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21:11:01

프란츠 베켄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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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콘라트 아데나워 마르틴 루터 카를 마르크스 한스, 죠피 숄 남매 빌리 브란트
6위 7위 8위 9위 10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아돌프 콜핑 루트비히 판 베토벤 헬무트 콜 로베르트 보쉬 다니엘 퀴블뵈크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콘라트 추제 요제프 켄테니히 알베르트 슈바이처 카를하인츠 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헬무트 슈미트 레진 힐데브란트 알리체 슈바르처 토마스 고트샤크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미하엘 슈마허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귄터 야우흐 디터 볼렌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얀 울리히 슈테피 그라프 사무엘 하네만 디트리히 본회퍼 보리스 베커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프란츠 베켄바워 오스카 쉰들러 네나 한스 디트리히 겐셔 하인츠 뤼만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하랄트 슈미트 프리드리히 대왕 임마누엘 칸트 패트릭 린드너 하르트무트 엥겔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힐데가르트 폰 빙엔 하이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마를레네 디트리히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로베르트 코흐 요슈카 피셔 카를 마이 로리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루디 푈러 하인츠 에르하르트 로이 블랙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볼프강 아펠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알렉산더 폰 훔볼트 피터 크라우스 베르너 폰 브라운 디르크 노비츠키 캄피노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프리드리히 실러 리하르트 바그너 카타리나 비트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프리츠 발터 니콜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오토 릴리엔탈 마리온 돈호프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로미 슈나이더 스벤 하나발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빌리 밀로위치 게르하르트 슈뢰더 요제프 보이스 프리드리히 니체 루디 두치크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카를 레만 베아테 우제 트뤼머프라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헬무트 란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알브레히트 뒤러 막스 슈멜링 카를 벤츠 프리드리히 2세 라인하르트 메이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엘저 콘라드 두덴 제임스 라스트 우베 젤러
출처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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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베켄바워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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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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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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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대
파일:FC 바이에른 뮌헨 로고(1979~1996).svg

43대, 대행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볼프강 오베라트
(1970~1972)
프란츠 베켄바워
(1972~1977)
베르티 포크츠
(1977~1978)

FC 바이에른 뮌헨 역대 주장
베르너 올크
(1965~1970)
프란츠 베켄바워
(1970~1977)
제프 마이어
(1977~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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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베켄바워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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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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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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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FIFA 월드컵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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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FIFA 월드컵 브론즈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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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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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1967 · 1968 · 1969 · 1971 · 1972 · 1973 · 1974 · 1975 · 1976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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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66 · 1966-67 · 1967-68 · 1968-69 · 1969-70 · 1970-71 · 1971-72 · 1972-73 · 1973-74 · 1974-75 · 1975-76 · 197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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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일:Ballon d'Or.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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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Ballond'or
수상
바비 찰튼
2위
에우제비우
3위
프란츠 베켄바워
1974 Ballond'or
수상
요한 크루이프
2위
프란츠 베켄바워
3위
카지미에시 데이나
1975 Ballond'or
수상
올레흐 블로힌
2위
프란츠 베켄바워
3위
요한 크루이프

1966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한스 틸코프스키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프란츠 베켄바워
( FC 바이에른 뮌헨)
게르트 뮐러
( FC 바이에른 뮌헨)
1968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게르트 뮐러
( FC 바이에른 뮌헨)
프란츠 베켄바워
( FC 바이에른 뮌헨)
게르트 뮐러
( FC 바이에른 뮌헨)
1974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귄터 네처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프란츠 베켄바워
( FC 바이에른 뮌헨)
제프 마이어
( FC 바이에른 뮌헨)
1976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제프 마이어
( FC 바이에른 뮌헨)
프란츠 베켄바워
( FC 바이에른 뮌헨)
제프 마이어
( FC 바이에른 뮌헨)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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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롱도르 다회 수상자
<rowcolor=#c18e33> ★★★★ ★★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리오넬 메시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rowcolor=#c18e33> ★★★ ★★ ★★ ★★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요한 크루이프 파일:프랑스 국기.svg 미셸 플라티니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마르코 반 바스텐 파일:스페인 국기.svg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rowcolor=#c18e33> ★★ ★★ ★★ ★★
파일:독일 국기.svg 프란츠 베켄바워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케빈 키건 파일:독일 국기.svg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파일:브라질 국기.svg 호나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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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베켄바워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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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C 바이에른 뮌헨 로고.svg
FC Bayern München Hall Of F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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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Libero'
리베로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Der 'Kaiser'
황제

프란츠 베켄바워
Der 'Stratege'
전략가

파울 브라이트너
Der 'Chef'
지배자
슈테판 에펜베르크
Der 'Samba-Stürmer'
삼바 공격수
지오반니 에우베르
Der 'Erste Meister'
첫번째 챔피언

콘라트 하이트캄프
Der 'Macher'
창조자

울리 회네스
Der 'Titan'
거인

올리버 칸
Der 'Zuverlässige'
신뢰

필립 람
Der 'Titelsammler'
타이틀수집가

비셴테 리사라수
Die 'Katze von Anzing'
안칭의 고양이

제프 마이어
Der 'Leitwolf'
늑대사령관
로타어 마테우스
Der 'Bomber der Nation'
폭격기

게르트 뮐러
Der 'Bulle'
황소
프란츠 로트
Der 'Visionär'
공상가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Der 'Kaisers Leibwächter'
황제의 기사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
Der 'Rekordmeister'
기록챔피언

메멧 숄
Der 'Fußballgott'
축구의 신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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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HALL OF FAME DES DEUTSCHEN FUSSBA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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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베켄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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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프리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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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333> 순서 선수 이름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로타어 마테우스 150회 1980.6.14 2000.6.20
2 미로슬라프 클로제 137회 2001.3.24 2014.7.13
3 토마스 뮐러 131회 2010.3.3 2024.7.6
4 루카스 포돌스키 130회 2004.6.6 2017.3.22
5 마누엘 노이어 124회 2009.6.2 2024.7.6
6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121회 2004.6.6 2016.8.31
7 토니 크로스 114회 2010.3.3 2024.7.6
8 필립 람 113회 2004.2.18 2014.7.13
9 위르겐 클린스만 108회 1987.12.12 1998.7.4
10 위르겐 콜러 105회 1986.9.24 1998.7.4
11 페어 메르테사커 104회 2004.10.9 2014.7.13
12 프란츠 베켄바워 103회 1965.9.26 1977.2.23
13 토마스 헤슬러 101회 1988.8.31 2000.6.20
14 울프 키르스텐 100회 1985.5.8 2000.6.20
}}}}}}}}}}}}}}} ||
독일의 前 축구인
파일:카이저 베켄바우어.jpg
이름 프란츠 베켄바워
Franz Beckenbauer
본명 프란츠 안톤 베켄바워
Franz Anton Beckenbauer
출생 1945년 9월 11일
독일 바이에른주 뮌헨시
사망 2024년 1월 7일 (향년 78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신체 181cm / 체중 75kg
직업 축구 선수 ( 수비수[3], 미드필더[4]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축구 행정가 은퇴
주발 오른발 (양발)
소속 <colbgcolor=#eeeeee> 유소년 SC 1906 뮌헨 (1951~1959)
FC 바이에른 뮌헨 (1959~1964)
선수 FC 바이에른 뮌헨 (1964~1977)
뉴욕 코스모스 (1977~1980)
함부르크 SV (1980~1982)
뉴욕 코스모스 (1983)
감독 서독 대표팀 (1984~1990)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0~1991)
FC 바이에른 뮌헨 (1993~1994)
FC 바이에른 뮌헨 (1996 / 감독 대행)
경영 FC 바이에른 뮌헨 (1994~2002 / 회장)
FC 바이에른 뮌헨 (2002~2024 / 명예 회장)
국가대표 103경기 14골 ( 서독 / 1965~1977)
1. 개요2. 생애
2.1. 선수 경력2.2. 지도자 / 행정가 경력2.3. 투병2.4. 사망
3. 플레이 스타일
3.1. 미드필더 시절3.2. 수비수 시절
4. 평가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5.1.2. 개인 수상5.1.3. 출전 기록
5.2. 감독
5.2.1. 대회 기록5.2.2. 개인 수상
5.3. 수훈
6. 베켄바워에 대한 헌사7. 이야깃거리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독일의 전 축구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센터백( 리베로), 중앙 미드필더이다. 특유의 제왕적 리더십[5]에서 기인한 '카이저(Der "Kaiser"/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기존 리베로의 역할을 개편한 독일식 리베로[6]로 뛰면서 리베로와 수비수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또한 발롱도르를 다회 수상한 유일한 수비수 [7]이며, 1966 월드컵 신인상을 비롯해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에 2회, 월드 사커 올해의 팀에 11회 연속, 키커 올해의 팀에 12회 연속 선정되었다.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 등과 함께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4회 우승[8] 유러피언컵 3연패[9], 서독 대표팀 유로 1972 1974 월드컵 우승[10]을 주도하며, 바이에른 뮌헨과 서독 축구의 최전성기를 견인했다.

