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버튼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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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 |||||||||||||||||||||||||||||||||||||||||||||||||||||||||||||||||||||||||||||||||||||||||||||||||||||||||||||||||||||||||||||||||||||||||||||||||||||||||||||||||||||||||||||||||||||||||||||||||||||||||||||||||||||||||||||||||||||||||||||||||||||||||||||||||||||||||||||||||||||
남우주연상 - 드라마(영화) | ||||||||||||||||||||||||||||||||||||||||||||||||||||||||||||||||||||||||||||||||||||||||||||||||||||||||||||||||||||||||||||||||||||||||||||||||||||||||||||||||||||||||||||||||||||||||||||||||||||||||||||||||||||||||||||||||||||||||||||||||||||||||||||||||||||||||||||||||||||||
제34회 ( 197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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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 197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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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 19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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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핀치 ( 네트워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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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버튼 ( 에쿠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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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보이트 ( 귀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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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 ||||
남우주연상 | ||||
제19회 ( 196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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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 196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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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 1968년) |
리 마빈 (캣 벌루/킬러) 더크 보가드 (달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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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버튼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로드 스타이거 ( 전당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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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스타이거 ( 밤의 열기 속으로) 폴 스코필드 ( 사계절의 사나이) |
역대 토니상 시상식 | ||||
남우주연상 - 뮤지컬 부문 | ||||
제14회 ( 196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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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 196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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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 1962년) |
재키 글리슨 (Take Me Al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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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버튼 (Camelo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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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버트 모스 (How to Succeed in Business Without Really Trying) |
역대 그래미 시상식 | ||||
Best Recording for Children | ||||
제17회 ( 197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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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 197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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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 1977년) |
시배스천 캐벗, 스털링 할로웨이, 폴 윈철 “ Winnie the Pooh and Tigger To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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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버튼 “ The Little Pri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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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뵘, 허마이어니 깅골드 “ Prokofiev: Peter and the Wolf / Saint-Saëns: Carnival of the Animal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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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f,#000> 이름 |
리처드 버튼 RICHARD BURT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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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 ||
입성날짜 | 2013년 3월 1일 | ||
위치 | 6336 Hollywood Blvd.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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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22a0a><colcolor=#ffffff> 리처드 버튼 Richard Burton CB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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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리처드 월터 젠킨스 주니어 Richard Walter Jenkins Jr. |
출생 | 1925년 11월 10일 |
영국 웨일스 니스포트탤벗주 폰트리디벤 | |
사망 | 1984년 8월 5일 (향년 58세) |
스위스 제네바 셀리니(Céligny)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묘지 | 제네바 비외 공동묘지 |
신장 | 178cm |
학력 | 옥스퍼드 대학교, 엑시터 컬리지 |
직업 | 배우 |
영화 데뷔 | 1949년, 'The Last Days of Dolwyn' |
활동 기간 | 1943년 ~ 1984년 |
배우자 |
시빌 크리스토퍼(1949년 결혼 – 1963년 이혼) 엘리자베스 테일러(1964년 결혼 – 1974년 이혼) (1975년 결혼 – 1976년 이혼) 수지 밀러(1976년 결혼 – 1982년 이혼) 샐리 해이(1983년 결혼) |
자녀 |
장녀
케이트 버튼(1957년생)[1] 차녀 일리저버스 프랜시스 "라이저" 타드(1957년생)[2] 삼녀 제시커 버튼(1959년생) 사녀 머리어 버튼(1961년생)[3] |
종교 | 무종교( 무신론)[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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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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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상
배우가 넘볼 수 있는 분야는 전부 섭렵해 연극, 영화, 뮤지컬, 라디오극, 시 낭독 분야에서 모두 최고의 정점을 찍었던 전천후다. 출신지인 웨일스는 물론 영국 전체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배우로 오스카상 후보에만 7번이나 올랐고 "위대한 영국인"에도 선정된 바 있다. 웨일스에선 인간문화재와 동급 수준의 문화적 유산으로 여겨진다. 웨일스에서 버튼을 어찌나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온 사방에서 버튼 관련 영상을 틀어대 같은 웨일스 출신인 마이클 쉰의 말에 따르면 "버튼의 목소리는 웨일스인들이 엄마 목소리 다음으로 잘 구분해낼 수 있는 목소리"라고 한다. 또한 세기의 미녀라 불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의 2번의 결혼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3. 생애
3.1. 어린시절
1925년 탄광 노동자의 13명의 자녀들 중 12번째로 태어났다. 출생 시 이름은 리차드 월터 젠킨스 주니어였다. 애칭은 리치(Richie). 출생지인 글러모건(Glamorgan) 니스 포트 탤벗(Neath Port Talbot) 폰트리더벤(Pontrhydyfen)은 쇠락해가던 탄광촌으로 모두 웨일스어를 썼고 영어는 외국어에 가까웠다. 술집 작부 출신의 어머니는 44세 때 13번째 아이를 낳던 중 사망했다. 이때 리차드 젠킨스는 두 살이었다.아버지는 도박 중독에 걸린 술꾼으로, 유쾌한 성미였지만 폭력 성향이 있어 두 살 때부터는 집 근처 포트 탤벗에 살던 누나 세실리아(Cecilia)와 매형 엘베드(Elfed)가 입양해서 키워준 거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누나를 엄마로 삼고 여조카 두 명과 남매처럼 자랐는데, 조카들에 따르면 버튼은 자상하고 상냥한 오빠로, 친구들과 럭비 경기를 할 기회를 마다하고 자신들과 놀아줬으며, 숙제를 도와주고, 밤마다 재밌는 얘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형들은 전부 광부였고, 남동생만[5] 겨우 그 운명에서 벗어났다. 매형은 리차드 젠킨스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도 광부로 키우려했었다. 실질적 아버지 역할은 19살 연상의 형 이보(Ifor)였는데, 평생 정신적 지주였으며 리차드 젠킨스가 배우가 된 후에도 리차드 젠킨스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리차드 젠킨스는 집안에서 중등학교에 진학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원래는 웨일스어 밖에 몰랐던 리차드 젠킨스는 웨일스 문학은 물론 영어에서도 두각을 나타냈고 럭비와 크리켓에 흥미가 많았다. 용돈을 벌려고 자잘한 심부름을 다니고 거름에 쓸 말똥을 모으고, 신문을 배달했다.
