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2 22:02:37

로마-튀르크 전쟁

파일:로마 제국 깃발.svg 파일:투명.png 로마의 대외전쟁파일:투명.png 파일:라바룸.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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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니움 전쟁 파일:Samnites_league_mon_256.png 삼니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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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포에니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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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셀레우코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셀레우코스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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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타니아 전쟁 파일:external/a352ddf511b96cba04fbaa172c0df140c9cb8c8ae188ad8ddda8a5c3a3eae004.png 루시타니 부족연합
누만티아 전쟁 파일:external/b66a81d7e3c5440cfef450e3309a2b4b425f1dcd788e510bd84b747e2e2573be.png 아레바키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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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아 전쟁 파일:akaian_league_mon_256.png 아카이아 동맹
킴브리 전쟁 파일:cimbri_mon_256.png 게르만족(킴브리족 · 테우토네스족 · 암브로네스족)
유구르타 전쟁 파일:masaesyli_emblem_256.png 누미디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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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폰토스 왕국 · 파일:SoundCloud82837371853.jpg 아르메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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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르 전투 파일:attachment/mon_256_11.png 갈리아족(헬베티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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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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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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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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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필로스의 아바스 전쟁
830년~8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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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4년~896년
913년~9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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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쿠아스의 아랍 원정
926년~9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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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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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ljuk Turks Flag.jpg 셀주크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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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체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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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6년~1099년
파일:룸 술탄국 국기.svg 룸 술탄국 · 파일:Seljuk Turks Flag.jpg 셀주크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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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년
페체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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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5년~11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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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
11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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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5년 시칠리아 왕국의 발칸 침공
11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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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센과 페터르의 난
1185년~12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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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불가리아 제2제국 국기.svg 불가리아 제2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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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640px-Flag_of_the_Despotate_of_Epirusunder_the_House_of_Komnenos_Doukas.png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 파일:931px-Armoiries_Achaïe.svg.png 아카이아 공국 · 파일:Arms_of_the_House_of_de_la_Roche.svg.png 아테네 공국 · 파일:800px-Flag_of_the_Kingdom_of_Sicily_(Hohenstaufen).svg.png 시칠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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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사 공방전
1317~13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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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카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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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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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0년~14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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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411년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베이국
제19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4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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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453년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베이국 }}}}}}}}}}}}


1. 개요2. 배경3. 셀주크 제국의 아나톨리아 정복4. 십자군 전쟁5. 요안니스 2세의 튀르크 전쟁6. 마누일 1세의 튀르크 전쟁7. 룸 술탄국의 공세8. 동로마 제국과 아나톨리아 베이국의 전쟁9. 오스만 베이국의 아나톨리아 제패10. 팔레올로고스 내전1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 개요

1050년대에 오구즈 튀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로 진출한 이래, 셀주크 제국, 룸 술탄국, 아나톨리아 베이국, 오스만 제국 등 튀르크인들이 세운 국가들과 동로마 제국의 전쟁. 전쟁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고 잔존국 까지 포함할 경우 1479년까지 이어졌다.

2. 배경

이슬람 아라비아에서 대두된 이래 수 세기 동안 지중해 세계 각지에서 격렬한 전투가 연이어 벌어졌던 로마-아라비아 전쟁은 1050년대에 이르러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9세기부터 마케도니아 왕조의 지도하에 중흥기를 이룩하며 아랍 세계를 밀어붙여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하던 동로마 제국은 1025년 바실리오스 2세 사후 정치 불안정과 부정부패, 귀족들의 자유농민 토지 강점으로 인한 빈부격차 심화 등 여러 문제에 부딪치면서 성장세가 둔화되었다. 한편, 아랍 세계 역시 아바스 왕조의 쇠락과 각지에서 난립한 토후국들의 세력 다툼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을 향한 제대로 된 공세를 개시할 여력이 없었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과 아랍 세계 모두 침체된 상황에서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으니, 바로 튀르크였다.

튀르크인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인 돌궐에서 기원했다. 그들은 10세기 경에 트란스옥시아나, 호라산, 사마르칸트 등 중앙아시아 스탭 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했고, 때로는 주변 정착 민족을 습격해 식량과 재물을 털었다. 그러다 아랄해 서쪽에 있던 튀르크계 종족인 오구즈족이 오구즈 야브구국을 세웠는데, 오구즈족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낸 셀주크라는 인물이 아브구(왕)의 경계를 사자 추종자들을 이끌고 크즐오르다로 피신했다. 그 후 셀주크는 사만 왕조 카라한 왕조 사이를 오가며 실익을 챙기다가 최종적으로 사만 왕조의 편을 들어 카라한 왕조를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서 몰아내고, 그 보답으로 사만 왕조에게 그 땅에 정착할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후 셀주크의 후손들이 대대로 호라산, 부하라, 크즐오르다에 살아가다가 카라한 왕조가 왕위 다툼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면서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가즈니 왕조의 술탄 마수드 1세에게 귀순하려 했다. 그러나 마수드 1세는 튀르크인들을 받아들이면 장차 화가 될 거라고 여기고 벡토그디 휘하 병력을 파견하여 튀르크인들을 내쫓게 했다. 이에 토그릴 1세와 차으르 베이가 반격하여 가즈니군을 물리치고 나사와 파라하 디히스탄을 공략한 뒤 가즈니 왕조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다른 튀르크 부족으로부터 이 지역을 지키는 대가로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1037년, 토그릴과 차으르는 사라흐, 아비바르, 마르 일대를 추가로 공략했다. 이후 토그릴은 자신을 호라산의 술탄이라고 칭했다. 역사학계는 이 때를 셀주크 제국의 건국년도로 규정한다. 이후 1038년 헤라트 및 니샤푸르를 추가로 공략했다.

