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100 Greatest Britons | ||||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rowcolor=#ffe>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윈스턴 처칠 |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 다이애나 스펜서 | 찰스 다윈 | 윌리엄 셰익스피어 | |
<rowcolor=#ffe>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아이작 뉴턴 | 엘리자베스 1세 | 존 레논 | 호레이쇼 넬슨 | 올리버 크롬웰 | |
11위~100위 | |||||
<rowcolor=#ffe>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어니스트 섀클턴 | 제임스 쿡 | 로버트 베이든 파월 | 알프레드 대왕 | 아서 웰즐리 | |
<rowcolor=#ffe>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마거릿 대처 | 마이클 크로포드 | 빅토리아 여왕 | 폴 매카트니 | 알렉산더 플레밍 | |
<rowcolor=#ffe>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앨런 튜링 | 마이클 패러데이 | 오와인 글린두르 | 엘리자베스 2세 | 스티븐 호킹 | |
<rowcolor=#ffe>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윌리엄 틴들 | 에멀린 팽크허스트 | 윌리엄 윌버포스 | 데이비드 보위 | 가이 포크스 | |
<rowcolor=#ffe>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레오나르드 체셔 | 에릭 모어캠브 | 데이비드 베컴 | 토머스 페인 | 부디카 | |
<rowcolor=#ffe>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 토머스 모어 | 윌리엄 블레이크 | 존 해리슨 | 헨리 8세 | |
<rowcolor=#ffe>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찰스 디킨스 | 프랭크 휘틀 | 존 필 | 존 로지 베어드 | 어나이린 베번 | |
<rowcolor=#ffe>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보이 조지 | 더글러스 베이더 | 윌리엄 월레스 | 프랜시스 드레이크 | 존 웨슬리 | |
<rowcolor=#ffe>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아서 왕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 로버트 스콧 | 이넉 파월 | |
<rowcolor=#ffe>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클리프 리처드 |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 프레디 머큐리 | 줄리 앤드류스 | 에드워드 엘가 | |
<rowcolor=#ffe>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 조지 해리슨 | 데이비드 애튼버러 | 제임스 코널리 | 조지 스티븐슨 | |
<rowcolor=#ffe>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찰리 채플린 | 토니 블레어 | 윌리엄 캑스턴 | 바비 무어 | 제인 오스틴 | |
<rowcolor=#ffe>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윌리엄 부스 | 헨리 5세 |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 로버트 1세 | 밥 겔도프 ( 아일랜드인) | |
<rowcolor=#ffe>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무명용사 | 로비 윌리엄스 | 에드워드 제너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 찰스 배비지 | |
<rowcolor=#ffe>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제프리 초서 | 리처드 3세 | J. K. 롤링 | 제임스 와트 | 리처드 브랜슨 | |
<rowcolor=#ffe>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보노 ( 아일랜드인) | 존 라이든 | 버나드 로 몽고메리 | 도날드 캠벨 | 헨리 2세 | |
<rowcolor=#ffe>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 J. R. R. 톨킨 | 월터 롤리 | 에드워드 1세 | 반스 월리스 | |
<rowcolor=#ffe>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리처드 버튼 | 토니 벤 | 데이비드 리빙스턴 | 팀 버너스리 | 마리 스톱스 | |
출처 | |||||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영국 기사 서임자 (남성) British Knights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black,#whit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같이 보기: 기사 서임자 (여성) | ||||||