감독으로도 대성하여 서독 대표팀 1990 월드컵 우승을 이끌면서 선수와 감독으로 월드컵을 모두 제패한 두 번째 축구인이 되었다.[11] 이후 독일축구연맹 부회장, 2006 월드컵 조직위원장, FIFA 집행위원, 바이에른 회장 및 명예회장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선수, 감독은 물론 행정가로서도 성공가도를 달린 인물이다.

2. 생애

2.1. 선수 경력

2.1.1. 클럽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폐허가 된 뮌헨에서 태어나, 1959년 바이에른 뮌헨 유스팀과 계약하고 1964년 1군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 2부 리그에 속해 있던 팀이었는데, 프란츠 베켄바워의 1군 데뷔와 동시에 1부 리그로 승격하는 데 성공한다.[12]

베켄바워의 가세와 동시에 1부 리그에 진입한 바이에른은 본격적인 몸집 불리기에 나선다. 이 때 새로이 가세한 멤버들이 바로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 공격에 게르트 뮐러 - 미드필드와 수비에 프란츠 베켄바워 - 골키퍼에 제프 마이어라는 위대한 라인업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당대 최고의 3인방을 스쿼드에 갖춘 바이에른 뮌헨은 신흥강호를 넘어서 서독과 유럽 축구계를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1966년 바이에른은 DFB-포칼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듬해인 1967년, 프란츠 베켄바워는 거의 평생을 함께할 파트너를 얻는다. 바이에른 유스에서 올라온 강철같은 스토퍼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로 베켄바워는 그와 함께 철벽의 중앙 수비라인을 완성시키고 DFB-포칼 유러피언 컵위너스컵마저 제패한다. 베켄바워는 1968년부터는 바이에른의 주장 완장을 차기 시작했는데, 하늘의 뜻인지 바이에른 뮌헨은 그 해, 역사상 처음으로 마이스터샬레를 들어올린다. 이후 1977년 분데스리가를 떠나기까지, 바이에른에 분데스리가 4회 우승, DFB-포칼 4회 우승, 유러피언컵 3연패,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회 우승, 인터컨티넨탈컵(현재의 FIFA 클럽 월드컵) 1회 우승을 이끌며 수많은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1977년, 20여년을 몸담았던 바이에른을 떠나 '축구 황제' 펠레와 마찬가지로 당시 축구 불모지로 꼽히던 미국에 진출한다. 북미 축구 리그에 진출하고 뉴욕 코스모스에 입단하여 4시즌 동안 3번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프란츠 베켄바워는 1980년 다시 독일로 돌아와 이번엔 함부르크 소속으로 마이스터샬레를 들어올린다. 1983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1년동안 활약하였다. 그 해에 마침내 '카이저'는 영광에 가득했던 커리어의 마침표를 찍는다.

여기까지 읽어봤다면 알겠지만, 자신이 소속되어 있었던 모든 클럽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충격과 공포인데, 여기에서 끝난 게 아니다.

2.1.2. 국가대표 경력

2.1.2.1. 1966 FIFA 월드컵
프란츠 베켄바워의 첫 메이저 국제대회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으로 이 대회에서 베켄바워는 4골을 터트리며 득점 랭킹 3위에 랭크되었다. 특히 소련과의 준결승전에서는 역대 최고의 골키퍼 레프 야신을 상대로 환상적인 왼발 중거리포를 터뜨린 바 있다. 슈팅 타이밍이 워낙 환상적이라 그날 경기 내내 홀로 선방쇼를 펼치던 야신이 몸도 던져보지 못하고 그대로 실점했다. 소련이 후반 막판 추격골을 넣었으나 베켄바워의 이 골이 결승골이 되어 2대 1로 서독이 승리하고 결승에 진출했다. 하지만 결승전에서는 잉글랜드와 연장 접전 끝에 2대 4로 패했다.[13] 결승전에서도 베켄바워는 바비 찰튼의 1:1 마크를 명받아 당시 최고의 미드필더로 꼽히던 찰튼과의 맞대결에서 크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기 후에 베켄바워 본인도 "찰튼이 나보다 아주 조금 나았기 때문에 잉글랜드가 승리를 거뒀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찰튼은 준결승전에서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포르투갈을 상대로 결승골 포함 두 골이나 뽑아냈고, 1966년 발롱도르까지 수상하는 등 당대 최고의 미드필더였다. 21세밖에 안 된 베켄바워가 거의 대등하게까지 버텨냈다는건 커다란 의미가 있다. 찰튼과 베켄바워가 서로를 '지워버렸다'라고 표현될 정도로 막상막하였다. 아무튼 찰튼이 결승전에서 골을 넣지 못했으니, 찰튼을 마크하는 임무 자체는 성공적으로 해낸 셈이다.

유로 1968[14]에서는 서독 국가대표팀이 예선 탈락하며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다.
2.1.2.2. 1970 FIFA 월드컵
1970 멕시코 월드컵 8강전에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독일과 전 대회 우승팀 잉글랜드가 맞붙었고 두 팀은 명승부를 벌였다. 베켄바워는 감독의 명에 따라 4년 전처럼 1:1로 찰튼을 마크했지만, 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던 찰튼은 공격가담과 패스전개로 유명한 베켄바워가 오로지 수비에 전념하게 만들면서 중원싸움을 압도했고 그로 인해 잉글랜드가 2대 0으로 경기를 리드하고 있었다.

이때,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꼽히던 알프 램지는 노장 찰튼의 체력 안배를 위해 찰튼을 콜린 벨과 교체 준비 시킨다. 이게 결국 오판이 됐는데 어수선한 상황에서 베켄바워가 페널티 박스 오른쪽으로 드리블을 치고 들어와 추격골을 성공시키면서 경기를 뒤집는 발판을 마련했다. 연이은 우베 젤러의 환상적인 헤더 골과 연장전 게르트 뮐러의 결승골로 결과는 3대2 독일의 연장 승리였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연장전 22분 베켄바워가 페널티 박스 안에서 잉글랜드의 미드필더 콜린 벨에게 말도 안 되는 반칙성 태클을 걸어 넘어뜨렸는데도 아르헨티나 국적[15]의 주심이 묵인하는 등 논란이 있었고 완벽하게 깨끗한 승리는 아니었다.

준결승에서 독일은 연장전에서만 5골이 터지는 혈투 끝에 이탈리아에게 3대 4로 석패하며 3위에 그쳤으나, 당시 경기에서 베켄바워는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연장전까지 120분을 풀타임 소화하는 실로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16]

