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8 00:01:50

호세 나사치

호세 나사치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알프레도 시베키
(1922~1923)
호세 나사치[1]
(1923~1935)
알바로 헤스티도
(1935~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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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파일: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7대
}}} ||
호세 나사치의 수상 이력
{{{#!folding ▼
1923 코파 아메리카 MVP
호세 나사치
1935 코파 아메리카 MVP
호세 나사치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
우루과이의 前 축구인
파일:external/1.bp.blogspot.com/who-is-Jose-Nasazzi-is-star-or-no-star-Jose-Nasazzi-Yarza-celebrity-vote.jpg
이름 호세 나사치
José Nasazzi
본명 호세 나사치 야르사
José Nasazzi Yarza
출생 1901년 5월 24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주 몬테비데오시
사망 1968년 6월 17일 (향년 67세)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주 몬테비데오시
국적
[[우루과이|]][[틀:국기|]][[틀:국기|]]
신체 182cm | 체중 85kg
직업 축구선수 ( 수비수[2] / 은퇴)
축구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CA 리토 (1918~1920)
CA 베야 비스타 (1922~1932)
CA 나시오날 (1932~1937)
감독 우루과이 대표팀 (1942~1945)
국가대표 41경기 ( 우루과이 / 1923~1937)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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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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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 선수 시절 & 영광의 시작2.2. 초대 월드컵2.3. 월드컵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나사치의 바통5. 수상
5.1. 클럽5.2. 국가대표5.3.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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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과이의 前 축구인.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선수 시절엔 우루과이와 남미를 대표하는 최강의 수비수이자, 처음으로 줄리메 컵을 들어올린 주장으로 축구 역사에 남았으며 다니엘 파사레야, 엘리아스 피게로아와 더불어 남미 역대 최고의 센터백 중 한 명이다. 엔 그란 마리스칼(En Gran Mariscal. 위대한 사령관)이라는 별명이 있다.

2. 생애

2.1. 초기 선수 시절 & 영광의 시작

나사치의 조상들은 대대로 밀라노 근교의 에시노 라리오에서 살았으며 어머니는 바스크 출신으로, 나사치는 이탈리아계이다.

나사치는 18세이던 1918년. 군소클럽 리토에서 처음 프로생활을 시작하였고, 1922년 몬테비데오에서도 자신의 고향을 연고지로 하는 베야 비스타[4]로 팀을 옮긴다. 나사치는 여기에서부터 싹수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1923년 우루과이에서 열린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국가대표팀에 주장 완장을 차고 데뷔, 그리고 베스트 플레이어에 선정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남미 전체에 알리게 된다.

그가 속해있던 우루과이 대표팀은 그의 데뷔 이전에도 남미에서 실력으로는 거의 깡패팀 수준이었다.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4번째 우승을 차지함을 시작으로 남미 최강팀을 넘어 세계구급 초강팀이란걸 증명이라도 하듯 우승을 쭉쭉 쓸어모으기 시작했다.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우루과이는 1926년까지 3번 우승했으며, FIFA 월드컵이 생기기 전의 축구계 최고 대회였던 올림픽에서도 1924년 1928년 대회를 연속으로 우승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2.2. 초대 월드컵

국가대표팀이 이런 대단한 성과를 거두게 되자 우루과이 정부는 초대 월드컵 유치를 위해 FIFA를 설득했다. 마침 1930년이 우루과이의 독립 100주년도 되는 의미가 있는 해였기 때문에 FIFA의 승인을 받아 초대 월드컵을 개최하게 되었다.

나사치는 어느덧 29세의 원숙한 플레이어가 되어 있었고 수비의 핵심이자 팀의 주장으로 당시 우루과이에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선수였다. 그리고 그는 당연히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우루과이는 3조 페루, 루마니아와 한 조가 되었고 나사치는 우루과이가 예선 2경기를 무실점으로 통과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이 포스는 결승전까지 쭉 이어져서 우루과이는 월드컵의 초대 챔피언이 되었다.

결승전의 상대는 우루과이의 전통적인 라이벌 아르헨티나였고, 1928년 올림픽의 결승에서 패배했던 아픔을 갚기 위해 아르헨티나는 이를 갈고 나왔지만 여기에서 우루과이가 승리했다. 이로써 그는 당시 세계 최고의 수비수임을 증명함과 동시에 쥘 리메 트로피를 처음으로 들어 올린 주장이 되어 축구의 역사에 남게 되었다.

훗날 유명 축구 전문가이자 통계학자인 이지케메 이쿤제는 자신의 저서 <world cup: 1930-2010>에서 호세 나사치를 1930년 월드컵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로 평가했으며, 그는 나사치를 비공식적으로 초대 월드컵 골든볼러로 선정했다. 일개 전문가가 평가한 건가 싶지만, 그가 책을 통해 발표한 월드컵 최우수 선수 랭킹은 주앙 아벨란제 제프 블라터가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피파 기록실에도 등재되어 있다. 이를 통해 그의 기록은 또 한 번 재평가 받았으며, 축구 역사상 유일하게 월드컵 골든볼을 수상한 수비수로 남게 되었다.[5]