노래 역시 이때부터 재능을 보여 보이 소프라노로 가창대회 에이스테드보드[6]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리차드 젠킨스는 노래 연습 도움을 청하면서 학교 교사 필립 버튼(Philip Burton)과 처음 연을 맺는다. 리차드 젠킨스는 조지 버너드 쇼의 "The Apple Cart"[7] 등 학교 공연에도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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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41년 15살 때 매형 엘베드가 앓아눕자 리차드 젠킨스는 학교를 때려치고 전시(戰時) 협동조합의 남성복점에서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전시 배급 쿠폰과 물자를 교환해주는 일을 했는데, 일이 시시해 매우 싫어했다. 이때 권투선수를 지망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 리차드 젠킨스는 영국 항공 훈련 부대에 생도로 들어가면서 예전 학교 교사 필립 버튼을 부대 지휘관으로 다시 만난다. 필립 버튼은 리차드 젠킨스에게 BBC 라디오 방송의 부대 관련 다큐멘터리 나레이션과 라디오극 연기를 맡겼다. 같은 시기 리차드 젠킨스는 메러디스 존스(Meredith Jones)가 운영하던 청소년 연극 단체에도 들어가 공연에 참여했다. 메러디스 존스와 필립 버튼은 리차드 젠킨스의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했고, 1942년 학교위원회에 리차드 젠킨스의 중등학교 재입학 허가를 간청해 승낙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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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젠킨스가 딜런 토머스 같은 시인들에게 관심이 많다는 걸 알게 된 필립 버튼은 문학과 연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직 강하게 남아있던 웨일스 억양을 거둬 내는 훈련은 물론 웨일스 산 정상에 올려보내 목소리 방사, 즉 목소리를 멀리 퍼뜨리는 방법까지 훈련 시켰다. 1943년 가을, 필립 버튼은 리차드 젠킨스를 입양하려 했지만, 입양아동과 나이차가 21살 이상 나야한다는 법률 때문에 가로막혔다. 하필 필립 버튼은 그보다 딱 20일 더 젊었던 것이다.
1943년 리차드 젠킨스는 중등 교육 수료 시험[8]을 우수한 성적으로 치르고 필립 버튼의 제안에 따라 전쟁에 투입되기 전에 6개월 간 옥스퍼드 엑시터 컬리지에 들어가게 된다. 입학 과정에서 필립 버튼이 법적인 피후견인이 되면서 단독 날인 증서[9]를 통해 리차드 젠킨스는 리처드 버튼이 되었다.
리처드 버튼은 나중에 "난 필립 버튼에게 나의 전부를 빚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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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무대배우가 되다
엑시터로 떠나기 직전인 1944년 에믈린 윌리엄스[10]가 쓴 "The Druid's Rest"[11]의 초연에 등장하며 무대 데뷔를 하였다. 공연이 성공하면서 런던에서도 공연할 수 있었으며, 호평을 받은 뒤 배우가 되기로 다짐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의 " 잣대엔 잣대로"의 안젤로(Angelo) 역할을 연기했을 땐 관객석에서 존 길구드와 테런스 래티건[12]이 지켜보고 있었다.징집을 당하면서 1944년부터 47년 사이엔 영국 공군의 조종사로 지냈다. 1946년 공식 휴가를 받아 에믈린 윌리엄스의 희곡이 원작인 BBC TV 영화 <The Corn is Green>[13]에 잠시 나올 수 있었다. 이는 곧 다른 TV 출연으로 이어져 연봉 500 파운드를 받게 됐는데 이는 그때까지 버튼의 가족 전체가 벌었던 돈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사회에 복귀한 뒤론 런던으로 향했다. 1949년 영국에서 제작한 <The Last Days of Dolwyn>으로 영화에 데뷔하였다. 1892년 한 웨일스 청년이 가상의 농촌인 고향 돌윈(Dolwyn)이 리버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댐과 저수지 마련을 위해 파괴된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한다는 얘기로, 에믈린 윌리엄스가 직접 쓰고 연출한 작품이었다. 버튼은 위엄 있는 목소리와 존재감로 주목을 받았다. 여기서 함께 연기했던 시빌 윌리엄스[14]와 같은 해 혼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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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Barabbas>(1949)에선 이미 로런스 얼리비에이와 같은 선상에서 평가 받고 있었다.
