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8:10:29

조진호(축구)

조진호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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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역대 대한민국 U-20 대회 주장
이태홍
1991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조진호
1993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김도균
1997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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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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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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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 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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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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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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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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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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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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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파일:조진호2.jpg
이름 조진호
趙眞浩 | Cho Jin-Ho
출생 1971년[1] 8월 2일
경상북도 대구시 (現 대구광역시)
사망 2017년 10월 10일 (향년 46세)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 양산부산대학교병원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3cm
학력 대륜중학교 (졸업)
대륜고등학교 (졸업)
경희대학교 체육대학 (체육학 90 / 학사)
직업 축구 선수 (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포항제철-포항 아톰즈/포항 스틸러스(1994~1999)
상무 축구단(1997~1998 / 군 복무)
부천 SK(2000)
성남 일화 천마(2001~2002)
감독 부천 SK/ 제주 유나이티드 FC(2003~2010 / 코치)
제주 유나이티드 FC(2009 / 감독 대행)
전남 드래곤즈(2011~2012 / 코치 겸 2군 감독)
대전 시티즌(2013 / 수석 코치)
대전 시티즌(2013~2014 / 감독 대행)
대전 시티즌(2014~2015)
상주 상무 FC(2016)
부산 아이파크(2017)
국가대표 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3경기 2골 ( 대한민국 / 1994~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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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안 조씨
서명 파일:조진호 서명.png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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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선수시절
3.1. 클럽3.2. 국가대표
4. 지도자
4.1. 제주 유나이티드 코치, 감독 대행4.2. 전남 드래곤즈 코치4.3. 대전 시티즌
4.3.1. 코치4.3.2. 감독 대행4.3.3. 감독
4.3.3.1. 2014년4.3.3.2. 2015년
4.4. 상주 상무 감독4.5. 부산 아이파크 감독
5. 사망6. 사후7. 지도 스타일
7.1. 전술 스타일7.2. 매니지먼트 능력
8.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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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축구인.

2. 상세

현역 시절에는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유망주[3][4]로 각광받던 때가 있었으나 한순간의 실수로 빛을 못보고 사라졌다. 하지만 지도자로서 2부 리그로 강등으로 절망에 빠져 있던 대전 시티즌을 제 2의 전성기로 이끌며 선수 시절의 아픔을 극복해냈고, 이후 상주 상무, 부산 아이파크 감독을 맡으면서도 준수한 성과를 이루어내며 대전 시절의 성과가 단순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해내며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의 반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17년 10월 10일, 부산 아이파크 감독으로 재직하던 중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6세로 특히 2016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광종 감독과 더불어 장래가 기대되는 전도유망했던 젊은 감독이었기에 많은 축구인들과 축구팬들이 애석함과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3. 선수시절

3.1. 클럽

3.1.1. 포항 스틸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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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출신으로 촉망받던 유망주였던 그는 1994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포항제철 아톰즈에 입단했다. 그러나 고질적인 무릎 부상과 잦은 슬럼프에 시달리며 포항에서 6시즌 동안 45경기 출장과 4골에 그쳤다. 1996년 FA컵에서 3경기 연속 골을 기록하고, 대회 초대 MVP를 수상한 것이 이 시기의 유일한 성과였다.

3.1.2.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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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부천 SK로 이적하여 17경기 2골을 기록하였고, 그 시즌 리그컵이었던 대한화재컵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2001년 이상윤과 트레이드되어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했으나 대부분 교체 출장에 그쳤고, 2002년 전방 십자인대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3.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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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U-20 세계 청소년 대회[5]에 출전하는 남북 단일팀[6]에 승선한 이후 1993년 두 대회 연속으로 대표팀에 승선하며 청소년 대표팀의 에이스로 두각을 나타내며 각광받기 시작하였고, 한국인 중에는 U-20 월드컵 최다 출전 기록을 보유하다가,[7] 조영욱이 2017 대회와 2019 대회에서 총 11경기를 뛰며 역대 2위로 내려갔으며 이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당시 최연소의 나이(18세 11개월)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1994 FIFA 월드컵 미국[8] 본선 엔트리에 해당 월드컵 엔트리 최연소 선수로 포함되어 독일과의 3차전에 출전하여 기도 부흐발트의 전담 마크맨으로 활약하며 위협적인 슛을 쏘기도 하였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9]을 앞두고 대한민국이 야심차게 선임했던 외국인 감독 아나톨리 비쇼베츠 대한민국 축구의 체질 개선을 선언했고, 좋은 체격 조건을 가진 선수를 추구했던 탓에 단신이였던 조진호의 대표팀에서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조진호는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과 큰 갈등을 겪게 되었고, 결국 조진호는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너 버리고 말았다.

