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08:44:43

대홍수(역사)

제2차 북방 전쟁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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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년 최대 위기. 서부의 옅은 녹색이 스웨덴 점령지역이고 중부와 동부의 짙은 녹색은 루스 차르국 점령지역. 남서부의 노란색만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잔존 영토다.
1. 개요2. 배경3. 전개
3.1. 혼란의 시작 - 흐멜니츠키의 봉기3.2. 재앙으로 - 루스 차르국의 참전3.3. 설상가상 - 스웨덴의 침공3.4. 연방의 반격
4.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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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어: Pоtор szwedzki/Potop
리투아니아어: Švedų tvanas/Tvanas
스웨덴어: Karl X Gustavs polska krig[1]


17세기 중후반에 걸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일어난 국가적 대혼란. 대홍수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는 하나 이는 비유적 표현일 뿐 실제로 자연 재해인 홍수가 발생한 것은 아니다.

좁게는 1655~1660년에 있었던 스웨덴과의 북방전쟁만을 가리키지만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는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일으킨 코사크[2] 대봉기에서부터 1667년에 끝난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까지의 기간을 모두 포함한다. 대홍수 이전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오스만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 루스 차르국 사이에서 동유럽의 대부분을 석권한 강대국이었지만 대홍수의 결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인구의 1/3을 잃고 영토를 상실했으며 동유럽의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즉, 대홍수는 소빙하기와 함께 폴란드를 몰락시킨 대사건이자 동유럽, 아니 유럽 전역의 판도를 바꾼 대사건이었다.

'포토프 슈베즈키'와 '스베두 트바나스'는 대홍수 당시의 스웨덴의 침공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코사크 대봉기에서부터 루스 차르국과의 종전까지 이어지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대홍수는 단순히 포토프란 단어를 사용한다. 리투아니아어로는 '트바나스'이지만 잘 쓰지 않는다. 폴란드에서도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다가 19세기 폴란드의 민족 문학가이자 《 쿠오 바디스》의 저자인 헨리크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가 이 시기를 다룬 소설 《대홍수》(Potop)[3]를 저술하면서 역사용어로 편입되었다.

검술 인디게임 Hellish Quart가 대홍수 시기의 동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2. 배경

발단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4]과 자포리자 코사크 간의 갈등에서 터졌다. 본래 코사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루스 차르국의 농노제를 피해 오늘날 우크라이나 중부와 남부로 자유와 땅을 찾아 도망친 사람들, 또는 비옥한 황무지와 자원을 찾아나선 모험가들로 구성된 반독립적 집단이었다. 반농반목, 수렵민 겸 약탈자로[5] 생활을 영위하던 코사크들은 크게 자포리자 코사크(오늘날 우크라이나 중동부)와 코사크(오늘날 우크라이나 동부 및 러시아 서남부)로 나뉘는데, 이 중 자포리자 코사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군과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과 크림 타타르의 침입에 맞서 싸웠고[6], 경제적 지원까지 해주고 있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며 등록 코사크군으로서 복무해왔다.

허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동남부 변경에 반독립적 집단이 세력을 구축하는 것을 두눈뜨고 볼 생각이 없었고, 여기에 영지를 확대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출하던 귀족들이 기존의 농노들뿐만 아니라 자포리자 코사크에도 농노제와 가톨릭 신앙을 강요하려 하자 결국 오랫동안 묵은 응어리가 코사크 귀족 보흐단 흐멜니츠키[7]의 야심과 결합하고 여기에 귀족들의 가혹한 착취에 눈이 돌아간 농노들도 봉기에 대거 참여하여 이전까지의 봉기와는 차원이 다른 대규모의 봉기로 발전했다. 심지어 폴란드 기병에 맞서 코사크의 약점인 허약한 기병을 보완하기 위해 흐멜니츠키는 코사크와 원수지간이던 크림 칸국의 타타르 기병[8]까지 봉기에 끌어들였다.

3. 전개

3.1. 혼란의 시작 - 흐멜니츠키의 봉기

1648년 1월 25일 흐멜니츠키는 '시치'(Січ)[9]가 열리는 장소인 호르티치아 섬을 경비하던 폴란드 군인들을 죽인 이후 시치를 열어 폴란드에 맞서 봉기를 일으킬 것을 결정했다. 그달 말 '라다'(Козацька рада)[10]에서 헤트만에 선출된 흐멜니츠키는 곧바로 코사크 헤트만국의 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선언했다. 동년 4월 코사크의 봉기 소식이 바르샤바에 전해지자 연방 정부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조우티보디[11] 전투에서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코사크에게 전멸당했고[12] 코르순[13] 전투에서 다시 격파당하면서 어느 편에 설까 망설이던 코사크들이 대거 흐멜니츠키 편에 가담했다. 때맞춰 농노들이 귀족에 대항해 민란을 일으키고,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성직자, 귀족, 농민 가리지 않고 폴란드인들은 죄다 학살당하는 상황이 펼쳐지면서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가게 되었다.

