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로 헤스티도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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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 ||||
호세 나사치 (1923~1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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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로 헤스티도 (1935~1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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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1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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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로 헤스티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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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우루과이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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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알바로 헤스티도 Álvaro Gestido |
본명 |
호세 알바로 펠레그린 헤스티도 포세 José Álvaro Pelegrín Gestido Pose |
출생 |
1907년
5월 17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
사망 | 1957년 1월 18일 (향년 49세) |
국적 |
[[우루과이|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키 176cm | 체중 73kg |
포지션 | 하프백 |
소속팀 |
CA 페냐롤 (1926~1941) CA 페냐롤 (1944) |
국가대표 | 26경기 ( 우루과이 / 1927~1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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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과이의 前 축구선수. 별명은 El Teniente.[1]2. 생애
2.1. 선수 생활
2.1.1. 클럽
헤스티도는 팬들에게 바리오 또는 위관급 장교[2]라 불렸는데 이전에 밀리터리 스쿨에서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모든 클럽 커리어를 페냐롤에서 보냈고 7차례 우루과이 리그 챔피언에 올랐다. 1941년, 소속팀 페냐롤의 50주년 기념 경기[3]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마치고 은퇴를 선언하였다.그러다 1944년 9월 22일, 갑자기 페냐롤에 복귀하여 2경기를 더 뛰고 완전히 은퇴를 선언하였다.
2.1.2. 국가대표
헤스티도는 1927년 7월 14일부터 1940년 8월 15일까지 총 26경기에 출전하였다.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각각 한 차례씩 우승했으며 월드컵에서도 베스트 11에 선발되는 활약을 펼쳐보였다. 하지만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참가하지는 않았다.2.2. 이후
헤스티도는 1957년, 49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3. 플레이 스타일&평가
센스와 페어플레이로 이름 높은 하프백이었다. 특히 초대 월드컵에서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 로렌소 페르난데스와 이루었던 하프백 라인은 철의 장막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호흡을 보여주었다. 또한 페냐롤의 주장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였다.4. 여담
- 초대 월드컵 결승전의 베스트 11 중 가장 젊은 나이에 그리고 빨리 사망한 선수이다.
- 그의 6살 위의 형 오스카르는 1967년 3월 우루과이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임기 중 사망하였다.
5. 수상[4]
5.1. 클럽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7회: 1928, 1929, 1932, 1935, 1936, 1937, 1938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4회: 1927, 1933, 1934, 1939
5.2. 국가대표
5.3. 개인
[1]
스페인어로 한국말로 풀이하면 군대 계급의 중위 정도다.
[2]
별명이 El Teniente. 영어로 Lieutenant였다.
[3]
상대는
아르헨티나의
CA 리버 플레이트였다.
[4]
헤스티도는
CA 페냐롤의
원 클럽 맨이므로 팀 이름의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