1995년 2월, 다이너스티컵에 참여 중이던 조진호는 감독의 기용 방식에 불만을 품고 대회 도중 대표팀에서 무단 이탈 하며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한 징계로 6개월 선수 자격 정지를 당하고 말았으며, 그 기간 동안 조진호는 축구 팬들에게도 외면받으며 잊혀져 갔다. 그리고, 이 날 이후로 다시는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지 못했다.

훗날 지도자 시기에 대한축구협회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언론에 의해 와전된 부분이 있었고 비쇼베츠 감독과 불화도 알려진 것보다 심하진 않았다 해명했지만 무단 이탈에 대해선 어리석은 행동이었고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라고 언급하며 고개를 숙였다. #

사실, 무단 이탈에 대해선 비화가 있는데, 공식적으론 무단 이탈이지만 실질적으론 자진 하차였다. 다이너스티 컵 당시 주장 완장을 차고 있었음에도 베스트 11은 커녕 교체 멤버로도 잘 기용하지 않은데서 온 심리적인 압박감과 박탈감이 주 이유였다.[10] 결국, 친하게 지냈던 최재성 기자에게 빠지겠단 기사를 써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호텔로 돌아온 최 기자는 기사를 써야하나 한참 고민하다 '조진호, 태극마크 자진 반납' 이라는 식의 제목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당연히 축협과 대표팀 코칭스태프에서 난리가 났지만 당시 조진호가 처한 상황과 고민등을 옆에서 지켜봤던 대표팀 선수들은 별 동요없이 일본 대표팀과 1:1로 비겼고 이런 분위기 속에 축협 역시 징계하겠단 방침을 철회했다고 한다. #

조진호 입장에서 본다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부탁한 것이었겠지만 기자의 권유대로 감독과 대화를 시도해 보거나 축협 관계자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면 이런 극단적인 상황까진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4. 지도자

4.1. 제주 유나이티드 코치, 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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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은퇴한 후 부천 SK의 코치로 스태프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2군팀 지도를 맡으면서 2005시즌 부천 SK의 R리그 우승을 이끌어냈다.

2009년 당시 제주 유나이티드의 감독이었던 알툴 감독의 사퇴로 잠시 제주 유나이티드의 감독 대행을 맡았다.

4.2. 전남 드래곤즈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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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는 전남 드래곤즈의 코치로 부임하였으며, 1군 코치직과 함께 전남의 2군 감독직을 겸임하였으며 이때 훗날 대전 시티즌의 후임 감독인 최문식과 같이 감독을 보좌했었다.

4.3. 대전 시티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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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코치

2013년에는 대전 시티즌의 수석 코치로 부임하여 김인완 감독을 보좌하였다.

4.3.2. 감독 대행

2013 시즌 중반 김인완이 극심한 성적 부진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악화된 건강 문제로 물러나면서 감독 대행직에 올랐고, 10월 9일 경남 FC와의 홈 경기에서 처음 나섰으나 0:1로 패했다.[11] 하지만 10월 20일 제주 원정 경기 1:0 승을 시작으로 11월 17일 성남전 1:0 승리까지 총 리그 4연승을 거두는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며 끝날 때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님을 몸소 보여주며 시즌 내내 부진한 성적으로 지쳐있던 팬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비록 11월 27일 경남 FC와의 원정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무승부를 거두면서 최종적으로는 2부 리그 강등을 피하지 못하였지만,[12] 이는 절대로 조진호의 탓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11월 30일 전남 드래곤즈과의 리그 최종전 2:0 승리로 유종의 미를 거두는 등으로 시즌 막판 리그 6경기 연속 무패 및 4연승이라는 부임 후의 좋은 성적을 거두며 대전 팬들에게 갓진호라 불리며 찬사를 얻었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2014년 새로 부임한 김세환 사장의 신임 아래 일단 감독 대행 신분으로 2014 시즌에도 팀을 계속 이끌게 되었다.[13]

2014 시즌 K리그 챌린지 개막전에서는 수원 FC에 1:4로 패하며 불안정한 출발을 하였으나, 고양 Hi FC전 4:1 대승을 시작으로 4월 27일 부천전 까지 총 리그 5연승을 거두었으며, 6월 21일 대구 FC전까지 총 14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하며 구단의 연속무패 신기록을 세움과 동시에 리그의 절대강자로 치고 올라가는 등 무서운 상승세를 보여주었다.

