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8:58:22

허정무/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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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정무의 지도자 경력을 정리한 문서.

' 무승부의 승부사 허정무승부', ' 무재배의 달인' 등의 별명으로 불는데, 허정무는 감독 생활 전반기를 통틀어 이례적으로 무승부가 은근히 많은 감독으로, 전남 드래곤즈 감독 시절의 9연무 등 화려한 무승부 기록을 많이 갖고 있다. 이를 비칭으로 여긴다면 그건 왜 그런 평가가 나오는지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무시만 하기 때문이다.[1]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는 1999년 당시 A매치[2]에서 당시 피파랭킹 1위 브라질[3]을 아시아 최초로 꺾었으며,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사상 첫 원정 2라운드(16강) 진출을 달성하며 현재까지 한국 원정 월드컵에서 가장 높은 순위(15위)를 기록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4]

하지만 감독 커리어의 마지막인 인천팬들에게는 최악의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2. 코치 경력

2.1. 포항제철 아톰즈 코치

1986년 선수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1990년 월드컵 대표팀 트레이너, 1991년 포항 제철 아톰즈 코치 등을 역임하다가 포항 감독 이회택이 1992년 K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물러나자 1993년 코치직에서 감독으로 영전하게 된다.

2.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1994년 월드컵 대표팀 코치를 역임했다. 1995년에는 박종환 코리아컵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둬 사퇴하는 바람에 대표팀 사령탑이 공석이 되자 그해 8월 12일 수원에서 있었던 브라질(!!!)과의 친선 경기를 임시 감독 자격으로 지휘하기도 했다.(결과는 0-1 패)[5]

2.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이후 대한축구협회 기술고문을 맡았다가, 2004년 기술위원회 부위원장에 오른다. 그러다 움베르투 코엘류가 잇달은 졸전 끝에 해임되고 조 본프레레가 감독으로 선출되면서 임시로 수석코치 자리를 맡았다. 약 5개월 뒤 본프레레 체제가 안정되자 수석코치를 사임하고 다시 K리그 감독으로 복귀했다.[6]

2.4. 대전 시티즌 기술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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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김세환에 의해 대전 시티즌 기술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연륜을 바탕으로 조진호를 지원했다고 한다. #

이때 아드리아노와 임창우 등의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3. 감독 경력

3.1. 포항제철 아톰즈 감독

1993년 감독 첫 해는 리그 6팀 가운데 4위를 차지했지만, 아디다스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체면치레를 했다.

1994년 전북 버팔로가 새로 창단하여 7개 팀으로 리그를 운영했는데 당연히 전북은 승점자판기 노릇을 하며 상위를 노리는 팀들은 치열한 레이스를 벌여야 했다. 결국 포항은 승점 50점 3위로 리그를 마친다. 2위는 유공(51점) 우승은 일화(54점). 한편 아디다스컵은 작년과 정반대로 신생 팀 전북에게도 밀려 꼴찌를 기록했다.
1995년 전후반기로 나뉜 리그에서 후반기 우승을 차지하여 전반기 우승을 차지한 일화와 대결하나 패배하여 준우승을 차지한다. 이 독특한 제도 때문에 오늘날 기록지를 뒤져보면 뭥미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우승을 차지한 일화는 승점 48점이고 준우승 포항은 승점 55점이다.(...) 한편 아디다스컵 성적은 8개팀 가운데 7위로 역시나 좋지 못했다.[7]

이 시기 일화의 호화 멤버를 언급하며 포항의 호화 멤버 못지 않았다고 허정무를 커버해주는 의견이 있지만, 그래봐야 일화의 멤버와 포항의 멤버를 비교해 볼 때 누가 더 국대에 많이 뽑혔느냐로 가려 보면 우열은 명확하다. 그리고 허정무가 그 일화의 뒤를 이어 준우승이나마 차지한 것도[8] 이회택이 리빌딩까지 다 끝내고 물려준 우승 멤버들을 3년이나 굴리고서야 가능했던 일이다. 거기다 코치에서 영전해 올라온 거라 팀 적응이고 뭐고 없던 시기였다. 그냥 이 시기 허정무는 지지리 못했을 뿐.

다만 이 시기를 언급하기 애매한 것이, 포항을 과연 온전히 허정무의 팀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 부호가 달린다. 최상단 허정무의 커리어 연표를 보면 한가지 어이없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1994~95년 포항 감독직과 대표팀 코치/감독직이 겹친다. 즉 멀쩡한 프로팀 감독을 시즌 도중 월드컵 대표팀으로 데려갔다(...)[9] 사실 전임 이회택도 1990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으로 납치당한 경력이 있다(...)

3.2. 전남 드래곤즈 감독 1기

이후 임시로 국대 감독을 맡았지만 전임 감독제[10]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만큼 사실상 봉사직이나 다름없었고, 결국 1996년 전남은 성적 부진을 구실로 창단 감독인 정병탁을 시즌 도중 경질하고[11] 허정무를 영입한다.
그리고 1997년 전남은 역사를 쓴다. 바로 21경기 무패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황신의 가호가 깃들면서 전남은 리그에서 승점 1점차 2위 분루를 삼켜야 했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아디다스컵 2위 프로스펙스컵 2위를 기록했다(...) 전남팬이던 아니던 보는 이로 하여금 참 웃프게 다가오는 기록인데, 더 골때리는 부분은 저 3개 부분에서 전남을 꺾고 1위를 차지한 팀이 똑같다. 바로 부산 대우 로얄즈 K리그에서 단 둘 뿐인 왕조 칭호를 들은[12] 바로 그 팀 바로 그 해였다.
결국 리그가 끝나고 열린 FA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전남에게 창단 3년만에 우승컵을 안겨주었다. 다만 해당 문서에 나와있지만 이 시기 FA컵은 우리가 지금 시점에서 느끼는 것과 위상이 약간 달랐다는 점은 참고하자.

1998년에는 4위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나[13] PO 첫 경기에서 무재배 승부차기로 탈락한다. 그리고 1998년 차범근이 월드컵 본선 2차전 네덜란드전 대패로 인해 월드컵 도중 중도 경질되고 말고, 그 후임으로 허정무가 대표팀 감독에 임명된다.

3.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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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대표팀 감독에서 계약 만료되자마자 한 달 만에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 비상근 자문위원직을 맡았다. 즉, 자신을 계약 만료시킨 회사에서 자신의 후임이 일을 잘하도록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한국 축구 역사상 전례없는 행보를 보여주며 많은 축구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

3.4. 용인시축구센터 총감독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난 뒤 협회 기술자문 위원을 하던 허정무는 국내외 여러 클럽에서 감독 제의를 받았지만, 유소년 육성을 위해 모든 제안을 고사한다.

