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4:29:25

최강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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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대성 (2013)
계약 기간 2011년 12월 21일 ~ 2013년 6월 19일
(1년 6개월 / 547일)[1]
계약 종료 (계약 기간 만료)
연봉 6억 원 (감독 / 추정치) #
전술 스타일 선수비 후역습
성적 A매치 14전 7승 2무 5패 (승률 50%)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본선 진출)[2]
1. 개요2. 선임 과정3. 코칭스태프4. 활동5. 평가
5.1. 32강 본선 진출 성공5.2. 대표팀 선발의 원칙 성립5.3. 총평
6. 전적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제69대 감독 최강희의 대표팀을 정리한 문서.

조광래 경질 이후 대표팀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대한축구협회에서 막장 행정을 불사하면서까지 수장을 선임해 만들어낸 대표팀이다. 결론적으로 월드컵 본선진출 미션을 완수하긴 했지만 대표팀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감독이 선임 인터뷰부터 자신이 임시감독임을 못박아 출범 직후부터 리더십이 삐걱거렸으며 이는 후술될 여러 논란을 야기하는 중요한 도화선이 되었다.

하지만 감독 선임 과정에서 하기 싫다는 사람을 압박해서 강제로 감독직을 떠맡긴 축협의 막장 행정이 크게 부각되었고, 최강희 감독이 국대 감독직을 여러 차례 고사한 끝에 어쩔 수 없이 떠맡았게 됐음을 적극적으로 어필했기 때문에 한국 축구 암흑기로 같이 묶이는 조광래호, 홍명보호, 슈틸리케호에 비해선 동정의 여론이 더 많았던 대표팀이다.

2. 선임 과정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e6002d> 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임 과정
}}}
제68대
조광래
제69대
최강희
제70대
홍명보
조광래 전 감독 경질 이후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의 운명은 이제 2월의 쿠웨이트전 단 한 경기로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이 확정이 결정되는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삿포로 참사 레바논 쇼크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조광래 감독은 결국 레바논 쇼크의 책임을 지고 2011년 12월 7일, 전격 해임당한다. 만약 최종예선도 아닌 3차 예선에서 만에 하나 3차 예선 최종전 상대인 쿠웨이트에게 패배한다면 최종예선도 못 밟고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32강 본선 진출은 짤없이 아시아 예선탈락 상황이었고, 당시 국대의 상황을 보면 쿠웨이트전도 전혀 장담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FC 바르셀로나식 패스 축구를 모토로 내세웠던 조광래호가 좌초하면서 외국인 감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기도 했으나, 정작 본인이 맡기 싫다고 누차 거절했던 최강희 감독이 조중연 전 축구협회장의 강권에 못 이겨서 부임한다. 잘 나가는 현역 프로팀 감독을 대표팀으로 빼 오는, 그것도 본인이 싫다는데 연줄로 찍어누른 것이다. 조중연이 울산 현대 코칭스태프일 때 최강희는 선수였다. 즉, 사제지간. 게다가 축협 국가대표 규정에 협회가 감독으로 선임한 스태프의 구단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무조건 응해야 한다는 기이한 규정이 있다.[3]
국가대표 축구단 운영규정 제12조 2항-협회는 1항의 선임된 자가 구단에 속해 있을 경우 당해 구단의 장에게 이를 통보하고, 소속 구단의 장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하여야 한다.
이렇듯 축협은 최강희에게 감독직을 억지로 떠맡기는 막장스런 행정력의 극치를 보여준다. 조광래 전 감독의 해임부터 최강희 감독의 선임까지 아무런 계획없이 즉흥적으로 한 것이었다.

