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태저넷 왕조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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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Plantage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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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역대 왕조 중 하나. 1154년에서 1485년까지 잉글랜드의 왕가였다. 프랑스어로는 '플랑타주네(Maison Plantagenêt)'이다.플랜태저넷 왕조도 부계 때문에 '플랜태저넷'이라 이름 붙여졌으나 실질적으론 노르만 왕조의 적녀를 통해 계속 이어진 노르만계 왕조이다. 그럼에도 이 왕조를 기점으로 잉글랜드 국왕이 기존 프랑스의 노르망디뿐만 아니라 앙주 영지까지 얻게 되었으니 주요 분기점으로서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플랜태저넷 왕조라고 구분지어 이름붙여졌다.
본가에서 8명, 랭커스터 왕조에서 3명, 이후 요크 왕조에서 3명이 즉위해 총 14명의 군주를 배출했다.
'플랜태저넷'은 사실 헨리 2세의 아버지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 플랑타주네가 항시 투구에 금작화의 가지(라틴어: Planta Genista)를 꽂고 나섰던 것에서 유래해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1] '플랜태저넷'이라는 말 자체는 조프루아 5세 이후에는 쓰이지 않다가 1460년경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A]가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강조하기 위해 이 표현을 자신의 별칭으로 썼다. 즉 리처드 1세 같은 이전 플랜태저넷 왕조의 왕들은 딱히 플랜태저넷 왕가라는 정체성보단 노르만 왕조의 정체성이 컸으며 왕가 휘장도 노르망디의 사자 휘장을 썼다.
플랜태저넷 왕가 출신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는 리처드 1세, 존 왕, 흑태자 에드워드 등이 있다.
이 왕조부터 잉글랜드 왕국의 고대 앵글로색슨 왕들의 피가 다시 영국 왕실에 흐르게 되었다. 플랜태저넷 왕조의 창시자 헨리 2세가 모계로는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영국 왕실 계보도> 참조.
2. 역사
{{{#!folding [앙주-샤토됭 가문, 플랜태저넷 왕조 계보도] |
에르베 1세 모르타뉴 백작 |
고츠프레드 샤르트르 자작 로르공 가문 |
풀크 1세 앙주 백작 잉젤거 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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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베 2세 모르타뉴 백작 |
힐데가르드 |
조프루아 1세 샤토됭 자작 샤토됭 가문 |
로르 1세 노장 백작 |
풀크 2세 앙주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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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 2세 샤토됭 자작 투르 대주교 |
아달루 |
풀쿠아 모르타뉴 백작 페르슈 백작[1] |
멜리장드 노장 백작 |
조프루아 1세 앙주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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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프루아 1세 페르슈 백작 샤토됭 자작 |
페르슈의 위그 2세 |
풀크 3세 앙주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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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 3세 샤토됭 자작 페르슈 백작 |
로르 2세 페르슈 백작 샤토됭 자작 |
조프루아 2세 가티네 백작 |
앙주의 에맹가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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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프루아 2세 페르슈 백작 |
위그 4세 샤토됭 자작 |
조프루아 3세 앙주 백작 |
풀크 4세 앙주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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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1세 잉글랜드 왕 노르만 왕조 |
멜리장드 예루살렘 왕 레텔 |
풀크 5세 앙주 백작 예루살렘 왕 |
조프루아 4세 앙주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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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잉글랜드 왕 노르만 왕조 |
조프루아 5세 플랑타주네 앙주 백작 |
보두앵 3세 예루살렘 왕 |