3.3. 할리우드 진출
1951년 존 길구드와 클레어 블룸[15]과 함께 한 "The Lady's Not for Burning"[16]에서 무대 연기가 호평받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로열 셰익스피어 극장[17]에서 연극 연출을 하고 있던 앤터니 퀘일[18]이 그를 " 헨리 4세"에선 감초 역할인 핼 왕자[19]이며 " 헨리 5세"에선 주연이 되는 헨리 5세 역으로 발탁했다.이 연속된 성공들을 계기로 1952년엔 할리우드 초청으로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의 상대가 되어 추리애정극 < 나의 사촌 레이첼>을 찍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 지명, 골든 글로브 신인상[20] 수상 등에 성공해 정상급 배우로 떠올랐다. 이어 출연한 전쟁극 <사막의 대진격>(1953)에선 제임스 메이슨이 상대였다. 메이슨의 소개로 험프리 보가트, 주디 갈런드, 코울 포터[21]와 친구가 되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죄로 고통 받다가 기독교에 귀의하는 퇴폐적인 로마 장교 역할을 맡은 종교 영화 < 성의>(1953)는 엄청난 흥행작이 되었다. [22] 이 덕분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첫 후보 지명이 이뤄졌으며 20세기 폭스의 최고위직 대럴 F. 재넉으로부터 7년 짜리 100만 달러 계약을 제의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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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버튼은 이를 거절하고 영국의 올드 빅 극장[23]으로 향한다. 햄릿을 연기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햄릿은 버튼에게 두려움인 동시에 매혹이었다. 영국 극장에서 존 길구드와 로런스 얼리비에이가 해낸 역이었기 때문에 탐이 난 반면, 햄릿을 연기했던 배우는 좋은 끝을 못 본다는 말이 돌아 겁도 났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평론가들은 열광했다.
1953년에서 1956년 사이 버튼은 영국으로 종종 돌아가 "코리올레이너스[24]" 등 연극 작업을 계속하며 무대 위에서 승승장구했다. " 오셀로"에선 이아고를 맡아 당시 흥행 보증수표였던 존 네블[25]과 호흡을 맞추기도 하였다. " 헨리 5세"로는 이브닝 스탠더드 연극상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버튼을 로런스 얼리비에이의 후계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1958년에는 헬런 헤이즈와 출연한 "Time Remembered(타임 리멤버드)"[26]로 토니상 후보에 오르면서 브로드웨이에도 발을 들였고 이후 뮤지컬 배우로도 최고급 활약을 보였다.
3.4. 카멜롯
반면 같은 시기 영화 쪽은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남성편력이 심한 영국 귀족의 아내( 라나 터너 분)와 사랑에 빠지지만 마을이 자연재해로 위기에 처하자 결별하는 힌두교 인도인 의사 역으로 나온 <비는 오다>(1955), 동생이 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한 직후부터 경력이 무너진 대배우 에드윈 부스를 다룬 <The Prince of Players>(1955), 알렉산더 대왕으로 나온 <알렉산더 대왕>(1956)은 흥행 실적이 좋지 않았다.한편 1957년 버튼과 시빌 윌리엄스는 영국의 가산세를 피하려고 스위스로 도피하게 되고 여기에서 훗날 배우가 되는 장녀 케이트(Kate)가 태어났다. 이때부터 버튼은 돈을 보고 출연하는 경향을 죽기 직전까지 버리지 못하게 된다. 심지어 경력이 망가질까 염려한 주변 동료들까지 돈만 좇지 말라고 말렸지만, 버튼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번 돈으로 버튼은 광부 생활에 대한 높은 긍지로 자신의 돈을 거절한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형들을 모두 탄광에서 빼낼 수 있었다.
그나마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59)는 흥행은 성공적이지 않았어도 연기는 자부할 정도로 좋았다.[27] 그러나 일본군에 의해 가라앉게 된 화물선에서 변장 중인 수녀 조운 콜린스와 다투는 진부한 통속극 <이별>(1957), 말기암인 친구의 부탁을 받아 모르핀으로 안락사를 시키는 의사로 나오는 <The Bramble Bush>(1960),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주 지위가 부여되기 전의 알래스카를 배경으로 동업자였던 두 친구가 원수가 됐다가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 <Ice Palace>(1960) 등은 연기마저 별로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무대 위의 버튼은 계속 전설을 만들고 있었다. 아서 왕- 기네비어- 랜슬롯의 삼각관계를 그린 "Camelot( 카멜롯)"의 제작 과정에선 특히 버튼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돋보였는데, 함께 한 줄리 앤드류스, 라버트 굴레이, 로디 맥다월은 작품의 성공이 전부 버튼 덕이라고 입 모아 말했다. 당시 앨런 제이 러너[28]와 프레더릭 러우[29] 콤비는 뮤지컬 " 마이 페어 레이디"의 성공을 다시 보여줘야 한다는 큰 압박에 시달리고 있어 긴장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버튼이 모두를 잘 다독였다고 증언했다. 5시간 짜리 공연이 800회 가량 이어졌으며 1961년 버튼의 남우주연상을 포함해 토니상 네 개를 받아갔다.
"카멜롯"은 존 F. 케네디 부부가 제일 좋아한 작품으로 집에서도 음반을 자주 들었고 아예 이를 케네디 정부의 상징으로 삼았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는 한 인터뷰에서 케네디와 자신이 백악관에 있던 시절이 미국의 카멜롯이며, 이후 다른 훌륭한 정권이 또 들어서더라도 카멜롯의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언론에서는 케네디 정부, 케네디 가문, 케네디 부부를 거의 구분 없이 카멜롯이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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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엘리자베스 테일러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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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레오파트라 7세 역을 맡은 대작 영화 < 클레오파트라>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역을 맡았다가 사랑에 빠져 결국 불륜으로 발전해 기존 아내였던 윌리엄스와 1963년 이혼하고 테일러도 1964년 이혼한 뒤 그 해 3월 재혼하게 된다. 테일러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에 대한 경계심이 매우 높았을 뿐만 아니라[30] 버튼에 대해서도 자아도취적이라 생각하는 등 개인적으로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버튼의 적극 공세에 넘어가고 말았다. 사별한 남편 마이크 타드 외에 테일러가 사랑한 유일한 남자이며 테일러가 작품을 하면서 만난 사람과 관계한 것도 평생을 통틀어 버튼이 유일해서 어떻게 버튼이 테일러의 마음을 얻어내는 일이 가능했는가에 대해 전문적인 분석도 인물 연구 차원에서 많이 이뤄졌다.
