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5:45:38

마거릿 대처/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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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영국에서의 평가3. 경제에 대한 평가
3.1. 긍정적 평가
3.1.1. 영국병 극복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신자유주의3.1.2. 1기 내각 시절 인플레이션 수치3.1.3. 경제성장3.1.4. 민영화3.1.5. 금융업 규제 완화3.1.6. 주식시장3.1.7. 자동차 산업의 부활3.1.8. 제조업의 부흥3.1.9. 고용지표 향상3.1.10. 공교육, 보건의료 예산 증액3.1.11. 대처 내각이 감세 일변도였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3.1.12. 대처 내각 시절 경제호황이 북해 유전 때문이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3.1.13. 스코틀랜드 경제를 쇠퇴시켰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3.2. 부정적 평가
3.2.1. 경제난과 양극화3.2.2. 집권 1년차 시절 인플레이션3.2.3. 실업률3.2.4. 3기 내각 시절 인플레이션 수치3.2.5. 민영화3.2.6. 북해 유전3.2.7. 스코틀랜드 경제 정책3.2.8. 종합
4. 정치에 대한 평가
4.1. 긍정적 평가4.2. 부정적 평가
4.2.1. 대처 내각과 스코틀랜드 독립 문제4.2.2. 제1세계 독재 정권에 대한 우호적 태도
4.3. 논란이 있는 평가
4.3.1. 파업과 시위에 대한 강경한 태도4.3.2. 페미니즘과의 적대적인 관계4.3.3. 보수당 내의 부정적 여론
5. 기타 평가
5.1. 긍정적 평가
5.1.1. 환경보호에 대한 기여5.1.2. 공교육 향상
5.2. 부정적 평가
5.2.1. 우유 도둑 논란5.2.2. 사생활에 대한 비판

1. 개요

"그녀는 칼리굴라의 눈과 마릴린 먼로의 입을 가진 정치인이다."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 출처)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지만, 종합적으로 영국의 정치학자, 역사학자 등 전문가들이 평가하는 다양한 조사에서 20세기 이후 영국 총리 가운데서 항상 최상위권에 꼽힌다. 그녀와 더불어 최상위권에 꼽히는 다른 총리들인 윈스턴 처칠,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클레멘트 애틀리[1]가 모두 제1, 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총리를 지냈기 때문에 전후 총리 중에서는 마가렛 대처가 단연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다. 영문 위키피디아 참조

영국의 경제위기를 극복한 강단 있는 정치인이라는 평과 영국의 빈부 격차와 사회적 갈등을 크게 키운 최악의 정치인이라는 평까지 극과 극의 평가를 전부 듣는 인물이다. 대처는 보통 전문가들에게는 거의 매우 좋은 평가를 받지만, 대중들에게는 강경 일변도 정책과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서 호불호가 극심하게 갈린다.[2] 보수당 지지자들로부터는 20세기 들어 내리 쇠해가던 영국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한 여걸이며 그녀의 능력과 업적만큼은 전 세계가 인정한다고 극찬받는다. 노동자들을 포함한 노동당 지지자들 대다수는 노동자의 적이라고 부르며 매우 싫어하며, 일부 경제, 행정, 정치 분야의 학자들은 대처의 정책에 긍정적인 평가만을 내리지는 않는다.

대처는 영국 의회정치의 특징인 타협주의를 노골적으로 거부했다. 이를 위해서 연설, 토론, 논쟁에 대해서는 항상 치밀하고 착실하게 준비하면서 상대에게 절대 반박할 빌미를 주지않고 몰아붙였고, 본인의 정책을 밀어붙이거나, 진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반대를 사실상 노골적으로 묵살하는 초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이는 구태의연하고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분위기에 젖어 문제 해결이란 측면에서 느슨했던 영국 의회의 분위기를 쇄신하고 대처 내각에 행동하는 정부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으며, 대처 본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그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데는 큰 성공을 거뒀다. 특히 대처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논쟁이나 토론에서 불처럼 맞붙는 대처를 상대로 굴욕과 창피를 무릅쓰고서라도 이에 대적하기 어려워, 한동안 의회 내에서는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로 가면서 서서히 이런 '철의 여인'의 아성은 금가기 시작했다. 매사에 초강경 대응하는 공격적인 성향은, 타협이나 유연성이 필요한 순간에서마저도 대처가 유화책을 쓰는 것을 스스로 주저하게 만드는 큰 원인이 되었다. 너무 지나치게 강경하게 정책과 정치를 수행했던 만큼, 이를 풀어주는 순간 일어날 반작용을 감수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 결국 한번 일어난 반대파의 목소리를 더 크게 찍어누르고, 그러면 반대파의 목소리가 더 커지는 악순환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큰 반란은 없는 듯 보였던 영국 의회는 물론이고, 대중, 심지어는 같은 당인 보수당조차도 어느 순간 고개를 돌리면서 대처는 돌아보니 이미 고립이 되어있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2006년 BBC가 역사학자 프랜시스 베케트에 의뢰한 "영국의 변화를 위한 비전을 얼마나 잘 실현했는가"에 대한 평가에서 클레멘트 애틀리와 함께 공동 1위에 올랐고, 2014년 런던대 연구팀이 영국 의회 하원의원 15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는 단독 1위에 올랐다. 그 밖에 영국의 교수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나 일반인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 등에서 모두 대처는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

영국 보수당 내에서도 싫어하는 세력들이 있긴 했다. 그 이유는 아래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반대로 블레어와 같이 노동당 쪽에서도 의외로 그녀를 괜찮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블레어의 정책 노선은 마찬가지로 영국병 참조. 그만큼 평가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대처리즘을 통해 영국병에 빠진 영국을 구원하며 신자유주의의 효시를 알린 동시에, 사회 양극화를 촉진시켜 영국을 분열시킨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2. 영국에서의 평가

파일:external/www.menzieshouse.com.au/bhw-vfecuaa7uc9.jpg
파일:external/i1.mirror.co.uk/Daily-Mirror-front-page--Thatcher-dies.jpg
영국을 구한 여인 영국을 분열시킨 여인
그녀의 죽음을 보는 두 시선. 헤드라인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3]
계층과 이념에 따라서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리긴 하지만 마거릿 대처 사망 이후의 일부 여론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대체적으로 공과에 대한 평가는 뚜렷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론조사에 관한 뉴스

주로 대처의 인기는 잉글랜드에서 상당히 높은 편이며, 특히 미들 잉글랜드로 불리는 잉글랜드 중남부 교외 지역의 중산층들 사이에서는 매우 확고한 편이다. 하지만 대처의 산업 구조조정으로 피해를 본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의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반감이 매우 높다. 대처 사후 국제적으로 애도의 조전이 쇄도하는 와중에서도 반감이 높은 지역[4]에서는 대놓고 축제판을 벌일 정도다.[5]

한편으로는 일부 보수당 의원들이 대처의 동상을 트라팔가 광장에 세우자고 건의했으나 " 아서 웰즐리 윈스턴 처칠도 얻지 못한 영예를 대처에게 줄 수 없다!"는 반발에 부딪친 일도 있었다.

한편 축구 칼럼니스트 존 듀어든 왈 "마거릿 대처는 축구의 적"이라고 비판했다.[6] 훌리건의 행태의 사회구조적인 원인은 제쳐둔 채 개인적 자질만을 문제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국인 60%가 대처의 장례식을 대규모로 치르는 것을 반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영화 <케스>, <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 나, 다니엘 블레이크> 등으로 유명한 영국의 대표적인 좌파 감독인 켄 로치 더 가디언(The Guardian)지와의 인터뷰에서 "아예 장례식도 민영화해야 한다. 그것이 대처도 원하던 일이었을 것."라며 비꼬기도 했다. 처음에 추정한 장례비용은 한화로 약 173억이었는데, 실제 들어간 비용은 그 1/3 정도인 61억 원이 소요되었다. 관련 기사 이 중 보안경비가 비중이 컸던 이유는 장례기간 중 터진 보스턴 폭탄테러 사건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다만 상술되어 있듯이, 대처 본인도 자신의 장례는 검소하게 치를 것을 생전에 당부했기 때문에, 국장 혹은 민영화까지는 아니지만 영국 정부도 나름의 예를 갖추어 공식적 장례 형식[7]으로 장례를 거행했다.

영국의 대표적인 좌파 언론인 더 가디언(The Guardian)에서는 "대처가 캐머런을 제치고 영국 최악의 수상으로 꼽혔다."는 기사를 올렸다. 역사 작가 협회에서 행한 조사인데 24%의 회원들이 대처를 최악으로 꼽았다고 한다.[8]

그러나 영국의 대학생과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 일반인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 등에서 대처는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6년 BBC가 역사학자 프랜시스 베케트에 의뢰한 "영국의 변화를 위한 비전을 얼마나 잘 실현했는가"에 대한 평가에서 클레멘트 애틀리와 함께 공동 1위에 올랐고, 2014년 런던대 연구팀이 영국 의회 하원의원 15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는 단독 1위에 올랐다.

3. 경제에 대한 평가

3.1. 긍정적 평가

마거릿 대처는 영국병을 극복해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단순히 2차대전 이후의 경기침체 자체를 떠나 영국은 심지어 19세기 후반부터 후발주자인 미국, 독일, 2차대전 이후 고도성장기에는 프랑스에 추격당해 이들 국가에 소득이 역전당해버렸다. 대처가 높이 평가받는 건 주변국에 비해 갈수록 날로 악화되던 국제적 이미지의 추락을 끊어버리고 21세기까지 미국, 독일, 프랑스와 경쟁할 수 있는 부국강병의 계기가 되었다는 데 있다. 실제로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전한 이후로 영국의 국제적 위상은 과거 대영제국의 수준은 아니더라도 미국, 소련, 유럽에서 더이상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복귀했다. 프랑스와 독일보다 계속 뒤처졌던 1인당 GDP도 증가하여 프랑스와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9] #

3.1.1. 영국병 극복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신자유주의

1970년대 중후반의 영국은 2차대전 승전국임에도 식민지 상실과 정부부채 과다 비효율성으로 점차 침몰하던 중이었다. 영국은 전쟁이 끝나고 10년 동안 배급제가 운영되는 곳도 있었고 마이너스 성장률까지 기록했다. 마가렛 대처를 평가함에 있어 지금같은 정상궤도 기준에서 볼게 아니라 당시 힘든 상황에서 영국 사회에 희망의 공기를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평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정부에 대한 저항에 오일쇼크까지 겹친 상황은 영국에게 치명타를 남기기에 충분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참고로 이는 미국도 비슷했다. 캘리포니아 프로포지션 13으로 알려진 주민헌법 개정이 당시 상황을 대변한다. # 프로포지션 13이 통과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들이 존재하지만, 당시 전 세계를 강타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말미암은 집값 상승과 이에 따른 부동산세 상승으로 인한 내집 지키기가 어려워진 것을 이유로 꼽기도 한다. 또한, 당시 캘리포니아 주민들 사이에서는 주정부의 세제정책들이 부자들에게 유리하고, 이런 세제정책을 관리하는 세무국 직원들이 본인과 친분이 있는 부자들에게 불법적 혜택을 주는 공공기관의 부패가 막연하다는 인식도 한몫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은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후대의 비판 역시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당대의 기준에서는 올바른 선택지였다.

제조업 구조조정, 금융업 활성화, 감세와 규제 완화, 정부 지출 축소 등의 신자유주의화는 마거릿 대처 자신의 개인적 사상과 결합해( Thatcherism)[10] 21세기의 그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극단적이었다. 대처는 영국인들에게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라"는 메시지를 던졌고, 대처가 영국 경제에 놓은 극약 처방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괜히 영국 노동당 토니 블레어 등 수많은 국내외 각국의 정상들이 그녀를 배운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대처 내각의 신자유주의 개혁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영국이 대처리즘의 부작용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1979년 대처가 넘겨받은 영국은 인플레이션과 노조 갈등의 장기화로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극과 재생이 필요한 상태였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노선 그대로 영국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으면 영국의 현재 모습은 지금보다 심하면 심했지, 더 낫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또 마냥 노동자 계급을 괴롭혔다는 통념과 다르게 최저임금제도를 실질적으로 정착하여 노동자 계급이 경제 불황 속에서도 적은 돈을 가지고서나마 집을 얻을 수 있게 하기도 했고, 영국보험체계의 현대화를 위해 힘쓰기도 했다.