마수드 1세는 튀르크인의 침략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1040년 5만에 달하는 군대와 코끼리 60마리를 이끌고 메르브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이에 토그릴과 차으르는 카라한 왕조의 왕자 파라무르츠와 함께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며 정면 대결을 회피했고, 경기병대가 종종 기즈니 왕조군의 보급로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기즈니 왕조군은 이러한 적의 유격 전술에 지칠대로 지쳤고, 근방의 수원지로 접근하지도 못해 심한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다 그들이 메르브 근방의 단다나칸 평원에 주둔했을 때, 튀르크 기병대가 16,000명이 총공세를 가했다. 기즈니 왕조군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단다나칸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토그릴 1세는 가즈니 왕조를 북인도로 밀어내고 호라산의 지배권을 확립한 뒤 세력 확장에 몰두한 끝에 1055년 부와이 왕조의 영도하에 있던 메소포타미아를 공략하고 바그다드를 확보해 아바스 왕조 칼리파를 자신의 수중에 두었다. 뒤이어 셀주크 술탄에 오른 알프 아르슬란은 레반트와 시리아를 공격해 파티마 왕조를 물리치고 그 일대를 장악했으며, 캅카스 일대의 지배자였던 조지아 왕국에도 지속적으로 공세를 가한 끝에 굴복시키고 매년 공물을 바치게 했다. 이렇듯 세력을 급격히 불리던 셀주크 제국은 동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아나톨리아로 눈길을 돌렸다. 이리하여 장장 400여 년간 이어질 로마-튀르크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셀주크 제국의 아나톨리아 정복

1068년, 알프 아르슬란이 시리아로 진출하여 파티마 왕조와 한창 전쟁을 치르고 있을 무렵, 그의 부하가 허락없이 아나톨리아로 진군해 마침 그곳에서 군대를 이끌고 경계중이던 동로마군과 접전을 벌였다. 튀르크군은 1069년 이코니움을 공략하는 등 분전했으나, 3차례의 접전 끝에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퇴했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동로마 제국 황제 로마노스 4세는 아르메니아로 대군을 파견했다. 아프 아르슬란은 분쟁을 평화적으로 종결시키려 했지만, 이 참에 튀르크인들을 꺾어놓고 싶었던 로마누스는 거부했다. 그리하여 양자는 1071년 8월 26일 아르메니아 반 호수 북쪽 무라트 강변의 만치케르트에서 격돌했다.

만치케르트 전투는 동로마 제국 최악의 패배 중 하나였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가 전투 도중 휘하 부대를 이끌고 이탈해버리는 바람에 사기가 급락한 동로마군은 전사자 8,000명, 포로 4,000명, 탈주 20,000명에 이르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고, 로마노스 4세는 생포되었다. 아르슬란은 밧줄에 양손이 묶인 로마노스 4세를 땅바닥에 눕힌 뒤 그의 목을 밟는 의식을 벌였다. 이후 황제를 일으켜 세우고 정중하게 대하면서, 평화 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이때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만일 우리의 처지가 반대라면 그대는 어찌하겠소, 가령 내가 포로로 잡혔다면?"
"죽였거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거리에서 그대를 조리돌림 했겠지."
"그렇소? 난 그대에게 더 큰 벌을 내릴 생각이오. 용서할 테니, 돌아가시오."

그리하여 풀려난 로마노스 4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하려 했으나 1072년 도키아에서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군대에게 패배한 후 킬리키아로 후퇴했다가 그곳에서 사로잡힌 뒤 실명형에 처해진 후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 후 집권한 미하일 7세는 소아시아의 카이세리에서 동방 정예병들을 집결시켜 튀르크의 공세에 맞서봤으나 참패했다. 설상가상으로, 동로마군에 배속되었던 노르만 용병대가 루셀 드 바이욀의 지도하에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좀포스 전투에서 토벌대를 섬멸한 뒤 동로마에 고용되어 있던 프랑크 용병대 마저 끌어들인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바다 건너편까지 이동하여 무력시위를 했다. 이에 동로마 정부는 셀주크 제국에 루셀을 토벌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청했고, 셀주크 제국은 이를 명분삼아 루셀이 장악하고 있던 아르메니아콘 일대를 단시일에 석권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잇따른 반란과 정권 교체.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자, 셀주크 제국은 3대 술탄 말리크샤 1세의 지도하에 아나톨리아를 향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그 결과 안티오키아와 스미르나가 1084년에 함락되었고, 1091년까지 니케아 등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의 유력 도시들도 대거 튀르크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튀르크인들은 해상에서도 동로마 제국을 괴롭혔다. 본래 동로마 제국에서 복무하다가 셀주크 제국에 투항한 뒤 스미르나의 에미르에 선임된 차카는 1088년부터 대규모 함대를 건조한 뒤 포카이아와 레스보스, 사모스, 키오스, 로도스 섬을 잇달아 공략했다. 니키타스 카스타몬티스 장군이 이끄는 제국군 함대가 이를 막으려 했지만, 이들을 어렵지 않게 격파했다. 비슷한 시이에 니케아의 에미르 이불 카심이 비티니아와 니코미디아를 약탈하고 해적 선단을 조직하여 마르마라 해에 약탈을 자행했는데, 그도 이들과 협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동로마 제국에 반기를 든 키프로스의 랍소마티스, 크레타의 카리키스와도 모종의 협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차카는 아예 동로마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1091년 페체네그와 연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협공하려 했다. 그는 에게 해 일대를 공략하고 헬레스폰트 해협으로 진격했고, 페체네그족은 아나스타시오스 방어선(Anastasian Wall)을 넘어 수도에서 30여km 떨어진 부육체크메세(Büyükçekmece) 호수 인근에 도달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1세가 불가리아와 블라흐 일대의 테마군과 국내외의 용병대를 모조리 끌어모아 레부니온 전투에서 페체네그인들을 섬멸하는 바람에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은 무산되었다.

1092년, 달라시노스와 요안니스 두카스가 이끄는 제국 해군이 레스보스 섬의 미틸렌 요새를 공격했다. 차카는 요새를 구하기 위해 출격하여 3개월한 해전을 벌였지만, 결국 요새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수비대가 귀환하도록 허락하는 조건으로 요새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스미르나로 귀환하던 중, 달라시노스가 기습 공격을 가해왔고, 투르크 함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 1093년 봄, 차카는 일전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함대를 재건한 뒤 마르마라 해의 아비도스 항구를 습격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룸 술탄국의 클르츠 아르슬란 1세에게 그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르슬란은 그의 딸 아이셰 하툰과 결혼했지만, 동로마 제국에 협조하기로 하고 그를 연회에 초대한 뒤 기회를 틈타 살해했다. 그 후 동로마 해군은 차카의 사망으로 무력해진 셀주크 해군을 상대로 공세를 가해 에게 해의 여러 섬을 되찾고 1094년에는 마르마라 해의 남쪽 연안을 탈환했다.

