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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루이스

제리 루이스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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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국제 영화제 명예 황금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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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상 수상의 하나로, 오랜 기간 영화 산업 전체의 발전에 현저한 공적이있는 인물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보통 아카데미상과는 달리,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이사 회원이 후보 선정과 투표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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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루이스
Jerry Lewis
파일:제리 루이스.jpg
본명 조셉 레비치
Joseph Levitch
출생 1926년 3월 16일
미국 뉴저지 주 뉴어크
사망 2017년 8월 20일
미국 네바다 주 라스 베가스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직업 영화배우, 코미디언, 영화감독
활동 1931년 ~ 2017년
신체 179cm
가족 아내:패티 팔머(1944~1980)
샌디 피트닉(1983~2017)(제리 루이스 사망)
슬하 6남 1녀
정당

[1]


1. 개요2. 생애3. 기타4. 작품 목록5.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제리 루이스는 할리우드에서 무언가 다른 영화를 만드는 유일한 감독이며, 특정한 범주, 규범이나 원칙에 빠져들지 않는 유일한 감독이다. 루이스만이 오늘날 용감한 영화를 만든다. 그의 개인적 천재성은 이를 가능하게 했다.[2]
장 뤽 고다르

제리 루이스는 미국의 배우, 영화감독, 코미디언, 각본가, 자선 사업가이다. 딘 마틴과의 콤비로도 유명하다.

그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연예인 중 한 명으로 거론되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코미디언 중 한 명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다방면에서 활약했기에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과 비교되기도 하며,[3] 얼굴을 마음대로 바꾸는 연기와 슬랩스틱에 능한 그는 짐 캐리의 선배격에 해당한다. 무대에서와 영화에서 모두 성공했다는 점에서도 짐 캐리와 같다.

2. 생애

1926년 미국 뉴저지 주 뉴어크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영화 업계에 입성하기 이전에는 보드빌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 함께 활동했던 사람이 가수이자 배우였던 딘 마틴인데, 이 둘은 함께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출연하여 전국적 스타로 떠올랐다. 딘 마틴은 잘생겼지만 느끼한 남자 역할을, 제리 루이스는 주로 귀엽고 정감이 가는 바보 역할을 담당하였다. 두 사람의 콤비는 당시 최고 흥행 배우 반열에 들었을 정도로 큰 인기를 구가했다.

모종의 사유[4]로 딘 마틴과 루이스 사이의 관계가 악화된 뒤, 1956년 루이스와 마틴은 콤비를 해체한 후, 각자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딘 마틴과 제리 루이스는 콤비를 해체한 1956년부터 일절의 교류도 없었다. 두 사람이 갈라지게 된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었겠지만 확실한 건 둘의 다툼이 잦았다는 것. 일설에 의하면 딘 마틴과 제리 루이스가 콤비로 활동을 시작했을 당시만해도 딘 마틴은 그저 다재다능하고 뛰어난 코미디언 제리 루이스를 따라다니는 운이 좋은 '다섯 번째 바퀴'로 여겨졌으나[5] 어느 순간부터 미남인데다가 젠틀한 유머 감각과 좋은 연기력을 가지고 있고 개성 있는 음색까지 갖춘 재능 있는 가수인 딘 마틴의 인기가 제리 루이스보다 높아지자 제리 루이스가 이를 시기하여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제리 루이스가 영화 감독, 프로듀서, 작가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려는 야망[6]을 가지고 영화 제작에 간섭하기 시작하자 한창 인기를 얻고 있던 딘 마틴이 제리 루이스의 행동에 불만을 품어서 본격적으로 사이가 서먹서먹해졌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제리 루이스의 아내 패티는 딘 마틴의 첫번째 부인인 베티와 친했기에 딘 마틴이 베티와 이혼하고 잔느와 재혼하자 두 사람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틀어졌다고 전해진다.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파트너십 말기에 파티에서 딘 마틴이 제리와 결혼하기 전 패티 루이스의 행실을 문제 삼아 패티에게 시비를 걸어서 딘과 제리 두 사람은 주먹다짐까지 했다고 한다.

콤비가 해체된 뒤 제리 루이스는 마틴-루이스 콤비와 함께 <화가와 모델>이나 <할리우드 오어 버스트>와 같은 영화를 찍은 바 있던 영화감독 프랭크 태슐린과 함께 일련의 코미디 영화를 찍게 되고, 이들 대다수가 히트하며 인기 배우 자리를 수성한다.

그러던 1960년, 그는 <벨보이>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고, 이로써 루이스의 두 번째 전성기가 시작된다. 오늘날도 여전히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레이디스 맨>이나 너티 프로페서가 이 시기에 감독되었다.

