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클러프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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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클러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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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클러프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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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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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브라이언 클러프 Brian Clough OBE[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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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브라이언 하워드 클러프[2] Brian Howard Cloug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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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5년 3월 21일 | |
영국 잉글랜드 노스요크셔 주 미들즈브러 | ||
사망 | 2004년 9월 20일 (향년 69세) | |
영국 잉글랜드 더비셔주 더비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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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8cm | |
직업 |
축구선수 (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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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미들즈브러 FC (1951~1953 / 유스) 빌링엄 신소니아 (1953~1955 / 유스) 미들즈브러 FC (1955~1961) 선덜랜드 AFC (1961~1964) |
감독 |
하틀리풀 유나이티드 FC (1965~1967) 더비 카운티 FC (1967~1973)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 (1973~1974) 리즈 유나이티드 FC (1974) 노팅엄 포레스트 FC (1975~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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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2경기 ( 잉글랜드 / 1959) | |
가족 | 아들 나이젤 클러프 | |
링크 | 공식 기념 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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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축구계의 궁극적 인습 파괴자
football's ultimate iconoclast
UEFA에서 축구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명감독 10인을 꼽으며 남긴 평.
football's ultimate iconoclast
UEFA에서 축구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명감독 10인을 꼽으며 남긴 평.
영국( 잉글랜드)의 축구선수 출신 전 축구 감독. 1975년부터 1993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노팅엄 포레스트 FC 감독직을 역임했다. 1부 리그 승격, 1부 리그 우승, 유러피언컵 2연패를 4시즌만에 이뤄낸 명장이다.
2. 유소년 시절
1935년에 미들즈브러에서 사탕가게 점원의 9자녀(자녀 중 한 명은 패혈증으로 4세때 사망) 중 6번째로 태어났으며, 1946년 초등 학생 시절 Eleven-plus 시험[3]에 떨어져 마턴 그로브 세컨더리 스쿨에서 재학하며 크리켓과 축구에 관심을 가지며 즐겼다고 한다. 졸업 후인 1950년에는 영국의 화학 회사 ICI 공장에서 일하다가 1951년에 미들즈브러 유소년 팀에서 뛰었고, 1953년에는 빌링엄 신소니아 유소년 팀에서 뛰다 이후 1955년까지 2년 동안 군 복무를 했다.3.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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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5002e> 미들즈브러 통산 득점 3위 |
군 제대 후인 1955년에 미들즈브러에 입단하여 선수생활 6년 동안 213경기를 뛰면서 197골을 기록하는 등 스트라이커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보여줬다. 1961년에는 라이벌 팀인 선더랜드로 이적해 뛰면서 61경기에 출전해 54골을 기록했지만, 1962년 12월 26일 베리 FC와의 경기에서 골키퍼 크리스 하커와 충돌하여 부상을 당해 실려나가고 만다. 결국 십자인대 파열로 팀에서 잠시 이탈했다가 2년 뒤에 복귀하였으나, 3경기 출장 후 은퇴하였다.
4. 감독 시절
4.1. 하틀리풀스 유나이티드 F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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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 하틀리풀스 감독 시절 클러프의 모습 |
선수 은퇴 이후 1965년에 하틀리풀스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미들즈브러 시절 팀 동료인 피터 테일러를 수석 코치직에 앉히면서 감독직을 수행했다. 당시 팀은 재정적으로 엉망이었는데, 클러프는 동네 술집을 돌아다니며 모금활동을 하는등 팀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고, 팬들은 그런 클러프를 마음에 들어해 이후 그가 보드진과 싸우고 경질당하자, 직접 나서서 보드진을 경질시켜버리고 클러프를 복귀시킨다. 이후 그는 팀을 승격시키고, 샘 롱슨(1900~1989) 더비 카운티 회장의 부름을 받아 하틀리풀스를 떠나게 된다.
4.2. 더비 카운티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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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1f20> 더비 감독 시절 클러프의 모습 |
1967년에 피터 테일러 수석코치와 함께 더비 카운티로 이적하여 로이 맥팔랜드, 존 오헤어, 존 맥거번, 앨런 힌턴, 레스 그린, 케빈 헥터 등의 선수들을 영입하여 리빌딩에 전념했다. 그 뒤 10여년간 2부 리그에서 맴돌던 팀을 1969년에 2부 리그 우승으로 1부 리그에 복귀시켜 1부 리그에 복귀한 바로 그 시즌인 1969/70 시즌에 4위로 시즌을 끝마치고, 마침내 1971/72 시즌에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1부 리그 우승을 이끄는 데 공헌했다. 불과 2년 전에 2부 리그에서 머물던 팀을 2년만에 1부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좋은 성적을 거두며 유로피언 컵에서도 선전하나, 샘 롱슨 회장과의 불화로 자진 사임하였다.