당시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는 코사크와 연합해 남쪽 크림 칸국의 타타르들과 그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십자군을 일으킬 계획이었지만 "국왕이 쓸데없이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의회(Sejm)의 반대와 어린 아들 지그문트 카지미에시를 잃은 슬픔에 그 계획을 잠시 미루다가 코사크 대봉기에 충격을 받아 죽고 말았다. 이후 사태는 성직자로 있다가 새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환속한 그의 동생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가 해결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한편 흐멜니츠키의 봉기군은 민란을 일으킨 농민들과 합세해 필랴우치 전투에서 다시 폴란드군을 격파하고 서쪽으로 진격했다. 서부 우크라이나의 대도시 르부프를 공략하려던 흐멜니츠키는 몸값을 받는 조건으로 도시 공략을 포기한 후 다른 도시인 자모시치를 공략하던 도중에 브와디스와프 4세의 사망과 얀 2세 카지미에시의 선출 소식을 전해들었으며 동시에 얀 2세로부터 코사크 및 정교회 신자들에게 특권을 부여할 터이니 봉기를 중지하라는 편지를 전해받았다. 흐멜니츠키가 이를 받아들여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봉기는 일단락되었다. 1648년 성탄절 당일, 키유프에서 흐멜니츠키는 성대한 개선식을 열었고 정교도 농민과 코사크들은 '해방자'의 등장에 열렬히 환호했다.

그렇게 해서 1649년 1월 키유프 근교 페레야슬라우(Перея́слав)[14]에서 코사크 및 정교회 신자들의 지위에 관한 폴란드와 카자크의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2월 흐멜니츠키는 자신을 " 루스인들의 유일한 독재관"임과 동시에 " 르비우, 헤움,[15] 할리치[16]까지 닿는 우크라이나와 포딜리야,[17] 볼히니아[18] 전역의 권력자"임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흐멜니츠키가 단순한 코사크의 지도자가 아니라 독립된 국가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페레야슬라우 회담은 결렬되었다.

그리하여 코사크와 연방 사이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1649년 여름 즈바라즈와 즈보리우에서 전투를 벌였고 두 전투는 모두 무승부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코자키-타타르 연합군은 8월 17일 즈보리우 조약을 체결하여 코자키 헤트만국은 키유프, 브라츠와프[19], 체르니후프 3개 주에서의 완전한 자치와 4만명의 군대를 보유함과 동시에 헤트만국의 신료들은 전원 코사크로로 임명하며 정교회 신자들의 특권 등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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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보리우 조약에서 인정된 코사크 헤트만국(올리브색)
그러나 세임까지 승인한 즈보리우 조약이었으나 우크라이나의 가톨릭 신자들은 이 조약을 인정하길 거부했으며, 가톨릭 신자와 코사크 및 정교회 신자 간의 갈등이 커지자 폴란드는 코사크 헤트만국을 다시 공격했다. 종전과 달리 이번에는 연방이 유리한 상황에 놓였는데 1651년 6월 베레스테치코 전투[20]에서 폴란드군이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고, 9월 빌라체르크바 전투에서 폴란드군이 다시 승리를 거두자 코사크 헤트만국은 휴전을 요청하여 9월 28일 빌라체르크바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결과, 코사크 헤트만국의 지배는 키유프주 1개 만으로 축소되었고, 군대의 숫자도 2만명으로 감축해야 했으며, 조약을 비준할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왕이 자비를 베푼 것에 감사를 표해야 하는 등 폴란드-리투아니아 및 국왕에게 완전한 충성을 맹세해야만 했다.

하지만 코사크 세력을 대거 꺾어놓는 내용의 이 조약은 의회에서 비준되지 못했다. 코사크에게 허용한 군대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이유에서 세임은 리베룸 베토를 선언했는데 흐멜니츠키 또한 굴욕적인 내용의 조약에 불만을 강하게 품고 있었다. 휴전 기간이 끝나자마자 코사크는 반격을 개시하여 1652년 바티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베레스테치코의 패배를 되갚아주었다.[21] 하지만 여전히 폴란드-리투아니아 세력은 강성했고, 그에 반해 코사크 세력은 너무나 미약했다. 베레스테치코에서의 대패를 기점으로 코사크의 독립 국가라는 꿈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흐멜니츠키는 최후의 수로 같은 슬라브계이자 정교회의 거두, 그리고 무엇보다 폴란드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인 루스 차르국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루스 차르국의 차르 알렉세이 1세는 이를 승낙했다. 그리고 이 결정을 기점으로 폴란드 입장에서 내부 분란 진압 정도로 시작했던 흐멜니츠키의 봉기는 대규모 국제 전쟁으로 변모, 폴란드 전역을 생지옥으로 바꿔놓는 대재앙으로 번졌다.

3.2. 재앙으로 - 루스 차르국의 참전

류리크 왕조 루스 차르국(러시아)과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그야말로 철천지 원수 관계였다. 양국은 리보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대의 지배권을 두고 자주 전쟁을 벌였는데 특히 류리크 왕조의 대가 끊기고, 루스 차르국에 혼란 시대가 찾아오자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루스 차르국을 공격[22]하여 수도 모스크바가 함락당하고 영토를 뭉텅이로 뜯기며, 차르 바실리 4세(Василий IV Иванович Шуйский , 1552 ~ 1612)가 바르샤바로 끌려가 국왕 앞에 무릎을 꿇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자[23]를 잠시나마 차르로 선출하는 등 굴욕을 찍기도 했다. 러시아인 귀족들과 백성들이 합심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을 몰아내고 미하일 로마노프를 차르로 선출하여 로마노프 왕조를 세우면서 혼란 시대를 끝냈으나 스몰렌스크 체르니후프 등 기존의 영토를 대거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넘겨주었고, 이에 루스 차르국은 폴란드에게 복수할 날만을 기다리며 칼을 갈고 있었다.[24] 그런 가운데 흐멜니츠키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고 지원을 요청해온 것은 루스 차르국에게 있어서 명분도 챙기고 복수도 실행할 최적의 기회였다.