아모리 1세 예루살렘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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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2세 잉글랜드 왕 플랜태저넷 왕조 |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아키텐 공작 |
시빌라 당주 |
보두앵 4세 예루살렘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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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왕 헨리 잉글랜드 공동왕 |
리처드 1세 잉글랜드 왕 아키텐 공작 앙주 백작 |
조프루아 2세 브르타뉴 공작 |
존 왕 잉글랜드 왕 아키텐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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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튀르(아서) 1세 브르타뉴 공작 앙주 백작 |
헨리 3세 잉글랜드 왕 아키텐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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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1세 | |||||||||||||||||
에드워드 2세 | |||||||||||||||||
에드워드 3세 | |||||||||||||||||
흑태자 에드워드 |
곤트의 존 랭커스터 공작 |
랭리의 에드먼드 1대 요크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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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2세 | 랭커스터 왕조 | 요크 왕조 |
{{{#!folding [랭커스터 왕조, 요크 왕조 계보도] |
에드워드 3세 플랜태저넷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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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태자 에드워드 |
곤트의 존 랭커스터 공작 |
랭리의 에드먼드 1대 요크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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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2세 플랜태저넷 왕조 |
헨리 4세 랭커스터 왕조 |
존 보퍼트 1대 서머셋 백작 |
코니스버러의 리처드 3대 케임브리지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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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웬 튜터 |
발루아의 카트린 샤를 6세의 딸 |
헨리 5세 랭커스터 왕조 |
존 보퍼트 1대 서머셋 공작 |
요크의 리처드 3대 요크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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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튜터 | 마거릿 보퍼트 |
헨리 6세 랭커스터 왕조 |
마거릿 보퍼트 |
에드워드 4세 요크 왕조 |
리처드 3세 요크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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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7세 튜더 왕조 |
요크의 엘리자베스 |
에드워드 5세 요크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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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튜더 왕조 |
[1]
모르타뉴 백작위와 노장 백작위를 통합해 페르슈 백작위를 창설했다.
2.1. 기원
편의상 '앙주 백작가'라고도 불리는 플랜태저넷 왕조는 본래는 루아브 계곡의 영주 중 하나로 좀 더 계보를 올라 간다면 본래는 서프랑크의 초대 국왕이었던 대머리왕 샤를 2세에게 예속되었던 사냥터지기였다. 더 위로 올라가면 북프랑스 멘 지방을 통치하던 프랑크 백작가문 로르곤 가의 분파로, 고즈프레드(조프루아 1세) 때 샤토됭 자작이 된 이후, 샤토됭 가문을 창건하였으며, 아들대에 페르슈 백작위, 후손인 조프루아 3세 때 앙주 백작위를 얻었다. 조프루아 3세가 일찍 죽고, 동생인 풀크 4세가 앙주 백작이 되었으며, 그 아들이자 헨리 2세의 조부인 풀크 5세는 1131년 예루살렘의 멜리장드와 재혼해 예루살렘 국왕으로 즉위하기까지 했다. 이때 전처인 멘의 상속녀 아렝뷔르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조프루아 5세 '플랑타주네'에게 앙주 백작위를 물려주고 중동으로 건너갔다.[3] 그리고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는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의 왕녀 마틸다와 결혼해 헨리 플랜태저넷, 즉 헨리 2세를 낳았다.2.2. 잉글랜드 왕위