그리고 이 대회까지 베켄바워의 포지션은 엄연히 중앙 미드필더였다.
2.1.2.3. 유로 1972
유로 1972 예선 플레이 오프에서 베켄바워의 서독은 드디어 바비 찰튼이 없는 잉글랜드를 만났다. 베켄바워는 헬무트 쇤 감독의 전술에서 리베로 역할을 맡은 전술의 핵심[17]이었고 상대팀 주장 바비 무어와 주장끼리 불꽃 튀는 명승부를 펼쳤다. 잉글랜드는 무어 혼자 미친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당시 서독은 베켄바워 외에도 귄터 네처 게르트 뮐러, 베르티 포크츠, 울리 회네스 등 최고의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고 말 그대로 그 때가 자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였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잉글랜드보다 나은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서독이 경기 막판까지 몰아붙이다가 1:1 상황에서 무어의 태클 실수로 페널티킥을 얻어 득점했고 추가 득점에 성공해 3:1 승리를 거두었다. 2차전에서는 양팀 모두 무득점을 기록하며 종합 3:1의 점수 그대로 서독이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헬무트 쇤 감독은 지금껏 외면하던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를 드디어 대표팀에 등용했고, 눈만 마주쳐도 뜻이 통하는 파트너와 함께한 베켄바워는 처음으로 국가대항전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프란츠 베켄바워와 귄터 네처가 중심이 되었던 이 시기의 서독은 1950년대 초의 헝가리가 돌아온 것 같았고 역대 최강으로 불렸던 펠레의 브라질에 비견된다는 의미로 '람바참바 팀'이라 불렸다.
2.1.2.4. 1974 FIFA 월드컵
그리고 자국에서 개최된 1974 서독 월드컵은 베켄바워에게 있어선 절실한 대회였다. 결승까지 올랐던 첫 번째 대회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오심 릴레이[18] 끝에 패배했고, 두 번째 대회는 준결승에서 쇄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음에도 연장 120분 풀타임을 뛰는 투혼을 발휘했으나 연거푸 벌어진 연장 혈투를 버티지 못하고 패했기 때문이다.
파일:악수를 나누는 베켄바워와 크루이프 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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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이프 vs 베켄바워
이번의 독일은 승승장구하며 결승까지 올라갔고, 이 월드컵의 결승전은 그야말로 결승전답게, 지금도 역대 월드컵 최강 스쿼드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두 팀인 소위 '클래식 네덜란드'와 '클래식 독일'이 제대로 맞붙은 대회였다. 거두절미하고, 프란츠 베켄바워는 결승전에서 요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드디어 월드컵을 들어올리는 데 성공한다. 유로 1972 1974 서독 월드컵 우승으로 서독(독일)은 월드컵과 대륙간 대회를 나란히 제패한 최초의 국가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이말인 즉, 국가대항전에서도 얻을 수 있는 트로피는 다 얻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유로 1972, 1974 서독 월드컵에서 베켄바워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수비수가 보일 수 있는 국제 메이저 대회 역대 최고의 퍼포먼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9]
2.1.2.5. 유로 1976과 그 이후
이후 유로 1976에서도 결승까지 올라가며 스페인 이전에 먼저 메이저 대회 3연패를 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승부차기에서 안토닌 파넨카에게 그 유명한 파넨카를 얻어 맞고 패배하며 기록 달성에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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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차기 패배 직후 좌절하는 베켄바워

이후 1976년 웨일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마지막 국가대표 득점을 올렸고, 1977년 2월 23일 프랑스와 친선 경기를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참고로 베켄바워가 서독 유니폼을 입고 남긴 기록은 103경기 14골 10도움, 월드컵 1회 우승, 1회 준우승 유로 1회 우승, 1회 준우승이다. 당시 최다 출장자였으며 서독 대표팀 최초의 센추리 클럽 가입자였다. 이후 90년대부터는 여러 선수가 기록을 갱신해서 현재는 12위까지 밀려 있다. 다만 과거 선수 대다수가 경기가 적어 100경기를 못 뛴 걸 감안하면 베켄바워는 그만큼 대단한 선수로 볼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20]

2.2. 지도자 / 행정가 경력

1983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유프 데어발의 후임으로 서독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임명되었다. 수석코치가 후임 감독이 되는 전례를 깨고 최초로 감독에 임명된 사례였다. 단지 그정도가 아니라 베켄바워는 지도자로서 경력이 전무한 상태였다. 전임자였던 데어발 감독은 유로 1980 우승, 1982 스페인 월드컵 준우승 등 분명한 결과물을 일궈내 왔으나 월드컵 우승이 목표였던 서독축구협회는 데어발로는 부족함을 느낀 듯 하다. 사실 데어발은 그 이전 감독들인 제프 헤르베르거 헬무트 쇤처럼 선수 시절부터 대표팀을 휘어잡아왔던 카리스마형 지도자는 아니었다. 데어발은 나름 인화력이 있어서 선수단을 잘 이끌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은 1982 월드컵 1차 조별 리그 첫 경기 알제리전에서 어딘지 모르게 나사 빠진 모습을 보인다거나 2차 조별 리그로 진출하기 위해 승부조작성 플레이를 한다거나 결승 이탈리아전에서 참패하는 등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데어발 감독은 1982 월드컵 직후 과감한 세대 교체에 돌입하여 유로 1984 본선에 임했으나 결과는 조별 리그 탈락이었다. 이에 축구협회는 2% 부족해 보이는 데어발을 경질하고 베켄바워를 신임 감독으로 앉힌 것. 베켄바워는 지도자 경력이 없었지만 예전의 쇤, 헤르베르거 감독처럼 독일 축구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레전드였기 때문에 선수단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베켄바워는 지도자 라이선스 없이 감독이 되었기 때문에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호칭인 Bundestrainer(분데스트레이너, 연방감독)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못하고, Teamchef(팀셰프, 팀 지도자)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유로 1984 직후 감독을 맡은 베켄바워는 데어발 때 시작된 세대 교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자신의 첫 메이저 대회인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한다. 사실 1986 월드컵 때 서독은 세대 교체 직후였기에 주장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를 제외하면 젊은 스쿼드로 구성되어 있었고, 명목상 우승 후보로 꼽히긴 했었지만,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플라티니의 프랑스,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 지쿠의 브라질 만큼 주목받는 팀은 아니었다. 베켄바워가 이끄는 젊은 서독은 데어발 시절의 대표팀보다 이름 값도 떨어졌고, 대회 초반에는 다소 자신감이 없어 보였으나 토너먼트가 진행되면서 조직력이 탄탄해지고 체력적으로도 뛰어난 모습을 보이며 결승까지 진출했다. 결국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에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이 스쿼드를 기반으로 다음 대회에서 다시 한 번 우승을 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이어 유로 1988 4강에서는 오렌지 삼총사가 활약하던 네덜란드에 패했지만,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마침내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이로써 베켄바워는 선수와 감독으로 월드컵을 모두 제패한 두 번째 축구인으로 그 이름을 올렸다.[21] 사실 1986년이나 1990년이나 독일 국대 스쿼드가 결코 압도적이라는 평은 듣지 못한 때라는 걸 감안하면 베켄바워의 통솔력이 얼마나, 어떻게 작용했는지 감히 짐작할 수 있다.[22] 1990년에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감독으로 부임해 디비지옹 1 우승을 이끈다.

그리고 1994년. 카이저는 자신의 고향인 뮌헨으로 돌아와 바이에른 뮌헨 회장직에 취임한다. 그러더니 바이에른 뮌헨 감독을 맡기도 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감독 재직 중에 커리어에 분데스리가 우승과 UEFA컵 우승을 추가시켰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트로피가 이 사람을 부르는 것인가, 이 사람이 트로피를 부르는 것인가 궁금해진다. 다만 1995-96 시즌 UEFA컵 우승의 경우, 해당 시즌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이었던 오토 레하겔이 팀과 선수들과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팀을 결승까지 올려놓고 사퇴했기 때문에 베켄바워는 임시감독으로 결승전 단 2경기만 지휘하고 UEFA컵 우승감독에 이름을 올린 케이스라서 베켄바워의 업적으로 쳐주기는 어렵다. 물론 어찌됐던 가장 중요한 결승전을 결국 이긴 건 베켄바워이긴 하지만.

1998년에는 독일축구연맹 부회장을 역임하고,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대회 조직위원장 직을 맡아 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즉 선수, 감독, 행정가 등 가는 곳마다 성공대로를 달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이야 그 인식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긴 하지만, 스타 플레이어 출신 감독은 성공하기 어렵다라는 말은 거의 불문율 수준으로 작용하던 때이고, 심지어 스타 플레이어 출신 행정가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 생각되던 때였다. 그런데 이 양반은 이 두 가지를 죄다 해냈다. 영웅신화라고까지 칭하면 다소 비약적인 찬사겠지만, 그야말로 은퇴 전후를 통틀어 축구판의 황제라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더 쉽게 비교해보자면, 축구 황제 펠레 역시 현재 세계 축구계에 나름대로 영향을 끼치고 있으나 펠레는 따지고 보면 명예직에 앉아 있을 뿐이지만, 베켄바워는 스스로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와 경력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23] 오죽했으면 前 FIFA 회장 제프 블래터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시절 블래터와 맞장을 뜰 수 있는 유일한 축구인이라는 말까지 들을정도다. 1인자인 블래터가 1인자라 이거저거 해먹는 탓인지 여기저기 적이 많지만, 그와 대비되게 베켄바워는 축구실력과 국력 양면에서 뛰어난 독일을 등에 업고 유연한 대응을 바탕으로 적을 만들지 않고 실익을 잘 챙겨간다.

2.3. 투병

2010년대 후반부터 건강 상태가 매우 안 좋았다고 한다. 의료진의 말에 따르면 2019년 4월부터 건강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으며 판단력과 기억력이 매우 안 좋아졌고 개선될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베켄바워는 두 번의 심장 수술과 골반 인공 관절 수술을 받았으며 자신의 골프 대회에서 한쪽 눈이 실명 상태임을 밝히기도 했다. #

2.4. 사망

현지 시각 2024년 1월 7일 일요일, 가족들 곁에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이로써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들로 불렸던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프란츠 베켄바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모두 역사의 뒷편으로 퇴장하게 되었다.

