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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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五戒불교에서 승려와 재가자를 가리지 않고 신자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계율이다. 팔리어로는 빤짜실라(Pañcasīla)라고 부른다.
2. 설명
삼보에 귀의하는 맹세를 ‘삼귀의(三歸依)’라고 하는데 목숨이 다할 때까지 부처님(Buddha)과 부처님의 가르침(Dhamma)과 승가(Sangha)라는 세가지 보배를 의지처로 삼겠다는 의미의 불교의례이다. 한국불교의 경우 다양한 부류의 불자들이 있다. 불교대학에서 기초교리와 각종 경전을 공부하거나 선원에서 안거를 하는 경우도 있고, 불교에 대해 교육받을 기회가 없어서 1년에 몇 번 복을 빌기 위해 절에 다니는 경우도 있으며 절에 다니지는 않지만 부모의 종교가 불교이거나 불교적인 분위기가 좋아서 스스로를 불교와 가까운 사람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이러한 사람들을 흔히 불자라 하는데 절에 다닌다고 해서 불자라 할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면 소리 내어 삼보에 귀의하는 것(三歸依)과 다섯 가지 계율(五戒)을 지키겠다고 맹세하고부터 불자라 할 수 있다. 가령 매일 절에서 살면서 기도나 참선을 평생토록 하고, 팔만대장경을 모두 외우고, 힘써 바라밀 실천을 하는 신심 있는 사람이라도 삼귀의와 오계를 맹세하지 않았으면 불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삼귀의와 오계는 불자가 되는 첫 번째 관문이며 성불할 때까지 늘 함께 해야 하는 소중한 것이다.
불자가 된 후 법회를 할 때나 예경을 할 때 반드시 삼귀의와 오계를 소리 내어 외워서 신심을 굳게 하고 깨달음을 원만하게 성취하는 자량이 되게 해야 하는데 이를 가벼이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한국불교의 경우 법회를 시작할 때 삼귀의를 하는 것은 정착되어 있으나 오계를 외우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남방불교의 경우 삼귀의와 오계를 간절하게 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우리도 이러한 간절한 모습의 법회진행을 보완해서 실시한다면 좋을 것이다.[1]
아래는 불교의 오계다.
1. 불살생(不殺生)[2]: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다.
2. 불투도(不偸盜): 도둑질하지 않는다.
3. 불사음(不邪淫): 아내 이외의 여성, 남편 이외의 남성과 부정한 정교를 맺지 않는다.
4. 불망어(不妄語):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5. 불음주(不飮酒): 술을 마시지 않는다.
오계란 재가불자인 우바새와 우바이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이다. 계는 산스크리트어 ‘실라’를 번역한 것으로 행위·습관·도덕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오계를 보면 앞서 서술된 내용과 같이 "~하지 마라." 는 식으로 풀이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계의 정신은 중도에 입각해 있다. 그럼으로 '~하지 마라' 고 해석하는 것 보다는 '~을 멀리하라. 가능한 한.'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다시 말해서 '~한 습관을 들여라.' 라고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앞서 계의 원어인 산스크리트어 ‘실라’는 습관이란 뜻을 품고 있다고 하였다.) 이 습관이라는 것은 '반드시' '절대적'이고 '의무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법규와는 달리 자율적, 자발적으로 형성하는 것이고 상황 조건에 따라 스스로 형성한 습관적인 행위와는 다른 행위를 할 수도 있으며, 그런 경우가 법규를 위반한 것이 아니라면 이는 제재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가령 한 학생이 새해에는 매일 아침마다 기상 후 물을 마시는 습관을 들여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하자. 그런데 새해가 시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이 학생은 기상 후 아침에 물을 마시는 것을 깜박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서 경찰이 와서는 수갑을 채우거나 벌금을 물리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계는 반드시 의무적이고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조항이 아니며, ('율'과는 달리) 강제성이 없고 자율성을 지니기에 조건에 따라서 보다 자타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지혜롭게 행위를 수정 가능한 유동성을 가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연기와 중도적 맥락에서 불교의 오계는 '절대로 ~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살생 투도 등의 오계에 기술된 행위를 하는 것을 '멀리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오리지널 불교에 입각한 재가자들이 지키는 '계'의 바른 풀이이자 '계의 정신'이다. 예시를 들자면 다른 생명을 억압하고 폭력을 쓰거나 살생하는 것을 멀리하라는 불살생계를 지키는 재가자 일지라도 동네 뒷산에서 멧돼지나 미친 개가 튀어나와서 가족들에게 돌진하려 한다면 몽둥이를 들고 가서 적어도 쫒아버리려고는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불교적 자세이다. 오계는 이런 관점으로 풀이해야 한다. 계는 절대적이고 실체적인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연기법에 입각하여 중도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해석이 바로 계를 의무가 아니라 습관과 같은 자율적인 성질을 지닌 것으로서 그리고 '가능한 한 ~을 멀리하고, 가능한 한 ~을 행하라는 것'으로서 해석하는 것이다.