4.3.3. 감독

4.3.3.1.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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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등으로 절망에 빠져있던 축구특별시 대전의 부활을 이끌다.

지도력을 인정받아 5월 8일 마침내 정식 감독으로 승진, 5월 11일 안산 경찰청과의 정식감독으로서의 데뷔전을 치렀으며, 이날 경기 2:0승을 이끌며 정식 감독 데뷔승을 거두었고, 5월 이달의 감독에 선정되면서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로도 조진호는 시즌 종료때까지 대전은 단독 선두를 달렸으며, 비록 시즌 막판 잠시 부진을 겪기도 하였지만 특유의 공을 뺏기더라도 저돌적으로 많이 움직이면서 수비에 가담하는 기술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아드리아노를 앞세운 화끈한 공격력을 앞세운 축구를 앞세워 챌린지 깡패로 군림했으며, 11월 부천 FC와의 홈경기서 1:0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조기 우승과 승격을 확정지었고, 2001년 이후 대략 13년만에 대전 시티즌 구단에게 우승 타이틀을 선사해주며 팀의 제 2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수원 FC와의 홈폐막전에서는 5:2 대승을 거두면서 2014시즌 피날레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지도력을 인정받아 K리그 챌린지 최우수감독에 선정되었으며, 비록 2부 리그이기는 했지만 구단 역사상 최초로 한시즌에 20승 이상을 거둔 감독이 되었다.

단순히 성과만 낸 것과 더불어 특히 울산 현대에서 기회를 못 잡아 방황한 임창우를 임대 영입한 후 기량을 발전시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의 우승 주역으로 발돋움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아드리아노는 조진호 감독의 신임 아래 시즌 내내 무서운 골폭풍을 이어가며 2014시즌 한해 27골로 대전 시티즌의 승격에 가장 큰 공헌을 하고, 대전을 넘어 K리그1 무대에서도 경쟁력 있는 선수로 거듭났다. 대전의 레전드 김은중은 자신의 선수 커리어의 마지막을 친정팀에서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4.3.3.2. 2015년
하지만 승격하고 난 뒤 주축 선수들이 다수 빠져나가고, 구단의 전득배 사장이 상식 선에서 벗어나는 막장 구단운영 행보를 선보였을 뿐더러 팀의 간판 골잡이 아드리아노가 계약 문제로 팀 합류를 늦게 하는 등의 악재를 겪으며 조진호 감독 개인의 지도력과 능력만으로는 도저히 팀을 살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수들 대부분이 경험 없는 어린 선수였던 것과 더불어 선수단 물갈이로 선수단의 조직력이 말이 아니었던 탓에 더 강한 클래식 팀들을 상대로 2014년과 같은 공격축구가 전혀 통하지 않았고, 한국의 레스터 시티 FC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그나마 하는 공격 역시 아드리아노 한 명에 크게 치중되어 있었다. 물론 아드리아노가 실력있는 공격수인 것은 사실이지만, 축구는 11명이서 함께 하는 것이지 아드리아노 한 명이 다 해먹는 것이 아닌 만큼, 상대팀에게 있어 대전은 아드리아노 한 명만 막으면 되는 팀이였다. 이렇게 총체적 난국이였던 대전은 리그 첫경기서 부산에 패했고, 홈개막전서 대전보다 낮은 순위로 같이 승격한 광주에 무기력하게 2:0으로 충격의 패를 당하였으며, 제주를 상대로는 무려 5:0으로 대패하기도 했다. 시즌 개막 후 11라운드까지 수원삼성을 상대로 단 1승을 거두고 홈에서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는 극심한 부진을 겪었다.