영국 재무부 지표를 확인하면 대처 내각은 긴축 재정을 실시하되 공공의료 공공복지 지출은 3~4% 단위로 꾸준히 증가함을 볼 수 있다. 적자(Deficit)를 줄인거지 빚(Debt) 그 자체를 줄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의 비율은 감소하는데 이유는 지속적 경제 성장에 있다. 대처 내각은 금리를 올리고 공기업을 구조개혁하면서 생기는 단기적 생산량 감소를 초래하긴 했지만 제조업 붕괴라는 단어는 세계 5위권의 제조업 강대국에게는 맞지 않는 수식어일 것이다. 이전 정권들의 자존심 지키기로밖에 해석될 수 없는 불안정한 환율 정책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황폐화된 제조업 계열 산업들이 있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탄광들이 망한 것은 세월이 지나며 수요가 감소했기 때문이지 정부가 석탄을 구매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한국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인해 1989년 10,000명 이상이 해고되었지만 오히려 경제적으로 보면 삶의 질은 올라갔다(미세먼지 감소, 높은 연료 효율 등등). 자동차 산업은 브리티시 레일랜드라는 회사를 찾아보면 이유가 명확하다. 출신이 다른 기업들도 하나로 모아두면 규모의 경제가 성립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의해 노동당 정부가 비효율의 빌미를 제공한 데 있다. 그리고 롤스로이스, 벤틀리, 재규어, 로버 등이 모두 대처 내각 이후에 해외로 팔려 나갔다(것도 2000년대에). 고실업과 같은 현상은 있었으나 이는 취업시장에서의 베이비 부머 세대의 유입 때문에 높게 유지되다가 집권 2기부터는 꾸준히 감소했다가 3기부터 다시 올랐다.

3.1.2. 1기 내각 시절 인플레이션 수치

파일:bosu-20221014-193913-008.jpg

대처가 총리에 취임한 1979년 5월에는 영국의 물가상승률이 10.3%나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이 경제정책의 최우선목표였고, 이에 대처는 기준금리를 인상함으로써 시중에 유통되는 통화량을 긴축시키는 통화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비록 단기적으로는 경기불황을 야기할 테지만, 궁극적으로는 물가를 안정시킴으로써 건전한 성장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처가 총리에 취임한지 정확히 4년 후인 1983년 5월에는 영국의 물가상승률이 3.7%까지 떨어졌다. 같은 기간동안 OECD 평균 물가상승률이 10.4%에서 11.1%로 오히려 상승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다른 대부분의 나라들[11]이 여전이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던 것을 감안하면, 대처의 물가안정 노력은 매우 큰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다. #

3.1.3. 경제성장

인플레이션이 안정되면서, 이제 대처 내각은 본격적으로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한 정책들을 추진하게 되었다. 특히 경제적 자유주의, 그것도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대처 내각인만큼, 감세를 통해 기업 투자를 활성화함으로써 경제를 살리고자 했다. 1979년만 해도 52%나 됐던 영국의 대기업 법인세율은 대처의 임기를 거치면서 35%까지 인하되었다. 중소기업 대상 법인세율 또한 대처 임기동안 40%에서 25%까지 인하되었다. # 소득세율 또한 인하되었는데, 소득세 최고구간은 83%에서 60%까지 인하되었으며, 최하구간 또한 33%에서 25%까지 인하되었다. #

덕분에 대처의 재임기간동안 영국의 기업 투자는 크게 활성화되었다. 실제로 노동당 정권의 경제정책이 주관했던 1974년부터 1979년까지의 총고정자본형성(Gross Fixed Capital Formation, GFCF), 다시 말해서 기업 투자(Investment)의 경우, 연평균 증가율이 0.21%에 불과했다. 반면 대처 내각이 본격적으로 경제를 운용했던 1980년부터 대처가 임기를 마친 1990년까지의 기업 투자는 연평균 증가율이 3.55%나 되었다. #

이러한 기업 투자 활성화는 전체 경제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1974년부터 1979년까지의 영국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53%로, 세계 평균 경제성장률이었던 3.33%에 크게 못 미쳤다. 하지만 대처가 재임했던 1980년부터 1990년까지의 영국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2.46%로 상승했으며, 당시 세계 평균 경제성장률이 3.04%로 하락한 것에 비하면 매우 긍정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3.1.4. 민영화

자동차 산업과 석탄 산업 같은 경우 이미 경쟁력을 상실했다는 비판을 국내외적으로 받고 있었다. 특히 롤스로이스 같은 일부 거대한 산업 같은 경우 이미 6, 70년대 들어 경영이 어려워지자 국유화해서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하다시피 했다.

또 국영기업 민영화는 필연적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영국 정부가 공기업을 현대화할 자금이 부족했으며 심각한 관료화 상태로 진행되어 가스가 나오는 데 분 단위로 시간이 걸리는 지역도 있었다. 민영화를 통해 현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냈으며 국민들이 고가격으로 피해볼 수 있음을 인식했는지 국민들로 하여금 전부 민영화 당일 주식 매수 기회를 우선적으로 주었다. 이를 통해 국민기업화도 이뤄낸 것이다.

민영화를 통해 각종 산업들의 효율성이 증가했으며, 특히 전자통신, 비행기, 그리고 한동안은 전기요금도 가격이 내렸다. 더불어 과거 독점으로 운영되던 산업에 규제완화를 도입하여 경쟁성을 증가시켰고, 경쟁성이 증가하면서 가격은 내려가고 효율성은 증대되는 효과를 봤다. 또한 이전까지 영국 경제를 좌지우지한 노동 조합의 힘도 크게 약화시켜 영국 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켰다. 서비스업과 금융업을 키웠으며, 비효율적인 기업은 더이상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만들어서 장기적으로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처 시절에 공공 지출이 감소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공공 지출에서 감소된 부분은 대부분 파산한 기업에 대한 지원 중단에서 나온 것이다.[12] # 무엇보다 대처의 정책으로 국민들의 주택 보유가 높아지면서 국민들이 경제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철도[13]나 수도 민영화 같은 개별 사안은 비판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잉글랜드 남부 등지를 중심으로 오히려 대처의 열정적인 지지자들이 가장 많이 생겨나게 한 정책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뭐냐면, 이 당시 대처는 국민주 방식을 통해 공기업 주식을 염가에[14] 대거 국민들에게 팔아치우면서 수많은 국민들이[15] 주식을 사게 되었고 이들이 이를 보유하거나 기관에 팔면서[16] 큰 수익을 보게 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민영화 정책 중 가장 호평받는 것은 공공주택 민영화인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영국인들이 자기 집을 보유하게 되었고 뒤이어 불어닥친 부동산 시장 광풍으로 집값이 대거 상승하면서 이들이 대박을 터뜨린 바 있다. 대처의 비판자들은 보통 여론조사 해보면 40%를 찍지만 지지자들 역시 보통 5~60%를 찍는데, 그게 괜히 그런 것이 아니다. 80년대 장기 집권하도록 도운 열정적인 지지 세력은 죄다 여기서 나왔다. 대처의 경제정책 속성 중 하나로 간과되는 것이 이른바 '대중 자본주의'인데, 대처의 정책으로 인해 적지 않은 중산층들이 자본 소유주가 되어 그 혜택을 누린 것을 무시할 수 없다.

3.1.5. 금융업 규제 완화

1986년 대처 내각의 금융업 규제완화는 은행과 증권업 간 장벽을 허물어버렸고, 증권거래소 가입 자격, 증권 매매 위탁수수료 등을 완전히 자유화했다. 경쟁을 일으켜 시장 전체를 키운다는 복안에 따른 조치였다. 금융업에 대한 규제기관의 운영 또한, 정부가 전적으로 맡았던 이전과 달리 정부와 민간에서 상의해서 결정하는 방향으로 변경함으로써, 민간의 자율성을 크게 높여주었다. 이러한 획기적인 규제완화와 자율성 확대 조치 덕분에 전세계의 금융자본은 런던으로 모여들었고, 덕분에 런던은 다시한번 세계 금융중심지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세계 언론들은 "우주 대폭발과 같은 획기적인 조치였다'며 빅뱅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 ##

대처 내각의 금융업 자율화는 이후 내각들에서도 이어져, 2001년 12월 금융감독청의 출범으로 정점을 찍게된다. # 금융감독청은 영국 금융업에 대한 규제를 총괄하는 기관으로서, 영국의 내각으로부터 전적으로 독립된 기관이었던 만큼, 당시 집권 노동당의 전반적인 경제정책 기조와 달리 금융업에 대한 규제를 추가적으로 완화하거나 규제의 정도를 매우 낮게 유지했다. 실제로 보수당 내각이 재임했던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영국의 금융업 매출액은 78억 파운드 증가했다가, 노동당 정권 초기였던 1997년부터 2001년까지는 26억 파운드 증가에 그쳤다. 하지만 금융감독청이 주관하게 되고 나서부터는 영국 금융업이 다시 활성화되어, 2001년부터 2005년까지는 매출액이 무려 393억 파운드나 증가하게 되었다. #

대처 내각의 금융업 자율화 이후, 현재까지도 영국은 금융업에 있어 세계 최정상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2022년 9월에 발표된, 가장 최신의 국제금융센터지수(Global Financial Centres Index) 순위에서도, 런던 뉴욕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하며 글로벌 금융업 중심 도시로서의 지위가 여전히 강고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 ##

3.1.6. 주식시장

파일:Screenshot_20221019-115107_Gallery.jpg

상단에서 언급된 여러 경제정책들, 즉 기업 투자 촉진을 위한 법인세율 인하, 국유기업 민영화에 의한 국유기업들의 주식시장 상장, 그리고 금융업의 규제완화와 자율화 등은 모두 시장친화적인 경제정책들로서, 영국의 주식시장 또한 이에 매우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실제로 영국 기업들의 시가총액은 1979년만 해도 301억 달러에 그쳤으나, 대처가 임기를 마치던 1990년에는 8,499억 달러까지 늘어나는 엄청난 증가세를 보였으며, 배수로는 무려 28배 이상 늘어났다. #

3.1.7. 자동차 산업의 부활

OICA의 통계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영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14위이며, 자동차 수출액은 세계 5위로 총 420억 달러이며 경쟁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의 169억 달러보다 월등히 높았고, 총 매출액은 820억 파운드였다. # ## 영국의 자동차 생산량에 비해서 수출액이 높은 이유로는, 마가렛 대처 재임기간동안 영국이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의 주요 생산 거점으로 자리잡은 것이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즉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이 영국이 아닌 대륙유럽이나 영연방의 다른 국가들에 판매할 자동차를 영국에서 생산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 초반까지도 오랜기간 동안 축적된 영국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 덕분에 생산량이 높았으나, 이후 영국 자동차 회사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으면서 생산량이 급감하는 피해를 겪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보수당 대처 내각은 닛산, 혼다, 토요타와 같은 일본 자동차 회사들이 영국에 투자할 것을 설득하였고, 이에 일본 회사들은 차례로 공장, 연구개발센터, 디자인센터를 영국에 설립하게 되었다. # ## ### #### #####

덕분에 영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고, 독일 미국의 자동차 회사들 또한 영국 자동차 산업에 투자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은 다시 자동차 산업을 부흥시킬 수 있었다. 실제로 1970년의 영국 자동차 생산량은 210만여대에 육박하였으나, 1980년에는 131만대까지 추락하였다. 하지만 대처 임기 말인 1990년에는 영국 자동차 생산량이 156만대 이상으로까지 회복되었다.

