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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oel de Oliveira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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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본명}}} | Manoel Cândido Pinto de Oliveira |
출생 | 1908년 12월 11일 |
포르투갈 왕국 포르투 | |
사망 | 2015년 4월 2일 (향년 106세) |
포르투갈 포르투 | |
{{{#white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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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영화감독, 배우 |
활동 | 1927년 - 2015년 |
가족관계 | 배우자 마리아 카르발하이스(1940 ~ 2015), 슬하 2남2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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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의 영화감독이자 현존했던 장수 영화 감독. 노익장 때문에 영화 외적으로도 유명했다.2. 일생
1908년 포르투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역의 유명한 의사였다. 원래 갈라시아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던 올리베이라는 육상선수로 활동하기도 했고 아마추어 카 레이서로 포뮬러 원의 전신인 그랑프리 레이스에 비 챔피언쉽 그랑프리를 따낸 적도 있다. 1927년 영화계에 입문해서 1942년 <아니키 보보>로 장편영화 연출로 데뷔했다. 하지만 흥행에 실패해 한동안 아내의 포도 농장에서 일하기도 했다.종전 이후 다시 영화계에 복귀하면서 늦은 나이에 1960년대 포르투갈 뉴웨이브 운동에 합류하기도 했지만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정권의 검열을 받는 등[1] 커리어의 시작이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카네이션 혁명 이후인 1970년대 중후반이었였다. [2] '좌절된 사랑 3부작'인 <베닐드 혹은 성모>, <불운의 사랑>, <프란시스카>를 발표하면서 환갑이 넘어서 뒤늦게나마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올리베이라 감독은 1990년대부터 유럽 영화계에 진출해 존 말코비치나 카트린 드뇌브, 미셸 피콜리,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 키아라 마스트로얀니 같은 유명 배우들과 작업하기 시작했다. 또한 증손자 리카르도 트레파라던가 후기 페르소나인 레오네르 실베이라를 기용하기도 했다. 이때 상복도 활짝 터져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0년대까지도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그는 2012년 건강이 악화해 이해에 그의 마지막 장편 <게보와 그림자들>을 감독했다. 2013년에 칸 영화제에 참석해 지팡이를 짚고 다른 사람 부축을 받아야 했지만 인터뷰에 문제없이 응하며 사진도 찍은 바 있었다. 100세를 훌쩍 넘기는 나이에도 <벨렝의 늙은 남자>라는 2014년에 만든 20분 정도의 단편 영화를 계속 만들었으며 마지막 유작으로 <힘의 한 세기>라는 15분 정도 다큐멘터리 단편을 감독 (그가 죽고 2달 뒤에 공개)하고 이후 2015년 4월 2일 만 106세로 타계했다.
1940년에 결혼한 아내하고는 해로해 손자와 증손자들을 많이 남겼다. 증손자 리카르도 트레파는 상술했듯이 배우로 활동 중.
3. 연출 특징
장수로 인해 상당히 특이한 커리어와 연출을 유지했다. 우선 19세기 문화의 잔재가 남아있던 시절에 태어나 성장기에 무성 영화 세례를 받은 세대였고, 중년엔 포르투갈 뉴웨이브에 관여하기도 했다. 유명해진것은 7-80년대부터였는데, 이때 이미 포르투갈 뉴웨이브는 소강 상태에 접어든데다 마노엘 같은 무성 영화 세대는 다 죽거나 은퇴한 상황이어서 서유럽 평론가들과 관객들을 상당히 당혹케 했다. 그도 그럴게 남들 다 은퇴할 나이에 반대로 주목받기 시작했으니... 심지어 과작도 아니라 다작이라 평론가들이 까다로워하는 감독에 속한다.비영화적인 요소를 영화적으로 탐구하는 부류의 감독으로 꼽힌다. 흔히 서간체 영화라 불리는 마노엘의 영화는 문학이나 연극을 끌어들여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대표작인 <프란시스카>는 고색창연한 18세기 멜로드라마를 연극 연출과 서간체 문학의 전통을 빌어 기묘한 분위기로 만들었으며, <아브라함 계곡>은 원작이 보바리 부인이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과감한 재해석을 선보였다. 무성 영화 특유의 인터타이틀, 과감한 생략과 나레이션 같은 면모를 많이 썼으며 캐릭터가 편지를 낭송하거나, 두 명의 캐릭터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형태의 영화들이 많다. 내용 면에서는 루이스 부뉘엘 감독의 영향을 받아 [3] 부르주아의 위선을 풍자하며, 동시에 포르투갈 역사와 삶의 유한성에 대한 성찰을 선보였다. 때문에 늦깎이로 유명해졌지만 진보적인 색채를 유지했고 일반 관객들에게는 난해하다는 평이 많다. 링크
본인이 밝히길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 D.W.그리피스, 찰리 채플린,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드레이어 감독은 마노엘 영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감독으로 꼽힌다.
