대(燕代) 일대를 통치하면서 밖으로는 여러 이민족을 달래며, 비옥한 지방을 지키는 것이 차선책입니다."
모용수는 이를 옳게 여겨 조정에는 사냥하러 간다 보고하고, 가벼운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에 업(鄴)을 떠나 모용령 등 몇몇 아들들과 휘하 기병들을 거느리고 용성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한단(邯鄲)에 이르렀을 때, 모용수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던 아들
모용린이 아버지를 배반하고, 업으로 돌아가 조정에 모용수의 계획을 전부 털어놓았다. 이에 모용평은 헌무제 모용위에게 아뢰고, 서평공 모용강(慕容强)에게 정예기병으로 뒤를 쫓게 하여 범양(范陽)에서 모용수를 따라잡았다. 그때 모용령이 모용강의 후위를 끊어 추격병을 압박하였고, 모용강은 감히 모용수를 함부로 공격할 수 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날이 저물자, 모용강은 하는 수 없이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모용령이 모용수를 만나 말했다. "원래 동도(東都)를 지키려 했으나, 이제 일이 누설되어 계책을 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왕(秦王)이 인재를 모으고 있으니, 그에게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용수는 이에 동의하고, 모용령과 함께
전진으로 망명하였다. 모용수와 모용령이 전진에 도착하자, 전진의 천왕
부견은 그들을 환대하며 모용수를 관군장군으로 삼았고, 모용령의 재능 역시 아껴 귀하게 예우하였다.
왕맹은 누차 모용수 부자를 제거하라 권했으나, 천왕 부견은 듣지 않고 더욱 상을 더하였다.건희 10년(369년) 12월, 보국장군 왕맹이 낙양을 공격하기 위해 출진할 때, 모용령을 참군으로 삼아 종군케 하고, 길잡이를 맡겼다. 낙양 점령에 성공한 후, 왕맹은 모용수와 친한 금희(金熙)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하고, 그로 하여금 모용수의 전언을 사칭하여
"나는 동쪽(전연)으로 돌아갔으니 너도 돌아와라"
는 말을 모용령에게 전하게 하였다. 모용령은 이를 의심하며 하루종일 어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으나, 낙양에서는 진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사냥하러 간다는 핑계로 자신의 옛 기병들을 거느리고, 탈영하여 전연의 낙안왕 모용장(慕容臧)이 있는 석문(石門)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헌무제 모용위는 배신했던 모용령이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고, 전진의
반간계가 아닐까 의심하여 모용령을 사성(沙城)으로 유배보냈다.건희 11년(370년) 5월, 사성은 용성으로부터 동북쪽으로 600리나 떨어져있는 외지였기에, 모용령은 이대로 가다가는 유배지에서 허망하게 생을 마감할 것이라 여겨 거병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사성에는 이미 수천 명의 병사들이 유배 생활을 하고 있어, 모용령은 그들을 모두 후히 대우하여 인심을 얻은 뒤, 마침내 병사를 일으켜 아문 맹규(孟嬀)를 습격해 살해하였다. 사성의 성대(城大) 섭규(涉圭)는 몹시 두려워 모용령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하였고, 모용령은 그를 신뢰하여 곁에 두었다.
사성 장악에 성공한 모용령은 유배병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위덕성(威德城)을 쳐, 그 성랑(城郎) 모용창(慕容倉)을 죽이고 위덕성을 점령하였다. 모용령은 병사를 더 모집하여 동쪽과 서쪽으로 계속해서 뻗어나가 여러 주둔지를 공격하였고, 많은 연나라의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어느정도 세력을 키운 모용령은 장차 용성을 진수하고 있는 진동장군•발해왕 모용량(慕容亮)을 도모하려 하였는데, 모용령의 동생 모용린이 이를 모용량에게 일러바치는 바람에 모용량이 성문을 굳게 닫고 대비하였다. 모용령의 곁을 지키던 섭규가 이 틈을 이용해 갑자기 모용령을 공격하니, 모용령은 단기로 도망쳐 전장을 이탈하였고, 우두머리가 사라진 모용령의 무리는 그대로 붕괴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섭규는 모용령을 추격하여 끝내 그를 붙잡아 죽이고, 용성에 들어가 모용량에게 이를 보고하였다. 그러나 모용량은 오히려 섭규에게 황족을 멋대로 처형한 죄를 물어 주살하고, 모용령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냈다.
훗날 후연을 건국한 성무제 모용수는 모용령을 '헌장태자(獻莊太子)'로 추증하였고, 조카 소무제 모용성이 즉위했을 때는 '헌장황제'로 추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