당시 축구 불모지였던 용인에 용인축구센터가 설립되는데 여기에 지분 형식으로 참여하며 선수 선발과 기술지도를 맡는다. 용인FC라는 명칭으로 불린 이 팀은 원삼중학교, 백암중학교, 백암종합고등학교, 신갈고등학교 인근 학교를 섭외해 유소년 축구단이 형성된 팀이다.

여기서 허정무는 2005년까지 수많은 당대 최고의 유망주들을 끌어모았다. # #

출신 선수는 너무 많으니까 여기서 확인하자.

하지만 2005년 전남 드래곤즈 감독 부임 후 용인FC 출신 선수들의 스카우트 과정에서 허정무 감독은 전남 U-18 고교인 광양제철고로 이승렬 등 2명을 전학시키고자 했지만 용인시에서 반대하며 갈등을 빚었다. 보다 근본적으로, 선수들의 진로와 관련해 이우덕 당시 용인시 축구센터 사장이 축구센터 공식 에이전트인 '엘포플러스'에 맡길 것을 요구한 반면, 허 감독은 일부 선수들에 한해 자신이 추천하는 에이전트에 맡길 것을 주장해 왔던 것이 주된 이유가 되며 결국 4년 만에 총감독 자리를 사퇴하고 만다. #

3.5. 전남 드래곤즈 감독 2기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자리를 그만두고 2005년, 전남으로 부임한다. 이즈음 전남은 2003년 이회택 감독이 리그 4위 FA컵 준우승의 호성적을 일구고 사임했고, 2004년 우승을 노리고 야심차게 영입한 이장수는 리그 3를 차지했으나 프런트와 갈등을 빚고[14] 1년만에 사임한 상황이었다.

이런 뒤숭숭한 상황에서 2005 시즌에는 13개팀 가운데 11위를 차지했다.[15] 여기서 지적할 부분은 바로 2000년을 전후한 전남의 성적이다. 앞서 대표팀으로 떠난 허정무의 뒤를 이어 이회택, 이장수 두 감독이 맡았던 1999년 ~ 2004년까지 리그 성적을 보면 4/10(99)-7/10(00)-8/10(01)-5/10(02)-4/10(03)-4/10(04)로 잠깐 주춤하는 부분이 있다. 이는 노쇠한 스쿼드를 갈아엎고 리빌딩에 착수하면서 생긴 현상인데, 이회택이 끝까지 매조지를 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이장수의 단 한 시즌만의 사퇴도 전력 보강을 위해 외국인 선수 영입을 두고서 프런트와 이견이 생긴 탓이었다. 결국 전임 두 사람이 한참 다져나가다가 도중에 손을 뗀 기반을 또 다지는 삽질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이건 사실상 헛소리고, 신임 감독이 부임하는 상황은 그 전임 감독이 건강상의 이유라거나 은퇴, 더 좋은 팀으로 옮겨가거나 하는 식이 아니면 어느 정도는 어지러운 상황에서 부임하기 마련이다. 허정무만은 모든 최상의 상황이 세팅된 다음에 부임해야 한다는 헛소리가 아니라면, 결국 6년간 1평균 5등 정도 하면서 꾸준히 플옵에 나가던 팀을 맡고 나서 13개 팀 가운데에서 11위를 맡았다는 최악의 성적을 남겼던 것에 불과하다.

2006 시즌에는 리그 6위를 차지하며 반등의 기미를 보였으나, 결국 전임 감독들의 평균 성적보다 조금 못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FA컵에서는 우승하는 파란을 일으켰다.[16]

그리고 2007 시즌. 리그는 10위에 그쳤지만 또 다시 FA컵을 들어올리며 2년 연속 FA컵 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이 해는 일명 '파리아스 매직'으로 포항이 리그 5위의 성적으로 플레이오프를 뚫고서 최종 우승컵을 들어올린 때였다. 또한 포항은 FA컵 결승전에도 올라왔기 때문에 더블을 노릴 수 있었는데, 전남이 이를 저지한 셈이다. 그러나 이 시즌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AFC 챔피언스 리그에 참가할 수 있었지만 동남아 팀, 그것도 방콕 대학을 상대로 0-0 졸전을 벌이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가와사키에 총 6골을 먹히며 2패를 기록해 다음 라운드 진출에 실패하며 온갖 비난을 들어야 했다. 경기 전 전력 분석을 하지도 못해놓고 말만 대학팀이고 실력이 있는 팀이라고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기도 했다.[17] 기사. 참고로 이 시기 ACL에서 K리그나 J리그 팀들이 동남아 팀과 만나면 그야말로 폭격을 퍼붓던 시절이며,[18] 반면에 전남은 홈경기에서 방콕 대학을 맞아 3:2로 간신히 피똥을 싸며 이기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

3.6.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기

자세한 내용은 허정무호 문서를 참조 바랍니다.

2007년 12월, 핌 베어백의 후임으로 국가대표팀 감독에 취임했다.

2009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포항 스틸러스가 우승한 이후 포항의 공격적인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일부 팬들이 맨날 무승부만 하는 허정무 말고 포항 스틸러스 감독 세르지오 파리아스를 국대 감독에 앉히자!는 주장이 나왔지만, 정작 허정무는 2007년 파리아스 매직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K리그에서 우승한 포항 스틸러스를 FA컵 결승전에서 1, 2차전 통틀어 3:2, 3:1로 발라버리고 포항의 더블을 저지한 전력도 있다. 적어도 둘의 맞대결에선 허정무가 파리아스보다 위에 있는 셈.[19]

과거 움베르토 코엘류, 핌 베어벡 두 감독이 급작스레 사임하면서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그때마다 선수들 사이에서 잡음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내부 결속을 잘 이끌어냈다. 사실 2010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 되면서 까인 이유는 전적으로 축구협회의 언론플레이 때문인데, 핌 베어벡의 사임 이후 믹 맥카시(당시 울버햄튼 감독)[20] 제라르 울리에(당시 프랑스 축구 연맹 기술고문)에게 오퍼를 넣었다고 했지만, 둘은 거절했다. 아예 오퍼를 넣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축구협회는 계속 외국인 감독을 알아보겠다고 언론플레이를 했지만 오퍼가 거절당했다고 발표해놓고는 몇 시간 뒤 뜬금없이 '이제 한국인 감독이 대표팀을 이끌 때가 됐다'며 허정무를 선임한 것이었다. 이러니 욕을 안 먹을래야 안 먹을 수가...

일부에선 허정무의 박지성 활용 문제를 놓고 논의가 분분하지만, 전술상의 실책으로 보긴 어렵다. 전통적으로 대표팀은 우수한 윙어가 많아 늘 경쟁이 치열했다. 또한 박지성은 수원공고 시절 스트라이커로 시작해서 명지대학교 시절 수비형 미드필더와 윙백이었고 히딩크가 윙어로 조련했으며 아드보카트는 공격형 미드필더 능력에 주목한 글자 그대로 멀티 플레이어다. 넘치는 윙어에 비해 부족한 중앙 미드필더 자원을 고려했을 때, 당분간 박지성의 포지션 고정은 요원할 듯 하다.