다시 설명해보자면, 어떤 학생이 새해에는 매일 영어공부를 하기로 목표를 세웠지만 하루 공부를 안하게 된 상황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계의 정신으로서 상황을 바라보자면 이 상황에서는 어찌 해야 할까? 이 때는 참회를 하면 된다. 오계 역시 이와 같이 자율적으로 스스로가 가능한 한 행하려 노력하는 것이지만 만약 지키지 못했다면 참회하고 앞으로는 지키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와 중도에 입각한) '계'의 정신이다. (그래서 계는 융통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계는 왜 지켜야 하는 것일까.
계는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외도(外道)들의 비행에 대해 출가와 재가불자들에게 내린 교훈이었다. 〈사분율〉에 보면 ‘부처님은 대중의 통솔·화합·안락을 위하고 다스리기 어려운 자를 잘 다스리며, 부끄러워하는 자에게 안락을 주기 위해 계를 제정하셨다’고 한다. 또한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믿음을 주고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믿음을 더욱 키워나가게 하며, 번뇌와 악을 끊어 정법이 영구유통 되도록 하기 위해 계를 제정하셨다’고 한다.
율장에서의 이유는 이와 같으며, 같은 맥락에서 다시 설명하자면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듯 살생, 투도, 사음, 망어, 음주 등의 십악업에 속하는 업(행위)을 지으면 그 행위가 원인이 되어서 괴로운 결과가 발생되며 그와 반대되는 방생(불살생), 보시(불투도), 청정행(불사음), 진실되고 화합하게 하는 말(불망어), 지혜를 키움(불음주) 등의 십선업에 속하는 행위를 지으면 그 행위가 원인이 되어서 안락하고 이익되는 결과가 발생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오계, 팔재계, 십선계, 보살계, 삼취정계 등의 계를 제정하신 것이다.
조금 보충설명을 하자면, 새싹이 피어나려면 씨앗이라는 '직접적인 원인'과 햇빛 물 토양 양분 적절한 온도 등의 '간접적인 원인'이 화합해야 한다. 이와 같이 중생이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행위(신업, 구업, 의업)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그 원인이 시공간적인 범주에 속하는 간접적 원인들과 만날 때 (작용이 있을 때 반작용이 생기듯, 콩을 심으면 콩이 나오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오듯) 그 원인에 상응하는 결과가 발생된다. 이때 중생이 짓는 업을 인因이라 하며 환경적 조건을 연緣이라 한다. 이 인과 연이 화합할 때, 이 인연에 의지하여, 원인에 상응하는 현상이 발생되게 된다. 이를 인연생기(因緣生起)라 하며 줄여서 연기법 또는 인과법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선한 원인을 지으면 즐거운 결과가 발생되고(善因樂果) 악한 원인을 지으면 괴로운 결과가 발생된다(惡因苦果)고 하셨다. 이러한 이치를 연기법(인과법)이라 하며, 이 같은 원리를 살펴보자면 계를 행하게 되면 중생에게 안락하고 이익 되는 결과가 발생됨을 알 수 있다. 그 사례 하나를 소개하겠다.