파일:external/img.sbs.co.kr/30000295182_700.jpg

처음에 감독직을 극구 고사하던 최강희 감독은 팀을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고 나는 2013년 6월 최종 예선이 끝나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고 공언하며 대한축구협회를 당황케 했다. 그리고 그동안 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을 밖에서 지켜보면서 대표팀 사령탑은 절대적으로 외국인 감독이 맡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라면서 본선에서는 외국인 감독으로 가야 한다면서 의견을 피력했고, 최종예선 도중에도 자신이 국가대표팀 감독을 수행하는 도중에 외국인 감독을 찾아봐야 한다는 말도 꾸준히 했다. 결국 약속은 지켰지만, 스스로 예선용 감독이라고 못을 박음으로서 전술과 선수 운용에서 제한과 선수단 해외파들의 장악을 하지 못하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감독의 임기를 시한부로 못박아 둔 것은 대한축구협회의 전시행정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최강희 감독의 의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8회 연속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게 되었다. 2013년 6월 18일 지역 예선 경기를 모두 마치고 다음 날 이전부터 공언한 것처럼 최강희 감독은 사의를 밝혔다. 최강희호의 최종 전적은 7승 2무 5패(공식전 5승 2무 2패).[4] 하지만 대가가 너무 컸는데, 최종전인 이란전에서 최강희 본인도 이란의 카를로스 케이로스 감독에게 수모를 당하는 한편,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사실상 붕괴 상태에서 2014 브라질 월드컵 32강 본선을 대비하게 되었다. 조광래호에 비해 선수 기용의 폭을 넓힌다는 명분으로 다양한 선수를 기용했지만, 월드컵을 1년 앞둔 시점에서도 정성룡[5] 빼면 뚜렷한 주전도 없는 팀이 되었다. 조광래 1년 6개월, 최강희 1년 6개월, 월드컵 32강 본선 감독 1년 이렇게 4년 허송세월을 확정지은 셈이다.

이 팀을 돌이켜보면서 되짚지 않을 수 없는 건 해외파들의 SNS 트위터 항명 파동이다. 조광래 감독의 엘리트 해외파 신뢰에 반비례하여 최강희 감독의 원칙은 경기 감각을 유지하는 국내파들을 중심으로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최강자라는 걸 증명하려고 했고, 경기를 제대로 뛰지 못하는 해외파들을 경쟁체제로 돌리고 파벌로 갈라진 대표팀을 봉합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조광래호에서 해외파 우대에 젖어 이에 불만을 가진 기성용, 윤석영, 김영권 등의 항명은 여러모로 파벌 논란을 일으켰다.

홍명보호의 월드컵과 슈틸리케호가 처참한 실패로 끝난 현재, 명백하게 감독의 책임이 절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조광래, 홍명보, 울리 슈틸리케 셋과는 달리 최강희는 최소한 자신이 공언한 약속[6]은 지켰고, 부임 과정에서 축협의 외압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나마 나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경기력 면에서는 앞선 두 감독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에 할 말이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만 본인도 애초에 자신은 대표팀 감독은 체질적으로 안 맞는다고 했었고, 퇴임 이후에도 대표팀 감독으로서는 좋은 감독이 아니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해당 기사. 또 처음에는 자신은 대표팀 감독에 맞는 그릇이 아니라며 대표팀 감독직을 고사했던 인물인지라 발언의 신빙성도 있는 편이다.

3. 코칭스태프

<rowcolor=#f20138>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강희호 / 코칭스태프
<colcolor=#fff><rowcolor=#ffffff> 직책 이름 국적 생년월일
<colbgcolor=#1d439b> 감독 최강희
Choi Kang-hee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59년 4월 12일 (54세)
수석 코치 최덕주
Choi Duck-joo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0년 1월 3일 (53세)
코치 신홍기
Shin Hong-gi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8년 5월 4일 (45세)
박충균
Park Choong-kyun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3년 6월 20일 (39세)
골키퍼 코치 김풍주
Kim Pung-joo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4년 10월 1일 (48세)
계약 기간 만료 당시 ( 2013년 6월 18일) 기준

4. 활동

4.1. 2012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최강희호/2012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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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4.2. 2013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최강희호/2013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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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

5.1. 32강 본선 진출 성공

수많은 불협화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강희 감독은 한국을 브라질 월드컵 32강 본선에 진출시켰다.

한국이 월드컵에 나가는 것이 당연지사라고 생각하는 여론이 있으나, 이러한 자신감이 생겨난 것은 겨우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때 정도였다. 이 당시 차범근 감독의 대표팀은 압도적인 성적으로 예선을 돌파하였고, 그 이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은 개최국 특전, 2006 FIFA 월드컵 독일,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비록 우여곡절은 있었을지언정 결국에는 진출하였으나, 경기 내용을 살펴 보면 결코 쉽게 통과하였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애당초 32강 본선 진출은 무조건 한다라는 생각 자체가 근자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리고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예선에서 중국, 카타르 등에 패한 슈틸리케호의 더욱 완벽한 실패에 따라 그래도 최강희 감독의 경우 정도면 괜찮은 수준이었다는 재평가를 받기도 했다.