허정무호의 A매치 성적은 2009년 11월 15일 기준으로 14승 13무 1패. 2008년 초 데뷔전에서 칠레에 패한 것을 제외하면 압도적인 28경기 무패 행진을 이어가고 있었다. 2009년 여름에 있었던 오만전이 비공식 경기가 된 탓에 공식으로는 27경기 무패. 어쨌든 최종예선 전까지는 상대팀이 모두 아시아권인 것을 감안해도 뛰어난 성적이라며 옹호하는 사람과 무재배의 달인이라며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11월 15일에는 덴마크와도 비겼다. 진짜 월드컵에서 7무 우승[21]하는 건 아니겠지만 싶어도... 하지만 11월 19일에 세르비아에 패하면서 무패행진이 끝났다.[22]

허정무의 무재배 기술(?) 때문에 디시인사이드 국내축구 갤러리에서는 허정무컵이라는 가상의 대회 짤방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2009년 12월 4일, 허정무호는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그리스와 함께 32강 본선 B조에 편성됐다. 당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던 마라도나와 악연이 있기 때문에 어찌 될지가 관심사였다.

게다가 마라도나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분명히 나를 걷어찼었다'고 언급을 했고 허정무는 '태권도로 걷어 찬 적 없다. 그랬다면 심판이 퇴장을 줬을 것"이라고 받아쳤다. 이 때문인지 남아공 월드컵 B조 본선에서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 간 경기를 앞두고 있을 때,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장외 신경전이 있었다.

2010년 2월 10일, 동아시안컵에서 만만하던 중국 0:3으로 대파당하면서 미친듯이 까였다. 게다가 스코어로도 그렇지만 경기력으로도 시망 수준이라 상당히 욕먹었다.[23][24] 그 와중에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언젠가는 와야 할 일이 오늘 왔을 뿐"이라고 해버려 더더욱 욕 먹는 중. 틀린 말은 아닌데, 문제는 하필 중국과의 무패 기록을 날린 날 할 말은 아니었다는 것.

2010년 설날 당일이었던 2010년 2월 14일, 동아시안컵 마지막 경기였던 한일전에서 일본에 3:1로 승리하였다. 일본 도쿄 원정에서 거둔 값진 승리였지만, 중국 쇼크로 인해 뒤돌아선 여론의 반응을 돌리기에는 무리였다. 오히려 일본 넷상에서 '이제 우리 감독 짤리는구나!' 하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미묘한 상황(…)이다.[25]

그래도 다행히 코트디부아르를 상대로 한 3월 3일 평가전에선 수비라인을 끌어내린 전술을 사용하여 문제되던 자동문을 고장(...)내고[26] 2:0으로 승리하였다.

이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둔 시기에 벌어진 에콰도르와의 경기도 2대0으로 이기고, 일본 사이타마에 가서 치른 원정 한일전까지도 2대0으로 이겼다. 하필 두 번째 경기의 경우에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출정식이기도 했기 때문에, 경기 직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의 출정식 행사가 진행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약체인 벨라루스와의 평가전에서는 져버렸기에 또 욕 먹었다. 결정적으로 상대가 꽤나 거칠게 태클을 하던 판에 센터백인 곽태휘를 부상으로 잃고 말았다. 왜 월드컵 비출전국이랑 해서 선수들만 날리냐는 원성도 나왔다.
그리고 대망의 2010년 월드컵의 첫 경기 상대인 그리스에게 승리하면서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승리를 기록한 역사상 1번째 '순수 한국인 감독'이라는 기록을 획득했다. 그 승리 덕분에 당분간 까방권을 획득할 듯 싶었지만...
아르헨티나전에서는 1:4로 대패하면서 대차게 까였다. 물론 아르헨티나 대표팀이야 항상 전세계 탑5 안에 드는 국가이니 패한 것 자체는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전술적인 면에서 비난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예로 허정무 감독은 오직 메시만 전부 전담마크를 하게 만들어 정작 이과인에게 해트트릭을 당해 패배한것이 가장 원인이 크다. 여담으로 이과인의 해트트릭 모두 메시의 발끝에서 만들어진 골이었다. 그 덕에 한국은 월드컵에서 상대팀에게 2번째로 해트트릭을 허용했다. (첫 번째 해트트릭 허용은 1990 FIFA 이탈리아 월드컵 한국 스페인전 타릭 미첼) [27]

아르헨티나전 패배 이후, 패배의 원인인 오범석을 아르헨티나전에 기용한 이유가 인맥 때문이었다는 악성 루머가 퍼졌다. 오범석의 아버지가 허정무와 같은 연세대학교 동문이자 축구협회 기술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한국실업축구연맹 이사이기 때문. 그러나 이건 말도 안되는 낭설인 것이 오범석은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주전 오른쪽 풀백이었고, 사실 이전 스페인과의 친선경기에서도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28] 그래서 아르헨티나전에 오범석이 선발됐을 때,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차두리와 오범석의 장단점의 차이를 들며 찬성했지만 결과는... 그 후에 나이지리아전에서 오른쪽 풀백을 되찾은 차두리도 역시, 실점의 빌미가 된 실수를 하는 등 기동성 있는 선수들에게 자주 돌파를 허용하는 약점을 노출하기도 했다.[29][30]
나이지리아전에서는 다시 그리스전 때의 포메이션으로 돌아갔고, 무승부로 나이지리아를 탈락시키며 '순수 한국인 감독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대표팀이 '원정 월드컵'에서는 '사상 최초'로 2라운드[31]에 진출하는데 성공한 '첫번째' 순수 한국인 감독이 되었다. 비록 소극적이고 수비적인 전술 운용 및 선수 기용으로 인해 많이 까였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목표였던 원정 월드컵에서의 사상 첫 2라운드 진출을 이루어 냈으니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사 속에 이름 한 줄을 명예롭게 남기게 되었다.

16강전에서 루이스 수아레스 우루과이에게 아쉽게도 1:2로 석패하면서 원정 월드컵에서의 역사상 최초의 8강 진출은,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32]

하지만 우루과이는 무실점으로 16강에 진출한 데다가, 루이스 수아레스와 디에고 포를란 등의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세계적인 선수들이 있었으며 최종 4위를 차지했다. 대등한 경기를 펼쳤으며 실제로 우루과이 대표팀 측에서도 "힘든 경기였고, 운이 좋아서 이겼다"고 했을 정도로, 졌잘싸를 보여주며 월드컵을 15위[33]로 마무리 하였다.

현재 2022년을 기준으로, 역대 '순수 한국인' 축구 대표팀 감독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FIFA 월드컵 원정 2라운드 진출을 달성했으며 동시에 '원정 월드컵'에서는 역사상 1954스위스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16위)[34] 이후 '2번째'로 16강 진출을 이뤄낸 감독이다.[35]

훗날 인터뷰에서 월드컵 이후 재계약을 안 한 이유에 대해 역대 국가대표팀 감독은 항상 잘려서 나왔는데, 내 발로 걸어나오는 선례를 한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 재계약을 안하고 스스로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감독이 두차례나 바뀌는 파행 속에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자 그때 너무 성급하게 판단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고 밝혔다.