흐멜니츠키는 루스 차르국의 지원을 얻는 조건으로 차르에게 신종할 것을 맹세하였고, 이에 차르 알렉세이 1세는 흐멜니츠키의 요청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1651년 3월 루스 차르국의 의회인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는 코사크를 모스크바 세력권으로 편입시킬 것을 결의했으나, 이 시기 루스 차르국은 아직 훗날의 러시아 제국처럼 강대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적대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망설였다. 알렉세이 1세는 1653년 11월 젬스키가 코사크 헤트만국을 루스 차르국의 보호국으로 삼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결의할 때까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보류했다. 마침내 다음해인 1654년 1월 페레야슬라우에서 코사크 헤트만국이 루스 차르국의 속국으로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는데 페레야슬라우 조약의 결과 코사크는 광범위한 자치권과 더 많은 군대의 보유, 키유프 대주교구의 권리 존속 등을 받아냈으며, 그 조건으로 루스 차르국에 대한 신종 및 외교권의 박탈을 대가로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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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화살표가 루스 차르국군, 분홍 화살표가 폴란드-리투아니아군

그리하여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사이의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654년 7월 4만1천명의 루스 차르국군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침공해 벨리[25]와 도로고부시[26]를 점령했으며, 곧바로 대 러시아 전진기지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인 스몰렌스크 공략에 나섰다. 또한 스몰렌스크 공략을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 오르샤를 점령하고 8월 슈클로우 전투를 치렀으며[27] 셰펠레비체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격파당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코사크와 이를 지원하는 루스 차르국의 병력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후 전쟁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불리해져 갔다. 루스 차르국군의 압도적인 물량공세에 버티던 스몰렌스크마저 9월 23일 함락당했다. 한편 우크라이나 방면에서는 루스 차르국-코사크 연합군이 진격에 나섰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루스 차르국군이 므스치슬라우와 로슬라블[28]을, 코사크가 호멜을 함락시키면서 드니프로 강과 드루지나 강 사이의 전 지역이 루스 차르국-코사크 연합군 손에 들어갔으며 리보니아-벨라루스 방면에서는 프스코프에서 출발한 루스 차르국군이 네벨(7월 1일)과 폴라츠크(7월 17일), 비쳅스크(11월 1일) 등 벨라루스의 도시들과 루자, 레제크네 등 폴란드령 리보니아의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흐멜니츠키가 지휘하는 코사크는 볼히니아 지방으로 밀고 들어가 그해 말까지 오스트로흐와 리우네 등을 함락시켰다. 루스 차르국-코사크 연합군은 빠른 속도로 동부 전역을 휩쓸었다.

국토의 동부 전역이 전화에 휩쓸리자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반격에 나섰다. 1654년 겨울~1655년 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마그나트[29]이자 육군 헤트만인 야누시 라지비우 크림 칸국과 동맹을 맺어, 벨라루스 지방에서 반격을 개시해 오르샤를 탈환하고, 마힐료우를 포위했으며 폴란드군이 오흐마티우 전투와 자시키우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코사크 연합군을 연달아 격파한 것을 기점으로 전쟁은 이제 밀고 밀리는 양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전황이 나쁘게 돌아가자 알렉세이 1세는 군 지휘관들에게 위협적인 칙령을 내리면서 사기 고무를 시키고, 대규모 공세를 펼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리투아니아군이 루스 차르국-코사크 연합군의 공세에 소극적으로 저항하자 6월 루스 차르국군은 슬로님[30]과 클레츠크[31], 벨리시[32]를 함락시켰고, 1655년 7월 3일 민스크 체르카시가 코사크의 수중에, 7월 31일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던 빌뉴스가 루스 차르국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33] 대규모적인 여름 공세의 성공에 힘입어 루스국군은 8월 카우나스 가르디나스까지 점령했으며 코사크는 여세를 몰아 갈리치아를 공략, 9월 브레스트 전투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한 후 르부프를 공격한 뒤 루블린에 입성했다.

결국 폴란드는 기존의 반란 진압은 커녕 영토를 더 뜯기지나 않으면 다행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이쯤 되면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당장 항복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위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북쪽에 폴란드의 영토를 탐내던 또 하나의 강대국, 스웨덴이 있기 때문이었다.

