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14:02

조르주 클레망소

클레망소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1e43, #002654 20%, #002654 80%, #001e43);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부르봉 왕정복고|
왕정복고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 아르망 에마뉘엘 드 비네로 뒤 플레시스 장 조제프 데솔 엘리 디카즈
(제2대) 제5대 제6대 제7대
아르망 에마뉘엘 드 비네로 뒤 플레시스 조제프 드 빌리에 장 바티스트 게이 쥘 드 폴리냐크
제8대
카지미르 드 로슈슈아르
[[7월 왕정|
7월 왕정
]]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자크 라피트 카지미르 페리에 장드디외 술트 에티엔 모리스 제라르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위그베르나르 마레 에두아르 모르티에 빅토르 드 브로이 아돌프 티에르
제17대 (제11대) (제16대) (제11대)
마티외 몰레 장드디외 술트 아돌프 티에르 장드디외 술트
제18대 (제17대)
프랑수아 기조 마티외 몰레
[[프랑스 제2공화국|
제2공화국
]]
제19대 제20대 제21대 제22대
자크 샤를 뒤퐁 드 뢰르 프랑수아 아라고 루이외젠 카베냐크 오딜롱 바로
제23대 제24대
알퐁스 앙리 도풀 레옹 포셰
[[프랑스 제2제국|
제2제국
]]
제25대 제26대
에밀 올리비에 샤를 쿠쟁몽토방
[[프랑스 제3공화국|
제3공화국
]]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루이 쥘 트로쉬 쥘 아르망 뒤포르 알베르 드브뢰이 에르네스트 쿠르토 드시세
제31대 (제28대) 제32대 (제29대)
루이 뷔페 쥘 아르망 뒤포르 쥘 시몽 알베르 드브뢰이
제33대 (제28대) 제34대 제35대
가에탕 드 로슈부에 쥘 아르망 뒤포르 기욤 워딩턴 샤를 드프레이시네
제36대 제37대 (제35대) 제38대
쥘 페리 레옹 강베타 샤를 드프레이시네 샤를 뒤클레르
제39대 (제36대) 제40대 (제35대)
아르망 팔리에르 쥘 페리 앙리 브리송 샤를 드프레이시네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르네 고블레 모리스 르비에 피에르 티라르 샤를 플로케
(제43대) (제35대) 제45대 제46대
피에르 티라르 샤를 드프레이시네 에밀 루베 알렉상드르 리보
제47대 제48대 (제47대) (제46대)
샤를 뒤피 장 카지미르페리에 샤를 뒤피 알렉상드르 리보
제49대 제50대 (제40대) (제47대)
레옹 부르주아 쥘 멜린 앙리 브리송 샤를 뒤피
제51대 제52대 (제42대) 제53대
피에르 발데크루소 에밀 콩브 모리스 루비에 페르디낭 사리앵
제54대 제55대 제56대 제57대
조르주 클레망소 아리스티드 브리앙 에르네스트 모니 조제프 카요
제58대 (제55대) 제59대 제60대
레몽 푸앵카레 아리스티드 브리앙 루이 바르투 가스통 두메르그
(제46대) 제61대 (제55대) (제46대)
알렉상드르 리보 르네 비비아니 아리스티드 브리앙 알렉상드르 리보
제62대 (제54대) 제63대 제64대
폴 팽르베 조르주 클레망소 알렉상드르 밀랑 조르주 레이그
(제55대) (제58대) 제65대 제66대
아리스티드 브리앙 레몽 푸앵카레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마르시알 에두아르 에리오
(제62대) (제55대) (제66대) (제58대)
폴 팽르베 아리스티드 브리앙 에두아르 에리오 레몽 푸앵카레
(제55대) 제67대 제68대 (제67대)
아리스티드 브리앙 앙드레 타르디외 카미유 쇼탕 앙드레 타르디외
제69대 제70대 (제67대) (제66대)
테오도르 스테그 피에르 라발 앙드레 타르디외 에두아르 에리오
제71대 제72대 제73대 (제68대)
조제프 폴봉쿠르 에두아르 달라디에 알베르 사로 카미유 쇼탕
(제72대) (제60대) 제74대 제75대
에두아르 달라디에 가스통 두메르그 피에르에티엔 플랑댕 페르낭 부아송
(제70대) (제73대) 제76대 (제68대)
피에르 라발 알베르 사로 레옹 블룸 카미유 쇼탕
(제76대) (제72대) 제77대 제78대
레옹 블룸 에두아르 달라디에 폴 레노 필리프 페탱
[[비시 프랑스|
비시 정권
]]
(제70대) (제74대) 제79대 (제70대)
피에르 라발 피에르에티엔 플랑댕 프랑수아 다를랑 피에르 라발
[[프랑스 임시정부|
임시정부
]]
제80대 제81대 제82대 (제76대)
샤를 드골 펠릭스 구앵 조르주 비도 레옹 블룸
[[프랑스 제4공화국|
