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23:22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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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초기
1.1.1. 브레즈네프의 국적 및 민족성
1.2. 독소전쟁 시절1.3. 권력의 길에 오르다1.4. 최고지도자 시절
1.4.1. 회색의 시대: 여러모로 무난했던 시대1.4.2. 산업경쟁력 강화 실패와 중동형 경제1.4.3. 일당독재 아래의 점진적 자유화1.4.4. 지방권력 강화1.4.5. 의욕적인 군비확장1.4.6. 대외개입 정책1.4.7. 데탕트 체제의 주역이 되다1.4.8. 중국과의 관계 악화1.4.9. 아프가니스탄 개입: 소련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다1.4.10. 종교정책1.4.11. 심한 자기과시욕
1.5. 말년
2. 진급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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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생애를 작성한 문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F0417-0001-028%2C_Berlin%2C_VII._SED-Parteitag%2C_1.Tag.jpg
1967년 4월 동독 동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사진. 왼쪽은 후임인 유리 안드로포프, 가운데는 동독 에리히 호네커, 오른쪽이 본인.

1.1. 초기

1906년 12월 19일 러시아 제국 카멘스코예(현 우크라이나 카미얀스케)[1]에서 금속 공장 노동자였던 일리야 야코블레비치 브레즈네프(Илья Яковлевич Брежнев)[2]와 어머니 나탈리야 데니소브나 브레즈네바(Наталья Денисовна Брежнева)[3]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기를 우크라이나에서 보내서 그런지 브레즈네프의 러시아어를 들어보면 г를 표준 러시아어처럼 /ɡ/ 발음이 아닌 우크라이나어처럼 /ɦ/로 발음하며, 어말의 в 역시 표준 러시아어처럼 /f/ 발음이 아닌 우크라이나어처럼 /w/로 발음한다. 1971년 신년사.

브레즈네프가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을 때, 소련은 스탈린이 지배했으며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많은 청년 공산당원들이 스탈린주의자로 성장했다. 스탈린은 제정시절부터 내려오던 비볼셰비키 계열 정치 집단 출신 전문직, 관료들인 '스페치(спецы, 스페셜리스트)'들을 대체하기 위해 혁명 이후에 '사회주의적 사고'를 교육받은 젊은 당원, 관료, 전문직 종사자들을 육성했었고, 브레즈네프도 이 정책의 수혜를 입은 '비드비젠치(выдвиженцы, 승진자)' 중 하나였다. 대숙청 옹호론자들은 대숙청이 이런 스페치들을 비드비젠치로 대체하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었다고도 주장하기도 한다.

브레즈네프는 1921년 가족과 함께 러시아 SFSR 쿠르스크로 이사해 15세 때부터 그곳의 제철소에서 근무하였다. 1923년에는 공산당 청년 조직인 콤소몰에 가입하고, 몇 년간 쿠르스크에서 측량사로 일했다. 27년에 결혼한 그는 우랄 지역으로 이동해 측량사로서의 경력을 쌓아 나갔고 1930년에 모스크바 공과 대학에 입학했다가 31년에 드니프로제르진스크 금속 공대에서 금속 공학을 배워 1935년 졸업한 뒤, 우크라이나 동부의 제철소 기사가 되었다.

1935년에는 소련 육군 정치장교 입대하였으며, 1936년 말에는 드니프로제르진스크 야금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4]

1937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간부, 몰도바 공산당 위원회 제1서기, 1939년에는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지구당위원회 서기에 올라 방위산업을 조직하였다.
파일:external/6e2e18908479624997cf406e26e5168a2ccd8dc90b6d9c64513abcdb2a4690ee.jpg
1920년대 후반의 브레즈네프 부부. 부인 빅토리야 브레즈네바(Виктория Петровна Брежнева) 사이에서 아들 유리(Юрий)와 딸 갈리나(Галина)를 두었다.

1.1.1. 브레즈네프의 국적 및 민족성

브레즈네프가 스스로 우크라이나인을 자칭한 기록은 있지만, 이것은 민족적 함의를 갖지 않았다. 혈통적으로 러시아인이라고 해도, 그는 엄연히 우크라이나에서 나고 자랐다. 또한,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사이의 통혼과 이주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흔한 일이라서 이중 정체성을 가지는 일도 많았다.
브레즈네프는 1906년,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직업을 찾아 러시아 제국 남부, 이른바 '노보로시야'(지금의 우크라이나 동남부)로 이주한 쿠르스크 지역 출신의 전직 농민인 산업 노동자 가족에게서 태어났다. 초기 문서에서 브레즈네프는 자신을 '우크라이나인'이라고 칭했지만, 나중에 모스크바로 이주한 후 신분을 '러시아인'으로 바꿨다. 이것은 느슨한 '러시아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신중한 선택이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우크라이나인'이 볼셰비키 국가 분류 체계에서 선호도를 누렸지만 1930년대 이후에는 균형이 '러시아인'으로 바뀌었다. 소련 우크라이나의 일부가 된 '신러시아'(노보 로시야)의 영토는 브레즈네프의 작은 고향이었다.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그의 성격을 전형적으로 쾌활하고 사교적인 '남부 러시아인'으로 보았다. 또한 문화적으로 브레즈네프는 러시아 농민과 완전히 분리된 적이 없다. 그는 농민을 돌보고 농민 가족의 가치를 보존했다.
Brezhnev was born in 1906 in the Russian empire. He came from a family of industrial workers, former peasants from the Kursk region who moved in search of jobs to the southern region of the Russian empire, so-called ‘NewRussia’ (now Ukraine). In his early documents Brezhnev put himself down as ‘Ukrainian’, but later, after he moved to Moscow he changed his identity to ‘Russian’. This was natural for people with a loose ‘Russian’ identity, but it was also a prudent choice: in the 1920s ‘Ukrainians’ enjoyed preferences in the Bolshevik national taxonomy, while after the 1930s the balance became reversed in favour of ‘Russians’. The territory of ‘New Russia’ (Novorossiia) that became part of Soviet Ukraine was Brezhnev’s small homeland; his contemporaries viewed his character as stereotypically ‘southern Russian’ – cheerful and gregarious. Also culturally, Brezhnev never fully separated himself from Russian peasantry. He cared about peasants and preserved peasant family values.
Zubok, Vladislav. "‘Do not think I am soft…’: Leonid Brezhnev." Mental Maps in the Era of Détente and the End of the Cold War 1968–91. Palgrave Macmillan, London, 2015. 7 https://link.springer.com/chapter/10.1057/9781137500960_2

브레즈네프는 1920년대에는 일관되게 본인을 대러시아인(великорос)으로 기록했지만 이후 지역의 이동에 따라 1940년대에는 우크라이나인으로 자칭했다. 1947, 1942, 1942 이 와중에 러시아인으로 자칭하는 기록도 존재한다. 1943 브레즈네프는 일관되게 대러시아인으로 자칭했었지만 나중엔 이동하면서 우크라이나인으로 자칭한 것이었고, 그 와중에도 러시아인으로 자칭하는 기록을 남긴 것이다.

1970년대에 쓴 자서전에서는 본인이 러시아인임을 인정했다.
따라서 민족(혹은 국적)에 따라 나는 러시아인이며 출신은 프롤레타리아이며 유전 야금 학자다. 그것이 내 가계도에 대해 알려진 전부다.
Таким образом, по национальности я русский, по происхождению — коренной пролетарий, потомственный металлург. Вот и все, что известно о моей родословной.

Леонид Ильич Брежнев, "Жизнь по заводскому гудку" (Москва: Издательство политической литературы, 1981), с.7
여기서 национальности는 국적, 국민성으로도 번역된다.
1.민족
2.민족소속
3.국민성, 민족성
출처 : 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 새노한사전
민족(民族); 국적, 국민성, 민족성
출처 : 도서출판 문예림 최신 러시아어-한국어사전
국적
национа́льность;национа́льная принадле́жность; по́дданство; гражда́нство
출처 : 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 새한노사전
국적
1.гражданство
2.национальность (судна)
3.национальный характер;национальные черты
출처 : 국립국어원 한국어-러시아어 학습사전(KORU)
국민성
национальность
출처 : 국립국어원 한국어-러시아어 학습사전(KORU)
검색출처
상단에 인용된 Zubok, Vladislav. "‘Do not think I am soft…’: Leonid Brezhnev."란 논문에 사용된 national taxonomy도 국가 분류로 번역된다. 그리고 소련에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국가가 실존했다. 공문서에 기재된 것만으로는 국적이 기재된건지 민족을 기재한 건지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브레즈네프는 1920년대 시절부터 문서에 일관적으로 ' 대러시아인'으로 기재했었다. 당시 소련은 러시아/우크라이나를 대러시아/ 소러시아라는 식으로 분류하지 않았으므로, 이 표현은 국적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브레즈네프에게 본인이 우크라이나 태생이라는 사실은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비밀이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러시아인 혈통이라서 때문에 자기가 러시아인이라고 말하고 다녔을 뿐, 말투에서는 우크라이나 억양이 확연히 드러났고 브레즈네프도 이걸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당대 소련인들에게 브레즈네프가 우크라이나 출신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Мастер Петя мне ответил:
마스터 페탸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길[5]
«Брэйк зробили у США
"브레이크란 놈은 미국에서 만들어 낸 것이야"[6]
Чтоб ряденски классы у клети
"소비에트의 계층을"
Засадить на уси года.»
"영원히 철창에 가두고자 만들어 낸 것이지"
데데테, 컨베이어(Конвейер, 1987) 노래 영상 (한국어 자막)

소련 특유의 낮은 노동생산성과 경직된 사회를 비판하는 노래인 데데테의 "컨베이어"에서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해당 부분의 "마스터 페탸"는 브레즈네프의 비유로, 보컬 유리 셰프추크는 브레즈네프의 연설을 희화화하며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가 뒤섞인 '혼종' 가사를 사용하고 있다.[7]

사실 공산주의자이자 다민족 국가의 일원이었던 브레즈네프가 러시아인 정체성이든 우크라이나이든 정체성이든 다른 뭔가를 가지고 있었든 현대의 그것과는 같을 리가 없으니 별 의미없다. 굳이 따져보자면 브레즈네프에게 있어서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은 경상도인/충청도인 같은 단순 분류상의 차이였을 가능성이 크다.

1.2. 독소전쟁 시절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일어났고 드네프르페트롭스크 독일 국방군에 점령당했지만, 브레즈네프는 도시의 산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전쟁의 시작과 동시에 정치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 해 10월 브레즈네프는 여단 인민 위원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남부전선군 정치 지도부 차장이 되었다.

1942년 우크라이나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자, 브레즈네프는 캅카스 전선군의 정치 지도부 차장으로서 캅카스에 파견되었다. 1943년 4월 그는 제18군의 정치부장이 되었고, 같은 해 말에 소련군은 주도권을 잡고 반격에 나섰다. 이후 제18군은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의 일부가 되어 우크라이나를 다시 되찾고 서방으로 진격했다.