헨리 1세 사후 그의 외조카인 스티븐이 즉위했는데 사실 헨리 1세가 생전에 정한 후계자는 딸 마틸다였다. 하지만 봉건 영주들은 마틸다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스티븐과 마틸다 사이에서 왕위 계승을 두고 내전( 무정부시대)이 일어났다. 일단 스티븐이 승리했으나, 스티븐의 맏아들이 죽어 계승자도 없었고[4] 후에 마틸다와 화해하면서 스티븐은 마틸다의 장남 헨리를 후계자로 삼는다. 스티븐의 사후 헨리가 헨리 2세로 즉위하여, 플랜태저넷 왕조가 개창되었다.2.3. 앙주 제국
현대 역사가들은 헨리 2세 및 그의 아들들인 리처드 1세, 존 왕을 별도의 왕조로 구별하여 앙주(Anjou) 왕조로 분류한다. 우선 헨리 2세가 외할아버지 헨리 1세의 노르망디[5]와 아버지 조프루아 5세의 앙주를 가지고 있었으며, 아키텐 공작 기옌 10세의 유일한 상속녀였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아키텐, 가스코뉴, 푸아투 등을 가지게 되면서 대륙 쪽에 광활한 영토를 가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브르타뉴까지 가지게 되면서 프랑스 영토의 3분의 1 이상을 잉글랜드가 차지하게 되었다. 잉글랜드 왕은 원래 노르망디 공국 시절부터 프랑스 내의 영토에 관해서는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지만 그 봉신이 프랑스 왕보다 영토가 컸던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 서부를 지나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자랑했으며, 이를 앙주 제국(Angevin Empir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4. 잉글랜드의 왕조
하지만 존엄왕 필리프 2세의 공격을 받아 대륙 내 영토(프랑스 서부)를 존 왕이 대거 상실하면서, 진정한 플랜태저넷 왕조는 잉글랜드를 본거지를 삼은 헨리 3세로부터 시작된다.2.5. 단절과 분열
플랜태저넷 왕조 본가의 마지막 후손은 리처드 2세이지만, 그가 플랜태저넷 왕조의 마지막 후손은 아니다. 에드워드 3세의 아들 중 장남은 흑태자 에드워드였고, 차남은 영아 때 죽었으며, 3남은 클라렌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 4남이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5남이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였다.3남 라이오넬은 외동딸 필리파 하나만 남기고 죽었고, 흑태자 에드워드 또한 부왕 에드워드 3세보다 일찍 사망해서, 흑태자의 아들이자 에드워드 3세의 적장손 리처드 2세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이후 리처드 2세가 볼링브로크의 헨리( 헨리 4세)가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폐위된 뒤 후손없이 죽었지만, 그렇다고 플랜태저넷 혈통이 단절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랭커스터와 요크 모두 작위명에서 따온 이름으로, 두 왕조의 본성은 플랜태저넷이었다. 리처드 2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숙부인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섭정을 맡았으나 곤트의 존이 죽고 친정을 시작한 리처드 2세와 의회와의 반목이 깊어진 끝에, 곤트의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리처드 2세의 왕위를 찬탈하여 헨리 4세로 즉위하면서 랭커스터 왕조가 개창되었다. 이후 헨리 4세의 아들 헨리 5세, 손자 헨리 6세가 연이어 즉위하면서 랭커스터 왕조가 이어지나 싶었다.
하지만 정신병이 발발한 헨리 6세의 연이은 실정에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이[A] 반기를 들고, 그가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당한 뒤에도 지지세력을 결집한 리처드의 장자 에드워드 4세가 마침내 랭커스터파를 격파하고 왕위를 찬탈하면서 요크 왕조를 개창했다. 이 과정에서 헷갈리지 않기 위해 랭커스터와 요크로 구분하는 것이지,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플랜태저넷 혈통이라고 생각하며 싸웠다. 실제로 이들의 촌수도 3촌에서 6촌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에드워드 3세의 슬하에는 아들이 8명이나 태어났고, 그중에 5명의 아들이 성인으로 장성하여 후손까지 남겼다.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는 젊은 나이에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지만, 이미 뒤를 이을 아들인 리처드 2세를 낳아 후계 구도가 공고했다. 에드워드 3세의 나머지 아들들은 영토와 공작의 지위를 하사받고 분가했는데, 4남인 곤트의 존이 랭커스터를 하사받고 제1대 랭커스터 공작이 되었으며, 5남인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요크를 하사받고 제1대 요크 공작이 되었다. 다행히 리처드 2세의 즉위 초에는 곤트의 존이 섭정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곤트의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이미 청원파의 수뇌부 중 한 명으로서 리처드 2세와 꾸준히 반목하고 있었고, 곤트의 존이 사망하자 리처드 2세는 사촌형인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영토와 작위를 박탈하고 추방시켰는데 방심하고 아일랜드를 방문해서 궁전을 비웠다. 이때 헨리가 반란군을 조직하고 귀국한 뒤에 왕위를 찬탈하고, 리처드 2세는 항복한 뒤 유배당하고 얼마 뒤에 사망했다.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헨리 4세가 된다.