최강희 감독은 자신이 취임 초기에 천명한 내용, 본선 진출의 성공, 그리고 그 이후 퇴임을 확실하게 지켰다. 이 결과 덕분에 다음 감독으로 부임한 홍명보 감독은 본선 진출 과정을 신경쓸 필요없이 자유롭게 대표팀을 리빌딩해 나갈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이를 증명하듯 홍명보 감독은 총 14회에 달하는 A매치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승률은 겨우 25%밖에 되지 않는 역대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월드컵 이전까지는 퇴임 여론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5.2. 대표팀 선발의 원칙 성립

조광래 전 감독의 전술은 2014년 월드컵에서 새롭게 주목받은 스리백 전술로 인하여 다시 재조명받으며, 충분히 재평가받을 자격이 있다. 특히 현 국대 감독들 중 최고 승률이었으며, 취임 초기나 중기의 경기력은 상당히 좋았다는 점만큼은 재평가를 통해 호의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조광래 전 감독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다름 아닌 선수 선발의 문제였다. 바로 주전 우선론이다.[7] 조광래 전 감독은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 발밑의 기술이 좋고 머리가 좋은 선수를 선호한다는 원칙 아래에 이러한 성향이 가장 가까운 선수들을 철저히 우대하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A매치 훈련 과정에서 조광래호는 1군과 2군이 나뉘어 훈련을 받고, 국내파 선수들 중 K리그 득점왕이었던 유병수의 경우 교체 투입되었다가 바로 다른 선수로 교체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그로 인하여 K리그빠들은 조광래 감독의 자질에 대해서 비난하였고, K리그 출신 선수들의 모터베이션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문제가 심각한 것이 하단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월드컵까지 기간이 오래 남아 있는 시점에서 스스로 가용 자원을 제한시켰고, 이후 가용 자원들이 이런저런 사정들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때 대응 능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가 터진 것이 바로 레바논 쇼크. 돈에 맞춰 제한된 선수를 고용하여 운영하는 클럽팀이나, 클럽팀을 무시하고 합숙훈련으로 선수 관리하던 시절의 국가대표팀에서나 가능한 운영 방식이었다.

최강희 감독이 대표팀에 들어오자 마자 맨 처음 시작한 것이 이 무너진 원칙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대표팀 축빠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사실들 중 하나가 월드컵은 결코 1년마다 열리는 리그 경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표팀은 유망주를 발굴하고, 기회를 주는 곳이 아니다. 리그 경기를 뛰지 못 해 죽은 폼을 살리는 곳도 더더욱 아니다. 대표팀은 그 시점에서 최고의 선수들을 모집해서 최고의 팀을 만드는 장소다. 당연히 치열한 포지션 경쟁과 조합의 가능성을 두고 선수를 선발하는 것이고, 그 원칙은 아무리 스타 선수라 하더라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최강희 감독은 이 원칙을 그대로 들이밀어 대표팀을 운영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광래 전 감독에게 우대를 받던 선수들, 이른바 2012 런던 올림픽 세대라 불리는 선수들이 SNS 항명 파동을 벌이는 등 멘탈레기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칙은 끝까지 지켜졌고, 그 결과 국내 K리그 선수들의 불만이었던 대표팀 선출 과정에서의 불이익 역시 크게 줄어들게 된다. 문제는 이 불합리가 홍명보호에서 전혀 생각도 못한 형태로 부활하게 되어버린다는 점이다.[9]

또한 대표팀은 그 시점에서 최고의 실력을 낼 수 있는 인물들을 뽑아 팀을 만드는 자리다. 유럽의 경우 팀은 2년 주기로 만들어진다고 이야기 한다. 바로 중요 이벤트라 말할 수 있는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FIFA 월드컵을 주기로 해서 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AFC 아시안컵과 월드컵이 비슷한 간격으로 시행되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지만, 이는 어느 정도 통용되는 소리이다. 왜냐하면 4년이라는 주기는 팀을 만들고 계속 이끌어 나가는데 있어서 너무나도 긴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해당 선수의 소속팀이 어떻게 달라지게 될지,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조광래 전 감독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비판되는 점이 너무 초반에 베스트 일레븐론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무려 월드컵 본선이 4년이나 남은 시점에서 말이다. 그 4년 사이에 주전 공격수가 2년~3년 동안 선수구실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지, 미드필더의 핵심이 살인태클을 당할지 아무도 모르는데도 조광래호는 철저한 베스트 일레븐 위주의 팀 운영을 가져갔고, 플랜B의 마련에 이상하리만치 소홀했다. 이러한 조광래 감독의 방침이 단적으로 드러난 예가 바로 목발 없이는 걷지도 못하는 이청용을 쿠웨이트전에 소집을 고려하겠다는 인터뷰였다. 결국 그 쿠웨이트전은 최강희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 폼이 떨어진 조광래호 주전들의 자리를 이동국이나 이근호, 김두현, 한상운 등 조광래호에서 외면받던 선수들이 흠잡을데 없이 메꾸면서 승리할 수 있었다.