베켄바워 사후 바이에른 뮌헨의 첫 홈경기인 분데스리가 호펜하임전은 구단의 지휘 하에 베켄바워 헌정 경기로 치러졌다. 선수단 전원이 베켄바워의 등번호 5번이 새겨진 트레이닝복을 입고 워밍업을 했고, 경기에서는 "Danke Franz"라고 쓰인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또한 베켄바워가 직접 부르고 녹음한 노래 'Gute Freunde'가[24] 선수 입장할 때, 뮌헨이 득점할 때, 그리고 경기 종료 후에 틀어졌다. 당연히 경기 전 묵념도 했고 양 팀 선수들이 모두 검은 완장을 차고 뛰었다. 경기는 뮌헨의 3대0 승리로 끝나며 베켄바워의 영전에 승리를 바칠 수 있게 되었다.[25]

사후 자국에서 개최된 유로 2024에서 유족으로 아내인 하이디 베켄바워는 독일 축구의 레전드인 위르겐 클린스만과 베르나르 디에츠와 함께 개막전에 하늘로 떠난 남편에 행운을 기원한 키스를 보냈다. 그리고 그의 기운이 깃들었는지 독일은 이 대회에서 8강에 오르며 실로 오랜만에 호성적을 거두었다.

3. 플레이 스타일

3.1. 미드필더 시절

미드필더 시절의 베켄바워에게서 가장 돋보였던 능력은 바로 볼 컨트롤 능력이다. 민첩했으며, 그런 가벼운 몸놀림으로 상대 선수를 따돌리고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에 능했다. 기술적인 역량이 매우 뛰어났기에 공을 빼앗기는 일이 드물었다.

뛰어난 볼 컨트롤과 스피드를 결합시켜 독특하면서도 저돌적인 드리블을 자주 시도했다. 기본적으로 다른 미드필더보다 처진 위치에 배치되었지만, 전방에 공간이 생기면 그 즉시 공을 몰고 상대 선수 여러 명을 제치며 순식간에 페널티 박스 부근까지 도달하곤 했다. 섬세한 개인 기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했고, 스피드 자체가 매우 빨랐기 때문에 상대팀에게 있어서 베켄바워의 드리블을 끊어내는 일이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대표적으로 1970년 월드컵 4강전 서독 vs 이탈리아 경기를 보면, 축지법을 쓰듯 순식간에 페널티 박스 부근로 이동하며 몇 번 씩이나 수비진을 모조리 뚫어내는 베켄바워를 볼 수 있다.

수비력도 뛰어났다. 온 몸을 사용한 적극적인 인터셉트가 특기였다. 인터셉트 뿐만 아니라 대인수비 부분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빈 틈 없고 침착한 대인마킹에 이은 저돌적인 태클로 상대의 공격 진행을 이른 타이밍에 끊어버리곤 했다.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듯 훌륭한 기량을 갖추었기에 수비적인 측면에서 눈에 띄는 약점이 없었다.

월드클래스의 미드필더였던 만큼 패스는 당연히 잘했다. 특히, 중앙에서 공을 가지고 배회하며 타이밍을 기다리다가 타이밍을 정확하게 포착한 뒤 슬쩍 띄워서 공격진으로 보내 주는 로빙 패스가 일품이었다. 주로 쓰는 발인 오른발로는 아웃프런트 킥 같은 기술도 자유자재로 구사하곤 했다. 베켄바워는 느긋느긋하게 공격을 전개하고 싶을 때, 아웃프런트 킥을 사용하여 측면의 선수에게 천천히 넘겨 주는 식으로 팀의 공격 속도를 조절했다. 오른발처럼 기술적으로 공을 다루지는 못했지만, 왼발 패스 능력 역시 상당히 좋았다.

미드필더 시절에는 득점력도 매우 출중했다. 대포알 같은 중거리 슈팅을 뽐냈으며, 왼발, 오른발, 머리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득점 패턴을 가져가며 꾸준히 골을 집어넣었다. 대표적으로 1966년 월드컵에서 우베 젤러를 제치고 팀 내 최다 득점자에 오르며 대회 최다 득점 공동 3위에도 오르는 등 상당한 득점력을 과시했다.

즉, 미드필더 시기의 베켄바워는 필드 플레이어로서의 모든 플레이에 능했던 유틸리티 플레이어이다.

3.2. 수비수 시절

베켄바워는 매우 공격 지향적인 스타일의 레프트백 자친토 파케티를 보고 "센터백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는 없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때마침 유로 1972가 열렸고, 베켄바워는 이 대회에서 스위퍼 역할을 맡은 것를 기점으로 스위퍼 포지션에 완전히 정착했다. 좀 더 낮은 위치에 기용된 베켄바워는 더 적은 압박 속에서 자유로운 움직임을 가져갈 수 있게 되었다. 헬무트 쇤 감독으로부터 '프리롤 스위퍼'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베켄바워는 파케티를 보고 떠올렸던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베켄바워는 미드필더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간결한 볼 컨트롤 능력을 사용하여 공간을 확보한 뒤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 스위퍼의 기본 소양인 '패스'에 있어서 매우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짧은 패스와 긴 패스를 가리지 않고 훌륭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베켄바워는 이른바 '찍어차기'의 달인이었다. 공을 찍어 차며 원하는 방향으로 띄워 보내는 기술이 정말 뛰어났다. 또한 자유자재로 공을 감아 찰 수 있었기에, 엄청난 궤적을 그리며 휘어 날아가는 롱패스를 자주 구사했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 기존의 수비수들과 차별화되는 공격전개를 보여줄 수 있었다. 베켄바워는 단지 패스를 잘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공을 몰고 나가 공격형 미드필더처럼 플레이하며 공격 전개를 진두지휘했다. 공격적인 위력이 뛰어났으며 센터백이 공격을 할 수 있는 영역을 극단적으로 넓혔기 때문에 잘하는 선수가 리베로의 역할을 맡게 되면 어느 정도까지 위력적일 수 있는지를 전세계인이 느끼게 만들었고, 베켄바워의 '독일식 리베로' 플레이는 훗날 로타어 마테우스, 마티아스 잠머,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등 다양한 선수가 물려받았으며 이들은 그 역할을 훌룡히 수행하였다. 이들 모두 뛰어난 성과를 이루었기에 당시 베켄바워의 천재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된다.

공격에 가담했을 때에는 미드필더 시절과 별 차이 없을 정도로 위력적인 드리블을 보여주었다. 상대 진영의 깊은 곳까지 뛰어들어가 공을 받았고, 지체 없이 다음 플레이로 연결했다. 때로는 날렵한 드리블을 통해 좋은 위치에서 파울을 얻어내거나 아예 골을 넣어버리기도 했다. 미드필더로 활약하던 시기에 비하면 득점력이 확실히 줄긴 했다. 그러나 수비수 시절에도 당대 수비수 중에서는 최고 수준의 득점력을 가진 선수였다. 또한 그는 힘도 강하고 주력이 매우 빠른 선수였는데 당대 최고 수준의 주력을 가지고 있었던 바비 찰튼을 월드컵 경기에서 완전히 틀어막는 모습을 보였고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공격수 들을 상대할때도 타고난 주력으로 뒤쫒아 마크를 하고 몸싸움으로 부딪혀 뺏거나 특유의 날카로운 태클을 통해 저지하였다.