백년전쟁에서의 패전 이후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사이에서 기나긴 내전인 장미전쟁이 벌어졌다. 요크 가문의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는 부계 쪽으로는 에드워드 3세의 5남의 후손으로 4남의 후손인 랭커스터 가문보다 계승권이 낮았지만, 모계쪽으로 에드워드 3세의 3남 클라렌스 공 라이오넬의 후손임을 내세워 왕위를 주장했다. 3대 요크 공 리처드는 랭커스터 가문에 패배한 이후, 처형당했지만 이후 랭커스터 왕조의 헨리 6세는 리처드의 아들 에드워드 4세에 의해 폐위되었고, 그의 장자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도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사로잡혀 처형되면서 랭커스터 왕조는 혈통이 단절되었다. 이후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하여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가 즉위해야 했지만 에드워드 4세의 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에드워드 5세의 계승을 부정하고 스스로 리처드 3세로 즉위했다. 인심을 잃은 리처드 3세는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가 이끄는 반란군에게 패배하고, 전사하여 요크 왕조도 끝나고, 플랜태저넷 왕가는 웨일즈인의 피가 섞인 튜더 왕조로 교체되었다.
보즈워스 전투 이전에 리처드 3세는 이미 유일한 적자 미들햄의 에드워드가 요절하면서 후계자가 없었고, 전임 에드워드 4세의 아들들인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작 리처드 또한 숙부인 리처드 3세에 의해 살해당한 지 오래였다. 결국 요크 왕조의 남계 후손은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자 리처드 3세의 형이었지만,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한 클라렌스 공작 조지의 아들 워릭 백작 에드워드만 남게 되었다. 정작 리처드 3세는 아들인 미들햄의 에드워드가 사망한 뒤, 친조카 워릭 백작이 아닌 외조카 존 드 라 폴(누이 엘리자베스의 아들)을 추정상속자로 삼았다. 클라렌스 공작 조지는 형 에드워드 4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처형당한 역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또한 목숨은 살려주되 왕위계승자로 삼기에는 무리수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워릭 백작 에드워드도 헨리 7세 시절 런던탑에 감금되었다가, 1499년에 처형당하면서 요크 왕조의 남계 혈통도 완전히 단절되었다.
랭커스터파의 지지는 헨리 6세의 이부형제인 제1대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며, 모계로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후손인 헨리 튜더(헨리 7세)가 이어받았고, 요크 가문의 혈통은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물려받았는데 그녀가 헨리 7세와 결혼하여 후대인 헨리 8세 시절에는 어느 정도 혈통상의 정통성을 갖추게 되었다.
2.6. 튜더 왕조로의 계승
이러한 단절과 분열이 계속된 끝에 장미전쟁의 종결 이후 랭커스터 왕조의 방계인 튜더 가문의 헨리 7세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했다. 사실 랭커스터의 방계라고 부르기도 어려운데 헨리 7세 본인은 부계로는 잉글랜드 왕가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헨리 7세의 어머니가 마거릿 보퍼트였는데 외가인 보퍼트 가문이 에드워드 3세의 4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후손이었다.[7] 잉글랜드는 여계 승계와 외손 승계를 인정했기 때문에, 헨리 7세는 모계를 통해 에드워드 3세의 후손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보퍼트 가문도 곤트의 존이 세 번째 결혼에서 낳은 자식으로 창설된 가문으로, 리처드 2세 시절에 적자로 인정받긴 했지만 왕위 계승권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통성이 부족했다.게다가 부계인 튜더 가문으로 가면 더욱 가관이다. 튜더 가문은 본래 브리튼인의 웨일즈 공가의 후손인 유서깊은 가문이었지만 잉글랜드 전체에서 보면 미약한 귀족 가문에 불과했다. 하지만 헨리 튜더의 조부였던 오웬 튜더가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광인왕' 샤를 6세의 딸이자 헨리 5세의 미망인이었던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들인 에드먼드 튜더와 재스퍼 튜더를 낳으면서 듣보잡에서 벗어났다. 오웬 튜더와 카트린의 장남인 에드먼드 튜더가 바로 헨리 7세의 친아버지이다. 헨리 7세의 아버지였던 에드먼드 튜더와 그의 동생 재스퍼 튜더는 이부형이었던 헨리 6세로부터 형제임을 인정받았고, 각각 리치먼드 백작과 펨브로크 백작 작위를 하사받으며 귀족으로 대우받았다. 당연히 에드먼드와 재스퍼는 자신들을 후히 대우해주는 이부형을 따라, 장미전쟁 내내 철저히 랭커스터 왕조의 편에 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튜더 가문에게 왕위계승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헨리 7세는 친가와 외가 모두가 애매한 지위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가능성은 전무하다시피했다. 하지만 장미전쟁에서 헨리 6세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전사하고, 헨리 6세마저 요크 왕조에 의해 폐위된 뒤 의문사해 랭커스터 왕조의 직계가 단절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게다가 조카인 에드워드 5세를 폐위시키고 유폐시킨 뒤 스스로 왕위에 오른 리처드 3세로 인해, 요크 왕조의 왕위 계승자들도 모조리 작살나면서 헨리 7세의 왕위 계승 가능성이 점쳐지기 시작했다. 이에 헨리 6세의 이부형제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며 보퍼트 가문의 후손인 헨리 7세가 랭커스터 지지자들의 구심점이 되었고 왕위를 주장하게 되었다.