GBE | |||||||
찰스 스콧 셰링턴 (1922) |
에드워드 빅터 애플턴 (1946) |
리들리 스콧(2024) |
|||||
KBE | |||||||
프레더릭 벤팅 (1934) |
에드먼드 힐러리 (1953) |
게오르그 솔티 (1971) |
시드니 푸아티에이 (1974) |
찰리 채플린 (1975) |
앨프리드 히치콕 (1980) |
밥 호프 (1998) |
|
앤드루 와일스 (2000) |
로저 무어 (2003) |
팀 버너스리 (2004) |
조너선 아이브 (2012) |
||||
Knight Bachelor | |||||||
아이작 뉴턴 (1705) |
찰스 라이엘 (1848) |
찰스 휘트스톤 (1868) |
조지프 리스터 (1883) |
아서 코난 도일 (1902) |
W. S. 길버트 (1907) |
프랜시스 골턴 (1909) |
|
핼퍼드 매킨더 (1920) |
프레더릭 G. 홉킨스 (1925) |
무하마드 자파룰라 칸 (1935) |
오언 리처드슨 (1939) |
알렉산더 플레밍 (1944) |
랠프 리처드슨 (1947) |
로런스 올리비에 (1947) |
|
존 길구드 (1953) |
칼 포퍼 (1965) |
알프 램지 (1967) |
쉬리다스 람팔 (1970) |
제임스 블랙 (1981) |
마이클 아티야 (1983) |
클라이브 싱클레어 (1983) |
|
렉스 해리슨 (1989) |
V. S. 나이폴 (1990) |
더크 보가드 (1992) |
로저 펜로즈 (1994) |
팀 라이스 (1994) |
캐머런 매킨토시 (1996) |
마이클 스타우트 (1998) |
|
폴 너스 (1999) |
리처드 브랜슨 (2000) |
숀 코너리 (2000) |
톰 커트니 (2001) |
믹 재거 (2002) |
벤 킹슬리 (2002) |
리들리 스콧 (2003) |
|
조너선 색스 (2005) |
헨리 세실 (2011) |
케네스 브래너 (2012) |
안드레 가임 (2012) |
다니엘 데이 루이스 (2014) |
패트릭 헤드 (2015) |
마크 라일랜스 (2017) |
|
제임스 래트클리프 (2018) |
톰 무어 (2020) |
마이클 호턴 (2021) |
마틴 에이미스 (2023) |
||||
CBE + Knight Bachelor | |||||||
데이비드 린 (1953) |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1959) |
알렉 기네스 (1959) |
스탠리 매튜스 (1965) |
맷 버스비 (1968) |
알렉 이시고니스 (1969) |
에른스트 곰브리치 (1972) |
|
리처드 애튼버러 (1976) |
존 밀스 (1976) |
월터 윈터보텀 (1978) |
데이비드 애튼버러 (1985) |
윌리엄 골딩 (1988) |
피터 유스티노프 (1990) |
이안 맥켈런 (1991) |
|
안소니 홉킨스 (1993) |
데릭 제이코비 (1994) |
바비 찰튼 (1994) |
사이먼 래틀 (1994) |
조지 마틴 (1996) |
마이클 갬본 (1998) |
아서 C. 클라크 (1998) |
|
엘튼 존 (1998) |
이안 홈 (1998) |
존 엘리엇 가디너 (1998) |
톰 피니 (1998) |
나이젤 호손 (1999) |
알렉스 퍼거슨 (1999) |
프랭크 윌리엄스 (1999) |
|
마이클 케인 (2000) |
폴 스미스 (2000) |
바비 롭슨 (2002) |
앨런 파커 (2002) |
앨런 베이츠 (2003) |
그레고리 윈터 (2004) |
트레버 브루킹 (2004) |
|
제임스 다이슨 (2007) |
크리스토퍼 리 (2009) |
브래들리 위긴스 (2013) |
존 허트 (2015) |
칼 젠킨스 (2015) |
로드 스튜어트 (2016) |
레이 데이비스 (2017) |
|
빌리 코놀리 (2017) |
배리 깁 (2018) |
마이클 페일린 (2019) |
데이비드 수셰이 (2020) |
샘 멘데스 (2020) |
스티브 맥퀸 (2020) |
로저 디킨스 (2021) |
|
조너선 프라이스 (2021) |
존 부어만 (2022) |
브라이언 메이 (2023) |
|||||
OBE + Knight Bachelor | |||||||
어니스트 섀클턴 (1909) |
윌리엄 브래그 (1941) |
리처드 돌 (1971) |
잭 브라밤 (1978) |
지미 새빌 (1990) |
클리프 리처드 (1995) |
트레버 맥도날드 (1999) |
|
스털링 모스 (2000) |
재키 스튜어트 (2001) |
톰 존스 (2006) |
테리 프래쳇 (2009) |
패트릭 스튜어트 (2010) |
밴 모리슨 (2015) |
앤디 머리 (2017) |
|
가즈오 이시구로 (2018) |
마이클 모퍼고 (2018) |
||||||
MBE + Knight Bachelor | |||||||
폴 매카트니 (1997) |
제프 허스트 (1998) |
나이젤 쇼트 (1999) |
니콜라스 윈턴 (2003) |
닉 팔도 (2009) |
링고 스타 (2018) |
케니 달글리시 (2018) |
|
루이스 해밀턴 (2021) |
<colbgcolor=#000><colcolor=#fff> 어니스트 섀클턴 Ernest Shackleton |
|
|
|
본명 |
어니스트 헨리 섀클턴 Ernest Henry Shackleton |
출생 | 1874년 2월 15일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킬데어(kildare)州 킬케아(Kilkea)[1] | |
사망 | 1922년 1월 5일 (향년 47세) |
포클랜드 제도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탐험가 |
학력 | 덜위치 칼리지 |
배우자 | 에밀리 도먼 (1904년 결혼) |
[clearfix]
1. 개요
영국의 탐험가.
