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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c002d> 발생일 | 2004년 6월 1일 | |
발생 위치 | 일본 나가사키현 사세보시 | |
유형 | 살인죄, 청소년 범죄 | |
원인 | 미타라이 사토미와 츠지 나츠미의 분쟁 | |
인명피해 | <colbgcolor=#bc002d><colcolor=#fff> 피해자 | 미타라이 사토미 |
가해자 | 츠지 나츠미 |
[clearfix]
1. 개요
2004년 6월 1일 일본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에서 사세보시립 오쿠보 소학교 재학생 츠지 나츠미(辻 菜摘, 11)가 동급생 미타라이 사토미(御手洗 怜美, 12)의 목을 커터칼로 수 차례 찔러 숨지게 한 사건. 일본에서는 '사세보 소6 여아 동급생 살해 사건'이나 '네바다땅 사건'으로 불린다.이 사건의 범인 츠지 나츠미는 1992년 11월 21일생으로, 현재 [age(1992-11-21)]세다.
추후 알려진 바에 따르면 피해자 미타라이 사토미는 당시 마이니치신문 사세보시 국장이었던 미타라이 쿄지(御手洗 恭二)의 딸이었다고 한다.
사건이 자세히 보도된 일요신문의 기사.
팟캐스트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 - 어린 악마의 탄생 3: 미소녀 살인마를 향한 광적 환호, 네바다땅 사건에서는 사카키바라 사건의 범인 아즈마 신이치로와 본 사건의 범인 츠지 나츠미의 심리, 츠지 나츠미에게 열광한 일부 일본 네티즌들의 심리를 분석하였다.
2. 사건 이전
츠지 나츠미는 중상위권의 성적에 가고 싶었던 중학교가 있을 정도로 꽤나 학업에 성실했다고 한다. 얌전한 보통의 여아였지만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5학년 말부터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져 갔다고 한다. 사람과 이야기할 때 사람의 눈을 보지 못하고 눈을 동공이 흔들리거나 자주 깜박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급우인 남아가 웃는 얼굴을 보이면 쫓아가서는 옷깃을 잡아 때리거나 걷어차는 행동을 보였고 밀어 넘어뜨리고 몸을 짓밟는 등의 심히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주변의 다른 급우들이 당황하고 말리거나 행동을 제지하면 '젠장!' 이라며 분노를 나타냈다고 한다. 살인 당일 자신의 커뮤니티에 '아아, 저질러 버렸다. 해버렸다!'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그러나 담임은 특히 심각하게 포착하지 않았으며 나츠미의 얌전하고 어른스러웠던 평소의 모습에 이런 이상행동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 동급생에게 다른 아동과 함께 집단괴롭힘을 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6년 들어 폭력적인 언행이 늘어난 아이였지만 담당 교사로부터의 평판은 “지각도 적고, 수업 중에도 솔선해 손을 들어 질문하는 적극적인 학생”이라는 것이었다.
놀이를 하다가 사토미가 나츠미를 업고 '무거워'라며 농담 식으로 말하자 나츠미는 화를 내면서 '실례잖아'라고 말했다. 물론 나츠미는 날씬한 체형이었는데 이를 농담이 아니라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때를 기점으로 5월 말에 접어들면서부터 나츠미와 사토미를 포함해 다른 몇 명이 돌고 있던 교환 일기를 둘러싸고 트러블이 일어났다. 사토미가 사용하던 표현을 다른 급우가 비슷하게 사용하자 나츠미가 그 표현의 사용을 금지한다고 엄격히 주장했다. 이 주장에 대해 사토미가 '공평하지 않아'라고 반박함으로서 사토미와 나츠미의 관계가 틀어졌다.
이전부터 나츠미의 폭력적인 행동과 폭언이 심해졌던 게 화근이 된것으로 보인다. 이에 사토미가 커뮤니티 게시판에 나츠미의 외모나 성격에 대해 얼추 돌려 말하면서 놀려 댔는데 사토미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나츠미를 두고 '말투가 공주병 같다'며 조롱을 이어갔고, 나츠미는 예전에 교환했던 비밀번호를 이용해서 사토미의 홈페이지에 로그인한 후 강제로 삭제했으며 사토미의 프로필 사진을 호박으로 바꾸거나 아바타를 삭제하기도 했다.
글이 삭제된 것을 눈치챈 사토미는 이를 아라시(荒らし, 트롤링)로 칭하면서 조롱하는 듯한 글을 다시 올렸는데, 이런 글을 계속 삭제하던 나츠미는 점점 살의를 품게 되었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범행 계획을 올리기 시작했다.