더욱이 조광래 전 감독의 경우 자나깨나 바르샤식 패스 축구, 점유율 축구에만 집착하는 태도를 통해서 그 약체라는 레바논에게도 패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리고 점유율 축구의 몰락은 2014 월드컵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었다. 현대축구는 갈수록 전술의 변화가 빨라지며, 이 때문에 같은 전술만 고집하면 이내 다른 팀에게 전술이 다 파악되어서 결국 통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당장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두 줄 수비의 창시자 디에고 시메오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리그 한번 우승한 이후 아직도 챔스 우승 트로피를 못 들어올린 것이나, 위르겐 클롭 게겐 프레싱 조차 몇년이 안 되어 같은 분데스리가 팀들에게 플레이가 파훼당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반면에 최강희 감독은 베스트 일레븐에 집착하기보다 최대한 많은 선수들을 기용하여 실험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비록 애매모한 스타팅 라인업으로 뚜렷한 주전이 없었다든지 그 과정에서 경기력이 평가절하 되었다든지 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막장스런 경기력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본선에 진출해서 약속은 지켰다.

최강희 감독이 처음부터 대표팀 감독 연임을 할 생각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후임 감독을 위한 선수 자료를 준비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이 원칙을 너무 잘 지켜서 한편으로는 역효과도 났는데, 팀 스타일이 이도저도 아니게 된 것이다. 자기 스타일과 관계없이 최대한 많은 선수들을 기용하니 수비진은 맨날 바뀌고, 결국 조직력도 악화돼서 후반부에는 에라 모르겠다식 뻥축구만 하게 된 것이다. 최강희호의 문제점이었던 수비 불안도 이에 기인하였으며[10] 조직력이 나쁘니 시력저하급 경기들이 계속 선보여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애초에 2013년 6월에 전북으로 돌아가겠다고 시한부 선언을 해서 팀 스타일을 만들 명분을 자기 스스로 삭제시켰기 때문으로, 결국 자신의 발언이 부메랑으로 돌아온 셈이 되었다.

즉, 최강희의 이런 원칙은 최대한 많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고 유연한 전술을 가졌다는 장점과 큰 틀 안에서의 조직력 약화 그리고 애매모호해진 팀 컬러라는 단점을 동시에 낳게 되기도 했다.[11]

5.3.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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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 축구
조광래 전 감독 경질 이후, 대한축구협회는 대책 없이 우왕좌왕만 하다가 조중연 회장이 개인 연줄까지 내세우면서 설득 끝에 겨우 최강희 감독을 선임, 결국 우여곡절 끝에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는 성공했다. 그런데 당시 반발이 심했음에도 최강희 감독을 그대로 연임시킬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3연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조 1위로 브라질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면 아마 축구협회에선 언플과 회유로 온갖 구실을 붙여서 하기 싫다는 최강희 감독을 기어이 본선까지 끌고 가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시아 최종예선 마지막 3연전을 엉망으로 치른 게 오죽하면 최강희가 일부러 그랬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12][13]

