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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타 흐루쇼프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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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cc0000>생애 | <colbgcolor=#fff,#1f2023> 생애 | ||
가족 | 아버지 세르게이 니카노로비치 흐루쇼프 · 어머니 크세니야 이바노브나 흐루쇼바 · 여동생 이리나 흐루쇼바 · 아내 예프로시니야 흐루쇼바,(사별), · 아내 마루샤 흐루쇼바,(이혼), · 아내 니나 흐루쇼바,(재혼), | |||
사건 · 사고 | 쿠바 미사일 위기 | |||
관련 전쟁 | 키예프 전투,(1941.8.17~1941.9.26), · 바르바로사 작전,(1941.6.22~1941.12.5), ·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1942.5.12~1942.5.28), | |||
관련 정치인 | 이오시프 스탈린 · 미하일 고르바초프 | |||
평가 | 평가 | |||
기타 | 스푸트니크 쇼크 · 처녀지 개간 운동 ·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 | |||
공산주의 | }}}}}}}}} |
1. 개요
Освоение целинны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 소련에서 행해졌던 대규모 농지 개간 운동. 그러나 1962년의 가뭄으로 실패로 끝났고 흐루쇼프 본인의 실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 배경
이오시프 스탈린의 뒤를 이어 소련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하루 빨리 미국을 따라잡고 싶어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통치하던 시기의 소련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잉여 생산물을 극한까지 착취하여 모두 공업화에 쏟아붓는 가혹한 통치에 경공업의 미발달과 제2차 세계 대전의 후유증으로 인해 소비재가 부족했고 특히 농업의 황폐화가 심각하여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가서 식료품을 사 오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질 지경이었다. 스탈린 생전에는 아무도 이런 정책에 찍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스탈린이 죽고 나서 소련의 정치가들은 단순히 정치적 탄압을 중단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 전쟁도 끝나고 어느 정도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니 인민들을 극한까지 수탈하는 정책을 중단하고 인민들의 욕구 충족에 더 힘을 기울여서 여유 있게 먹고 살만한 나라로 만들어야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생각은 게오르기 말렌코프와 라브렌티 베리야에게서 시작되었고 흐루쇼프도 마찬가지였다.[1]흐루쇼프는 동료 경쟁자들과 함께 베리야를 처단한 뒤 스탈린 시절 황폐화되었던 농업의 진흥을 위해서 그간 개발되지 않았던 오지 지역을 개간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시 소련 농무부 장관을 지냈던 로비노프와 여타 농업 관계자들과 함께 농업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방법을 고심했고 그 대상으로 물색한 것이 북부 카자흐스탄, 남 시베리아, 북 캅카스, 우랄 산맥의 방치되었던 땅을 농경지로 개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늘어난 곡물 생산량을 이용해 목초와 곡물을 가축들을 먹여살리는 데 쓰기까지 한다면 소련의 식료품 부족 문제까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매년 1800~1900만 톤의 곡물을 수확한다는 가정 하에 1200만 헥타르[2]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처녀지 개간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사실 이렇게만 본다면 그냥 무식하게 처녀지 개간 작업만 밀어붙인 것 같지만 사실 농민들에게 지급할 임금과 연금을 늘리고 여권도 발급받게 만들어서 국내여행을 자유롭게 하는 등[3] 2등 시민 취급을 받은 농민들의 지위를 향상시켜 생산성을 높이는 작업도 병행했다. 즉, 처녀지 개간 사업 자체는 농촌진흥계획의 일부였다. 물론 가장 신경 쓴 사업이기는 하지만...
3. 계획
흐루쇼프의 미개척지 개간 계획의 골자는 이랬다.그런데 옥수수는 대표적인 C4 식물이다. 즉, 더운 지역에서 자라는 옥수수는 개간 운동의 주요 배경이었던 카자흐스탄, 남 시베리아 지역에서 재배하기에는 부적합했으며[4] 지력을 미친듯이 소모하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좋은 토질을 가진 미국도 함부로 심지 않는 식물이다.[5]
흐루쇼프는 1959년 미국 방문 중 아이오와 주의 드넓은 옥수수밭을 보고 크나큰 감명을 받아 옥수수에 심취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이오와는 소련 대부분 지역보다 남쪽에 있기 때문에 남시베리아 지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4. 일시적인 성공
어쨌든 흐루쇼프는 이 계획이 파멸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기차에 몸을 실었다. 국가적으로 이 사업을 팍팍 밀어줬기 때문에 젊은 소련 공산당원들과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 온 주민들 30만 명 가량이 처녀지 개간 사업 예정지인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우랄 산맥 지역으로 몰려들었으며 처녀지 개발 계획에 트랙터 5만 대와 트럭 6천여 대를 투입하였고 주택과 도로 같은 기초적인 인프라를 건설하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사에 미숙한 이들이 많았고 상식적인 농학자들은 이곳은 원래부터 강수량이 부족하던 지역이라 휴경을 많이 하고 파종을 늦게 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엉터리 과학자인 트로핌 리센코는 조기 파종과 휴한기 없는 집약적 경작을 계속 주장했고 날씨도 그리 좋지 않아서 1955년 농사는 대실패로 끝나 버렸다.하지만 흐루쇼프는 1년차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승부수를 걸었고 첫 시도와 마찬가지로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3500만헥타르(35만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신규 농경지를 확보하였다. 거기에다 새로 정착한 공산당원들도 경험이 쌓였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1956년 농사는 소련 전역이 가뭄의 영향으로 흉작이었음에도 유독 흐루쇼프가 지원을 아까지 않았던 카자흐스탄에서만큼은 대풍년이 들어 소련 전체 수확량 8500만톤 가운데 2700만톤을 처녀지에서 수확하는 성과를 거두어서 흐루쇼프는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확고히 다지는 데 성공을 거두었고 이 성공 이후 계획을 더욱 확대해 최종적으로 4180만 헥타르까지 계획이 확대되었으며 이 때문에 북부 카자흐스탄과 우랄, 남시베리아에서 막대한 농산물을 추가로 수확할 수 있었다. 1954년 소련의 곡물 수확량이 8550만톤이었는데 1960년에는 1억 2500만톤으로 늘어났고 개중에 5800만톤을 카자흐스탄과 남시베리아, 우랄에서 수확했으니 당시 통계만 봐도 초기에 엄청난 대박을 쳤던 것은 사실이었던 셈이었다. 여기에서 그쳤다면 흐루쇼프는 괜찮은 농업 정책을 편 지도자로 남아있을 수 있었겠지만...