인류 미개척지 정복이라는 큰 탐험 두 번을 모두 실패했으나, 두 번째 탐험에서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점쳐지는 극도로 열악한 상황 하에서 전 대원 생환에 성공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인류 역사상 최고의 탐험가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소년 시절
어니스트 섀클턴은 2남 8녀의 둘째(장남)로 태어났다. 농부였던 어니스트의 아버지는 의사가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 진학하였기에, 어니스트는 고향에서 어머니와 형제자매들과 소년 시절 대부분을 보내었다.이후 1884년 섀클턴은 런던의 시든햄으로 이주했고, 1887년 덜위치 학교에 진학한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책을 읽기 좋아했다고 한다.
2.2. 디스커버리 호의 탐험
섀클턴이 남극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시기는 1901년이다. 영국은 디스커버리호를 보내 남극을 탐험하도록 했는데, 이때 섀클턴도 참가했다.제국주의 시대 남극 정복은 나라의 자존심을 건 대결인지라 이 탐험대의 대장은 영국 해군 중령 로버트 스콧이었고, 전문 연구원들을 제외한 일반 탐험대원들은 영국 해군들로 대부분 구성되었는데 영국 상선대 사관인 섀클턴도 해군 소속인 만큼 이 탐험대에 참가할 수 있었다.
스콧은 섀클턴과 에드워드 윌슨을 데리고 남쪽으로 향하지만 얼마 못 가서 실패를 맛보게 된다. 데리고 간 개 22마리를 모조리 잃고 세 명 모두 설맹 & 동상 & 괴혈병에 허덕이게 된 것이다. 특히나 섀클턴의 병세가 심각했고, 결국 그는 기지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콧의 결정에 따라 본국으로 강제 송환당했다. 나중에 스콧이 쓴 '디스커버리 호 여행기'에서 섀클턴은 변변치 못한 인물로 그려졌다. 그 평가가 과연 합당한지는 스콧과 섀클턴의 행적을 보고 판단하면 된다.[4]
첨언하자면 에드워드 윌슨은 나중에 스콧과 함께 남극점 탐험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같이 죽음을 맞았다.
2.3. 님로드 호의 탐험
1907년, 섀클턴은 다시금 남극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탐험대의 대장으로서 참가하여 1909년까지 계속했다.다만, 영국 탐험대임에도 불구하고 스콧이 '맥머도 만(灣)은 나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딴지를 거는 바람에 웨일스 만과 에드워드 7세 랜드에 잇달아 상륙을 시도하지만 얼음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맥머도 만에 기지를 세웠다.[5]
그러나 그가 거둔 성과는 눈부신 것이었다.
2.3.1. 성과
- 제임스 애덤스가 지휘한 등반대는 남극 최대의 화산인 에러버스 산의 정상에 올랐다. 이 산의 높이는 3734m이며, 현재도 활동하는 활화산이다.