당대 최고의 축구지능을 가졌던 요한 크루이프의 라이벌이었던 만큼 크루이프 못지 않게 축구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뛰어난 위치선정 능력을 가졌고 동료들과의 연계 및 스위칭 플레이가 완벽했다. 특히 어떤 포지션에서든 자유자재로 뛸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였다는 것이 그의 탁월한 축구지능에 대한 논증이 되며 어느 포지션에서 뛰던 그는 월드클래스의 기량을 선보였고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양발과 화려한 개인기를 활용해 상대편 수비수와 골키퍼를 농락했다. 마치 지단, 베르캄프처럼 유려한 볼 키핑과 볼 컨트롤로 어느 위치에서든 자신의 의도대로 상대 수비수를 유린했으며 특출난 중거리슛으로 여러차례 원더골을 만들어냈다.
베켄바워의 프리킥
프리킥마저 잘 찼다. 매우 영리하게 킥을 처리했는데, 아웃프런트 킥과 인프런트 킥을 선택적으로 구사하며 골키퍼의 타이밍을 빼앗곤 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1973-74 시즌 뒤스부르크와의 리그 경기에서 나온 프리킥. 오른발 아웃프런트로 찍어 찼다.
베켄바워의 수비력
당연하게도, 베켄바워의 능력은 공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당대 최고 수준의 수비력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드필더에서 수비수로 정착한 후 그의 뛰어난 관록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비에 관련하여 베켄바워가 가진 최고의 능력은 상대의 플레이를 읽어내고 공을 가로채는 능력이다. 베켄바워의 인터셉트 능력은 이 능력을 통해 60년대 최고의 수비수라는 타이틀을 얻은 잉글랜드의 바비 무어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허나, 일부에서는 베켄바워를 언급할때 수비적인 부분보다는 공격적인 부분만을 과도하게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수비적인 부분또한 완벽한 선수였고 모든 경기에서 밸런스 있게 오버래핑을 사용하였다. 결코 무리해서 공격을 하는 도박적인 플레이어가 아니었으며 반드시 필요한 상황에서만 오버래핑을 하였고 확실하게 들어갈 각이 보이지 않으면 최대한 안정적인 플레이만을 고집했다. 이는 네덜란드 vs 서독의 1974년 월드컵 결승전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베켄바워는 탁월한 운동능력 덕분에 클리어링도 뛰어났다. 베켄바워의 클리어링은 정말 아크로바틱했다. 또한 슬라이딩 태클이 매우 날카롭고 예리 했다 베켄바워의 반응속도와 순발력은 정상급이었기에 상대방이 미처 반응 하기도 전에 태클로 공을 끊어냈으며 힘도 좋아서 몸싸움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점프력이 좋았으므로 헤더 클리어링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다리도 유연했기 때문에 어떤 자세에서든 상대의 흐름을 끊어낼 수 있었다. 공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인정사정없이 걷어냈다. 공을 걷어내는 데에 바이시클 킥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선수 초반 미드필더로 뛰던 시절 베켄바워의 수비 방식은 과격했으며 꽤나 거칠고, 투박했다. 그러나 수비수로 포지션을 바꾼 후 수비 스타일이 완전히 발전하여 매우 섬세한 수비력을 갖추게 되었다. 베켄바워는 타고난 축구지능과 수비지능을 통해 공수 양면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고 특유의 활동량으로 경기장 전체를 누비며 지배했다. 공격수와 1대1 대치상황에서 적극적인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했고 그의 태클은 매우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파울을 범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뛰어난 점프력과 헤더 능력으로 압도적인 공중볼 경합능력을 보였으며 속도가 매우 빨랐기에 발빠른 공격수들도 베켄바워를 쉽게 뜷지 못했으며 껌딱지처럼 달라붙는 대인수비로 공격수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진공 청소기가 따로 없었고 펠레, 크루이프, 찰튼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틀어막았다.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주장직을 수행하며 어마어마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베켄바워가 카이저(Der Kaiser), 즉 황제란 별명을 얻게 된 것은 그가 뿜어내는 특유의 사령관적인 기질 덕분이었다. 경기를 완벽히 통제했고 아주 침착했다.

4. 평가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
"Der Starke gewinnt nicht, derjenige der gewinnt ist stark."
1974 서독 월드컵 결승전에서 네덜란드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후.[26]
시대를 아울러 각종 매체에서 내놓은 올타임 랭킹 자료에 따르면, 요한 크루이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지네딘 지단 등과 주로 비교되며, # # 독일 선수나 수비수 포지션 중에서 그와 비교될 만한 선수는 없다.[27]] 수비수 포지션에서 절대적인 위상을 갖고 있으며, 이견의 여지가 없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로 꼽히며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TOP 10에 고정적으로 포함되는 선수다.[28] 수비수에 있어선 커리어를 능가하는건 차치하고 비슷하게나마 갖춘 동포지션의 선수조차 찾을 수 없다.[29]

상기와 같은 근거와 후술될 개인 및 팀 커리어를 종합하여 일반적으로 독보적인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임과 동시에 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여겨진다.[30]

또한, 그의 전성기인 1966~1976년까지 발롱도르 순위에서는 11년간 10번이나 5위 안에 들어가기도 했다.
1966년 3위
1967년 4위
1968년 4위
1969년 7위
1970년 4위
1971년 5위
1972년 1위
1973년 4위
1974년 2위
1975년 2위
1976년 1위

보통 임팩트가 드러나기 쉬운 스트라이커나 미드필더가 수상과 포디움을 독식하기 마련인 발롱도르라는것을 감안해볼때 전성기를 수비수로 플레이한 베켄바워의 이 순위는 경이적이라 할 수 있다.[31]

독일에서 축구 선수들의 랭킹을 정하는 키커 랑리스테에서 WK(월드클래스)[32]를 무려 27회, 현재 기준으로는 21회[33]나 받았는데 이는 모든 독일 선수와 분데스리가를 거쳐간 선수들 중 가장 많은 횟수다.[34] 1965-66 시즌 후반기에 처음 WK를 받은 이후로 바이언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1976-77 시즌까지 열 한 시즌 연속으로 받았다. 독일 최초의 트레블을 달성하고 리그 역대 최소실점 2위를 기록한(34경기 18실점. 그 당시엔 1위였으나 2015-16 시즌에 17실점으로 우승하면서 밀려났다.) 2012-13 시즌 트레블을 달성한 바이언의 주전 센터백인 보아텡과 단테도 한 단계 아래인 IK(인터내셔널 클래스)를 받았던 걸 생각하면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알 수 있다. 또한 분데스리가 베스트 11인 키커 올해의 팀에 12년 연속 선정되기도 하였다.

선수와 감독으로 그가 들어올린 메이저 트로피들만 정리해도 다음과 같다.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우승은 다 해봤다라는 말을 현실화시킨 축구인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팀의 주장이자 에이스로 말이다.[35]

이밖에도 선수로 월드컵 준우승 (66), 3위 (70) / 유로 준우승 (76), 감독으로 월드컵 준우승 (86) 등도 달성하여 선수-감독 불문 커리어 전체가 단순히 화려하단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완벽하다.[37]

대다수 매체에서 역대 베스트 11을 선정할 때 중앙 수비수 한 자리는 예외없이 프란츠 베켄바워로 고정이다. 반면 그의 중앙 수비 파트너를 누구로 둘 지에 대해서는 정말로 피 터지게 치열하다.[38] 애초에 수비수를 떠나 선수로서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1970년대 축구계를 양분했고, 그의 위상은 크루이프, 호날두, 디 스테파노, 지단과 동격으로 쳐지니 선수로서도 역대 최고급 반열이고 수비수 중에서는 비교대상이 아예 없는 수준이다.

선수 시절의 경이로운 위상과 커리어는 물론 감독과 축구행정가로도 이렇게 실패없이 성공가도만을 달린 축구인은 축구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39] 그야말로 선수, 감독, 행정가를 아울러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끼쳤던 세계 축구사의 전설이자 황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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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와 수비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70년대 최고의 선수 2위, 1960년대 수비수들 중 1위에 이름을 올렸다.