5. 결과
흐루쇼프는 2년차에 엄청난 대성공을 거두자 이대로라면 권력기반을 다지는 수준을 넘어 미국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제 밀은 자급했으니 고기 생산을 대대적으로 늘리겠다면서 처녀지에서 생산된 곡물과 목초들을 바탕으로 겨우 3~4년 안에 소련의 버터, 우유, 육류 1인당 생산량에서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당시 소련으로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당연하겠지만 축산업 관련 전문가나 농민들, 관료들은 육류 생산량을 급속히 늘리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작에 이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봤으며 인민들마저 반신반의했다. 여하튼 육류 생산 증산 작업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고 흐루쇼프는 국가에 판매한 육류량을 세 배인 15만톤으로 늘리겠다는 약속을 지킨 라쟌 지역의 당 제1서기 알렉세이 라리오노프를 사회주의노력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물론 이건 거짓이었다. 그는 장부상 수치를 부풀리기 위하여 종자용 가축과 젖소를 도축장으로 보내고 농민들에게 소를 사서 되팔고 또다시 매입해서 목표를 달성했다. 결국 죄책감에 못 이겨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이런 비극이 진행되던 와중에도 흐루쇼프는 방미 중에 옥수수 농장을 방문해서 감명을 받았고 옥수수가 따뜻한 지역에서 주로 자라는 작물인 걸 간과한 채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추위로 쫓아내는 소련 땅에 옥수수를 심겠다고 나서면서 삽질이 추가되었다. 거기에다 때마침 가뭄까지 겹쳤고 더군다나 트로핌 리센코의 조기 파종과 휴한 없는 정책은 엄청난 잡초 번식을 초래했다. 그런데 그 많은 잡초들을 박멸하기에는 소련의 제초제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전문가들이 경고했듯이 1962년에는 가뭄으로 카자흐 처녀지의 표토가 죄다 말라 붙었고 이 지역의 특징인 강한 바람이 그 말라붙은 표토를 멀리 날려 버려 600만 헥타르의 토지가 황폐화되었다. 흐루쇼프의 비장의 카드인 옥수수는 3400만 헥타르에 파종했으나 1/5에도 못 미치는 640만 헥타르에서 밖에 수확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관이었고 결국 처녀지 곡물생산량이 절반 이상 줄어들고 상당수 지역에서는 종자 수급조차 못 하는 대참사가 발생하였다. 아무리 근성의 공산주의도 기후와 자연에 깝치면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해당 지역을 개척하기는 했지만 안정적인 곡물수확처가 못 되었던 것이다.
당시 소련의 농업 투자가 북부카자흐스탄, 우랄, 남시베리아로 집중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곡창인 서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농경지 투자가 소홀해지면서 이 지역의 농업 생산성 향상에 방해가 되었다.
옥수수 경작 등의 삽질로 원래 소 사료로 애용되던 건초용 목초 수확량은 처참했다. 거기에다가 종자용 가축까지 먹어치웠으니 육류 생산량과 우유와 치즈 등 유제품 생산량도 다시 급감하였고 흐루쇼프 집권기의 흐루숍카 대규모 연금제도 신설로 대표되는 생활수준 향상으로 고기 소비량이 매년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1960년대 초반에는 일부 서방 국가들보다도 고기 소비량이 늘어났는데 이 때문에 수매가가 크게 늘어나자 1962년에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이에 사람들은 스탈린 시대의 기근에 대한 악몽을 떠오르면서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처녀지 계획이 실행된 곳 중 하나였던 북캅카스의 노보체르카스크의 분노한 노동자들은 "흐루쇼프를 갈기갈기 찢어 소시지로 만들자!"고 외치면서 지역 당 본부로 행진을 벌였다. 이 행진을 잘 보기 위하여 아이들이 나무 위에 올라가 있기도 했는데 군대가 시위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허공에 대고 경고사격을 했고 그것 때문에 눈 먼 총알에 맞고 죽는 아이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거기에다가 1962년 흉작의 결과로 소련은 모양 구겨지게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호주 등으로부터 곡물을 대량으로 수입해야 했고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모양 구겨지게 대응하는 바람에 인민들의 지지도 크게 약해졌으며 자연히 당내에서 흐루쇼프에 대한 입지도 약해져 흐루쇼프는 당내 음모로 인하여 결국 1964년에 실각했다. 위의 유머가 당시의 현실을 풍자한 것이다.