- 앨리스테어 F. 맥케이가 지휘한 분견대는 남위 72도 25분, 동경 155도 16분에 위치한 자남극점을 정복했다.
- 과학적인 성과도 컸다. 섀클턴은 남극에서 석탄 조각을 발견했는데, 석탄이란 식물이 땅속에 묻혀서 생기는 것이라,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극지 기후에서는 생성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지질학의 패러다임을 대륙 이동설로 바꾸어준 증거가 된다. 발견 당시에는 오파츠 취급됐다.
- 섀클턴이 이끈 본대는 남극점에서 156km 떨어진 지점인 남위 88도 23분까지 도달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최고 기록이었다.
2.3.2. 죽은 사자보다 산 당나귀가 낫다
성과도 컸지만, 섀클턴의 탐험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만주산 조랑말과 스노모빌을 투입했는데, 그걸 본 노르웨이인 프리드쇼프 난센은 기겁하면서 그를 말리며 " 조랑말은 위험합니다! 개가 낫소. 그리고 저 설상차는 과연 극지방에서 제대로 움직이기나 할 수 있겠소? 개썰매가 나을 거요."라며 충고[6]를 해줬지만 섀클턴은 조랑말을 가지고 남극 탐험을 떠났다. 이렇게 한 이유는 섀클턴이 고집불통의 바보라서는 아니고, 결과적으로는 틀렸지만 나름대로 이러한 계산을 했기 때문이다.조랑말은 1마리가 하루에 무려 800킬로그램을 끌고 갈 수 있는데, 먹이는 하루에 5킬로그램만 주면 된다. 그러면 그 짐으로 먹이도 가져가고 두둑한 먹을거리와 연료, 의료품이나 생필품을 끌고 갈 수 있다. 스노모빌이 고장나도 문제 없다. 하지만 개는 1마리가 무리를 해도 하루에 겨우 50킬로그램밖에 못 끌 뿐더러, 하루에 먹이 750그램이 필요하다. 따라서 짐을 운반하는 데 개보다는 조랑말, 그것도 추위에 강한 만주 지역 말이 안성맞춤이다. |
- 개는 땀을 흘리지 않고 말은 땀을 흘린다. 땀은 극지방의 맹추위 속에서 순식간에 얼어 버리므로 동상의 위험이 크다.
- 개는 털이 무성하지만 말은 갈기를 제외하고는 털이 없는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매우 짧다. 따라서 털이 두둑한 개썰매용 개들은 영하 40도에서도 알아서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말은 담요를 씌워주는 등 조치가 필요하다. 게다가 말은 덩치가 커서 휴식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도 고역이지만,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개는 사람이 구덩이를 파서 휴식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도 어렵지 않다.
- 조랑말은 200kg이 넘기 때문에 크레바스에 빠지면 구출하기가 불가능하지만, 개는 20~30kg 정도라 한두 마리가 빠지면 사람 한두 명만으로도 충분히 구해낼 수 있다.
- 개는 잡식이라 먹이를 사람과 공유할 수 있지만, 말은 사람이 먹지 못하는 건초를 따로 준비해야 한다. 게다가 건초를 먹인 말에게는 얼음 녹인 물을 충분히 급여해야 한다.
위의 이유들 중 말의 땀은 동물 관련 전문가가 아니면 잘 모를 수 있으므로 변명의 여지가 있으나, 나머지는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더구나 섀클턴은 이미 남극을 경험한 만큼 남극 환경이 말에게 적합한 환경인지 아닌지 분석할 기회가 있었다.
결국 말들은 거의 모두가 얼어죽었고, 설상차도 죄다 작동이 멈춰버렸으며, 최후까지 살아남았던 한 마리의 조랑말도 훗날 비어드모어 빙하라 불리는[8] 험준한 빙하를 넘다가 크레바스에 빠져 죽었기에 탐험대원들은 생필품을 실은 썰매를 직접 끌어야 했다. 그렇게 빙하를 넘어 남극점으로 향했지만, 결국에는 식량 부족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9] 이때 섀클턴의 탐험대가 도달했던 지점은 남위 88도 23분 지점으로 조금만 더 갔다면 남극점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식량이 바닥났기 때문에 탐험을 강행했다면 성공을 거머쥘 수 있었을지언정 그 대가를 목숨으로 치러야 함이 분명했다.
