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카첸버그의 주요 수훈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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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rey Katzenberg 제프리 카첸버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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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0년 12월 21일 ([age(1950-12-21)]세) |
뉴욕주 뉴욕시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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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뉴욕 대학교 (석사) 미국영화연구소 콘서바토리 (AFI) (명예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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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영화 제작자로,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전 회장, 디즈니 전 이사회 의장이자 드림웍스의 공동 창업자,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전 CEO이다.당시 디즈니의 CEO였던 마이클 아이스너와 함께 디즈니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1]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2. 경력
2.1. 드림웍스 설립 전
1950년 뉴욕 시에서 태어났다. 1974년 뉴욕 대학교를 중퇴해 파라마운트 픽처스에 입사하여 우편 보조 사원으로 일하여 7년 만에 제작 부사장으로 승진하여 마이클 아이스너 밑에서 일을 한다.이후 1984년 아이스너를 따라 자리를 옮겨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직접 하워드 애쉬먼을 영입하자 애쉬먼과 함께 앨런 멩컨이 합류하였고, 미녀와 야수와 라이온 킹의 각본가 린다 울버튼도 영입하며 유능한 인재를 스카우트하여 침체기를 겪던 회사를 소생시켰다. 불과 5년 만인 1989년 인어공주로 디즈니 르네상스의 문을 열고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으로 흥행과 비평을 모두 사로잡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또한 존 라세터의 잠재력을 일찍이 알아봐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의 협상을 이끌어 디즈니가 픽사의 첫 영화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픽사의 영화들을 배급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하지만 1994년에 디즈니의 COO였던 프랭크 웰스가 헬기 사고로 사망하게 되자 CEO인 마이클 아이스너와 경영권을 놓고 서로 싸우게 되었다. 뉴스위크가 ' 디즈니의 가장 가치있는 인적자원'이라 표현할 정도로 유력한 승진 후보로 여겨졌지만 결국 아이스너가 카첸버그를 직접 해고하면서 디즈니에서 퇴출되었다.[2] # # #
2.2. 드림웍스 설립 후
디즈니에서 퇴출된 이후 스티븐 스필버그, 데이비드 게펜과 함께 드림웍스를 설립하여 카젠버그는 CEO로, 게펜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설립 4년만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드림웍스의 위상을 높였고 이집트 왕자, 개미 등 애니메이션도 흥행에 성공하였고 2001년에는 슈렉이 흥행 대박을 거두고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 하였다.
이후 2004년에는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을 독립시키고 슈렉 2가 북미 4억 달러, 전세계 9억 달러의 흥행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2005년에 1억 달러가 넘는 제작비를 들인 아일랜드가 한국을 제외한 전세계에서 흥행에 크게 실패해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드림웍스는 2006년에 파라마운트 픽처스와 합병되고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배급권도 파라마운트로 넘어 온다. 이후에도 다양한 흥행작이 나왔지만 가디언즈의 흥행이 기대 이하로 주가가 떨어지자 카젠버그는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직원의 15%인 350명을 해고시켰다. 기사 1 기사 2 이후 백지연의 피플 INSIDE에 출연하였다. #
2016년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 컴캐스트에 인수된 후 CEO 자리에서 물러났고 2019년에는 새로 회사를 차려 'Quibi'라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준비해 2020년 4월 6일에 출시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평가를 받으며[3] 6개월 만에 페업했다.
3. 기타
- 영화계와 애니메이션계에서 제작자로서 전세계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일례로 봉준호는 2013년 CJ가 마련한 특별대담에서 봉준호의 창의적인 도전정신을 높이 평가한다는 카첸버그를 가리켜 “엄청난 재능을 가진 이야기꾼”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 #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아버지들의 아버지, 뇌(소설), 웃음에는 이지도르 카첸버그라는 인물이, 카산드라의 거울에는 이지도르의 조카인 '다니엘 카젠버그'와 '카산드라 카젠버그' 남매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의 성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한다. 알려진 이유로는 애니메이션 개미에서 자신의 대표작인 개미의 아이디어를 훔쳐간데에 대한 조크라고 한다.