3.1.8. 제조업의 부흥

대처가 금융업 규제 완화를 통한 금융업 활성화를 추진했기 때문에, 금융업 팽창과 함께 제조업은 축소시켰을 것이라고 단정짓는 막연한 느낌과 오해들이 다수 존재한다. 하지만 영국 국가통계청(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에서 Chained Volume Measures에 따라 집계한 영국 제조업의 월간 생산 증가율 통계에 따르면, 대처의 임기동안인 1979년 5월에서 1990년 11월까지의 기간동안 영국 제조업 생산은 7.3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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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제조업의 시대에 따른 총부가가치 변화 추이를 산출한 통계에 따르면, 마거릿 대처의 임기, 그리고 같은 보수당 출신 후임 총리 존 메이저의 임기를 합쳐 보수당 내각 18년동안 영국 제조업의 총부가가치는 1,610억 파운드에서 1,860억 파운드까지 250억 파운드 증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대처가 재임하기 이전, 해럴드 윌슨 제임스 캘러헌 노동당 정권 5년동안 제조업 총부가가치가 10억 파운드 감소하고, 노동당이 다시 집권한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의 13년 동안에 410억 파운드 감소한 것에 비하면 매우 긍정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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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 총부부가치가 전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 또한, 대처가 재임하기 전부터 이미 감소하는 추세였다. 실제로 대처 이전의 노동당 정권 5년동안 26%에서 23%로 감소했다. 즉 대처와 메이저의 보수당 내각 18년동안 23%에서 18%로 감소한 것은 오히려 이전보다 완만한 감소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대처와 메이저 이후 블레어와 브라운의 노동당 정권 13년동안 18%에서 10%까지 감소한 것을 감안했을 때, 대처와 보수당에서 영국의 탈산업화를 조장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며, 오히려 그 이전과 이후의 노동당 정권들에서 진행되었던 제조업 비중 축소가 적어도 조금이나마 늦춰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3.1.9. 고용지표 향상

대처의 산업 구조조정으로 인해 실직한 노동자들이 주는 임팩트가 워낙 크기 때문에, 대처 임기 전반적으로 영국의 고용지표가 악화되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과 오해들이 다수 존재한다. 하지만 영국 국가통계청(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에서 집계한 월간 고용률 통계에 따르면, 대처의 임기동안인 1979년 5월에서 1990년 11월까지의 기간동안 영국의 고용률은 71.7%에서 72.3%까지 0.6%p 증가했다. 미미한 증가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처 직전에 노동당 정권이 집권했던 1974년 2월에서 1979년 5월까지의 기간동안에는 72.9%에서 71.7%까지 감소한 것에 비하면 긍정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신규 일자리 창출 또한 대처의 보수당 내각은 직전의 노동당 정권을 상회했다. 영국 국가통계청에서 집계한 월별 취업자 수 통계에 따르면, 노동당 정권 5년동안에는 총 17만개, 연간 3.4만개 정도의 신규 일자리가 창출되는 것에 그쳤다. 반면 대처 내각 11년동안에는 총 159만개, 연간 13.8만여개의 신규 일자리가 창출되어 노동당 정권의 연간 일자리 창출을 4배 이상으로 상회했다. #

3.1.10. 공교육, 보건의료 예산 증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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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 내각이 신자유주의를 지향했기 때문에, 전체 정부지출과 함께 공교육과 보건의료에 대한 예산 또한 삭감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과 오해들이 다수 존재한다. 실제로 대처 임기동안 GDP는 23.3% 성장한 반면, 정부지출은 12.9% 증가하는 것에 그쳤던만큼 정부지출을 어느정도 억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처 임기동안 NHS(National Health Service), 즉 보건의료 예산은 31.8% 증액되었으며, 이는 GDP보다도 더 높은 증가율이다. 공교육 예산 또한 13.7% 증가했으며, 이는 전체 정부지출보다는 더 높은 증가율이다. #

3.1.11. 대처 내각이 감세 일변도였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상단에서 언급한 법인세율과 소득세율 인하가 워낙 임팩트가 컸기 때문에, 대처 내각의 경제정책이 감세 일변도였다는 막연한 느낌과 오해들이 다수 존재한다. 하지만 대처 내각의 감세정책들은 거의 대부분 인플레이션이 안정화된 이후 경제활성화를 위해 추진한 정책들이며, 그 이전에는 긴축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일정수준의 증세 또한 추진하기도 했다. 실제로 대처 내각의 1981년도 예산안의 경우, 상단에서도 언급된 기준금리 인상과 북해유전으로 인해 금융업과 석유산업이 뜻밖의 호황을 맞았던만큼, 이를 운에 의한 횡재로 간주하고 이들에 대한 횡재세를 부과하기도 했다. # 또 1981년도 예산안에서는 소득세와 자본세 과표구간의 자연스러운 상승을 동결함으로써, 소득세와 자본세의 실질적인 증세를 유도하기도 했다. #

3.1.12. 대처 내각 시절 경제호황이 북해 유전 때문이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아울러 이미 70년대부터 북해 유전 등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지만[17], 여전히 영국은 보다 사양산업인 석탄 산업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연명하고 있었고, 이 당시 석탄 광부들은 대처 이전에 이미 영국 총리를 하나 갈아치울 정도로 그 정치적 위세가 막강했다.[18] 이런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석탄 산업을 대거 구조조정한 결과, 이 당시 석탄 산업 근로자들은 상당수 북해 유전과 가스전으로 취업하게 되어 산업 구조 전환이 이루어졌다.

북해 유전 같은 환경적인 측면이 영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맞지만, 대처 이전의 영국은 그러한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해 IMF 금융지원까지 받았다. 적어도 대처가 석탄 산업을 구조조정하고 거기에 소모되는 인력과 물자를 석유, 가스 산업으로 돌리는 등 그런 환경적 혜택를 받고자 노력한 점은 이전 행정부보다는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19]

거기에 북해 유전 같은 대규모 유전들이 마냥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마찬가지로 북해 유전으로 꿀을 빨았던 네덜란드는 이른바 자원의 저주로 말미암아 큰 경제적 홍역을 치른 바 있다. 이러한 문제가 굳이 유전만 그런 것도 아니고 대표적으로 그 옛날 제국주의 스페인 중남미 금은광으로 재미를 봤다가 말아먹은 사례도 있다. 결국은 어떻게 써먹느냐에 달린 것이다. 따지고 보면 북해 유전의 존재가 아이러니 하게도 석탄 산업의 구조조정 필요성을 유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스페인 역시 식민지 금은광이 흥해서 국내 제조업을 말아먹은 전례와 비슷하다.

그리고 이 북해 유전은 냉전 종식과 우리나라의 삼저호황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주요 산유국 중 하나가 되었고 이 때 영국은 레이건의 미국과 더불어 제2차 오일쇼크 극복을 위해 석유 증산에 박차를 가했다. 덕분에 세계 유가는 갈수록 하락했다. 이는 에너지 자원 수출로 먹고 살던 소련에도 타격을 가했고 이에 냉전이 종식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삼저 호황에는 저유가가 포함된다는 걸 생각해보면 역시 북해유전이 간접적으로 삼저호황에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3.1.13. 스코틀랜드 경제를 쇠퇴시켰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스코틀랜드 경제가 박살났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구체적인 통계를 살펴보면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일단 지표만 보자면 마거릿 대처 시기에 특별히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간 격차가 커진 것은 아니다. # 영국 정부 자료에 따르면 오히려 1인당 GDP 성장률은 두 지역이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경우에 따라 스코틀랜드가 더 높은 적도 적지 않았으며, # 이 외에도 이 기사에 따르면 오히려 대처 시기 스코틀랜드의 1인당 GDP 성장률이 더 높았다.

심지어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자료를 보더라도 스코틀랜드의 1인당 GDP는 2012년 기준으로 39,642달러인데, UK의 GDP는 35,671달러로 스코틀랜드가 더 높다. 이 점을 볼 때 대처가 스코틀랜드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UK에서 잉글랜드가 차지하는 GDP나 인구 비중은 통상 80+a%을 오가는 걸 감안하면 UK와 잉글랜드의 1인당 소득 관련 지표는 그다지 차이 안 난다. 스코틀랜드 독립당과 가디언지의 자료에 따르면 파운드화 기준으로 스코틀랜드의 1인당 GDP가 약 2,300파운드가 높다고 했다. # [20]

3.2. 부정적 평가

통화 유통량 조정으로 생긴 실업률 증가와 경제 불황, 늘어난 빈부격차, 일부 민영화 정책, 금융업 규제 완화, 그리고 노동자 파업 강경 진압 등이 주요 비판 대상이다. 한마디로 영국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는 뜻. 또한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기반 산업 붕괴로 인한 독립 여론 부상, 북아일랜드 피의 일요일과 힐스버러 참사에서의 경찰 옹호 등 계층간 및 민족간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3.2.1. 경제난과 양극화

그녀의 임기 동안 영국의 경제는 불안정했고 변덕스러웠다. 영란은행의 보고서에 따르면, 마거릿 대처의 공격적인 통화주의 정책으로 영국의 인플레이션은 오히려 올랐고, GDP 성장률도 마이너스를 기록하여 경기 침체를 알렸으며, 환율의 가치도 올랐다.

결과적으로 1기 대처내각은 경제불황을 겪게 됐고, 2기 내각까지도 경제성장은 미미했다.[21] # 집권 제3기의 Lawsoon Boom도 집권 마지막에 인플레이션을 키우고 경기 침체를 일으켜 경제를 살렸는지에 대한 논쟁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3.2.2. 집권 1년차 시절 인플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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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는 1979년 5월 4일 집권하면서 과감한 통화주의 정책과 세제정책을 펼쳤고, 그 여파로 인플레이션은 23%까지 치솟았다.[22] 일부는 이와 같은 인플레이션 급증을 전 노동당 정권의 정책 탓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당대에도 대처의 잘못된 세제정책이 인플레이션 급증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존재했다. # 대처는 고소득층 소득세(income tax)를 줄이는 대신 부가가치세(value added tax, VAT)를 올렸는데, 당시 저명한 경제학자들은, 심지어 통화주의자들 중 일부도, 이와 같은 대처의 정책은 경제성장과 투자 증가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23] 심지어 이런 대처의 정책이 인플레이션을 필요 이상으로 키운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했다.[24] 이에 통화주의자인 빌 로빈슨도 "(대처의) 통화정책은 짊어질 짐이 너무 크다. 통화정책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라고 발표했다.[25]

3.2.3. 실업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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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월 27일자 영국 더 가디언의 제1 면에 실린 기사

1기 집권 당시에는 무리한 통화주의 정책으로 1981년 경제 불황을 유발했고, 제조업 감소로 실업자 수가 3백만 명까지 증가하여 1929년 대공황 이후 가장 높은 실업률을 기록하게 된다. # 1981년 364명의 경제학자들은 대처의 이러한 정책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나 # #, 대처는 본인에게 유턴(U-Turn)은 없다면서 본인의 경제 정책을 밀어붙였다. 덕분에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잡았으나 6분기에 걸친 GDP 감소가 있었고 높은 실업률은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면서 불필요한 경제 불황을 일으켰다는 비판도 있다. # #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서는 여러 방법이 있으나, 임금과 물가 고정은 자치 잘못하면 경제 불황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 추진하지 않는다.[26][27] 보통 정부는 긴축통화정책(contractionary monetary policy)을 통해 과잉된 경제를 진정시켜 인플레이션을 조정한다. 21세기에 주로 사용되는 긴축정책으로는 금리인상과 지급준비제도가 있다. # # 그러나 대처의 1기 집권 시절에는 전 세계적으로 통화유통량(monetary aggregates) 조정 정책이 통화주의자들을 필두로 유행하고 있었고,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영향을 받은 대처도 금리인상과 더불어 통화주의 정책을 이용하여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통화유통량 조정은 말 그대로 정부가 나서서 시장에 이미 공급된 통화량을 측정하여 미래에 공급될 통화량을 예측하여 조정하는 제도이다. 문제는 통화유통량 조정이 이론적으로는 분명히 효과적인 정책이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실행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영국보다 앞서 통화유통량 조정을 펼친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는 통화량 예측과 그 예측에 따른 통화유통 목표치를 달성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1982년에 인정하고 사실상 통화유통량 조정 정책을 무기한 정지한다. #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이 당시에 얻은 교훈으로 더 이상 통화유통량 조정 정책을 되도록이면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며, 미국은 이후 금리와 재정정책을 통해서 인플레이션을 조정하고 있다. #