4. 십자군 전쟁

1092년 11월 19일,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몰아붙이던 말리크샤 1세가 40세의 나이로 급샤했다. 그 후 셀주크 제국은 말리크샤 1세의 형제와 자식, 조카들에 의해 사분오열되었고, 알렉시오스 1세는 이 때를 틈타 아나톨리아를 탈환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그가 가지고 있는 병력만으로는 아나톨리아에 군림하고 있는 클르츠 아르슬란 1세 룸 술탄국을 당해내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1094년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무기와 보급품, 숙련된 군인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우르바노 2세는 이를 동방에도 교황의 권위를 떨칠 기회라고 여기고,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에 수도자들을 보내 "이교도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자"라고 외치게 했다.

이에 1096년 서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귀족, 영주, 기사들이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동방으로 진군하면서 십자군 전쟁이 발발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전사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곤혹스러워 했지만, 이내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해 십자군 지휘관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예루살렘으로의 원정 도중에 공략한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돌려준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그 후 동로마군은 십자군이 진군하는 동안 식량을 공급하고 후방에서 지원하는 예비대 역할을 수행했다.

십자군은 1097년 5월 6일 니케아를 포위 공격했고 5월 21일 클르츠 아르슬란 1세가 이끄는 튀르크군을 격파했다. 클르츠 아르슬란 1세는 수도를 니케아에서 아나톨리아 중부의 콘야로 옮긴 뒤 니케아 수비대에겐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라는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가망이 없어진 것을 깨달은 니케아 수비대는 공성군의 최고 사령관인 알렉시오스 1세에게 강화를 요청했다. 이에 황제는 니케아 측에 시민들과 수비대의 안전을 보장하는 칙서까지 보여주며 십자군을 시내에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6월 19일, 동로마 해군은 십자군이 잠들어있던 새벽을 틈타 니케아 항구에 정박했고 타티키오스가 이끄는 동로마 육군이 니케아를 접수했다. 날이 밝아서야 니케아가 동로마군의 수중에 넘어간 것을 알게 된 십자군은 사흘간 약탈할 권리를 잃은 것에 분개했지만 동로마 제국이 니케아를 가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 후 동로마군은 십자군과 보조를 맞추며 진군해 튀르크인들의 반격을 모조리 물리치고 소조폴리스, 필로멜리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헤라클레이아, 카이사레아를 장악했다. 여기에 요안니스 두카스는 1097년 에게 해 연안과 서부 아나톨리아의 내륙 지역에 대한 공세를 별도로 이끌어 스미르나, 에페소스,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아를 공략했다. 그러나 안티오키아 공방전을 치르던 중 안티오키아 공작이 될 야심을 품은 보에몽 1세의 농간에 넘어간 타티키오스가 십자군 장성들이 자신을 해치려 든다고 여기고 철수해버리는 사건이 벌어졌고, 십자군 지휘관들은 동로마군이 배신했다고 간주하고 나중에 함락한 안티오키아를 동로마 제국에 돌려주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보에몽이 안티오키아 공작에 선임되는 것을 용인했다. 그 후 예루살렘을 공략한 십자군은 레반트와 시리아 각지에 십자군 국가를 세우고 동로마 제국과 대립했고, 아나톨리아 내륙지대의 튀르크인들은 그 사이에 룸 술탄국 다니슈멘드로 양분되었다.

5. 요안니스 2세의 튀르크 전쟁

1119년, 룸 술탄국과 다니슈멘드 사이를 오가며 프리기아와 피시디아 사이의 넓은 지대에 거주하던 튀르크인들이 아부 샤라의 지도하에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의 항구도시인 아탈레이아에서 니케아로 가는 육로를 지키던 라오디케아를 공략했다. 이로 인해 아나톨리아 서남부의 동로마 항구들과 도시들이 고립되어 육로로 통행하지 못하게 되자, 요안니스 2세는 반격에 착수했다. 그는 먼저 요안니스 악수흐에게 일부 병력을 이끌고 리쿠스와 라오디케아로 진군하게 했다. 악수흐는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공성 병기를 준비해 놓아서 적이 방비할 시간을 빼앗았다. 야부 샤라는 아나톨리아 중부로 도망쳤고, 라오디케아는 공성 젓날에 바로 함락되었다.

요안니스 2세는 라오디케아에 주둔군을 배치하고 요새를 강화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고, 악수흐는 공세를 이어가 1119년 늦가을까지 소조폴리스와 메안데르 강 중부를 재탈환하고 도로를 깔고 요새를 세움으로써 방비를 강화했다. 이후 악수흐는 1120년 아나톨리아 서남부로 진군해 지배력을 강화하는 작업에 착수했으나, 1121년 페체네그인들이 트라키아에 대대적으로 쳐들어와서 약탈을 자행하자 요안니스 2세의 회군 명령을 받고 군대를 돌려야 했다.

그 후 페체네그인들을 베로이아 전투에서 궤멸시키고 베네치아-동로마 무역 전쟁을 벌인 끝에 베네치아 공화국과 타협하면서 서방과 북방 전선을 안정시킨 요안니스 2세는 1130년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2세를 주살하는 등 날로 강성해지고 있는 다니슈멘드를 정벌하기로 마음먹었다. 황제는 파플라고니아 등 아나톨리아 중부를 수복한 뒤 카스타모뉘를 상대로 치열한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했다. 이렇게 새로 확보한 영토에 다니슈멘트의 치하에서 핍박받던 로마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을 이주시켰고, 튀르크 아미르들을 회유해 다니슈멘드에게 반기를 들게 했다. 다니슈멘드는 동로마 제국의 공세에 별다른 반격을 하지 못했고, 요안니스 2세는 1133년 수도로 귀환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금문부터 아야 소피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광장에 비단을 수놓는 등 매우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1134년, 요안니스 2세는 재차 다니슈멘드 원정을 감행하여 1135년까지 깅그라 등 아나톨리아 중부 일대의 여러 영역을 확보한 뒤 2,000명의 주둔군을 주둔시켰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만치케르트 전투 참패후 잃어버렸던 영역을 상당수 회복했다. 1137년 제국에 공공연히 저항하던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과 안티오키아 공국을 복종시킨 뒤 시리아의 요충지인 샤이자르를 공략하고자 샤이자르 공방전을 치렀지만, 동로마 제국이 레반트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바라지 않은 십자국 국가들의 비협조로 인해 실패했다. 1139년 상가리오스 강 연안 지대에 살던 튀르크인들을 상대로 원정을 감행해 그들을 굴복시켰고, 1140년 네오카이사레아를 포위 공격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많은 군마가 죽고 식량이 떨어지자 철수해야 했다.