- 디즈니 르네상스 시기에 대해 다룬 《웨이킹 슬리핑 뷰티》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는데 카첸버그가 타란의 대모험의 개봉 전 인터뷰에서 침체 상태의 디즈니를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비유해 '이제 잠자는 공주를 깨워야할 시간이 되었다'고 발언한 것에서 그 제목이 유래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 영화의 제작자였던 조 헤일은 '이미 공주는 깨어있는 상태인데 뭔 헛소리를 하는 거냐'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 그의 커리어는 주로 애니메이션 영화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디즈니에 영입되기 전까지는 애니메이션에 대해 완전히 문외한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이클 아이스너의 스카웃 제의를 받고 디즈니에 처음 입사한 날, 아이스너가 그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총책임을 맡겼을 때 그 자리에서 완전히 몸이 굳어버렸었다고. 이후 애니메이션 제작에 익숙해지기 위해 월트 디즈니가 생전에 영화 제작자로서 남긴 방대한 자료들을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
- 인터뷰에 따르면 본인이 디즈니에 있던 당시에는 '어른들 마음 속에 있는 아이'를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면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에서는 '아이들 마음 속에 있는 어른'을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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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의 애니메이터이자 수장, 이제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부문 사장이 된
존 라세터와 친분이 있었지만 거듭되는 악연으로 사이가 다소 껄끄러워졌다. 처음 라세터가 픽사에서
토이 스토리를 제작하며 디즈니에서 투자금을 받기 위해 프리젠테이션을 하자, '다 좋은데 좀 성인 취향으로 가자'며 내용 전개에 이런 저런 손을 대었다. 드림웍스 특유의 시니컬한 작품 세계가 드러나는 면모지만
픽사의 스타일과는 완전히 상극인데다 '살아 움직이는 장난감들'이라는 토이 스토리의 소재와도 어울리지 않아 작품 전체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결국 토이 스토리는 프로젝트 방향을 처음부터 다시 짜고 난 후에 대박을 쳤다.
이후에도 라세터와 친분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개미와 벅스 라이프 사건으로 친분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때 이미 카첸버그는 디즈니를 나와 드림웍스에 들어간 상태였는데, 픽사의 벅스 라이프 프로젝트가 진행중이고 그 정보가 조금 공개되자 이후 곧바로 애니메이션 개미을 개봉시켰다. 픽사의 아이디어가 공개되자 후발주자로 제작에 들어가서 작품을 먼저 내버렸다는 시각이 우세한데 확실하진 않다. 라세터가 사석에서 카첸버그와 나누며 노출된 아이디어를 카첸버그가 스틸했다는 의견도 있는데 이것도 확실하진 않다. 어쨌든 흥행 면에서는 벅스 라이프(전 세계 3억 6천만 달러)가 개미 (전 세계 1억 7천만 달러) 보다 더 높게 나오면서 사실상 카젠버그는 라세터에 완패하였고 이 일로 라세터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 2003년 신밧드 : 7대양의 전설이 흥행에 실패하자 카젠버그는 3D 애니메이션만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는데, 인어공주과 알라딘의 감독인 존 머스커는 그를 '2D 애니메이션과 이혼한 사람'이라고 부르며 농담하기도 했다.
- 투자자인 CJ그룹과의 인연 때문인지 한국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한국 인터뷰 프로그램에 나와 인터뷰를 진행한 적도 있으며, 최근에는 '한국 소재의 애니메이션이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 있으며, 곧 제작에 들어간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2010년대 초반까지 미국의 대형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중에선 드림웍스가 한국에서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탓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4년에 디즈니의 겨울왕국이 애니메이션 최초로 천만 관객을 달성한 뒤 드림웍스의 천재강아지 미스터 피바디와 홈이 그닥 시원찮은 반응을 보여주고, 디즈니와 픽사,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이 승승장구했기 때문에 더이상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영화의 흥행이 드림웍스의 전유물은 아니게 되었다.
[1]
마이클 아이스너가 주로 회사의 외연 확장을 이끌어 경영적으로 기여했다면 카첸버그는 당시 주요 영화사들 사이에서 꼴찌를 면치 못 했던 디즈니의 박스오피스 성적을
터치스톤 픽처스와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연타석 흥행에 힘입어 업계 1위로 올려놓는 데 공헌했다. 단, 《웨이킹 슬리핑 뷰티》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디즈니의
애니메이터들과 갈등을 빚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2]
카첸버그의 친구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당시 디즈니와 마이클 아이스너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3]
틱톡과 비교분석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