당시 방면군의 상급 정치 위원은 후에 브레즈네프의 중요 후원자가 되는 니키타 흐루쇼프였다. 브레즈네프는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자, 제4우크라이나전선군 정치 지도부 부장으로서 프라하로 갔다. 브레즈네프가 자체 훈장 수여와 주코프 회고록 조작 등의 행동으로 스스로의 명예를 깎아 먹긴 했지만, 어쨌거나 브레즈네프가 캅카스에서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진군하며 전선에서 활약한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독소 전쟁의 참담한 현장을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브레즈네프는 이 때의 경험으로 인해 전쟁을 기피하는 성격이 되었다. 훗날, 서기장이 된 뒤에도 브레즈네프는 프라하 침공, 아프간 침공 등 중요한 군사적 결정에 있어서 마지막 순간까지 무력 개입이라는 선택지를 꺼리며 데탕트 노선을 유지하려 했다.

1946년 8월, 브레즈네프는 소장 계급을 단 것을 마지막으로 소련군에서 전역했다. 이후에는 전후 재건에 참여했고 드네프르페트롭스크주 지구당위원회의 제1서기가 되었다. 1950년에는 소련 최고회의 의원이 되었으며, 그 해 말에 몰도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취임했다. 몰도바에서 일하면서 주민들의 처참한 삶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말년에 회고록을 집필할 때도 몰도바 사람들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구구절절 언급했다.

브레즈네프는 몰도바인들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공식 기록과 통계상으로는 브레즈네프가 제1서기로 있으면서 몰도바의 상황이 크게 개선된 것으로 나와 있다. 흥미롭게도 브레즈네프 자신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성공했다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또한 통계와 정부 보고서와는 별개로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다는 일부 학자들의 분석도 있다. 1952년, 소련 공산당 19차 당 대회에서 보고를 맡은 그는 이 때 처음으로 스탈린과 대면하게 되는데, 스탈린은 그를 두고 '아주 잘생긴 몰도바인'이라고 총애했다고 한다. 대회 이후, 브레즈네프는 당 중앙위 위원으로 승진했고, 재차 소련 공산당 상무 회의 후보 위원, 당 서기국 서기로 파격 승진하였다.

브레즈네프는 우크라이나, 몰도바, 그리고 카자흐스탄 등에서 만든 인맥을 권력 강화에 많이 이용하였는데, 그들 중에서는 콘스탄틴 체르넨코, 딘무하메드 코나예프, 니콜라이 티호노프도 포함되어 있었다.

1.3. 권력의 길에 오르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사망 직전 브레즈네프를 소련 공산당 상무회의 후보위원으로 임명하는 등 브레즈네프에게 주목하기 시작했지만[8] 그에게 본격적으로 일을 맡기기 전에 스탈린이 1953년 3월에 사망하면서 소련 공산당 상무회가 폐지되고, 보다 작은 정치국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후보위원 자리는 자동으로 취소되었으며 서기국에서도 해임되었다. 대신에 새로 구성된 간부회는 브레즈네프를 해군 정치국장에 임명하였는데 얼마 후 해군성과 육군성이 통합되어 국방성이 되면서 해군 정치부가 사라졌고, 국방성 총정치국 부국장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이에 브레즈네프는 게오르기 말렌코프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이 이제 50살이 되었고 심장마비와 다리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자신을 우크라이나에서 보내 일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흐루쇼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라브렌티 베리야 숙청에도 참가하는 등 브레즈네프는 다시 권력 중심부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1953년 8월, 브레즈네프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953년 9월 전원회의에서 흐루쇼프가 처녀지 개간 사업을 선포하면서 1954년 1월 전원회의에서 카자흐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에 임명되어 말렌코프의 지지자인 제1서기 판텔레이몬 포노마렌코를 보좌하였다. 1954년 2월, 카자흐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전 제1서기 샤야크메토프는 자아비판을 하고 해임되었으며 포노마렌코와 브레즈네프가 카자흐스탄을 장악하였다. 1955년 2월 8일, 포노마렌코의 후원자인 말렌코프와 흐루쇼프와의 대결에서 패배해서 각료회의 의장에서 축출되자 흐루쇼프는 1955년 5월 8일, 포노마렌코를 폴란드 대사로 임명해서 쫓아내고 브레즈네프가 카자흐스탄을 장악하게 했다. 브레즈네프는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개척 사업을 지도했다. 1956년 2월, 브레즈네프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소련 공산당 상무회의 후보위원 겸 서기로서 방위산업, 우주계획, 중공업 및 수도 건설 지휘 임무를 맡았다. 1957년 6월에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이끄는 반당 그룹의 게오르기 말렌코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등이 흐루쇼프와 대치한 당 지도권 싸움에서 흐루쇼프를 지지하였다. 반당 그룹을 배제한 후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의 신임을 받으며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정식 구성원이 되었다.

1960년 브레즈네프는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취임해 명목상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당연히 실권은 소련 장관회의 주석을 겸직한 소련 공산당의 제1서기(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있었지만,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직은 해외여행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는 이때 서유럽의 비싼 의복이나 승용차에 대해 흥미를 느꼈는데, 이런 취향은 한참 뒤에야 유명하게 되었다.


1961년, 상무회 주석 시절 생환한 유리 가가린과 포옹하고 입맞춤하는 브레즈네프.[9] 조국의 영광스러운 순간을 보고 감격에 차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인상적이다.

1962년까지 흐루쇼프의 당 지도자로서의 지위는 튼튼했지만, 그의 건강 악화와 동시에 나타난 지도력 저하가 다른 지도진의 신뢰를 무너뜨려 그의 정치 기반이 흔들렸고,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 문제가 한층 더 심화돼 흐루쇼프의 지도력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표면상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에 충실했지만 알렉세이 코시긴,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알렉산드르 셸레핀의 권유로 1963년 흐루쇼프의 추방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다. 흐루쇼프도 낌새를 눈치채었지만 스탈린처럼 브레즈네프를 제거하기는 커녕 소련 지도부에 또 다른 혼란이 발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순순히 물러나기로 했다. 결국 흐루쇼프는 1964년 10월 13일에 열린 중앙위원회 총회의 결정으로 실각하였고, 브레즈네프는 소련 공산당 제1서기, 코시긴은 소련 장관회의 주석에 올랐다. 니콜라이 포드고르니는 은퇴를 맞이한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후임으로 1965년부터 1977년까지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취임했는데, 이 시기까지를 삼두정치 시기라 칭하기도 한다. 원래는 셸레핀까지 합쳐서 사두정치였으나 셸레핀이 제일 먼저 축출돼서 소련 직총중앙위원회로 좌천되면서 널리 알려진 브레즈네프-코시긴-포드고르니 체제가 자리잡히게 된다.

1.4. 최고지도자 시절

1.4.1. 회색의 시대: 여러모로 무난했던 시대


1970년대 브레즈네프 시기 당시 모스크바. 대규모 도시 계획을 통해 확장되고 생활 여건도 개선되면서 1970년대 이후 인구 700만이 넘게 되었다.

서구 역사가들은 그의 집권기를 회색 시대 혹은 침체 시대(era of stagnation)라고 부른다. 이는 소련 초기처럼 사람 목숨이 파리처럼 죽어나가는 이나 기근, 무자비한 정치 탄압도 없었고, 소련 말기부터 해체 이후인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까지 이어지는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휘몰아친 격동적인 혼란 멸망도 없었기 때문. 전체적으로 사회가 안정되면서 사람들의 삶도 편안해졌지만, 동시에 전체적으로 침체되어 가는 거대한 관료주의 체제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10]

브레즈네프의 집권기는 이후 고르바초프 당시 경제난도 없었고, 스탈린식의 공포정치도 없었기 때문에 이전과 이후를 모두 겪어본 러시아인들의 말에 따르면 '이 가혹한 땅에 문명이 들어선 이래' 가장 평화롭고 살기 좋았던 시대, 여러모로 소련 인민들에게는 무난한 시대였다.

스탈린 시대는 중공업 몰빵으로 경제 성장률은 높았지만 국민 생활 수준은 열악했는데 흐루쇼프 시대부터 경공업에도 힘을 쏟아서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소련에 TV와 세탁기, 라디오[11] 같은 가전 제품이 널리 보급되었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소련 국민의 생활 수준은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되었지만 과오도 있는데 의료 복지 개선과 음주 규제를 하지 않아 국민 건강 수준이 악화된 것이다.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흐루쇼프 시대 말기까지 소련 국민의 평균 수명 증가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러시아 SFSR의 1948년 평균 수명은 남자 47세, 여자 56세였는데 1964년 평균 수명은 남자 64.89세[12], 여자 73.58세로 선진국 수준 턱밑까지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남자 평균 수명은 3세나 감소했고 여자 평균 수명은 크게 감소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증가하지 않고 제자리걸음이었다. 이후 1980년대 중반 고르바초프가 금주법을 시행하자 남자 평균 수명이 흐루쇼프 시대 말기 수준으로 회복되었으나, 1987년 64.83세에서 남자 평균 수명이 더 증가하지 않아 1964년 64.89세 기록을 경신하지는 못했다.

흐루쇼프 실각후 서방은 브레즈네프가 스탈린식 통치를 펼쳤다는 식으로 선전을 펼쳤고, 이것이 한국에 무비판적으로 전해져서 그렇게 알고 있던 한국인이 많지만, 실제로는 흐루쇼프 시대의 분위기 자체는 계속 이어받았기 때문에 대놓고 반정부나 반사상 활동을 벌이지만 않는다면 어느 정도의 자유는 보장되었고[13], 경제 성장 둔화와 별개로 사람들의 삶의 질 자체는 상당히 나아졌다.[14] 게다가 이후에 소련이 골골거리다 해체 이후 탄생한 러시아가 쪽박을 차면서 자연히 브레즈네프 시대에 향수가 일고 평가가 급속히 올라가게 된 감도 있다. 게다가 이때 당내 의사 결정 구조도 당내 여러 세력 간 합의에 따른 집단 지도 체제로 귀결되었고 과거 같은 1인 독재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당내에 팽배했는데, 브레즈네프는 이를 알고는 나중에 조금씩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1977년에는 드디어 절대권력자가 되었다.[15] 정작 이 시점부터 건강 문제로 리더십 공백이 생긴 것을 보자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1.4.2. 산업경쟁력 강화 실패와 중동형 경제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와는 반대로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난하거나 벼랑 끝 전술을 하지 않고, 미국과의 갈등 완화를 위해 데탕트를 실행하여 과거 핵전쟁 위기가 만연했던 흐루쇼프 시대보다 훨씬 평화로워졌으며, 비록 군사력의 증강으로 국방비가 GNP의 12%를 넘었으나, 그렇다고 미국과의 심한 갈등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서방 국가와의 무역 또한 늘어났다.[16] 그러나 이러한 무역의 상당수는 소련의 석유나 각종 자원을 서방의 완제품과 소비재로 교환하는 것이라서, 전형적인 후진국형 무역 구조였다. 무엇보다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은 대대적인 제조업 경쟁력 강화에 손을 댄 것이 아니라, 손쉬운 자원팔이로 경제를 운영하다 보니 나중에 가면 소련 제조업의 경쟁력은 서방보다 점점 떨어졌고, 이는 양과 질 모두 형편없는 소비재라는 결과로 돌아와 인민들의 불만을 불렀다. 특히 서방과의 무역을 통해 들여온 질 좋은 수입산 소비재와의 비교가 이런 위화감을 부채질했다고 한다.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고유가 시대에서 1980년대 말 저유가 시대가 되자 석유 수출에 의존하던 소련 경제는 박살이 나게 되고 결과적으로 소련의 해체를 불렀다. 그리고 이는 2020년대인 현재에 와서도 러시아가 중동형 경제로 굴러가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훗날 그렇게 될 줄 소련 내에서 아무도 몰랐고, 그저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쉬운 길을 택한 것이다.