3.7. 인천 유나이티드 FC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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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는 추후 행선지로 포항행 떡밥을 투척했다. 1990년대 초반 코치, 감독으로 재직한 연이 있기 때문인데, 막상 포항 팬들의 여론은 나빴다. 파리아스 이후 뿌리를 내린 '아름다운 축구'와 허정무가 추구하는 '견고한 축구' 스타일이 완전 상극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월드컵 원정 16강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2010년 9월 4일부로 인천 유나이티드의 지휘봉을 잡으며 K리그로 돌아왔다. 그리고 당일 부산 아이파크와의 데뷔전에서 모두의 예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하며 인천 사령탑 생활을 시작했다. 두번째 경기인 상무와의 경기에서마저 후반 45분에 동점골을 먹히면서 또 한 번 무를 캐냈다.

다행히 3번째 경기인 대구 FC와의 22라운드 경기에서 4-1로 완승하며 인천에서의 첫 승을 거두는 데 성공했다. 2007년 포항 스틸러스와의 FA컵 결승 2차전 승리 이후 무려 1022일 만의 K리그 승전보. 23라운드 서울전에서는 0-2로 무너지며 인천 부임 후 첫 패배를 당했다.

10월 9일 대전 시티즌전에선 유병수의 해트트릭으로 3골 차로 앞서가다 후반 중반부터 내리 3골을 허용하며 그 보기 드물다는 3-3 무승부를 연출했다. 정규리그가 종료된 시점에서 그의 성적은 10경기 2승 6무 2패. 과연 명불허전이다. 다만 이는 축구팬들이 농담조로 하는 말인 만큼 진지하게 새겨 들으면 곤란하다. 인천 유나이티드 FC 문서에 상세히 나와있지만, 당시 인천 유나이티드는 팀 캐미스트리가 완전히 붕괴되어 승점 자판기 신세로 전락한 상태였다. 그나마 허정무 부임 후 어렵사리 팀을 추스려서 성적을 낸 것.

2011년 3월 5일 시즌 첫 경기에서 상주 상무에게 2:0으로 패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제주(0:0)/대구(1:1)전을 연달아 무재배하는 권능을 보여주며 리그에서 8무 2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보여줬다.

8월 20일 리그 22라운드 경기에서 꼴찌 강원 FC와의 안방 경기도 0:0으로 비기면서 10경기 무승의 무재배 저력을 보여주자 열불난 서포터들이 선수단 입구 쪽에서 '허정무 나와라!'며 야유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몰래 피해 다른 입구로 빠져나왔다.

8월 27일 리그 23라운드 대전 시티즌과의 홈 경기에서 드디어 11경기만에 2:0으로 이기면서 무재배를 잠시나마 나왔다.

그러나 결국은 2011시즌을 14무라는 무승부 1위 기록과 역시 무재배 지존이라는 명성을 확인시키고 만다. 최종 리그 성적은 6승 14무 10패로 13위. 여담인데 10무를 넘게 무승부를 기록한 다른 팀은 전남(...)과 제주 뿐으로 딱 10무씩 거뒀다.

그리고 12월 6일 스포츠서울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끄는 인천 구단의 부진에 대하여 구단 사장이 잘못이라는 말을 하다가 대폭 까였다. 알다시피 인천은 시민구단으로서 재정이 탄탄하지 못하다. 게다가 전임 시장의 엄청난 개발 논리로 인하여 10조원이 넘는 막대한 빚에 시달리는 인천광역시로서 인천 구단에 원하는 대로 돈을 대해줄 수가 없다. 게다가 이 인터뷰에 조건도 현 인천 사장은 원하는 대로 4명 영입해 주고 할 수 있는대로 해줘도 성적이 이 모양인 걸 남 탓한다고 반발했다. 하지만 인천 팬들은 조건도 사장이 그런 말할 자격이 없다는 입장이다. 2011년에 영입한 선수가 권정혁, 김한섭, 엘리오, 알미르 4명인데 이 중에서 이적료는 단 한푼도 들어가지 않았다. 전부 트레이드 혹은 자유 계약. 자기가 데려온 것도 아니고 감독이 스스로 구해온 것을 두고 할 수 있는대로 해줬다 고 말하기엔 너무 뻔뻔하다. 결국 2011 시즌이 끝난후 조건도 사장이 사임하였다. 사실 인천 구단의 수뇌부는 구단주-사장-단장간 관계가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구단 운영의 여러 부분에서 사사건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2012 시즌이 시작되기 전 "파란색-검은색이 왜 전통인지 모르겠다."는 발언을 통해 안 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던 인천 유나이티드 팬들과의 관계를 절단냈다. 자세한 내용은 인천 유나이티드 FC/2012년 문서 참조.

일단은 인천 감독으로 있지만 다음 시즌 리그 8위에 들어가지 못하면 감독 그만두겠다고 공언했다. 결국 1승 1무 4패 14위의 성적을 마크하며 여론의 압박을 받자 2012년 4월 10일자로 자진사퇴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인 광주전에서 무재배를 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이후 인천은 김봉길의 지휘 아래 무기력한 모습을 깨뜨리고 시즌을 9위로 마쳤다.

일설에 따르면 원래 몹시 엄한 스타일이었던 허정무가 조용한 리더 스타일의 박지성과 함께하고, 또 그와 함게 일생의 숙원이던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업적을 일궈낸 이후 사람이 많이 변했고 그렇게 안 하던 일을 하게 된 것, 독기가 빠진 것이 폭망의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전남 시절 제자 정인환, 김명운 등과 김남일, 설기현 등 본인의 입맛에 맞는 선수들을 시민구단의 재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기존 선수를 내주면서까지 데려오며 대대적으로 스쿼드를 갈아엎으려 했다는 것이 문제다. 물론 감독 자신의 축구 철학과 전술과 걸맞은 선수를 모아서 스쿼드를 꾸리는 것은 감독으로서 당연한 권리이지만, 그 돈은 한정된 예산 나오는 것이고, 그 선수를 데려오는 업무는 프런트가 하는 것이다. 때문에 좋은 감독은 전술 못지 않게 정치와 경제 감각이 있어야 한다.

물론 허정무가 있는 스쿼드대로 성적을 낸다는 것이 장점으로 언급되지만, 뭐 그마저도 포항 시절 호화 멤버들로 피똥을 싼다거나 전남 시절 2000년대 중반 동남아 팀에게 어려움을 겪는다던지 항상 그랬던 것도 아니다. 어쨌든 대충으로나마 있는 스쿼드를 쓸 줄은 안다고 칠 때, 없는 스쿼드를 재주껏 메꾸는 능력은 검증받은 바가 없었다.[36] 각급 대표팀에서야 매의 눈으로 찍어둔 선수들을 콜업하면 구단들이 군소리 한마디 없이 갖다바쳤고, 포항과 전남은 액수가 좀 차이는 나겠지만 엄연히 기업 구단이다.