결국 리처드 3세가 보스워스 전투에서 전사하고, 이후 헨리 7세가 즉위하면서 튜더 왕조가 개창되었다. 그리고 헨리 7세는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면서 채웠다. 즉, 랭커스터의 어설픈 방계 따라지였던 헨리 7세가 요크 왕조의 공주와 정략결혼을 하면서 간신히 왕권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3. 전설
앙주 백작가는 악마의 자손이라는 전설이 있다. 12세기 무렵에 떠돌던 전설에 따르면 앙주 백작들 중 한 명(조프루아 2세 또는 풀크 3세로 추정)이 먼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멜뤼진이란 여인을 데려왔고, 그녀에게서 4명의 자식들을 보게 되었지만 항상 아내가 미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 때문에 곤혹스러웠다.이 때문에 백작은 비밀리에 기사 네 명에게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내의 외투 자락을 밟고 있으라고 명령했고, 명령을 받은 기사들은 충실하게 명령을 수행했다. 이에 신부가 멜뤼진에게 성체를 갖다댄 순간 뒤에 서있는 기사들을 밀쳐내고 아직 어린 두 아이를 안고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멜뤼진의 정체는 악마의 딸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체를 바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미사 때 밖으로 나가려했다는 것으로 끝난다. 손이 두 개밖에 없었기에 셋째 아이는 데려가지 못했고, 남은 아들이 앙주 백작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프루아 2세와 풀크 3세의 아내들의 가계는 매우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전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당시 이런 추문이 나돌았다면 무사했을 리가 없다. 조프루아 2세 당주의 아들인 풀크 3세에게는 친손자가 없었기에 외손자인 조프루아 3세와 풀크 4세가 영지를 차례로 물려받았다.
이같은 전설이 나올 정도로 포악하고 호전적이며, 폭력적인 행동과 끝을 보고 마는 성미를 조상 대대로 이어 내려왔고, 1154년 헌팅던의 헨리는
'앙주 혈통이 다혈질이고, 호전적인 통치자 아래 번성했으며, 사람들을 공포로 다스렸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며, 그 힘으로 주변국들을 파괴하고 영토를 복속시켜 온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고 기록했다.이런 평가는 앙주 가문의 후손들도 인정했는지 앙주 가문의 피가 가장 진하다는 조프루아 2세는 누군가 그에게 앙주 가문의 특징을 물으면 이렇게 답했다.
"우리 가족은 형제가 형제를, 아들이 아비를 대적하고, 서로 해코지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도록 태어났다네."
이런 앙주 가문 말고도 그 통치하의 앙주 주민들도 이웃의 노르망디 주민들로부터 교회를 모독하고, 사제 살해와 역겨운 식사예절을 가졌다는 이유로 야만인 취급을 받았다. 풀크 2세처럼 성인에 가까운 평화주의자도 있었지만, 대부분 가계 구성원들은 잔인했고, 풀크 5세처럼 다섯 번이나 결혼하는 엉망인 결혼생활, 방탕, 집안 불화들이 꼬리표로 따라다녔다.