이 때 소련의 소비재의 질이 어느정도였냐면 겨우 최빈국에서 벗어난 개발도상국에 불과했던 당시의 한국이 1970년대 초 부터 트랜지스터를 활용하는 텔레비전을 내놓았을 때 소련은 여전히 진공관을 사용하는 텔레비전이 많았었다.[17] 게다가 라다 지굴리나, 모스크비치 2140 같은 승용차를 구매하는 계약을 체결했으면 이후 차량을 수령하기까지 몇 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었다. 노멘클라투라와 같은 공산당 고위간부들은 서방제 소비재를 즐기고 있었다.

이외에도 흐루쇼프 시대부터 준비하던 코시긴 - 리베르만 개혁을 단행해 경제 체제 전반을 개선하려 했으나, 커다란 성과 만큼이나 부작용도 심각해서 개혁을 추진한지 5년이 되는 1970년에 중단해 버렸다. 1970년대 들어서는 경제성장률이 5~6% 안팎에서 3%로 급속히 저하되었고, 관료제의 폐해가 적나라해졌으며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가 심각해졌지만 이를 막기 위한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이런 관료주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게 바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이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고르바초프가 급진적 개혁을 밀어붙이는 계기가 된다.

소련은 스탈린 치하에서 1930년대 신화적인 공업화를 이뤄냈고, 1940년대는 독소전쟁 승리를 거두었으며, 1950년대는 전후복구로 아주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1960년대까지도 경제성장률이 5~6%대로 어느정도 나왔지만 1960년대 초반부터 점차 성장률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조짐을 보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개혁이 있어야 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소련 내에서 원리주의적 공산주의의 입김이 강했기 때문에,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데 저항이 심했다.

흐루쇼프는 소련 지배층이 받아들일 수 없는 충동적인 정치[18]를 하다가 결국 지도층의 반발을 사서 실각했고,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의 예를 봐서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전면적인 개혁을 하는데는 흐루쇼프라는 반면교사가 큰 걸림돌이었다.

그나마 브레즈네프 재임 초기인 1960년대에는 어느정도 성장률이 유지되었지만 1970년대 들어서는 성장률이 급속히 하락하여 3% 안팎을 기록하는데 그쳤고, 소련시민들의 구매력은 높아지기는 했지만 지하경제가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물론 경기 침체를 극복하려고한 경제개혁안은 계획되어있기는 했지만 이보다 쉬운 길이 갑자기 열렸으니 그것은 바로 1970년대 초반에 일어난 오일 쇼크였다.

브레즈네프는 오일 쇼크 때 소련이 풍부하게 가지고 있던 자원, 즉 석유에 주목했다. 그래서 자원을 서방에 내다 팔고, 그 돈으로 인민의 복지를 향상한 것이다. 이것은 개혁보다는 쉬운 길이었지만, 나중에 가면 소련에 독이 되어 자원의 저주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소련은 기술이나 교육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에 더 나은 길이 있었지만, 이념적 경직성 및 쉬운 길로만 가다보니 이렇게 제조업을 등한시한 것이다.[19] 브레즈네프의 전성기인 1970년대는 고유가 때문에 소련은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였고 인민의 삶도 서방 국가들에 맞먹을 정도로 좋아졌지만[20], 앞으로의 파국을 내재한 풍요로움이라는 점에서 청나라 건륭제 말기가 연상될 정도로 상당히 비슷한 시대였다.

어쨌든 고유가 때문에 이렇게 경제를 꾸리는 것은 쉽고도 좋은 성과가 있었다. 이것은 사실 소련의 뒤를 이은 러시아도 마찬가지 문제였고, 저유가 시절인 1980-90년대, 2010년대 내내 침체를 하다가 고유가가 된 2000년대, 2020년대 갑자기 경제가 좋아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문제는 그가 사망한 이후 1980년대 들어 유가가 떨어지던 시기가 되면서 유가로 경제를 꾸리던 소련경제는 위기에 접어 드는데, 이 시기를 맡은 브레즈네프의 후임자들 세 명이 모두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소련의 불운이었다. 안드로포프, 체르넨코는 건강이 문제가 있어서 최고권좌에 앉은지 1,2년만에 단명해 개혁은 엄두도 못냈고, 마지막으로는 방향은 옳았을지 몰라도 당 장악력이나 리더십에 문제가 있던 고르바초프가 최고 권좌에 올라서[21] 개혁을 추진하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있었던 리더십 공백 또한 소련의 불운이라고 할수 있다.

1.4.3. 일당독재 아래의 점진적 자유화

전임자 흐루쇼프는 소련을 지배하던 스탈린 우상화를 종식하고, 자유화를 이끌었다.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를 실각시키고 집권한만큼, "흐루쇼프 해빙기"의 여러 자유화 조치를 폐지하기는 했으나, 스탈린식 공포정치로는 결코 돌아가지 않았고, 흐루쇼프가 지향한 자유화는 계속 이어나갔다.

스탈린 시절에는 파벌 싸움에서 지면 암살당하든 사형당하든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지만, 흐루쇼프 때부터 이것이 점차 순화되어 브레즈네프 시대에 이르러서는 파벌 싸움에서 진다고 해도 평당원이나 야인으로 강등만 되어 연금을 받으며 집에서 유유자적할 만큼 온건해졌다. 한 역사가는 이를 “정치가들의 파벌 싸움이 피비린내 자욱한, 목숨을 건 치열한 결투에서 신사들끼리의 스포츠 게임이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브레즈네프 시절에는 권력투쟁이 상당히 온건화되어 실각하더라도 그저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실각이나 파면정도에 그쳤다. 실각이나 하야한 사람은 한직으로 가거나 연금을 받는 은퇴자로 살아갔다. 실각해서 권력을 잃은 고관들의 연봉은 현직에 준할정도로 꽤 높았다. 그러니까 권력투쟁이 있었다고 해도 패배한 사람은 스탈린 시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고문당하지 않았다.[22] 코시긴이나 포드고르니와 같이 브레즈네프와 3두체제를 이루다가 야인이 된 인물들은 그냥 실각 수준이었으며, 모스크바에서 유유자적하며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들이 실제로 곤경을 겪은 것은 브레즈네프 시기가 아니라 소련체제의 위기로 연금이 끊기는 1980년대 말기였다.

물론 브레즈네프 자유화는 서방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반체제적인 언론이나 출판물은 금지되었고, 의회 민주주의나 다당제를 주장하는 운동가들은 탄압을 받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스탈린 시절처럼 고문, 처형, 투옥되는 게 아니라 거주지 이전조치, 정신병원 감금에 그쳤다. 그것도 안되면 아예 서방국가로 추방했다.

다만 브레즈네프가 본의 아니게 오명을 산것은 소련 라디오텔레비전 위원회 의장(국영방송사 사장)인 세르게이 라핀(Сергей Лапин)과 후에 서기장을 지내게 된 유리 안드로포프가 심의와 검열을 강화하면서 소련 연예계가 그 영향을 받았기때문이다. 세르게이 라핀이 1970년부터 1985년까지 15년 동안 소련 라디오텔레비전 위원회 의장직을 맡을 동안 이념적 순수성을 강화해야된다면서 생방송 프로그램을 축소시키고, 남자연예인이 장발을 하거나 수염을 기르면 방송출연을 거부시키거나, 여자 연예인들이 바지를 입은채 방송 출연하는것을 금지시키거나, 마이크에 대놓고 입을 들이내는것이 펠라차오를 하는것이 연상된다고 징계를 내리는 등 자신의 보수적인 성향을 방송심의에 노골적으로 반영하였고, 또한 유대인 예술가들을 방송출연에서 배제시키는 등의 행동도 일삼았기 때문에 그런 평가가 나왔던 것이다. 당시 서구권에서 68혁명의 영향을 한창 받던 시절인데다가 미국과 영국이 정치적으로 보수화된 1980년대에도 방송 심의만큼은 케이블 방송 발달의 영향으로 그렇게 보수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이 상황에서 소련은 과거의 방송심의기준을 고수하다보니 불평이 나오는것이 당연지사였다. 그렇지만 라핀이 브레즈네프의 취향에는 잘부합했기 때문에 의장으로 장수할수는 있었다.

애플바움의 논픽션 〈굴라그〉에 따르면 이때 당시도 굴라크 체제는 변함없이 가동되었지만, 스탈린 시대와는 다르게 반체제 유명 인사가 굴라크에 수감되거나, 좌천되어 노동현장에 떨어지더라도 서구의 지속적인 관심과 구명 요청 및 생사확인이 가능했던 시대다. 굴라크 대신에 정신병원에 대신 가둬넣었고 많은 반체제 인사들은 정신병자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주기도 했다. 또는 컨테이너에서 살게 하는 모욕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굴라크에 가는 사람들은 정치범이 아니라 노동을 통한 교화라는 명목으로 파렴치범이 대상이었다. 위험분자에 대한 감시는 계속되었으며, 시위와 같이 직접 행동에 나서면 연금하거나 근무지를 북극권 혹은 중앙아시아로 보내는 방법으로 간접적인 탄압을 했다.

그리고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 집권기에 동네북 취급이었던 스탈린을 집권 초기에 어느 정도 재평가 시도를 하였다. 1966년에는 자신의 직함인 제1서기를 스탈린의 직함인 서기장으로 다시 바꾸었고, 1970년에는 스탈린의 무덤에 스탈린의 흉상을 세워서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된 다른 소련 지도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당시는 스탈린 시절 피해자들이 아직 멀쩡히 살아 있던 시절이고[23], 1957년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 주도하에 말렌코프, 불가닌, 보로실로프, 사부로프, 페르부힌, 셰필로프 등 인물들이 흐루쇼프에게 도전하다 숙청당해 버리는 등의 이유로 스탈린주의적인 인물들이 사라졌으므로 정치국 내 입지를 다지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브레즈네프는 스탈린 복권 시도로 생기는 강한 반동에 도전하는 것이 정치적 큰 무리라 판단하고 포기하게 되었다.[24] 이로 인해 흐루쇼프 시절 폐기되었던 스탈린식 공산주의 발전은 브레즈네프 시기에도 여전히 불가능해 졌다. 그리하여 계속해서 고식적 공산주의 전진만 이어나가게 되며, 소련은 공산주의에의 도달이 멀어지며 점점 침체되어 간다.[25] 그리하여 스탈린 재평가는 실패하여 스탈린 시절 스탈린그라드라 불리던 볼고그라드의 명칭은 브레즈네프 시기에 계속 유지되었고, 1977년에 소련 국가의 가사를 다시 제정했을 때 가사에 스탈린의 이름이 빠졌다. 또한 미국으로 망명해 있던 스탈린의 친딸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가 회고록 등을 발간하고 다녀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또한 위에서 언급된 브레즈네프 본인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듯 흐루쇼프를 탐탁지 않게 여긴 당내 보수파들이 옹립한 인물이었음에도 브레즈네프의 집권 기간은 오히려 흐루쇼프식 수정이 더 확장되어 가는 시기였으며 실제 정책에서 흐루쇼프식 수정이 취소될 수 없었다. 이는 흐루쇼프식 수정 이후를 "현실사회주의"라고 칭했던 것과 같이 당시의 소련 관료들이 보기에도 스탈린 집권 당시에 통용되었던 형태의 이념에는 분명히 비현실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소련의 굴라크 문제는 흐루쇼프가 집권하던 시기에도 겉으로만 해결했다고 선전했을 뿐 실제로는 다소 형태만 바뀌어서 그대로 존속했으나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굴라크들이 일부 철거되는 등 실질적인 조치가 이루어졌다.