오히려 거꾸로 허정무 영입은 구단 고위층이 파워 게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저명인사'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몇년 뒤 똑같은 일 어느 시민구단에 또 한번 생기는데...

어쨌든 그의 파란만장한 감독인생이 월드컵이라는 최정점을 찍고는 일단락된 느낌이다.

허정무가 감독으로서 K리그에서 남긴 기록은 121승 128무 113패.

4. 평가

강도 높은 훈련과 피지컬, 투쟁심을 강조하는 스타일로 '호랑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지장형이 아닌 카리스마형 감독으로 팀 장악력은 일품. 그러나 전략 전술 능력은 평이해서 전술가형 수석코치가 옆에서 보좌할 필요가 있다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평가도 있다. 물론 선수 시절 센터백까지 뛰어본 풍부한 경험 덕분에 전술 이해도는 대한민국 지도자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편이다.

처음에는 패배할 때마다 선수탓을 하고, 전술적 역량은 어느정도 갖추었음에도 선수들에게 대뜸 정신력과 국가관을 수없이 강조하는 구식 감독이었다. 1998년 국대 감독 당시 1월달 전지훈련까지 하고 나서 선수들을 해병대나 유격부대에 입소시켜 극기훈련을 시키는 등 상식 밖의 꼰대 기질을 보여주었다. 비시즌이면 최대한 휴식을 취해야 하는 선수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 것도 모자라 쓸데없는 정신훈련으로 앉아 있게 시키고, 군부대 입소 훈련이나 시키는 등의 비과학적이고 무식한 행태를 거듭했으며, 대회에 나가면 선수들의 체력 안배는 생각 안 하고 막무가내로 굴리면서 선수들의 정신력 탓, 국가관 탓, 애국심 탓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이동국이 무릎을 크게 다치기도 했다.

그러나 훈련을 너무 많이 시키고 선수들을 독하게 다그치는 극단적인 면모는 2008년 국대 감독 이후 많이 사라졌으며 본인의 성격도 많이 죽었다.[37] 2002년 월드컵 때 깨달은 게 많았다고 하며, 부드러운 성격인 박지성을 주장으로 내세우고, 16강 진출이라는 목표조차 '유쾌한 도전'이라고 하는 등 변신을 꾀한 덕분에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사상 첫 원정 2라운드(15위) 진출을 이루었다.

하지만 잠시 감춰뒀던 이런 투박하고 조야한 기질이 2010년의 대성공 이후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이후의 K리그 지도자로서는 오히려 2010년 성공하기 전보다도 더 성적이 좋지 않았으며, 프런트나 팬들과도 쓸데없는 갈등을 꽤 큰 규모로 겪는 등 여러 부분에서 문제가 많았다.

있는 스쿼드대로는 성과를 내는 감독이라는 말이 있으나, 허정무의 감독 커리어 전체를 되돌아봤을 때는 맞는 말이라고 보기는 애매하다. 오히려 전임 감독들보다도 못한 성적을 거둘 때도 분명히 있었고, K리그 우승권 팀에서 장기적인 커리어를 보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아시아 톱 클래스 감독은 당연히 아니었고 K리그 내에서도 그렇게 명망 높은 감독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결국 2010년에 대한민국을 이끌면서 거뒀던 놀라운 성과로 인해 이런 평가가 있는 것인데, 오히려 허정무가 대한민국 감독 2기 전까지 보여줬던 성과를 감안한다면 2010년에 대한민국을 이끌고 거둔 성과는 허정무의 감독 역량에 비해 너무 과분한 성과라고 평가해야 할 정도다.[38]

그래도 전남 드래곤즈 역사상 최고의 감독[39]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원정 월드컵 2라운드 진출을 이끈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남겼다는 점에서 허정무는 충분히 성공적인 감독 커리어를 쌓았다고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한 구단에서 최고의 감독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업적이 아니며, 대한민국 2기 시절에 낸 성과로 인해 허정무는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의 월드컵 2라운드 진출을 이끈 유일한 한국인 감독으로 남아있다.

청소년 대표와 국가대표를 거쳤고, 체육 장학생으로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전형적인 코스를 밟았기 때문에 학연과 지연으로 선수를 뽑는다는 루머에 자주 시달린다. 하지만 하단의 허카우터 항목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정말 저 3분류로 선수를 선발했다면 뽑지 않았어야 될 선수를 뽑아서 성공시킨 사례가 상당히 많다. 그 때문에 당연히 근거없는 루머라고 부정된다.

5. 허카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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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있는 선수를 발굴하거나 키워내는데 탁월한 지도자이다.

거스 히딩크 부임 직전의 국가대표팀 명단. 단 이 경기는 허정무가 사퇴한 이후 치러진 경기로, 당시 경기를 실제로 지휘한 사람은 차기 대표팀의 수석코치로 내정된 감독대행 박항서였다.

거스 히딩크가 발굴했다고 알려진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표팀 선수 대부분이 이미 국가대표 엔트리에 포함되어있다. 2002 한일 월드컵 출전 선수 중 상당 수는 1999~2000년 대표팀 감독 부임 시절에 선발한 선수들이다. 송종국, 박지성, 이영표, 김남일, 이을용, 안정환, 이천수 등... 차두리, 윤정환 정도를 제외하고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월드컵에 첫 출전한 선수들은 대부분 허정무가 국가대표에 처음으로 소집했다.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둘째치고라도 허정무 감독의 선수의 기량과 잠재력을 알아보는 안목만큼은 뛰어나다. 이 때문에 붙은 별명이 스카우트를 덧붙인 허카우터. 한정된 자원과 환경 속에서 성적을 내야 하는 K리그의 클럽팁보다 재정적인 한계에서 다소 자유로운 국가대표 감독에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40]