버튼은 테일러의 미모 뿐만이 아니라 뛰어난 연기, 활달하면서도 다감한 태도, 삶에 대한 철학, 유머 감각 등 테일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에 반해있었다. 테일러 역시 엄청난 다독가였고 정교한 화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테일러와의 대화는 버튼에게 거의 중독적일 정도였다. 버튼에게 있어 테일러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였다. 버튼은 테일러를 대양("ocean")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한 버튼은 테일러에게는 자신의 가장 처참한 부분까지 다 보여줘도 괜찮을 거라는 신뢰와 안도를 느꼈다. 1966년에 버튼은 테일러와의 관계를 담은 책을 발간한 적도 있다.
둘은 네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가 되게 해준 <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7) 등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다. 화사한 드라마 <예기치 못한 일>(1963)에선 비행기가 연착한 걸 이용해 새로운 연인과 함께 자신을 떠나려고 하는 배우 아내 테일러를 붙잡아두려는 재벌을 연기했는데 엄청난 수익을 얻었다. 신나는 분위기의 호화로운 < 말괄량이 길들이기>(1967)도 흥행에 대성공했다. 버튼은 테일러가 이전 결혼들을 통해 얻은 아이들에게도 아버지 노릇을 잘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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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클레오파트라> 촬영장에서의 스캔들과 당시 전세계 수천 개의 잡지 표지를 장식하고 있던 테일러의 유명세[31] 덕분에 버튼-테일러는 할리우드 그 자체인 부부가 되었다. 이보다 유명한 커플은 전무했고 앞으로도 절대 나오지 않을 거라고들 모두가 단언한다. 보스턴에선 이 커플을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룬 팬들이 하도 난리를 쳐서 두 사람이 상해를 입기도 했다. 버튼은 유명인사로서의 삶에 푹 빠져버렸다. 이런 버튼을 보고 한 동료가 "넌 유명해지고 싶은 거냐, 좋은 배우가 되고 싶은 거냐?"라고 묻자 버튼은 "둘 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버튼은 한편으론 이런 속물적인 자신을 역겨워해서 기자들과 파파라치들 앞에선 보란듯이 과시하며 한껏 어울려주다가 돌아서면 자아비판에 들어갔다.
한편 이때부터 버튼의 화려한 생활에 가속도가 더해졌다. 전용기 구매도 일시불로 해결했다. 이들 부부는 이런 전용기로 전세계를 오가며 풍족한 생활을 즐기는 소위 제트족(jet set)의 대변인이 되었다. 과시형 사치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버튼이 주변의 걱정을 살 정도로 부에 집착하는 타입이었다면, 테일러는 반대로 돈에 전혀 미련이 없는 타입이었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버튼이 추구하는 삶의 양식으로 인해 지출이 얼마가 새어나가든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버튼은 사치를 좋아하면서도 테일러와 달리 돈 들이는 걸 무척 아까워하기도 해서 이 모순적인 감정 때문에 또 상당히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버튼은 자신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테일러에게 돈을 쓰는 건 늘 자랑스러워했다. 무엇보다도 버튼은 테일러에게 보석을 많이 선물해서 그 유명한 테일러의 보석 컬렉션 중에는 버튼이 선물한 것들이 많다. 한 경매에서 무려 아리스토틀 오나시스를 이겨 테일러에게 주려고 한 보석을 차지했을 땐 특히 매우 기뻐했다.
버튼은 단독으로 출연한 영화들로도 일정 성과를 맛봤다. 피터 오툴과 나온 <베켓>(1964)에서 토마스 베켓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존 휴스턴이 연출한 테네시 윌리엄스 희곡 원작의 <이구아나의 밤>(1964)에선 성직을 박탈 당한 신부로 나와 에바 가드너, 데보라 카, 수 라이언[32]으로부터 인간 세상의 모든 욕망을 시험 당하는 인물을 연기했다. 냉전시대의 건조한 현실을 보여주는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1965)에서 옛 조국 동독의 제거 대상이 된 지친 영국 첩보원 역으로 다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버튼은 이제 작품 당 백만 달러라는 최고 대우를 받는 배우였다.
1964년 버튼은 브로드웨이 런트 폰탠 극장[33]에서 존 길구드 연출작으로 햄릿 공연을 제일 오래 한-136번-한 배우로 기록을 세우며 토니상을 수상했다. 이를 빌 컬러런[34]이 영상으로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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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곧 출연작들의 질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테일러와 함께 찍은 영화들 중 <고백>(1965)이나 <위험한 여로>(1967), 평단과 관객들 모두를 당혹케 한 <파우스트>(1967), <붐>(1968)은 완성도가 엉성했고, 테일러와의 관계도 덩달아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단독 작품도 당혹스러운 섹시 코미디 <Candy>(1968), 렉스 해리슨과 게이 커플로 나온 <The Staircase>(1969) 같은 작품들이 줄을 이었다. 그나마 < 천일의 앤>은 영화 자체는 혹평 받았어도 버튼은 헨리 8세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이젠 연기도 망가져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나온 제2차 세계 대전 배경의 액션 <독수리 요새>(1968), 영국 국적의 게이 갱단원을 연기한 <Villain>(1971), 딜런 토머스의 <언더 밀크 우드>의 영화판(1972) 정도를 빼고는 다 맥 빠지는 연기라는 소리를 들었다. 로저 이버트가 <푸른 수염>(1972)을 평하며 "버튼의 연기 경력이 또 한 번 망가지고 있는데 딱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라고 했을 정도였다. KKK와 싸우는 농부로 나온 <버닝 크로스>(1974)조차도 뜻밖의 혹평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버튼은 1972년 형 이보의 사망으로 우울증에 빠졌다. 결국 1974년 이혼했다. 이혼하기 1년 전 버튼-테일러 부부는 TV 영화 <이혼>에 출연해 극중에서 이혼했는데 실제로도 이혼하게 된 것이다.