2015년 K리그 클래식에서는 개막 후 11경기에서 1승 2무 8패로 부진한 성적으로, 결국 5월 21일 자진 사퇴했다.[14]

애초에 조진호는 자신을 신뢰했던 김세환 사장이 물러나고 전득배 사장이 새로 부임한 순간부터 사실상 짤릴 운명이였으며, 조진호의 퇴진 역시 사실상 예견된 일이었다.

그리고 성적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비록 감독으로서 조진호의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조진호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2015년의 대전은 크게 망가져있는 상태였기에 2015년의 부진을 조진호 탓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그 어떤 감독이 대전을 맡았어도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을 것이라는게 대전팬들의 평이었다.

4.4. 상주 상무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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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독일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은 후 2015년 12월 17일 외인 생활을 끝내고 K리그 클래식에 승격한 상주 상무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조진호의 상주는 비록 전술의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고, 전방을 향하는 패스의 정확도가 낮았다는 평이지만, 기존의 롱 볼 축구에서 세밀한 패스와 스피드를 가미했고, 대전 감독 시절과 마찬가지로 전방에서 적극적인 압박 수비를 주문했고, 탄탄한 수비진을 구축하였다. 박준태, 박기동, 임상협 등을 앞세운 공격라인을 바탕으로 폭발적인 득점력을 과시하고 카운터 어택을 시도할시에 윙 포워드의 움직임이 상당히 파괴력 있는 모습을 보였다

전방에서 적극적인 압박 수비를 주문함으로써 상주의 탄탄한 수비진을 구축한 조진호는 상주 상무의 창단 최초이자 승격팀 최초, 군경팀 최초상위 스플릿 진출을 이끌어내며 2017 시즌 K리그 클래식에 잔류하면서 대전 감독 시절 거둔 성과가 단순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하였다.

더구나 2017년 상무가 김병오, 김호남, 신세계, 여름, 유상훈, 윤주태, 이광선, 임채민, 정선호, 주민규, 홍철 등 영입비용 0원이라는 초호화 스쿼드를 구성하면서 2017 시즌 다시 한 번 돌풍을 예고했다.

4.5. 부산 아이파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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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2016년 11월 25일, 김태완 수석코치에게 상주 상무의 감독직을 넘기고 K리그 챌린지 부산 아이파크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사

승강제가 정착한지 5년이 흐르면서 클래식과 챌린지 양방향으로 선수 이동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처럼[15] 이제는 전현직 감독의 이동마저 활발히 일어나는 대목은 리그 전체로 볼 때 긍정적인 요소다.

조진호는 침체된 팀 분위기를 빠르게 수습하며 시즌 초반부터 팀을 상위권에 랭크시키는등 승격의 희망을 살리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여기에 2017 KEB하나은행 FA컵에서는 포항 스틸러스, FC 서울 등 쟁쟁한 우승 후보를 연이어 격파하며 선전하였으며, 팀을 4강까지 올려 놓으며 유능한 지도자로 입지를 확실히 다져가고 있었다. 이렇게 명가재건에 힘을 쏟던 조감독이었지만, 리그에서는 중요 경기에서 뒷심 부족으로 승점을 챙겨오지 못하며 1위 경남 FC와의 승점차를 줄이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결국 리그 1위 경남 FC와의 마지막 낙동강 더비에서 2:0으로 패하면서 사실상 1위 자리를 놓치게 되었고, 하는 수 없이 플레이오프와 FA컵에 투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5.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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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경남전 패배로부터 이틀 뒤인 10월 10일 오전, 화명동 숙소에서 나오다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이를 발견한 주민의 신고에 의해 급하게 양산부산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향년 44세의 너무도 아까운 한창 나이였다.

더 안타까운 점은, 당일 오전으로 예정되어 있던 선수들 소집을 정오로 미룬 상태였다고 하며, 이승엽 코치는 R리그 강원원정 시찰을 가던 중이었다.[16] 소집 시간이 돼서 감독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된 부산 선수들은 원래 예정대로 오전에 선수들과 만났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거라며 비통해했다. 이 날 미디어 데이를 가졌던 K리그 클래식의 타 팀 감독들 역시 비보를 접하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특히 제주 유나이티드 조성환 감독은 눈물까지 보이며 축구계 후배이기도 한 고인의 사망을 안타까워했다. 한편 빈소는 후송되었던 양산부산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고, 부산 아이파크 관계자들을 비롯해 한웅수 프로축구연맹 부총재를 포함해서 최용수, 조성환, 유상철 등이 빈소를 지켰다.[17]

조감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이승엽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아 잔여 시즌 팀을 이끌게 되었으며[18] 이후 이승엽은 대행으로 최선을 다해 지도했지만 안타깝게도 부산은 승격과 FA컵 우승 모두 실패하면서 팀을 떠나게 된다.