4. 필모그래피
- 아니키 보보 (Aniki-Bóbó) (1942)
- 봄의 제전 (Acto da Primavera) (1963) [4]
- 과거와 현재 (Passado e o Presente) (1972)
- 베닐드 혹은 성모 (Benilde ou a Virgem Mãe) (1974)
- 좌절된 사랑 (Amor de Perdição) (1978)
- 프란시스카 (Francisca) (1981)
- 나의 경우 (O meu caso) (1987)
- 헛된 영광 (Non, ou a Vã Gloria de Mandar) (1990)
- 아브라함 계곡 (Vale Abraão) (1993)
- 세상의 기원으로의 여행 (Viagem ao Princípio do Mundo) (1997)[5]
- 나는 집으로 간다 (Je rentre à la maison) (2001)
- 토킹 픽처 (Um Filme Falado) (2003)
-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 (O Estranho Caso de Angélica) (2010)
- 게보와 그림자들 (O Gebo e a Sombra) (2013)
5. 기타
장수한데다 전성기가 늦게 찾아오신분이라 재미있는 일화들이 있는 편이다. 예를 들어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Visita ou Memorias e Confissoes)>과 같은 다큐멘터리는 유작으로 기획해 사후에 공개하려고 했다. 문제는 이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건 1982년. 한마디로 본인의 최전성기가 이 다큐멘터리 만든 이후에 펼쳐졌고 그게 근 30년이었다, 본인도 뻘쭘했을듯.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가 공개된 것은 사후인 2015년이 돼서였다.국내 월간 영화지이던 로드쇼(1989~1998년까지 나옴) 1990년 7월호 칸 영화제 특별 기사에서 영화제 출품작인 'Non', ou A Vã Glória de Mandar(기사에선 지휘관의 헛된 승리.국내에선 헛된 영광이란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를 짧게 소개하며 올해 81세로 이번 영화제 최고령인 올리베이라 감독은 과연 언제까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라는 기사를 썼는데 이 잡지 폐간하고도 훨씬 오래 영화를 만들었다.
후배 포르투갈 영화감독들과 연관이 많았다. 포르투갈 뉴웨이브 감독들이라던가 주앙 세자르 몬테이루, 페드로 코스타 같은 후배 감독들의 영화들을 보고 평을 남겼던 걸로 알려져 있다.[6]
[1]
검열로 체포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2]
아이러니하게도 마노엘 가문은 카네이션 혁명의 여파로 재산 대부분을 잃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꾸준히 좌파적/부르주아 비판을 유지했다.
[3]
실제로 부뉘엘의 대표작 <
세브린느>의 후속작을 만들기도 했다.
[4]
데뷔작 아니키 보보를 찍고 무려 21년이 지나서야 두 번째 장편을 만들었다. 이때 나이가 55세.
[5]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의 유작이기도 하다.
[6]
흥미롭게도 올리베이라가 실제로 젊은 포르투갈 감독들에게는 그렇게 많은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올리베이라가 1908년생이다 보니 나이차이가 엄청난데다가 계급적으로도 그랑 부르주아, 소위 굉장한 부잣집 출신이었기 때문.
#. 포르투갈 뉴웨이브 감독 중에서는
안토니오 레이스 (레이스는 봄의 제전에서 조감독으로 참여했고 독립 후 레이스 학파를 결성해 포르투갈 영화 조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페드로 코스타가 레이스 학파에 영향을 받은 감독.),
파울로 로샤랑 교류가 있었으며, 사랑의 섬 같은 로샤 중기작이 올리베이라랑 비슷하다는 평이 많다.