다음 해인 1975년 버튼은 <버닝 크로스>(1974)에 함께 출연했던 플레이보이 모델 출신 지니 벨[35]과 사귀기 시작했다. 벨의 헌신으로 버튼은 알코올 의존증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버튼은 그렇게 테일러와의 관계를 가장 악화시켰던 장애물이 사라지자마자 벨과 헤어지고 테일러와 재결합했다.
서두른 만큼 두 사람은 빠르게 멀어졌다. BBC 기사는 버튼의 폭음이 다시 심각해졌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3.6. 후반기
1975년 12월, 버튼은 " 에쿠우스"로 브로드웨이에 복귀하기 위해 성적인 문제가 있는 젊은 환자를 돌보는 정신과 의사 역을 준비하던 중 스위스에서 포뮬러 원 챔피언 제임스 헌트의 아내 수지 밀러[36]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22살 연하였고, 헌트 부부는 결혼한지 갓 1년이 된 신혼이었다.버튼은 밀러를 신속히 이혼시키기 위해 제임스 헌트에게 위자료 명목으로 100만 달러를 줬다. 여성편력이 심한 헌트는 사실 벌써 밀러에게 질려있었고, 버튼의 제안을 감사히 수용하며 1976년 6월에 재빨리 이혼해주었다. 버튼도 한 달 뒤인 7월 테일러와 이혼했고 바로 한 달 뒤인 8월에 버튼과 밀러는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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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버튼은 밀러와의 결혼생활 중에도 테일러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쓰고 전화를 해대며 밀러를 불안하고 질투하게 만들었다. 버튼의 공연 팜플렛에 우연히 테일러의 보석 광고가 실렸을 땐 밀러를 안심 시키기 위해 인쇄된 분량을 전부 회수해야했다.
한편 드디어 간만에 만난 명극 " 에쿠우스"의 정신과 의사 역은 버튼에게 다시 찬사를 안겼다. 1977년 시드니 루멧의 영화화에서도 동일한 찬사를 받으며 골든 글로브, 그리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후보로 올랐다.
그러나 호러 명작 < 엑소시스트>의 속편 < 엑소시스트 2>(1977)를 평론가들은 실망스러워했다. 초능력자 사이코패스 테러범을 연기한 <메두사>(1978)와 <Lovespell>(1979)도 당대 평론가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로저 무어, 리처드 해리스, 스튜어트 그레인저가 아프리카 지도자 구출을 위한 용병으로 고용된다는 액션 어드벤처 < 지옥의 특전대>(1978)는 그래도 속편까지 이어지고 개작 얘기가 나올 정도의 중박을 쳤다.
1980년 "카멜롯" 재연을 위해 극장으로 복귀했지만 등의 만성 통증, 간경화와 신장 문제로 긴급 수술에 들어가면서 차질이 생겼다. 수지 밀러와도 결국 1982년 이혼했다. "Wagner"(1983)는 무려 로런스 얼리비에이, 존 길구드, 랠프 리처드슨이 나왔음에도 버튼의 연기가 시원찮았을 뿐만 아니라 제작자들이 상영 자체를 아예 포기해서 재편집한 뒤 TV 미니시리즈로 만들어버렸다.
1983년 노엘 카워드[37]의 희곡의 "사생활(Private Lives)"을 통해 작업적으로 전 아내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재회해 전국 순회했지만 표가 매진이 된 것과는 별개로 혹평을 받았다. 버튼은 이 공연을 하게 되면서 테일러와 5년 만에 처음 얼굴을 봤는데, 테일러는 2년 전 연극 무대에 데뷔할 땐 토니상 후보에까지 올랐었지만 하필 이 작품을 만들던 시기엔 진통제 및 알코올 중독이 절정이라 연기가 엉망이었고, 자만한 태도에 심지어 연습시간에 취해있을 때도 있어서 버튼은 고통 받았다. 버튼은 테일러와는 여기서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버튼은 "Wagner"를 만들 때 제작부 보조였던 분장사 샐리 해이(Sally Hay)를 만나 해이의 독립심과 직업정신에 반했었는데, 아예 "사생활" 투어 중에 해이와 결혼식을 올려버렸다. 이때 버튼은 57세, 해이는 34세였다. 이로서 샐리 해이는 샐리 해이 버튼이 되었다. 테일러 뿐만이 아니라 건강이 심각하게 좋지 않았던 버튼 역시 이 공연으로 혹평 세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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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버튼은 해이와의 결혼생활 중에도 테일러에 대한 사랑과 집착을 완전히 버리진 못했고, 버튼을 지켜보던 주변인들은 버튼이 결국 테일러와 재결합할 거라고 생각했으며, 전세계인들이 버튼이 죽는 순간까지 버튼과 테일러의 재결합을 적극적으로 염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이는 버튼 사후에도 괴로워했다. 해이는 상당히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야 버튼이 죽기 직전의 삶에서 버튼의 중심은 자신이었다는 확신으로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해이는 테일러에 대한 사랑 고백이 대부분인 버튼의 일기까지도 출간했다.