6. 사후

조진호 감독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통하고 먹먹하고 눈물이 납니다. 당신에게 받은 은혜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대전시티즌 팬들 선수들 프런트들도 같이할 겁니다. 치열하고 냉정한 승부의 스트레스 내려놓고 편히 쉬세요.
김세환 대전 시티즌 사장
감정을 말로 이룰 수가 없다. 그와 함께 했던 순간은 빈 페이지가 됐다. 그와 함께 했을 때 항상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가 떠났다는 소식에 슬프다. 그는 내 아시아 축구 역사의 일부다. 조진호 감독은 신이 내게 보내준 친구이자 아빠였고 동료였다. 항상 나를 기억해달라, 나도 좋은 기억으로 항상 조진호 감독을 잊지 않겠다.
아드리아노[19]
항상 멋진 경쟁, 정말 감사했습니다.
경남 FC 구단

대전 시절 조진호 밑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던 아드리아노 김세환 前 사장을 비롯한 많은 대전 출신 선수들이 SNS를 통해 추모의 메시지를 올렸고, 대한축구협회를 비롯해 온갖 축구계 인사들이 애도의 뜻을 표했다. 셰이크 살만 AFC 회장과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 또한 애도 공문을 보내 왔다.

사망 당일 스플릿 A 그룹 팀들 감독간의 미디어데이가 열렸는데 미디어데이 막바지에 이 소식을 듣고는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갑자기 침통해지게 되었다. 특히 조진호와 함께 현역생활을 한 적 있는 제주 유나이티드 조성환 감독은 소식을 듣고 눈물을 감출 수 없을 정도였다.

K리그에 소속된 각 구단들 또한 홈페이지나 SNS를 통해 고인을 추모하는 메시지를 올렸다. 대부분의 구단들이 조진호의 감독 시절 사진을 차용한 것과 달리, 조진호가 제일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했던 팀인 포항 스틸러스는 현역 선수 시절 사진을 올려 많은 이들을 먹먹하게 했다. # 조진호의 마지막 상대 팀이었던 경남 FC는 추모에 더해 '그동안 멋진 경쟁에 감사했다'는 메시지를 추가로 남겼다.

대한민국 시간으로 10월 10일 당일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대한민국 vs 모로코 친선경기 시작 전 선수들이 묵념을 가졌다. 이어서 10월 14~15일 모든 K리그 경기에서도 추모 묵념을 진행했다. 10월 14일 수원 FC 부산 아이파크의 경기에서는 부산 측 원정 서포터석에 조진호 감독의 사진이 걸렸으며, 이 날 이정협은 PK로 결승골을 넣은 뒤 조진호 감독의 사진 앞에 달려가 얼굴을 파묻는 모습을 보여줬다. #

또한 대전 시티즌 서포터즈들은 부천 FC 1995와의 경기에서 조진호 감독이 대전을 챌린지에서 우승시켰던 2014년을 기억하고자 경기 시작 후 14분 동안 응원하지 않으며 조진호 감독을 추모했으며 경기장 밖 펜스에도 자주색 리본으로 추모의 메시지를 적었다.

1위 경쟁을 하던 경남 FC의 김종부 감독은 얼마 전 모친상을 당한 것과 더불어 조진호 감독을 생각하면서 우승확정을 지은 후에도 세레머니를 자제했다고 한다.