당시에도 통화유통량 조정과 인플레이션 사이의 상관관계가 기존의 분석과 달리 더 낮다는 연구 결과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통화유통정책을 밀던 미국과 캐나다는 1982년에 일시적으로 중지하고 1987년에 모두 공식적으로 포기한다. 결국 대처 내각도 1982년에 통화유통정책을 대거 수정하고 1985년에는 통화주의 정책을 일시중지했으며 1987년에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 이 때문에 다수의 경제학자들은 통화주의로 요약되는 대처의 1기 경제 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이며, 일부 경제학자들은 통화유통량을 조정하지 않고 금리인상과 재정정책 조정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았으면 경제 침체는 피할 수 없었겠지만 대공황 이후 최악의 실업률과 경제 불황은 겪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통화주의자들도 대처의 통화주의 정책은 통화주의를 완벽하게 따르지 않고 조기에 포기했기 때문에 기대 이하의 성적을 냈다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경제학자들이 작성한 수많은 추도 연설에도 대처의 통화주의 정책은 비교적 강조되지 않았다. #

3.2.4. 3기 내각 시절 인플레이션 수치

1985년 이후 영국은 대처의 정책 덕분에 5% GDP 성장률, 실업률 감소, 집값 상승이라는 매우 이례적인 경제 호황기를 경험한다. 특히 집값이 상승하면서, 대처의 공공주택 민영화 정책으로 집을 소유하게 된 중산층의 가계소득과 자산이 증가했고, 이는 경제 신뢰도 상승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영국 국민들의 자산증식 저당 대출은 기록적인 수준까지 증가했으며, 소비 지출이 증가하는데 기여하여 경제를 살리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이는 영국이 감당할 수 없을만큼의 성장이었다. # #

비록 일부 경제학자들은 이런 경제 호황이 계속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대처 내각은 본인들의 경제개혁이 성공하여 결실을 맺었다 착각했다. 실제로 대처 내각은 로슨 호황(Lawsoon Boom)이 경제적 기적이라 자화자찬하면서 당시 4% 이상으로 오른 인플레이션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 1987년 10월 영국 주가가 25% 폭락했고, 영국 정부는 더 이상의 주가 폭락을 막기 위해서 금리를 인하했다. 금리 인하로 주가는 더 이상 폭락하지 않았지만 이는 영국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으로 경제성장률을 증가시켰고, 특히 집값을 과대평가되게 만드는 단초로 작용한다. 결국 경제학자들의 우려대로 인플레이션은 다시 오르기 시작하면서, 1988년에는 인플레이션이 10% 이상으로 치솟아 올랐다.

대처 내각은 어쩔 수 없이 인플레이션과 이로 인해 떨어지는 파운드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영국은 금리를 15%까지 인상했다. 하지만 금리가 갑자기 급등하면서 부동산 대출을 포함한 대출 이자가 영국 국민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오르게 됐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대처 내각은 국민들의 생활고보다 환율을 방어하는데 더 급급했고, 경제가 갑작스럽게 둔화되다 못해 불황의 문턱으로 갔지만, 고금리를 계속 유지했다. 이는 결국 1991-92년의 경제 불황을 초래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결과적으로 로슨 호황기에 부동산 시장의 빅뱅이라고 불렸던 경제 성장은 1991-1992년의 불황으로 모두 상쇄되어 백지 상태로 회귀했다.[28] #

이런 1991-1992년 경제 불황은 로슨 호황기 동안 대처 내각이 인플레이션을 인위적으로 축소시키기 위해서 가입한 유럽환율조정장치(European Exchange Rate Mechanism, ERM)에서 탈퇴하고 금리를 인하하고 나서야 회복할 수 있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당시 대처 내각이 환율 방어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았다면 불황을 피할 수도 있었다고 평했고, 1991-1992 경제불황을 불필요한, 피할 수 있었던 불황이라고 묘사한다. 즉, 대처 내각의 경제는 임기 초반의 경제 불황과 임기 중반의 경제 회복 그리고 임기 말에 다시 경제 불황으로 마무리됐다고 정리할 수 있다.

3.2.5. 민영화

케인즈주의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은 저서 <Peddling Prosperity>[29]에서 대처 정부 경제정책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으며, 영국가스공사(British Gas)와 영국전력공사(British Electricity), 그리고 잉글랜드, 웨일스 물관리공사(Regional Water Authorities(RWAs))의 민영화는 국가 기간시설(基幹施設)의 민영화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의 하나로도 언급된다.[30] 민영화 문서를 참조해 보면 알겠지만, 민영화는 경제를 회복시키는 마법의 주문이 아니다. 제대로 관리 감독되지 않으면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리스크 또한 가졌기에 무분별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기세를 드높이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하에서 민영화의 리스크는 간과되었고, 대처의 민영화는 이후 경제적 측면에서 대표적인 비판거리가 되었다.

실제로 일부 주요 산업 분야의 민영화는 이미 1930~40년 대에 자유 시장을 옹호하던 경제학자들로부터도 기업의 이익과 공익이 상충될 수 있기 때문에 반대를 받았고, 이런 산업 분야는 민주주의 절차를 통해서만 독점을 방지하여 거시적인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 또한 대처의 민영화 정책 도입 이후로 민영화된 산업들의 효율성이 증가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이미 1996년에 경제학자들로부터 제기됐으며 #, 민영화된 공익산업과 철도산업[31]의 부실한 투자와 과한 요금 인상으로 영국 정부는 2017년에 상한가격제를 다시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 2019년에는 대처를 존경한다는 보리스 존슨마저도 철도 국유화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

하지만 정작 방송국 민영화라든가 BBC에 상업광고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무산되었다. 이웃나라 프랑스 아일랜드, 네덜란드 등지에선 공영방송에서도 상업광고가 편성된 것과 대조되는 점. 참고로 이웃나라 프랑스에선 대놓고 사회복지정책을 축소하진 않았지만 대신 그 당시 총리였던 자크 시라크가 마거릿 대처도 못한 공영방송의 민영화(TF1)를 실현했다.[32]

런던을 관통하는 템스강의 경우, 수질 오염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유명한데 원인으로 대처 총리 시절의 민영화가 꼽힌다. 민영화 이후 영국의 수도회사들이 시설투자나 서비스 개선은 제대로 하지 않고 주주 배당을 위한 수익 증대에만 신경을 썼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영국 최대 수도회사인 '템스워터'의 경우 부채가 약 150억 파운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와중에 템스워터는 수도요금 인상안을 내놓아 빈축을 사기도 했다. 영국 현지에선 필수 인프라를 관리하는 공공기관 민영화의 부작용이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때문에 템스워터의 국유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프랑스의 일간지 르 몽드는 "하수 중 일부가 빅토리아 시대에 만들어졌을 정도로 오래됐는데도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면서 "영국 최대 수도회사인 템스워터의 투자 부족 때문에 영국이 폐수 논란에 휩싸였다"라고 논평했다. 오물로 뒤덮인 英 템스강… 26조 부채 안은 수도회사의 이기심이 부른 재앙, 배설물 뒤덮인 英템스강…“튀는 물도 조심” 조정경기 참가자 입수금지

3.2.6. 북해 유전

마거릿 대처를 비난하는 측에서는 "대처 내각의 결실은 허상이고, 하느님의 축복인 북해 유전 덕분에 영국 경제가 회생했을 뿐"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북해 유전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를 매우 과장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영국이 북해 유전을 개발한 덕분에 산유국으로 올라서고 거기에서 상당한 규모의 재정 수입을 얻고 수입 대체 효과와 관련 산업이 발전하는 혜택을 누린 것은 분명하다.[33] 조지 소로스의 수제자로 알려진 짐 로저스는 북해 유전의 낮아지는 생산성과 고갈 위기 등을 언급하면서 파운드화 자산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영국은 이제 x됐다. 하지만 많은 주식 커뮤니티들에서 약팔이라고 까이기도 하는 로저스의 말이기 때문에[34] 어느 정도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다.

3.2.7. 스코틀랜드 경제 정책

또 일각에서는 "마거릿 대처 치하에 스코틀랜드 경제가 박살났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며 이것이 심지어 스코틀랜드 독립 의식을 증폭시켰다고 하기도 한다. 이는 당시 스코틀랜드 경제 구조와 큰 연관이 있다. 광산업과 제철업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 특성상 대처의 구조 개혁은 말 그대로 직격탄이었고, 그에 따라 대처에 대한 반감 또한 수치상의 발전이나 변화와 무관하게 무지무지하게 올라갔다. 이는 스코틀랜드뿐 아니라 다른 영국 북부 전반의 현상이었으며, 1980년대를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이런 경제 구조 개혁으로 인해 벌어진 실업 문제나 도시 슬럼화가 자주 묘사된다. 대표적인 게 폐광으로 실업자가 된 광부들을 다룬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영화 "브래스드 오프(Brassed Off)". 심지어 맨유 선수들을 다룬 다큐 "Class of '92"에도 스쳐가듯 대처 욕이 많이 나온다.[35] 빌리 엘리어트에서도 허구한날 대처가 까인다. 배경이 석탄 산업 합리화 조치로 피해를 본 잉글랜드 북부 더럼이기도 하고, 각본가 리 홀과 모티브를 준 실제 인물 필립 마스든도 대처 시대 노동자 계급에서 고통받았던 사람이라서 안 깔래야 안 깔 수가 없다.

구조개혁으로 인한 실업과 그에 따른 수치상의 성장이 민생에 바로 직결되기는 힘들다는 점은,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문제들이다. 한국도 IMF 이후 GDP나 실업률이 원상복귀되기는 했지만 비정규직 문제 등 여러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고, 미국도 90년대 제3의 길과 자유무역으로 인해 많은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진 것처럼. 따라서 아래 옹호란에 나온 듯이 스코틀랜드가 대처한테 대놓고 무시당한 것은 아니지만, 스코틀랜드의 몇몇 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고 그 피해에 대한 대처의 태도 역시 훌륭하지 못하여 여전히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대 영국의 노동 계급 및 노조들은[36] 여전히 그녀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노동 계급 출신이자 working class hero(노동 계급의 영웅)[37]라고 불리는 브릿팝 밴드 오아시스의 前 멤버이자 리더였던 노엘 갤러거는 대처를 "노동 계급을 없애버리려고 시도했고 '어느 정도 없애버린 인물'"이라고 평했다. 당연히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된 영국 대중음악계에서도 평판은 엄청 나쁘다. 이런 앙금은 대처리즘의 폐해를 직접 보고 자란 1990년대 브릿팝 세대부터 강하게 드러나는 편. 갤러거 형제부터 시작해 펄프의 자비스 코커[38]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중산층 출신인 블러 데이먼 알반(대처 지지자들이 사는 교외 지역에서 성장했는데, 본인은 자신과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알반은 좌파로 유명하다)까지 브릿팝 밴드 90%가 대처를 싫어한다.

이를 반영하듯이 빌리 엘리어트(뮤지컬)에서 작곡을 담당한 전설적인 록 음악가 엘튼 존 역시 Merry Christmas Maggie Thatcher라는 넘버를 통해서 마가렛 대처를 극딜했던 적이 있다. 해당 가사가 We all celebrate today 'Cause it's one day closer to your death[39]라는 신랄한 가사는 당시 대처에 대한 해당 지역의 민심을 짐작하게 만들어준다. 영국 북부의 오래된 탄광 도시 및 오래된 공업 도시들은 대처 시절 기반을 잃고 몰락했기 때문에[40] 현대 잉글랜드의 북부-남부간 지역감정을 이전보다도 강화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3.2.8. 종합

집권 당시 영국의 인플레이션율은 1979년 12.5%까지 치솟았다. 거기에 더해 석탄 및 제조업 분야는 파업으로 들끓었다. 정부부채 역시 심각한 수준이었다.[41] 따라서 1기(1979년~1983년) 당시의 경제정책은 인플레율을 끌어내리고 정부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증세 및 정부지출 삭감, 통화정책에 집중되었다. 이 정책들의 악영향으로 영국은 약 6분기에 걸친 GDP 감소를 경험하며 마이너스 성장이 지속됐다. 그 이후 경제성장률은 다시 플러스로 변했지만 GDP 성장률은 1970년대에 비해서 높다고 볼 수 없었고, 이는 1980년대 중반의 Lawsoon Boom을 포함시켜도 똑같다. # 즉, 1기 당시의 실물지표 악화는 이전 정권들의 실책으로 생긴 결과로 해석될 여지도 있지만, 통화정책을 너무 강경하게 밀어붙인 것 때문에 대공황 이후 최고의 실업률을 달성하고 GDP 감소는 6분기에 걸쳐 지속되어 필요 이상으로 영국 경제에 피해를 끼쳤다고 볼 수 있다.