2.3. 월드컵 이후

1932년 정들었던 베야 비스타를 떠나 우승을 위해 우루과이의 명문팀 중 하나인 나시오날로 팀을 옮겼다. 여기에서 그는 옮기자마자 브라질의 도밍구스 다기아와 함께 든든한 벽을 쌓았고 처음으로 우루과이 리그의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나사치의 당시 위엄은 우루과이 리그 팀 실점에서 바로 드러나는데 1932년 베야 비스타의 시즌 실점은 35점에 순위 8위, 나시오날은 34점에 순위 3위였다. 당시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의 팀은 10개였으니 나사치의 존재 하나만으로 3위팀과 8위팀의 총 실점이 비슷했던 것이다. 1933년에 나사치와 도밍구스가 버티고 있던 나시오날은 10실점으로 우승, 베야 비스타는 61점을 먹히며 수비진이 완벽히 망가졌다.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는 월드컵에 참가하지 않았던 유럽 팀들에게 앙심을 품고 우루과이가 참가하지 않았지만, 나사치의 실력은 어디 안 갔다. 1935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다시 한 번 우승을 차지하고, 베스트 플레이어에 다시 한 번 선정되었다.

그의 활약은 1937년까지 이어졌다. 1937년. 36살의 나이로 그는 모든 유니폼을 벗었고, 페드로 세아의 뒤를 이어 1942년에서 1945년까지 잠시 우루과이 대표팀의 감독을 맡기도 했었다. 3년간 16경기에서 10승 3무 3패. 승률이 62.5%로 꽤 좋았지만 아르헨티나에 밀려 우루과이는 이때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축구와 큰 관련을 맺지 않고 몬테비데오 카지노에서 관리인으로 일했다.

그 후 1968년 6월 17일. 나사치는 몬테비데오에서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영상이 얼마 남아있지는 않아서 정확한 추론을 하기는 힘들지만 182cm / 85kg의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체구를 바탕으로 힘이 넘치는 수비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기술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지만 빠르고 위치 선정까지 좋았다 한다. 그래서 우루과이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X선조차 그의 수비는 뚫지 못할 것이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의 진정한 장점은 리더십인데 우루과이가 초대 월드컵과 2번의 올림픽, 4번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할 당시 대부분 대회에서 주장으로 활약했다. 우루과이의 역대 베스트 11을 뽑으면 중앙 수비수로서는 당연히 선발되며, 주장의 자리도 당연히 그의 몫이다. 우루과이 축구 전성기 때의 주장이니 당연한 일이고 수비수로서 이뤄낸 대회의 성과를 따지면 대회 우승은 물론 비공식 월드컵 mvp와 2회의 코파 아메리카 mvp를 수상한 엄청난 커리어의 소유자이다. 역대 모든 수비수들을 놓고 비교해봐도 발롱도르 2회에 빛나는 프란츠 베켄바워 정도만이 비견 가능하다. 단연 1930년대 최고의 수비수이다.

그의 리더십은 역대 최고의 주장을 꼽을 때도 빠지지 않으며, 프란츠 베켄바워, 보비 무어, 프랑코 바레시 등과 동급으로 칭해진다.

4. 나사치의 바통

1872년 세계 최초로 A매치를 벌였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기를 시작으로, 1873년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이겼던 것에서부터 타이틀을 가진다고 가정하여 권투와 같이 타이틀을 방어한다는 개념으로 따지는 비공식 축구 월드 챔피언십이란 것이 있다. 그리고 나사치의 바통이라 하여 1930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우루과이 대표팀을 시작으로 거의 비슷한 방식을 쓰는 이야깃거리가 있다. 한가지 다른 것은 나사치의 바통이 비공식 축구 월드 챔피언십과 다른 점은 나사치의 바통은 90분간의 정규 시간만으로 따진다는 것이다.

2018년 11월 현재 나사치의 바통을 가진 팀은 11월 18일의 A매치에서 탄자니아 민주 공화국를 1:0으로 꺾은 레소토이다. 이후 타이틀이 유럽으로 넘어와 2020년 9월 네덜란드를 꺾은 이탈리아가 2021년 5월까지 나사치의 바통을 쥐고 있다. 현재 9연속 방어에 성공중이며 다음 A매치가 약체 산마리노이기 때문에 이 바통을 쥐고 다가올 유로 2020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나사치의 바통이나 비공식 축구 월드 챔피언십이나 모두 공식 이벤트가 아니며, FIFA에서는 어떠한 홍보도 하지 않는다. 또한 나사치의 이름만 딴 것일 뿐, 나사치가 만들거나 나사치와 특별한 관련이 있는것도 아니다.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5.3. 개인



[1] 나사치가 대표팀에 소집되지 않을 때에는 엑토르 스카로네등이 주장완장을 차기도 했다. [2] 라이트백, 센터백 [3]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4] 베야 비스타는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1990년에서야 단 한 차례 우승했던 경력이 있는 약체팀이다. 하지만 나사치가 이 팀 출신이라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삼고 있으며, 그들의 홈구장 이름을 에스타디오 호세 나사치라 이름붙인 것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 [5] 그의 1930년 월드컵 활약은 1966년의 바비 무어, 1974년의 프란츠 베켄바워, 1998년의 릴리앙 튀랑, 2006년의 파비오 칸나바로와 함께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활약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무어, 베켄바워, 칸나바로는 실버볼, 튀랑은 브론즈볼을 수상받은 반면, 나사치는 이들을 뛰어넘는 골든볼을 수상했기 때문에 거의 월드컵 한정으로는 최고의 수비수로 평가받가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