한편 해이를 만난 뒤 차분해진 버튼은 초심을 되찾고 있었다. 뒤늦게나마 < 1984>처럼 저예산이지만 보다 예술성에 집중하는 영화에 다시 출연하려 한 것이다.
3.7. 사망
12살 때 술에 입문한 뒤로 평생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렸는데 리 마빈은 버튼이 한 자리에서 드라이 마티니를 연속 17잔 들이키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 역시 폭음하는 버릇으로 유명했던 에바 가드너와 만난 <이구아나의 밤>(1964) 촬영장은 주연배우 둘이 하루종일 취해있던 기묘한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루에 담배를 5갑 피는 골초이기도 했는데 이 역시 10대에 시작했다.결국 1984년 스위스 제네바 교외 셀리니의 저택에서 <지옥의 특전대2(Wild Geese II)>(1985)를 준비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졌고 이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결국 별세했다. 향년 58세. 딜런 토머스의 시와 함께 묻혔다. 버튼의 대체로 에드워드 팍스를 기용한 <지옥의 특전대2>는 버튼 앞에 바쳐졌다.
참 기묘하게도 유작은 바로 사망한 해의 숫자와 일치하는 < 1984>. 촬영 내내 목과 등에 만성 통증으로 시달렸지만 사후 개봉된 뒤 다행히 찬사를 받았다.
TV 드라마 유작은 미국 CBS 채널의 미니시리즈 "엘리스 아일랜드"였다. 사후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아내 샐리 해이 버튼은 평생 재혼하지 않았고 계속 버튼 성을 간직했다. 또한 버튼의 이름을 내건 자선활동을 벌였다.
4. 주요 출연 작품
4.1. 영화
- The Last Days of Dolwyn, 1949
- Now Barabbas, 1949
- 나의 사촌 레이첼(My Cousin Rachel), 1952
- 사막의 대진격(The Desert Rats), 1953
- 성의(The Robe), 1953
- The Prince of Players, 1955
- 비는 오다(The Rains of Ranchipur), 1955
-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1956
- 이별(Sea Wife), 1957
- Bitter Victory(Amère victoire), 1957
-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Look Back In Anger), 1959
- 한여름 밤의 꿈(Sen noci svatojánské), 1959
- March to Aldermaston, 1959
- The Fifth column, 1960
- 지상 최대의 작전(The Longest Day), 1962
- 클레오파트라(Cleopatra), 1963
- 예기치 못한 일(The V.I.P.s), 1963
- 이구아나의 밤(The Night of the Iguana), 1964
- 베켓(Becket), 1965 - 토마스 베켓 역
- 고백(The Sandpiper), 1965
-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 1965
-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1966
-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 1967
- 파우스트(Dr. Faustus), 1967[38]
- 위험한 여로(The Comedians), 1967
- 붐(Boom!), 1968
- 독수리 요새(Where Eagles Dare), 1968
- 천일의 앤(Anne of the Thousand Days), 1970
- 롬멜 습격 작전(Raid On Rommel), 1971
- Villain, 1971
- 언더 밀크 우드(Under Milk Wood), 1972
- 트로츠키 암살사건(The Assassination of Trotsky), 1972
- 푸른 수염(Bluebeard), 1972
- 로마여 영원하라(Massacre In Rome), 1973
- 여행(Il Viaggio), 1974
- 버닝 크로스(The Klansman 혹은 Burning Cross), 1974
- 밀회(Brief Encounter 혹은 Breve incontro), 1974
- 엑소시스트 2(Exorcist II : The Heretic), 1977
- 에쿠우스(Equus), 1977
- 메두사(The Medusa Touch), 1978
- 와일드 기스(The Wild Geese), 1978
- 철십자 훈장 2(Steiner - Das Eiserne Kreuz II), 1979
- 화가와 소녀(Circle Of Two), 1981[39]
- 1984, 1984
4.2. 공연
- 햄릿, 1953-4
- Time Remembered(타임 리멤버드), 1957-8
- Camelot(카멜롯), 1960-1
4.3. TV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983
- Wagner( 바그너), 1983
- Ellis Island(엘리스 아일랜드), 1985
4.4. 라디오극
- Under Milk Wood, 1954
4.5. 음반
- 어린 왕자, 1975
5. 여담
- 카디프의 왕립 웨일스 음악 & 드라마 대학(Royal Welsh College of Music & Drama)에 리처드 버튼 극장(Richard Burton Theatre)이 생겼다.
- 같은 니스 포트 탤벗 출신인 앤터니 홉킨즈, 같은 웨일스 출신인 마이클 쉰은 버튼을 동경해 배우가 되었다. 홉킨즈는 15살 때 잠시 고향집에 내려와 머물러 있던 버튼을 찾아가 사인을 받은 적이 있다.
- 같은 웨일스 출신의 시인 딜런 토머스를 가장 좋아했고, 그의 절친이 되기도 했다. 토머스가 39살의 나이에 알코올 의존증으로 사망했을 때 버튼은 매우 비통해했다. 1954년 대본을 완성하자마자 사망한 딜런 토머스의 "Under Milk Wood"를 BBC에서 라디오극으로 만들 때 무상 출연했다. 저작권 사용료는 전부 유족에게 돌아갔다.