다만 이 당시 처녀지 개간 운동 자체가 완전히 헛된것은 아니라서 이후로 남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여전히 상당히 큰 규모의 농사가 행해지고 있으며, 동시에 카자흐스탄은 북부 흑토지대에서의 막대한 수확량에 힘입어서 농업강국으로 남아있다.
6. 여담
"우린 미국을 소비에트적 속도로 따라잡을 것이다!"(Мы Америку догоним на советской скорости!, 1988)는 음악 프로젝트 코무니즘(Коммунизм)의 1988년 곡으로 처녀지 개간 운동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
가사는 개간 운동 당시 유포된 수많은 어용 작품 중 하나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왔고 멜로디는 미국의 경음악인 "팝콘"(Popcorn, Gershon Kingsley, 1969)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6]
이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 처녀지개간메달이다.
이를 계기로 다수의 러시아인들이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카자흐스탄에서는 한동안 러시아인이 카자흐인을 제치고 제1의 민족집단을 구성하기도 했으며 우랄과 시베리아 등지의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때 러시아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해 온 러시아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1990년대에 카자흐스탄을 떠나기는 했다. 이때는 러시아나 카자흐스탄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것은 똑같았던 데다 카자흐스탄에서 카자흐어 진흥 정책과 러시아어 배제 정책을 펴자 평소에 카자흐어를 잘 안 쓰는 상당수 러시아인들이 카자흐스탄보다 러시아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러시아로 귀환해서 한동안 카자흐스탄의 인구가 감소되기까지 했다. 물론 러시아로 돌아간다고 해도 러시아도 사정이 그리 녹록지 않아서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온 사람도 있다. 카자흐스탄에선 러시아어가 공용어급의 위치에 있다는 것도 한 몫하고 그래도 중앙아시아에서는 살만한 나라인 점도 있기 때문에...
그 외에도 국제적으로 영향이 있었다.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마오쩌둥이 흐루쇼프가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떠드는 것을 보고 경쟁심을 느껴서 중국도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외치는데 그 결과가 바로 대약진 운동이다. 흐루쇼프는 굴욕을 감수하고 곡물을 수입해서 기근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마오쩌둥은 자기 자존심 때문에 똥배짱으로 나가느라 자국민 수천만 명이 굶어죽는 대참사를 초래했다.
결국 수십 년이 흘러 소련 붕괴 후에야 러시아의 농업은 정상화될 수 있었다. 러시아는 2020년대 기준 세계에서 가장 곡물을 많이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 2022년 식량·에너지 위기도 러시아가 수출하던 곡물이 끊긴 것과 연관이 크다. 사실 소련의 곡물 생산량이나 절대량이 적어서 곡물을 수입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소련의 밀과 감자 생산량은 세계 1위였다. 육류 소비가 늘어나자 가축 사료용 곡물을 충당하기 위해 곡물을 수입했던 것이다.
여담으로 냉전 내내 소련이 식량을 수입한 국가 중 가장 중요한 국가는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항의 차원에서 수출을 일시 중지한 것을 제외하면 소련에 대한 식량 수출을 계속 이어 갔다.
[1]
사실 사회주의의 지향점과 전후 복구기, 건국 이래로 30년 넘도록 희생과 헌신을 해오며 쌓인 인민들의 요구와 희망사항 등을 생각하면 누가 집권하더라도 생각은 똑같았을 것이다.
[2]
12만 제곱킬로미터로서 남한 면적 보다도 넓다!
[3]
소련을 포함한
공산권 국가들에선 국내여행을 위한 국내 여권을 따로 발행했다. 자세한 내용은
려행증 문서를 참고할 것.
[4]
소련에서도 남쪽 지방에서는 옥수수가 잘 자란다. 소련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는 지금도 세계 5위의 옥수수 생산국이다.
[5]
옥수수 밭 근처에 콩을 심는 것도 땅이 계속해서 비옥해지게 하기 위해서다. 콩은 식물 중 거의 유일하게 뿌리혹 박테리아라고 하는 박테리아가 질소를 공급해 주기 때문에 질소비료 없이 햇빛과 물만 있어도 잘 자라는 작물로 유명하다.
[6]
이 곡은 1975년 소련의 국영 음반사이자 유일한 "공식" 음반사였던 멜로디야에서 낸 컴필레이션 앨범 "Парад оркестров"에 수록된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