4.3.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 리즈 유나이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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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DAA> 순서대로 브라이튼, 리즈 감독 시절 |
1973년에 당시 3부 리그 소속팀인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에서 감독직을 수행했으나, 19위라는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으로 경질된 뒤[6] 1974년에 명장 돈 레비 감독이 잉글랜드 국대 감독으로 떠나 자리가 비어 있는 리즈 유나이티드로 옮긴다. 그러나 클러프의 지도 방식이 너무 강압적이었기에 돈 레비 시절에 거칠고 적극적인 성향을 보였던 리즈 선수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불화만 지속되다 44일만에 경질되었다.
이 시기는 2008년 '댐드 유나이티드'라는 제목의 영화로 영화화되었다. 정확히는 동명의 감독 평전을 영화로 옮긴 것. 단지 원 평전이 클러프 감독의 유족에게 실제와 다르다고 고소를 당한 걸 감안하고 봐야 할 듯 하다.
4.4. 노팅엄 포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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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102a> 광란의 질주를 이끌며 기적을 쓰다 |
노팅엄 포레스트 감독 전반기는 클러프 커리어의 정점이자 그야말로 진정한 언더독의 대반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던 시절로, 그는 2부 리그를 전전하던 팀을 맡아 승격 첫 시즌에 1부 리그를 우승시키고 뒤이어 유러피언컵 2연패를 차지하는 만화에서나 볼 법한 일을 현실로 만들어냈다.
1975년에 클러프가 취임할 당시 노팅엄 포레스트는 1959년 FA컵 우승 이후로 1부 리그에서 별 진전이 없다가 1972년을 끝으로 2부 리그에 짱박힌 채로 꿈도 희망도 없는 곳이었다. 그런 팀을 클러프가 마틴 오닐, 존 로버트슨, 비브 앤더슨, 이안 보이어 등을 중심으로 스쿼드를 형성하고 취임 이듬해인 1976년에 브라이튼에서 막 경질당한 피터 테일러를 코치로 다시 불러들이며 팀을 다잡아 1976/77 시즌에 2부 리그 3위로 1부 리그로 승격한 뒤 이후 클러프의 지도력에 힘입은 선수단 전체가 엄청난 모습을 보이며 팀 성적이 미칠듯이 급상승, 승격 첫 시즌인 1977/78 시즌에 25승 14무 3패의 성적으로 곧바로 리그 우승을 했고 리그 컵마저 가져오며 더블을 기록했다. 게다가 1978/79 시즌 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나간 유러피안컵에서 유럽의 여러 강호들을 물리치고 결승전에서 영국인 감독 밥 휴튼이 지휘하는 말뫼 FF를 1-0으로 꺾어 첫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1979/80 유러피안컵 결승전에서도 함부르크 SV를 꺾고 리버풀 FC에 이어 두 번째로 유러피언컵 2연패라는 대기록을 세운다.[7]
이러한 영광 이후 1982년에 오랜 친구인 피터 테일러 코치가 더비 카운티 감독이 되자 헤어진 클러프 감독은 아들 나이젤, 데스 워커, 스튜어트 피어스, 스티브 스톤, 스티브 체틀 등을 중심으로 1980년대에 중상위권 팀으로 자리잡으면서 리그 컵 2연패(1989, 90), 풀 멤버스컵 2회 우승(1989, 92)을 이룩한 뒤에 1990년에 로이 킨을 영입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려 했으나, 1992/93 시즌에 팀 성적이 곤두박질[8] 치면서 22위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강등당했고, 동시에 클러프는 18년간의 오랜 지도자 생활을 마감한다.