1.4.4. 지방권력 강화

전입자 흐루쇼프는 여러 개혁조치를 실시했고, 브레즈네프 집권 시절에 흐루쇼프의 여러 조치가 폐지되지만, 지방분권 만큼은 계속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브레즈네프 통치 기간에는 전에 비해서 서기장과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졌다.

스탈린 이래로 흐루쇼프 때까지는 서기장과 중앙정부가 전 연방을 통제했다면 브레즈네프 시대는 사실상 구성 공화국 또는 자치 공화국, 주의 서기장들[26]이 상당한 실권을 가졌다. 이는 브레즈네프 본인의 유약함과 서서히 커지던 민족주의의 발흥 때문이었다. 게다가 브레즈네프 통치 말년에 이르면 명목상 본인이 소련 공산당 서기장,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등의 직함을 가진 최고권력자였지만 현실은 뒷방 노인네로서 안드로포프, 수슬로프, 체르넨코, 우스티노프, 그로미코 등의 주요 서기국원들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한편으로 소련의 경제가 현대화되는 시기에 이렇듯 급작스러운 지방 분권이 일어나면서 카자흐스탄이나 키르기스스탄 같은 공화국들은 이 시기에도 유목민의 비율이 거의 낮아지지 않아 소련 해체 이후에도 생활상에 큰 변화를 겪지 못했다. 그나마 카자흐스탄은 21세기 이후 알마티의 규모가 커지고 아스타나가 신설되면서 어느 정도 변화가 발생했으나 키르기스스탄은 현재까지도 유목민의 비율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브레즈네프 집권 이후 더 이상 중앙정부에서 지역 개발에 직접 관여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1.4.5. 의욕적인 군비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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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보듯이 브레즈네프 집권 말기인 1970년대 후반에는 소련의 국방비가 오히려 미국을 앞섰다.

흐루쇼프는 벼랑 끝 전술 쿠바 미사일 위기를 일으켜서 소련과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 넣었지만, 신중한 성격의 브레즈네프는 이와 반대로 나갔다. 아무래도 소련은 국력이 미국보다 뒤쳐진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여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립은 피해가면서도, 조용하고 착실하게 소련의 군비를 확장했다. 그리하여 소련은 흐루쇼프 시절에 미국에 비해 열세이던 핵탄두 수가 브레즈네프 시절부터 역전했고, 1만기가 넘는 탄두에 수천 기의 소련 ICBM, SLBM이 미국 및 서방의 도시들을 겨누게 되었다. 소련의 ICBM들은 1970년대가 들어 더욱 정밀해졌고 델타급 잠수함들은 나토의 대잠망을 돌파하지 않고도 소련 연안에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게 되어서 미국과 확실히 공멸할 수 있는 수준의 핵전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여기에 미국의 최신예 무기에 버금가는 소련제 재래식 무기들도 속속 개발되어, 소련군의 전력은 그의 치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소련 해군이 세계 2위 대양해군으로 부상하게 된 것도 브레즈네프 정권 시절이었다.

브레즈네프 시기 개발된 재래식 무기체계 몇 가지를 살펴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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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중동전쟁 당시 서방세계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2K12 쿠프 지대공 미사일. 당시 미국제 전투기의 RWR에 전혀 잡히지 않는 레이더파를 가지고 있었기에 미공군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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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권에서 냉전의 상징으로 알려진 MiG-25 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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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세계에서 경계하던 소련의 신형 T-72 전차. 1973년 실전배치 이후 단 몇 년만에 자그마치 수천대가 양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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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24 공격헬기.

미국과 우주에서 돈을 뿌리며 우주 경쟁을 펼치던 우주개발에서도 브레즈네프의 성격이 드러나는데, 아폴로 11호로 달에 미국이 먼저 착륙하자, 브레즈네프는 돈지랄로 간주되던 달착륙 계획을 미련없이 취소하고, 조용하지만 좀더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우주개발에 방향을 틀게 된다. 그래서 소련은 달 탐험 대신 우주정거장 건설로 방향을 틀어 1971년에 살류트 우주정거장을 발사하였고, 우주정거장 운용의 노하우를 축적하여 현재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다. ISS의 운용 노하우도 상당부분 살류트- 미르를 운용해 본 경험이 있던 러시아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런 면을 보면 브레즈네프는 충동적이고 요란하던 흐루쇼프와는 달리 조용하면서도 신중하고 집요하게 목표를 추진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군비 확장은 소련 경제에 있어서 별다른 도움은 되지 못했다. 두 차례의 오일 쇼크로 거액의 돈을 벌게 된 소련이었지만 브레즈네프는 이러한 막대한 수익의 상당수를 소련의 경제와 인민들의 생활과는 별 관계가 없는 군사력에 집중 투자해버리는 바람에 군대는 비대해졌고 결과적으로 경제를 좀먹게 되었다. 특히 소비재 그리고 컴퓨터와 같은 첨단기술에 대한 투자도 지지부진해졌다.[27]

한편 브레즈네프의 군비 증강은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에게 있어서 깊은 위기로 다가오기도 하였다. 이때 소련이 SS-20 세이버 중거리 탄도 미사일 Tu-22M 중거리 폭격기를[28] 1970년대 부터 실전배치에 들어갔다. 문제는 해당 시스템들이 ICBM과 SLBM, 장거리 폭격기를 규제하는 전략무기제한협정의 제한을 전혀 받지 않아서 안보 위기로 이어졌다.(일명 유로미사일 위기(Euromissile Crisis)) 서유럽 국가들은 자국 이기주의로 비춰질 수도 있는 미국의 핵협상을 비판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이후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기에 서유럽 국가들의 안보적 경각심을 해소하기 위해 서독과 이탈리아에 퍼싱 II 탄도미사일이 배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군비 확장의 책임을 브레즈네프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미국도 비슷한 논리로 계속 군비를 확장했고, 양대 초강대국은 서로를 불신했기 때문에 이렇게 군비에 몰빵한 것이다. 브레즈네프 시기 군비확장의 가장 큰 이유는 흐루쇼프의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해 군사력에 대한 엄청난 트라우마가 정치국을 휩쓴 것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1.4.6. 대외개입 정책

브레즈네프는 대외적으로는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동유럽에서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진행되던 프라하의 봄 소련군 탱크로 깔아뭉개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선언하였다. 다만 브레즈네프는 프라하의 봄 당시 군사 개입을 최대한 회피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그는 이 사태를 두고 "나는 온화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세게 때릴 수 있는데 그런 다음에는 사흘을 토할 것 같아요."라고 언급했다.[29] 하지만 모든 방법을 동원했음에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해결을 못하며 사태가 악화되자 어쩔 수 없이 군사개입을 하고 만다. 하지만 이는 브레즈네프에게 값진 경험을 하게 해주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성공적 마무리는 그에게 큰 정치적 승리를 안겨준다.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은 1980년부터 1981년 말까지 소련 지도부를 고통스럽게 했었다. 소련은 프라하의 봄 때처럼 무력개입을 해서 이 사태를 끝내고 싶었지만 쇠약해졌음에도 무력을 혐오한 브레즈네프가 완강하게 거부한 것. 브레즈네프는 데탕트의 희망을 여전히 놓지 못해서 폴란드 침공이 데탕트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여겼고, 정치국원들 역시 서기장의 반대를 돌파할 만한 뾰족한 수가 없었을 뿐더러 당시 소련의 경제 사정상 침공할 여력이 없었다. 이에 정치국에서는 협박을 하기로 결심하고 수십만이 넘는 대규모의 바르샤바 조약군을 동원해 '자파드-81' 대규모 군사 훈련을 하며 폴란드를 프라하의 봄과 마찬가지로 폴란드를 침공할 것 처럼 연출했다.[30] 그와 함께 폴란드에 40억 달러의 막대한 지원을 하여 폴란드 인민들을 달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폴란드 경제는 쇠퇴하며 반소감정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렇게 연대노조는 계속되었지만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결국 소련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981년 말 계엄령을 선포하며 이 사태가 진정되었다. 그동안 소련은 15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폴란드에 쏟아 부었다.[31]

베트남 전쟁에 개입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브레즈네프 집권 시기에 소련의 원조를 받은 북베트남 남베트남을 멸망시키고 베트남 무력 통일했다. 일부에서는 미국의 패배를 남쪽에서 소모전만 벌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북베트남을 침공해서 전복했어야 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미국이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소련과 중국이 뒤에 있었기 때문. 브레즈네프는 북베트남에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는 한편 미군이 북위 17도선, 즉 원래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국경선 위로 진격할 경우 소련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 경고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소련과 앙숙이던 마오쩌둥도 지속적으로 베트남에 군사원조를 했고, 확전되면 백만 대군을 투입하겠다고 호언하고 있었다. 미국은 공산게릴라에 시달리던 남베트남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참전했는데 더 나아가 북베트남을 침공한다는 것은 명분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북베트남을 공격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성과 없는 소모전만 벌이게 되었고, 결국 철수로 이어졌다. 미국이 북베트남을 본격적으로 침공했으면 소련+중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져 3차 대전 핵전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북폭도 중지했고, 결과적으로 피해만 입은 채 아무 소득도 없이 물러나게 된다. 거기에 중일관계 정상화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키프로스 전쟁에서도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를 이간질해서 북키프로스 건국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브레즈네프 치하의 소련은 앙골라 내전에 개입했지만, 브레즈네프는 처음에는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쿠바군이 정치국의 동의 없이 앙골라 내전에 개입한 것을 두고, 정치국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앙골라 내전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득세했다. 첫째로 쿠바군이 앙골라에서 패배를 소련이 관망하게 되면 쿠바에 대한 영향력이 상실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아공이 내전에 개입하면서 소련이 개입할 정당성이 확보된 상태였다. 그리고 몇 년 전 미국의 개입으로 붕괴된 칠레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도 문제가 되었다. 결국 격론 끝에 정치국은 이 내전에 개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개입으로 인해 아프리카 남부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늘었지만 쇠퇴하고 있는 데탕트가 더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제4차 중동전쟁 시기는 브레즈네프가 그토록 이루려 한 데탕트가 빛나는 시기였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소련과 미국은 이 전쟁에 대해 서로의 신뢰를 확인시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브레즈네프는 중동 상황이 악화되고 있으며 소련은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었고, 닉슨은 이집트에서 소련의 군사고문단 17000명이 쫓겨나는 것에 대해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의 의도를 모르겠으며 미국은 아무 연관이 없다는 해명을 했다. 또한 전쟁 발발 후 브레즈네프는 중동 전쟁에 개입을 주장하는 코시긴과 포드고르니를 정치국에서 축출해가며 미국과 대립을 피하려고 했다. 그 결과 이 위험한 전쟁은 소-미 데탕트를 후퇴시키지 않았으며 소련, 미국의 데탕트를 더욱 공고히 하게되는 계기가 될 수 있어보였다.[32]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시기를 절정으로 데탕트는 쇠퇴해간다. 당시 브레즈네프의 데탕트 최대의 친구였던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몰렸다가 결국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그 결과 닉슨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미국 내 데탕트 세력이 함께 박살나버렸기 때문.