불살생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비로써 생명을 살리며 그 공덕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데까지 이른다. 옛날, 관상을 잘 보는 한 스님이 친구의 아들을 상좌로 데리고 있었다. 아들의 명이 너무 짧으므로 스님을 만들면 짧은 명을 넘길 수 있지나 않을까 하여 보내왔던 아이였다. 어느날 상좌의 관상을 보던 스님은 깜짝 놀랐다. 1주일 안에 상좌가 죽을 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친구의 어린 아들이 절에서 죽으면 친구 내외가 너무 섭섭해할 것 같고, 다만 며칠이라도 부모 옆에서 같이 지내게 해주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하여 상좌에게 말하였다. "집에 가서 삼베옷도 한 벌 만들고 무명옷도 만들고 버선도 짓고 하여, 한 열흘 다녀오너라." 그 동안에 집에 가서 부모도 만나고 부모 앞에서 죽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상좌는 열흘이 지난 뒤에 옷도 만들고 버선도 짓고 스님 잡수시라고 떡까지 해 가지고 아무 일 없이 돌아왔다. 돌아온 상좌의 얼굴을 보고 스님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얼굴은 본래 단명한 상에다 최근에 상이 아주 나빠져서 꼭 죽는 줄 알았는데, 그 나쁜 기운은 완전히 사라졌을 뿐 아니라 앞으로 장수할 상으로 변하여 있었던 것이다. 틀림없이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스님은 상좌에게 자초지정을 물었고, 상좌는 다음과 같이 사실을 아뢰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작은 개울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개미떼 수천 마리가 새까맣게 붙어 있는 큰 나무껍질이 흙탕물에 떠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작은 폭포가 있고 그 아래 물이 소용돌이치고 있어 모두가 물에 빠져 죽을 상황이었습니다. 순간 스님께서, '죽을 목숨을 살려주어야 불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고 복을 받는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얼른 옷을 벗어부쳐, 옷으로 나무껍질과 그 개미들을 다 받아 가지고 마른 언덕 땅에다 놓아주었습니다." 스님은 그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상좌의 등을 두드려주며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렇지! 개미떼를 살려준 공덕으로 장수하게 되었고 부처님의 법을 잘 공부하게 되었구나. 다 불보살의 가피력이시다.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7일 뒤에 죽을 상좌의 생명이 방생한 공덕으로 70년 연장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험담은 경전이나 영험록에 허다하게 많이 있다. 무릇 생명을 살리면 몸에 있던 병도 낫고 업장도 소멸되고 운명도 능히 새롭게 바뀌게 된다.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이라면, '불살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뭇 생명을 살리는 자비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일타큰스님, 『오계이야기』, 효림출판사(2000), p.28-30 |
더 나아가 계를 지키는 것은 무명과 미혹을 깨뜨리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와 같은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깨닫기 위한(성불하기 위한) 길인 계정혜(戒定慧) 삼학도(三學道) 중 하나로서, 계(戒)를 지키며 정(定)을 닦아나가게 되면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게 되면서 - 혜(慧) -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같은 내용들이 우리가 계를 지켜야 하는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해보면 계를 행해야 하는 이유이자 계의 제정 목적은 스스로도 이롭게 하고 다른 생명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 라고 할 수 있다. [3]
그리고 오계는 금계보다는 권계로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고 깊이있는 해석으로서, 단순히 ~하지 말라(멀리하라)는 것보다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정리해보자면
불살생(不殺生)은 생명을 살생하거나 억압하거나 폭력을 쓰지 않고 자비심으로 생명을 살리고 방생한다.[4]
불투도(不偸盜)는 주지 않은 것을 갖지 않으며 아낌없이 조건없이 베푼다.
불사음(不邪淫)은 사음하지 않고 청정하게 산다.{생명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서 (있는 그대로 즉 부처님으로, 불성으로, 나와 둘이 아님으로, 과거생에 부모님이었고 형제 자매였다고, 육신의 실상은 청정하지 않다고) 바라보고 대우한다.}
불망어(不妄語)는 거짓말, 이간질, 욕설, 꾸미고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고 진실되고, 화합하게하고, 부드럽고, 상대에게 이익을 주고 깨우침을 주는 말(법보시)을 한다.
불음주(不飮酒)는 술을 비롯한 마약 담배 도박 게임등의 중독성이 있는 물질을 섭취하지(행하지) 않고 늘 깨어있는 상태로서 알아차리고 꿰뚫어 보는 수행을 하여 밝은 지혜가 생기게 한다.[5]
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오계(五戒)는 이 같은 내용의, 자리이타를 목적으로 삼으며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해주는, (습관과 같은) 중도적인 성격을 가지며 가능한 한 실천하고 지키려 해야 할 행위규범을 말한다.[6][7]
오계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성계와 차계로 구분지어서 분류하는 관점[8]과 오계 전체를 학습계율로 분류하는 관점[9]이 있다. 이 두가지 상반되는 관점에 대하여 한국 불교계와 종단적 차원에서 명확하게 오계를 바라보는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필요해 보이며 이는 불자 개개인들의 논의주제로도 적합해 보인다.