이에 섀클턴은 겸허히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다. 식량 부족과 추위로 온갖 고생을 다했지만, 그래도 섀클턴의 탐험대는 한 명도 죽지 않고 모두 무사히 돌아왔고, 이는 극지 탐험에서 실로 드문 일이었기에 영국에서 기사 작위와 훈장을 받았다.
죽은 사자보다는 산 당나귀가 낫다(Better a live donkey than a dead lion).[10]
이 말은 돌아오면서 했다고 알려졌으나 정확히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했던 말이었다.
한편, 스콧은 섀클턴이 영웅 대접을 받는 것을 보면서 열폭했는데 앞서 맥머도 만의 우선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섀클턴을 비난하고 싶었지만 이미 섀클턴이 영웅이 된 터라 언급도 못했다. 그러면서 섀클턴의 다음 도전은 반드시 성공할 거란 생각에 초조해져 이번에야말로 남극점을 자신이 정복하겠다며 남극으로 떠나지만 그 탐험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자세한 과정은 로버트 스콧, 아문센 vs. 스콧 문서로.
그러나 섀클턴에게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계기가 된 탐험은 따로 있었다.
2.4. 남극 횡단 도전, 위대한 실패
자세한 내용은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 문서 참고하십시오.2.5. 말년
1922년 섀클턴은 로웨스와 같이 남극 탐험대를 이뤄 퀘스트 호를 타고 원정을 떠났지만 사우스조지아의 그리트비컨(Grytviken)에서 쓰러져 앓다가 죽었다. 여행경비를 만들기 위해 고생하며 겪은 스트레스와 과로가 큰 원인이라고 한다.그가 사망하자 영국 남극 탐험대의 베테랑이었던 레너드 허시(Leonard Hussey)[11]가 섀클턴의 시신을 영국으로 가져가는 데 자원했고, 영국을 향해 가던 중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 머물렀다. 이때 섀클턴을 사우스조지아에 묻어달라는 새클턴의 부인 에밀리의 전보가 왔고, 허시는 섀클턴의 시신을 가지고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돌아와 간단히 예배를 치른 후 그리트비컨의 묘지에 시신을 안장했다. 어니스트 섀클턴의 묘지 향년 47세였다.
그의 죽음으로 1895년 남극 대륙에 인간이 상륙하며 시작된, 체력과 근성으로 극지를 탐험하던 '영웅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그리고 비행기와 쇄빙선, 설상차를 통한 기계 탐험의 시대가 시작됐다.
사망했을 때 빚 4만 파운드[12]를 남겼지만, 그의 생애를 다룬 책 '어니스트 섀클턴 경의 삶(The Life of Sir Ernest Shackleton)'이 출판되고 섀클턴 기념 기금이 조성되어 부인과 자녀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섀클턴의 실패담은 탐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뛰어난 판단과 행동력으로 모든 대원을 살렸기 때문이다. 비록 당대에는 로버트 스콧의 명성에 가려진 감이 없지 않지만, 20세기 말 그의 위대함은 재발견되었으며 현재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다.[13] 1999년에 영국 BBC 설문조사에서는 가장 위대했던 탐험가 순위 5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물론 이 순위는 스콧보다 위다.[14]
2011년 8월 30일, 섀클턴이 갖고 있던 비스킷이 230만 원에 팔렸다. 관련 링크를 보면 이 비스킷이 왜 고가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족으로 100년이 넘은 비스킷이 왜 썩지 않았는가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자세한 것은 하드택를 참고.
3. 여담
-
1956년 영국 지질학자인 레이먼드 프리슬리(1886~1974)는 자신이 극지 탐험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면 무릎을 꿇고 섀클턴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참고로 그는
로알 아문센,
로버트 스콧, 섀클턴 모두와 같이 일해본 사람이다. 아래가 바로 그 발언이다. 다른 둘(아문센, 섀클턴)에 비해 스콧은 탐험대 대장으로선 확실히 영 별로인 인물이긴 했지만[15] 그래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대원들을 의도적으로 낙오시키는 짓까진 하지 않았다. 대신 본인 때문에 대원들과 함께 다 죽었다는 게 문제.