이후 다니슈멘드의 말리크 모하메드 가지가 트라페준타의 둑스가 일으킨 반란을 후원하고,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이 또다시 제국을 상대로 공공연히 저항하자, 요안니스 2세는 재차 이들을 정벌하러 출진했으나 1143년 4월 8일 사냥 도중에 독이 발라진 화살촉에 손을 찔려버리는 바람에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동로마군은 황제의 유언에 따라 막내 황자 마누일 1세를 새 황제로 옹립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6. 마누일 1세의 튀르크 전쟁

1146년, 마누일 1세는 서부 아나톨리아와 킬리키아를 잇따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는 룸 술탄국을 응징하고자 원정을 감행했다. 동로마군은 3차례 전투에서 모두 승리한 뒤 룸 술탄국의 수도인 이코니온을 포위했다. 그러나 룸 술탄국의 맹렬한 저항으로 인해 쉽사리 공략하지 못하다가 프랑스 왕국의 루이 7세가 십자군 국가를 구하기 위해 제2차 십자군 원정을 단행하여 발칸 반도로 진입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룸 술탄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서둘러 수도로 돌아가서 십자군을 영접했다.

1161년, 동로마 제국은 룸 술탄국과 새로운 협정을 체결했다. 시바스를 포함한 일부 변경 지역이 상당한 현금을 대가로 동로마 제국에 넘겨졌으며,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마누일 1세를 주군으로 받들고 충성을 맹세했다. 그렇게 해서 동로마 제국과 화합한 룸 술탄국은 오랜 경쟁자인 다니슈멘드를 상대로 맹공을 펼친 끝에 1170년대에 그들을 거진반 무너뜨리고 세력을 크게 불렸다. 마누일 1세는 갈수록 강성해지는 룸 술탄국이 곧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 할 거라 여겼고, 때마침 신성 로마 제국 프리드리히 1세가 십자군 원정을 명분삼아 자국의 영역을 통과하려 하는 것에도 부담을 느꼈다. 이에 자신이 먼저 십자군을 칭하고 룸 술탄국을 정벌해 프리드리히 1세가 남하할 여지를 차단하기로 마음먹었다.

1176년, 마누일 1세는 클르츠 아르슬란 2세에게 다니슈멘드 왕조에게서 빼앗은 영토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아르슬란이 이를 거부하자, 마누일 1세는 주군의 명을 거역한 봉신을 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최대 5만에 달하는 병력을 소집해 룸 술탄국의 수도 이코니온으로 진군했다. 여기에는 헝가리 왕국, 안티오키아 공국, 세르비아, 아르메니아계 군주들이 파견한 병력도 가세했다. 마누일 1세는 교황청, 예루살렘 왕국 등에 이 '성전군'의 행렬이 10마일에 달한다며 자랑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황제의 명령에 따라 다니슈멘드에게 영토를 반환할 테니 평화 협정을 맺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마누일 1세는 이왕 일을 벌인 이상 끝까지 밀어붙이기로 마음먹고 평화 협상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어진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동로마군은 뜻밖에도 10,000여 명의 튀르크군에게 패배했다. 사실 패배로 인한 전력 손실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공성 장비와 물자를 망실했기 때문에 이코니온 공략은 불가능해졌고 퇴로 확보도 힘들어졌다. 결국 마누일 1세는 클르츠 아르슬란 2세로부터 안전한 퇴각을 보장받는 대신에 국경지대의 비잔티움 측 전진 요새인 수블레온, 도릴레온을 철거하기로 했다.

그러나 마누일 1세는 현지 튀르크 부족민들이 철수하는 동로마군을 공격한 것을 빌미 삼아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수블레온 요새만 허물고 도릴레온은 허물지 않았다. 이에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1177년 1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제국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메안데르 강 유역의 도시와 촌락들을 약탈한 뒤 트랄레스, 메안데르의 안티오키아 등을 유린한 후 에페소스 인근까지 육박했다. 튀르크군은 에게 해에 도착한 뒤 동로마 해군의 노, 바닷물, 백사장의 모래를 기념물로 챙기는 등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요안니스 콤니노스 바타치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본국으로 귀환하던 튀르크군을 중간에서 요격하여 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에서 궤멸시켰다. 그 후 요안니스는 메안데르 강을 거슬러 올라가 룸 술탄국의 영역인 프리기아로 쳐들어가 튀르크 촌락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룸 술탄국은 1178년 파나시온, 1179년 클라우디오폴리를 포위 공격하는 등 반격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결국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1179년 겨울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지속해봐야 무익하다는 것을 통감하고 모든 것을 전쟁 이전으로 되돌리는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7. 룸 술탄국의 공세

1180년 마누일 1세가 붕어한 후, 동로마 제국은 대혼란에 휩싸였다. 11세의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 2세와 어머니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황후는 제국의 분란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다가 안드로니코스 1세에 의해 비참하게 죽었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제위를 찬탈한 뒤 의심되는 자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반란이 일어난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에 군대를 보내 현지인들을 학살하는 등 폭정을 자행했다.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이 때를 틈타 지난 전쟁 때 빼앗겼던 영토를 일부 회복하고 서부 아나톨리아를 수 차례 약탈했다. 1190년 프리드리히 1세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던 중 룸 술탄국을 공격하면서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었지만, 십자군이 통과한 후 세력을 곧 회복하고 아나톨리아 중부 일대의 지배권을 공공연히 다졌다.

1192년 클르츠 아르슬란 2세 사후 쉴레이만 2세와 케이휘스레브 1세 사이의 내전이 벌어진 끝에 쉴레이만샤 2세가 1196년 케이휘스레브 1세를 동로마 제국으로 내쫓고 권좌에 올랐다. 쉴레이만 2세는 1203년 다비트 4세 이후로 갈수록 강성해지고 있는 조지아 왕국을 침공했으나, 타마르 여왕의 남편이자 조지아군 총사령관인 다비트 소슬란이 이끄는 조지아군에게 바시아니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로 인해 권위를 잃은 쉴레이만 샤는 1204년 사망했고, 아들 클리츠 아르슬란 3세가 뒤를 이었으나 1205년 동로마 제국에서 돌아온 케이휘스레브 1세에게 축출되었다.