부처님은 마지막 유훈에서 “법과 율(계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Yo vo, ānanda, mayā dhammo ca vinayo ca desito paññatto, so vo mamaccayena satthā)” (D16) 라고 하셨다. 이 말은 불교인들의 모든 행위는 경장과 율장에 실려 있는 가르침에 따라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경장과 율장에 근거하지 않고 임의적으로 계를 해석하여 현실에 적용하려 한다면 본질에서 크게 어긋날 수 있다. 오계를 바라보고 해석함에 있어서 이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성도 이후 45년간 길 위에서 설법과 교화를 하시던 부처님의 삶의 자세를 이어받은, 소수의 출가자만이 아닌 출가와 재가 그리고 일체중생 모두가 다 같이, 모두 함께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성불하고자 하는) 대승불교의 상구보리 하화중생 즉 자리이타(自利利他) 자각각타(自覺覺他) 정신 역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리라.
3. 오계 이외의 계들
불교에는 재가인(在家人)이 지켜야 하는 오계(五戒) 이외에도 팔계재(八戒齋), 사미(沙彌)와 사미니(沙彌尼)가 지켜야 하는 십계(十戒), 십선업을 언급한 십선계(十善戒) 그리고 삼취정계(三聚淨戒) 등도 있다.오계를 비롯한 이 같은 계와 율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스승임을 잊지 말도록 하자.
4. 기타
참고로 일부 한역불경은 오계의 첫 글자에 아니 불(不) 자 대신 떠날 리(離) 자를 써서 이살생, 이투도, 이사음, 이망어, 이음주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그리고 오계란 표현은 유교, 도교 에서도 사용한다고 하나 이 경우 '오계'라는 명칭만 동일할 뿐 불교의 오계와 내용이나 의미는 다르다.
[1]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816
[2]
'아힘사'라고도 말한다.
[3]
그럼으로 지범개차(持犯開遮)의 기준 역시 실체적 견해나 이기심 등의 어리석음이 아닌 연기적(중도적) 지혜에서 비롯된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되어야 할 것이다.
[4]
방생을 자꾸 하다보면 비심과 자심(자비심)을 깨닫게 된다. 놀부처럼 복을 바라고 욕심으로라도 방생을 하는 것 역시 그 덕에 생명 하나라도 살 수 있게 되니 다행이고 좋은 일이며, 이 같은 방생일지라도 자꾸 하다보면 결국 자비심을 알게 되고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집에 들어온 작은 거미나 그리마 등의 곤충들이 보이면 그 부근에 종이나 쓰레받이를 깔고, 그 위에 곤충들이 올라오면 플라스틱 반찬통 같은 곳으로 옮겨서 집 밖으로 내보내 주면 그것도 좋은 방생이다. 이외에도 유튜브의 방생도공스님 채널을 보면 여러 생명들을 방생하시는 좋은 영상들을 볼 수 있다. 더불어 방생은 축생들 뿐만이 아닌 인간을 방생할 수도 있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재물과 부처님 가르침을 보시하고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를 하여서 스스로 자립이 가능하게끔 성장할 수 있도록 고아원 양로원 특수학교를 비롯해 세상에서 고통받고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돕는 것이 곧 사람을 방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https://gikoship.tistory.com/15780677 (붓다께서 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을까?)
[6]
각각의 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일타큰스님이 지으신 <오계이야기>나 유튜브의 BBS나 BTN 채널에 올라와 있는 법문들 등의 여러 불서들과 법문들을 통하여 찾아볼 수 있다.
[7]
https://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2412 (오계에 대한 설명이 잘 되있는 기사이다.)
[8]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9645
[9]
http://www.mediabuddha.net/m/news/view.php?number=20881 ‘불음주계’가 취하도록 마시지 않기? 란 제목의 기사이다. 남방불교에서 오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서술된 내용으로서, 오계를 성계와 차계로 구분짓는 관점과 대치되는 내용이 담겨있다. 법과 율에 근거하지 않고 임의적으로 계를 해석‧적용한다면 본질에서 크게 어긋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기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