과학적 리더십이 필요하면 스콧이 적임자이다. 신속한 정복을 원하면 아문센이 최고다.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섀클턴을 보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16]
프랭크 와일드(1873~1939) |
- 2016년 10월에 톰 하디 주연으로 전기 드라마를 제작한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이후 소식이 없다가 2020년 2월에 재차 보도가 되었지만 딱히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아무래도 코로나로 인하여 연기되었거나 아예 취소된 듯하다. 2022년에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공식적인 발표는 아니었다.
-
블렌디드 몰트 위스키 중에 이 사람의 성을 딴 "섀클턴"이 있다. 1907년 님로드 호를 몰고 간 두 번째 남극탐험에는 맥킨레이(Mackinlay) 사의 올드 스카치 위스키 25상자가 실려 있었다. 그 중 다섯 상자를 베이스 캠프까지 가지고 가서 묻어두었는데, 남극점 정복에 실패하고 철수하면서 이 위스키는 탐험대가 묻어 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회수하지 못했다. 탐험대는 나중에 영국에 와서야 이를 기억해냈다고 한다. 그렇게 이 위스키 상자는 섀클턴 탐험대의 여담 정도로 치부되고 잊혀졌는데, 1900년대 초중반을 지나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위스키 제조법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17]
그러다 섀클턴이 생전에 남겼던 기록물에서 당시 베이스 캠프에 이 위스키를 묻었다는 기록이 발굴되었고, 탐사 100주년이 되는 2007년에 화이트 앤 맥캐이(Whyte & Mackay) 사(社)[18]는술꾼들을 그러모아위스키 발굴 원정대를 꾸려서 남극으로 갔다. 당시 베이스 캠프였던 곳은 떠다니는 유빙과 혹독한 날씨로 인해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원정대는 끝내 남극의 얼음 속에 묻힌 이 위스키 상자를 찾아냈다. 놀랍게도 100년간 얼음 속에 묻혀 있던 위스키였지만 11병이 얼어터지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고, 화이트 앤 맥캐이 사는 이 위스키를 토대로 옛날의 제조법을 복원해냈다. 그리고 이 위스키는 어니스트 섀클턴의 이름을 따서 재출시하게 된다. 건빠이 건빠이
그런데 시음평은 숙취 없다는 것 빼곤 그닥 좋지 않았다는 게 중론이다. 인터넷 주류(酒類) 커뮤니티 상에서는 "섀클턴이 남극에 버리고 온 위스키"라고 폄하하기도(…). 다만 좋아하는 쪽에서는 "섀클턴 위스키는 바닐라, 시나몬, 생강, 토피 등의 향과 말린 과일, 초콜릿, 파인애플 등의 맛이 어우러져 있으며, 은은한 모닥불의 향이 여운으로 남는 것이 특징"이라고 옹호하며 "오리지널이 그랬듯(?) 냉동실에 처박아 뒀다 먹으면 맛있다"라고 한다. 그들에 의하면 "냉동 보관 시 달콤한 바닐라와 시나몬, 진저 향이 더욱 살아나고 과일 향이 풍성해진다"고 주장한다고.
여튼 재출시된 섀클턴 위스키는 라벨에 남극 지도[19]와 함꼐 "Mackinlay's British Antartica Expedition"(맥킨레이 사의 영국 남극 탐험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한국에서는 5만원대 정도로 구할 수 있다.