브레즈네프는 아메리카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에는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의 시선으로 본 아메리카 대륙은 미국의 영역이었다. 남의 영역에 굳이 손을 대봐야 소-미 대립으로 이어질 테고, 그러면 데탕트 외교에 치명적인 방해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중남미에서의 각종 사회주의 세력들은 소련의 지원을 제대로 못 받아 미국의 지원을 받는 친미, 반공 세력에게 무참히 패배하게 되었다. 이 시기 브라질의 사회주의 성향 대통령인 주앙 굴라르가 집권하자 카스텔루 브랑쿠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으며,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사회주의적인 후안 에밀리오 보스크가 집권하자 미군이 직접 개입해서 친미 정부로 바꾸고, 칠레의 사회주의적인 살바도르 아옌데의 정부를 뒤엎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집권했으며, 볼리비아에서는 체 게바라와 그의 동료들을 살해하였다. 하지만 데탕트를 위시한 브레즈네프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릴 의사가 없어서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은 중남미의 사회주의 정부에게 대외원조적 형태의 차관지원 정도로 끝냈다.[33] 그래서 브레즈네프 시기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전횡에 고통을 받은 것은 브레즈네프식 데탕트 외교의 과오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데탕트 체계가 붕괴되고 안드로포프 시기가 돼서야 멈춰서 당시 소련은 미국의 전횡에 적극적인 비난을 가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1983년에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에 대한 반발이다.

그리고 소련과 함께 공산권 양대 강대국인 중국과 공산권의 지도자 위치를 놓고 대립하여 중소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으며, 1969년에는 우수리 강 유역의 다만스키 섬(중국명 전바오 섬)에서 양국 군대 간의 무력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중국-소련 국경분쟁 항목을 참조.

이처럼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은 세계에 소련의 영향권을 확장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게 1980년대가 되면 무려 세계 69개국의 나라들을 지원했지만 이 지원들은 당연하게도 국내 경제에 큰 부담만 되어 돌아왔으며 국제적 영향력은 그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점점 후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 브레즈네프는 이 문제를 풀만큼의 건강하지 않았으며 그 후임 자들 또한 마찬가지일 예정이었다.

1.4.7. 데탕트 체제의 주역이 되다

"브레즈네프는 고르바초프로의 이행에 필수적이었다. 브레즈네프는 고르바초프가 성취한 것을 도입했다. 브레즈네프는 세계평화의 자산이었다."
에곤 바르[34]
"그는 선의를 갖고 행동했지만, 상대의 속임수에 굴복하지는 않았고 조금이지만 정중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는 항상 재치있는 농담을 통해 긴장감을 해소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브레즈네프는 공식적인 오찬 회동중에도 기꺼이 비공식적인 대화를 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출처]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
"만사가 잘 되고 있습니다. 결국 승리하는 세력은 전쟁 세력이 아니라 평화 세력입니다."[36]

군비를 늘린 행보와 대리전을 통해 미국을 곳곳에서 괴롭힌 것과 별개로 미국, 서방 세계와 대립을 완화시키는데 주력했고, 실제로도 그는 서방세계와 정면대립은 피하려 했다. 이는 브레즈네프가 독소전 시기 사단장급 정치인민위원으로서 호된 전투를 직접 경험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캅카스부터 시작해 카르파티아 산맥에 이르는 긴 행군을 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본 그는 전쟁에서는 설령 이기더라도 그 대가가 훨씬 크다는 것을 확고히 믿게 되었다.[37] 이런 브레즈네프의 시각에 흐루쇼프 벼랑 끝 전술과 위기도발 행위가 좋게 보일 리 없었고, 이를 극복하고 세계평화를 위한 토대를 확고히 구축하는 것이 브레즈네프 대외 정책의 주요 동기가 된다. 그로미코의 증언에서 볼 수 있듯이 공식적인 외교 석상에서 거침없고 호탕한 언사로 서방세계를 압박하길 즐겨했던 흐루쇼프와 달리 브레즈네프는 정중한 태도로 상대방의 호감을 사도록 노력했고 그 덕에 서방과의 대립을 완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와 여러 번 정상회담을 거치며 서방과 동구권의 긴장 완화에 주력했다.

당시 미국과 서방은 균열과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이는 소련도 마찬가지여서 프라하의 봄 중소국경분쟁 그리고 소련의 경기 침체로 인해 니키타 흐루쇼프 처럼 공격적인 대서방 외교를 취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브레즈네프도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38] 그렇기에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과 함께 냉전시대 데탕트 체제의 주역으로써 활동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미국 정상과의 관계'에서 서술. 이런 해빙무드 덕에 서방과의 무역도 늘어났고, 반미 선전이 넘쳐났던 소련 뉴스들은 그 자취를 감추고 미국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들이 나왔으며, 서방 문화에 대한 제재도 풀어서 인민들은 미국 팝과 비틀스의 노래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화기애애한 두 정상을 보며 사람들은 냉전 체제가 머지 않아 종식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1974년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몰락하면서 미국 내 반데탕트 세력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닉슨이 사임하기 얼마 전 닉슨이 브레즈네프에게 소-미 독트린을 통해 세계평화를 구축하자는 황당한 제안을 했다.[39]

그럼에도 브레즈네프가 서방과의 데탕트에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쏟아부은 결과 1975년 8월 1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체결된 헬싱키 협정에 다른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과 함께 참가해 서명할 수 있게 되었다. 헬싱키 협정에 인권 보장과 같은 소련 체제에 부담이 되는 조약 내용도 있었지만 브레즈네프는 그보단 양대 초강대국으로써의 위상을 전세계에 알리는 것이 자국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련은 '내정 불간섭'이라는 조항을 근거로 공산주의 체제 내에 대한 서방 세계의 개입을 차단하는 것으로 활용했으며[40] '영토 보전' 조항을 근거로 발트 3국을 자국에 종속시킨 것이 합법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41]

요약하자면 '인권 존중'과 같은 소련 체제에 있어서 마이너스 요소가 있는 협정임에도 브레즈네프 자신의 정치적 자산 그리고 소련의 명분을 위해 헬싱키 협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명시한 헬싱키 협정에 참여한 덕에 서방과 동구권의 긴장은 완회되었고 브레즈네프는 자신의 정치적 치적이 마련되었다고 기뻐했다. 이후 1977년, 프랑스를 방문해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국제 긴장상태 완화와 핵무기의 확산을 방지하자는데 양국이 공감대를 가졌고 성공적인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데탕트 체제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 내부에서는 점점 반체제 운동이 되살아나며 균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1977년, 미국에 지미 카터 행정부가 새로 들어선 이후 한동안 개선되던 미소간 관계는 다시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다. 지미 카터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은 폴란드 출신인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였는데, 러시아가 폴란드에 자행한 탄압과 폭거의 역사를 경험해서 그런지 대소 강경파였고 인권을 강조하던 지미 카터도 소련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브레즈네프가 애써 구상한 초강대국 데탕트 체제는 점점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 브레즈네프도 1978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미국 상원의원 사절단에게 핵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미국의 대소 강경파에게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 그리고 앞선 균열들은 애들 장난으로 보일 정도의 초대형 사고가 터져버린다.

1.4.8. 중국과의 관계 악화

브레즈네프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데탕트 체제의 주역이 되었지만 흐루쇼프 시절부터 악화되던 중소관계는 브레즈네프의 집권기에 개선되지 못했다. 흐루쇼프 실각 직후 소련을 방문한 저우언라이에게 말리놉스키가 우리가 흐루쇼프를 조졌듯이 당신네도 마오쩌둥을 조져야 한다고 술에 취해서 망언을 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고, 브레즈네프가 직접 저우언라이에게 사과했음에도 중국은 요지부동이었다. 마오쩌둥은 흐루쇼프를 대단히 싫어했지만 그가 부하들 손에 쫓겨난 것에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류사오치가 자신에게 똑같은 짓을 하지 않을지에 대해서 우려하기 시작하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중국은 계속 소련을 수정주의로 비난하였다. 도발하는 말 한마디로 대중관계는 물론 중국을 상당기간 퇴보 시킨 것이다

1969년에는 중소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아 무력 충돌과 전면전 위기까지 발생하여 소련 공산당 지도부가 중국에 대한 핵공격을 고려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일어났다.[42] 다행히 양국 지도부의 협상으로 1969년의 위기는 봉합되었으나 중소관계는 특별히 개선되지 못했고 중국은 1970년대에 미국의 손을 잡았다. 1979년에는 중국이 소련을 자극하기 위해 중소분쟁에서 소련 편을 들던 베트남을 침공했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중국이 소련을 비난하며 미국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에게 군사 지원을 하여 소련과 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브레즈네프는 집권 말기인 1980년대 초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중국은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요구하며 브레즈네프의 손을 뿌리쳐 브레즈네프 집권기에 중소관계는 개선되지 못했다.

1.4.9. 아프가니스탄 개입: 소련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다

В 1980 году Любовь Брежнева задала своему отцу нелицеприятный вопрос об Афганистане. Яков Ильич принялся оправдывать брата... «Справедливости ради хочу сказать, — пишет Любовь Брежнева, — что дядя мой звонил ежедневно Дмитрию Устинову и, употребляя общепринятый фольклорный диалект, спрашивал: «Когда эта блядская война кончится?». Злясь и краснея, генеральный секретарь кричал в трубку: «Дима, ты же мне обещал, что это ненадолго. Там же наши дети погибают!»…


1980년 류보피 브레즈네바는 부친에게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돌직구성 질문을 던졌다. 야코프 일리치는 자신의 형제를 정당화하려 애를 썼다... "공평하게 하기 위해 말해 두자면 말이다", 류보피 브레즈네바가 기술했다. "내 삼촌은 매일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통속적인 어투[43]를 구사하며 물었다. "이 씨발놈의 전쟁이 대체 언제 끝나는데?" 소련 서기장은 화를 내고 얼굴을 붉히며 전화기에 외쳤다. "디마,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약속했잖아. 우리 아이들이 거기서 죽어나가고 있다고!"[44]
브레즈네프의 조카딸 류보피 브레즈네바의 증언. #

이렇게 데탕트 외교로 평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한 가지 거대한 오판으로 데탕트의 완전한 붕괴는 물론, 나중에 소련 멸망의 하나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바로 아프가니스탄에 무력으로 개입한 것이었다.

사실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 친소정권에 군사개입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아프간의 헤라트 시와 주변 지역이 친소 정권에 맞선 반란을 일으켰고, 폭도들은 잔혹하게 카불의 관리, 소련인 고문들과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이에 아프간의 대통령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는 모스크바에 소련의 군사 개입을 필사적으로 요청했다. 이는 개입을 할 생각이 없던 브레즈네프를 깜짝 놀라게 했고, 정치국은 이 새로운 사태를 분석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이에 정치국에서는 3주 동안이나 계속 아프간 개입에 대해 논의했고, 아프간에 군사 개입은 하지 않고, 추가 지원만을 약속하는 걸로 끝냈다. 그리고 파키스탄 이란을 압박해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아프간으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련은 아프간에 군사개입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지만 상황이 급변했다. 아프간 친소혁명을 이끌던 타라키 아프간 대통령이 하피줄라 아민의 쿠데타에 의해 암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45] 아민이 미국과 접촉하고 있다고 여긴 정치국은 강하게 분노하며, 유리 안드로포프,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중심으로 해서 미국에 포섭되었다고 여겨지는 아민을 제거하고 아프가니스탄을 구하겠다는 입장이 큰 지지를 받았고, 결국 정치국이 우스티노프-안드로포프 계획을 승인했다. 만약 자신들이 믿는 대로 아프간이 친미 국가가 되고, 아프간에 미국 핵무기가 배치된다면, 사실상 소련 전역이 미국 핵미사일의 공격권 안에 들게 되기 때문이었다. 일이 이 지경까지 가자 결국 브레즈네프도 정치국원들의 의견에 수긍하고 개입 결정에 서명을 하면서 소련군이 아프간으로 파견되어 아프간 전쟁이 시작된다.