제4공화국
]]
제83대 제84대 제85대 (제84대)
폴 라마디에 로베르 슈만 앙드레 마리 로베르 슈만
제86대 (제82대) (제86대) 제87대
앙리 쾨유 조르주 비도 앙리 쾨유 르네 플르뱅
(제86대) (제87대) 제88대 제89대
앙리 쾨유 르네 플르뱅 에드가르 포르 앙투안 피네
제90대 제91대 제92대 (제88대)
르네 마예르 조제프 라니엘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에드가르 포르
제93대 제94대 제95대 제96대
기 몰레 모리스 부르제스모누리 펠릭스 가야르 피에르 플림랭
(제80대)
샤를 드골
[[프랑스 제5공화국|
제5공화국
]]
제97대 제98대 제99대 제100대
미셸 드브레 조르주 퐁피두 모리스 쿠브 드뮈르빌 자크 샤방델마스
제101대 제102대 제103대 제104대
피에르 메스메르 자크 시라크 레몽 바르 피에르 모루아
제105대 (제102대) 제106대 제107대
로랑 파비위스 자크 시라크 미셸 로카르 에디트 크레송
제108대 제109대 제110대 제111대
피에르 베레고부아 에두아르 발라뒤르 알랭 쥐페 리오넬 조스팽
제112대 제113대 제114대 제115대
장피에르 라파랭 도미니크 드빌팽 프랑수아 피용 장마르크 에로
제116대 제117대 제118대 제119대
마뉘엘 발스 베르나르 카즈뇌브 에두아르 필리프 장 카스텍스
제120대 제121대 제122대 제123대
엘리자베트 보른 가브리엘 아탈 미셸 바르니에 프랑수아 바이루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콜뤼슈
6위 7위 8위 9위 10위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장 가방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엠마뉘엘 수녀
장 물랭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볼테르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크리스찬 카브롤
쥘 페리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미셸 사르두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하룬 타지프
에리크 타바를리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다비드 두이예
장 자크 골드만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달리다
레옹 지트론
니콜라스 윌로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
프랑시스 카브렐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르노
베르나르 쿠슈네르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미셸 세로
미셸 드러커
라이무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레이먼드 풀리도르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질베르 베코
조제 보베
장 페라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뤽 베송
티노 로시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세르지 레기아니
프랑수아즈 돌토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프랑스 제54대 총리
조르주 뱅자맹 클레망소
Georges Benjamin Clemenceau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eorges_Clemenceau_1.jpg
<colbgcolor=#fff,#000092><colcolor=#000092,#fff>출생 1841년 9월 28일
프랑스 왕국 무이롱앙파레
(現 프랑스 페이드라루아르 방데 무이롱앙파레)
사망 1929년 11월 24일(향년 88세)
프랑스 파리
(現 프랑스 일드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재임기간 제54대 총리
1906년 10월 25일 ~ 1909년 7월 21일 1기
1917년 11월 16일 ~ 1920년 1월 20일 2기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가족 배우자 마리 엘리자베트 플뤼메[1][이혼]
아들 미셸 클레망소[3]
직업 정치인, 언론인, 의사
서명
파일:조르주 클레망소 서명.svg