4.1. vs 요한 크루이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요한 크루이프 vs 프란츠 베켄바워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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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에 대활약한 또다른 레전드 요한 크루이프와의 라이벌리로도 매우 유명하다. 축구사에선 펠레 vs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 vs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라이벌리 중 하나며 종목을 통틀어서도 NBA 매직 존슨 vs 래리 버드와 함께 라이벌리를 논할 때 거의 무조건 언급된다. 똑같은 유러피언컵 3연패, 1974 서독 월드컵 결승전의 맞대결, 축구 전술사 혁명의 핵심롤(토탈 풋볼 vs 리베로), 은퇴 후 감독으로도 성공했다는 점등 여러가지 공통점들이 있어 더욱 조명받는다. 크루이프 사망시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리스펙트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준희 해설위원과 장지현 해설위원도 원투펀치에서 이 주제를 다루었는데, 둘 다 역대 축구를 크게 한번 바꾸고, 토탈 풋볼의 상징이 된 크루이프를 더 위로 랭크하였다. 다만, 베켄바워가 얻어온 엄청난 수의 우승 트로피들과 뛰어난 활약, 리베로로서 아직까지도 수많은 수비수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도 언급하였으나 수비수라는 포지션이 랭크놀이에서 불리하다는 점도 들었다. 참고로, 해당 매체에서 이전에 역대 유틸리티 플레이어 순위에서는 루드 굴리트에 이어 베켄바워가 2위에 선정될 정도로 베켄바워는 다재다능한 선수이기도 했다.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1.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72, 1976; 2위: 1974, 1975
  • 발롱도르 드림팀: 2020
  • FIFA 월드컵 브론즈슈: 1966
  • FIFA 월드컵 신인상: 1966
  • FIFA 월드컵 올타임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72, 1976
  • UEFA 유로 올타임 XI: 2016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6, 1967, 1968, 1969,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 월드 사커 올타임 XI: 2013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1966, 1968, 1974, 1976
  • 독일 세기의 축구 선수: 2000
  • 독일 올해의 축구인: 1990, 2006
  • 키커 올해의 리베로: 1973-74, 1975-76, 1980-81
  • 키커 올해의 팀: 1965-66, 1966-67, 1967-68, 1968-69, 1969-70, 1970-71, 1971-72, 1972-73, 1973-74, 1974-75, 1975-76, 1976-77
  • NASL MVP: 1977
  • 레기오날리가[40] 올해의 선수: 1965
  • FIFA 100: 2004
  • FIFA 공로훈장: 1984, 2004
  • FIFA 회장상: 2012
  • UEFA 회장상: 2012
  • 라우레우스 평생공로상: 2007
  • FIFA XI: 1968
  • 20세기 월드팀: 1998
  • 20세기 유럽팀: 1998
  • 옹즈 드 옹즈: 1976
  • 마르카 레전드: 2012
  • 아스 올타임 XI: 2021[41]
  • 바이에른 뮌헨 올타임 XI: 2005[42], 2017[43]
  • 바이에른 스포츠상: 2005
  • CONMEBOL 리본상 공로훈장: 2006
  • 한스 로젠탈 명예상: 2010
  • 골든풋: 2010
  • 월드 스포츠 1950~1970년 월드 베스트 XI: 1970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최고의 유럽 선수 (1956~1990)
  • IFFHS 올타임 월드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유럽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독일 드림팀: 2021
  • 독일 스포츠 명예의 전당: 2006
  • 독일 축구 명예의 전당: 2018
  •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
  • 발터 벤제만 독일 축구문화상 특별상: 2006
  • 독일 축구 대사 평생공로상 명예상: 2022

5.1.3.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63/64 FC 바이에른 뮌헨 레기오날리가 6 2 - - - -
1964/65 FC 바이에른 뮌헨 레기오날리가 31 17 - - - -
1965/66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3 4 6 1 - -
1966/67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3 0 5 0 9 0
1967/68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8 4 4 0 7 1
1968/69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3 2 6 0 - -
1969/70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4 6 1 0 2 0
1970/71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3 3 9 1 8 1
1971/72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4 6 6 1 7 1
1972/73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4 6 6 0 6 1
1973/74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4 5 4 0 10 1
1974/75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3 1 3 0 7 1
1975/76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4 5 7 2 9 0
1976/77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3 3 4 0 - -
1977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15 4 0 0 - -
1978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27 8 0 0 - -
1979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12 1 0 0 - -
1980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26 4 0 0 - -
1980/81 함부르크 SV 분데스리가 18 0 1 0 0 0
1981/82 함부르크 SV 분데스리가 10 0 3 0 5 0
1983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25 2 0 0 - -

5.2. 감독

5.2.1. 대회 기록

5.2.2. 개인 수상

5.3. 수훈

  • 독일 공로훈장 공로십자장: 1976
  • 독일 공로훈장 제1급 공로십자장: 1986
  • 독일 공로훈장 대공로십자장: 2006
  • 바이에른 공로장: 1982
  • 바이에른 사회공로메달: 2011
  • 바이에른 헌법 금메달: 2012
  • 니더작센 공로장 1등급: 2008
  •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공로장: 2009
  • 은월계수잎 훈장: 1966, 1967

6. 베켄바워에 대한 헌사

프란츠 베켄바워는 내가 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다. 출처
펠레
프란츠는 훌륭한 볼 배급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훌륭한 태클러였고, 상황을 통제할 줄 알았으며 결코 긴장하는 법이 없었다. 정말 상대하기 힘든 선수였다. 출처
그가 가졌던 최고의 능력은 환상적인 시야였다. 출처
1966년을 다시 떠올려 보면, 프란츠와 나는 하루 종일 서로를 바라보았고, 둘 다 긍정적인 의미로 경기에 기여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지 확인하느라 바빠서 사이좋게 경기장에서 지워졌다. 출처
그는 훌륭한 선수였고, 매우 긍정적이었으며, 매우 빨랐고 항상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1966년과 1970년에 그를 막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서독이 가진 선수 중 가장 위협적인 선수였다. 그는 그의 스피드와 컨트롤, 재능을 살려 놀라운 플레이를 보여주었고, 나 같은 마킹맨이 항상 붙어 있어야 그 훌륭한 능력을 조금이라도 제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출처
바비 찰튼
그는 수비수와 미드필더를 모두 소화할 수 있었다. 그는 다재다능하고 융통성이 있었으며, 경기의 흐름을 잘 읽었고, 플레이하는 방법을 아는 선수였으며, 또 전진하여 골을 넣기도 했다. 출처
에우제비우
누구도 프란츠를 넘어설 수 없었다. 출처
게르트 뮐러
나는 어느 날 식당에서 그를 봤는데, 그는 그런 곳에서도 그가 축구할 때 보여주는 권위와 클래스를 보여주었다. 출처
브라이언 클러프
매우 우아하며, 공을 잘 다루고 경기를 잘 읽는 선수였다. 그는 미드필더와 수비수를 모두 소화할 수 있었는데, 내 생각에 그에게 걸맞은 위치는 '리베로'였던 것 같다. 공을 앞쪽으로 가지고 나와서 수비진과 중원을 연결하는 것 말이다. 그는 훌륭한 리더이기도 했으며, 라커룸에서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출처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당신은 그가 완벽한 선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출처
나는 누군가가 그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축구장 안에서도, 축구장 밖에서도. 출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클래스 그 자체. 침착하고 속도감이 있었으며, 중원으로 쉽게 이동하여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동료들이 가진 모든 장점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 그가 발의 안쪽과 바깥쪽을 모두 활용하여 패스하는 것을 보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 위대한 선수의 특징은 서로 다른 두 시대에서도 효과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베켄바워는 그런 선수였다. 출처
글렌 호들
그는 남자다운 리더였고, 우아함과 기술로 중무장한 채 지배적인 존재감을 뽐냈던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이건 꼭 말해야겠네요. 그는 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8살 때, 나는 서독과 네덜란드간에 있었던 1974년 월드컵의 결승전을 보았어요. 나는 네덜란드를 응원했죠. 네덜란드가 패배하고 나서 나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어요. 그때는 아주 슬펐지만, 지금은 Der Kaiser의 총명함을 인정해요. 출처
에릭 칸토나
그는 축구계의 진정한 신사였고, 경기를 읽는 능력이 뛰어나고 기술적이기에 필드 어디에서나 뛸 수 있는 선수였다. 그는 클래스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선수였고, 오랜 시간 동안 정점에 군림했다. 멋지다. 출처
에마뉘엘 프티
내가 본 영상에서 베켄바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공격에 가담했고, 골을 넣었으며, 팀을 지휘했다. 대박이다. 출처
제라르 피케
전설적인 프란츠 베켄바워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한다. 그가 축구계에 미친 영향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영면하시길 카이저. 출처
알리 다에이
내가 어릴 때는 베켄바워의 시대였다. 내게 베푼 마음 한 조각 한 조각이 따뜻해 베켄바워의 생일 9월에 축하 샴페인과 꽃, 카드를 보낸다. 출처
차범근

7. 이야깃거리

2020년 프랑스 풋볼 주관 발롱도르 드림팀에서 하나뿐인 센터백 득표율 1위를 기록하며 2013년의 월드 사커 올타임 XI에 이어 또다시 이름을 올렸다. 베켄바워는 1970년 월드 스포츠, 1981년 플라카르의 베스트팀 등 현역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관과 매체에서 선정한 올타임 베스트팀에서 중앙 수비수 한 자리에 매번 무혈입성하고 있다. 은퇴한 지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 위상이 굳건하다.

1966년 당시 유럽 최정상이던 인테르로 이적이 거의 확정상태였지만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이 북한 대표팀에게 패배하자 이탈리아 축구협회에서 외국인 선수 영입 금지 조항을 만들면서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 실제로 이적이 성사되었다면 바이에른 뮌헨의 찬란한 영광은 없었을지도.