5월 29일: 쳐죽여버릴 테다.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려. (ぶっ殺してやる。この世からいなくなってしまえ)
5월 31일: 내일 커터칼로 죽이기로 결심했다. (明日、カッターナイフで殺そうと決めた)
나츠미는 후에 진술에서 사토미가 게시판에 글을 쓰는것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포기했다고 말했다.
나츠미는 후에 진술에서 사토미가 게시판에 글을 쓰는것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후의 공술에서 사건으로부터 며칠 전에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려' 라고 생각했다고 말하고 있었으며 사토미의 트롤링을 보기 전부터 살의를 기억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1월부터 웹사이트를 열어 『배틀 로얄』의 동인 소설을 발표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장래 지망을 소설가나 만화가라고 쓴 적이 있다는 그녀는 속편을 예정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소름돋게도 자신이 다니던 6학년 학급과 같은 인원수의 38명이 서로 죽이는 스토리로, 각 캐릭터 모델이나 이름이 동급생들을 닮았다고 하며 피해 여아와 동성의 등장인물도 묘사되어 있었고 그 캐릭터는 이야기 속에서 끔찍하게 살해되고 있다며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피해 아동이었던 사토미는 밝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교우관계가 좋지 못했던 나츠미를 되려 챙겨주는 모습이었다고 교사에게 언급되었으며 도리어 급우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집단따돌림을 지지하는 쪽은 나츠미였다고 한다. 피해 아동인 사토미를 포함한 동급생들과 필기 합작 노트를 만들고 있었지만 앞서 말한듯 나츠미의 폭력적인 행동과 폭언에 다른 급우들과도 트러블이 있었기 때문에 사건이 시작되기 불과 3시간 전에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것도 피해자 사토미를 통해서.
3. 사건 내용
2교시 후 쉬는 시간 나츠미가 교환 일기를 빼고 싶다는 취지의 메모를 사토미에게 전했다. 나츠미는 이에 친구에게 "뭐든 다 때려치지 그래(なんなら全部やめちゃえば)"라고 전했다.12시 15분 경 수업이 끝나고 점심 시간이 시작되었다. 15분~35분 사이에 나츠미는 수업이 끝나고 점심을 먹으려 가려는 사토미를 6학년 교실에서 북쪽으로 약 50미터 떨어진 학습실에 "잠깐 와봐."라고 불렀다. 이후 커튼을 친후 의자에 앉히고 손으로 눈을 숨기고 뒤에서 목과 왼손을 그었다. 따가운 고통에 사토미는 의자에서 일어서 양손을 흔들며 나츠미의 손등에 상처가 생길 정도로 저항했지만 나츠미는 여러 번 세게 그었다. 이에 사토미가 쓰러지자 곧바로는 현장을 떠나지 않고 교실로 돌아가기까지의 약 15분간 손에 붙은 반환 혈액을 손수건으로 닦은 후 피해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거나 몸을 만지거나 걷어차는 둥의 행동을 취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피해자의 목에는 깊이 약 10cm, 왼쪽 손등엔 길이 약 10cm의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가 있었다고 한다.
12시 35분에 담임이 사토미와 나츠미가 교실에 없는 것을 깨달았다. 담임이 복도에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나츠미는 돌아와 피에 젖은 옷을 보이면서 담임과 마주했다. 침묵하는 나츠미의 손에는 커터 나이프와 피로 젖은 손수건이 잡혀 있었고 바지의 옷자락은 물에 담근 것처럼 진함을 늘리고 있었다. 담임은 곧 나츠미로부터 커터 나이프를 압수했다. 당초 담임은 나츠미가 부상을 입고 있다고 생각해 손을 벌렸지만 부상은 없었다. 이후 놀란 교사가 강하게 나츠미에게 사정을 묻자 나츠미는 "내 피가 아니에요. 내가 아니에요."라고 웅얼거렸다고 한다. 나츠미는 이후 사토미가 쓰러져있는 학습실의 방향을 가리켰다.