이는 최강희만 탓하기보다 협회의 그릇된 운영 방식에도 분명한 비판이 가해져야만 한다. 당장 예선전이 한참 진행 중인데 대안도 준비 안 해놓고 일단 감독부터 날려놓고 다급해지니까, 본인이 하기 싫다는 최강희 감독을 인맥빨로 강제로 국대 감독에 눌러앉혔다. 당시 최강희는 전북 감독 자리에 애착심을 보이면서 국대 감독 자리를 영 내켜하지 않았으나, 사방에서 압력이 들어오자 예선까지만 국대를 맡겠다는 시한부 조건을 내걸었다. 사실 이 시한부 조건이란 게 '난 진짜 진짜 하기 싫다. 그러니 제발 시키지 마라'라는 식의 아주 완곡한 표현이었으나, 축협이 이 말도 안되는 조건을 진짜로 덜컥 수용하면서 상황이 더 꼬여버린 것이다. 도대체 전 세계 어느 나라 축구 대표팀이 예선용 감독 따로, 본선용 감독 따로 기용을 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처음부터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14][15]
대표팀에 대한 나의 생각은 0%였다. 가려면 그때 갈 수 있었다. 0.1%라도 마음이 있었으면 왜 그때 안 갔겠는가? 2002년 박항서 감독, 2003년 쿠엘류 감독 밑에서 코치를 하는 동안 느꼈다. 대표팀은 내가 올 곳이 아니고, 다시는 맡아선 안 된다는 걸. 대표팀 감독은 비즈니스와 정치를 해야 할 때가 더 많다. 난 그거 못한다. 내가 생각하는 감독은 선수들과 늘 부대끼고, 그들을 관찰하고 특징을 파악해 맞는 옷을 입히는 거다. 그런데 대표팀에 가면 한 달에 겨우 사나흘 훈련하고 나머지 시간엔 K리그 보러 다니고 모여서 회의만 한다. 선수들과 함께 할 시간이 부족하다. 대표팀에서 무슨 닥공을 하고, 패스 축구, 템포 축구를 하나? 사흘 준비하면 하루는 회복 훈련, 하루는 전술 훈련과 스피킹 게임하고, 다음 날 경기 뚝딱한 뒤 끝나면 짐 싸서 각자 잘 가~ 하고 헤어진다. 그런데 감독은 끊임없이 언론에다가 자기가 그 사흘 동안 뭘 했는지를 내놔야 한다. 이런 축구를 추구하고 이렇게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뻥을 치는 거다. 큰 대회 전까지, 혹은 장기 합숙 훈련을 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거다. 한국 축구의 현실이 선수들 모아서 사흘 훈련하고는 세계적인 팀들과 경쟁하는 건 어렵다. 이젠 아시아 내에서 격차가 줄어서 예선도 아슬아슬하다. 근데 팬들의 눈높이는 저만치 올라가 있다. 누가 "당신 대표팀 감독인데 축구 색깔이 뭐냐"고 묻길래 난 살색이라고 답했다. 장기 소집이라면 모를까 짧게 소집해서 색깔 내는 건 어렵다. 내가 지향하는 것과 스타일이 달랐다. 죽을 거 알고 그 자리에 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렇게 거부하고 밀어냈는데 2011년 12월에는 더 이상 뿌리칠 수가 없었다. 선수 시절 스승이었던 조중연 전 회장과의 의리로 볼 수도 있다. 그 분에게 빚진 은혜도 갚아야 했다. 그리고 내 의지만으로 뿌리칠 수 없는 상황도 있었다. 결국 봉동이장이 서울로 압송돼갔다.
- 서호정의 킥오프에서 발췌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사태는 최강희 감독이 아니라 근시안적으로 바라보는 대한축구협회의 책임이 훨씬 더 큰 총체적 난국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축구협회는 그 다음 러시아 월드컵까지도 이러한 근시안적 졸속 행정을 되풀이했고, FC 코리아로 대표되는 극성 축구팬들은 위와 같은 국가대표 감독의 고충을 모르고 1년짜리 단기 부임한 감독만 닥달하는 과정이 최강희가 부임한 2012년부터 2018년까지 되풀이되고 있다.[16][17]

최강희 감독의 발언에서 알다시피 애초에 대표팀과 클럽팀은 명백히 다르다. 대표팀은 클럽팀에 비해 같이 모여서 훈련하고 경기를 치르는 횟수가 한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표팀에서 전술을 실험하고 개발하는 일은 클럽팀에 비해 훨씬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북 팬덤들[18]과 비난 여론[19]에 떠밀려 퇴출이나 사퇴하는 형태가 되었지만, 그래도 최강희 감독은 자신의 말을 지켰고, 전북으로 다시 돌아갔다. 애당초 최강희 감독은 자신의 원칙, 어디까지나 예선 과정만 자신이 맡겠다는 점을 계속해서 어필하였다. 그 전에 3차 예선 쿠웨이트전도 원래는 조광래 감독이 맡았어야 했던 경기이고 조광래가 팀을 문제없이 잘 이끌었다면 중도에 경질될 일도, 최강희가 원치 않게 감독직을 맡을 일도 없었다. 그리고 브라질 월드컵이 끝난 이후의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좀 무시무시한 얘기가 될 수도 있지만 최종예선도 못 가고 탈락하는 일이 있더라도 쿠웨이트전까지는 조광래 감독에게 맡겼어야 하고 그 후에 잘못되어서 경질해도 후임 감독은 신중하게 선임했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으나 오히려 월드컵 진출실패하면 한국축구는 더 추락했을 것이다. 또 한국 대표팀 이야기는 아니지만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감독을 데려왔는데도 불구하고 최종예선도 못 가보고 3차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최강희 감독은 일단 자기가 하겠다는 선까지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보여준 참혹한 경기력, 선수들과의 갈등을 빚으면서 생긴 통솔력 문제와 체계적인 전술의 부재 등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좋은 감독은 아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최강희 본인조차도 상술한 브라질 월드컵 이후 서호정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국대 감독을 맡았던 시기를 영광스러운 자리는 커녕 흑역사로 취급하며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을 정도.