2기(1983년~1987년)부터는 공기업, 공공주택 부문에서 민영화 등이 이루어진 점, 그리고 국제적으로 이 시기에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팽창한 시점이라 그 궤를 맞춰서인지[42] 자산 가격 상승에 따른 총수요 팽창이 있어 경제성장률이 높았다. 1987년의 경제성장율은 5.3%, 1988년에는 5.9%였는데, 이 경제 팽창기를 이른바 Lawsoon Boom이라고 부른다. 이 과정에서 중산층이나 서민들이 제 집을 가지게 되거나 주식 등 자산 증식에 있어서 재미를 보게 되는데, 대처 내각의 경제 운용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상당 부분 이로 인해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역시 자산 거품이 일어 퇴임 후 그 거품이 꺼짐에 따라 91년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대처 내각은 Lawsoon Boom이 거품이 아니라 공급 혁명의 효과로 해석하여 인플레이션을 방치했다.[43] # 덕분에 대처 내각의 평균 GDP 성장률(2.7%)은 1970년대(2.5%)에 비해서 높지 않다.

1기부터 2기까지 높았던 실업률은 대처 정부의 어두운 면이라 할 수 있다.[44] 다만, 주택가격은 대체로 상승세를 보였고 말기 들어 크게 상승했으나, 1990년 대 초반에 경제 거품이 빠지면서 주택가격도 같이 하락했다. 또한 80년 대 동안 임대 주택을 팔고 새로운 주택 건설에 미흡한 모습을 보이면서 1990년 대와 2000년 대까지 주택부족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부부채는 해결됐고 물가도 떨어졌지만, 지니계수 등 소득분배 지표는 악화됐으며, 빈곤에 처한 아이들의 숫자도 13%에서 22%로 증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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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을 내리는 과정에서 지니계수가 악화됐고, 하위 10%의 생활은 경제 성장이 시작된 80년 대 중반에 근소하게 소득이 증가했으나, 주택 비용 부담을 고려하면 오히려 79년보다 더 못한 상황에 놓였다.[45] #

또 인플레이션을 무리하게 잡으면서 1930년 대와 맞먹는 실업률을 기록한 적도 있었으며, 집권 1기와 3기 이후에 일어난 경제 불황[46] 모두 대처의 정책으로 인해 생겼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을 피할 수 없으며 #, 이 불황으로 실업률 증가와 소득분배 지표의 악화로 빈곤층이 크게 증가했다. # 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 지역의 낙후된 발전과 높은 실업률을 해결하는 데 느리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다. 주택 소유 증가도 주택을 구입할 수 있는 국민들에게는 이득이었으나, 이로 인한 지니계수도 악화됐고, 무엇보다 당시 팔린 임대 주택 때문에 이후 영국은 주택 부족을 경험하게 된다. 80년대 중반에 시작된 Lawson boom도 지속 불가능한 경제 성장률과 인플레이션 증가를 방치하여 1991년 경제 불황을 유발했다. 민영화도 일부 산업의 효율성을 증가시켰으나, 민영화 과정에서 너무 싼 가격에 기업을 팔아서 국고를 늘릴 수 있던 기회를 놓쳤다는 평도 있다. 또한 금융 규제 완화로 금융업을 크게 키운 것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금융사들이 위험부담이 큰 품목을 거래하게 만들어 2008년 금융위기에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 ##

요약하자면 마가렛 대처는 민영화와 규제 완화로 일부 영국 산업의 경쟁력을 키워서 잠시 영국 경제를 정상 궤도로 올렸으나, 지나치게 급진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은 제조업 공동화를 일으켜 높은 실업률과 빈부격차라는 구조적 문제를 남겼으며, 말기에는 다소 안정 되어가던 인플레이션마저 다시 키워서 영국의 경제 불황을 유발했다고 평할 수 있다. #

특히 2020년대 들어서는 영국에서는 현재 영국이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의 원인을 대처 시대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책임을 돌리는 일이 잦아졌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영국경제가 어려워지자 2010년부터 대처의 유산을 물려받은 영국 보수당이 14년간 연속 집권하며 강력한 긴축예산 정책으로 제금을 줄이고 정부지출을 억제했다. 보수당의 장기간의 긴축정책이 투자부족으로 영국의 생산성 하락 등 영국 제조업의 몰락과 복지 축소 중산층의 몰락 빈부 격차 확대 등을 유발했다. 세율은 높은데 경제 성장이 부진해 재정적자와 정부부채는 늘어나는 악순환의 코너에 몰려있는등 영국경제는 장기적으로 몰락하고있다. 또 보수당이 추진한 브렉시트와 세계적 코로나 유행과 우크라 전쟁 등 으로 인플레 와 경제침체가 같이 겹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 이로 인해 영국인들이 생활수준이 하락하는 등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자 결국 보수당은 2024년 영국 총선 선거에서 거의 몰락 수준으로 대패하며 노동당에게 정권을 잃었다.

그래서 2020년대 들어 영국의 영국경제 몰락의 근본 원인을 모두 대처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돌리고 있고 그런 기조의 정책을 고수한 보수당의 책임으로 돌리는 풍조나 여론이 크게 확산되었다. 대처의 경제적 업적에 대한 영국인들의 평가는 우호적이던 10-20 여년 전과 달리 크게 악화하여 매우 부정적으로 변했다. 요즘 영국 서민들의 경제에 대한 불평에서 대처에 대한 원망이 빠지지않는다. 왜 모두들 대처를 미워하는가? 다분히 대처에 대한 정치적인 반감이 작용한 것이다.

4. 정치에 대한 평가

4.1. 긍정적 평가

4.1.1. 보수 이데올로기의 세대 교체

보수당 지지자들에 따르면, 대처는 근면성실한 노력과 자립을 중히 여기는, 미들 잉글랜드로 대표되는 영국 중산층의 전통적인 가치와 사회관을 관철하고자 했고,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 또한 이런 신념에 유래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전후 시작된 영국의 사민주의적 정치와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성격이었기에 그녀에 대한 평가가 더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2000년대 노동당 집권 이후 이런 식의 재평가가 강해지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대처 정권을 전후로 영국 정계, 특히 보수 우파 내 이념적 스펙트럼은 큰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기존의 보수 우파가 정책 논쟁, 계급 담론보다 귀족 계급, 국교회 중심의 정체성 같은 가치관과 혈통에 기반한 보수주의를 추구했다면 대처 이후의 신보수주의자들은 우파적 경제정책을 우파적 이데올로기 자체의 핵심으로 두고 중산층 내에서 소위 말하는 '무임승차자'들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한 보수주의의 대중화로 포커스를 완전히 바꾼 것이다.

대중에게 보여준 이미지도 특기할 만하다. 유머와 부드러운 태도가 미덕으로 여겨졌던 영국 정치계에 여성으로 등장해 치밀하게 준비된 자료와 방대한 지식, 그리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언변으로 토론 상대를 압도하던 스타일 또한 어떤 의미로건 인상적이었다. 결국 그런 면모가 영국 정치사에서 지금과 같은 커다란 존재감을 각인하는 데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관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대처의 옷차림에서 대처가 어떤 자세로 그날의 토론에 임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는 것. 강경한 독설로 나갈 땐 독사 모양의 브로치를, 우호적으로 사근사근한 토론 진행을 할 시에는 아기 천사를, 조용히 이도 저도 아닌 결론을 유도하고 싶다면 아무 모양 없는 둥근 형태의 브로치를 차는 기호가 있었단 것이다.

4.2. 부정적 평가

Bus stop rat bag, Haha, charade you are
버스 정류장의 쥐새끼 같은 노파, 당신은 가식덩어리일 뿐이지
핑크 플로이드, " Pigs (Three Different Ones)"


영국 ITV Central의 풍자 인형쇼 Spitting Image[47]에서 마가렛 대처와 당시 보수당 정부를 신랄하게 풍자한 영상 모음들. 마가렛 대처를, 자기 아들을 개처럼 부리고 부처 장관들을 함부로 대하며, 예배당에서 헌금을 갈취하는 인간말종으로 그려놨다. 마지막엔 모두에게 욕을 먹으며 쫓겨나는 것까지 재현했다.

4.2.1. 대처 내각과 스코틀랜드 독립 문제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스코틀랜드 독립운동
, 영국의 자치권 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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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대처 총리였다. 우리 스코틀랜드인들이 지지하지도 않는 사람이 총리가 되어 스코틀랜드 경제를 죽이니 영국 정치에 대한 회의감과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니콜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
스코틀랜드가 아무리 대처 시절에 생각만큼 경제가 나빠진 것이 아니었다해도, 대처 총리 시대때 그런 인식에 기반해 스코틀랜드 독립 진영이 가장 크게 성장했던 것은 사실이다.[48] 당장 스코틀랜드 독립 운동의 대표 주자인 니콜라 스터전의 정치 입문 계기가 대처 총리였고,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독립 운동을 이끈 알렉스 새먼드 역시 인기 요인이 대처 총리를 비판하며 스코틀랜드 민족주의를 조장했기 때문이다.

2015년 영국 총선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은 독립당을 밀어 주는 결정을 내렸다. 2015년 영국 총선 스코틀랜드독립당(SNP) 56석을 얻으며 약진. 웨일즈, 스코틀랜드의 자치권 확대와 보수당의 브렉시트 정책으로 인한 국가 해체 위기의 심화. "영국은 해체의 길로 가고있다"

일단 스코틀랜드가 대처와 그 이후의 역대 연합왕국 행정부의 경제정책 하에서 받은 수혜 역시 크며, 특히 최근 들어서 북해 유전을 포함해 스코틀랜드가 다른 UK나 잉글랜드보다 1인당 GDP가 몇 천 달러 가량 많은 현실을 감안하면 이들이 대처 정권의 피해자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대처 총리의 극약처방의 수혜자 중에는 분명 스코틀랜드가 들어간다. 스코틀랜드 독립 운동을 경제적 측면에서 찾고자 한다면 스코틀랜드 지역 경제는 전반적으로 대처 시기이래 활성화되었으니 대처는 일단 저기로부터는 자유롭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독립 열기에는 분명 대처 정부의 경제정책도 그 원인이 있는데 그것이 단순히 일자리를 뺏었네 뭐네 하는 차원은 아니다.

스코틀랜드 내부에서 대처리즘의 금융업 중심 정책을 통해 제대로 덕을 받은 건 예나 지금이나 노동인구가 집중된 공업 도시가 아니라, 학생들과 금융업, 그리고 수도로서의 행정 기능으로 도시 자격을 유지한 에든버러인데, 실제로 스코틀랜드 경제 생활의 중심지는 이 에든버러가 아니라 영국 전체에서 굴지의 제3의 도시였던 글래스고이고, 산업혁명 자체를 상징하는 공업 대도시 중 하나였던 글래스고는 대처리즘으로 경제적 직격탄을 맞았다.

경제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현지 사회, 정치적인 면에서도 글래스고는 반대처 정서가 크게 성장할 확실한 이유가 있다. 글래스고는 예전부터 아일랜드계 가톨릭 이민자들이 대거 이주하여 장로회를 믿는 현지 스코틀랜드 출신 시민들과 상당한 갈등이 있었고, 이는 주로 셀틱 FC 레인저스 FC 사이 축구 경기의 훌리건질로 표출되었다. 대처 정권이 북아일랜드에서 영장도 필요 없고, IRA 소속이라는 추측만 가지고도 바로 쏴서 사살할 수 있는 shoot-to-kill 정책을 도입하는 등 막 나가는 탄압책을 펼치자, 이게 엉뚱하게 글래스고 내에서 저런 주민들 사이의 갈등에 다시 불을 지펴, 80년대 IRA의 반영 무장투쟁이 절정에 달하면서 동달아 글래스고의 폭력 범죄 또한 이때 전성기를 찍었다.

그렇다고 해서 에든버러에서 대처를 좋게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경제 문제 자체도 대처리즘 정책에서 단물을 빨다가 결국 2010년대 현대 들어와 평균 집값이 런던의 켄싱턴에 맞먹는 엄청난 가격 상승과 물가 상승으로 인해 전통적으로 빈부격차와는 별개로 잉글랜드와 달리 상류층과 노동계급 양쪽 모두 시내 중심 도로인 하이 스트리트 양쪽으로 난 아파트에서 주거 공간과 문화, 공동체 생활을 공유하며 계급을 초월한 끈끈한 공동체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에든버러의 사회적 전통을 파괴하는데 크게 일조를 했다.