허정무가 발굴한 선수들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박지성: 당시 박지성은 연령별 대표팀은 커녕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2군 입단 테스트에 떨어지고 불러 주는 대학이 없어서 명지대학교에 겨우 들어간 미드필더[41]였지만 허정무가 올림픽 대표로 뽑았다. 무명 선수의 깜짝 발탁이라 언론에선 명지대학교 감독 김희태와 허정무의 친분 관계를 놓고 바둑내기해서 허정무가 지는 바람에 박지성을 뽑았다는 루머가 돌았고, 추후에 직접 해명하는 지경에 이른다. 박지성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올림픽 대표팀과 명지대 축구부가 친선 경기를 했는데, 70여m를 혼자 드리블을 하며 5명을 제친 뒤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을 넣는 모습을 허정무가 보는 앞에서 보여주었다고 한다. 본인이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는데 상대가 알아서 비켜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고. 이후 허정무는 나이 19세의 박지성을 A대표팀에도 데뷔시켰다. 그냥 고만고만한 백업 정도로 기용한 것도 아니고, 국가대표팀에 있어 월드컵 다음으로 중요도가 높은 대회인 AFC 아시안컵에서 주전으로 중용했다.[42] 이후 박지성은 거스 히딩크를 만나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유럽까지 진출했다.[43]
  • 이영표: 올림픽 대표팀 시절부터 중용하여 3개월 만에 A대표팀에도 발탁했다.
  • 이천수: 청소년 대표 소속이었는데, 올림픽 출전 전에 이동국 외에 스트라이커 부족을 느껴서, 과감히 발탁하여 올림픽에 출전시켰다. (그런 이천수가 올림픽에서는 고의성 있는 반칙으로 퇴장.[44] 이후 절치부심 2002년 월드컵 출전.)
  • 구자철: 당시 무명의 미드필더를 뽑았다고 욕을 많이 먹었다.
  • 기성용: 국가대표 명단에 이름을 처음 올린 것은 핌 베어벡이지만 일회성 선발에 그쳤고, A매치 데뷔시키고 붙박이 주전으로 밀어준 건 허정무였다. 당시 기성용은 무려 4살을 월반해 2008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할 정도로 가능성을 널리 인정받긴 했지만 올림픽에서 기대에 못미치는 경기력을 보이며 '포텐은 있는데 성인 레벨에선 아직...'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런 선수를 바로 A대표팀에 선발하고, 심지어 월드컵 가냐마냐가 달린 최종예선 무대에서 주전으로 중용한 것이다. 이 시기에 이청용 역시 대표팀 주전으로 자리잡으며 허정무는 양박쌍용 진용을 구축한다.

이외 이동국, 송종국, 설기현, 김정우, 염기훈, 이정수 모두 허정무가 올림픽 대표로 뽑아서 훈련시킨 이들이다. 특정 선수 몇명이 특출날 수는 있어도, 이렇게 여러명의 선수들이 동시에 좋은 활약을 펼쳤다는 것은 허정무의 선수 보는 안목과 적절한 코칭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대표팀 발탁뿐 아니라 클럽팀이나 유소년 육성기관인 용인시축구센터에서 선수를 키워낸 사례도 많다.
  • 김주영: 허카우터로 알려지게 된 가장 큰 계기. 유스 시절 공격수로 테스트보러 온 김주영을 보고 "공격수로 계속 뛰면 대학도 못 간다, 하지만 수비수라면 국가대표까지도 가능하다."고 평가하며 포지션 변경을 종용했는데, 그 이후 실제로 김주영이 K리그의 대표적인 수비수로 성장하고, 국가대표로도 뛰었다. #[45]
  • 곽태휘: 허정무가 전남 감독으로 있었을 때 수준급 센터백으로 성장했다. 08년 2월 A매치에서 07년 7월 이후 득점이 없던 국가대표팀의 골가뭄을 해결하며 이후 허정무호 국가대표팀의 주전수비수로 성장하게 된다.[46]
  • 한교원: 조선이공대학이라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대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했지만 허정무의 눈에 들어 데뷔 시즌부터 주전으로 뛰고 기량이 발전되어 국가대표팀까지 진출했다.
  • 김신욱: 김신욱을 국가대표팀으로 처음 발탁했다.

2007년 당시 청소년대표였던 윤빛가람을 보고는 '재능이 있긴 한데 그리 특출나지는 않은 것 같다'는 발언을 했는데, 2012년 윤빛가람의 기량이 저하되자 재조명되기도 했다.[47]

또한 2019년에는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단점인 느린 주력은 고치기 힘들다 평가 받던 이강인에 대해 오히려 "스피드는 늘릴 수 있다. 최고 속도가 크게 성장하긴 힘들지라도 순간 민첩성을 향상시키면 스피드가 충분히 빨라질 것."라고 진단했는데, 이후 22-23 시즌 RCD 마요르카에서 이강인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면서 민첩성이 크게 증가한 모습을 드러내자, 허정무의 안목이 다시금 재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런 능력 때문에 축빠들은 허정무가 감독보다는 유소년 육성에 전념하거나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맡길 바라고, 다른 건 비난해도 선수보는 눈은 국내 최고 수준으로 추앙한다. FC 코리아는 허정무의 업적을 선수빨이라고 폄하하지만, 사실 그 선수빨은 스스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허정무는 2014 브라질 월드컵 전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허카우터'라는 별명을 처음 듣는다고 했다. ##