이토록 불협화음이 많았던 탓에 축구팬들은 알게 모르게 국가대표팀 감독 최강희에 대한 언급을 피하려고 한다. 당장 싸움이 붙었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세력이 얽혀서 개판이 나기 때문이다.
  • 전북빠(최강희 감독을 빼냈다는 이유로)
  • 케이리그빠(국내파를 무시한다는 이유로)
  • 이동국빠(박빠들의 어그로 등 때문에)
  • 홍명보[20](엔트으리 때문에)
  • 기성용까(SNS 사건 때문에)
  • 일부 일베충( 기성용 전라도 출신[21][22]이라는 이유로)
  • 김현회빠(한국 축구를 위해 용기있게 내부고발을 했다는 이유로)
  • 동정론(본인이 원하지도 않는데 정치적 이유로 강제로 끌려온 감독, 1년만 맡을테니 후임자를 찾으라는 요청에도 축구협회가 후임자 물색에 소극적이었던 부분, 그 와중에 통제되지 않는 선수단 등)


  • 기성용[23](최강희호의 성적도 좋지 않고 전술도 안 좋았는데 충분히 무시받을 만하다는 이유로)
  • 해축빠(국내파가 형편없기 때문에)
  • 박주영빠(해외에서 뛰고 있는 한국 대표 공격수를 지지하는 이유로[24])
  • 홍명보빠(2002년의 영웅이며 올림픽 동메달의 성과가 있다는 이유로)
  • 국축까(해외파가 우월하기 때문에)
  • 야빠(그냥 축구를 까려는 이유로)
  • 대다수 일베충( 야갤의 영향으로 국축까가 많기 때문에)
  • 김현회까(한국 축구의 인재를 망치려고 한다는 이유로)
  • 무능론(이유가 뭐가 되더라도 일단 국가대표팀을 맡으면 최선을 다 했어야 했는데 시작부터 시한부 선언을 한 부분에 대한 무책임, 전술적 부족함과 선수단 장악에 실패한 점 등[25])

이렇듯 수많은 집단들이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대표팀에 온갖 의견을 내게 되었는데, 이는 한국 축구가 극심한 혼란기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한 번 싸움이 붙으면 엮이는 사람들과 이유가 복합적이라 기사가 날 때마다 논란이 벌어진다. 이 전쟁의 시초라 볼 수 있는 논쟁은 단연 이동국 VS 박주영이고, 이 두 선수 팬들의 대결구도가 최강희호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나이 30대를 넘은 이동국과 폼이 하락세로 접어들기 시작한 박주영을 가지고 여전히 누가 국가대표팀 간판 공격수인가 여부로 싸우고들 있다는 점에서 한국 축구가 답답해졌다고 볼 수 있다.[26] 한국 축구를 둘러싼 시각에서 본격적이 편가르기, 진영싸움, 정치질이 시작된 시기고 믿고 뽑을 선수도 적어진 혼란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의 인상이 아직도 해축빠들에게 크게 남았는지 현재 기성용을 필두로 해외파들의 시대가 열린 지금은 최강희호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가 더욱 커져서 나무위키에도 최강희 문서가 어떠한 인물들에 의해 지나친 비난이 쓰여지기도 하는 등, 최강희는 현재까지도 고통받고 있다.

6. 전적

결과 : 총 14전 7승 2무 5패 23득점 20실점
경기 수 득점 실점 승률[27]
<rowcolor=#ffffff> 14 7 2 5 23 20 50%
일시 / 장소 상대 결과 대회 득점 비고
2012년
2012년 2월 25일
( 전주)
파일:우즈베키스탄 국기.svg
우즈베키스탄
4 : 2
친선 경기 이동국(2골)
김치우(2골)
2012년 2월 29일
( 서울)
파일:쿠웨이트 국기.svg
쿠웨이트
2 : 0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아시아 지역 3차 예선
이동국, 이근호
2012년 5월 30일
( 스위스, 베른)
파일:스페인 국기.svg
스페인
1 : 4
친선 경기 김두현
2012년 6월 8일
( 카타르, 도하)
파일:카타르 국기.svg
카타르
4 : 1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이근호(2골)
곽태휘, 김신욱
2012년 6월 12일
( 고양)
파일:레바논 국기.svg
레바논
3 : 0
김보경(2골)
구자철
2012년 8월 15일
( 안양)
파일:잠비아 국기.svg
잠비아
2 : 1
친선 경기 이근호(2골)
2012년 9월 11일
(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파일:우즈베키스탄 국기.svg
우즈베키스탄
2 : 2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필리포시안(OG)
구자철
2012년 10월 16일
( 이란, 테헤란)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0 : 1
2012년 11월 14일
( 화성)
파일:호주 국기.svg
호주
1 : 2
친선 경기 이동국
2013년
2013년 2월 6일
( 영국, 런던)
파일:크로아티아 국기.svg
크로아티아
0 : 4
친선 경기
2013년 3월 26일
( 서울)
파일:카타르 국기.svg
카타르
2 : 1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이근호, 손흥민
2013년 6월 4일
( 레바논, 베이루트)
파일:레바논 국기.svg
레바논
1 : 1
김치우
2013년 6월 11일
( 서울)
파일:우즈베키스탄 국기.svg
우즈베키스탄
1 : 0
아크말(OG)
2013년 6월 18일
( 울산)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0 : 1

