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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Frenchman | ||||||||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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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콜뤼슈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장 가방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엠마뉘엘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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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물랭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볼테르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크리스찬 카브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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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페리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미셸 사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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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하룬 타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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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크 타바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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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다비드 두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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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골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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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달리다 |
레옹 지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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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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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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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시스 카브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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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르노 |
베르나르 쿠슈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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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미셸 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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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드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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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무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레이먼드 풀리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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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질베르 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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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보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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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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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뤽 베송 |
티노 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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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세르지 레기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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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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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兄 | |
오귀스트 마리 루이 니콜라 뤼미에르 Auguste Marie Louis Nicholas Lumiè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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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2년 10월 19일 |
사망 | 1954년 4월 10일 |
弟 | |
루이 장 뤼미에르 Louis Jean Lumiè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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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4년 10월 5일 |
사망 | 1948년 6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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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발명가이자 영화감독.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다. 기계 제작자인 동시에 제작・흥행・배급 등 현재의 영화제작 보급형태의 선구적 역할을 한 영화의 시조이다.2. 시네마토그래프 제작과 최초의 영화 제작
브장송 태생이지만, 어렸을적인 1870년 리옹으로 이사해 기술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아버지가 사진 회사를 운영해서 그런지, 사진에 익숙했다고 하며 오귀스트는 경영자로, 루이는 기술자로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은퇴한 후, 사진을 가지고 발명품을 시도하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영화 필름이었다. 1895년 2월 13일에 시네마토그래프 특허를 얻고, 1달 뒤 영상을 찍기 시작해 공개했다.이전에도 영상이라는 개념은 발명가 사이에서 알음알음 존속해왔고 이들이 만든 필름도 발견되었지만, 그 결과물을 대중에게 공개한 건 이들이 최초다.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나 열차의 도착 같은 영화들은 공개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켜 영화의 도래를 알리게 했다. 극영화라는 개념이 도입되기 전에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다큐멘터리의 선조로도 불린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단순히 유행에 그칠 것이라고 잘못 판단해 영화에 대한 특허를 취득하지 않았다. 결국 영화 산업에는 제대로 끼어들지 못하고 파테에게 찍었던 영화 필름을 매각했다. 이후 컬러 및 입체 사진 연구로 넘어갔다. 그래도, 영화가 발전하는 것 자체에 대하여 감탄해서인지 1930년 유성 영화를 보고나서,
"영화가 나온지 100년이 지났을때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술이 나와 지금 영화랑 전혀 다른게 나와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출처는 90년대 영화 월간지 로드쇼에 나온 뤼미에르 형제 특집기사.19세기 중반에 태어난 형제지만 굉장히 장수하여 형은 91세, 동생은 83세를 살았다. 하지만 둘의 장수는 크누트 함순처럼 형제의 명예에 치명타를 남게 하였다. 형제 모두 파시스트와 비시 프랑스를 지지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루이스는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파시스트 국가가 미국 영화에 대항하길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귀스트 역시 동생에 동조했으며 비시 프랑스 하에서 공직에 선출되기도 했다. 출처 이로 인해 프랑스 200 프랑 지폐 초상화로 선정될 뻔한 당시 크게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결국 초판을 모조리 갈아야만 했었고 그 자리엔 100 프랑에 들어갈 예정이였던 귀스타브 에펠로 대체되었고, 100 프랑 자리엔 폴 세잔이 얼떨결에 차지했다.
다만 후에 그나마 영화제작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서인지 형 루이 뤼미에르는 위대한 프랑스인 순위 100명에 선정되기는 했다.
3. 최초의 영화제작자들이 아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1888년 프랑스인 루이 르 프랭스(Louis Le Prince, 1841.8.28~1890.9.16 ?)가 촬영한 12프레임짜리 단편영화 《라운데이 정원》(Roundhay Garden Scene)이 최초의 영화라는 주장이 나왔다.[1] 유감스럽게도 루이 드 프랭스가 1890년 원인 모를 행방불명을 당해서 이 영화가 묻혀졌던 것이다. 프랭스는 1890년 디종 역에서 열차를 탄 것을 형이 본 게 마지막 목격이었고 이후 영원히 사라졌다. 1897년 프랑스 경찰은 사망처리했지만 지금까지도 그 어떤 행방은 드러나지 않았다. 암살, 가족들의 자작을 통한 잠적 또는 살해, 익사를 통한 자살설이 제기되지만 모두 확실치 않다. 기묘하게도 라운데이 정원에 출연한 사람들 중 루이의 친구와 아들은 전부 30대를 넘기지 못한 채 요절했고, 루이의 장모 사라는 영상을 찍은지 딱 10일만에 세상을 떠났다.다만, 라운데이 정원은 내용이 있는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랑 달리 2초짜리 클립인데다 개인 소장품이기 때문에 뤼미에르 형제가 만들어 발표한 영화의 형태하고는 거리가 있다. 이 때문에 만약 프랭스의 영화가 최초의 영화라 인정받더라도 뤼미에르 형제는 최초의 상업영화 제작자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수 있다.
최초의 영화 타이틀의 경우 영화의 정의에 따라 차이가 존재할 수 있는데, 단순 영상이 아닌 대중 상영을 전제로 하는 것이 영화라고 취급할 경우 여전히 최초의 영화 타이틀은 유지하게 된다.
4. 여담
- 만든 영화들이 초분 단위 클립 수준이기 때문에, 유튜브에서 짜잘히 올라와있다. 공식적으로는 이 필름들을 엮은 뒤 생애와 활동에 대한 나레이션을 덧붙인 2016년 뤼미에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 성의 '뤼미에르 Lumière'는 프랑스어로 빛을 의미한다. 영화가 빛하고 연계가 있다는걸 생각해보면 우연의 일치지만 의미심장한 부분.
- 원신의 2023 이벤트중 하나인 장미와 화승총에 프레임속 이미지를 담당하는 인물인 꼬마 뤼미에르의 모티브는 루이 장 뤼미에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