1. 개요2. 상세3. 기타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정치인, 언론인, 의사. 프랑스 제3공화국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2. 상세

열렬한 공화주의자이자 의사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해, 졸업 및 면허 취득 이후 일찍 정치활동에 투신했다. 동시에 미국 남북 전쟁을 경험하고, 이와 같은 현대전이 대세가 될 것임과 산업혁명이 보일 총력전을 인식했다. 초기에는 언론사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다 1870년, 몽마르트(Montmartre)로 유명한 파리 18구 구청장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언론인 시절 때는 일간지 '로로르(L'Aurore; 새벽)' 지의 사주이자 주필을 겸했다.

정치 초창기엔 파리 코뮌을 지지하는 등 공산주의 성향을 보이기도 했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로는 군비 증강과 독일에 대한 외교적 고립정책을 강하게 주장하는 등 애국주의적인 성향 또한 강하게 드러내면서 장 조레스 등의 사회주의자들과 멀어졌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 당시 자신이 주필로 있던 신문 '로로르'를 통해 군부와 우익을 비판하고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는 등 기본적으로는 극우 보수주의자들에도 반대하는 중도파 입장에 가까웠다. 급진당에 가입했던 전력에서도 알 수 있듯 리버럴에 가까웠다는 평도 있는데, 후술된 전쟁 시기 행적을 보면 이것도 좀 애매하긴 하다. 대체적으론 중도좌파~중도우파까지 왔다갔다하며 민족주의 성향이 결합된 대외 강경파 스탠스였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는지, 쥘 페리(Jules Ferry)가 이른바 '문명화의 사명, 계몽의 의무'로 식민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골자의 연설을 한 것에 대해 '그것은 의무 이행이 아닌 부정이다'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 13일 이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공개서한을 써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본래 이 공개서한의 제목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라는 소극적 제목이었는데, 주필 클레망소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보다 직설적인 제목으로 바꾸도록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에밀 졸라, 장 조레스, 아나톨 프랑스 등의 지식인들과 함께 드레퓌스의 결백을 위해 싸웠던 것으로도 유명하다.[4]

1906년 ~ 1909년의 1차 집권 뒤 고령으로 인해 사실상 정계은퇴 상태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인 1917년 11월, 프랑스의 전쟁수행 능력이 거의 바닥난 상황에서 76세의 나이로 총리로 컴백. 서부전선 페르디낭 포슈 필리프 페탱, 조제프 조프르 등을 중심으로 재정비하고 강력한 전쟁수행 의지를 보이면서 전시 내각을 이끌었다. 쉽게 말해서 20여년 뒤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윈스턴 처칠 비슷한 역할을 한 셈. 그가 내각수반으로서 1차 대전을 진두지휘한 기간은 1917년 11월 16일~1918년 11월 11일까지 1년이 채 안되었지만, 해당 기간이 종전, 승리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시기여서 지금도 1차대전 당시 프랑스의 승리에서 주역으로 인정받는다.

결국 미국의 참전과 함께 서부전선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낸 독일이 내부 붕괴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은 협상국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클레망소는 베르사유 조약의 협상국 리더 중 하나로 가장 강경파적인 입장에서 독일에 대한 천문학적 배상과 군사력 억제를 요구해서 관철시켰다.[5] 허나, 당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연합국 지도자들이 너무 지나친 액수의 배상금을 들이밀었다고 이게 이후 새로운 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media1.britannica.com/71448-004-9BCD8C64.jpg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한 협상국 정상들과 함께. 왼쪽부터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 비토리오 올랑도 이탈리아 총리, 클레망소,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며 이 넷은 파리 강화 회의의 조약들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정상들로서 빅4라 불린다.

베르사유 조약 이후 1920년에 완전히 은퇴하여 미국과 영국령 인도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유유자적한 노후를 보내다가 1929년에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소장파 시기엔 꽤나 정적이었던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도 이땐 많이 슬퍼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제1차세계대전을 프랑스의 승리로 이끌며 나라를 구한 전시총리가 되었지만, 사실 비판거리도 없진 않은 인물이다. 총리가 되자 당시 정부와 최고사령부의 소극적인 전쟁수행 방식을 비판했고, 노동자들의 파업 진압을 위해 군대와 경찰을 동원했으며, 1918년 5월 파리에서 총파업이 일어나자 경찰을 이용하여 모조리 이들을 체포하여 군에 입대시켜 버린 점, 그리고 반대파들을 억압했던 일 등이 비판거리로 지적된다.