담임이 현장에 달려가자 사토미가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는 것을 시인했다. 선생은 「구급차! 구급차! 구급차!」라고 외치고 사토미를 안고 가면서 상처 부위를 눌러 지혈을 시도했다. 외침을 들은 3학년 교실 교사가 직원실로 뛰어들어 교장에게 보고했다. 교장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으나 학생이 부상을 입었다는것을 인지한 채 스스로 현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교장과 가해학생인 나츠미는 이 시간 엇갈리고 있었다. 담임이 도착할 때 사토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고 한다. 학습실에는 피가 흩어져 벽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입구 부근에는 부러진 커터 나이프의 칼날이 떨어져 있었으며 사토미의 안경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12시 43분에 현장의 참상을 목격한 교장은 119 구급대에게 사건을 통보했다. 교장은 시 소방국 지령과에 상황을 잘 설명할 수 없었지만 곧바로 학교로부터 약 4km 떨어진 파출소로부터 구급차가 출동했다. 거의 동시에 피해자의 아버지에게도 연락을 넣었다. 사토미의 아버지는 택시로 학교로 향했다.
50분에 구급차가 도착하지 않는 것에 초조했던 교장은 다시 119로 통보했다. 교사들은 각 교실의 문과 커튼을 닫고 학습실을 차단했다.
12시 51분에 구급차가 도착했다. 구급대원이 관계자로부터 사정을 듣고 돌린다. 구급대원은 병원으로의 반송을 포기하고 사세보 경찰서에 연락했다.
8분 뒤인 12시 59분에 사토미의 아버지가 학교에 도착했다.
시간은 불명. 나츠미는 교사들이 학습실에 모여 있는 동안 복도에서 흥분 상태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후 2층으로 내려가던 나츠미를 찾은 한 교사가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계단에 앉게 했지만 당시 그녀가 가해자인 줄은 몰랐다고 회고한다. 나츠미는 울 듯한 얼굴로 목소리를 떨면서 혼잣말처럼 '구급차를 불렀어...', "나, 어떻게 되는 거야..."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에 교사는 나츠미를 진정시키고 1층 보건실로 데려가 손을 씻긴 후 옷을 갈아입혔고 다리에 붙은 피는 정면 현관쪽의 개수대에서 씻어냈다.
“누군가 자세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라고 구급대원이 물었더니 아까 나츠미를 보건실로 데려가 옷을 갈아입혀 준 교사가 나츠미를 데려왔다. 대원이 사토미가 부상을 입은 이유를 물었더니 "내가 커터로 그었다"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경찰은 40분에 걸쳐 교장실에서 사정을 청취했다.
나츠미는 '토요일에 계획을 짰고 월요일에 죽이려고 했지만, 들키려고 생각하고 오늘로 했다', '죽을 때까지 기다린 후 들키지 않도록 교실에 돌아왔다.', '기절시킨 후 천장에 목을 메게 할까 망설였지만 더 확실한 방법으로 커터 나이프를 선택했다.'. '왼손으로 눈가리개를 하고 그었다'고 말했다.
16시경 6학년을 제외한 모든 아동이 집단 하교했으며 6학년은 14시부터 5곳으로 나뉘어 사정청취를 받고 있었다. 1인당 15분 정도였다. 18시경에 조서가 완성되어 보호자의 입장과 6학년 아동의 하교가 인정되었다. 출장처에서 돌아온 교장이 보호자에게 사태를 설명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몇 시간 후 츠지 나츠미는 사세보 경찰서로 차로 이동했다. 19시경까지 급식을 먹지 않았던 그녀는 간식을 받아먹었다.
20시 30분에 경찰이 살인 사건이라고 발표했으며 21시경 피해 아동 사토미의 아버지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22시 30분에 나츠미는 경찰서 내의 여성 직원 휴게실에서 취침했다.
4. 사건 이후
6월 14일 나가사키 소년 감별소에서 출장 심판이 열렸는데 15시경에 개정했다. 당시 나츠미는 보라색의 블라우스에 연한 색의 저지를 입었다. 이후 정신감정 실시를 결정해 폐정되었다. 가정법원이 결정한 감정유치기간은 8월 14일까지 총 61일간이었다.6월 23일 부첨인이 정신감정 중이던 츠지 나츠미의 모습 등에 대해 발표했다. 츠지의 부모는 유족이 보내는 편지를 함께 읽었는데 양 부모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어떻게 사과해야 좋을까"라고 말하고 심정을 이야기한 반면 시설을 방문한 부모와의 면회에서 나츠미는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세간 이야기 등은 했지만 부모가 돌아간 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낸 데다 언니가 면회를 오자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7월 20일 학교에서 피해 아동 사토미의 이별회가 열렸다.