한편으로 당시 중세 유럽의 기준으로는 지적이고 교양있는 영주들도 많았다. 앞서 언급한 풀크 2세의 경우, 그 자신도 대단힌 학식이 있는 인물로 자신의 주군인 프랑스 국왕 루이 4세를 '글도 읽지 못하는 왕관을 쓴 당나귀'라고 대놓고 조롱까지 했으며, 이외에도 미남들이 많은 편으로 큰 키와 다부진 체격, 황금빛 붉은 머리카락이 특징적이었다. 물론 헨리 2세처럼 머리카락 색을 제외하고 전혀 상반된 특징을 가진 가진 인물들도 많았다.
4. 프랑스와의 연관성
앙주 백작 가문은 기본적으로는 프랑스의 귀족 가문으로 시작한 집안이었다. 조프루아 5세 플랜태저넷 때 앙주, 노르망디, 투르, 멘의 영주였다. 헨리 2세 즉위 이후로 결혼 및 정복을 통해 아키텐, 가스코뉴, 푸아티에, 브르타뉴 등을 획득했다. 존왕이 많이 털리긴 했지만 아키텐 서부, 즉 가스코뉴는 헨리 3세가 1259년의 파리 조약으로 회복했고, 이것이 백년전쟁을 일으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프랑스 내 영토 문제와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두고 전쟁이 일어났고, 한때는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시원하게 물리쳤으나 그 뒤 샤를 5세에게 밀리는가 싶었지만 다시 헨리 5세가 이끈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대승으로 파리까지 장악해버리고 프랑스 공주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여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잉글랜드 왕은 물론 프랑스 세자 샤를 7세를 제치고 프랑스 왕까지 한다는 트루아 조약을 맺어 프랑스 왕위 계승과 영토 전역의 장악이 눈 앞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헨리 5세가 갑자기 죽고, 갓난 아기인 헨리 6세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이렇게 불안해진 와중에도 섭정공인 베드포드 공작이 잘 지휘하여 계속 우세하게 이끌었고 마침내 오를레앙을 포위하여 샤를 7세를 몰아붙여 프랑스 정복의 꿈이 현실로 이뤄질 무렵 갑자기 신의 계시를 받아 프랑스를 구하러 왔다는 잔 다르크가 등장, 그녀에게 오를레앙을 비롯한 결정적인 여러 전투에서 치명적으로 패배하고, 원래 점령하고 있었던 대관식이 열리는 랭스까지도 그녀에게 빼앗기며 샤를 7세가 먼저 프랑스 왕에 정식으로 즉위하는 바람에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기 힘들어져버렸다.
결국 동맹을 맺고 있었던 프랑스 내 친잉글랜드 세력인 부르고뉴국 공작 선량공 필리프 3세의 도움 및 프랑스 왕 샤를 7세의 배신 덕분에 잔 다르크를 포로로 손에 넣어 이를 갈면서 그녀를 엉터리 종교재판을 통해 마녀와 이단자라고 억지로 몰아붙여 화형시켰으나 그 짓도 소용없이 부르고뉴 공작과 그 휘하 영주가 안 그래도 우세해진 프랑스 편으로 붙은 데다가(아라스 조약) 오히려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 잉글랜드에 대한 적대 감정이 프랑스 전역에 퍼져나가고, 이후로도 쭉 전세가 밀려 결국 프랑스 내 모든 영토를 잃는 것으로 끝났다.