3.3. 설상가상 - 스웨덴의 침공

스웨덴은 바사 왕조 이래로 확장주의와 숱한 전쟁을 통해 국력을 크게 늘리며 당시 발트해의 지배권을 손에 넣는 숙원을 이루기 직전까지 도달하는가 하면 30년 전쟁에서 단련된 군대를 보유하고 당당히 승전국이 되는 등 당시의 스웨덴을 스웨덴 제국으로 칭할 정도로 황금기를 달리고 있었지만, 정작 계속해서 전쟁을 하느라 지치고 외교적으로도 온갖 고초를 겪는데다 30년 전쟁에 상당한 여력을 쏟아부은 나머지 늘어나버린 군대를 유지할 자금이 부족하다는 문제도 겪고 있었다. 전쟁 당시에는 동맹국이었던 프랑스 왕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종전 이후에는 프랑스의 지원이 끊어졌고, 새로 확보한 영토에서 벌어들이는 세수에도 한계가 있었다.[34] 재정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는 전쟁으로 한탕 제대로 뽑아 군사도 굴리면서 재정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바티흐 전투에서 정예군이 쌈싸먹히고 한창 루스 차르국-코사크 연합군과의 전쟁으로 정신없는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스웨덴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한편, 폴란드-리투아니아 바사 왕조는 지그문트 3세 바사의 폐위 이후부터 쭉 스웨덴의 왕위를 주장하고 있었다. 얀 2세의 바사 가문은 본래 스웨덴의 귀족 가문으로, 덴마크가 주도하는 칼마르 연합에서 벗어나는 스웨덴 독립 전쟁에서 구스타브 바사가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스웨덴의 왕위를 차지한 가문이었다. 이 바사 가문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차지하게 된 계기는 지그문트 3세 바사였다. 지그문트 3세의 아버지는 구스타브 바사의 둘째 아들 요한 3세로 스웨덴에서 나고 자란 스웨덴 토박이였으나 어머니 카타지나 야기엘론카 지그문트 1세의 딸이었기 때문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그리하여 1587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된 지그문트 3세는 요한 3세가 1592년 사망하자 스웨덴 왕위까지 물려받으면서 스웨덴과 폴란드의 동군연합을 이끌었다. 하지만 지그문트 3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루터교가 다수를 차지하던 스웨덴을 다시 가톨릭 국가로 돌려놓으려하자 가톨릭화 정책에 반발한 숙부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반란을 일으켜 1599년, 지그문트 3세를 폐위시키고 본인이 스웨덴 국왕 칼 9세로 즉위했다. 폐위당한 지그문트 3세는 당연히 스웨덴 왕위를 주장하며 스웨덴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으나 칼 9세가 사망한 후 즉위한 칼 9세의 아들이자 지그문트 3세의 사촌은 바로 당대의 사자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였다. 결국 지그문트 3세는 1629년 알트마르크 조약으로, 스웨덴 왕위를 되찾기는 커녕 리보니아 전쟁을 통해 얻은 리보니아 지역만 잃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뤼첸 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딸 크리스티나 여왕을 거쳐 1654년 구스타브 2세의 외조카 칼 10세 구스타브가 스웨덴 왕위에 오르면서 바사 왕조가 끝나고, 스웨덴에는 팔츠츠바이브뤼켄 왕조가 들어섰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바사 왕조는 지그문트 3세가 사망하고 그 자식들인 브와디스와프 4세, 얀 2세 카지미에시 대에도 계속해서 스웨덴 왕위를 주장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바사 왕가의 이러한 주장이 불편했던 칼 10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제압함으로써 왕위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하려 했다.

그동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스웨덴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선전포고를 하며 제2차 북방 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결속력은 형편없었다. 국왕 얀 2세는 폴란드 슐라흐타들에게 인기가 없었을뿐더러 그들의 문화였던 사르만티즘을 경시했다. 더구나 그는 전직 예수회 수도자 추기경이기까지 했다. 종교를 핑계로 폴란드 귀족들의 권한을 제한하고, 개입하려 했던 말썽 많은 얀 2세에 대한 반발은 수많은 귀족들을 스웨덴 국왕 칼 10세에게 가담하게 만드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35] 특히 스웨덴 편에 가담한 라지비우(라드빌라) 가문 등 일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귀족들은 칼 10세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즉위할 것을 권유하였다. 어째든 스웨덴군은 약체화된 폴란드-리투아니아군[36]을 격퇴하고 결국 무저항 상태의 수도 바르샤바를 함락시켰으며, 국왕 얀 2세는 슐레지엔으로 몽진했다. 그러자 알렉세이 1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완전히 망해버리면 스웨덴을 견제할 세력이 남지 않게 된다고 판단하여 1656년 11월 3일 빌뉴스 근교 니에베자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휴전 조약을 맺고, 곧바로 스웨덴령 리보니아를 공격했다.[37]

한편 루스 차르국과 대치하고 있었던 리투아니아군 헤트만 야누시 라지비우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다른 마그나트들과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해체하기 위해 스웨덴과 결탁했다. 연방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분리해 스웨덴-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을 이루며 리투아니아는 다시 2개의 공국으로 나누어 하나는 자신이, 또 하나는 사촌인 보구스와프 라지비우가 가지고, 스웨덴을 종주국으로 인정하는 케다이니아이 협정을 맺었다.

이러한 발트해 연안의 복잡한 정세는 멀리 우크라이나의 정세에 악영향을 미쳤다.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적으로 보는 흐멜니츠키는 스웨덴을 동맹자로 보고 있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휴전을 루스 차르국의 배신이라고 생각해 1657년 8월 급사할 때까지 차르와 손을 끊기 위한 계획을 준비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1656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까지 연방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실질적으론 완전 독립 상태였으나 형식상으로는 여전히 연방의 속국인 프로이센 공국 공작이기도 했기에 이 사실은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에 그는 프로이센의 완전 독립을 위해 선전포고를 하고 곧바로 폴란드의 서부로 군대를 파견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동쪽의 러시아와 리투아니아, 동남쪽의 우크라이나, 북쪽의 스웨덴, 그리고 서쪽의 브란덴부르크까지 문자 그대로 사면초가에 놓이게 되었다. 칼 10세는 라드노트 조약으로 폴란드 왕국 왕령 프로이센 쿠를란트는 스웨덴령으로, 대폴란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으로, 소폴란드 에르데이 공국으로, 우크라이나 일대는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카자트 헤르만국으로 분할하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라지비우 가문 산하로 두며 벨라루스 일대는 루스 차르국으로 넘기는 폴란드 분할안까지 계획했다.