산업혁명의 중심지인 글래스고와 달리 에든버러는 옛날부터 대규모 산업 노동계급이 적었고, 그리고 이들도 각종 사업으로 돈을 벌어온 스코틀랜드 출신 부호나 명성을 얻은 학자, 유명인들이 자기 고향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여 계급간 적대 감정보다 '같은 스코틀랜드 수도의 시민'이란 문화 민족적 수평 동질감이 더 강했다.[49] 이런 측면에서 스코틀랜드 자치 정부 수립에 일관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로 반대했던 모습은 연합왕국의 2번째 왕국의 수도로서 행정적, 정치적 중심지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에든버러 시민들에게 오만하고 고압적이며 스코틀랜드는 스스로 뭔가 할 줄 모른다고 무시하는 잉글랜드인이란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또한, 이를 완화하기위하여 1988년도에 스코틀랜드 국민교회( 장로회) 총회에서 연설을 진행했는데, 이 연설이 당시에 크나큰 논란을 불러온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성공회와 크나큰 역사적, 신학적, 교회 문화적 차이를 전혀 인식 못하고, 그리고 자신이 논설하는 성공회적 논리와 교리도 잘 알지도 못하고 연설하다 전국가적으로 비토의 목소리가 터져나왔기때문이다[50]. 이 사건을 산상수훈(Sermon on the Mound)이라고 부르는데, 비꼼의 대상이 부활한 예수인것을 본다면 얼마나 개판이었는지 짐작할수있다. 이 사건은 단지 장로교회 뿐만 아니라 가톨릭, 성공회, 종교학 교수, 보수당 중진들등 수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샀으며, 사실상 일종의 정치적 자살로 비춰졌다. 이는 유튜브나 다른 기록물에서 열람할수있으니 한번 보는것을 추천한다.

굳이 따지면 대처 시기에 피해를 입은 지역은 북잉글랜드지역과 스코틀랜드 중에서도 북잉글랜드와 접한 기존의 스코틀랜드 중에서도 남부 쪽은 피해를 봤다고 볼 수 있으나 대신 애버딘을 위시해서 스코틀랜드 내에서도 북해 유전과 관계가 깊은 지역이 새로이 부상했다. 근데 이 또한 주의 깊게 보면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애버딘은 크게 성장한 지금도 인구가 20만명이 안 되고, 그나마 그 인구 중 다수가 상술한 그대로 그 동네에 눌러 붙어 사는 게 아니라 주중에는 현지서 먹고 자고 일하고, 주말이나 휴가 때는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삶 자체가 유동적인 유전 노동자들이다.

반면 글래스고의 경우 대처리즘 이후 경제가 침체되며 인구가 크게 줄어든 지금도 60만에 가까운 굴지의 스코틀랜드 제1의 도시이고, 이 당시에는 1백만이 훌쩍 넘었던 영국 전체에서 둘째니 셋째니 버밍햄과 경쟁하던, 어디가서든 꿀리지 않는 대도시였다. 스코틀랜드 북부라는 지방 자체가 진짜 상술한 유전업이랑 그나마 날씨 좋은 여름철에 킬트입고 위스키 마시러 관광오는 하이랜드 빼고 아무것도 없는, 인구 밀도 자체가 황량하게 낮은 동네인데 스코틀랜드 경제, 사회의 중심인 로우랜드가 엿먹은 대신 애버딘 유전업이 좀 컸다고 해서 "스코틀랜드는 대처리즘의 수혜자다"라는 주장이 성립하는 지 의문이다.

이런 식으로 스코틀랜드는 대처 정부 하에서 일부 지방, 산업은 경제적으로 수혜받은 게 있어도 정치적, 문화적으로는 소외되었다. 대처 정부 시절 군소정당급의 영향력밖에 없었던 스코틀랜드 국민당은 이때부터 노선을 본격적으로 좌향좌하며, 1988년 글래스고의 고번(Govan) 선거구에서 승리를 거둔 걸 기점으로 대처리즘에 분노한 스코틀랜드 노동 계급과 지역 정치 엘리트 양쪽의 지지를 끌어 모으며 결국 1990년대에 들어 지금의 유력 정당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했다.

정치란 건 단순히 경제적으로 뭔가 던져 주면 그게 곧 지지율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박탈을 하든, 혜택을 주든 그 과정과 방식에서 현지 주민들이 어떤 메시지를 받았냐가 핵심이다. 이런 면에서 대처는 상술한 그대로 전형적인 '고압적이고 거만하며 스코틀랜드를 불평만 하는 촌구석으로 취급하는 잉글랜드 엘리트'로 이미지를 각인시키며 현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의 부상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51] 오늘날 연합 왕국 내의 상호 불신간에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드라이브를 건게 대처의 스코틀랜드 정책이었다. # 대처리즘이 영국 전역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은 후 비교도 안되게 더 큰 런던을 중심부로 한 남동부의 머릿수를 무기로 도저히 이런 조류에서 벗어날 기미가 안 보이니 아예 대놓고 국가 자체를 해체하겠다는 여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던 것이다.

대처의 임기를 끝냈던 인두세 도입도 스코틀랜드의 반감을 부른 원인 중 하나였다. 이것은 1989년에 스코틀랜드부터 먼저 도입하고 잉글랜드, 웨일스는 1990년에 도입하기로 돼있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도 인두세 폭동이 일어났고 대처는 사임했으나, 스코틀랜드부터 먼저 도입했다는 사실 때문에 대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조세권 문제는 토니 블레어 내각이 1997년 스코틀랜드 자치권 이양 주민투표에 조세권 이양을 끼웠고 의회 이양과 함께 가결되었다.

오늘날에도 그 영향이 살아 있는 여러 가지 커다란 결정과 정책들로 인해 대처 내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공과가 꾸준히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다.

브렉시트 선거에서 유럽연합을 탈퇴하기로 결정한 이후 다시 한 번 스코틀랜드 문제가 주목받고 있다. 당초 영국은 스코틀랜드가 영국에서 독립하면 유럽연합 가입을 반대할 것이라고 발표하여 스코틀랜드를 위협했는데, 불과 2년 뒤에 영국 스스로 유럽연합 탈퇴를 선언하여 문제가 됐다. 스코틀랜드 국민당에서는 영국 측에서 공약을 어겼으니 다시 국민투표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영국과 유럽연합의 협상 기간 동안은 여전히 독립 반대 의견이 강세했으나, 영국이 정식으로 유럽연합을 탈퇴하고 1년의 유예기간이 끝나면서 브렉시트의 현실이 스코틀랜드를 닥치자 독립 찬성 의견에 힘이 붙기 시작했으며, 2021년 기준으로는 독립 찬성과 반대 의견이 팽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 2021년 스코틀랜드 총선에서 독립을 지지하는 스코틀랜드 국민당과 스코틀랜드 녹색당이 과반 이상을 차지했다.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이 심화되어 2014년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가 이뤄지면서, 소위 '대처식 리더십'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다. 대처의 구조조정에 따라 스코틀랜드인들의 마음이 분리 독립으로 크게 돌아선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무엇보다도, 상대방을 정적으로 규정하고 문제점이나 극복 대상을 명확히 하고 타협이나 회피없이 그에 맞서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대처식 리더십의 주요한 특징이고 이 과정에서 추진력이 있다는 평판을 얻어 생긴 별명이 철의 여인 대처였다. 그러나 비타협적이고 강경한 추진 과정에서 그에 상응하는 적과, 새로운 문제들이 생기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고, 그 새로운 문제가 심화되어 생긴 것이 2014년의 연합왕국 해체 위기라면 대처의 리더십이 높은 평가를 받는 만큼 그 반대급부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대처 시대에 스코틀랜드 게일어 사용 인구가 감소했다는 지적도 있다. #[52]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마거릿 대처의 잘못인지 어떤지는 추가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굳이 따지자면 게일어 사용자가 저렇게 줄어들 동안 대처는 뭐했냐는 식의 비난은 가능하겠지만. 대처 시대에는 UK 행정부 소속 스코틀랜드 주 장관 조지 영거[53]의 게일어에 대한 개인적 선호 등에 힘입어 게일어 방송에 대한 자금 지원이 증가했다. 반면 오히려 블레어 시기에는 그에 대한 자금 지원이 감소했다고 나와있다. 게일어 사용인구 감소가 대처시기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1755년 이래 게일어 사용 인구는 줄곧 감소추세였다. 오히려 대처 시기보다 더 감소율이 높았던 시절이 훨씬 더 많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4.2.2. 제1세계 독재 정권에 대한 우호적 태도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이 따라 관점이 크게 갈리는 부분이지만, 그녀가 보인 독재정권들에 대한 우호적 행태는 대처의 소속 정당인 영국 보수당 지지층 내에서도 비난받으며 옹호하려 드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가령 인종차별법 아파르트헤이트를 공공연하게 두둔한 점이나, 정적들을 무력화하려고 법을 바꾸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점은 비호의 여지가 없다. 피노체트[54]가 통치하는 칠레에 무기를 판매했다거나, 피노체트가 실각한 후 런던에서 영국 사법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을 때 강경하게 석방을 주장한 일 등이 있고, 아파르트헤이트 문제[55] 유엔에서 남아공에 대한 경제제재를 결의했을 때 영국 상임이사국 자격으로 반대표를 던진 것 역시 대처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게다가 넬슨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훗날 남아공 정국이 바뀌어 만델라가 석방되었을 때는 환영 의사를 밝혔는데,[56] 이는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무너져가고 있는 대세를 거스르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57]

이런 부분은 어지간한 대처 옹호자들도 실드치지 않아서 새삼스럽게 이야깃거리가 되는 일이 드물기는 한데, 그래도 대처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실제로 대처의 행적에 대한 논쟁이나 토론이 벌어질 경우, 이런 치명적 약점에 대한 언급 자체를 회피하고 다른 부분에 중점을 두고 싶어하는 대처 지지자와, 왜 대처에 대한 평가를 이야기하면서 제일 큰 문제점을 회피하려고 드느냐고 따지는 대처 비판자 사이에서 입씨름이 벌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여기에다가 포클랜드 전쟁의 여파까지 더하여 중남미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싫어하는 정치인 공동 1위이다. 다른 한 명은 로널드 레이건. 제아무리 결과론적으로 포클랜드 전쟁 아르헨티나의 독재정권을 붕괴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처는 갈티에리보다 더한 욕을 먹고 있다.

4.3. 논란이 있는 평가

4.3.1. 파업과 시위에 대한 강경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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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는 파업이나 시위 등 정치적 반대 행위에 대해 강경한 태도로 대응했다. 가령 위의 사진처럼 런던 시위 때에 기마경찰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짓밟고 격파한 기동 전술을 도입한 것은 '철의 여인'다운 강경한 대응 방법이었다.