부산 아이파크는 조진호가 떠난 후 첫 홈경기인 10월 25일 수원 삼성전에서 경기장 밖에 조진호 감독 추모 공간을 만들어놨다. 이 때 한 경남 FC 팬은 조진호 감독님 덕분에 낙동강더비가 즐거웠다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한편 조진호는 FA컵 4강 대진표가 나왔을 때 이미 수원 삼성 블루윙즈전에 대비해 전술을 모두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이를 인수인계받은 이승엽 대행은 조진호 감독의 전술을 파악해 전방압박을 충실히 해서 조진호 감독이 원했던 공격적인 축구를 선보였고, 승부차기 끝에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꺾고 FA컵 결승에 진출하며 명장의 마지막 경기에 피날레를 찍었다.[20]

한편 이러한 사건을 통해 감독의 고충과 스트레스가 재조명받으며 감독이라는 자리가 선수 생활보다 더 혹독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리고 선수들과는 달리 마땅히 스트레스를 풀 만한 방법이 없는 현실에 대한 개선과, 건강검진 의무화 및 관리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들도 나오고 있다. 그래서 K리그는 2018년부터 감독 및 코칭스태프들의 건강검진을 의무화시켰다.[21][22][23]

2017 K리그 정규 시즌 종료 후 조진호 감독에게는 특별 공로상이 주어졌고, 둘째인 조함민 군이 대신 시상식에 참여했다. 권오갑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는 조함민 군의 학비를 전액 지원해 주고, 추후 현대중공업 입사도 추진해 주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조함민 군은 서울 이랜드 FC U-15 팀 소속으로 축구선수의 꿈을 키우고 있는 중이기에 현대중공업 발언까지는 좀 너무 나갔다고 바라보는 시각이 많았으며 이후 부산은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상주 상무에게 승부차기 끝에 5:4로 패하며 승격에 실패했다.

조진호 감독이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난 2018년, 부산은 10월 14일 서울 이랜드 FC와의 홈 경기에서 추모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기일 당일날 부산 아이파크 대전 시티즌 SNS에는 당신의 열정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진 및 글을 올렸다. 경기 결과는 3:1로 부산의 승리였다.

그 후 2부 플레이오프에서 대전을 3:0으로 이기고 승강 플레이오프에 다시 한 번 더 올랐지만 FC 서울에게 패하면서 또 다시 승격이 좌절되었다.

2019년 부산은 다시 한번 승강 플레이오프에 올라왔고, 2차전에서 경남을 2:0으로 격파하며 5년만에 K리그1에 돌아왔다. 조진호 감독의 생애 마지막 경기에서 패배를 안겨주고 심적 스트레스를 받게 했던 팀이 경남 FC였는데 2년 후 그 경남을 강등시키고 부산이 승격했다는 점도 드라마틱하다. 조덕제 감독과 많은 선수들이 승격 소감 인터뷰에서 조진호 감독에 대해 언급했으며 이후 2020년 10월 10일 부산아이파크는 구단 미디어를 통해 조진호 전 감독의 추모글을 올렸다. 하지만 부산은 비겨도 잔류에 유리한 상황에서 나머지 2경기(10/24 인천전, 10/31 성남전)에서 이동준의 선제골 이후 동점골과 역전골을 연달아 내주며 2:1로 역전패를 하면서 다시 2부리그로 강등되었다.

7. 지도 스타일

7.1. 전술 스타일

조진호는 과거 부천 SK 2군 감독 시절 부터 변화 무쌍한 포메이션 변화와 포지션 파괴술, 즉 선수단 멀티화를 중요시하였다.

과거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끄는 바이에른 뮌헨은 선수들은 정해진 포지션 없이 뛰고, 경기 도중 수 차례 포메이션이 바뀌었는데, 조 감독의 축구도 이와 비슷했다.

2014시즌 당시 경기 중 대전 선수들을 보면 자유자재로 선수들의 포지션이 바뀌는 것이 보이며, 당시 대전 대부분의 대전 선수들이 2개에서 3개정도의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들이였다.

앞서 말한 임창우는 원래 센터백이였지만 조진호는 그를 라이트백으로 기용하였으며, 이는 신의 한수로 작용하여 임창우는 라이트백으로서 대전에서는 물론 국가대표로서도 아시안게임에서 활약하였고, 풀백이였던 송주한은 풀백 이외의 중앙 미드필더와 센터백까지 소화시켰고, 레프트백 장원석도 측면 미드필더나 중앙 미드필더로, 센터백 안영규를 스트라이커로 기용하였으며, 풀백 김한섭은 시즌 막판에는 거의 윙어로 쓰는 등의 다소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로서 성적만 좋은 것에 그치지 않고 당시 대전 선수들은 활용가능성을 높이며 자신의 주가를 높였으며, 조진호는 경기 전에 미리 선수들에게 4-4-2 포메이션이나 쓰리백을 바탕으로한 수비, 4-3-3 포메이션 중 세 가지를 제시하고 어느 때곤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일렸고, 대전 선수들은 경기흐름에 잘 적응하며 전혀 어색하지 않게 포지션 및 위치를 움직였고, 이로서 대전은 상대편에게 있어 상당히 분석하기 어려운 팀이 되었다.