이 당시 폴란드는 덴마크, 합스부르크 제국, 네덜란드 등의 지지를 받기는 했지만 늘 그렇듯 말로만 지원하는 유럽 국가들의 성명이었을 뿐 실질적인 도움은 거의 받지 못했고, 초기 크림 칸국의 타타르 병력들을 통해 끼어들어 온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 에르데이 공국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의 선전포고까지 잇따랐다.

3.4. 연방의 반격

그러나 동유럽 최대의 강국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이 최악의 상황에도 무릎끓지 않은 채 저력을 보여줬다. 조국이 외세에 짓밟히는 것을 본 국민들이 레지스탕스를 조직해 점령군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고, 1655년 12월 망명 중이었던 얀 2세를 지지하는 티쇼프체 연맹이 결성되었다.

거기에 쳉스토호바의 야스나 구라 수도원에서 소수의 폴란드군이 거의 10배에 달하는 스웨덴군의 공성을 격퇴함으로써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레지스탕스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역에 산재하던 점령군들을 격퇴하기 시작했고, 봉기한 군세가 폴란드 육군 헤트만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리투아니아 대헤트만 얀 파베우 사피에하의 지휘 아래 통합되었을 때, 그들은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충성을 맹세한 세력을 배제한 뒤 공격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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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교외의 바르카 전투에서 스테판 차르니에츠키는 스웨덴군에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장기간의 공성전 끝에 바르샤바를 탈환했다. 이에 경악한 칼 10세는 대규모의 군세를 이끌고 숫적으로 우세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을 패배시켜서 바르샤바를 재점령했으나 마찬가지로 큰 피해를 입었던 탓에 다시 떠나버리고 말았다. 10월 8일에는 프로스트키 전투에서 스웨덴군이 폴란드군에 의해 전멸했다. 당시 스웨덴은 루스 차르국 및 덴마크와의 전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쪽으로 군대를 더 보낼 수 없었고, 이후 1657년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완전히 스웨덴군을 몰아냈다. 이 해에 야누시 라지비우가 사망했고 그와 함께 연방을 해체하려 했던 보구스와프 라지비우는 12년 후 1669년 망명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죽었다.

이후 같은해(1657) 에르데이 공국과 브란덴부르크와의 전쟁에서 이겼지만 리투아니아 방면 루스군이 건재한 상황에 서쪽에 더 시간과 병력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결국 폴란드는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공국을 독립시키는 벨라우-브롬베르크 조약을 맺어 브란덴부르크와의 전쟁을 끝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이 전쟁을 통해 알브레히트 공작의 신종 이후 폴란드의 봉신국으로 남았던 프로이센 공국의 완전한 주권을 확보하였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의 아들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이 프로이센의 이름을 빌려[38] 프로이센 왕국으로 개칭하여 프리드리히 1세로 대관식을 치렀다. 이 프로이센 왕국이 약 100여 년 뒤에는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멸망시켰으니 폴란드-리투아니아 입장에서는 땅을 칠 노릇이지만 어쩌겠는가.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대러 전선이 더 급한 상황이었으니. 게다가 애초에 이 상황을 초래한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대내외정책이기도 하고.

한편 흐멜니츠키가 사망한 후 후계자로 선출된 이반 비호프스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안에 고립된 스웨덴군을 격파해 국외로 몰아낸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하디아치 조약을 맺어 화해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런 사태를 맞이하자 알렉세이 1세는 스웨덴과의 사이에서, 루스 차르국에 유리한 발리에사리 휴전을 맺고 1658년 10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전쟁을 재개했다. 화평이 보장된 2년 사이에 벨라루스의 귀족과 코사크 지도층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지지로 입장을 바꾸었고, 벨라루스에서 루스군을 맞아 싸우는 연방군을 지원했다. 어쨌든 연방 입장에서는 숨통이 좀 트인 격이었다.

이후 코사크는 단독으로 북부에서 빌뉴스를 봉쇄하려고 했지만 유리 돌고루코프에 의해 봉쇄되었고, 남부에서도 비호프스키가 이끄는 코사크들이 세레메테프에게서 키유프를 탈환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1659년 비호프스키와 동맹인 크림 칸국은 공동으로 트루베츠코이가 이끄는 군대에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주어 괴멸시키고, 코노트프 마을을 포위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원정이 실패로 끝난 것도 모르고 있었던 러시아인의 불안은 8월, 점령지 키유프를 출발한 세레메테프와 그의 휘하 부대에 의해 제거되었다. 비호프스키는 치히린(Chyhyryn) 전투에서 세레메테프에게 패배해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망명했고, 반연방 성향의 코사크는 그를 해임한 후,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아들 유리 흐멜니츠키를 새로운 코사크 헤트만으로 선출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1660년, 얀 2세는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 바사 왕조의 스웨덴 왕위 주장을 완전히 철폐하고, 1629년부터 실질적으로 스웨덴령이 된 리보니아의 스웨덴 영유도 인정하는 등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훨씬 불리한 올리바 평화조약까지 맺으면서 스웨덴과의 전쟁을 끝냈다. 이에 1660년 말까지 루스군을 벨라루스 일대에서 몰아냈으며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이 시기 가장 유능한 폴란드 장군은 오늘날 폴란드 국가에도 등장하는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였다. 그는 폴론카 전투에서 돌고루코프의 부대를 물리치고, 1661년 빌뉴스를 탈환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 내의 기타 여러 도시도 하나하나 폴란드-리투아니아군에 해방되었다. 이러한 반격에 루스군은 스웨덴과의 전쟁을 회피하고 리보니아와 잉에르만란드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는 굴욕적인 카르디스 조약에 서명하며 발트 지방에서 철수하였다.[39]