1974년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에 흑인 최초로 발탁된 에르빈 코스테데의 은인같은 존재다. 코스테데의 두 번째 국대 경기였던 잉글랜드 친선전 원정길에서 감독 헬무트 쇤은 첫 번째 경기에 실망해 그를 기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베켄바워가 쇤에게 그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설득하여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코스테데는 이후 인터뷰에서 인종차별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다가 헬무트 쇤의 불만을 사 국가대표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차범근과는 굉장히 두터운 사이다. 베켄바워가 말년 함부르크에서 뛰던 시절 차범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한창 전성기를 보냈는데 같은 리그에서 플레이를 하며 서로 간에 친분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 정도냐 하면 차두리 2010 남아공 월드컵 이후 셀틱 FC로 이적하려 했을 때 차두리의 워크퍼밋 조건이 충족이 안 되자 베켄바워가 직접 추천서를 적어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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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차범근 SBS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2009-10 챔스 결승전을 앞두고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팬들에게 챔스보다 더 빛나는 주장 하비에르 사네티가 있는데 챔스 없다고 슬퍼하지 말라는 칭찬[45]을 하였고, 결과는 인테르의 승리. 빛나는 주장과 빅이어를 동시에 갖고 있는 위대한 클럽 인테르[46]

2014년을 휩쓴 아이스 버킷 챌린지에 수많은 축구인들이 지목했으나, 베켄바워는 정중히 거절하고 5000유로를 기부했다. 그 이유는 전후 폐허가 된 뮌헨에서 태어났기에 갓난아기 때부터 항상 차가운 물로 씻어야만 했고, 그것이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 찬물을 견딜 수 없다고. 기부 후에 펠레 믹 재거, 그리고 귄터 네처를 지목했다. #

무결의 커리어와 달리 사생활은 전혀 깨끗하지 못했다. 1966년 첫 결혼을 해서 두 아이를 얻었지만, 나이가 많이 차이 나는 보험대리인과 혼외정사를 벌여 셋째 아이를 얻은 것 때문에 첫번째 부인과 별거를 거쳐서 1990년에 이혼을 하고 만다. 1980년대 별거 기간 동안에는 다른 여자와 동거를 했다가 1990년 독일축구협회 여직원과 2번째 결혼을 했다. 이후 아이 없이 결혼생활을 지내다가 개인 비서와의 불륜으로 두 아이를 얻은 것이 빌미가 되어 두번째 부인과도 별거를 거쳐 2004년 이혼을 하게 된다. 개인 비서와 세번째 결혼을 올린 직후 현재까지는 별 다른 탈없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라이벌이었던 요한 크루이프가 1968년, 아내 대니 코스터를 만나서 201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별 트러블 없이 부부생활을 잘 유지한 거랑은 크게 대비가 된다.[47]

2022 카타르 월드컵 개최지 선정 의혹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90일 정지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그는 2022년 월드컵 개최지 투표가 실시된 2010년 무함마드 빈 함맘 전 카타르 축구협회장과 밀약을 맺고 카타르 선정을 도왔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영국 선데이타임스는 베켄바우어가 독일 기업의 카타르 진출을 돕는 브로커 역할을 한 정황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가르시아 조사관이 두 차례 면담 요청을 했으나 모두 거부했다. #

하지만 베켄바워가 조사에 응하였고, 그 결과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고 FIFA에서도 고소를 취하, 제프 블래터의 애꿎은 희생양이 되었다. 기사 아무래도 행보 자체가 블래터의 오른팔인 미셸 플라티니와 정반대 행보를 보이고 영향력이 큰 레전드 오브 레전드다보니 견제를 했다고 볼 수 있다. FIFA 회장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법을 개정하면서까지 5선에 도전하는 블래터와의 기세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베켄바워는 2000년대 초반부터 유력한 차기 FIFA 회장 후보로 꼽히는 인물이며, 집행위원으로서 2022 카타르 월드컵의 개최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정 개최해야한다면 1월에 해야한다는 입장이었기에 뇌물수수혐의는 더욱 뜬금없었다. 베켄바워는 블라터의 이러한 처사에 분노하여 강력한 재조사 입장을 들고 블라터와 정면대결을 펼치려는 상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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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부터 독일을 대표하는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의 대표 모델로 활약중이다. 베켄바워의 이름을 딴 스니커즈는 슈퍼스타와 함께 영원한 스테디셀러. 2006 독일 월드컵을 기념하여 베켄바워가 현역시절 착용했던 져지, 유니폼 등을 복각해서 한정 출시하기도 했다.

역시 독일인답게 맥주를 좋아한다. 사실 옥토버페스트의 원산지인 바이에른주의 바이에른 뮌헨의 레전드인데 안 좋아하는 게 더 이상하기도 하다. 바이에른 주를 대표하는 에딩어(Erdinger Weißbräu) 맥주의 광고를 찍기도 했다.

펠레의 엄청난 팬이다. 역대 최고의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이 들어오면 고민도 안 하고, 바로 펠레를 말한다. 오죽 하면 "내게 가장 영광스러웠던 때는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때가 아니라, 펠레와 함께 뛰었던 때였다"라고 말했겠는가. 2015년 5월에도 " 펠레 메시보다 조금 더 앞서 있다"라고 말했다. 물론 20대에 한창 커리어를 쌓고 있던 메시를 펠레에게 비견했다는 것 자체가 메시에게도 찬사. #

아들 슈테판 베켄바워도 축구 선수였으나, 2군에서 주로 뛰었다. 지난 2015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손자 루카 베켄바워도 축구 선수 하노버 96 2군을 거쳤지만 아버지처럼 재능이 없는지 지역 리그 팀에서 뛰고 있다.

위르겐 클롭을 엄청 좋아한다. 그가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을 맡는 게 소원이라고 한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독일이 한국에 0:2로 패배하고 결국 조별리그 꼴찌로 광탈하자 " 외질은 국가 제창도 안 하는 매국노"라며 맹비난을 했다. #

UEFA 네이션스 리그/2020-21 시즌에서도 독일이 스페인에게 0:6으로 대패를 당하자 "독일 축구가 전세계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라며 분노했다. #