집회 및 언론의 자유 보장과 사회적 안정 보장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어떻게 찾을지는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 중 하나이고, 대처의 대처 방식을 사회적 안정과 법 질서의 유지라는 명목으로 집회와 언론의 자유를 파괴한 반민주적 행태로 보는 사람도 있다. 오늘날 수백만개의 CCTV가 설치된 런던의 첫삽을 뜬 것도 1980년의 대처로 이 정책은 97년 이후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내각 때도 이어졌지만 위의 대 시위 강경 노선과 더불어 '감시하는 정부'라는 낙인이 되어 많은 반대를 샀다.[58] 그래픽노블 브이 포 벤데타의 배경의 모티브가 대처 총리의 통치기라는 사실은 작가인 앨런 무어 스스로가 서문에서 공인한 바이다. Warhammer 40,000의 작가들이 인류제국을 구상할 때 이 시기의 영국을 참고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의 강경한 태도는 꽤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노동자 파업, 특히 탄광 노조의 파업을 강경 진압한 경우를 보자면, 탄광 노조가 그만큼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어 대처 이전에 총리를 갈아치울 정도의 영향력을 보였다.[59] 그러나 노조가 총리를 갈아치울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는 것에 대한 국민적 반감은 극심했으며, 이와 함께 탄광 노조가 파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조직원들에게 보여준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면모들은 대처가 노조를 비판할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1984년 NUM(전국탄광노조)의 노조위원장인 아서 스카길은 3번이나 파업 투표에서 졌음에도 무리하게 4,000명을 모아 투쟁하였고, 정부는 적지않은 국민적 지지를 얻어 노조에 강경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4.3.2. 페미니즘과의 적대적인 관계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이지만, 페미니즘 계열에서는 싫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은 여권 신장의 가장 큰 요소이고, 여성의 경제적 자립에 있어 가장 큰 장애는 무엇보다 임신 출산 육아이다. 영국은 국영 탁아소가 정비되어 있어 여성이 안심하고 직장에 나갈 수 있었지만, 대처가 국영 탁아소 등을 폐지함에 따라 다시 여성은 육아에 대한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대처가 페미니즘을 반대했다는 것은 마가렛 대처의 자서전이나, 여성 보좌관의 글이나, 심지어 메릴 스트립 주연 철의 여인(영화)에서도 꾸준히 나타나는 부분이다. 위의 Section 28 같은 경우만 해도 그렇지만, 대처 본인은 오히려 가부장적 보수주의에 깊이 몸담고 있는 보수 우파였고, 페미니즘을 비롯한 이 시절 고개를 들기 시작한 사회적 진보주의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질 리가 만무했다.

4.3.3. 보수당 내의 부정적 여론

보수당의 원로들 중에서는 대처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세력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베버리지 보고서를 통한 계급 타협이 정착된 상황에서 노동 계급에 대한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오래된 계급 투쟁의 망령을 다시 불러왔다는 것이 당시 보수당 원로들 중에 대처를 싫어한 세력이 존재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영국 현지에서도 종종 회자되는 썰인, 대처 재임 시절 내각의 정책을 부정적으로 봤다는 얘기가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사적으로 비서관들에게 "오늘은 그 여자(대처)가 짐의 백성을 얼마나 괴롭혔는가?"라고 비꼬곤 했다는 일화가 상징적이다. 양차 대전에서 국가 주도 동원 경제의 막강한 조직력이, 전후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에서 보편 복지 정책으로 연결되어, 사회적 안정과 계급적 불만의 해소라는 측면에서 크게 성공한 걸 보았던 전후 영국 보수 엘리트들은, 미국과 달리 사회 안정이라는 쥐만 잡을 수 있다면 일정 수준의 시장 개입은 용인했다. 결국 대처를 끌어내린 것도 노동당이 아니라, 보수당 중진들이었다.

대처는 전통적인 영국 보수당의 문화에 적응하기보다는, 기존 보수당의 이념 체계를 신보수주의로 완전히 뜯어고치고자 했기 때문에 벼락출세한 정치적 졸부 취급을 당하였었다. 역시 미국과 달리, 이 시점에서도 영국은 적어도 보수당 중진들, 원로들이라는 특정 사회적 집단 내에서 보면 프랑스 혁명 산업 혁명 이전 종교, 혈통, 작위 같은 전근대적 신분 결정 요인에 큰 무게를 두는 계급적 가치관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고, 이 관점에서는 일단 평범한 중산층 가정 출신의 여자라는 점 자체가 문제가 되었다.[60] 이러한 가치관을 조선시대급 꼴통 마인드라고 지적할 수도 있지만, 근대에 들어와서 큰 내전도, 체제의 급격한 전복도 없었던 영국에서는 근대 이전의 사회, 신분 질서의 유산이 상당히 강력하게, 그리고 오래 유지되었다.

5. 기타 평가

5.1. 긍정적 평가

5.1.1. 환경보호에 대한 기여

" 오존층 보호를 위해 프레온 가스를 제한하자"는 몬트리올 의정서를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녀가 화학과 출신이라는 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칼 세이건이 그녀를 높게 평가한 이유.

5.1.2. 공교육 향상

교육 부분에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GCE O와 CSE의 two-tier system을 폐지하여 하나의 시험인 GCSE로 통합하였다. 이로 인하여, 저소득층 가구들이 집중된 지역의 학교에서도 고등학교인 sixth form에 진학하게 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열리게 되었다. 종전의 CSE 시험으로는 고등학교 진학이 불가능했기 때문. 결론적으로 1988- 1989년 사이에만 고교 진학률이 약 20% 증가하는 쾌거를 이뤘다.

5.2. 부정적 평가

5.2.1. 우유 도둑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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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회자되는 실책 중 하나로 70~74년, 그녀가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 중에 7~11세 아동의 우유 무상급식을 폐지한 것이 있다. 이 때문에 온갖 비난이 끊이지 않았으며 당시 붙은 별명은 '우유 도둑'(Milk snatcher).[61] 오죽했으면 마가렛 대처 본인이 "우유 무상급식 중단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라고 후회하는 몇 안 되는 정책 중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 비슷한 사례로 2010년 데이비드 캐머런 내각도 다시 우유 도둑 논란에 휩쓸렸다.

영국에서 우유는 안 그래도 영국인들 내에서도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영국 요리에서 취향을 덜 타는데다 칼슘 공급원을 넘어 식생활의 중심이다. 한국인에게 김치가 중요한 음식이듯이, 서양인에게 우유는 매우 중요한 음식이다. 현대 영국인에게 국부이자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는 윈스턴 처칠영국이 2차대전으로 허덕일 때(1943년)에도 "한 국가의 앞날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투자는 어린이들에게 우유를 먹여두는 일이다."라며 누누이 강조했을 정도였는데, 그녀의 병크가 영국인의 정서의 민감하다 못해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한국 정부가 재정 부족 크리로 학교 급식, 군대 급식에서 김치를 뺀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영화 철의 여인에서 대처가 마트에서 우윳값을 물어보고는, 집에 와서 "우윳값이 올랐다" 라고 남편에게 하소연한다. 그러자 남편의 대답이 "잘됐군, 우리는 절약해야 돼." 라고 대답했다고.

이 사건 때문에, 영국에서는 마가렛 대처의 기일이 되면 우유 도둑질을 조롱하는 목적으로 인터넷에다 우유를 마시는 짤방을 올리기도 한다.

5.2.2. 사생활에 대한 비판

아들인 마크 대처(1953~)가 2004년 적도 기니 쿠데타 도와준 혐의 인터폴에 현상수배되었다. 마크가 적도 기니의 쿠데타를 도와준 이유는 대의나 명분 이딴 건 없고 그냥 "쿠데타에 성공하면 적도 기니에서 나오는 석유를 얻어 먹으려고 했다." 라는 이유였다고 한다. 물론 쿠데타는 쿠데타에 참여할 용병들을 실은 비행기가 짐바브웨 하라레에 억류되며 실패하고 본인은 쿠데타 실패 얼마 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잡혔는데 마가렛 대처는 아들 보석금을 마련하려고 제대로 똥줄탔다. 어찌어찌해서 아들 보석금을 물어주는데 성공하고 마크 대처는 집행유예를 받고 영국으로 추방되었다. 이외에도 마크 대처는 행보가 엄청 지저분한 인물로 자기 어머니가 총리라는 것을 이용해서 영국군 제식 무기들을 몰래 외부로 빼돌린 뒤 그걸 중동에 갖고 가서 밀판매를 일삼고 용병단을 결성해서 반정부 집단에게 돈받고 대신 전투를 치러주는 짓을 했다. 적도 기니의 쿠데타도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러니까 상임이사국의 총리의 아들이라는 놈이 무기 밀매에 PMC 조직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마크 대처는 풀려난 후에는 별다른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으며[62] 조용히 살고 있다.

하루에 3~4시간만 잠을 잔 것으로 유명하다. 노년에 대처가 앓은 치매의 원인으로 수면 부족을 꼽는 분석이 많다. 그 때문에 이 모습을 본 엘리자베스 여왕이 너무 걱정이 되어서 "이보시오, 대처 수상. 영국의 발전을 위해 온 힘을 쏟는 것은 좋지만 하루에 4시간밖에 자지 않으면 나중에 큰 화를 입을까 걱정이 크오. 짐도 하루에 8시간 이상은 자는데, 경도 행복하게 오래 살려면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소?" 라고 충고까지 했다. 수면 부족은 베타아밀로이드라는 성분을 세척하지 못해 이 성분이 뇌를 파괴하여 치매를 유발한다고 알려졌다. 게다가 엘리자베스 여왕은 90세가 넘도록 장수했으니, 더더욱 비교가 되는 일화다.[63] 이러한 면모는 현재까지 대처의 비판자들이 대처를 놀릴때 사용하는 단골 레퍼토리다. 그러나 수면 부족의 경우에는 아들 문제와 달리 전적으로 개인 문제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비판받을만한 것은 아니다.