1663년 말, 얀 2세와 연방군은 드네프르강을 건너 코사크 영역을 포함한 좌안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연방군의 진로에 있던 여러 도시는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 쇠락했기 때문에 아무 저항도 없이 연방군에 굴복했으나, 다음해 1664년 1월 흘루키우 공성전에서 실패해 커다란 희생을 냈고, 노우호로드시베르스키까지 퇴각했다. 이 전쟁의 최후의 큰 전투는 1664년 여름에 벌어져 루스군은 비쳅스크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뒤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1664년부터 1667년 1월까지 질질 끌면서 시간을 보냈다. 허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측에서 다된 밥에 흙이 뿌려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예르지 루보미르스키가 기존의 귀족공화정 개혁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역으로 급박해졌고, 결국 안드루소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루스 차르국에게 스몰렌스크의 요새 및 키유프를 포함한 좌안 우크라이나로 불린 우크라이나 동부를 할양했다. 다만 코사크를 공동으로 통제하는 것과 20년 후 좌안 우크라이나를 반환하는 등 폴란드의 요구 조건도 잊지 않았다.[40]

4.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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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직전에 몰렸던 최대 위기에 비하면 꽤 국토를 회복하긴 했으나 대홍수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상당한 영토를 넘겨줘야 했고 동유럽의 패권을 상실하며 몰락하고 말았다.

일단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국이었던 프로이센 공국이 연방과 벨라우-브롬베르크 조약을 체결하여 독립해 버렸으며, 코사크 영역을 포함한 드네프르강 동부지대를 루스 차르국에 할양했다. 거기에다가 대 러시아 전진 기지 겸 방어 거점이었던 스몰렌스크도 덤으로 할양되었다. 할양된 국토의 크기가 전체 국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진 않았지만 전략적 요충지이자 중요 거점이었기 때문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루스 차르국, 이후 러시아 제국에 대한 우위를 완전히 상실했다. 대홍수 이후로 21세기 현재까지도 폴란드의 국력은 러시아를 넘어선 적이 없다.

또한 '대홍수' 시기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코사크에 학살되었고, 얀 2세의 경우 계속되는 전쟁과 반란에 진절머리가 나 퇴위하여 프랑스로 망명해 그곳에서 생제르맹테프레의 명예 수도원장으로 지내다가 1672년에 죽었다. 대홍수 당시 연방을 배신했던 라지비우 가문은 두 배신자로 인해 주변으로부터 경멸을 받았고, 라지비우 가문 대신 사피에하 가문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군림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스 차르국은 2년 뒤 반환 약속을 한 키유프를 반환하지 않은 채 계속 힘을 비축해 결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갈갈이 찢어 삼켜먹었고, 코사크는 좌우로 나누어 루스 차르국의 지배를 받게된 좌안 우크라이나에서 코사크 헤트만국이라는 자치 국가를 운영했으나 결국 18세기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자포리자 코사크가 해체되면서 자치권을 상실했다.

스웨덴은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 끝에 맺은 카르디스 조약으로 발트해 전체를 석권했으나 결국 대북방전쟁에서 칼 12세가 전사하고, 뉘스타드 조약으로 표트르 1세에 의해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 잉에르만란드 등을 잃는 등 발트해의 강국의 위치를 잃고, 2류 국가로 전락했다.

대홍수 이전까지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신하국에 불과했으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는 선전포고 한 번과 서쪽 전선이라는 위치를 잘 활용해 홀로 이득만 챙기며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연방의 종주권을 청산했다. 이 전쟁의 보이지 않는 승리자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는 프로이센 공국의 융커들을 숙청하여 베를린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구축하였고, 아들인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부친이 닦은 기반을 바탕으로 국력을 꾸준히 성장시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를 돕는 대가로 프로이센 국왕을 칭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프로이센 왕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2세의 통치를 거쳐 점차 강대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해 나갔다. 이후의 역사는 알다시피 독일 민족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분할, 대홍수 당시 그나마 잔존한 영토도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과 함께 집어삼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123년 동안 지도에서 사라졌다.

수복은 어느 정도 했지만 전국토가 피폐해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대홍수 이후 오랜 기간 유럽 무대에서 주류 국가 라인에 들어오지 못했으며 분할과 흡수합병을 반복당하는 2류국가 신세를 면치 못한다. 대홍수로 독립시킨 프로이센 공국을 이용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독일을 통일하여 ' 독일 민족국가'를 출범시켰으니 '대홍수'는 동유럽, 나아가 유럽 전체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 대사건이었다.