이 무렵, 동로마 제국은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폭정과 1185년 시칠리아 왕국의 발칸 침공, 아센과 페터르의 난 등 외세의 침략, 내치 실패로 인한 민중 봉기와 각지의 반란으로 인한 혼란으로 인해 휘청이다가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당하면서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이후 아나톨리아 서부 일대에 니케아 제국이 세워졌고, 흑해 연안 지대엔 트라페준타 제국이 설립되었다. 케이휘스레브 1세는 이 때를 틈타 공세를 감행해 1207년 니케아 수비대를 몰아내고 지중해 연안의 중요한 항구도시인 안탈리아를 점령하고 그곳을 해군 기지로 삼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211년, 지난날 십자군의 침공으로 황위를 잃었던 알렉시오스 3세가 룸 술탄국으로 찾아가서 술탄 케이휘스레브 1세에게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청했다. 당시 케이휘스레브 1세는 니케아 제국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지켜보며 장차 그들이 룸 술탄국이 빼앗은 옛 영토를 되찾으려 들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는 이참에 알렉시오스 3세를 니케아 황제로 세운 후 꼭두각시로 삼아서 니케아 제국을 복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사절을 니케아로 보내 테오도로스 1세에게 퇴위를 권고했다. 예상대로 테오도로스가 거절하자, 케이휘스레브 1세는 5,000~11,000명의 병력을 모아 1211년 봄 알렉시오스 3세와 함께 니케아 제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메안데르의 안티오키아 전투에서 테오도로스에게 목숨을 잃었고, 알렉시오스 3세도 체포된 후 테오도로스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케이휘스레브 1세의 뒤를 이어 술탄에 오른 케이카부스 1세는 테오도로스 1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했다. 그 후 그는 니케아 제국 대신 트레파준타 제국 쪽을 공략하기로 마음먹고, 일련의 공세 끝에 1214년 시노페를 공략하고 트라페준타 제국을 룸 술탄국의 봉신으로 삼았다. 1220년 술탄에 오른 케이쿠바트 1세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복속시키고 크림 반도에도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지중해 연안의 아나톨리아 해안지대 상당수를 장악했다.

8. 동로마 제국과 아나톨리아 베이국의 전쟁

1243년, 일 칸국이 아나톨리아로 쳐들어와 콰세다 전투에서 튀르크군을 섬멸하고 룸 술탄국을 봉신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술탄의 위세는 땅에 떨어졌고, 각지의 튀르크 에미르들은 술탄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활동했다. 니케아 제국은 룸 술탄국이 약해져서 자신들을 견제하지 못하는 틈을 타 발칸 반도를 향한 군사 원정을 연이어 펼친 끝에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동로마 제국을 50여 년만에 부활시켰다.

그러나 룸 술탄국이 급격히 쇠락하면서 여러 베이국이 아나톨리아에서 세워진 후, 동로마 제국은 또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지금까지는 룸 술탄국이 튀르크인들을 적절하게 제어해줬지만, 이제는 베이국들이 난립하고 세력 확장을 꾀하면서 자연스럽게 동로마 제국령인 아나톨리아 서부의 안보가 위태로워졌다. 설상가상으로, 미하일 8세 라스카리스 왕조를 단절시키고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장기 집권을 꾀하고자 공동 황제 요안니스 4세를 실명시켰다가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 아우토리아노스에게 파문당하면서 촉발된 아르세니오스 분열이 발발했다. 라스카리스 왕조의 지지 기반이던 소아시아의 주민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팔레올로고스 왕조를 더 이상 추종하지 않았고, 튀르크인들은 이 틈을 타 소아시아를 수월하게 공략했다.

1282년, 미하일 8세는 소아시아를 갉아먹는 튀르크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프리기아 원정을 개시했지만 도중에 트라키아의 파코미오스 마을에서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뒤이어 황위에 오른 안드로니코스 2세는 소아시아를 사실상 방치했던 부친과는 달리 튀르크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우선 궁정을 소아시아로 옮기고 장병들을 격려했으며, 명장 알렉시오스 필란트로피노스를 기용해 투르크군을 무찌르게 했다. 필란트로피노스는 메안드로스 강 계곡에서 투르크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으며, 멘테세 토후국으로 진격하여 멜라노디온 요새를 공략했다. 그러나 1295년 가을, 안드로니코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붙들려 한쪽 눈이 뽑히고 유폐되었다. 이렇게 명장이었던 필란트로피노스가 허무하게 사라지면서, 소아시아 방면 동로마군은 지리멸렬해졌다.

1302년, 안드로니코스 2세는 장남 미하일 9세에게 최대 16,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맡겨 아나톨리아 베이국 중 가장 강력한 위세를 구가하던 카라시 왕조를 정벌하게 했다. 이 원정군에는 10,000명의 알란 용병대가 배속되었다. 미하일 9세는 마그네시아 요새에 진을 쳤으나, 적군이 주변 산의 정상과 숲 등 방어에 유리한 지점을 선점했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기 때문에 함부로 전투를 벌이지 못했다. 그러던 중 투르크군이 산에서 내려와서 돌격해오자, 그는 전투 준비를 명령했지만, 알란 용병대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는 바람에 무력하게 패했다. 미하일 9세는 페르가몬으로 후퇴한 뒤 다드라미티움으로 가서 그곳에서 1303년 새해를 맞이한 뒤, 여름에 키지쿠스 시에 가서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려 했다. 그러나 소아시아 현지민들의 민심이 동로마 제국을 떠나고 병력 모집이 제대로 되지 않자, 그는 실의에 빠진 나머지 중병에 걸려 피기 요새에서 그해 내내 요양 생활을 해야 했다. 튀르크인들은 그 사이에 에페수스 시와 로도스를 공략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2세는 카탈루냐 용병 6,500명을 고용해 카라시 왕조를 공격하게 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여러 도시에서 튀르크군을 축출했지만, 튀르크인들보다 잔인하고 야만적으로 주민들을 짓밟았고, 안드로니코스 2세의 공동 황제인 미하일 9세와 여러 번 충돌했다. 급기야 1305년, 그들은 제국을 배신하고 튀르크군과 합세해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테살리아를 파괴한 후 아테네 공국과 테베를 정복하고 그곳에 눌러지냈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혼란에 빠져 소아시아에 전념하기 힘들었다. 한편 가장 강대한 베이국이었던 카라시 왕조 역시 카탈루냐 용병대의 맹공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어서 예전만한 위세를 보이지 못했다. 그 사이 무섭게 성장한 베이국이 있으니, 바로 오스만 베이국이었다.