- 2016년 12월 현대자동차에서 글로벌 브랜드 캠페인으로 탑기어,[20] 아르틱 트럭스[21] 등과 협력하여 양산차인 2016년식 싼타페[22]를 이용한 남극 횡단에 도전해 성공했는데 이때 싼타페의 운전자로 참가한 패트릭 버겔[23]은 섀클턴의 외증손자로, 외증조부의 염원을 100년 만에 이뤄낸 셈이다. 이때 동원된 차량은 버겔이 몬 싼타페와 물자 수송용 차량 3대로 총 4대, 인원은 버겔 및 안내원 1명, 차량 정비팀 4명, 영상 제작팀 5명 등 총 11명이었고, 코스는 유니언 빙하~ 남극점~맥머도 만[24]이었다. 관련기사 영상은 티저 "Shackleton's Return Teaser"(14초), 본편 "Shackleton's Return"(5분 13초),[25] 메이킹 필름 "Behind The Scenes: Shackleton’s Return"(4분 42초)의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26] Hyundai “Shackleton's Return”- Main film(페이스북판. 유튜브판과 내용은 똑같다)
- 평소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을 매우 아껴서 자주 읽었으며, 남극 횡단 탐험대 때도 가져가서 읽었다. 섀클턴의 회고에 따르면 횡단 탐험 당시 백과사전은 불쏘시개감으로도 아주 훌륭했다고. 그 아끼는 책을 겨우 불쏘시개로 써야 했던 복잡한 감정을 나타낸 것이다.
4. 외부 링크
4.1. 관련 서적
- 남극 - 섀클턴의 자서전
- 섀클턴 평전 교보문고
-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 섀클턴의 파워 리더십
- 인듀어런스
4.2. 관련 영상
4.3. 관련 사이트
[1]
현
아일랜드 킬데어 카운티 킬케아. 출생지도 그렇고 10살 때까지 아일랜드에 살았으며 모계도 아일랜드계라서 아일랜드 측에서는 어째서 섀클턴이 영국인으로 기억되어야 하느냐고 불만을 보인다. 반면 부계는
영국인이고 종교적으로 영국인이다.
[2]
남극점까지 156㎞를 남겨둔 시점, 돌아갈 길을 포기한다면 인류 최초의 남극점 정복자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식량 부족 때문에 더 이상의 전진은 불가능하다'고 순순히 인정하고는 발걸음을 돌리면서 했던 발언이다. (귀환 이후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3]
반대로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굴욕적인 삶보다는 존엄 있는 죽음이 낫다."라고 한 적이 있다. 각각 직업이 탐험가와 군인으로 서로 다르다 보니 삶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다를 수밖에. 그러나, 한편으로는 닮은 것일 수도 있다. 탐험가는 정찰대로 군인은 탐험대장으로 본다면, 다르다는 점은 그 직업만의 극에 달한 정체성이라고 인지하는 것이 좋다.
[4]
남극 정복에 직접 도전할 최후의 3인으로 친구이자 의사였던 윌슨과 함께 섀클턴을 뽑아간 걸 보면 분명 원정대 대원들 중 남들보다 뛰어난 점을 보아 선택했을테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된 듯하다.
[5]
얄궂게도 정작 스콧은 나중에 남극점을 정복하러 왔을 때 맥머도 만의 기지를 사용하지 못했다. 얼음이 너무 많아서 배가 접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6]
이후, 난센은 스콧에게도 같은 충고를 건네었다.
로알 아문센 또한 스콧에게 조랑말이나 설상차보다는 개썰매가 유용하다 충고를 했지만, 스콧은 무시했다. 문제는 섀클턴은 선례가 없었기에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실패할 줄은 몰랐지만, 스콧은 섀클턴의 선례를 보았음에도 정신력 부족으로 치부하고 말과 설상차를 고집했다는 것이고, 그 결과 더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7]
훗날 스콧이 그랬던 것처럼 데려간 품종이 야쿠트(사하 아타)였다면 영하 50도의 강추위에서도 견디는 품종이라 믿었던 듯 싶다.
[8]
섀클턴의 탐험을 후원한 사람이 비어드모어였기에, 빙하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9]
이후 스콧의 남극점 원정도 섀클턴의 실패와 똑같이 흘러간다. 이유도 섀클턴과 똑같이 개 대신에 말을 준비했기 때문.
[10]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와 같은 뜻이다.
전도서 9장 4절 문구인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For to him that is joined to all the living there is hope: for a live dog is better off than a dead lion)(개역개정/KJV)"에서 따 온 것이다. 덧붙여 서양에서 당나귀는 바보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따라서 섀클턴의 속뜻은 '살아서 겁쟁이 바보 취급을 당하더라도 무모하게 전진해 대원들을 모두 죽게 두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다.'라는 말이다.