최절정기에는 피레네 산맥에서부터 아일랜드를 포함해 스코틀랜드와의 국경까지 앙주 제국으로 불리기도 한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또한 플랜테저넷 가문 사람들은 왕실 용어로 프랑스어를 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잉글랜드보다 프랑스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단정짓기도 또 곤란하다. 기본적으로 당시는 현대와 같은 식의 국민국가적 정체성이 있었던 때도 아니었기에 잉글랜드 왕으로서의 정체성과 프랑스의 영주로서의 정체성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최근 학자들이 지적하는 점이지만, 플랜테저넷 왕가의 역대 왕들은 프랑스 땅에서는 일개 공작이며, 프랑스 왕의 봉신일 뿐이었지만, 잉글랜드 왕으로서는 프랑스 왕과 대등한 서열에 섰다. 본인들도 이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고, 국제무대에서 프랑스 왕과 맞먹는 위상을 주는 잉글랜드를 결코 소홀이 여기지 않았다.[8]
일단 문화적 정체성면에서는 리처드 1세의 시기에도 자신들의 근원인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상당히 잔존했으리라 추정되지만 잉글랜드 왕가라는 자각도 확실히 있었고[9] 에드워드 1세 시기로 접어들면 확실하게 잉글리쉬로서의 정체성을 가문 단위로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백년전쟁 당시 플랜테저넷 가문이 집요하게 프랑스 왕위를 원했던 것처럼, 프랑스를 일종의 고토로써 회복하려는 사고방식 또한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5. 계보
헨리 2세 | 청년왕 헨리 | ||||||
리처드 1세 | |||||||
존 왕 | 헨리 3세 | 에드워드 1세 | 에드워드 2세 | 에드워드 3세 | 흑태자 에드워드 | 리처드 2세 | |
곤트의 존 ( 랭커스터 왕조) |
|||||||
에드먼드 ( 요크 왕조) |
6. 기타
- 대체역사소설 《 다아시 경 시리즈》에서는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서 죽지 않고[10] 귀환, 플랜태저넷 왕조가 계속 유지된다는 설정을 통해 플랜태저넷 왕조 치하의 영불제국(Anglo-French Empire)을 그리고 있다. 겁스 무한세계의 센트럼도 비슷한 세계관.
- 엘리스 피터스의 역사추리소설 《 수도사 캐드펠 시리즈》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바로 2.2에 해당하는 스티븐 왕과 마틸다 황후의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이다. 시리즈 마지막 작품에서는 어린 헨리 2세가 잠깐 등장하면서 오랜 전쟁이 끝나고 새 시대가 열릴 것을 예감케 하는 장면이 나온다.
[1]
당시의 별명이 아니라 후대에
셰익스피어가 붙인 별명이라는 말도 있다.
[A]
초대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친손자로
에드워드 4세와
리처드 3세의 아버지. 즉, 이쪽도 플랜태저넷 왕조의 후손.
[3]
이때 재혼한 아들 중 차남인 아모리 1세의 외동 아들이 영화 <
킹덤 오브 헤븐>에 등장했던
보두앵 4세다.
[4]
3남이 살아있었으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작위를 이어 불로뉴 백작이 되었다.
[5]
영문 위키에서는 헨리 2세의 아버지 조프루아 5세가 1144년에 노르망디 공작에 올랐다고 기술되어 있다.
[A]
초대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친손자로
에드워드 4세와
리처드 3세의 아버지. 즉, 이쪽도 플랜태저넷 왕조의 후손.
[7]
보퍼트 가문은 곤트의 존이 정부 캐서린 스윈포드에게서 낳은 아이들로 창시된 가문이다. 이후 곤트의 존이 두번째 아내와 사별한 뒤 캐서린 스윈포드와 정식으로 결혼하면서 보퍼트 가문은 적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8]
예를 들어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
정상회담(...) 같은 거라도 열렸다고 치자, 만일 플랜테저넷 가문이 프랑스의 귀족 가문으로만 남았다면 아무리 잘나도 프랑스 왕 옆에서 꼽사리끼는 역할밖에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잉글랜드 왕까지 먹었다면 분명 프랑스 내에서는 프랑스 왕의 신하지만 이런 무대에서는 프랑스 왕과 대등한 수준에서 설 수 있다. 즉 가문의 격 자체가 올라가게 되는 것.
[9]
당시 프랑스의 왕인 필리프 2세와의 대화기록을 보면 리처드1세는 항상 '나는 잉글랜드 왕국의 왕으로서~' 등의 표현을 자주하는 등 프랑스의 왕과 동등한 일국의 왕의 지위임을 명실히 드러낸다. 물론 프랑스 영토의 영주로서 필리프 2세에게
주군이라는 표현을 하며 존중했었지만 더불어 잉글랜드 국왕으로서의 지위도 확실히 표현했고 서로 국왕으로서 수많은 기싸움을 벌였다. 또한 리처드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포로 수감으로
브리튼 섬을 오랫동안 떠나있을 때 잉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포로생활이 끝나자마자
런던으로 복귀, 왕 즉위식을 다시 거행하는 등 잉글랜드의
존재를 의식했다.
[10]
역사적으로는 리모주 공성전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