- 남매처럼 자란 조카(Rhiannon James Trowell)에 따르면 버튼은 어려서부터 자정을 넘겨서까지 책을 읽고 다시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는 일을 반복했다고 한다.
-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버튼에게 상을 주지 않는 아카데미에 항의하는 의미로 본인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자리를 보이콧했다. 버튼이 결국 아카데미상을 받지 못한 채 사망한 사실을 테일러는 말년에도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 험프리 보가트와 절친이었다. 보가트가 사망했을 때 8살이었던 보가트의 아들을 극장에 데려가는 등 챙겨주었다.
- 스펜서 트레이시를 좋아했다. 그와 보가트가 사망한 뒤론 할리우드가 예전같지 않다며 울적해했다.
- 박학다식하고 이야기를 재밌게 잘해서 동료 배우들은 물론 왕족과 귀족 등 사교계 저명인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매우 좋았다. 저음과 성적 매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강하게 끌어 당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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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많은 스타들이 그러했듯이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 다독가로 유명하며 본인도 자신이 책벌레라는 사실을 자주 얘기하고 다녔다.
- 생전에 해설을 맡았던 컨셉 앨범 "Jeff Wayne's Musical Version of The War of the Worlds"의 라이브 무대 쇼에서 홀로그램으로 재현되었다.
-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잠시 학부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이 경력을 자랑스러워했다.
-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만나기 전 난봉꾼으로 유명했다. 테일러조차도 <클레오파트라>를 촬영하기 몇 년 전에 버튼을 파티에서 목격했던 얘기를 나중에 하면서 "예쁜 여자들한테는 무조건 수작을 걸고 있었다"고 했을 정도였다.
-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불륜을 저지르기 전부터 많은 여자들과 바람피고 있었다. 테일러와 결혼하기 전 클레어 블룸, 진 시먼스, 수전 스트라스버그[41]와 관계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 "카멜롯"을 올렸을 시점엔 " 줄리 앤드류스를 제외한 모든 여자주인공들과 잠자리를 가졌다." # 다만 테일러 전의 여자들과 관계했을 땐 언제나 결국 아내인 시빌 윌리엄스 곁으로 돌아오곤 했다.
- 줄리 앤드류스는 2009년 10월 22일자 레이첼 레이 쇼에서 버튼이 "카멜롯"을 공연하면서 9개월 넘게 친구로 잘 지내다가 갑자기 성적인 관심을 표현했는데, 자신이 이를 거절하자 며칠 동안 사이가 험악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곧 화해하면서 다시 관계가 괜찮아졌다고 한다.
- 남웨일스 학생일 적부터 1983년 봄까지 쓴 44년간의 일기를 아내가 출간했다. 1965년부터 이혼할 때까지는 테일러에게 바치는 연애편지 기능도 했기 때문에 테일러가 다 읽고 짧게 답을 달기도 했다.
- 일기에 로런스 얼리비에이를 "얄팍하고, 평범한 지능을 가진 범인(凡人)이지만 세일즈하는 능력만큼은 좋다"고 평가했다. 말런 브랜도는 "멀쩡한 정신으로도 제멋대로 구는 비만한 멍청이"라고 적었고, 루실 볼은 "기함할 정도의 무매력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유머감각이 없는 괴물 같은 인간"이며 에드워드 8세는 노망이 났다고 했다.
- 1968년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런던에서 <독수리 요새>를 찍을 때 애완견 네 마리를 위해 두 달 동안 전용 요트를 대여해 템즈강에 정박시켰다. 당시 영국은 광견병 관리를 위해 해외에서 영국 "땅"으로 반입된 개들은 6개월 간 격리시켜야 한다는 법이 있었는데, "물"에는 해당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이용해 편법을 저지른 것이다. 20,000 달러가 들었는데 오늘날 원화 가치로 1억 5천 가량 된다.
- 세 딸 케이트(Kate), 라이저(Liza), 머리어(Maria)의 이름에서 따온 컬리즈머(Kalizma)라는 이름의 고급 요트를 갖고 있었다. 이 요트에 피카소와 반 고흐의 작품들을 싣고 다녔다고 한다. 현 소유주는 이게 버튼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부부의 요트였다는 걸 홍보수단으로 삼아 성업 중이다.
- 소피아 로렌과 서로 배우로서의 역량을 높이 사고 작업을 신뢰하는 좋은 친구 사이였다.
- 십자말풀이를 좋아했다.
- 2013년 BBC4에서 만든 TV 영화 <Burton & Taylor>에서 버튼을 연기한 도미닉 웨스트는 버튼이 " 말런 브랜도와 마찬가지로 때로 연기를 매우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분석했다.
- 2023년 봄에 영국 국립극장 신작으로 버튼 주연의 1964년 연극 "햄릿" 제작과정을 다룬 "The Motive and the Cue"가 올라갈 예정이다. 버튼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와의 관계가 창작의 열정과 활력을 불어넣어줬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어 이 부분도 다뤄진다. # 자니 플린(Johnny Flynn)이 버튼 역으로 캐스팅 되었다.
- 아버지 키가 매우 작다. 152cm 였다고 한다. #
[1]
시빌 크리스토퍼와의 사이의 자녀. 인기 있는 드라마 시리즈에 자주 출연 중인 배우다.
그레이스 아나토미에서 주인공 메레디스 그레이의 엄마인 전설적인 명의사
엘리스 그레이 역으로도 나왔다.
[2]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마이크 타드 사이의 딸로, 에디 피셔가 입양했다가 이후 리처드 버튼이 재입양했다.