1991년 6월 서훈명단(1991 Birthday Honours)에 올라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을 받았다. 링크
4.5.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도 더비셔에서 거주하면서 포포투에 축구 논평을 기고해오다가,[9] 1970년대부터 앓았던 알코올 중독의 부작용으로 투병하다 2004년 9월 20일에 타계했다. 장례식은 더비 카운티 FC의 홈구장인 프라이드 파크 스타디움에서 거행되었고, 14,000여명의 양 팀의 추모객들이 경기장을 찾았다.2002년에 영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고, 노팅엄 포레스트의 홈구장 시티 그라운드에 그의 이름을 딴 스탠드가 있다. 아들인 나이젤 클러프 역시 축구감독을 하고있는데 3부 리그 팀인 버턴 앨비언 FC을 카라바오컵 4강으로 이끌며 호부호자 증명을 제대로했다.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59-60
5.1.2. 개인 수상
-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 득점왕: 1958-59, 1959-60
5.2. 감독
5.2.1. 대회 기록
- 더비 카운티 FC (1967~1973)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971-72
-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 1968-69
- 텍사코컵: 1971-72
- 와트니컵: 1970
- 노팅엄 포레스트 FC (1975~1993)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1977-78
- 풋볼 리그컵: 1977-78, 1978-79, 1988-89, 1989-90
- 풀 멤버스컵: 1988-89, 1991-92
- FA 채리티 실드: 1978
- 유러피언컵: 1978-79, 1979-80
- 유러피언 슈퍼컵: 1979
- 앵글로-스코티시컵: 1976-77
5.2.2. 개인 수상
- 유럽 올해의 축구 감독[10]: 1979
-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1979-80
- LMA 명예의 전당: 1989
- PFA 메리트 어워드: 1992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2
5.3. 서훈
- 대영제국 훈장 4등급 (OBE): 1991
6. 일화
6.1. 돈 레비 감독과의 악연
브라이언 클러프와 돈 레비의 썰전 영상 (1974)
자존심이라면 한 자존심하는 클러프는 '더티 리즈'라는 별명에 걸맞게 거친 플레이를 하는 리즈, 그리고 그 매니저인 돈 레비를 정말 싫어했던 편이다. 그러다보니 리즈가 돈 레비의 후임자로 브라이언 클러프를 낙점했을 때 클러프는 부임 즉시 팀에서 레비의 색을 지워내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클러프가 취임 직후부터 해고당할 때까지 질러댄 이적료는 레비가 13년동안 쓴 이적료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았고. 이런 대량의 이적으로 인해 리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들로부터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이런 클러프의 급진적인 팀 변화 정책이 팀의 케미스트리를 박살내버릴 위기에까지 처하게 되자 클러프는 44일만에 해임당하고 말았다.[11][12] 그러다보니 클러프로서는 리즈와 돈 레비를 더더욱 싫어하게 되었을지도.
위의 영상으로 나와 있는 요크셔 TV 프로그램에서 썰전을 벌이면서 더더욱 라이벌리는 강조되었다. 오죽하면 포포투가 아르센 벵거 vs 알렉스 퍼거슨 급의 역사적 라이벌 베스트 6에 선정했을까.
6.2. 무하마드 알리와의 일화
무하마드 알리: 영국 런던에 있는 브라이언이요? 그 브라이언 클러프라고 말 많은 사람인데 미국에서도 유명해요. 영국의 무하마드 알리라고 한다는데 무하마드 알리는 나 하나뿐입니다. 더는 못 참아요. 그만해요.
브라이언 무어[13]: 그만둘 겁니까?
브라이언 클러프: 아니요, 싸울겁니다.
브라이언 무어[13]: 그만둘 겁니까?
브라이언 클러프: 아니요, 싸울겁니다.
6.3. 정치 성향
나는 사회주의가 가슴으로부터 우러 나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운 좋게도 돈을 많이 벌었으나 내가 만난 부자들은 다른 사람들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더군요. 하지만 나는 반대로 생각하고,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회주의는 이러한 생각에서 시작된 겁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여러 발언에서 짐작할 수 있듯,
사회주의자였다.7. 동상 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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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순서대로 미들즈브러, 노팅엄, 더비에 위치한 동상 |
미들즈브러의 알버트 파크, 노팅엄의 올드 마켓 스퀘어, 더비의 프라이드 파크 스타디움에 있으며 노팅엄에 자리한 동상이 가장 유명하다.
프라이드 파크 스타디움의 동상은 유일하게 브라이언 클러프 단독 동상이 아닌데, 그의 곁에 있는 인물은 오랜 시간 동안 클러프와 함께한 수석코치 피터 테일러이다. 동상은 1971/72 시즌 풋볼 리그 디비전 원 우승 당시를 재현한 것.
[1]
Officer, 대영제국 훈장 4등급
[2]
/klʌf/
[3]
중학교 진학 시험
[4]
오늘날의
하틀리풀 유나이티드 FC
[5]
원래는 전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으나, 후임인
밥 페이즐리 감독의 요청으로 채리티 실드 때 일일감독을 맡았고, 생애 마지막 경기를 승부차기 승리로 장식하면서
만원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축구계를 떠났다.
[6]
이 때 절친인 피터 테일러 코치가 클러프의 후임 감독이 된다.
[7]
만약 15-16 시즌의 레스터 시티가 이후 16-17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했다면 이 시기의 노팅엄 포레스트와 비교되었을 것이다.
[8]
이 당시 FA컵에서 로이 킨의 실수로 팀이 탈락하자 라커룸에 돌아온 로이킨에게 펀치를 먹였다고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로이 킨이다!
[9]
물론 그 사이 몇몇 팀들의 감독 제의를 받기도 했다.
[10]
제프 헤르베르거 어워드
[11]
그나마 클러프는 영국 역사상 빨리 짤린 순위에서 10위이다. 가장 순식간에 짤린 사람은 10분만에 짤린 르로이 로지니어.
[12]
http://www.fourfourtwo.co.kr/news/news_view?idx_B=1645&RNUM=297
[13]
영국의 유명 스포츠캐스터. 2001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