8월 24일 소년심판의 의견진술이 이뤄졌다. 이에 감정유치기간이 1개월 연장되어 9월 14일까지로 바뀌었다.
9월 15일 10시 30분에 나가사키 가정법원 사세보지부 201호 법정에서 마지막 소년심판이 열렸는데 나가사키 가정법원 사세보 지부의 고마쓰 히라나이 재판장, 우에다·진토 양판 사보, 가정법원 조사관 5명, 소년 감별소 직원 2명, 부첨인 3명, 나츠미의 부모가 참석했다. 이때 츠지 나츠미는 흰색 바탕에 체크 무늬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날 나츠미를 아동자립지원시설인 국립 키누가와 학원(国立きぬ川学院)에 송치하고 2004년 9월 15일부터 2년간의 강제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보호처분을 결정했다.
입소 초기에는 나츠미에게 집단생활을 시키지 않고 전용동에서 교정교육이나 정신과 의사·임상심리사에 의한 각종 심리검사를 주기적으로 행한 후 서서히 집단생활로 이행했다.
9월 16일 9시 50분 나츠미의 부모와 부첨인 3명이 나가사키 소년 감별소를 찾아 나츠미와 면회했다.
나츠미와 4명의 직원을 태운 차가 오후에 감별소를 출발했으며 나가사키 공항에서 ANA668편에 탑승한 후 18시에 도쿄 국제공항에 도착했는데 이송 시 일반 탑승 개시 전에 기체 마지막 꼬리에 탑승했다.
도쿄 국제공항에서 내린 후에는 육로로 국립 키누가와 학원으로 이동하여 21시 18분에 도착했다.
2005년 3월 츠지 나츠미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나츠미는 시설의 분교인 사쿠라시립 중학교 우노하나분교에서 졸업식을 맞이했는데 감색의 블레이저에 플리츠 스커트를 입고 있었으며 나츠미의 부모와 직원 10명 정도가 참석했다. 당초에는 오오쿠보 초등학교의 교장이 학원에서 졸업 증서를 건네 줄 예정이었지만 결국 사세보 아동 상담소의 직원이 건네주게 되었다.
2005년 4월 22일 첫 단체 행사인 하구로산 등산 소풍에 참가했을 때는 감색의 저지 바지에 흰색 트레이너를 입고 빨간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으며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었다. 등산 중에 교사가 "괜찮아?"라고 물어보자 "네, 괜찮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5월 13일에는 시설의 항례 행사인 원유회에 참가했다.
나츠미는 2008년에 시설 내 중학교를 졸업한 후 도치기현 수용시설로 이감되었고 2013년에 출소하였다.
오쿠보 초등학교에서는 이 사건이 일어난 6월 1일을 생명을 바라보는/경시하는 날로 정하고 매년 이 사건을 교훈 삼아 도덕교육을 하고 있다.
사건 당시 사토미의 아버지는 마이니치신문 사세보 지국장이었는데 사건 발생 직후 기자로서의 직업의식과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아버지 사이에서 흔들렸고 연일 사건 보도에 대해 딸의 이름이나 사진이 나오면 사건을 들이대는 것처럼 마음대로지만 굳이 이름이나 사진을 내보내지 않아도 뉴스나 기사로 성립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이야기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츠지 나츠미의 친언니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고향을 떠나 검정고시[1]를 통해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다고 한다.
사토미의 친오빠는 나츠미를 한두 번 정도 만난 적이 있는데 자택에 여동생의 친구들이 잘 놀러 왔고 그 중에 나츠미도 있었다고 하며 사토미와 성향도 잘 맞고 게임 이야기를 하거나 「 대난투 스매시브라더스 DX」 를 함께 즐겼다고 한다. 사건으로부터 이틀 전 학교 운동회에서도 캠코더를 돌리고 있던 친오빠에게 나츠미의 모습이 찍혔다고 하는데 나츠미는 웃으면서 폰과 머리를 톡 친후 도망갔다고 했지만 뒤돌아보니 다른 급우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고 한다.