9. 오스만 베이국의 아나톨리아 제패

1281년경, 오스만 1세는 아나톨리아 반도 서북부 비티니아 지방의 쇠위트에서 영주이자 룸 술탄국의 봉신으로 활동하던 아버지 에르투으룰의 뒤를 이어 영주에 올랐다. 그는 동로마 제국을 향한 지하드를 선포해 현지의 동로마군을 상대로 소규모 접전을 벌여 성과를 거뒀다. 이에 주목한 튀르크 전사들과 학자, 이슬람 성직자들이 그의 휘하에 들어오면서, 그는 차츰 세력을 키웠다. 이윽고 1299년, 오스만 1세는 룸 술탄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오스만 베이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오스만 1세는 나라를 세운 직후부터 인근 영역 확보를 위한 전쟁에 착수했다. 에스키셰히르, 빌레지크, 이네골이 이 시기에 공략되었고, 여러 마을이 별다른 저항 없이 복종했다. 그는 여세를 이어가 1301년 니코메디아로 쳐들어가 주변 지역을 약탈했고, 뒤이어 부르사 일대도 약탈했다. 다만 공성 기술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에 강력한 방어시설을 갖춘 두 도시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이지 않고 느슨한 포위를 이어갔다.

요르요스 파키메리스에 따르면, 안드로니코스 2세는 니케아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메가스 헤타이라치(μέγας ἑταιρειάρχης: 특정 구역의 지휘관)인 요르요스 무잘론에게 이들을 격퇴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요르요스 무잘론은 1302년 바페오스 전투에서 오스만 1세가 이끄는 5,000 튀르크 기병대에게 참패했다. 그 후 오스만 1세는 비티니아 전역을 공략하고자 여러 차례 공세를 가해 여러 마을과 거점을 공략했다. 1308년경 마르마라 해에 있는 임랄리 섬을 공략한 후 해군 기지를 건설해 비티니아의 중심지인 부르사 콘스탄티노폴리스간의 교역로를 차단했다. 또한 1316년 울루산의 여러 요새를 장악하면서 부르사와 다른 아나톨리아의 동로마 도시들간의 연락로마저 차단했다.

이렇게 해서 부르사를 완전히 고립시킨 튀르크군은 1317년부터 부르사를 포위 공격했다.( 부르사 공방전) 부르사 시민들은 1318년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사절을 보내 무역을 해야 생존할 수 있는 도시가 봉쇄되는 바람에 재정난이 심각해지고 있으니 속히 구원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당시 동로마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 불가리아 제2제국,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한 데다 카탈루냐 용병들의 난동으로 인해 국토가 파괴되고 많은 국민이 학살당하는 등 내우외환이 극심했기에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321년부터 안드로니코스 2세와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간에 제1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하면서, 부르사는 자연스럽게 외면당했다.

부르사 시민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버텼고, 튀르크인들은 공성 기술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에 강력한 방어시설을 갖춘 이 도시를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다. 그러나 외부와 단절된 채 수년을 버티다보니 기근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시민이 아사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수비대장 사로스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326년 4월 6일 항복했다. 전설에 따르면, 오스만 1세가 이 날에 사망했다고 한다.

오스만 1세의 아들 오르한은 항복을 접수받은 뒤 부르사의 모든 거주민에게 금화 30,000개를 바친 후 도시를 떠날 권리를 부여했다. 하지만 대다수 주민들은 도시에 그대로 남기로 했다. 오르한은 쇠위크에서 부르사로 수도를 이전하고 현지의 그리스 귀족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오스만 베이국의 지배계급에 편입했다. 부르사는 빠르게 경제력을 회복했고, 1376년 오스만 베이국이 수도를 에디르네로 옮길 때까지 수도로서 기능했다.

부르사 공략에 성공한 후, 오르한은 지하드를 명분삼아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영토를 향한 지속적인 공세를 감행했고, 1328년경 니케아를 포위했다. 한편, 안드로니코스 3세는 제1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에서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를 상대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그는 아나톨리아의 남은 영토를 보전하기로 마음먹고, 최측근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함께 니케아를 구원하기 위해 정예병을 소집했다.

1329년, 안드로니코스 3세는 2,000명의 트라키아 정예 중기병대와 2,000명이 넘는 민병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넘어 칼케돈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곧 첩자를 통해 오르한에게 전해졌다. 오르한은 황제가 니케아에 근접하기 전에 요격하기로 마음먹고, 일부 병력을 남겨서 니케아를 계속 포위하게 한 뒤 자신은 8,000가량의 튀르크 경기병대 및 보병대를 이끌고 적을 요격하러 이동했다.

1329년 6월 10일, 양군은 펠레카논 평원에서 마주쳤다. 먼저 그곳에 도착한 오르한은 언덕에 숙영지를 세운 뒤 적을 언덕으로 유인하고자 기마 궁수 300명을 보내 적에게 접근하게 했다. 그러나 유인책이라는 것을 눈치챈 동로마군은 그들을 밀어낼 뿐 추격하지 않았다. 이에 오르한은 수적으로 우월한 만큼 밀어붙이기로 마음먹고 전군을 이끌고 돌격했다. 하지만 동로마군은 2배 많은 적을 상대로 분전했고, 어둠이 깔릴 때까지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 이때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는 허벅지에 화살이 꽂혀 중상을 입었지만 전장에 끝까지 남았다.

어둠이 깔리면서 전투가 종료된 후, 양측은 진영으로 돌아가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때 안드로니코스 3세는 신하들의 조언에 따라 인근 도시로 후퇴한 뒤 부상을 치료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동로마군이 철수하는 것을 감지한 오르한이 추격하면서, 양군은 또다시 충돌했다. 이때 황제가 사망했다는 뜬소문이 퍼지면서, 동로마 민병대는 삽시간에 공포에 질려 패주했다. 튀르크군은 이들을 맹추격해 모조리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남은 병력을 수습한 뒤 황제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퇴각했다.

동로마 제국은 북방의 세르비아 왕국 불가리아 제2제국의 압력이 거세지는 상황에도 어렵게 차출한 정예병을 펠레카논 전투에서 대거 잃어버렸다. 이 이상 손실을 본다면 제국을 유지할 가망마저 사라질 가능성이 높았기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아나톨리아를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니케아는 2년 더 버텼지만 결국 1331년 3월 2일 항복했다. 오르한은 1333년 니코메디아를 포위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니코메디아에 식량을 제공하고 오르한에게 매년 12,000개의 금화를 바칠 테니 니코메디아를 빼앗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오르한은 꿋꿋이 공성전을 이어갔고, 결국 니코메디아는 1337년 오스만 베이국의 수중에 넘어갔다. 1338년, 튀르크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건너편의 칼케돈을 공략했다. 1341년 6월 15일 안드로니코스 3세가 붕어했을 때,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영토는 비티니아의 흑해 쪽 연안의 헤라클레아 폰티카, 아마스트리스(오늘날 아마스라), 페가이(오늘날 카라비가), 그리고 에게 해 연안의 필라델피아와 포카이아만 남았다.