이 외에도 조진호는 전술 패턴 훈련에 집중하였고, 공격적인 터치를 중요시하였다. 앞서 말한 전술 변화를 시도하는 축구를 위해 조진호는 볼을 갖고 진행되는 훈련을 많이 시켰고, 공격 전술 패턴 훈련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선수끼리 서로 경합을 강하게 훈련하다보면 부상이 발생하는 만큼 패턴 훈련을 통해 선수들이 경기의 흐름을 알게 하는 것과 더불어, 최정예 멤버로 구성된 1군과 나머지 팀으로 구성해 압박을 강하지 않게 하고 패턴을 익히게 했고, 수비부터 패스 연결로 빌드업에 있어서 길을 찾게 하고, 이러한 훈련 중 일부 선수의 포지션을 바꿔가게 하면서 타 포지션을 보다 더 몸에 익히게 했으며, 이러한 훈련으로 부상과 체력 소모를 피하였다. 또한 조진호는 퍼스트 터치의 방향을 중요시 했다.

일단 무조건 공격적으로 공을 잡아놓게 하며, 수비 쪽으로 잡아둠으로서 불필요한 백패스 밖에 할수 없는 상황을 피하였다.

7.2. 매니지먼트 능력

전술적인 부분 외에 조진호 감독의 가장 큰 장점은 선수단 매니지먼트 능력으로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성적과는 관계없이 선수단과 팬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과 지지를 받았었다.[24]

전반적으로 자신의 전술에 선수를 맞추기보다 선수 장점을 극대화 시키는 지도자 스타일을 보여주었으며, 특히 아드리아노의 경우는 훌륭한 퍼스트 터치와 탄력을 이용하도록 역할을 단순화 시켜 한시즌동안 27득점이라는 폭발적인 득점력을 기록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경기 외적으로 성격과 정서가 불안하다는 단점이 있는 아드리아노에게 특유의 형님 리더쉽을 앞세워서 축구할 것만 제대로 한다면 되도록 아드리아노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하며 다독였고, 이러한 조진호의 노력 덕에 아드리아노가 대전 시절 정서적으로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고 평가받으며, 이후에도 둘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감독 시절 내내 선수단과 팬들과의 소통을 중요시함으로서 선수들과 팬 모두와의 거리감을 좁히고 하나로 뭉치게 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선수단과 팬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이로 인해 2015시즌 팀이 부진했음에도 상당수의 대전 팬들은 조진호를 신뢰했었다.

8. 이야깃거리

  • 조진호 감독은 다른 감독들과는 다르게 팀이 골을 성공시키면 맨 위에 있는 사진처럼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리는 등의 세레머니나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격하게 기쁨을 표출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디에고 시메오네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 하지만 격한 세레머니를 펼치던 조진호도 2017년 부산 아이파크 감독 시절에는 친정팀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서 팀이 골을 성공시키면 평소와는 다르게 세레머니나 퍼포먼스를 자제하면서 친정팀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도 하였다.
  • 옆집 아저씨같은 인상일 정도록 친근한 인상이었는데 사실 친근한 걸 떠나서 팬서비스는 그 누구보다 좋은 축구인이었다. 생전 이 축구인의 SNS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적극적으로 팬들과 소통하는 감독으로도 유명하였고, 경기에서 실망스럽게 패배한 날에도 웬만하면 팬들에게 싸인이나 사진 촬영을 해주는 등 성적과 상관 없이 팬들로부터 큰 신임을 얻던 감독이었다.
  • 2014년 대전이 챌린지에서 우승했을 때 팬들이 우승 축하한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조진호는 '선수들 공이라서 자기는 인사받을 자격이 없다. 선수들에게 많이 축하해줘라' 라고 답을 하기도 했다.
  •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부산 아이파크가 문재인 대통령의 고향을 연고지로 하는 스포츠팀인 만큼 롯데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었던 만큼 부산 아이파크 유니폼도 입어달라고 말하는 등 일도 있었다. #
  • 2021년 대전 하나 시티즌의 리그 33라운드 홈경기는 2014년처럼 한밭종합운동장에서의 승격을 기원하며 '응답하라 2014' 컨셉으로 진행됐는데, 공교롭게도 이날 경기가 펼쳐진 날이 10월 10일 조진호 감독의 기일이었고, 이날 경기 대전은 4:1로 완승을 거두었다.