피파 온라인 2, 피파 온라인 3에서 전설의 선수, 월드 레전드 카드로 등장해 주포지션이 아닌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풀백으로 널리 기용되었다. 이후 위닝일레븐이 독점 라이센스를 가져가며 생성제한되었고, FC 온라인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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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레리 포르쿠얀, 페렌츠 베네와 득점 공동 3위. 골든슈, 실버슈, 브론즈슈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부터 수여하기 시작함. 따라서 비공식 수상. [2] UEFA에서 진행한 팬 투표 [3] 센터백, 리베로 [4] 중앙 미드필더 [5] 국가대표팀과 바이에른 뮌헨에서 모두 주장을 맡았고, 주장이 되기 이전에도 팀의 에이스로서 절대적 카리스마로 팀을 지휘했다. 베켄바워의 이런 성향은 후대의 로타어 마테우스가 물려받는다. [6] 단순히 라인 뒤에 머물며 자유로이 스위핑하는 기존 이탈리아식 리베로가 아니라, 이에 더해 적극적으로 공격작업에 가담해 직접 타격까지 하는 역할. 베켄바워는 뛰어난 축구지능과 스킬, 순간 스피드로 이 역할의 대명사이자 상징으로 군림했다. [7] 가장 많은 연도에 걸쳐 발롱도르 유효표를 받은 수비수이기도 하다. 1965년부터 1976년까지 12년 연속으로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유효표를 받으며 매년 발롱도르 랭킹에 이름을 올렸는데, 66년부터 76년까지 11년 연속 5위 안에 랭크되며 명성을 떨쳤다.(1965년 공동 17위, 1966년 3위, 1967년 4위, 1968년 4위, 1969년 7위, 1970년 4위, 1971년 5위, 1972년 1위, 1973년 4위, 1974년 2위, 1975년 2위, 1976년 1위) [8] 1968-69, 1971-72, 1972-73, 1973-74 [9] 1973-74, 1974-75, 1975-76 [10] 프랑스가 1998 프랑스 월드컵- 유로 2000을 연속 우승할 때까지 최초의 메이저 대회 연속 우승. [11] 선수-감독으로 월드컵 우승은 1970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마리우 자갈루가 처음(1994년 기술고문으로 한 번 더 경험)이며, 이후 2018 월드컵에서 프랑스의 디디에 데샹이 세 번째로 뒤를 잇는다. [12] 지금은 세계적인 명문 클럽이 되어 있는 바이에른이 1963년의 분데스리가 창설 당시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은, 당시 바이에른의 라이벌 TSV 1860이 직전년도 남부 오버리가(Oberliga Süd) 우승팀이기 때문이다. 서독축구협회는 첫 해 분데스리가에서 동일 연고지에 복수의 팀을 넣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결코 해당 오버리가에서 3위를 거둔 바이에른이 약팀이어서 진입하지 못한 게 아니며, 실제로 바이에른은 2등급인 남부 지역리그(Regionalliga Süd)에서 2년 만에 승격을 달성했다. [13] 축구팬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웸블리 골이 터진 바로 그 경기다. 그리고 여기서 제프 허스트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월드컵 역사상 유이하게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이 나온 경기이기도 하다. 다른 한 명은 킬리안 음바페. [14] 유로 1976까지는 네 팀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현재보다 본선 진출이 더 어려웠다. [15] 파일:Honeycam 2020-09-09 23-57-55.gif
주심의 이름은 앙헬 노르베르토 코에레사(Angel Norberto Coerezza). 판정에 영향을 주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4년 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주장 안토니오 라틴이 독일인 주심의 오인으로 억울하게 퇴장당하는 통에 잉글랜드 선수들이 우세한 경기를 가져가며 결국 아르헨티나가 8강에서 짐을 싸야 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 때문에 아르헨티나인 입장에서는 잉글랜드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16] 사실 당시 독일이 교체카드를 모조리 쓴 탓도 있지만, 골절상을 입고서도 끝끝내 120분 풀타임을 소화한 베켄바워의 정신력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17] 사실 1972년 이전의 베켄바워는 리베로라고 하기 애매하다. 클럽에서는 최후방 수비수도 자주 맡았지만 국가대표팀에서는 일반적으로 미드필더로 기용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공격적인 역할로. [18] 1966년 월드컵 결승전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서독만 오심 피해를 본 것이 아니었다. [19] 이와 비견되는 국제 메이저 대회 역대 최고의 수비수 퍼포먼스는 1930 우루과이 월드컵 호세 나사치, 1966 잉글랜드 월드컵 바비 무어, 1974 서독 월드컵 엘리아스 피게로아, 유로 1996 마티아스 자머, 1998 프랑스 월드컵 릴리앙 튀랑, 2006 독일 월드컵 파비오 칸나바로 등이 있다. [20] 참고로 라이벌 크루이프는 50경기도 뛰지 못했다. 그 정도로 당시에 A매치 경기 수는 별로 많지 않았다. [21] 첫 번째는 브라질 마리우 자갈루. 단, 자갈루는 브라질 대표팀 주장은 아니었다. 주장과 감독으로 우승한 경우는 베켄바워와 프랑스의 디디에 데샹만이 있다. [22] 두 번의 결승전 상대가 모두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끌던 아르헨티나였는데, 첫 대결은 마라도나에게 당했으나 두 번째에는 감독 베켄바워가 선수 마라도나를 이겼다. [23] 명예직에 앉아 있을 뿐이라곤 하지만, '펠레는 브라질 대통령이 되려면 될 수 있었다. 안 했을 뿐이지'라고 공언하고, 또 이를 흰소리로 치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세가 당당하다. 체육부 장관으로 역임하던 시절 나쁘지 않았고. 세계 축구계로 봐도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펠레는 알만큼 펠레라는 이름자 하나만으로 많은 영향을 끼쳐 왔으며 또 현재에도 끼치고 있다. 그래도 아예 실권자인 베켄바워가 파워로는 위지만. [24] 원제는 'Gute Freunde kann niemand trennen.' 해석하면 '좋은 친구는 그 무엇도 떨어뜨릴 수 없다.' [25] 여담으로 베켄바워 생전 뮌헨의 마지막 경기는 1주일 전에 열린 바젤과의 친선경기였으며, 이 경기는 1대1로 비겼다. [26] 프란츠 베켄바워는 세계 최고의 선수이자 자신의 라이벌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가 우승했어야 했다는 사람들에게 이 말 한 마디로 멋지게 응수했다. [27] 관련링크 1, 2, 3, 4, 5, 6, 7,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gomez33&logNo=220832951328&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8] [28] 마찬가지로 GOAT 자리가 공고한 골키퍼 포지션의 레프 야신처럼 본인 포지션에서 절대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다. 그나마 파올로 말디니 정도가 수비수로서 베켄바워의 아성에 근접했다고 평가받지만, 그마저도 큰 격차가 있다. [29] 팀 커리어로 보자면 세르히오 라모스, 발롱도르 수상 이력으론 마티아스 잠머 파비오 칸나바로 등의 수비수들이 있긴 하지만 당대 위상 등을 고려하여 팀 및 개인 커리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매우 큰 차이가 난다. [30] 반면 그의 아래에 놓일 독일 축구 선수 랭킹은 상당히 치열하다. 일단 베켄바워 원톱에, 게르트 뮐러가 2인자인 것은 거의 고정이지만, 로타어 마테우스,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프리츠 발터 등 3인자 자리부터는 누구하나 딱 찝어서 얘기할 수가 없는 수준이다. [31] 1960년대에는 베켄바워 역시 미드필더였다는 점은 참고할 사항. [32] 독일에서 독일 선수를 평가하는게 큰 의미가 있냐하겠지만, 해당 문서에 가면 자세이 써 있듯 키커 랑리스테에서 WK에 선정되기란 매우 어렵다. 어지간한 당대 월드클래스 선수들도 선수 경력 내내 한번 받기가 쉽지 않으며, WK 선정의 권위는 모두가 알아줄 정도의 공신력을 지닌다 보면 된다. [33] 과거에는 멀티 플레이어들을 포지션마다 중복으로 평가를 내려줬기 때문에 요즘 선수들보다 누적면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랑리스테는 시즌을 전반기, 후반기로 나누어서 2번 평가를 내리는게 일반적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한 시즌에 4번의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 따라서 베켄바워의 경우 현재 기준으로 평가를 내리면 WK를 받은 횟수는 27회가 아닌 21회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2위 우베 젤러보다 7회, 3위 노이어보다 9회가 더 많으니 여전히 독보적인 수치가 아닐 수 없다. [34] 2위 우베 젤러가 14회이다. 베켄바워와 젤러를 포함해 WK 두 자릿 수 이상 기록자는 마누엘 노이어(12회), 베르티 포크츠(11회),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10회)까지 총 5명뿐이다. [35] 한준희 해설위원은 원투펀치에서 트로피가 베켄바워를 따라다닌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36] 다만 오토 레하겔 이 뮌헨을 결승까지 올려놓은 상태에서 구단과의 불화로 사퇴하고 베켄바워가 결승전 2경기만 치르고 우승감독으로 이 된 케이스로, 베켄바워의 기여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토 레하겔이 결승까지 올라오면서 10경기를 치렀고 4강에서 크루이프의 드림팀 바르셀로나를 탈락시켰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37] 감독까지 포함한 커리어는 축구사에 전례가 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비견될만한 인물을 꼽는다면 선수로 월드컵, 유로, 챔스를 우승하고, 월드컵 골든볼, 유로 MVP,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며 감독으로 챔스 3연패를 달성한 지네딘 지단이 유일할 것이다. [38] 이 때, 주로 언급되는 선수는 바비 무어 또는 프랑코 바레시다. [39] 정리하면 선수로 월드컵 우승, 유로 우승, 유러피언컵 3연패, 유러피언컵위너스컵 우승, 분데스리가 5회 우승 / 감독으로 월드컵 우승, UEFA컵 우승, 디비지옹 1 우승, 분데스리가 우승 / 행정가로 독일축구연맹 부회장, 피파 집행위원, 월드컵 조직위원장, 바이에른 회장과 명예회장 역임. [40] 당시의 2부 리그 [41] 링크 [42] 팬투표 [43] 분데스리가 홈페이지 선정 [44] 제프 헤르베르거 어워드 [45] 정확히는 "너네 챔스 우승은 못 할 거임 ㅋ"라는 의미의 도발에 가깝다. 챔스 결승 상대가 자신의 친정팀인 바이언이었기 때문에 바이언이 우승할 것이라는 뜻으로 한 말. [46] 여담으로, 인테르는 이 우승을 통해 이탈리아 클럽 유일의 트레블을 달성했다. 또한 23년 시점에서 돌아본다면 바이언에 있어 이 준우승은 상당히 아쉬웠을 것이, 2009-10 시즌의 바이언 역시 리그 컵대회를 모두 평정하고 챔스 결승까지 온 것이기 때문. 즉 이때 우승했다면 바이언의 첫 트레블은 3년 일찍 달성되었을 것이고, 바르사보다 두 번째 트레블이 빨랐을 것이며, 아예 이를 넘어서 트레블 3회라는 엄청난 대기록을 쓸 수도 있었다. [47] 심지어 크루이프는 가족이 괴한들한테 공격받은 문제로 국가대표까지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