사건 이후 나츠미는 사토미의 가족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발 살인을 저지른 촉법소년들조차 처벌을 피하거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미안해하거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나츠미의 부모가 유족에게 온 편지를 눈물 범벅으로 읽는 그 순간에도 냉정했다고 한다. 이에 사토미의 친오빠도 기자 회견에서 사과를 요구했는데 '만약 츠지 나츠미가 사과하며 온다면, 무섭다는 감정은 들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상대도 대등한 관계로.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한 것을 알고 있을 지금, 제대로 사과해 주었으면 한다. 그쪽이 깨끗이 청산했으면 좋겠다. 또 반대로 시설에서 나온 후에도 그녀가 오지 않거나 만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라가 재교육에 실패했다고 정도로 나는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5. 반응
당연하게도 이 사건은 매스컴과 지상파는 물론 뉴스를 통해 세간에 알려져 주목을 받았는데 일본에는 미성년자가 범행을 저질렀을 때 가해자의 신상 공개를 제한하는 법률이 존재하기 때문에 언론에선 가해자의 본명이 알려지지 않았다.뜻밖에도 범행 후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사진 속에서 귀여운 외모가 공개되자 2ch과 그림 게시판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어 옷에 적힌 타이포그래피 'NEVADA'를 따서 '네바다 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귀여운 외모 탓인지 팬아트나 코스프레까지 등장했으며 네바다 땅이 입고 있었던 NEVADA 티셔츠는 매진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공개된 것은 위의 흐릿한 단체 사진 1장뿐이며 귀엽게 생겼다는 평을 듣고 인기를 얻기는 했으나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인터넷상에는 네바다땅 고화질 사진이 떠돌곤 하는데 이는 이목구비를 완전히 새로 그려넣은 수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진 모두 합성한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
후지TV 방송 보도 중 네바다땅 소유의 일기장을 클로즈업한 장면이 있었는데 이 중 한 페이지의 뒷면에 가타카나로 나츠미라고 적혀 있어서 파문을 몰고 왔다. 이는 네바다땅의 본명이었으며 인근 주민들의 증언이 더해져 나츠미의 성씨는 물론 생년월일을 포함한 개인정보까지 밝혀졌다.
네바다땅의 본명은 츠지 나츠미(辻菜摘)로 장래희망은 만화가, 필명은 dhuo19, 좋아하는 인물은 시바사키 코우와 마에다 아이라고 하였다. 개인 홈페이지[2] 운영도 했던 모양이다.
경찰 수색 결과 츠지 나츠미의 컴퓨터에서는 잔인하고 잔혹한 사진과 동영상이 다수 발견되었으며 공격적인 성향은 히키코모리적 행동으로 말미암은 현실과의 단절, 인터넷 중독, 만화 영화 열중 등이 원인으로 추정되었다.
나츠미는 언니의 렌탈 카드를 사용하여 15세 미만 관람 불가 영화 배틀로얄을 대여점에서 빌려 몇 번이나 시청하고 있었는데 당시 11살이었던 나츠미가 이 영화를 토대로 범행 계획을 세웠다고 하며 1주일간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하고 이를 개인 홈페이지에 작성하였다. 여담이지만 배틀로얄의 등장인물 중 소마 미츠코를 담당한 배우가 나츠미가 좋아하는 시바사키 코우다.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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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미는 그림도 많이 그렸는데 이는 방송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 중 하나엔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한국어가 적혀 있었다.
- 일본 대학의 대학 교수인 모리 아키오가 자신이 주장한 게임뇌 이론의 뒷받침 근거로 해당 사건을 제시하였다.
- 피해자의 성씨인 미타라이는 희귀 성씨라고 한다. 현재 약 1000명 정도의 인구가 사용하고 있다.
- 사토미의 아버지의 직속 부하였던 마이니치신문 기자 가와나 쇼시는 사토미의 친오빠의 말을 인용해 「'사과할 꺼면 언제든지 와': 사세보 초등학교 6학년 동급생 살해사건」이라는 제목의 서적을 저술했다.
7. 관련 문서
- 메리 플로라 벨 - 네바다땅과 마찬가지로 11세 때 살인을 저지른 영국인.
- 이미혜 - 대한민국의 범죄자. 강도 사건을 저질렀는데 얼굴이 예쁘다는 이유로 강도얼짱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회원 몇만 명이 모인 팬카페가 개설되고 구명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 사무라이 스피리츠 제로 스페셜 - 이 사건 때문에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작품 중 하나. PS4/Vita판 발매 전까지 그 어떤 플랫폼으로도 이식되지 못했으며 AES에서조차 칼질을 당해야 했다.
- 촉법소년
8. 외부 링크
- 사세보 소학교 동급생 살인사건 자료(일본어) - 네바다땅이 개인 홈페이지에 올렸던 일기와 동인 소설이 아카이브돼 있다. 당시 2ch(현 5ch) 등지에 올라왔던 팬아트들도 볼 수 있다.
-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