[1] 스웨덴에서는 칼 10세 구스타브의 대 폴란드 전쟁으로 칭한다. [2] 러시아어로 카자키(каза́ки), 우크라이나어로 코자키(козаки́), 폴란드어로 코자치(Kozacy) 등으로 표기되지만 본 문서에서는 가장 범용성이 높은 영문 표기를 사용한다. [3] 시엔키에비치의 폴란드 역사소설 3부에서 《대홍수》는 2부에 해당한다. 1부는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봉기를 배경으로 한 《불과 칼로써》, 3부는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배경으로 한 《보워디요프스키 대령》으로, 모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전성기가 끝나고 쇠락해가는 시기가 다루어졌다. 폴란드에서 영화화되기도 했다. 반대로 코자키 측 입장에서 쓰여진 소설이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율 브리너 주연 영화로 유명한 《 타라스 불바》이다. [4] 슐라흐타라고 한다. 다른 나라의 귀족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권한을 쥐었다. 이 시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그냥 귀족들로 구성된 세임(의회)에서 다 해먹고, 국왕은 그냥 상징/국회 의장 정도로 보는게 더 편하다. 국왕도 연방 국왕선거에서 뽑혔고, 당시 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권력은 귀족의회에 있었다. [5] 코사크와 농노는 단일 집단이 아니었다. 물론 정교회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지주들을 공격하고 농민들을 보호했던 이상적인 코사크 지도자도 있었지만 수많은 농노를 부려먹던 봉건귀족(예를 들면 비슈네베츠키 가문이 있는데, 여기는 아예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까지 배출했다.)에서부터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벨라루스인, 러시아인은 물론이고 동포인 우크라이나인들까지 크림 칸국에 노예로 팔아먹는 노예상까지 다양했다. 대부분은 그냥 군벌에 가까운 존재였다. 타타르와 코사크의 상호약탈로 골머리를 앓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오스만 제국과 교섭하여 약탈을 금지시켰는데, 이게 코사크의 자금줄을 말려버려 그들의 봉기를 촉발한 원인으로 제기되기도 한다. [6] 당시 크림 타타르의 침입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루스 차르국의 중대한 골칫거리였다. 주민들을 싸그리 노예로 잡아가 남부 변경은 물론 빌뉴스 근교와 모스크바 같은 중심지까지 털릴 정도였다. 그래서 이 나라들은 자세치나야 방어선같은 거대한 방어시설을 건설하거나 아니면 크림 타타르의 선제공격을 허용하되 귀환 행렬을 공격하여 포획된 사람과 물자를 되찾는 식으로 대응했다. [7] 원래 예수회 신학교까지 다닐 정도의 친폴란드파 헤트만이었으나 마그나트 알렉산데르 코니에츠폴스키(Aleksander Koniecpolski)에게 땅을 빼앗기고, 가족까지 폭행당하는 불상사를 겪은 후 코사크에 대한 귀족들의 폭정을 하소연하기 위해 두 번씩이나 바르샤바를 찾아갔으나 다른 귀족의 반대로 거부당했다. 이에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세력을 모집하던 도중 수상한 낌새를 감지한 당국에게 체포되었고, 바르샤바로 끌려가던 도중 동료들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8] 타타르 기병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흐멜니츠키는 크림 칸국에게 기독교인 노예를 제공할 것을 약조했다. [9]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열린 자포리자 코사크 대표의 자치적인 회의기구. [10] 시치가 여는 회의로 군사적인 성격이 강하다. 여기서 코사크의 지휘관인 헤트만을 선출했다. 라다는 현재 우크라이나 의회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11] 현재는 우크라이나 조우타 강에 있는 대도시이지만 옛날에는 초원이 있었던 곳이다. [12] 이 때 유명한 윙드 후사르 부대도 참전해 패배를 겪는다. [13] 현재의 우크라이나 체르카시주의 도시이다. 1944년 3월에 타라스 셰우첸코를 기념하기 위해 "코르순셰우첸키우스키"으로 변경되었다. [14] 1943년 페레야슬라우흐멜니츠키(Перея́слав-Хмельни́цький)로 이름이 바뀌었다. [15] 폴란드 동부 루블린 주에 위치한 도시. [16]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의 도시. [17] 현재의 우크라이나 중서부와 남서부 흐멜니츠키주 일대로 중심지는 카미야네치포딜스키. [18] 현재의 우크라이나 서부의 동쪽 프리퍄티 강과 서쪽의 남부크 강 사이의 볼린주일대. [19] 우크라이나어로는 브라츨라우(Брацлав). [20] 얀 2세가 친정한 폴란드군 8만명이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코사크-타타르 연합군 20만명을 말 그대로 학살한 전투였다. 코사크-타타르 연합군이 전사자만 3만명을 낸 것과 달리 폴란드군의 사상자는 많이 잡아야 1,000명 미만을 기록했다. [21] 이때 코사크는 '베레스테치코의 복수'라는 이유로 사로잡은 8,000여 명의 폴란드군을 내장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전부 학살하였다. 나중에 연방의 국왕으로 선출되는 얀 3세 소비에스키의 형 마레크도 이때 죽었다. [22]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는 루스 차르국을 스웨덴 왕위 탈환을 위한 교두보로 써먹기 위해 숙부 칼 9세 가짜 드미트리 사태에 개입하자 스웨덴의 개입을 명분으로 루스 차르국을 침공했다. [23] 이 왕자가 바로 위에서 설명한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이다. [24] 그런데 이 지역들은 애초에 루스 차르국이 모스크바 대공국 시절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에게 승전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로부터 얻어낸 곳이다. 이때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루스 차르국은 수세기에 걸쳐 전쟁을 벌이며 종주권이 여럿 변한 곳이 많은데 스몰렌스크와 체르니후프도 이런 지역이다. [25] 현재의 러시아 트베리 주의 도시 [26] 현재의 러시아 스몰렌스크 주의 드니프로 강변에 위치한 도시 [27] 이 전투는 특이하게도 일식 중에 치러진 전투였다. 