[3]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에디 피셔와 독일에서 입양을 준비하다가 이혼한 후 리처드 버튼이 테일러와 함께 입양했다.
[4]
위키피디아, On his religious views, Burton was an atheist, stating: "I wish I could believe in a God of some kind but I simply cannot."
[5]
1990년
Richard Burton: My Brother를 냈다.
[6]
Eisteddfod. 역사상 기록이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웨일스 전통 경연 축제다. 1990년부터
버튼의 이름을 딴 상을 시상하고 있다.
[7]
1928년에 발표한 정치풍자극. 주인공인 왕의 정부는 "
피그말리온"과 동일하게 여배우 패트릭 캠벨(Patrick Campbell, 1865 - 1940)을 모델로 삼았다.
[8]
School Certificate Examination. 1917 - 51년에만 존재하던 제도다.
[9]
deed poll.
[10]
Emlyn Williams. 1905 - 1987. 웨일스 극작가.
[11]
에이스테드보드 축제를 준비 중인 웨일스 마을의 어느 술집에 한 영국인이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12]
Terence Rattigan. 1911 - 1977. 영국을 대표하는 극작가 중 한 사람이다.
[13]
1938년에 발표한 대표작. 19세기말 가난한 웨일스 탄광촌이 배경이다. 1940년
브로드웨이 초연에선
에설 배리모어가, 1945년 영화에선
베티 데이비스가, 1979년 TV 영화에선
캐서린 헵번이 주인공인 영국인 교사 L.C. 모팻 역을 맡았다.
[14]
Sybil Williams. 1929 - 2013.
[15]
Claire Bloom. 1931-. 나중에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알렉산더 대왕,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세 영화를 버튼과 함께 찍었다.
[16]
크리스토퍼 프라이(Christopher Fry, 1907 - 2005)가 1948년에 발표한 중세 배경 희극. 1400년경, 군에서 제대한 뒤
우울증에 걸린 토머스 멘딥(Thomas Mendip)은 자신을
교수형에 처해달라고 시장에게 사정한다. 당연히 시장은 이를 무시하는데, 마침 근처에선 제닛(Jennet)이란 여성이 실종된 주민을 개로 변신 시켰다고 의심을 사
마녀사냥 당하기 직전이다. 토머스는 실은 자신이 그 주민을 죽였다고 거짓 주장을 하며 자신은 사형 당해야 마땅하다고 시장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17]
Shakespeare Memorial Theatre.
[18]
Anthony Quayle.
[19]
Prince Hall. 왕위에 오르기 전 왕자 시절의
헨리 5세를 지칭한다.
[20]
New Star of the Year.
[21]
Cole Porter. 1891 - 1964. 유명 뮤지컬 "
키스 미 케이트"를 작사/작곡했다.
[22]
동시에 이 영화는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기도 해서, 주연을 맡은 버튼과 시먼스, 마투어는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화면비 영화 주연이라는 간판도 가지게 되었다.
[23]
Old Vic Theatre.
[24]
Coriolanus.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1605-8년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비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셰익스피어가 마지막으로 쓴 비극이다. 가이우스 마르키우스(Caius Marcius)는 볼스키족의 도시 코리올리(Corioli)에서 전공을 세운 뒤 코리올라누스라는 칭호를 하사 받고
집정관이 된다. 하지만 시민과
호민관 모두와 적대한 끝에 로마에서 추방 당하자 예전의 적이었던 볼스키족의 아우피디우스와 결탁해 로마를 공격한다.
[25]
John Neville. 1925 - 2011.
[26]
장 아누이의 Léocadia(레오카디아)를 번안한 작품이다. 겨우 3일간 사랑했던
루마니아 오페라 가수 레오카디아의 죽음으로 살 의지를 잃은 왕자에게 숙모가 일종의 연극 치료를 시도해 활력을 되찾게 한다는 내용이다.
[27]
영국 영화 뉴웨이브의 도래를 알리는 영화로 꼽힌다. 즉 버튼은 영국 성난 젊은이의 첫 번째 얼굴이 된 셈.
[28]
Alan Jay Lerner.
[29]
Frederick Loewe.
[30]
테일러가 곁에 가까이 둔 이성친구들은 거의 다
게이였던 이유도 이 때문로 여겨진다.
[31]
슈퍼스타란 말로도 부족해서 메가스타라고 불렸다.
[32]
Sue Lyon.
스탠리 쿠브릭의 <
롤리타(1962)> 주인공이었다.
[33]
Lunt-Fontanne Theater.
[34]
Bill Colleran. 배우 리 레믹(Lee Remick, 1935 - 1991)의 남편이었다.
[35]
Jeannie Bell. 1944-.
[36]
Suzy Miller. 1949-.
[37]
Noel Coward. 1899 - 1973.
게리 쿠퍼와
프레드릭 마치 주연 <삶의 설계(Design for Living)>(1933)의 원작 희곡을 썼다.
[38]
유일한 연출작.
[39]
"사랑의 벽"으로도 유통되었다. 줄즈 대신의 유작이다. 당시 16살이었던
테이텀 오닐의 가슴 노출이 있어 개봉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비판 받고 있으며 작품의 전체완성도 역시 크게 혹평 받았다. 60세 화가가 16살 소녀와 사랑에 빠지며 창작욕을 되찾는다는 얘기다. 당시 유행했던 순진한 젊은 여자와 야성적인 늙은 남자의 에로티시즘과 로맨스를 다룬 영화 중 하나로 꼽힌다.
[40]
Brendan Behan. 1923 - 1964.
[41]
Susan Strasberg. 1938 - 1999. 배우.
리 스트라스버그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