1972년, 루이스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인 <광대가 운 날>를 감독하기로 했는데,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최초의 헐리우드 영화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영화 촬영 과정 중 루이스는 여러 사건을 겪게 된다. 이 영화는 루이스가 처음으로 만든 정극 영화였는데, 각본가와의 갈등은 물론이고, 시사회장에서 지인들의 반응도 냉담했다. 설상가상으로 촬영 중 자금 조달에까지 어려움을 겪자 결국 프로젝트가 좌초되고 만다. 루이스는 한 인터뷰에서 다시는 이 영화를 보고 싶지 않고 결코 공개되지도 않을 거라고 선언한 바 있다. [7]

이후 제리 루이스의 평판은 극도로 나빠졌고, 그 다음 작품들도 하나둘 실패하게 되자 영화계에서 그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다.

그렇게 슬럼프에 빠진 제리 루이스를 평소 그의 팬이던 마틴 스콜세지가 < 코미디의 왕>에서 제리 랭포드 역으로 캐스팅했고 영화의 성공으로 제리 루이스는 재조명받기 시작한다.

제리 루이스는 <크래킹 업>을 감독한 이후로 영화 감독으로서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으며, 이후로는 배우로 활동하거나 근위축증 환자들을 위한 자선 사업이나 토크쇼 진행 등을 하며 살았다. 그는 2017년 세상을 떠났다.

3. 기타

  • 생전에 미국 평단에서는 '멍청한 영화나 만드는 코미디언' 취급을 받았지만 프랑스에선 작가주의 영화감독으로 대접받았다.[8] 특히나 장 뤽 고다르[9]를 필두로 한 카예 뒤 시네마 필진의 사랑을 받았다. 무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슈발리에와 코망되르를 수여받았을 정도. 이러한 프랑스의 루이스 사랑은 조너선 로젠봄이나 크리스 후지와라 같은 평론가들에 의한 미국 내에서의 루이스 재평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제리 루이스는 주로 미국 사회의 마초성이나 신체적 허약함, 신체의 변형 등을 코미디 소재로 다뤘으며, 이는 대다수의 루이스 영화에서 주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 제리 루이스는 또한 일인 다역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보석 같은 가족>에서는 무려 1인 7역을 소화했을 정도.
1956년에 콤비를 해체한 두 사람은 20년만에 프랭크 시나트라의 도움으로 제리 루이스의 Telethon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당시 1976년도. 쇼의 게스트인 시나트라가 비밀리에 기획한 것이다. 딘 마틴은 당시 탈의실에 숨어있었다. 잠시 후 딘 마틴과 재회한 제리 루이스는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가 시나트라에게 Son of a Bitch라고 조용히 욕을 했다. 장난이였기에 뒷탈은 없었지만. 이 때가 20년만의 공식적인 Reunion이라고 하지만 불화 이후에도 전화 통화를 종종 하거나 에디 피셔 쇼에 함께 출연한 적이 있다고 한다.

4. 작품 목록

감독 작품만 기술한다.

<벨보이> (1960)
<레이디스 맨> / <심부름 소년> (1961)
< 너티 프로페서> (1963)
<팻시> (1964)
<보석 같은 가족> (1965)
<쓰리 온 어 코치> (1966)
<빅 마우스> (1967)
<원 모어 타임> / <위치 웨이 투 더 프론트> (1970)
<광대가 운 날> (1972)[10]
<하들리 워킹> (1980)
<크래킹 업> (1983)

5. 외부 링크

제리 루이스 입문 가이드
제리 루이스의 작품세계


[1] 살아생전 존 F. 케네디 로버트 F. 케네디를 지지했었으나, 후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했다. [2] 출처 [3] 영화 백 투 더 퓨처 1에서도 1955년의 브라운 박사가 마티에게 1985년의 미국 대통령이 로널드 레이건이라는 말을 듣자 그럼 부통령은 제리 루이스냐? 하고 비웃는 묘사가 나온다. [4] 모두 추측일 뿐이지만 # 여기에 가장 그럴싸한 추측들이 있다. [5] 실제로 당시 평론가들은 제리의 공연에 대해 끊임없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딘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6] 제리 루이스는 자신의 코미디 영화들을 통해 찰리 채플린이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지기를 원했다. [7] 그렇지만, 제리 루이스는 죽기 얼마 전 필름을 미국 의회도서관에 기증하였다. 단, 2024년 6월까지 상영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현재는 나쁜 상태의 클립 몇 개 정도만이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정도다. 이 영화를 본 몇 안되는 사람인 프랑스 영화 평론가 장 미셸 프로동에 따르면 걸작이라고 하니 루이스 팬이라면 기다려보자... [8] 미국에서 이는 종종 조크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백 투 더 퓨처 시리즈를 보면 미래에 영화배우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이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럼 부통령은 제리 루이스냐?라고 어처구니 없어하는 장면도 있다. [9] 고다르는 제리 루이스를 몹시 존경했으며, < 만사형통>에서 세트를 통해 <레이디스 맨>에 오마주를 바치기도 했다. [10] 미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