클럽을 맡으면 유망주는 샘솟고 전술적으론 안정되지만 왠지 모르게 비기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과도한 훈련으로 성적이 조금씩 내려가는 경향이 있었지만 허정무가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그 유망주 파워로 부임 전보다 성적이 올라가는 괴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후 대전의 대표이사 부임 후에는 배준호라는 걸출한 신인을 직접 공들여 데려와 유럽에 진출시킨 결과 배준호는 유럽에서 포텐이 폭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외에도 U-17의 윤도영을 비롯해 허정무 시절 대전 유스로 들어온 어린 선수들이 2024 시즌 고전을 면치 못하던 대전을 먹여살리는 모습을 보여주자, 환갑을 넘은 나이에도 선수 보는 안목은 여전히 죽지 않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1] 특히 컵대회만큼은 강한 면모를 보인다. 비록 무승부와 연장 끝에 승부차기로 이긴 전적이 하도 많아서 여기서도 무재배라는 비아냥을 피하기 어려웠지만... [2] 니시노 아키라 감독의 U-23 일본 대표팀이 아시아 최초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남자축구에서 피파랭킹 1위이자 마리우 자갈루 감독과 호나우두의 브라질을 1:0으로 이겼으며, A매치에서 브라질을 이긴 것은 한국이 아시아 최초이다. [3] 당시 브라질은 1994 FIFA 월드컵 미국 우승, 1997 코파 아메리카 볼리비아 전승 우승, 1997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사우디아라비아 우승,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준우승, 1999 코파 아메리카 파라과이 전승 우승,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7전승 우승으로 최전성기 시절이었다. [4] 당장에 거스 히딩크(4위) 다음으로 가장 국대 축구 감독으로 한국의 월드컵 높은 순위(15위)을 기록한 감독이 허정무다. [5] 참고로 이 이후에도 대표팀 감독직은 한동안 공석 상태로 있었는데, 이 때문에 그해 9월 30일 잠실에서 있었던 CA 보카 주니어스와의 친선 경기(결과는 1-2 패)는 당시 전남 드래곤즈 감독이던 정병탁이, 10월 31일에 역시 잠실에서 있었던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친선 경기(결과는 1-1 무)는 역시 당시 울산 현대 감독이던 고재욱이 각각 지휘하면서 대표팀 감독직을 여러 감독이 원 포인트 릴리프 식으로 연이어 맡는 막장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 상황은 우여곡절 끝에 1996년 2월에 박종환 감독이 다시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일단락되긴 했지만... [6] 본프레레는 결국 수석코치를 다시 뽑지 않았고, 월드컵 최종 예선이 끝난 뒤 해임당했다. 국내외 양쪽 모두 본프레레 개인의 인맥과 영향력이 약했다는 증거다. [7] 전후반기로 나뉜 리그에서 전반기 우승팀이 힘 빼던 일은 매양 있는 일이고 축구뿐 아니라 야구도 비일비재했다. [8] 치열한 명승부긴 했지만 [9] 배운 짓이 도둑질이라고 20년 뒤 허정무도 똑같은 짓에 가담한다. 사실 그 시절 허정무도 하고 싶었으면 하고 싶었지 나쁘거나 이상한 일이라고는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 [10] 당시에도 전임 감독제가 있긴 했지만 당시 축구협회는 대회가 끝나면 감독도 끝!!이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면서 전임 감독제 자체가 자리 잡지 못했고 이러한 문제는 결국 커다란 대참사를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이란 쇼크다. [11] 이 부분을 설명하자면, 1995년 전남은 신생팀이면서 8개팀 가운데 6위를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킨다. 때문에 프런트에서 투자를 보강하며 다음 시즌 호성적을 기대했으나 예상 밖으로 컵대회 최하위를 기록하자 초강수를 둔 것이다. [12] 다만 축구팬에 따라서는 리그 3연패를 2회 달성한 시기 일화를 유일한 왕조로 치기도 한다. [13] 8위팀까지 승점 3점차가 나는 혼전양상. 물론 1위도 독주는 아니었다. [14] 외국인 선수 영입을 둘러싼 비리 문제가 불거졌다. [15] 선수단 내분이 일어나며 조윤환이 사임한 전북 상무를 밑에 깔아놨다. 그리고 조윤환의 뒤를 이어 전북에 부임한 감독이 바로 최강희. [16] 여담으로 2006 FA컵 우승 당시 MBC 라디오 '이은하의 아이 러브 스포츠'라는 프로그램에서 허정무가 취중 인터뷰를 해 잠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상황이 어쩔 수가 없었는데, 당시 전남이 FA컵 우승 축하연을 하는 중에 허정무가 인터뷰에 응했기 때문. [17] 허정무의 무재배 덕택에 극단적인 국뽕들은 전남 같은 팀이 ACL에 나가는 자체가 나라 망신이라며 서울, 수원, 성남 등 호화 스쿼드를 갖춘 강팀만 참가 자격을 줘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까지 펼 정도였다. 그렇지만 전남도 이미 창단 시점부터 꾸준히 설비 투자를 해 왔고 프런트에서 선수 영입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단지 앞선 팀들이 K리그1의 대표적인 큰 손들이라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비출 뿐이지, 결코 전남이 거지 구단이었던 건 아니다. [18] 성남이 2004년, 인도네시아의 페르딕을 만나 15-0 폭격을 퍼부은 바 있으며, 요코하마가 베트남의 빈딘을 상대로 6-0으로 이기기도 했다. 2005년 수원과 주빌로 이와타가 베트남의 호앙아인을 상대로 6-0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부산이 빈딘을 상대로 홈에서 8-0, 원정에서 4-0, 도합 12-0을 기록하기도 했다. 2006년에도 감바 오사카가 베트남의 다 낭을 상대로 15-0 폭격을 퍼붓고, 2008년에 가시마가 태국의 끄룽타이은행에게 9-1과 8-1, 베트남의 남딘에게 6-0을 안겨주는 등 보기 드문 졸전이었다. 즉, 해마다 K리그와 J리그 팀이 이 시기의 동남아 팀 상대로는 5득점 이상 경기를 내곤 했었다는 얘기. [19] 물론 이는 같은 모기업이라 포항과 전남이 선수와 스태프를 자주 스와핑(?)(원래 맞교환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이다. 통화스왑이 그 예시. 다만 일반인 사이에선 좀 그런 의미로만 쓰이긴 한다....) 하는데다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당시는 전남이나 포항이나 전력이 엇비슷했다. 리그 우승한 팀이랑 10등팀이 어떻게 엇비슷하냐고? 파리아스 매직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진 이유 자체가 득실차가 -4였던 5등팀 포항을 6강 PO부터 시작해서 마침내는 우승까지 시켰기 때문이다. 정규리그만 따지고 보면 파리아스 시절에서 가장 나쁜 성적이었다. 진짜 전성기는 ACL 우승이란 결실을 맺은 2009년. 다만 이후 국가대표 감독이 되면서 전남 드래곤즈 박항서를 감독에 앉히게 되었고, 나란히 2008 AFC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한 포스코 동맹 두 팀은 당시 28강 조별 본선 탈락으로 K리그 망신이라는 오명들을 쌍으로 뒤집어 쓴다. 포항의 경우 2009년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전화위복에 성공했지만... [20] 축구 팬들에겐 선수들과 같은 반바지 입고 어깨동무하며 독려한 2002년 월드컵 아일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익숙할 것이다. [21] 전혀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이런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게 문제다. 3무승부로 32강 조별본선을 통과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1위팀 2승 1무, 2위팀 3무, 3위팀 2무 1패, 4위팀 2무 1패 밖에 없다. 