[1] 계약 만료일 기준. [2] 2014년 브라질 월드컵 32개국 본선에 진출에 성공했다. [3] 이는 차후 상황이 같진 않았지만 신태용에게도 반복된다. 신태용 본인도 하기 싫다고 계속 했지만 당시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억지로 하게 된 경우였다. [4] 참고로 조광래호는 12승 5무 3패(공식전 7승 3무 1패)였다. 최강희호의 5패 상대는 이란(2패), 스페인, 크로아티아, 호주. 조광래호의 3패 상대는 이란, 일본, 레바논이었다. [5] 그러나 정성룡마저도 슈퍼세이브가 거의 없고 홍명보 감독 체제에서 발탁된 김승규에 의해 입지가 심히 불안하다. 일단 국내 팬들은 김승규의 선발 출전을 바라는 상태다. [6] 월드컵 예선만 맡겠다는 것과 월드컵 아시아 예선이 끝나면 미련 없이 전북으로 돌아가겠다는 것. [7] 보통 해외파 우선론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본래 K리그에 있던 선수들이 해외로 나가며 해외파가 되어버린 케이스가 많다. [8] 그렇다고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선수들이 기용에서 제외된 것도 아니다. 윤석영은 최강희호에서 국가대표팀에 데뷔했고, 기성용은 최종 예선 막판을 제외하면 국가대표팀에서 빠진 적도 거의 없으며(더불어 이때 최강희 감독은 이 선수가 SNS에서 뒷담화 한 것도 알고 있음에도 넘어갔다.), 김영권 역시 SNS로 포지션 불만을 언급한 뒤 잠시 빠졌지만, 곧 다시 기용되었다. 마지막 이란전 패배가 김영권의 실책에서 비롯되었다. 실제 출전 시간을 살펴보면 이 때 최강희호에서 입지가 크게 줄어든 해외파래봤자 병역 논란에 시달리며 올대로 차출된 박주영과 아우구스부르크로 임대되어 잠시 좋은 활약을 보여준 지동원 두 명이 끝이다. [9] 홍명보의 선수 선발 기준이야말로 조광래의 그것이 극단적으로 발현된 형태라고 할 수 있기에, 홍명보호의 처참한 실패로부터 우리는 조광래가 짤리지 않고 2014년 월드컵까지 그대로 국대를 이끌었을 때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10] 월드컵 최종예선 내내 포백라인이 맨날 바뀌었다. 수비라인이 자주 바뀌는 건 결코 좋다고 볼 수 없는데, 조직력이 가장 중요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11] 이런 점에서 있어서 가장 비판받는 유럽축구의 감독이 펩 과르디올라인데, 유럽 챔피언스리그만 나가면 잘 하는 팀 컬러를 갖다던지고 지나치게 변칙 전술을 사용해대서 조직력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이 여파로 펩은 바르셀로나를 떠난 뒤로 단 한번의 챔스 우승 경력이 없었다가 2023년 맨체스터 시티의 트레블로 다시 빅이어를 들었다. [12] 하지만 취임 인터뷰 당시 아시아 예선만 하겠다고 못을 제대로 박았으니 설사 3연전 승리를 했어도 단호하게 자진사퇴를 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13] 심지어 최강희 감독은 감독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어야 국대 감독을 그만두기에 유리하다며, 언론인들에게 자신에 대한 안 좋은 기사를 많이 써달라고 부탁을 했을 정도였다. 물론 최강희 감독 특유의 유머성 농담이 담긴 말이지만, 그만큼 국가대표 감독직보다 전북 현대 감독 복귀를 희망했다. [14] 2006년 독일 월드컵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때는 원래 조 본프레레로 본선까지 가려고 했으나, 예선까지는 문제없이 잘 했는데, 2002년 4위로 눈만 미친듯이 높아진 한국축구에게는 2005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최하위 부진과 본프레레가 신뢰와 믿음을 보이지 못하여 월드컵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본프레레를 경질시키고 본선용으로 딕 아드보카트를 선임한 것이다. [15] 2000년대 이후 대한민국이 예선을 치르지 않았던 2002년을 제외하면 지역예선부터 본선까지 감독교체없이 갔던 경우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때의 허정무가 유일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대회는 16강(15위)에 진출했으며, 지역예선부터 잡음을 일으키며 예선 도중에 감독을 교체했던 2006년은 대회 17위, 2018년은 대회 19위로 아쉽게 16강은 무산되었으나, 2014년은 최악의 경기력으로 대회 27위로 탈락하였다. 