[11]
앞서 언급된 인듀어런스 호에서 기상학자로 승선했다.
[12]
2011년의 가치로 환산하면 160만 파운드,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26억 정도다.
[13]
반대로 스콧의 명성은 내려갔다.
[14]
당연히 당시 신생국가 노르웨이 출신인 아문센이 남극점과 북극점을 정복하고 북서항로까지 개척해서 열등감과 대영제국이라는 명성에 흠집이 갔기에 띄우긴 했으나, 후대에 가면서 섀클턴이 제일 고평가를 받는다. 스콧은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섀클턴보다 아마추어에 대원들을 다 살리지 못했고 결국에는 자신도 목숨을 잃어 추운 남극 극지방에서 대원 두 명과 함께 얼어 죽고 말았다. 어떻게든 대원들을 살리기 위해 코앞인 남극점을 포기하고 극한의 상황을 헤쳐나가 모든 대원들을 다 살려낸 섀클턴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15]
실책에 실책을 거듭해 대원들을 다 죽게 만든
똥별이니,
리더십 부문에서는 영국이 자국의 자존심을 세운다고 너무 띄워줬다고 볼 수 있다.
[16]
프리슬리가 한 말은
문명 6에서
아문센-스콧 남극점 기지의 인용어구로 나온다. 다만 섀클턴을 언급하는 부분은 잘렸다.
[17]
1~2차 세계대전 및
금주법 때문으로 추정된다.
[18]
100여 년이 지나며 화이트 앤 맥케이가 맥킨레이를 인수한 상태였다. 화이트 앤 맥케이는 달모어(Dalmore)의 모기업이기도 하다.
[19]
정확하게는 섀클턴이 생고생한 웨들 해와 남극 반도 쪽.
[20]
탑기어가 현대자동차와 아르틱 트럭스를 연결해주었다고 한다.
https://www.topgear.com/car-news/suvs/hyundai-first-car-cross-antarctic
[21]
영국의 자동차 튜닝 기업으로 이름대로 극지, 혹한지 주행에 적합한 튜닝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이 회사 소속의 기슬리 욘슨(Gisli Jonsson)이 차량의 개조 및 정비 책임자로 동행했다.
https://arctictrucks.com/blog/2018/01/20/remaking-history-with-hyundai-and-shackleton/
[22]
단 극지 환경을 고려한 최소한의 개조를 했고, 차량 외부에는 100년 전 섀클턴과 함께했던 대원들의 이름 및 그 후손들의 메시지가 기재되었다.
[23]
Patrick Bergel. 다만 당사자는 '버글'에 가깝게 읽고 있다. 섀클턴의 손녀 알렉산드라 섀클턴의 아들로 본업은 IT 기업인. 탐험은 전혀 경험이 없어 남극 가기 전에
아이슬란드로 끌려가서 10일 동안 혹한지 운전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인터뷰
[24]
맥머도 기지가 있는 로스 섬이 있는 만으로, 영어로는 McMurdo gulf가 아닌 McMurdo sound라고 쓰는데, sound는 소리라는 뜻 외에 피요로드 같은 가늘고 긴 협만(峽灣)의 뜻도 있기 때문이다.
[25]
한국어 자막 버전
[26]
10개월이나 수소문해서 당시 탐험대원들의 후손을 끌어모아 인터뷰하고 단체 사진도 찍었다. 인터뷰한 후손들은 주인공인 버겔과 그 어머니 알렉산드라 외에 부대장 프랭크 와일드의 증손자조카 팀 프라이트, 갑판장 존 윌리엄 빈센트의 증손녀 헬렌 빈센트, 헤일리 빈센트 및 외현손녀 프레야 크롭, 화가 조지 에드워드 마스톤의 손자 올리버 마스톤 및 증손녀 이자벨라 마스톤, 밀항자 퍼스 블랙보로의 손자 존 블랙보로까지 9명. 단체 사진 찍을 때 보면 총 26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