이 사례는 1998년 월드컵 B조에서 칠레가 달성을 하였으나 16강서 브라질을 만나며 탈락(16위). [22] 웃긴 건 이 경기의 경기력 자체는 제법 괜찮았다는 평이 많았단 거다. [23] 다만 이 경기 국대 선발 라인업을 보면 알겠지만 이전 경기들과 달리 미드필더 라인에 중미 4명을 기용했다. 다이아몬드도 아니었고 그냥 4-4-2였는데, 양쪽 윙 자리에 중미를 박아넣는 희한한 실험을 했다. 하지만 중국전 패배로 된통 욕 먹은 이후부터는 포지션 파괴를 자제했다. [24] 포지션 파괴가 나쁜건 절대 아니다. 포메이션상 중앙 미드필더 성향의 선수를 측면에 배치하는게 왜 저러나 싶겠지만 실제 의도는 차라리 측면을 좀 내주더라도 중앙을 아주 두텁게 가져가면서 중원을 장악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실제로 이 경우 측면은 풀백이 공격적으로 임해서 메꾸고, 경기중 공격수 한명이 윙어 위치로 빠지면서 중앙미드필더들의 패스 선택지를 늘려주는 변칙 전술 중 하나이다. 문제는 그런 명확한 의도와 보완책 없이 단순히 머릿수 맞추기 용으로 중앙미드필더를 측면에 배치하면 전술이 답답해진다. [25] 물론 오카다 타케시 당시 일본 감독 역시 짤리지 않고 허정무와 마찬가지로 월드컵에서 원정 16강 성과를 거두게 된다. 팬들 여론이 부질없기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인 듯. [26] 조용형과의 센터백 파트너 조합 변경 후 수비라인을 끌어내리니 자동문 조용형도 조율형으로 변신하여 드록바를 3, 4명이서 포위하여 쌈싸먹었다. [27] 이 당시에 히딩크가 아르헨티나전을 시청한 이후에 '한국은 축구가 아니라 야구를 했다'라며 허정무에 혹평을 했다는 악성 루머까지 돌았다. 하지만, 정작 원 출처라던 <풋볼 인터내셔널>에서는 그 인터뷰의 원문은 커녕 히딩크와의 인터뷰 자체도 전혀 찾아 볼 수도 없었고 당연히 소설로 판명되었다. 당시 경기에 출전했던 카를로스 테베즈도, 경기 이후에 "한국 선수들이 그리스전처럼 공격을 하지 않아 놀랐다"라며 인터뷰를 하였는데 결국 아르헨티나를 두려워한 나머지 지나치게 수비적으로 나온게 오히려 아르헨티나 공격진이 자유롭게 활개치게 놔준 꼴이 되었다. [28] 원래부터가 오범석은 선수시절 동안 K리그에서 최고 수준의 풀백으로 평가받아온 선수다. [29] 기동력과 공격력은 당연히 차두리가 훨씬 뛰어나지만 수비력과 공수밸런스는 오범석이 더 뛰어났다. 그렇기에 아르헨티나전 선발 자체는 이론적으로 맞았지만 실제 경기에서 대표팀 전체가 지나치게 수비적인 전술에, 아르헨 공격진의 파괴력이 보고 듣던 것보다 더 강력하자 심리적으로 위축된 점까지 겹쳐 포지션 이탈 등의 사고가 일어났고 결국 4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30] 사실 차두리의 스타성과 오범석이 스타파워가 사실상 없는 것으로 인해 이 논란이 정말 많았는데 냉정하게 차두리가 나오건 메시가 나오건 메시를 필두로 한 아르헨 공격진에게 오른쪽 측면이 유린당하는 걸 막는 것은 불가능하고 차라리 왜 정성룡을 기용했느냐가 가장 큰 허정무의 실책이다. [31] 이유형 감독으로 일본을 이기고 1954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16위)한적이 있어서 최초 원정 16강이 아니다. [32] 교체 투입한 이동국의 경우에는 좋은 슛기회를 잡았고 적당한 퀄리티의 슈팅까지 이어졌으나, 못 넣은 것이니 교체도 맞아 떨어졌다면 맞아 떨어졌다. 슈팅의 성공 여부야 뭐... [33] 현재까지 대한민국 원정 월드컵 최고 순위 [34] 이유형 감독으로 일본을 이기고 16개국 본선에 진출했다. [35] 그 이후 12년뒤에 열린 윌드컵에서, 비록 대표팀의 감독은 '외국인'이 맡았지만 대표팀의 역사상 '원정 월드컵'에서는 '3번째'로 16강 진출(16위)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36] 포항 3년간 리빌딩 끝난 우승 멤버를 물려받고도 FA컵 우승 1회를 제외하면 별로 한 게 없고, 전남 1기 시절 FA컵 1회 우승 1회 준우승은 분명 업적이고 리그 준우승도 차지하는 등 잘나갔다. 그러나 전남 2기 시절 FA컵 2회 우승도 분명히 업적이지만, 리그 성적으로 보면 전임자나 후임자들과 성적을 비교했을 때 상당한 핫바리에 불과했다. 대표팀 1기도 좀 애매하고, 2기는 있는 스쿼드로 성적 잘 냈다. 즉, 허정무가 항상 혹은 대체로 있는 스쿼드를 있는 스쿼드 나름대로 쓸 줄 안다는 것은 오류가 상당히 많다. [37] 처음 허정무가 국가대표 감독으로 선임되자 선배 선수들은 허정무 감독을 상당히 두려워 했다고 한다. [38] 물론 이 2010년의 성과는 분명히 허정무의 실력으로 거둔 성과이고 이를 운빨로 치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전체 커리어를 보면 있는 스쿼드대로 성과를 냈다는 말은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39] 물론 전남을 맡았던 기간 내내 좋은 모습만 보였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현 시점까지도 전남 드래곤즈 메이저 대회 우승 기록의 전부인 코리아컵 4회 우승 중 3회 우승을 허정무가 이끌었고, K리그1 최고 성적도 허정무가 전남 1기 시절 이루었던 준우승 1회가 전부다. 전남의 구단 역사를 통틀어서 따져봐도 허정무가 전남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라는 점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40] 물론 빅리그 기준으로는 선수 수급의 원활함은 클럽팀이 훨씬 더 용이하다. 기본적으로 특정 국적만 대상이 되고, 소속팀과 일정을 맞춰야하며 선수가 부상이라도 당할 경우 걸맞은 대체인력조차 거의 없다시피한게 대표팀이기 때문. 그러나 K리그의 클럽팀들은 재정적 한계가 비교적 명확한 경우가 많아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게 더 어렵다보니 반대로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차출 공문만으로 쓸 수 있는 대표팀 감독이 스쿼드를 맞추기 쉬운 감이 있다. [41] 심지어 명지대에서도 후순위로 뽑힌 선수였기에 연습 경기조차도 뛸 기회가 없었다고 본인이 방송(KBS 대화의 희열)에서 밝힌 바 있다. 다행히 명지대 축구부 감독 김희태가 묵묵히 연습하던 그의 성실성을 높히 평가해 연습경기에 윙백으로 출전시켰고 이를 본 허정무의 눈에 들었던 것. [42] 단, 국내에서도 아시안컵이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2002WC로 인해 축구대표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진 2004년대회부터이다. 2000년도 대회만 봐도 12개국이 3개조로 진행된 소규모 대회였다. [43] 대표팀의 구멍으로 제3자에게는 큰 비난을 들었으나 꾸준히 중용받으며 감독의 아들이 아니냐는 비아냥을 견디고 카타르 월드컵에서 맹활약 한 황인범과 비슷한 케이스. [44] 애둘러 표현하였으나 대놓고 말하면 상대방의 얼굴에 싸커킥을 차는 범죄 수준의 반칙이었다. 말디니의 뒷통수를 차는 정도는 애교로 보이는 수준. [45] 다만 2017년 러시아와의 평가전에서 자책골을 두개를 넣은 이후로 대표팀과 멀어졌다. [46] 다만 월드컵 직전 부상으로 인해 남아공월드컵 직전 하차. [47] 2011년 아시안컵 이란전에서 환상적인 중거리슛으로 이란전을 승리로 이끌때까지만 해도 큰 기대를 받았지만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그 이후로 대표팀에 많이 소집되지 못했다.하지만 그 이후 ACL MVP도 타는 등 비록 대표팀과는 멀어졌지만 아시아에선 수준급 중앙 미드필더로 우뚝 서는 등 인정받는 미드필더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