다만 브레즈네프는 아프간 개입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으로 대했다. 원래부터 군사 개입을 최후에나 의지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의 이런 생각이 독소전쟁을 겪은 뒤로는 승리를 위해 치르는 대가는 승리 자체보다도 언제나 크다는 믿음으로 발전했기 때문. 그래서 맨 처음에는 아프간 개입을 주장한 안드로포프와 우스티노프가 브레즈네프를 아프간 개입에 찬성하도록 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먹었다. 특히 안드로포프는 놀라울 만큼 사실 여부가 희박한 증거와 정보들을 이용해 브레즈네프를 설득하려 애썼다. 그리고 결국 침공이 개시된 후 브레즈네프는 아프간 개입이 엄청난 실수[46]였음을 깨닫고 안드로포프와 우스티노프에게 분노했다. 위의 일화도 그 무렵의 이야기. 하지만 이때는 브레즈네프의 정치 경력이 거의 끝나가는 시기였기에 영향이 크지 않았고, 그 결과는 매우 참담했다. 좀 깨어있던 관리들은 소련이 이 험난한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기적을 기다렸다고...

무엇보다 이 개입은 정치국에서도 격론이 오갈 정도로 논란이 큰 사안이었고, 당시 국제정세로 봐서도 많은 무리가 있었지만, 정점에 이른 소련군의 전력을 과신한 것이 탈이었다.

1.4.10. 종교정책

흐루쇼프 시기 강화되었던 국가 주도의 종교 탄압 정책도 이 시기에 완화되었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의 중축과 건설이 허용되었고 이 때 부터 교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칼미크인들의 전통적인 불교에 대한 신앙심도 허용되었고 이슬람교, 여호와의 증인, 몇몇 개신교 종파 등( 오순절 침례교 일부 종파)도 허용되었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었다는 것이지 없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소련 정부에 의해 허용된 종교들도 기본적으로 소련 당국의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했으며 소련 당국의 감시와 통제를 허용하지 않는 교회들은 가차 없이 폐쇄되었다. 그리고 비밀스럽게 종교 행사에 참여했다가 발각된 소련 공산당원들도 당연히 출당되었다.

1.4.11. 심한 자기과시욕

파일:브레즈네프 훈장.jpg
자뻑이 좀 심했던 브레즈네프는 자기 자신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일이 잦았다. 느닷없이 2차대전 때의 전공을 이유로 소련 최고의 영예인 소비에트 연방 영웅을 자신에게 직접 수여하기도 했는데 그 횟수가 무려 네 번(1966, 1976, 1978, 1981)이었다. 장군 중의 장군으로 손꼽히는 게오르기 주코프와 동급이다. 거기에 그와 비슷한 등급인 사회주의노력영웅(1961)까지 더하면 무려 5중 영웅이 되는 셈. 이외에도 재임 기간 18년 동안 총 200여 개의 훈장을 수여받았는데, 브레즈네프의 명예욕을 아는 측근들의 충성 경쟁이 무차별적인 훈장 수여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런 상훈에 대한 욕심은 전직 서기장들인 스탈린이나 흐루쇼프에 비해 브레즈네프 자신이 전쟁 때 별다른 전공이 없었다는 자격지심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스탈린은 2차대전 때 당, 정, 군을 망라한 최고 지도자였고, 흐루쇼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드물게 개념인 축에 속한 정치위원으로 여러 전공을 세웠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의 정치위원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흐루쇼프. 물론 브레즈네프도 일선 정치장교였고, 블라우 작전때 격전지였던 캅카스 방면에서 실전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일개 전투에서조차 원수나 대장급이 줄줄이 야전군을 움직이던 독소전쟁에서 일개 소장급의 정치위원의 전공이 클 리가 없었다.[47]

말년에 갈수록 이러한 훈장 부심은 심해지기만 했는데, 생전에도 사후에도 해외뿐 아니라 소련 국내에서까지 비웃음거리가 되어 사미즈다트 같은 지하 출판물에서도 디스했을 정도였다. 죽기 6개월 전에도 키예프 1500주년기념메달을 받고 갔을 정도이고, 1978년에는 2차대전 종전 직후에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영웅들에게만 일괄적으로 수여되고 사실상 수훈이 종료되어 있던 전승훈장을 멋대로 부활시켜 수상하는 자뻑 모드를 보여주었다. 이 짓은 자신의 전공을 명실상부 독소전 최강 장군 게오르기 주코프, 스탈린그라드를 천왕성 작전으로 구원한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막판에 베를린을 두고 주코프와 레이스까지 한 이반 코네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빨치산만 끌고 나치 독일을 애먹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 북아프리카에서 사막의 여우의 각을 뜬 버나드 로 몽고메리와 동급으로 놓는다는 이야기이다. 당연히 이들이 이걸 안다면 미치고 펄쩍 뛸 일이다. 그나마 눈치는 봤는지 게오르기 주코프, 이오시프 스탈린,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처럼 2회 수훈은 안했다.

브레즈네프의 셀프 전승훈장 수여는 소련에서도 대놓고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텔레비전에서 브레즈네프가 전승훈장을 받는 모습이 나갈때 모스크바 거리의 택시 기사들부터 당중앙위원회에 근무하는 운전기사들까지도 배를 잡고 웃어댔다. 체르나예프를 비롯한 일부 간부들은 이런 도를 넘은 자뻑이 여론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였다. 하지만 당 최고위층은 브레즈네프 우상화 경쟁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참고로 브레즈네프가 전승훈장을 탐낸 이유는 그 영예도 영예이지만, 갖은 보석으로 장식된 전승훈장이 너무 멋져보여서(...) 였다. 브레즈네프는 공식적으로 전승훈장을 받기 5일 전에 일기장에다가 전승훈장을 보고 하악하악하는 내용을 남겼다.

또한 1979년에는 조악한 수준으로 쓰여진 자신의 회고록이 출판되자마자 레닌상 문학 부문을 수상하는 등 문학에 대한 능욕까지 해버렸으며, 그와 레닌문학상을 두고 경합했다가 어이없게 낙마한 빅토르 골랴브킨은 "이 위대한 작가가 살아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가 우리처럼 거리 위를 행진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는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 그는 당연히 레닌문학상을 받아 마땅하다. 나는 그가 나를 앞선다고 본다. 이 장밋빛으로 뺨을 물들인 뚱땡이가 말이다. 여러분은 그가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그는 뒈질 것이다."라고 축사를 빙자한 조롱의 글을 레닌그라드의 문학 잡지 '오로라'에 기고했고 오로라 편집진은 몽땅 숙청당했다. 여기에 게오르기 주코프의 회고록에 굳이 쓰지 않아도 될 자그마한 자신의 전공[48]을 창작해서 쓰라고 하는 위엄을 보여주기도.[49]

결국 이 양반이 죽은 후인 1988년에 소련 최고회의에서 관련 법규를 개정해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든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이든 1회 초과 수상 자체를 금지해 버렸다. 1년 뒤인 1989년에는 억지로 단 전승훈장이 박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레즈네프는 스탈린식 우상화는 실시하지 않았다. 이런 자화자찬을 인민들이 비웃든 말든 자기만 만족하면 괜찮다는 스타일이었던 듯.[50] 그래서 흐루쇼프에 이어 브레즈네프에 대한 유머가 소련에서 유행할 수 있었다. KGB 요원들도 인민들이 서기장 동지에 대해 뭐라고 떠드는진 알고 있었겠지만, 본인들이 생각해도 브레즈네프의 훈장 수집 욕구는 너무 지나치다 못해 어이없을 수준이었을 것이다.

1.5. 말년


1978년, 미래의 서기장에게 수상식을 하는 브레즈네프.(8분 37초부터)

브레즈네프는 막상 절대권력을 완전히 구축한 뒤부터 건강이 나빠졌다. 브레즈네프는 술과 담배를 좋아했고[51] 그 때문에 말년에 브레즈네프는 각종 성인병으로 고통받았다. 담배 자체는 1970년대에 건강 악화로 끊긴 했지만 젊은 시절에 피어둔 담배가 결국 그에게 큰 화로 다가왔다. 1975년엔 심장마비를 겪었으며 사실상 이때 이후부터 브레즈네프는 유리 안드로포프 KGB 국장,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국방장관 등의 고위 관료들의 집단지성에 의존해 통치해야 했다. 1977년 이후부터 페이스메이커도 달고 다녔으며 중추 신경계의 악화, 뇌졸중, 불면증, 통풍, 백혈병, 당뇨병, 폐기종, 기관지염 등의 질병들을 앓고 있었던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심지어 적국인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의 의료진들을 초청해 수술을 받기도 했다. 여기에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 얻은 불면증으로 수면제 중독도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 안드로포프는 브레즈네프에게 가짜 수면제를 처방하면서 그의 약물 중독을 치료해보려 했지만 체르넨코는 눈치 없이 진짜 수면제를 브레즈네프가 달라는대로 공급해주어서 별 소용이 없었다.[52] 소련 사회에서 약물중독은 부르주아 퇴폐종자들이나 걸리는 한심하고 역겨운 것이었으므로 브레즈네프가 약물중독에 시달린단 사실은 철저히 은폐되었고 따라서 적절한 치료도 받지 못했다.

브레즈네프의 경호원 차조프는 안드로포프에게 비밀리에 브레즈네프가 약물중독임을 알리고 이를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에 알리자고 제안했다. 안드로포프는 이를 한동안 숨기려 했지만, 브레즈네프가 1974년에 블라디보스토크와 파리를 방문하다가 쓰러지고 1975년에 모스크바 외곽에서 또 쓰러지는 등 심각한 건강이상을 보이자 브레즈네프의 과로를 풀어준다는 구실로 그를 약물치료를 받게 했다. 하지만 브레즈네프는 조금 건강상태가 괜찮아지자 요양소를 탈출해버렸다.(...) 브레즈네프의 약물 중독은 심각한 것이었는데, 헬싱키 회담 직후 크림반도에 휴가를 보내러 간 브레즈네프는 쓰러져서 그대로 병원으로 실려갔고, 지스카르 데스탱과의 정상회담은 국제적 스캔들로 비화되기 직전까지 갔으며 1975년 11월, 폴란드 통일노동당 7차 당대회에 초대받은 브레즈네프는 약물에 취해서 주악되는 인터내셔널가를 듣더니 흥분해서 헐떡이며 박수를 치고 지휘를 했다. 폴란드 제1서기 에드바르트 기에레크를 비롯한 폴란드 측 당국자들은 모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상황이 이쯤되자 안드로포프도 더 이상 브레즈네프의 약물중독을 숨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정치국에 이를 보고하려 했지만 수슬로프가 반대하면서 브레즈네프 주위의 일부 핵심 측근만이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브레즈네프가 약물중독에 걸렸음을 눈치챈 포드고르니가 반격해왔기 때문이었다. 1975년에 브레즈네프의 새 주치의로 미하일 코사료프가 임명되어 전임 주치의 로디오노프가 아무때나 약물을 공급하는 관행을 철폐하고 약물공급권을 주치의에게 독점시켰다. 브레즈네프는 더 이상 약을 주지 않겠다는 부하들의 말에 폭발 직전까지 갔으나 이러다간 1976년 2월에 열릴 25차 당대회에 참석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간곡한 설득과 더불어 포드고르니가 자꾸 쑤시고 다니는 상황을 인시하고 받아들였다. 브레즈네프에게 약물을 주면서 비선실세가 되었던 니나 코로뱌코바 간호사도 해고되었다.