[1] 실제로는 1971년생으로 박건하, 최용수 등과 동기라고 한다. [2] 이 서명은 '조'가 Cho로 써 있는데 부산 아이파크 감독 부임 이후에는 팬들에게 사인을 해 줄 때 '조'자를 알파벳이 아닌 한글로 써서 해줬다. [3] 데뷔 후 별명이 조르징요(이름을 영어로 써놓고 브라질 발음으로 읽으면 딱 조르징요였다.)였을 정도로 촉망받던 유망주였다. [4] 이후 이 별명은 발음만 살짝 바뀐채 후대의 동명이인 유망주에게 그대로 대물림되었다. [5]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 [6] 지역예선에서 대한민국이 우승, 북한이 준우승하여 남북팀 기록은 대한민국이 계승하며, 이 대회에서 포체티노가 출전한 우승후보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이기는 이변을 일으켰다. [7] 조진호는 총 두 번의 대회에 출전해 7경기를 출전하였고, 김진규 역시 두번의 대회에서 총 7경기를 출전하였다. 하지만 조진호는 총 630분을 뛰었고, 김진규는 586분을 뛰어서 조진호가 근소한 차이로 1위다. [8] 마지막 24개국 본선 진출 대회 [9]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 [10]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주장은 대부분 나이나 학년이 높은 선배가 맡고 주전으로 뛰는 것이 기본으로 깔려있는 인식인데, 비쇼베츠 감독은 좁디 좁은 대한민국 축구계 및 밀접한 선후배 관계를 잘 몰랐던 탓에 조진호에게 주장 완장을 채워서 이 사달이 났던 것이다. [11] 이날 경기에서 골을 시킨 윤신영과는 2015년 대전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나게 된다. [12] 훗날 이날 경기는 경남 구단이 심판 매수했던 경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3] 매번 대전 시티즌 구단은 사장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감독도 바뀌는 악순환이 지속되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14] 부고 이후 보도들에 의하면 일정 수준의 성적 미달시 중도사임이 조건으로 걸려 있었으며 조 감독은 이에 매우 상심했다고 한다. 후임 감독이 이미 정해져있는 상태였다는 말까지 돌아다녔을 정도이다. [15] 챌린지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 선수들이 클래식에 팔려 가는 것은 물론이고, 반대로 클래식에서 기회를 잡지 못하던 선수가 챌린지로 옮겨 꽃을 피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16] 원주종합운동장에서 경기할 예정이었다. [17] 축구계에서 최근 현역 감독의 사망 사례는 1999년 9월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부산 대우 로얄즈의 신윤기 감독대행 이후 18년만에 일어난 일이다. [18] 이승엽 코치와는 현역 선수 시절 포항 스틸러스에서 함께한 적이 있어서 오랫동안 알고 지내 온 사이다. [19] 위 내용을 모두 자신의 SNS에 한글로 기재했다. [20] 하지만 오심으로 인해 수원의 골이 취소된 것은 분명하기에 뒷맛이 개운치는 않은 결승 진출이었다. 수원 팬들 또한 감독의 죽음은 추모하되 오심은 못 넘어간다는 입장이었으나 분위기상 의견을 강하게 내지 못해 묻히고 말았다. [21] 참고로 조진호 감독은 평소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승엽 코치와 같이 술자리를 해도 대부분 이승엽 코치가 마셨다고 한다. [22] 기본 신체검사와 혈액검사, 심장 초음파 검사 결과 기록을 제출해야 한다. [23] 개인사업자인 감독과 코칭스태프는 건강보험이 지역가입자로 되어 있어서 일반 직장인처럼 의무 검진 대상이 아닌것도 한 몫 했다. [24] 성적이 나쁘거나 부진할 때는 조진호를 비판할 지언정 경질이나 사퇴 같은 거취 문제를 운운한 팬들은 드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