이는 냉정히 말하면 자유주의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였지만, 방어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전시 민주국가의 지도자가 행하는 강력한 내부통제 행위는 언제나 논쟁거리이긴 하다.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면 아무데나 갖다붙여도 되기 때문에 자칫 독재 등에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기타

파일:external/static.lexpress.fr/1_431.jpg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c41e5aaaf4beb5362de8a8c4a426924e.jpg

전선을 시찰하는 클레망소

직접 병사들이 있는 참호를 돌아다니면서, 사병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로 유명했다.[6] 그러나 적군에게 겁을 집어먹는 병사나 탈영병, 패배주의에 물든 병사들에게는 가차가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지휘관들에게 퇴각하거나 도망치는 병사는 무조건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린게 바로 이 양반이다.

파일:external/tigerscorner.free.fr/image742.jpg

그의 별명인 ' 호랑이'에 빗대어 그려진 삽화

프랑스는 반드시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 끝까지 난 전쟁, 전쟁, 또 전쟁 뿐이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그는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는데, 클레망소가 얼마나 대독일 강경책을 주장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허나 이 과정에서 화평파격이던 조제프 카요(Joseph Caillaux)와 루이 말비(Louis Malvy) 등이 망명 또는 투옥되는 잡음이 생기기도 했다. 그나마 이들은 각각 1921년과 24년 석방 또는 완전 복권되었고 그 외 공식적으로 극형을 당한 정적은 없다고 한다.

정치 은퇴 후 한 기자가 "이제까지 만난 정치인 가운데 최악은 누구였습니까?" 라는 질문에 "아직까지 그런 사람은 만나지 못했습니다"고 대답했는데, 기자가 정말이냐고 되묻자 "이 작자야 말로 최악이라고 생각한 순간 더 최악의 인물이 나타나더군요" 라고 답한 일화가 있다. 몇년만 더 살았으면 진짜 최악의 인물이 집권하는걸 볼 뻔 했다.

의도했건 아니건 은연중 군국주의를 조장한거 아니냐는 비판도 받는 인물이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이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군인들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다(La guerre! C'est une chose trop grave pour la confier à des militaires)"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 말은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명언으로 오늘날까지도 제법 인용되고 있다.[7]

'젊어서 진보, 늙어서 보수' 식의 말을 한 원조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지만,[8] 잘못 알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가짜명언 팩트체크. 인용된 기사에도 나와있지만, 해당 발언은 누군가가 한 말이라기보다는 파편적으로 전승되어 온 속담이나 문장에 화자가 자신과 상반되는 이념을 넣어 비난한 것에 불과해보인다. 왕정 시절엔 공화주의자들이, 이후에는 자유주의, 사회주의, 진보주의가 비슷한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 사람도 파나마 스캔들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와 리슐리외급 전함 3번함의 이름이 클레망소가 될 예정이었으나 건조가 중단되었다. 이후 클레망소라는 이름은 클레망소급 항공모함으로 이어진다.

[1] Mary Elizabeth Plummer, 1849년 3월 18일 ~ 1922년 9월 13일 [이혼] [3] Michel Clemenceau, 1873년 11월 24일 ~ 1964년 3월 4일 [4] 드레퓌스 사건이 몰고 온 사회적 파장의 시발점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양심가 마리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사건 당시 군에 의해 튀니지로 좌천되었는데, 이후 클레망소 집권 당시 명예 회복 절차를 거친 후 국방장관까지 역임한다. [5] 이때 온건적인 입장을 고수한게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었다. [6] 이는 훗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도 썼던 방법인데, 그 원조는 클레망소인 것. [7] 샤를 드골도 1958년 정계에 복귀하면서 "정치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다"고 클레망소의 원래 발언을 절묘하게 뒤집어놓은 발언으로 자신의 정계복귀를 합리화하기도 했다. [8] 칼 포퍼의 말로 알려진 경위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