고르바초프 회고록에 따르면, 한번은 브레즈네프가 정치국 회의를 주재했지만, 노쇠한 브레즈네프가 회의 중간에 심각한 기억상실증 증세를 보이면서 회의 주제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태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치국원들은 모두 아무 일도 없는체 이를 무시했고 고르바초프는 안드로포프를 따로 찾아가 우려를 표했지만 안드로포프는 "이보게 미하일, 우리는 레오니트 일리치를 돕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걸 다 해야 하네. 레오니트 일리치가 이런 상태여도 말이야. 이건 당내와 국가의 안정성의 문제고, 더 나아가 국제적 안정성의 문제야."라고 그를 타일렀다고 한다.

브레즈네프의 건강이 너무 나빠진 것은 뛰어난 정보 기관의 도움 없이 그를 일상적으로 보는 서방 외교관의 눈 정도로도 알 수 있어서, 서방 기자들이나 외교 대표들은 브레즈네프가 70세 생일을 넘기면 은퇴할 것으로 여겼다. 사실 브레즈네프도 너무 늙고 지친 나머지 자신의 칠순 생일 파티에 참석한 정치국원들에게 이제 서기장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하지만 늙은 브레즈네프를 얼굴 마담으로 내세운 안정된 체제에 만족하고 있던 정치국원들은 잠시 하얗게 질렸다가 앞을 다투어서 브레즈네프가 없으면 이 나라는 돌아갈 수 없다고 그를 뜯어말렸다. 이에 브레즈네프가 미국의 정당들처럼 명예 당주석 자리를 만들면 되지 않겠냐고 했지만 이것도 반려되었다. 이후에도 브레즈네프는 한 차례 자신의 은퇴를 정치국 회의에 상정했으나 그때도 모두가 뜯어말렸다. 사실 브레즈네프도 자신이 은퇴한 후에 서기장으로 누리는 호화로운 삶이 불가능해지는 것과 정치적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자신의 은퇴를 매우 적극적으로 추진하진 않고 은근슬쩍 뭉개고 말았다.

자녀들과의 갈등도 잦아서[53] 아내 빅토리야는 매일 텔레비젼에 나오는 남편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는 것을 보고 은퇴를 권유했지만 자식놈들은 서기장의 자녀로서 얻을 수 있는 각종 비법적인 특혜를 잃고 싶지 않아서 브레즈네프에게 은퇴해선 안된다고 가스라이팅을 해댔다. 브레즈네프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없으면 찾아오지도 않고 이런 요구만 한다고 환멸을 토로하는 등 많은 스트레스도 겪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소련 인민들은 브레즈네프의 병세 악화를 조롱하였다. #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소련의 경제는 침체되었고 노멘클라투라의 득세, 브레즈네프의 무식 등에 많은 소련 인민들이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1979년부터는 주요 행사에 불참하는 일이 잦았다. 소련은 정보 통제가 심했던 나라라 서방에서는 브레즈네프 사망설, 대역설 등이 심심찮게 제기되었고, 공식 사진도 여러차례 포샵처리가 가해졌다. 포샵처리가 안 되거나 어쩌다 찍힌 브레즈네프의 사진을 보면 눈에 초점도 없고 입도 반쯤 벌리고 축 늘어진 모습이 있어 병색이 완연했다. 그는 이미 1977년 경부터 연설할 때 발음이 뭉개지기 시작하면서 건강이 안 좋음을 인증했다. 1980년 신년사만 봐도 발음이 더 뭉개지고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진다.


1979년에 발표된 그의 신년사. 우크라이나 억양도 있는데다가 뇌졸중, 치아, 시력 문제까지[54] 겹쳐서 술취한 사람마냥 어눌한 발음이 나왔다.[55]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이 개최되고 당연히 주최국의 지도자로써 연설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서방과의 관계가 틀어진 상황에서 단체로 서방 국가들이 보이콧을 한 터라 반쪽 짜리 올림픽이 되었고 모처럼 올림픽을 통해 데탕트 체제를 강화하고자 하던 그의 구상은 실패로 끝난 셈이었다. 1981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지도자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를 협박해 레흐 바웬사를 비롯한 폴란드의 민주화 인사들을 체포, 구금하라고 강요했고 결국 소련군의 직접적 군사개입을 원치 않았던 야루젤스키는[56] 자국 군대를 동원해 폴란드 민주화 인사들을 잔혹하게 탄압한다. 비록 폴란드 인민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일이지만 소련의 입김과 지원하에 벌어진 일이라 당연히 서방과 소련의 관계는 더욱 냉각되기에 이르렀고 마침 반공주의를 모토로 내걸던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은 소련에 대한 추가적인 제재를 단행해버렸다. 브레즈네프는 악화되어가는 상황에 분개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노쇠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밑에서도 언급된 1979년 6월, 오스트리아에서 진행된 카터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소련 측은 브레즈네프가 정상으로 보이기 하기 위해 모든 수를 동원했지만 브레즈네프가 맛이 갔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카터 대통령은 노쇠한 브레즈네프가 횡설수설하는 것을 보고 그의 건강을 염려해 건배조차도 앉아서 할 것을 제안했다. 정상회담을 마치고 다시 비행기에 오르면서 브레즈네프는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레드카펫 위를 뒤뚱뒤뚱 걸어서 비행기에 올랐는데 전세계 시청자들은 그가 넘어지는지 안넘어지는지를 노심초사하면서 보았다. 이후 1981년 11월, 생애 마지막으로 서독을 방문하여 본에서 헬무트 슈미트와 에곤 바르를 만났을 때 브레즈네프는 더 이상 정상적인 대답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측근들이 건네주는 서류들을 기계적으로 받아서 낭독할 뿐이었다. 모든 실질적인 대답은 그로미코가 하였고, 서독 측은 이제 소련과의 대화에서 자신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브레즈네프가 아니라고 판단할 정도였다.

이후 1982년 3월에 타슈켄트의 항공기 공장을 방문하였다가 해당 공장 시설의 일부가 붕괴되는 사고에 휘말리며 건강에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당시 브레즈네프는 살아남았지만 쇄골과 갈비뼈 골절, 간출혈 등의 중상을 입었다. 진통제 덕에 외부 일정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지만 이미 몸 상태는 시쳇말로 맛이 간 상태였다. 사고를 두고 # KGB에서는 사보타주를 의심했지만 상술했던 성격은 온화한 편이었던 브레즈네프는 "간청합니다. 거기에서 누구의 머리도 베지 마십시오. 처벌하지 마세요. 저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안드로포프 KGB 주석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 그 직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 도착해서 레닌 훈장을 수여하면서 아제르바이잔(Азербайджан)을 아프가니스탄(Афганистан)으로 잘못 부르는 대형 사고도 쳤지만 누구도 지적하지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처럼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사고 이후에도 주치의들의 건강 관리를 받으며 건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982년 11월 10일 오전 8시 30분에 모스크바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사망한지 몇 시간이나 지나서 경호원들에게 발견되었고 경호원들은 그를 살려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애를 썼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후 KGB 보안책임자와 의료진이 투입되었지만 브레즈네프의 얼굴은 푸른색이었고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의 사망을 보고받은 정치국은 그의 죽음을 예견했었기 때문에[57] 의사들에게 자세한 설명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마지막 공개 활동은 사망하기 3일 전에 열린 10월 혁명 65주년 기념식이었으며, 사후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지고 붉은 광장 크렘린 벽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의 죽음은 장례 절차 및 부고를 준비하기 위해서 나중에 발표되었으나 그의 사망이 정치국에 보고되자마자 모든 라디오 방송이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장송곡만 내보냈기 때문에 인민들은 발표 이전부터 브레즈네프가 죽은 줄 눈치채고 있었다. 인민들은 늙은 브레즈네프에게 이만저만 싫증이 난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죽자마자 고인드립성 농담들이 나돌았다.
문: 브레즈네프의 유언은 무엇일까??
답: 유랴! 내 페이스메이커에서 손 떼!


그의 장례식이 담긴 영상.

그가 죽은 직후에 그의 사망 소식을 발표하기 전 TV에서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백조의 호수를 방영했다. 이후 소련 러시아에서 쿠데타나 다른 서기장이나 대통령이 서거하거나 실각하는 등 나라에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을 때 라디오나 TV 채널에서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이 곡이나 발레 영상[58] 재생하는 게 전통이 되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주요 언론들이 그의 사망 직후 특집 보도를 했으며 로널드 레이건을 비롯해 브레즈네프가 생전에 만났던 미국 전직 대통령들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