10. 팔레올로고스 내전

1341년, 안드로니코스 3세 사후 9살의 어린 황제 요안니스 5세와 모후 사보이아의 안나의 세력과 권신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3차 팔레올로고스 내전) 내전이 장기전으로 흘러가자,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1345년 초 오스만 베이국의 아미르 오르한과 직접 만났다. 오르한은 칸타쿠지노스의 딸 테오도라를 아내로 삼는 대가로 칸타쿠지노스에게 자신의 군대를 넘기기로 했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튀르크군의 협력에 힘입어 134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한 후 요안니스 5세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1352년, 트라키아를 다스리던 요안니스 6세의 아들 마테오스와 요안니스 5세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마테오스가 구원을 요청하자, 요안니스 6세는 오르한으로부터 상당 규모의 튀르크 병력을 빌려서 아드리아노플로 파견했다. 이에 요안니스 5세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손을 빌렸고, 스테판 두샨은 이를 받아들여 기병 4천 명을 파견했다. 양측은 마리차 강에서 격돌했고, 튀르크군이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후 튀르크군은 약탈 허가를 얻고 인근의 소도시와 촌락들을 모조리 약탈했다. 이로 인해 요안니스 6세는 이겨놓고도 인기가 폭락하는 상황에 놓였다.

1354년 3월 2일, 트라키아에 대지진이 일어나 대부분의 지역이 파괴되었다. 수많은 도시와 촌락이 피해를 입었고 생존자들마저 그 뒤에 이어진 눈보라와 홍수로 인해 사망했다. 한때 대도시였던 갈리폴리는 거의 집 한 채도 남아있지 않은 폐허로 변했다. 튀르크군은 이 소식을 듣고 가족들을 최대한 거느린 채 트라키아로 이주, 버려진 도시들에 터전을 잡았다. 대다수는 페허가 된 갈리폴리로 갔고, 곧이어 더 많은 튀르크인들이 그곳으로 가서 합류했다. 이리하여 제국은 트라키아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요안니스 6세는 튀르크 측에 영토를 반환하라고 요구했으나, 튀르크인 이주를 주도한 슐레이만 파샤는 알라의 뜻에 따라 도시를 점유한 것이니 제국에 넘겨주면 불경스러운 행위가 되는 것이라며 묵살했다. 결국 일련의 사건으로 지지를 상실한 요안니스 6세는 1354년 12월 10일 요안니스 5세에게 굴복하고 퇴위했다.

요안니스 5세는 튀르크 세력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친서방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그 대가로 교황으로부터 지원군을 받기를 희망했지만 정교회를 신봉하는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기만 했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그는 오스만 베이국의 압박에 굴복하여 그들의 봉신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서방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오기 위해 서유럽을 견문하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1373년 서유럽 견문을 마치고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하던 요안니스 5세는 불가리아에 의해 억류되었다. 당시 그의 맏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안드로니코스 4세는 부황의 구원 요청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2년 동안 억류되었던 요안니스 5세는 가까스로 풀려난 뒤 안드로니코스 4세를 폐위시키고, 차남 마누일을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이에 격분한 안드로니코스 4세는 1373년 5월 요안니스 5세가 오스만 베이국의 아나톨리아 원정에 참여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무라트 1세의 아들 사우지와 결탁하여 봉기했다. 이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고 금세 진압되었다. 격노한 무라트는 사우지를 실명시키고, 요안니스 5세에게 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는 물론 안드로니코스 4세의 어린 아들까지 실명시키라고 요구했다. 요안니스 5세는 명령에 따르면서도 약간의 자비를 베풀었다. 두 부자는 한쪽 눈만 잃은 채 콘스탄티노플에 감금되었으며, 안드로니코스 4세의 제위 계승권은 공식적으로 박탈되었다. 제위 상속자가 된 스물 세 살의 마누일은 테살로니카에서 황급히 소환되어 9월 25일에 공동 황제가 되었다.

1376년 3월, 요안니스 5세는 베네치아에게 테네도스 섬을 양도하는 대가로 3만 두카토를 받고, 제관의 보석들을 돌려받기로 했다. 그러자 제노바가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베네치아가 테네도스 섬을 양도받기 전에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1376년 7월, 제노바인들은 안드로니코스 4세를 감옥에서 탈출시켰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비밀리에 갈라타로 간 후 무라트와 접촉하여 기병과 보병 혼성군을 얻었다. 그는 그 군대로 콘스탄티노플을 한 달 동안 포위한 뒤 뚫고 들어갔다. 요안니스 5세와 나머지 황족들은 금문의 요새에서 며칠 동안 버텼지만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그들을 자신이 얼마 전까지 갇혀 있었던 아네마스 탑에 가두었다. 그 후 그는 테네도스 섬을 제노바에 양도했고, 1377년 10월 18일에 정식으로 즉위하며 어린 아들을 공동 황제인 요안니스 7세로 삼았다. 그러나 테네도스 섬의 동로마 총독은 제노바에게 넘기기를 거부하고, 베네치아의 함선이 오자 기꺼이 섬을 넘겨줬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4세는 신의를 내보이기 위해 제노바가 그 섬을 무력으로 탈취하는 것을 지원해야 했다. 그러나 제노바는 베네치아에게 패배해 끝내 테네도스 섬을 얻지 못했다.