[1] 애틀리는 전쟁 말기에 총리에 선출되었다. 그의 업적의 대부분이 전후 처리 문제와 전후 복구 사업에 할애되어 있다. [2] 묘하게 동시대 신자유주의의 상징이었던 레이건과 정반대인데, 레이건은 대중들에게 인기가 좋고 심지어 민주당 지지자들도 나름 이미지가 나쁘지 않은 반면 전문가들에게는 과대평가되었다는 의견도 적지 않게 나온다. [3] 왼쪽의 데일리 메일의 경우 친 보수당 언론이고, 오른쪽의 데일리 미러의 경우 친 노동당 언론이다 [4] 예를 들면 리버풀, 맨체스터 [5] 리버풀은 아예 대처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녀가 죽었다."라며 조소했다. [6] 사실 영국의 축구계 자체가 보수당 인사들에게 대체로 우호적이지 않다. 당장 알렉스 퍼거슨만 보더라도 열혈 노동당원이다. 축구 자체가 영연방 국가들에서는 노동계급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맥락을 같이 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축구는 흑인들이 주로 즐기는 스포츠이다. 백인들은 럭비를 선호한다.) 귀족들이 많이 다니는 유서깊은 사립 학교에서는 남학생들에게 아직도 럭비 크리켓을 가르치지, 축구를 시키지 않는다. [7] 굳이 국내 환경에 비유하자면 국민장 정도 급. 물론 대체적인 급이 이렇다는 것이고 세세하게는 많이 다르다. [8] 참고로 브렉시트를 터뜨린 데이비드 캐머런은 22%이며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로 욕을 잔뜩 먹은 네빌 체임벌린은 17% [9] in the years before 1979, per capita output in Germany and France consistently grew faster than in Britain, but in subsequent years, grew more slowly. [10] 동성애 억제, 가족의 가치 신봉 등이 있었다. [11] 영국 외의 예외사례로는 미국이 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 연방준비제도 의장 폴 볼커 또한 대처와 마찬가지로 통화주의 정책을 고수했다. [12] A large part of those spending reductions were related, of course, to privatizations which took public companies' losses off the public books. [13] 이나마도 국영 철도는 그럼 얼마나 좋았냐며 반박당기도 한다. [14] 시세 대비 20~30% 할인했다. [15] 심지어 공기업 노조에서 반발했음에도 공기업 직원들 역시 이를 많이 구매했다. [16] 사실 지금도 이러한 공기업들의 상당수는 기관이 보유하고 있다. [17] 가스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개발되었다. [18] 영국이 IMF 구제금융을 받은 1976년은 1차 오일 쇼크와 2차 오일 쇼크 사이의 시점이다. 오히려 이 때는 석유값이 강세일 때라 석유 장사하기 좋을 때였는데 중동, 소련 등 누릴 만한 나라들은 다 누렸던 이런 혜택를 받지 못한 점은 까일 만하다. [19] 석탄 산업의 고용은 50~60년대의 70만 명 수준에서 70년대에는 25만 수준으로 감소했고, 이것이 대처 정부를 들어서 거의 0명으로 줄었고 이게 지금까지 내려져 오고 있다. 그리고 북해 유전으로 인해 석탄 산업을 포함해 38만 내지 6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동시에 북해 유전과 관련해서 이 수치에 상당하는 일자리가 생겼다. 2014년 기준으로 북해 유전, 가스전 관련 일자리 종사자 수는 450만 명이라고 한다. [20] 위 수치는 전부 북해 유전 수입을 포함한 수치다. 북해 유전을 제외한 1인당 GDP는 일단은 낮게 나온다. 다만, 북해 유전 수치를 제하고 보는 것도 우스운 것이 애초에 스코틀랜드 지역 산업이 개박살난 환경적 요인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저 북해 유전이다. 또, 지역 경제에 영향력도 큰 산업을 배제하는 것 역시 스코틀랜드의 경제력을 과소평가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북해 유전이 스코틀랜드에 특별히 경제적 혜택을 제공한 것도 사실이지만, 잉글랜드도 북해 유전 덕을 본 것 역시 사실이다. # [21] In the early 1980s, a determined attempt was made to reduce the rate of inflation, which had picked up sharply during the 1970s in response to higher oil prices and an expansionary monetary policy. Policy was geared towards meeting targets for money supply growth, but money growth remained stubbornly resilient. Consequently, nominal short rates remained at or above 12% between 1980 and 1981. The exchange rate also appreciated in response to tight monetary policy and the flow of North Sea oil revenues that had started to come on stream. There followed a large recession between 1980 and 1981 and only a sluggish recovery until the mid-1980s. pg.285 [22] But she also raised taxes on consumption. Partly as a result of this, and the Government's monetary policy, the inflation rate jumped to nearly 23 percent and the practices of supply-side economics have receded. [23] But economists agree that the shift in the tax burden from income to consumption did little to urge on economic growth or investment. [24] In the tax arena, Mrs. Thatcher's substantial reductions in income taxes, particularly for the highest earners, had little effect and the increase in value added tax - essentially, a national sales tax - added to inflation. [25] Monetary policy had too much of a burden to bear, said Bill Robinson, a senior research fellow at the London Business School and a monetarist. I don't believe you can just do it with monetary policy. [26]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1970년대 초반에 미국이 겪었던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서 임금을 고정했지만, 이는 역효과를 일으켜 경제를 더 악화시킨 적이 있으며, 미국은 약 10년 동안 스태그플레이션의 영향에 놓였다. # 이후 선진국들은 임금과 물가를 직접 조정하기보다는 금리인상, 통화량 통제, 정부예산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27] 1980년대 대한민국은 이 방법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았으며 당시 김재익 경제 수석은 추곡수매가 인상을 억제하고 임금을 인상한 기업에 대출 불이익을 주는 방법을 썼다. 하지만 이건 독재정권이었기에 가능했다. [28] However, the positive shocks to residential investment dampened soon after as the impact of the deep recession offset the initial stimulus provided by the immediate aftermath of the credit liberalization. [29] 원래 번역명은 <부질없는 번영>이 되었어야 했지만 국내 출판사의 괴상한 센스로 인해 번역명이 <경제학의 향연>으로 정해졌다. [30] 2009년 말에만 영국가스공사는 요금을 상당히 인상했고, 원가를 이유로 근 10년 내 총 40%의 요금상승이 있을 거라고 예고했다. 영국통신 BT 유럽에서도 특히 느린 서비스 속도로 악명이 높고 물관리공사의 경우 잉글랜드, 웨일스는 OFWAT에 서비스를 위탁하게 되었고, 스코틀랜드는 민영화를 피해 아직까지 3개구로 분할되어 관에서 운영하고 있다. [31] 다만 철도 부문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의외로 대처가 민영화에 회의적이었던 분야 중 하나가 철도였다. 90년대 임기 막바지에 동의로 돌아서긴 했으나 94년에 그 일을 실제로 한 건 후임자인 존 메이저다. [32] 다만 이때 당시 자크 시라크 총리는 민영화를 남발하였는데, 이는 결국 그의 지지율에 악영향을 미쳐 그가 대통령으로 출마했던 198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2차 결선 투표 당시 좌파 진영의 프랑수아 미테랑한테 무려 8% 차이로 지고 말았다. [33] 2002년부터 스코틀랜드의 강한 민족 의식에 기반해 분리 독립론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스코틀랜드 민족당(SNP)는 항상 북해 유전을 독립의 밑바탕으로 상정했고, 이건 이 유전이 독립 운운할 만큼 생산성을 보유했단 뜻이다. 나라 하나 지탱할 정도로. 그런데 이 논리대로라면 북해 유전으로 본격적으로 꿀 빨게 된 것도 대처의 석탄산업 구조조정으로 관련된 노동자들이 북해로 몰려간 이후의 일이다. [34] 실제로 로저스의 투자 방법은 성공적인 주식 투자 방법의 전형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35] 대처와 영국 보수당의 무관심 속에서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살아났고, 그 상징이 바로 맨유 유스팀 출신의 레전드들이다, 이런 요지. [36] 이 외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대처 시대에 고통받았다. 맨체스터도 대처 때문에 리버풀과 사이좋게 박살났기 때문이다. [37] 원문은 존 레논이 작곡한 노래 " Working Class Hero"다. 존 레논 역시 생전 좌파 운동가로 유명했지만 마거릿 대처에 대해서는 별 말을 남기지 않았다. [38] 대처 정책의 피해자인 셰필드 출신이다. [39] "우리 모두는 네가 죽을 날이 하루 더 가까워졌기에 오늘을 축하해" 의역하면 '네 목숨이 하루 더 줄어들었으니까 오늘도 축하해!' 좀 저급하게 말하자면 "빨리 뒈져버려"란 소리다. [40] 영화 빌리 엘리어트, 브래스드 오프, 풀 몬티 등에서 약간이나마 보여준다. 사실상 켄 로치 마이크 리 같은 영국 좌파 영화 감독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41] 전 정부의 삽질에 따른 당시 정부 집권 연도의 경제지표 악화는 2차 석유파동 및 IMF 당시 한국에도 있었다. 사실 이때 이른바 80년대 초반 불황이라고, 일본을 제외한 여러 선진국들의 경제가 뒷걸음치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특히 남미는 원자재 가격 폭락으로 80년대 내내 헬게이트가 열렸다. [42] 우리나라도 이 시기 삼저호황을 겪으면서 부동산이 폭증했고, 일본은 이 분야 전설이다. [43] the government made such a mistake in allowing an inflationary bubble in the late 1980s. Part of the reason is that they really felt they had created a supply side miracle – which hadn’t actually occurred. [44] 사실 1970년대 후반 영국의 골머리였던 실업률이 5-6% 수준이었는데, 집권 직후 대처가 인플레이션을 먼저 잡기 위해 통화유통량 조정과 긴축정책으로 실업률은 1982년 10%를 넘어서서 1984년 여름에는 12%로, 전후 최고 수준을 찍었다. 이후 1986년까지 11% 이상이었으나, 1987년부터 하락하기 시작해 1989-90년 경에는 7% 정도까지 떨어졌다. 이후 1991년부터 다시 상승해 1993년 10%를 넘어섰으나, 이번에는 좀 더 빨리 하락해서 1999년이 되면 6% 아래로 떨어졌다. [45] But after housing costs, the real income of the 10th percentile fell by 2.4 per cent — so the poor were in fact worse off in 1990 than in 1979 [46] However tough budgetary measures meant that growth suffered in Mrs Thatcher's first term, with a deep recession in the early 1980s followed later in the decade by a boom. [47] '꼭 빼닮은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쇼에서 나온 인물들의 면모가 모두 진짜임을 강조하는 의미인 셈. [48]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아일랜드 자치권 논의-스코틀랜드 자치권 논의-1차 세계대전- 아일랜드 독립 전쟁-2차 세계대전- 1979년 스코틀랜드 자치권 이양 주민투표-1997년 스코틀랜드 자치권 이양 주민투표-2014년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 브렉시트 순으로 흘러간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대립이 있어도 지금처럼 격하진 않았다. 첫번째 자치권 이양 주민 투표에서는 노동당에서 총 유권자 찬성률 40% 이상시 가결 조건을 거는 바람에 찬성표가 소폭 앞섰으나 조건미달로 부결되어 좌절됐고 이에 화가난 SNP가 전원 제임스 캘러헌 내각 불신임 투표에 동의를 해버렸다. 이후 총선에서 마거릿 대처 내각이 집권하고 스코틀랜드에 최소한의 권한을 쥐어주며 자치권 이양 요구를 묵살했다. 이후 1997년 투표를 통해 스코틀랜드 의회와 정부를 얻지만 노동당의 미숙한 전략으로 스코틀랜드 노동당 지지자의 대부분을 SNP로 끌어오게된다. 이 상황에서 아슬아슬하게 독립 투표가 부결되었고 브렉시트 투표가 가결되어 영국이 EU를 나간 이후가 현재 상황이다. 이 흐름에서 보수당은 기름을 두번 부었고 노동당은 두번의 실수를 저질렀다. [49] 스페인 바스크 지방도 이렇게 계급 갈등을 더 큰 국가 내 지역민족주의적 유대감으로 완화한 사회적 역사가 있다. 그리고 이런 지방민족주의적 사회적 합의 노선 자체가 당연히 계급적 타협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 스코틀랜드 국민당이나, 바스크 민족주의 정당들이나 자연스럽게 경제적으론 온건 사민주의적 경제 정책, 사회적으론 카톨릭 교회와의 긴밀한 관계를 표방하게 된다. [50] 거기에 중간중간 자신의 정책에 대한 옹호와 일하지않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도 섞어넣었었는데, 그때 당시 실업률이 대처정부 사상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던때라 잉글랜드내에서도 강한 역풍을 맞았었다 [51] 오늘날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의 원인이 경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52] 해당 표를 보면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스코틀랜드 게일어 사용자는 약 8,000명 증가했고, 1971년부터 81년까지는 6,000명 감소했다. 헌데 1981년부터 1991년까지 화자가 무려 17,000명 정도 감소했다.(참고로 마거릿 대처의 집권 시기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다.) 그러나 1991년부터 2011년까지는 감소의 폭이 크게 줄어 8,000명 정도 감소하는데 그쳤다. [53] 보수당 지지자로 통합주의자다. [54] 다만 칠레는 전략적인 문제가 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전쟁 시점에서 이미 별개로 영토분쟁이 존재하고 있는 등 양국 간 갈등이 존재했다. 그 이유로 포클랜드 전쟁 당시 남미의 다른 국가들은 전부 아르헨을 지지하는 가운데 칠레만 유일하게 영국을 지지한 거고 영국과 칠레의 비밀 동맹은 아르헨티나를 겨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5]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했을 때 당시 국민당 정권에서 영국에게 심하게 물먹였다. 예를 들면 법원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게 만들어 아예 추밀원에서 법에 대한 심의를 할 수 없게 하지 않나, 총리가 남아공 정부를 은근히 비판했다가 아예 공화정으로 전환했다. [56] 물론 넬슨 만델라는 그 얼마 뒤에 영국을 방문했을 때 대처와의 회담을 거부했다. [57] 허나 F. W. 더클레르크 전 남아공 대통령은 대처의 경재제재 거부가 남아공의 인종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고 말하긴 했다. # [58] 범죄 예방에 유효하다는 관측도 있지만, 이것이 대처 생전에 그랬듯이 '편견에 기초한 잘못된 직권 남용'에 악용될 소지는 얼마든지 있다. [59] 당시 노조와 맞서 싸우다 물러난 총리가 대처와 같은 보수당의 에드워드 히스. [60] 이에 관련된 일화로 소고기 값에 대한 것이 있다. 기존의 상류층 사람들과 대처는 출신 성분이 다른데다가 대처가 기존 상류층에 편입되려고 애쓰지도 않았던 탓에 공통된 대화 소재가 없었다. 그래서 대처가 사교 모임에서 상류층 여자들과 대화해야 할 때 마지못해 꺼냈던 말이 소고기로 대표되는 생필품 물가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돈이 넘쳐나는 상류층 사람들에게 생필품 물가 같은 건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고, 상류층 여자들은 '소고기 값 밖에 모르는 여자'라며 대처에 대해 뒷담화를 했다. [61] 도둑을 의미하는 다른 단어도 많지만 구태여 '스내처'로 불린 건 윗부분의 짤에 나온대로 대처의 이름과 라임이 맞아 떨어져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스내... 한국어로 의역하면 "도둑 대는 우유를 훔"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62] 물론 2016년에는 파나마 페이퍼즈에 연루되기도 했다. [63] 대처와 비슷하게 잠도 안자고 일 열심히 한다는 콘셉트에 강경정책으로 비판받은 로널드 레이건은 아예 임기 도중에 치매가 발생했다는 게 자녀들의 증언으로 전해져 오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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