전투가 벌어진 1654년 8월 12일 유럽 일대에서는 일식 현상이 발생했다. 점쟁이들에 의한 전투 결과는 양측 모두 서로 승리를 주장했다. [28] 현재의 러시아 스몰렌스크주 남부에 위치한 도시 [29]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크고 부유한 대귀족. 참고로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마그나트(Magnate), 부유한 귀족(Szlachta Zamozna), 소작인 귀족(Szlachta Czynszowa), 길거리 귀족인 거지 귀족(Holota)이었다. 폴란드는 귀족층의 인구 비중도 동시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많았고 같은 귀족이라도 대지주이자 세임 내 한 파벌을 이끄는 마그나트급의 대귀족들과 가난한 귀족들의 빈부격차는 엄청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상으로 정치적 권리는 귀족층 내에서 모두 평등했다. 명목상 귀족층 내 평등한 정치적 참여권은 귀족 공화정에 대한 강력한 이념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긍정적 효과도 있었지만 악명 높은 귀족 공화정의 비효율성을 굳혀버리는 큰 장애물이기도 했다. [30] 현재의 벨라루스의 흐로드나주에 있는 도시 [31] 현재의 벨라루스 민스크주 클레츠키 군에 있는 도시 [32] 현재의 러시아 스몰렌스크주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33] 이 때 루스 차르국군은 빌뉴스의 유대인 공동체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34]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로 스웨덴이 획득한 슈트랄준트 일대 서부 포메른 해안가는 원래 오데르강 발트해와 만나는 지점으로, 무역 통제를 통해 막대한 관세를 뜯을수 있는 지방이었지만 30년 전쟁이 남긴 파괴가 생생했던 17세기 중후반에는 애초에 주요 전장이었던 동부 독일 일대가 쑥대밭이 되고, 회복이 늦었기 때문에 막상 땅을 차지했어도 한동안 제대로 뽕을 뽑지 못했다. [35] 여기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의 정치 시스템이 이 시대 이전 유럽을 강타한 종교 문제와 맞물려 막장스런 개판 조직력을 명백하게 보여주는데, 이 모든 개판의 발단이 된 흐멜니츠키의 봉기를 유발한 과정이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를 개척하려는 귀족의 가톨릭 강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법화(confessionalization) 과정을 겪던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왕실의 중앙정부가 이렇게 강압적인 종교 통합을 통해 통치력과 국가 관료 체계를 강화하려는 시도는 온갖 억지를 부리며 반대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가톨릭 교회의 세력을 늘리는 것도 철저하게 중앙정부가 아닌 자기들 지역 귀족들의 재량으로만 이루겠다는 소리였고, 아예 서방의 다른 가톨릭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처럼 종교적 통합 자체를 중앙권력의 강화 수단으로 쓸건지, 아니면 전통적인 정책이었으며 전 세대까지만 하더라도 비교적 잘 작동했던 교파적 외교 자체를 포기하고, 종파를 불문한 귀족적 평등주의를 통해 불만세력을 잠재울 건지 한쪽으로 뚜렷히 노선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내부적 마비는 최악의 시너지 효과를 불러왔다. [36] 사실 코사크 대봉기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피해가 컸고, 루스 차르국은 대군을 동원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을 공격하는 와중에 흐멜니츠키 봉기 전까지만 해도 군대의 한 축을 맡은 코사크가 루스 차르국 편에서 싸우면서 폴란드군의 절대 다수가 러시아 방면에서 싸우고 있었으며, 후방에 남아있는 병력은 얼마 없었다. 그나마 후방에 남아있는 병력 또한 상당수가 지휘관인 귀족들을 따라 스웨덴에 가담하는 바람에 결국 이하 생략. [37] 대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얀 2세 사망시 차르 알렉세이 1세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하겠다고 약조했다. 과거 브와디스와프 4세가 루스 차르 선출까지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아이러니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부분이자 이 전쟁이 얼마나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주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38] 이름과 과거 영미권 연구에 의존한 한국 서양사학계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많은데 독일을 통일하는 이 프로이센 왕국의 중심지는 오늘날의 독일 브란덴부르크였지 머나먼 변방이었던 동프로이센이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애초에 프로이센 왕국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계승한 국가였지 튜튼 기사단의 전통을 이어받은 나라가 아니었다. 간단히 왜 베를린이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수도였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39] 러시아로서는 발트해 서유럽과 교역할 수 있는 유일한 바다였고, 이 때문에 계속 스웨덴과 충돌하게 되어, 결국 표트르 대제 때 발트해를 완전히 장악했다. [40] 하지만 루스 차르국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요구를 들어줄 리는 만무했으며,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재위 기간인 1686년에 체결된 항구적 평화 협정으로 루스 차르국은 좌안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구적인 지배를 확정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