이는 2022년, 4년간 유지된 벤투호가 다시 한 번 16강(16위)에 진출하며 증명되었다. [16] 클럽 감독도 시간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는 것이 축구계의 일반적인 시각이고, 자원과 시간이 매우 한정적인 국대 감독은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한국 축구는 두 번의 월드컵 동안 단기 감독 돌려쓰기를 반복하고 있고 그 시발점이 최강희호였다. [17] 물론 이 난리를 치르고 난 후 부임한 슈틸리케에게는 그래서 한동안 맹목적인 지지론, 4년은 기다려줘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반대로 슈틸리케호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차단해버리는 정반대의 역효과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슈틸리케는 사람들의 믿음에 보답하지 못 했고 결국 경질되면서 대표팀의 암흑기가 되풀이가 되었다. 물론 이건 이것대로 애초에 협회가 감독이라는 첫단추를 잘못 끼웠단 탓이 훨씬 컸다. [18] 최강희는 예선전을 끝으로 전북 감독직으로 다시 복귀하고 싶다는 의사를 드러냈었고, 전북 프런트와 서포터즈도 축협에게 강제로 빼간 최강희 감독을 다시 복귀시킬 것을 요구했다. [19] 선임 과정에서부터 문제가 많았고, 국대 감독직을 노골적으로 싫어했던 최강희 감독의 태도, 선수들을 장악하지 못했으며 뚜렷한 전술적 기량도 보이지 못해 최강희 감독의 유임을 반대했다. [20] 정작 홍명보와 최강희는 그리 나쁘지 않은 관계였다. 홍명보는 올림픽 대표팀 감독 시절 선수 차출 문제로 조광래와 갈등을 겪었던 것과는 달리 기성용 페이스북 사건 당시 기성용을 불러 최강희 감독한테 사과할 것을 당부하였고, 최강희도 브라질 월드컵 본선에서 실패한 홍명보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를 옹호하면서도 한 편으론 안타까워했다. [21] 사실 그 때문에 최강희를 같이 까기도 한다. 전라도 팀의 감독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다만 기성용을 더 죽어라 깔 뿐이었다. [22] 기성용의 그 동안 망언 때문에 기성용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이 부류에 꽤 있었다. [23] 정작 최강희는 기성용을 품어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24] 이들은 특히 이동국을 해외 진출했다가 실패한 아시아 수준이 한계인 선수로 인식하고 있어서, 해축빠와 상당수 접점이 있다. [25] 이는 후에 더 심각한 상황에서 대표팀 감독에 부임해서 경기력을 눈에 띄게 향상시켜 카잔의 기적을 만들고 흑역사를 끊어낸 신태용 감독과도 비교할 수 있다. [26] 최순호 - 황선홍에서 이동국 - 박주영으로 이어지는 대표팀의 최전방이자 대한민국 간판 공격수 계보는 이 시기부터 흐려지기 시작했고, 브라질 월드컵에서 박주영이 망가진 이후로는 확실하게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지동원은 폼이 워낙 들쑥날쑥 한데다가 원톱으로서는 낙제점이었고, 김신욱은 전봇대라는 오명만 들어야 했으며, 슈틸리케가 뽑아서 중용하던 이정협도 결국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또한 손흥민은 골 결정력은 한국최정상이지만 정작 원톱감은 아니고, 황희찬은 황소같은 체력과 몸싸움은 합격점이라도 골 결정력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이승우는 피지컬이 절망적인 수준이다. 현재 이 문제는 신태용 시절부터 아예 포메이션을 442 투톱체제로 바꿔서 손흥민을 톱으로 올려서 득점력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다. 손흥민이 2016년부터 토트넘에서 톱에 가까운 스타일로 변화가 이뤄져서 가능했던 방법이었다. [27] 축구 야구와 달리 무승부를 분모에 산입 계산해서, 무승부는 승리로 취급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승률 문서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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