2. 진급 이력



[1] 과거에는 드니프로제르진스크(Дніпродзержинськ)라고 불렀으나 크림 반도 사태 이후 2016년 옛 이름을 우크라이나어식으로 바꾼 카미얀스케(Кам'янське)로 바꾸었다. [2] 우크라이나어 표기는 '일랴 야코비치 브레지네우(Ілля Якович Брежнєв)'. [3] 우크라이나어 표기는 '나탈리야 데니시우나 브레지네바(Наталія Денисівна Брежнєва)'. [4] 야금 대학으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원어는 테흐니쿰(техникум)으로서 '기술 학교' 라고 번역하는 중등 교육 기관이다. 테흐니쿰 같은 중등 교육 기관들을 영미권에서 college로 번역하다보니 일어나는 오류이다. [5] 1990년 해당 곡을 다른 앨범에 재수록했을 때는 시대에 맞춰 이 부분을 " 마스터 미샤"라고 바꿨다. [6] 여기서 "브레이크"는 브레이크 댄스를 의미하는데, 우리가 아는 화려한 퍼포먼스의 비보잉 댄스가 아닌 로봇처럼 어색하게 몸동작들 딱딱 끊어가며 추는 팬토마임 식 춤을 의미한다. 80년대 당시 소련에서 유행했다. [7] 단순히 러시아어를 우크라이나어식으로 읽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우크라이나어에서만 쓰는 표현도 섞여 있다. 위 가사에서 밑줄 친 부분은 우크라이나어 단어 혹은 문장을 러시아어식으로 적은 것이다. [8] 말년의 스탈린은 브레즈네프 외에도 자신의 후계 체제를 준비해야 한다는 구실로 정치적 신인들을 파격적으로 승진시키는 행보를 보였다. 아나스타스 미코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니키타 흐루쇼프 등 다른 거물 정치인들은 스탈린의 이런 행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했으나, 스탈린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너무 갑작스레 승진하여 얼떨떨한 새 후보위원들을 돕지 않거나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식으로 간접 저항했다. 결국 이런 정치적 신인들의 대다수는 시원찮은 일처리 때문에 스탈린에게 찍혀 좌천당했다. [9] 후술하겠지만 브레즈네프가 즐겨하던 동유럽식 인사이다. [10]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도 월남전의 막바지에 이른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비슷한 침체기에 있었다. '회색 시대'라는 표현은 미국의 1970년대를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 강대국들의 침체기 사이에서 성장을 거듭한 국가가 바로 일본이다. [11] 1960년대 당시 소련의 라디오 보급률은 50%에 불과했다. [12] 소련 붕괴 이전 최고 기록. [13] 게임의 법칙이 적용되어서 공과 사를 구별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공적인 상황에는 여전히 공산당과 공산주의를 찬양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반공 서적이나 반체제 발언도 어느 정도는 너그러이 넘어갔다. 한국에서는 당시 소련을 북한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스탈린 집권기였고 스탈린 사후 소련은 당시 다른 공산권 국가인 베트남이나 불가리아 정도의 자유도는 가지고 있었다. [14] 이때문에 노동 규율이 해이해지는 부작용도 있어서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출근 도장만 찍고 놀러다니거나 무단으로 결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그 결과 소련의 노동생산성은 크게 저하되었다. 후대의 유리 안드로포프가 노동 기강을 강하게 잡으면서 이러한 현상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러시아 현대사 통틀어서 가장 노동 환경이 괜찮았던 시대가 브레즈네프 때였다. [15] 원래는 브레즈네프와 코시긴이 같이 실권을 잡고 있었지만, 코시긴이 추진한 경제개혁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당내 보수파들이 브레즈네프를 바지사장으로 올리기 위해서 코시긴을 사임시켰다. 포드고르니가 맡고 있던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도 1977년 브레즈네프에게 넘어간다. [16] 실제로 펩시를 비롯한 미국 기업들이 이 시기에 소련에 진출하기도 했으며, 소련TV에 상업광고가 등장한 때였기도 했다. 이때 상업광고가 도입된 김에 소련 기업들에게 회사자금의 1%를 광고비로 쓰라는 지시도 내렸기 때문에 소련의 광고시장이 팽창하기는 했으나 저급 제품들이나 심지어 제대로 생산되지도 않은 제품들도 광고를 내보냈기 때문에 소련 인민들에게 '광고는 저급한 제품을 팔아먹기 위한 수작'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그래서 광고 효과는 떨어졌다. 이러한 문제점이 개선된 것은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 시기에 와서부터였다. [17] 소련제 진공관이 자주 폭발하여, 소련 내에서는 TV를 보다가 TV가 폭발해 사망하는 사건도 많았다. [18] 흐루쇼프의 개혁보다는 농업 실패와 대외정책이 결정적이었다. [19] 사실 이것은 소련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원의 저주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영국같은 경우도 북해 유전이 터지면서 제조업이 다 박살난 것을 보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영국은 금융이라는 세계 최고 경쟁력의 산업이 있었지만 소련은 그게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20] 이때 사회주의 형제국에 대한 우호성 무역도 활발해서, 당시 북한에서 헝가리산 포도주를 맛볼 수 있었던 '좋은 시절'이었다는 회고담을 볼 수 있기도 하다. [21] 취임할 때 54세였는데, 젊은 리더십을 펴기는커녕 원래부터 안드로포프의 총애 때문에 고속 출세한 인물이라서 능력에 비해 리더십의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다른 정치국 위원들은 많게는 고르바초프보다 20살 이상이나 연상이었는데 예를 들어 그의 임기 초반에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영전했다가 1988년에 은퇴한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1909년생이었다. 이런 원로들 앞에서 그의 말은 씨알도 안 먹혔다. [22] 다만 이전 최고권력자였던 흐루쇼프는 브레즈네프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보 당국에 의한 지속적인 감시는 받고 있었다. [23] 1966년에는 대물리학자 이고르 탐(195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과 표트르 카피차(197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스탈린 복권에 반대하는 편지를 브레즈네프에게 쓰기도 했다. [24] 아이러니하게도 흐루쇼프의 숙청으로 대체된 인물이 브레즈네프와 그의 최측근인 안드레이 그로미코이다. [25] 흐루쇼프는 1980년에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에 돌입한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결국 소련은 해체될 때 까지 공산주의는 고사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에도 한참 못 미치는 과도기적인 형태로 끝을 맺게 된다. [26] 카자흐스탄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벨라루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타지키스탄 에모말리 라흐몬 등 일부는 소련 해체 때 그대로 자리를 이어받아 독재를 행했다. [27] 비슷한 시기 북한도 김일성이 의욕적인 군비 확장정책을 벌이면서 전체 예산의 자그마치 30%를 국방비에 집중 투자했다. 결과적으로 파탄 지경은 아니던 북한 경제는 한국에게 추월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결과적으로 고난의 행군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8] 사실 공중급유 프로판이 있어서 대륙간 폭격이 가능했지만 미국과의 협상으로 인해 제거된다. [29] 이 시기 브레즈네프는 정신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진정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나중에 건강에 치명적인 습관이 되었다. [30] 폴란드 서기장 카니아가 모스크바에 회담을 하러 왔을 때 우스티노프는 "카니아 동지, 우리의 인내심은 바닥이 났소!"라고 소리지르며 "2주의 최후의 최후의 시간을 주겠소!"라며 압박을 했다. 정작 브레즈네프는 평소의 다정다감한 모습 그대로였다고... [31] 하지만 침공을 했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깨졌을 게 분명했다. 소련 정치국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침공하지 않았던 거고. [32] 다만 소련의 입장에서 이집트의 완전한 패배는 용납할 수 없는 결과였기에 이스라엘군의 과도한 진격에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하기도 했다. 이스라엘도 상태가 좋지 못해서 이집트 영토까지는 밀고들어가지 못했기에 기우로 끝났지만. [33] 일례로 1972년 소련에 간 아옌데는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을 원했지만, 소련 지도부는 데탕트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있던 터라 칠레에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은 일은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도 당시 남미의 민주화 인사들은 소련과 동맹국으로 대거 망명하는 일이 잦았으며, 소련도 망명은 잘 받아줬다고 한다. [34]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의 비서로 활동해 동방 정책을 구상한 인물이다. [출처] Святослав Рыбас. Громыко. Война, мир и дипломатия. — М.: Молодая гвардия, 2011. [36] 브레즈네프는 미국 데탕트를 통해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전쟁을 피하고 세계평화를 위해서 매진하는 의외의 성향을 보였다. 후술하듯 브레즈네프는 군사개입을 최대한 피하려고 했으며 아프간전 개입에도 부정적이었다. [37] 브레즈네프의 아버지 또한 반전적인 모습이 강했으며, 브레즈네프도 전쟁을 겪기 전부터 부친의 영향을 받았는지 줄곧 아버지 얘기를 했다고 한다. [38] 브레즈네프 시기 세계 공산당에 대한 지령도 폭력 투쟁을 반대하며 평화 투쟁을 할 것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그의 집권기에 소련은 체 게바라 같은 폭력 투쟁을 주장하는 혁명가를 적대하게 된다. [39] 이는 브레즈네프의 꿈이기는 했지만 당연하게도 대외적, 대내적 형편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40] 브레즈네프 독트린도 당연히 폐기하지 않았다. 그 덕에 1981년에 폴란드 연대노조를 탄압하며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의 계엄령을 적극 지지해 서방세계로 부터 비난을 받았다. [41] 물론 미국은 해당 협정과는 별개로 소련의 발트 3국 귀속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정치국 내 보수적인 인사들은 협정에 매우 실망하였다. [42] 당시 정치국에서는 중국의 인적 자원을 극도로 두려워 하였다. 여태껏 소련은 미국과 핵전쟁 대비만 했지 중국과 같은 인구 대국과의 싸움은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당시 소련에서는 "중국군 500만명이 항복했습니다!"와 같은 유머가 나돌았었다. 또한 소련은 중국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국경으로 밀어넣는 시나리오도 두려워 하였다. [43] 우크라이나 억양을 뜻한다. 브레즈네프는 평생 우크라이나 억양을 구사했으며, 간혹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를 섞어 쓰기도 했다. [44] 디마는 드미트리의 애칭이다. 이는 브레즈네프 리더십의 특징이기도 했는데, 그는 고위 정치국원들을 친구처럼 애칭을 부르면서 친근하게 대했다. 물론 수슬로프와 코시긴처럼 자신이 어렵게 여긴 인물들에겐 경어를 썼다. [45] 여태껏 소련은 아프간 대통령인 타라키와 회담을 했으며, 타라키의 친소적인 행보에 브레즈네프는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46] 아프간 침공 전부터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인해 그동안 브레즈네프가 모든 정치 생명을 바쳤던 초강대국 데탕트 체계가 완전히 붕괴되고 만다. [47] 여기다가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서기장 시절 자기 군계급을 소장에서 원수로 4단계나 자가진급시켰다. [48] 영웅적으로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다는 내용을 넣으라고 했다. 당연히 주코프가 일개 정치장교였던 그의 전공을 집어넣을리가 없다. [49] 문제의 회고록은 결국 10판째에서야 수정되었다. 사실 이것 말고도 온갖 검열과 수정 압박이 가해져서, 초판이 발행되었을 때 주코프는 "이 책은 내가 쓴 게 아니야."라고 볼멘소리를 냈다고 한다. [50] 애초에 브레즈네프도 살벌한 스탈린 시기를 겪어본 인물이고, 자신이 몰아낸 흐루쇼프 덕에 소련 정계의 살벌한 숙청이 완화된 것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었다. 스탈린식 대숙청을 부활시키지 않는 한 더 이상 우상화를 할래야 할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브레즈네프는 성격상 그런 대숙청을 부활시키느니 차라리 자기 우상화를 포기할 사람이었다. [51] 특히 고급 술과 담배를 수집하는것을 즐겼다. [52] 수슬로프가 죽던 날 브레즈네프 일기에는 수슬로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안드로포프가 그에게 '노란것'을 주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볼코고노프는 그 노란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금일봉일까 하는 추측을 남겼지만 나중에 수면제로 밝혀졌다. [53] 아들 유리와 딸 갈리나가 대규모의 횡령을 저질렀기에 브레즈네프는 자식들을 공직에서 파면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유리는 재산이 몰수되었다. 그나마 아들 유리는 아내 류드밀라 및 아들 2명과는 좋은 관계였고 80세까지 장수했으나 갈리나는 결혼을 4번이나 할 정도로 사생활이 엉망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알코올 중독에 정신질환까지 심하여 브레즈네프가 이로 인해 속을 썩였다. 이 때문에 갈리나는 정신병원을 수없이 들락거리다 결국 69세의 나이로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러시아의 남녀 간 수명 차이가 세계적으로도 심한 것을 생각하면 갈리나가 얼마나 엉망으로 살았는지 알 수 있다. [54] 특히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더 좋은 것을 달라는 장면이 나온다. [55] 1971년에 발표된 그의 신년사와 비교해보자. [56] 야루젤스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는 오히려 개혁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57] 상술했듯 죽기 몇 년 전부터 정치국원들은 브레즈네프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79년부터 제대로 맛이 가기 시작해 80년 이후로는 진통제에 의존해 대외 활동을 버텨내는 수준이었고, 82년에는 아예 공장 붕괴 사고에 휘말려 중상까지 입었으니... [58] 길이는 약 3시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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