한편, 무라트는 안드로니코스 4세를 복위시킨 뒤, 그를 복위시키는 대가로 갈리폴리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이에 따라 1377년 말 갈리폴리를 오스만 베이국에게 헌납했다. 한편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은 아네마스 탑에 3년간 갇혀 있다가 1379년에 탈출하여 무라트 1세의 진영으로 갔다. 마누일은 무라트에게 자신과 아버지를 복위시켜 주면 공물과 군사 지원을 더 늘리고 소아시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로마의 거점인 필라델피아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무라트는 이를 승낙해 군대를 규합했고, 베네치아는 제노바를 선호하는 성향이 강한 안드로니코스 4세를 제거하기 위해 소함대를 파견했다. 1379년 7월 1일,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 2세는 하리시오스 대문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에 다시 입성했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갈라타의 제노바인들에게 도망쳤다. 1380년, 요안니스 5세와 안드로니코스 4세, 콘스탄티노플과 갈라타는 각각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지원을 받아 내전을 벌였다. 무라트는 겉으로는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 2세를 지원했지만 암암리에 안드로니코스 4세를 지원해 양측간의 적대 관계가 지속되게 만들었다. 전쟁은 거의 2년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1381년 4월에야 비로소 양측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협상 결과 안드로니코스 4세는 제위 계승권을 되찾았고, 그의 아들 요안니스 7세도 장차 아버지를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1390년 4월, 요안니스 7세는 조부 요안니스 5세를 폐위시키고 단독으로 즉위했다. 이는 요안니스 5세가 자신이 아닌 숙부 마누일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러나 5달만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움을 받은 요안니스 5세가 복위에 성공하자, 요안니스 7세는 오스만 배이국의 바예지트 1세 궁정으로 망명했다. 바예지드 1세는 이들을 중재해 요안니스 7세를 셀렘브리아 영지로 복귀시킨 뒤 마누일 2세의 황위 계승을 인정하되 아직 아들이 없는 그가 후계를 남기지 못할 경우 그 후계는 요안니스 7세가 잇도록 했다. 그러나 얼마 후 마누일이 아들을 낳자, 요안니스 7세는 평생 동안 황족으로서 정중히 예우받되 황위를 잇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한편, 바예지트 1세는 중재를 해준 대가로 아나톨리아에 마지막으로 남은 동로마 영토였던 필라델피아(오늘날 터키 알라셰히르)를 할양받았다.

1391년, 요안니스 5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문 가운데 하나인 '황금 문'의 방비가 허술해진 것을 우려하여 성벽 밖에 있는 수도원 몇 채를 허물고 거기에서 나온 석재로 성문을 보강했다. 이 소식을 접한 바예지드 1세는 당장 보강한 부분을 허물지 않으면 적대행위로 간주하고 공격하겠다고 위협하는 서신을 보냈다. 결국 요안니스 5세는 보강한 부분을 허물어야 했고, 이로 인해 화병에 걸려 사망했다.

1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요안니스 5세 사후 단독 황제가 된 마누일 2세는 온갖 내정간섭을 하는 오스만 술탄국으로부터 자립하기 위해 서유럽을 돌며 지원을 호소했다. 바예지트 1세는 이를 경계해 마누일 2세를 수차례 소환했지만, 마누일 2세가 끝까지 응하지 않자 1394년부터 1402년까지 8년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제17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마누일 2세는 난국을 해결하고자 1399년 요안니스 7세에게 도시를 맡기고 십자군 결성을 이루기 위해 서유럽으로 떠나 베네치아, 파리, 런던을 순차적으로 방문하고 1402년에 귀환했다. 그의 방문은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사이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데는 큰 기여를 했으나, 원래 목적이었던 군사 원조 면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02년, 바예지트 1세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참패하여 포로로 잡혔다. 투르크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풀고 물러났고, 동로마 제국은 테살로니카와 트라키아 서부의 해안지대를 수복했으며, 오스만 술탄국에게 바치던 조공도 중단했다. 요안니스 7세는 섭정 지위에서 물러나 테살로니키 일대를 영지로 삼아 '테살로니키의 황제'를 칭했고, 아들 안드로니코스 5세는 공동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1407년, 안드로니코스가 사망하자 비탄에 빠진 요안니스도 이듬해 죽으며 2대에 걸친 테살리아 황제국은 소멸되었다. 이후 마누일 2세의 차남 안드로니코스가 테살로니카 총독으로 부임했다.

1411년, 오스만 술탄 자리를 놓고 메흐메트 1세, 이사, 술레이만과 치열한 내전을 치르고 있던 무사 첼레비는 술레이만을 꺾은 뒤 술레이만과 동맹을 맺었던 동로마 제국을 공격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제18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이에 마누일 2세는 메흐메트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메흐메트 1세는 즉시 발칸 반도로 출진해 무사를 무너뜨리고 오스만 술탄국의 유일한 술탄이 되었다.

1421년, 아버지 마누일 2세에 의해 공동 황제가 된 뒤 국사를 전담하던 요안니스 8세 무라트 2세와 무스타파의 내전에 개입해 무스타파를 지지했다. 무라트 2세는 무스타파가 이끄는 반란을 진압한 뒤 쳐들어와서 1422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 공격했다.( 제19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이때 튀르크군은 대형 구포를 동원해 성벽을 타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1423년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유린해 그리스인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당하지 않았으나 마누일과 요안니스 8세는 굴욕적인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요안니스 8세는 껍데기만 남은 제국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교황청과 협상해 정교회 가톨릭의 우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통합하고 십자군을 일으켜 오스만 술탄국을 축출하고자 하였다. 1437년에 요안니스와 동방 주교들은 교황 에우제니오 8세에 의해 열린 피렌체-페라라 공의회에 참석했고, 동방 교회에 대한 우위를 확인한 교황은 오스만 술탄국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소집했다. 하지만 이 조건을 알게 된 동방 교회 내부에서 통합 찬성파와 통합 반대판의 극렬한 갈등이 벌어졌다.

헝가리와 폴란드의 주도로 결성된 십자군은 오스만 술탄국으로 쳐들어갔으나, 1444년 9월 20일 바르나 전투에서 투르크군에게 참패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도 십자군에 호응하기 위해 콘스탄티노스가 모레아에서 동로마 제국군을 이끌고 북상했지만 십자군을 물리치고 반격해 온 오스만군에게 쫓겨났고, 뒤쫓아온 오스만군은 코린트 지협을 넘어 모레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돌아갔다. 실의에 빠진 요안니스 8세는 1448년 사망하였고, 동생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새 황제로 즉위했다.

1451년 새 술탄에 오른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을 결심하고 2년간 대군을 준비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도시를 비운다면 에게 해 연안 지대의 황제로 대우해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하자, 술탄은 1453년 4월 2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얼마 안 되는 수비대와 시민들의 협조를 받으며 결사 항전했지만, 5월 29일 끝내 함락당하자 황제의 장식을 전부 떼버린 뒤 적군을 향해 달려들어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은 2206년의 역사를 마감하였고,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삼고 파디샤를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